<노순택 _ 전쟁기계>

“기계에 관한 명상, 좋은 기계에 관한 명상, 그것이 살인 기계가 될 수도 있다는 명상, 이 심란한 명상”

 

 

mora

 

전후는 전쟁으로 인해 산산히 조각난 잔해와 흔적들을 다시 모으고 이어붙이고 조합하는 ‘불편한 시간들의 연속이다.

그 시간들을 일상으로 재 배치하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허나 남과북으로 갈려진 현실과 미국적인 것, 서양적인 것은 끊임없이 물들고 있었고, 식민지의 경험으로부터 전전, 전후의 경험까지를 통째로 집어삼킨 국민들은 그 과정에서 불화하게 된다.


그 불화의 이미지의 기저를 전후의 ‘몽타주’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50년대의 대중잡지와 소설들을 통해서 일괄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몽타주’적 시선이다. 그것은 전후의 폐허가 된 삶을 명랑하게 자유롭게 이어붙이고 조합하는 시선과도 동일할 수 있다. 1950년대 대중잡지 <아리랑>에 연재되는 김성환의 코주부의 만화에서 실질적인 포토 몽타주기법이 선보인다(당시 포토 몽타주는 서양에서 모홀로기 나기와 같은 예술가들에 의해서 활용된 기법인데  김성환 화백은 사진과 합성한 만화의 여러 가지 버전을 만들어서 이벤트적으로 기재하였다 ) 사진과 그림의 부분을 합성하여 만든 실질적인 이미지들을 볼 수 있다. 또는 쌍커풀 없이 큰눈과 검은 머리카락이지만 서구화된 여성들의 이미지를 통해서도 혼합된 시선을 느낄수 있다 (기호의 제국-롤랑바르트 일본은 서구화되어 가는 중이다 일본은 그들의 모방이나 치아, 피부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기호를 잃어버리고 있다 말하자면 일본은 텅빈 기호작용으로부터 (대중적인)커뮤니케이션으로 옮겨 가고 있는 것이다.) 이는 대중문화의 이미지뿐 아니라 전후의 소설의 기저에서도 반복해서 등장한다.

 

손창섭의 생활적에서 동주의 언어가 덧싀워진 말이 없음, 즉 조합한 말이 없음의 문맥이 여전히 앓는 몸을 상징하고 외부로 나갈수 없는 상태를 암시하듯이 어쩌면 폐허와 명랑에서 이 명랑이라는 장치는 외부로 나아가는 덧씌워진 말일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관점에서 전후의 몽타주 라는 시선으로 바라볼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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