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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회: 이상과 바울

 

 

 

 

 

 

윤인로

 

 

1

 

기존 세계의 끝이자 다른 세계의 시작인 새벽이 올 때를 기다린다는 것. 앞선 「오감도 7호의 묵시적 최후, 그 끝에 붙인 이상의 표현으로는 천량(天亮)이올때까지”(1: 61). 새벽, 천량. 이른바 어떤 서광. 벅차게 밝아오는 그 빛을 고지하는 것은 무엇인가. 갈리아의 수탉이며, 그 울음소리이다. 이상은 씨네포엠의 형식을 가진 대낮(‘건축무한육면각체연작 중 하나)에서 그 울음소리를 듣고 있다.

 

ELEVATER FOR AMERICA/ / 세 마리의닭은화문석의층계이다. 룸펜과 모포(毛布)/ / 삘딩이토해내는신문배달부의무리. 도시계획의암시/ / 둘째번의정오싸이렌/ / 비누거품에씻기워가지고있는닭. 개아미집에모여서콩크리-트를먹고있다./ () 얼룩고양이와같은꼴을하고서태양군(太陽群)의틈사구니를쏘다니는시인/ 꼭끼오./ 순간(瞬間) 자기(磁器)와같은태양이다시또한개솟아올랐다.(1: 79)

 

파편화된 이미지-컷들의 점프 혹은 변주 속에서 의미의 지향을 읽을 수 있다. 아메리카는 이상이 말하는 동경, 뉴욕, 런던과 같은 근대의 한 정점을 가리킨다. 엘리베이터는 그런 아메리카를 향해 수직으로, 그러므로 직선으로 상승할 수 있게 하는 근대적 기계학, 과학, 수학의 메타포다. 이와 함께 빌딩, 신문, 도시계획, 룸펜 등의 단어들이 단일한 의미망을 이루고 있다. 이상의 대낮은 근대의 대낮을, 근대의 그 벌건 정오를, 근대의 벌거벗은 정점을, 줄여 말해 근대성의 나신(裸身)을 문제시한다. 그런 시선에 「날개」의 결말부에 나오는 정오 싸이렌이 맞닿는다. “이때 뚜하고 정오 싸이렌이울었다. 사람들은 모도 네활개를펴고 닭처럼 푸드덕거리는것같고 온갖 유리와 강철과 대리석과 지폐와 잉크가 부글부글 끓고 수선을 떨고 하는 것 같은 찰나, 그야말로 현란을 극한 정오다.”(2: 290) 유리, 강철, 대리석, 지폐, 잉크는대낮의 신문, 빌딩, 엘리베이터, 미국, 도시계획과 동일한 계열에 속한다. 이 계열 곁에 이상이 말하는 이 있다. 날지 못하고 퍼덕이고만 있다. 백화점 상품진열대에서 이상이 맡았던 비누향 또는 비누거품으로 청결히 세척되고만 있다. 그런데 이상은 그런 닭들이 개미집에 모여서 콘크리트를 먹고 있다고 쓴다. 그 개미집은 「지하생활자의 수기」에 나오는 그 개미집이다. 이른바 수정궁또는 ‘2×2=4’의 합리적 세계, 그것이 개미집이다. 유리와 강철과 콘크리트로 된 수정궁이라는 개미집, 그 근대적 건축, 건축적 근대 속에서 그 건축의 일부인 콘크리트를 파먹고 있는 이상의 닭, 고지하는 닭/시인. 그 시인은 항시 얼룩고양이 같은 아웃사이더로 태양군의 틈새를 쏘다니고 거닌다. 근대적 대도시를 환히 밝힌 태양의 빛들이 더 이상 내려쬐지 않는 시공간들을, 그 빛의 군집 바깥을 찾아 쏘다니는 시인. 그 시인/반신(半神)의 시간 속에서, 그 시간으로 말미암아, 개미집의 붕괴와 최후를 알리는 닭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꼭끼오’, 바로 그 순간. 이상은 그 순간의 고지에 의해 근대의 대낮을 보증하는 태양과는 다른 태양, 깨지기 쉬운 사기그릇 혹은 자기와 같은 태양이 솟아오른다고 적었다. 이상의 수탉은 근대의 대낮을 중지시키는, 자기로 된 태양의 출현을, 새로운 새벽의 도래를 고지한다. “삽짝문을나설라치면언제어느때향선(香線)과같은황혼(黃昏)은벌써왔다는소식이냐, 수탉아, 되도록순사가오기전에고개숙으린채미미한대로울어다오, 태양은이유도없이사보타아지를자행하고있는것은전연사건이외의일이아니면아니된다.”(1: 49) 이상에겐 근대의 정오/정점, 그 대낮의 극한적 현란은 이미 벌써 황혼을 맞아 잦아들거나 누그러들고 있다. 이상이라는 까마귀는 그 황혼 무렵에야 날개를 편다. 그런 황혼 속에서 근대적 현란의 극한을 최종의 징후로, 끝의 기미로, 형질전환의 임계로 인지하는 이상이라는 수탉이 그 순간 고지의 울음을 운다. ‘부활의 때가 갈리아 수탉의 울음소리에 의해 고지될 것이라고 했던 건 미네르바의 부엉이를 다르게 비상시키려 했던 청년 마르크스였다. 이상은 수탉을 불러 말한다. 미미하고 미약한 상황 그대로 울어달라고. 이상은 새로운 태양, 새로운 광속이 출현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세력, 새로운 태양의 사보타지를 획책하고 사주하는 세력, 줄여 말해 을 영원히 유보하는 전()-종말론적 힘의 연락망을 수탉의 사건적 고지를 통해 파열시키려 한다. 이상의 수탉은 조종소리로 운다. 그 울음이 자기로 된 태양을 발생시킨다. 자기 혹은 질그릇은 바울의 어휘이다.

 

어둠 속에서 빛이 비치라고 말씀하신 하느님께서는 친히 우리 마음속을 비추시어 그리스도의 얼굴에 (드러나는)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보화를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것이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고린도후서, 4: 6~7)

 

이상이라는 불세출의 그리스도’, 그의 얼굴은 여기는 폐허다라는 문장(「자화상」)으로 표현된바 있다. 자기로 된 태양은 그런 폐허에서 발생하고 출현하는 절대적 신성을 인지하도록 이끄는 밝은 빛이다. 이상과 바울에겐, 이상이라는 사도에겐 그 빛이 바로 보물이며, 그것은 질그릇속에서만 간직되고 보존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 보화, 보물에 대한 한 가지 주석은 다음과 같다. “[보물이란 사건 그 자체, 즉 너무도 불안정한 어떤 일이 일어났음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보물을 그것과 동질적인 불안정함 속에 겸허하게 지녀야 한다. 세 번째 담론그리스도교은 약함 속에서 완성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바로 거기에 그것의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로고스도, 표징도, 말해질 수 없는 것에 의한 황홀경도 되어서는 안 된다. 이 담론은 자체의 실제적인 내용 말고는 아무런 위세도 없이 공공연한 행동과 가식 없는 선언이라는 초라한 투박함만을 가질 것이다. (…) 질그릇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알랭 바디우, 『사도 바울』, 현성환 옮김, 새물결, 2008, 107쪽]깨지기 쉬운 자기로 된 태양()은 이른바 진리(가 개창되는) 사건에 다름 아니다. 그 사건적 진리란 불안정함과 위기, 위태, 줄여 말해 약함의 속성 안에서만 발생되고 관철될 수 있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러므로 약함의 보존이다. 교조화되고 경화된 혁명의 담론은 혁명 그 자체가 아니라 혁명을 통한 다른 목표의 수행에 방점을 찍는다. 그때 혁명은 언제나 매개적인 것으로, 궁극의 목적달성에 비추어 늘 예비적이고 수단적인 것으로 전치되고 전락한다. ‘약함이란 그런 단순한 매개와 수단으로서의 지위를 거절한다. 약함은 그런 수단적 지위를 항상적인 불안정과 위기 속에 놓이도록 한다. 약함은 혁명을 혁명 그 자체의 보존과 지속으로 관철시키려는 입장에 다름 아니다.[약함 속에서 완성되는 사건, 그 진리공정의 신학정치에 관해서는 윤인로, 철탑 아래로 도래중인 것2013720, 울산의 기록」, 격월간 말과활2(201310~11월호)를 참조. 그 약함이 깨지기 쉬운 질그릇이고 사기그릇이다. 그 약함이 바로 질그릇 속에 간직된 신성의 빛이며 사기그릇 속에 보존된 새로운 태양()이다. 그 빛들은 목적-수단의 위계를 부숨으로써 목적의 군림 속에서 이뤄지는 이윤축적을 중단시키고, 목적/율법에 의해 동원되고 환수된 힘들을 되돌려 회복시킨다. “바울에게그리고 이상에게] 그리스도는, 혁명을 정치적 진리의 자족적인 시퀀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서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도래이다. 그리고 기존의 담론 체계들을 중단시키는 사람이다. 그리스도는, 즉자적으로 그리고 대자적으로, 우리에게 도래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무엇이 우리에게 도래하는가? 우리가 율법에서 풀려나는 것이 그것이다.”[알랭 바디우, 사도 바울, 97 도래중인 그리스도, 그리스도라는 도래. 다시 말해 율법화된 레짐으로부터 매일 매회 놓여나고 풀려나는 시공간의 개창 혹은 임재. 이를 위해 보존해야 할 것은 깨지기 쉬운 사기그릇 안의 보물, 그 약함, 그 게발트이다.

 

 

2

 

다시 한 번, 대낮을 찢는 닭의 울음소리를 인용하자. ‘꼭끼오./ 순간 자기와같은태양이다시또한개솟아올랐다.’ 이번엔 방점을 순간(瞬間)’이라는 시어에 찍으려 한다. 닭의 울음, 바로 그 고지의 순간은 이상이 말하는 도래중인 나의 역사신학을 관통하는 시간감, 별안간’ ‘바야흐로’ ‘금시에’ ‘불원간’ ‘미구에등과 하나의 계열을 이룬다. 이상의 순간이란 한 체제의 통치이성이 스스로를 신성한 것으로 제작해내고 신적인 것으로 고양시키려는 과정을 중단시키는 때이다. 순간또한 바울의 어휘다. 바울? 그렇다, 사도 바울. 하지만 바울과 이상이 말했던 그 순간이란 바울과 이상의 폭력적 이면을 되겨누는 것이기도 했다. 무슨 말인가.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린도전서, 15: 51~53)

 

우리 모두가 잠에 빠진 것은 아니라는 것. 깨어있는 자들, 이른바 메시아의 초병들이 있으며, 그들에 의해 최후를 고지하는 마지막 나팔소리가 답파하리라는 것. 그 양각나팔(Shofar)의 음파 혹은 주파 속에서, 다시 말해 그 순식간의 시간 속에서 모든 것들은 변신과 전환의 임계에 육박한다. 위의 52절은 위기의 특징들을 표현하고 있다. “52절은 모든 시간을 종적(縱的)으로 파기하며 돌입하는 이 위기의 주목할 만한 특징 세 가지를 말한다: 첫째, 순식간에 일어날 것이다. 문자 그대로 나눌 수 없는 순간().”[칼 바르트, 『죽은 자의 부활』, 전경연 편, 대한기독교서회, 1991, 160] 복창한다. 나눌 수 없는 순간, 분할할 수 없는 시간으로서의 순간. 나눌 수 없다는 건 느낌과 사고와 행동의 을 지배적 힘의 입맛에 맞게 분절하거나 할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눌 수 없는 시간으로서의 순간이란 해질 수 없는 시간이며, -바깥(으로)의 힘이며, 그 계산불가능성으로 추동되고 준동되는 시간이다. 바울과 이상의 순간은 그렇게 끝내 환원되거나 환수되지 않고 끝까지 잔류하고 잔존하는 잔여와 잔당의 시간, 끝의 시간이다. 다시 말해 그들이 말하는 순간은 유혈적 셈법의 체제로 환원되지 않는 차이()’의 시간이다. 억제되거나 억류될 수 없는 그 차이의 시간 안에서, 매회 끝을 선포하는 지금-여기가 개창된다고 했던 건 마르크스의 독자/상속자로서의 데리다였다. 그들의 순간은 모든 분절되고 할당된 시간들, 그 위계적 질서를 종적으로내리치고 파기하며 돌입하고 있는 폭력적 위기로서, 지고의 주권적 게발트로서, 이른바 부활의 사건으로서 장전되고 있다.

 

그런 위기의 두 번째 특징은 갑작스러움이다. 뜻밖에 갑자기, 이른바 홀연(忽然)의 시간. ‘-이라는 것은 합의되고 합성된 의미들의 연락망 바깥을 말하는바, 그 바깥이라는 제헌적/구성권력적 성분에 의해 죽은 자들은 썩지 않을 것으로 부활하고 산 자들은 변신한다. 부활과 변신, “그것은 다른 역사를 뚫고 그의 길을 가는 구원사이다.”[칼 바르트, 죽은 자의 부활, 160~1] 뚫으며 답파하는 구원사(救援史). 이상의 최후작에 속하는 종생기에는 나는 날마다 운명하였다.”(2: 368)는 문장이 들어있는데, 그것은 매회 죽었다가 매번 다시 깨어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상에게 종()과 생()은 한 가지로 반복된다. 첫 소설 십이월십이일에는 만인을위한신은엄슴니다 그러나 자긔한사람의신은누구나잇슴니다”(2: 116)라고 말하는 ’, “만인의 신! 나의 신! ! 무죄!”(2: 120)라고 외치는 그가 있다. 그는 이상의 분신 중 일부이며, 인제죽을때가도라왓나보다! 아니 참으로사라야할날이도라왓나보다!() 이제야 최후로 새우주가 그의앞에는전개되엿든 것이다.”(2: 146)라는 문장 속의 인물이다. 그렇게 이상 소설의 처음과 끝은 최후적 심판과 부활의 이미지로 관통되고 있다. 이상 문학의 주조음으로서의 구원사적 성분.

 

위의 52절이 표현하는 위기의 세 번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셋째: 마지막 나팔소리가 울릴 때, 이것이 이 위기의 결정적 표징이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하신다(나팔소리는 명령의 신호이다!) () 실로 잠정적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다만 예비적 경고조가 아니라 완전한 권위를 가지고 즉각 출발과 순종을 촉구한다.”[칼 바르트, 죽은 자의 부활, 161쪽] 바울의 마지막 나팔소리, 신이 원하기에 신의 절대적 명령으로 발효되는 그 지고한 징후 및 신호는 이상이 말하는 최후의 조종소리와 고지하는 닭울음소리, 더불어 이상이 발하는 여러 최후적 정언명령들과 하나의 계열을 이룬다. 바울과 이상의 묵시적 대음향들은 대지를 구획한 법의 할당된 권역들을 싸그리 일소하는 위기로서 종적으로 내리쳐진다. 그 위기의 음들, 리듬들, 파문들은 결정적이고도 궁극적인 폭력, 절대적이고도 지고한 주권으로 즉각 대지의 법륜을 갈아 끼워지도록 촉구하고 강제한다. 바울과 이상, 그들 두 사도가 중시하는 순간이란 바로 그렇게 내리치는 위기/묵시의 힘이며, 그런 한에서 그 힘은 또 하나의 순간, 지금(Jetzt)’의 시간과 만난다. “인식 가능한 지금[Jetzt] 속에서의 이미지는 모든 해독의 기반을 이루는 위기적이며 위험한 순간의 각인을 최고도로 유지하고 있다. () 이 지금 속에서 진리에는 폭발 직전의 시간이 장전된다.”[발터 벤야민, 아케이드 프로젝트Ⅰ』, 조형준 옮김, 새물결, 2005, 1056 바로 지금’, 다시 말해 정초되고 보존된 기왕의 법계를 폭발 직전에 끌어다 놓는 진리-시간, 이상이 말하는 금시(今時)’바야흐로의 시간. 그것들은 위기적 순간들로 각인된 시간, 그 각인이 최고도로 유지, 지속, 보존되는 시간, 이른바 파루시아의 시간이다. 이 완성, 모든 죽음의 소멸은 그리스도의 최고, 최후의 주권 행위다. 아직 그 일은 완수되지 않았다.”[칼 바르트, 죽은 자의 부활, 126 복창한다. 아직 그 일은 완수되지 않았다.

 

파루시아, 임재의 사건은 완수되거나 완성되지 않고 매번 그 완수와 완성을 부결시키고 부정하는 아직 아닌(not yet)’의 시간으로 도래한다. 파루시아의 사건은 언제나 이미 자신의 기각과 기소로 도래하므로, 늘 아직 오지 않은 미-래다. 매번 직전(直前)에 있는 것이다. 직전에 있고 미-래이므로 바울과 이상은 기다린다. 저 닭울음소리에 뒤이어진 새벽빛 천량의 도래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 기다림을 고요한 내적 수양이나 마냥 엎드린 기도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기다림이란, 기다림의 메시아 정치란, 눈앞에 이미(already)’ 도래해 있는 임재의 사건과 각성의 시간을 꽉 붙잡고 파지한 채로, 그 사건의 완성과 완수를 매번 기각하면서 그 파국적 사건성을 최고도로 지속하려는 항구적인 기도(企圖)이다. 이상의 그런 신학적/정치적 기도는 불안의 정조가 흐르던 성천의 깊은 밤, 「산촌여정」의 한 문장에서 이렇게 표현된다. “공기는수정처럼맑아서 별빗만으로라도 넉넉이 조와하는 누가복음도읽을수잇슬것갓슴니다.”(3: 45) 왜 「누가복음」인가.

 

 

3

 

임박한 임재, 도래중인 끝. 그 임박함, 그 도래를 표현하는 두 복음서의 두 문장은 이런 것이다. 이른바 때가 찼다.”(「마가복음」, 1: 15)라는 한 문장과 이상이 별빛 아래서 읽고 있었던 곧 끝이 오는 것은 아니다”(「누가복음, 21: 9)라는 한 문장. 때가 찼다는 건 이미에 이어진다. 아직 끝이 온 게 아니라는 건 아직 아닌에 이어진다. 성천의 이상은 때가 찼다고 말하는 마가의 그리스도를 따라 삶을 지닌 모든 것은 모두 피를 말려 쓰러질 것이다. 이제 바야흐로.”(3: 203)라고 적었다. 그것은 누가의 계시록, 곧 성전(聖殿)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의 사회적 관계, 합의된 가치체계가 때가 이르면  하나도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누가복음, 21: 6)고 했던 누가의 그리스도와 맞닿는다. 그런 한에서, 지금 이상은 마가와 누가가 공동으로 그려놓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그 두 복음서의 을 향한 공통적 시간감 속에 들어있다. 그러하되, 바로 그런 시간감을 문제시하는 것이 곧 끝이 오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누가복음이고 이상은 그런 누가복음을 좋아한다.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일소되리라는 말에 곧바로 이어진 문장들을 보자.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으며 이런 일이 일어나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 이르시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며 때가 가까이 왔다 하겠으나 그들을 좇지 말라”(누가복음, 21: 7~8)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와서 때가 찼다고 말하는 자들을 따르지 말라는 것.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외투를 입은 적그리스도. ()에 의해 설계된 상황을 구제의 상황이 아니라고, 임재가 아니라고, 도래가 아니라고 선언하는 시간, 시간들. 임재 안의 반()-임재, 도래 안의 비-도래를 항구적으로 판별하고 결정하고 각성해내는 순간, 순간들. 이상에게 누가복음은 그 시간 그 순간을 예민하게 지각하고 인지하도록 이끄는 것이었다. 성천의 이상은 (내는 그리스도)’의 임재를, ‘화평이 아니라 불을 던지고 분쟁케 하려는’(누가복음, 21: 51) 신적 힘의 발생을 그리스도의 다음과 같은 말, “[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누가복음, 12: 49)라는 아직 아닌의 상황 속에서 목격하고 경험한다. 이미와 아직 사이, 이미 안의 아직, 아직 안의 이미. 파루시아의 상황이 발생하는 때가 그와 같다. 바로 그 때, 그 파루시아의 힘은 끝을 영원히 유예하고 지연시키는 자들과, 그 유예를 통해 축적하는 자들과, 다시 말해 그들의 체제, 그 전()-종말론적 레짐과 항구적인 적대에 돌입한다. 바로 그 항구적 적대의 전장(arena)을 보존하고 지속하는 일. 그것이 기다림의 메시아 정치다. “모든 것이 끝날 때까지 모든 것이 시작될 때까지. 그리하여 모든 것이 간단하게 끝나버릴 아리송한 새벽이 올 때까지”(3: 215) 기다린다는 것의 뜻과 의지가 그와 같다. 이미와 아직 사이로 도래중인 새벽, 천량, 서광.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그 주권을 함께 관철시키는 상황을 표현하기 위해 바울은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는다는 문장을 여러 번 사용한다. 썩을 몸이 다시는 썩지 않을 구원을 입으리라는 것, 죽을 것이 불사의 시간과 부활의 사건을 입으리라는 것도 그런 옷 입음의 신학에 이어진 것이다. ‘왜 오늘 바울인가라는 물음에, 바울 의인(義認)론의 구체적 실천 현장의 중요성과 그 전장에서 발생하고 있는 사건성에 방점을 찍음으로써 답하고 있는 민중신학자 김진호는 바울의 옷 입음론을 두고 다음과 같이 비평한다.

 

바울 식의 옷 입음론은 보는 이보이는 이라는 이분법을 가정하고 있다. 한데 자신이 보이는 이라면, ‘보는 이는 자신의 내면에 있을지언정 결코 자신과 대면할 수 없는 존재, 곧 타자다. 그이는 실제로는 무한정의 거리에 있다. 그이는 실제로는 우리와는 결단코 유사해질 수 없는 전지전능의 존재다. () 하여 그런 이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은 단지 그이의 은총(charis)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루돌프 불트만이 바울에게서 신앙이란 무엇보다도 순종(hypakoe)을 의미했다는 지적은 의미심장하다. 바울 자신은 결코 그렇지 않았지만, 바울의 신학은 전능한 보는 이앞에서의 삶의 수동성을 내포한다.[김진호, 「죄론과 시선의 규율권력, 리부팅 바울』, 삼인, 2013, 230

 

문자로 된 유대주의의 율법이 내면을 만들었을 때, 신은 인간의 그 내면성과 죄업을 속속들이 간파하고 있는 보는 이의 시선으로 그 인간 안에 존재하게 된다. 그렇게 보는 이의 시선에 맞춰 자신을 보이는 자로 모듈할 때, 다시 말해 보는 이의 시선에 자기 의지의 격률을 동일시하고 순종할 때, 그는 선민(選民)이 되고 죄인이 아니게 된다. 이 과정은 회당 체제 안의 유대인, 자유인, 남성이 자신들의 신성한 권리를 옹립하기 위해 이방인, 노예, 여성을 하위의 주체들로, 타락한 죄인들로 배치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른바 유대주의의 죄인-선민 메커니즘’. 이를 적으로 설정하고 비판하기 위한 방책이 바울의 옷 입음론이었던바, 그것이 실은 적의 논리와 생리를 내재적으로 답습하고 있었다는 게 김진호의 생각이다. 보는 이와 보이는 이의 날카로운 분리 속에서 자기의 옷 입음을 주시하는 보는 이의 시선에 자기를 일방적으로 동일화하는 삶. 바울의 논법이 생산한 삶이 그와 같다. 적과 단절하려는 의지가 적을 반복하게 하는 상황. 적을 극복하려는 기도가 적과의 내밀한 연루 속에서만 관철되고 있었던 실황. 그 곤혹과 곤욕. 바울의 옷 입음론은 순종적이고 복종적인 주체 생산의 매커니즘을 배태하고 있었다. 삶에 외재적으로 주어지고 시혜되는 은총, 삶과 무한정한 거리로 이격되어 있는 신, 삶과 완벽하게 분리된 초월적 신성, 다시 말해 대면할 수 없는 신, 붕 뜬 신. 지상의 의미연관을 거세한 구원, 지상의 고통에 눈감는 전지전능. 그것들이 삶을 수동적인 것으로, 항구적인 하위의 것으로 제작해낸다. 그리고 거기에 파시즘의 운동원리가 있다. “파시즘은 바로 이런 신성화된 권력의 순응 메커니즘을 가리키는 사회학적 개념이다.”[김진호, 죄론과 시선의 규율권력, 231 이상이 말하는 살신(殺神)에의 의지가 바로 그런 신성화된 권력의 작동에 소송을 거는 것이었다. 그러하되 다시 전면에 내세워야 할 이상의 텍스트는 이상 자신의 곤혹스런 이면 혹은 정면 차생윤회」이다. 거듭 인용했었던 그 텍스트의 핵심어들을 상기해 주셨으면 한다. 도식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표를 한 장 만들면 다음과 같다.

 

 

바울

이상

마지막 나팔소리

고지하는 닭울음소리

순식간/홀연히

순간/바야흐로

부활/불사

날마다 운명함, 살아야할 날이 돌아옴

옷 입음론

초인법률초월론

복종적 주체 생산

살아있지 않아도 좋을 광인, 전염병자, 주정꾼, 걸인

신성화된 권력, 파시즘

모종의 권력, 일제학살, 결단적 우생학

「고린도전서」, 15: 53

「차생윤회」

 

 

이렇게 두 번 질문하자. 이상은 불세출의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은 자인가. 이상 안에서 이상 자신의 그 옷 입음을 응시하는 자는 누구인가. 이상은 그리스도를 옷 입은 자이다. 그 옷 입음을 주시하는 그 보는 이의 시선-권력은 법률을 초월하는 이른바 초인의 것이다. 지금 이상은 그 초인의 시선에 맞춰 스스로를 모듈하고 동일시하는 중이다. 「차생윤회영웅적 결단(英斷)’을 통해 법-바깥을 개시하는 초인의 힘에 이상 자신을 오차 없이 포개는 과정의 폭력적 속성을 노출한다. 우생학적 결단, 일제학살. 다시 말해 피, , 정상과 병리의 분리, 광기에 들리고 술에 절고 불로(不勞)에 빠진 자들의 거대한 일소, 최종적 절멸. 그런 초인의 권력이 모종(某種)’의 것인 까닭은 그 권력이 이상 자신 안에 있는 초인의 것이면서도, 실은 이상 자신이 결코 마주하거나 만날 수 없는 무한정한 거리를 갖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상이 동일시하려는 자기 안의 초인은 끝끝내 그런 동일시를 수락하지 않는다. 동일시는 항구적으로 유예되며 대리보충된다. 그 과정에서 이상은 지상에서의 자기 삶으로부터 완벽하게 이격된 초인의 볼모가 된다. 붕 뜬 초인, 지상에 부재하는 초인의 전지전능은 모조된 구원을 선포하면서 그 선포에 동조(同調)되는 힘으로 수동적이고 순종적인 삶을 생산한다. 이른바 살아있지 않아도 좋을 인간들은 그러므로 일조일석에 싸그리 말살되어야 하는 게 아니라 항구적으로 양산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이상은 자신이 했던 말의 뜻을 알지 못한다. 그 무지 속에서 이상의 초인은 위조된 구원의 체제, 곧 살아있지 않아도 좋을 인간들을 동력으로 옹립되는 적그리스도의 체제를 설계하고 제작한다. 그때 구원(Erlösung)은 절멸(Endlösung)과 등가적이며 등질적으로 된다. 구원은 분명 절멸과 동시적이어야 하지만, 그 절멸이 이상의 초인에 의한 절멸일 수는 없다. 오늘 근대라는 체제로부터의 구원은 분명 절멸과 동시적이어야 하지만, 그 절멸은 이상의 초인이 살해되는 상황 속에서의 절멸이 아니면 안 된다. 차생윤회의 이상은 근대라는 체제에 보증을 서면서 구속되어 있는 볼모이자 죄인이다. 죄수 이상은 수인(囚人)이만들은소정원」에서 이렇게 적었다. “()를내어버리고싶다. 죄를내어던지고싶다.”(1: 153) 속죄, 죄로부터의 속량. 그것은 자신이 봉헌하는 자기 안의 초인에 대한 동일시를 중단함으로써 초인의 그 시선-권력을 절단하는 일에서 출발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 중단, 그 절단의 힘은 이상의 무엇에서 발생하고 발족하는가. 그 힘은 이상의 권태, 권태의 신학정치에서 발원하고 발발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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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인로문학평론가하나의 체제가 스스로를 신성한 것으로 고양시키는 과정에 대해그리고 그 과정과 동시적으로 구성되는 주체들의 또 다른 신성한 힘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계간<오늘의문예비평>, 격월간 <말과활>의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연재를 마치며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합니다. 6회에 걸친 연재를 마무리할 수 있도록 애써주신 웹진 <아프꼼>의 선생님들께도 감사합니다.

 

저는 제가 하고 있는 작업의 의미를 안다고 믿고 싶지만, 그 앎이 저의 단선적인 앎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충격하는 분들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충격을 완충할 방법을 찾을 것이 아니라, 그 충격에 섬세하게 파괴될 수 있는 생활의 방법을 찾고 싶습니다. 학위논문에서 부분적으로 뽑아낸 단락들로 연재를 이어간 것이라 비약이 심했을 터입니다. 글 전체를 읽어주십시요, 라고 무릅쓰고 부탁드리고 싶은 까닭은 비약의 문제에 대한 해결과 해소를 위해서가 아니라 글 전체에 산재해 있을 다른 문제들의 증폭과 증여를 위해서입니다.

 

 

 

 

 

 

 

 

 

 

 

 

 

 

 

 

 

 

 

 

제14화 정체성은 없다.  

 

 

 

소설가 金 飛 

 

 

 

 

 

 

 

나는, 없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이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나는 나이기도 하지만, 내가 아니기도 하다. 나는 여기에 있지만, 여기에 없기도 하며, 나는 여기에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스스로 나는 나의 존재를 깨우치기도 한다. 내가 여기에 없을 수도 있다고 믿고 있는 어떤 존재가, ''라는 이름으로 여기에 살아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단 나 혼자만의 혼돈이나 혼란이 아닐 것이다. 모든 인간이 어떤 한 가지, 혹은 몇 가지의 이름으로 거기에 존재하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부분적이고 제한적인 호출에 지나지 않는다.

'어머니'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은 희망적이고 긍정적이라고 말하는 이 세계의 일방적인 호출로 인해 '여성'이라는 이름의 존재를 잃어버리거나 혹은 박탈당한다. '학생'이라는 이름의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존재의 인간도, 획일화된 교육의 틀 속에서, 혹은 '학생'이라는 이름의 편견 속에서 '인간'이라는 이름을 빼앗겨버리고 만다. '가장'이라거나 '남자'의 이름도 하나의 존중받아야 할 인간을 어떤 틀 속에 꼼짝없이 가두어버리며, 하물며 '여성'이라거나 '장애인'이라는 말은 더욱더 폭력적으로 어떤 거부할 수 없는 강압적인 틀을 지워버린다.

지금까지의 세계는 그렇게 모든 각자의 이름을 가진 인간들이 수동적이고 획일적인 지시에 의해 국가나 제도라는 거대한 기계를 움직이는 데 일조해왔지만, '시간'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층위의 거부할 수 없는 움직임은 이 세계와 인간을 단 한 순간도 어느 한 곳에 머무르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단지 우주의 시간으로는 일각에 지나지 않는 참으로 보잘것없는 역사가 우리에게 흘렀을 뿐, 우리의 세계는 지금 어떤 모퉁이를 돌며 시간의 관성을 견디지 못해 휘청거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김병필'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김비'라는 이름을 가지면서, '남성'이라는 틀 속에서 빠져나와 '여성'이라는 이름 속에 편입되면서, 그리고 그 속에서 전에 없던 평온함을 느끼면서도, 나는 여전히 꿈틀거리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이전에는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다른 층위의 혼란과 혼돈 앞에 서 있는 나를 목격한다. 거듭해서 시시각각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는 혼돈은 언제나 이방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때로는 친근했고 때로는 낯설었지만, 언제나 그건 일정한 거리감 속에 존재하는 이방인이었다. 그 혼돈 앞에서 매번 얼굴이 굳어가던 것이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 그러나 분명히 살아있는 나 자신의 모습이었고.

나는 지금까지 무수히도 여러 번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 말했지만, 이제 나는 더는 그 말을 할 수 없을 것 같다. 어쩌면 이건 지금도 여전히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스스로 삶과 시간을 희생하고 있는 나와 같은 처지의 소수자들에게는 반역이나 배반처럼 들리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우리가 찾아야 하는 건 정체성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인지도 모른다는 어렴풋한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물론 그것이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여전히 나도 혼란 속에 있으며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편안함을 느끼면서도 언제나 나를 따라다니는 의심과 의혹의 눈초리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외부의 시선이나 편견 따위 이제 뻔뻔스러울 정도로 내성이 생기긴 했지만, 내 안에서 어긋나며 찔러오는 무언가를 나는 분명히 감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나 혼자만의 깨달음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이름을 가진 모두의 마음속에 딱딱하게 자리한 흉터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에. 정체성이라는 말에 붙들리면 붙들릴수록 오히려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거기는 더욱 크게 요동치고 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을 수 있기에.

 

나는 비겁한 삶을 지향한다. '지양(止揚)'이 아니다. 분명한 '지향(志向)'이다. 나는 모두가 손가락질하는, 그런 삶을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당당하고 떳떳하다고 논리적으로 스스로 입장을 서술하며 턱을 높이 치켜드는 그런 삶이 아니라, 얼버무리고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해 머쓱하게 웃고 마는 그런 얼굴로 세상을 마주하며 사는 것이, 결국 내 삶이 궁극적으로 도착하게 될 지점일 것이다. 타인을 생각하고, 이 사회를 고민하고, 내 나라를 걱정하고, 이 세계를 안타까워하는 대신, 나는 오롯이 나 혼자만 생각하며, 흔들리고 불안한 나를 감지하면서, 날마다 쓰러지지 않는 나 하나만을 겨우 감사하며 살아갈 것이다. 나는 세상이라는 인간을 생각하는 대신, 오직 나 하나의 목숨에 매달려 벌벌 떨며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에게 허리를 숙이고 고개를 숙이며 살겠다고, 나 자신에게 다짐하고 있는 중이다. 그따위 비겁하고 비루한 삶이 어디 있느냐 누군가 손가락질을 해온다면, 구구절절 어려운 수사와 언어들로 나의 선택과 논리를 증명하는 대신 머쓱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이면서.

 

세상의 말들은, 너무 많은 것들을 밝혀낸 반면 그만큼 너무 많은 것들을 소외시켜왔다. 쏟아져 나온 말들을 신뢰하면서, 그 속에 매달리면서 우리는 너무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 정체성이라는 몇 개의 기호 앞에 우리는 너무 무기력해져 버렸으며, 전혀 그럴 필요 없는 일인데 그 앞에 번번이 좌절하고 말았다. 무수히 많은 인간들이 그 속에서 자신의 삶을 찾고 희망을 찾아간 반면, 그만큼 많은 수의 사람들이 그것으로 인해 삶을 져버리고 목숨을 잃었다. 정체성이 또렷한 것일수록 그만큼 당당하고 화려했으며, 정체성이 없는 존재는 언제나 괴물적으로 환기되어왔다. 물론 어느 것도 인간이라는 존재를, 우리가 사는 세계를 올바르게 호출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서성거리고 더듬거리면서, 처음으로 그 어떤 것에도 갇히지 않은 삶을 꿈꾸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디에도 나 자신을 두지 않고 위태롭고 흔들리는, 부유하며 사는 삶을 날마다 꿈꾸면서. 정체성을 빼앗겨버린, 혹은 놓쳐버린 나를 닮은 인간들에게 괜찮다고 그들의 어깨를 토닥일 수 있는 그런 삶을. 비겁하고 보잘것없더라도, 내 안에서 나를 위한 삶을 놓지 않고 사는 끈질기고 지독한 생의 애착을.

 

'정체성은 없다. 정체화가 있을 뿐이다.' - 자크 데리다

 

 

 

 

 

 

 

 

제13화 무명의 생

 

 

 

소설가 金 飛 

 

 

 

 

 

 

그래서 나는, 나를 띄워보낸다.

 

  지상의 관념 위에 나를 붙들고있던 모든 것들을 벗어버리고, 이제 나는 나를 허공으로 띄워올린다. 경계 속에 나를 속박시켰던 편견과 강박, 그리고 또 다른 감옥일 수 밖에 없었던 전환과 변신, 끈질기게 나를 붙들었던 괴물같은 인간성과, 어디에서 기인하는지조차 알지못했던 두려움의 끈을 벗어버리고, 나는 있는 힘을 다 해 땅을 박차 올라 허공에 나를 띄운다.
  날개도 없는 것의 날갯짓은 보잘 것 없고 형편없는 높이에 불과하겠지만, 자신들의 경계 속에 안온함을 누리고 있을 누군가에게 그건 고작 투신이거나 추락처럼 보이겠지만, 나는 온 힘을 다 해 나 자신을 들어올린다. 아무런 경계도 존재하지 않는, 모든 정체성이 사라져버린 공간. 그 어떤 이성이나 감정도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관념의 공동.
  허공에 떠올랐기에, 어떤 땅 위에 발 딛고 있지 않기에, 나는 분명 위태롭고 위험해보일 것이다. 버릇처럼 그건 또 다시 내게 불안과 두려움을 추동시키겠지만, 나는 그 모든 것을 지우기 위해 언제든 기꺼이 허공 속으로 몸을 내던질 것이다. 어디론가 부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나는 발버둥치거나 비명지르며, 지상의 세계 어딘가에 도착한 생존을 갈구하지 않는다. 오지 않은 미래에 짓눌려, 일각의 현재를 희생하지 않으려 한다.
  나는 나의 고독을 알고 있다. 손에 든 최초의 무언가 어긋나면서,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지 않아도 되었을, 그런 고민과 사유 속에 발을 빠트렸다. 누군가는 그것을 장애라고 하기도 했고, 누군가는 그것을 잠시 잠깐의 착각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것이 장애인지 착각인지 그들의 논쟁이 시끄러워지는 동안, 작은 상자 속에서 나는 언제나 공포에 질리며 혼자서 몸을 떨어야했다. 아무도 지켜주지 못할 거라는 절박함이 나를 깨우며, 나는 어쩌면 세상이 말하는 인간의 허물을 벗어버렸던 건지도 모른다. 그것도 모른 채, 인간이 되기 위해, 세상이 말하는 그들과 똑같은 평범한 인간으로 살기 위해, 나는 온 힘을 다 해 경계를 넘어서며 이리저리 분주하기만 했다. 때로는 도약이었고, 때로는 추락이었으며, 어떤 시간 속에서 그건 추억이었고, 또 다른 시간 속에 그건 악몽이었다.
  그리고 나는 또 다시 내가 붙들고 있던 것들을 놓아버리고, 내가 도착하게될 허공을 빈틈없이 탐색해야했다. 설령 그것이 어리석고 모자란 것일지라도, 끝내 나는 내가 다다르게 될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러한 부유를 두려워하지 말아야한다. 서로 다른 경계 속에서 서로 다른 땅을 디디고 있는 자들에게, 나는 분명 침입하거나 침범하는 이방인이겠지만, 섣불리 희망에 기대거나 절망에 쓰러지지 않으며, 나는 표정이 지워진 냉혹한 얼굴로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말소시켜야한다.
  다른 사람들은 할 필요가 없었던 혼자만의 투쟁으로 나는 이미 나이를 먹어버렸지만, 나는 아직도 나의 생을 포기하지 않았다. 세상 모든 것들을 지워버린 이기적인 삶이지만, 나는 그것 만으로도 나의 생존을 담보할 수만 있다면, 내 이 모호한 삶의 의미를 반드시 지켜야한다는 사실을, 나는 이제 깨달았다.

 

  어리석게도 나는 너무 오래도록 확신을 바랐던 건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혼돈과 혼란으로 태어난 생명, 그래서 더욱 나는 내 삶에 또렷하고 분명한 무언가를 갈구했었던 건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그것을 정체성이라 말하지만, 그건 언제나 어긋나기만하는 엇갈림이며, 결코 들어맞지 않는 과녁일 뿐이다. 내가 나를 가리키면서 나를 알지 못하고, 내가 나를 말하면서 내가 아닌 세상의 명령만을 중얼거리며, 내가 나의 삶을 살면서도, 나는 언제나 살해당한 채였다. 어떤 세상의 틀 속에서도, 나는 위협당하며 살아야하는 존재였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서야 나를 미지의 공간 속으로 띄워보내고자 한다. 세상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깨끗한 여백의 시간을 나에게 선물한다. 그 어떤 것으로도 훼손되거나 오염되지 않으며, 오직 나만을 위한 이기적인 시간. 분명히 누군가에게 손가락질받고 비난받게 될, 그러나 결코 두렵지 않은 모멸의 시간.

 

  앞으로도 나는 너무 오래도록 그 무언가를 찾아 헤맬 것이다. 그리고 나는 끝내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는 사람일 것이며, 나를 살게하는 것은 세상이 말하는 희망이나 미래가 아니라 끊임없이 내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나를 파헤치는 집요함이라는 것을 깨우치게 될 것이다. 찬란하게 빛나는 판타지에 붙들려 온 몸을 흔들며 내달리는 질주가 아니라, 여기 이 자리에 선 나를 잊지 않으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조금씩 나의 걸음을 시작하는 일이, 바로 내가 살아야할 나의 삶이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여기, 이 땅 위엔 해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토록 찾고있던 해답이란 건, 어쩌면 우리들의 발 밑에 들러붙어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날마다 그것을 뭉개고 짓밟으며, 우리는 그렇게 어리석게도 허망한 미래만을 뒤쫓아 살아가고 있는 건지도.

 

  그래서 나는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부여해야한다. 세상이 부여한 표피와 흔적들을 벗어버리고, 부유하며 다가오는 모든 것들에게 나만의 의미와 이름을 붙이고 불러야하는 것이다. 오래 전 인디언들의 이름이어도 괜찮을 것이다. '푸른 태양의 일격'이라던가, '용감한 하늘의 심판자'여도 좋다. '초록 생명의 흙'이라던가, '검은 사유의 시간'이어도 괜찮다. '꿈'을 '잠'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며, '사랑'을 '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가족'을 '동지'라거나 '적'이라고 해도 좋고, '친구'를 '연인'이라고 말해도, 혹은 '이방인'이라고 말하더라도, 부유하는 우리들 곁에 다가온 누군가는 똑같은 얼굴로, 거기에 그렇게 존재하거나, 혹은 지나칠 것이다.

 

  새로운 나의 호출로, 세상의 모든 것들은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며, 나의 호출에 응답하는 것들을 기쁘게 맞이함으로써, 나는 나를 부르고 세상을 부르며, 그것으로 인해 또 다시 진정한 나의 이름이 호출되는 환희를 깨닫게될지도 모른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부속품이 아니라, 이 세계를 나의 부속품으로 만들어,  작고 보잘것 없겠지만 나를 위해 존재하는 나의 시간을, 나의 차원을, 나의 세계를 살아야한다.

 

  이제부터 나의 정체성은 없다. 세상에는 나의 이름을 호출할 수 있는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꿈틀거리는 생명으로 세상에 태어난 모호하고 흐릿한 하나의 인간일 뿐, 남자도, 여자도 아니며, 사람도, 국민도 아니다. 오직 어디에서든 어떤 모습으로든 끝까지 살아남으며, 빈 몸으로 마음껏 이 삶을 즐길 수 있는, 언제나 꿈틀거리며 다시 태어나, 나에게 다가오는 새로운 시간을 향유할 준비가 되어있는, 역동적 생명이 될 것이다. 날마다 새로워지게 될, 무명(無名)의 생이다. 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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