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안녕을 묻는 방식의 발명을 위하여

 

 

신현아

 

 

1. 일과 영혼: 자기해방되었나요?

 

“저는 연구모임 아프꼼의 연구원입니다. 활동한 지는 4년쯤 되었습니다. 아프꼼에서 제가 하고 있는 것은 전반적인 일입니다. 아무거나 다 합니다.”

 

언젠가부터 내가 ‘아프꼼’으로서 나를 소개할 때 해왔던 말이다. 아무거나, 전반적인 일을 한다는 말은 한 편으로는 이제는 ‘짬 좀 찼다’는 것의 겸손이기도 하겠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오히려 내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에서 나온 자기방어이다. 부끄러움. 연구모임 아프꼼은 ‘일’로 자신을 소개하는 곳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가짐으로, 기쁨과 슬픔과 자부심과 몸 둘 바로 자신을 전해야 하는 곳인데, 나는 어째서 일로 자신을 소개하는가. 그래서 스스로에 대한 자신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 우리는 <배수아와 새벽의 극장>이라는 행사를 치루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노력을 기울여 만들어 낸 시간들. 그런데 정말 어처구니없게도 내가 이 행사에 대해 가장 먼저 기억하는 것은 영상 상영 초반에 합이 맞춰지지 않았던 것, 뒤풀이 테이블 세팅이 잘 되어 있지 않았던 것 등이다. 생각해보면 우습다. 이 행사에는 아프꼼이 언제 이런 격려를 받아보았을까 싶을만치 어느 때보다도 많은 사람들이 와서 축하해주었고,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서 목소리, 힘을, 마음을 보태주었고, 따뜻한 격려를 보내주었는데, 나는, 왜, 고작, 치킨이 미리 도착하지 않은 것에 노심초사하였던 것일까. 정작 가장 많이 마음을 썼던 사람도 좋은 행사였다고, 기뻤다고, 사소한 것에 마음쓰지 말자고 하는데, 나는 왜.

 

 

그러니 이런 마음이 ‘소진’의 한 단면이라고 할 것이다. 나는 이러한 나의 소진을 들키는 것이 부끄러웠다. 좋아서 하는 일이어야 하는데, 그래서 다른 사람도 북돋아야 하는데 소진되어 있다는 것이 다른 팀원들에게 미안했고 전해지지 않았으면 하였다. 게다가 나보다 힘들게 일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내가 감히 입 밖으로 내어 ‘소진’을 말하는 것은 ‘문제적’이고 ‘못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랬을 때 오히려 ‘일’은 하나의 좋은 알리바이가 된다. 나는 나 스스로에게도 내가 소진되었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영혼이 소진되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더 ‘일’에 ‘실무’에 매진하였다. 다른 팀원들에게 힘든지를 묻기 전에 일정에 맞춰 진행되었는지를 물었고, 일이 끝나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기보다도 집에 내려가서 잠을 잤다. 그때는 그것이 참 절실하였다. 사람들이 나에게 “무리하는 것 아니냐”고 걱정하면서 물으면 나는 오히려 의아했다. “일이 안되고 있나요? 잘 되고 있지요? 그럼 뭐가 문제인가요?”라고 말하면서. 이 말은 결국 “내 영혼에 대해 묻지 말아주세요. 나도 당신의 영혼을 묻지 않을 게요.” 라는 말에 다르지 않았으리라.

 

 

「이행과 자기해방의 결속체들」은 애씀과 그에 따른 소진에 대한 걱정이며, 또 한 편으로는 그 소진으로 인해 해방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질문이다. 소진은 자기해방이 아닌 족쇄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기해방되었느냐는 이 질문에 답하자면, 언젠가부터 나는 소진되었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소진되면서부터 나는 자기 해방이라는 것을 애써 잊었다.

 

 

2. 소진과 성장통의 사이: 당신의 영혼은 안녕한가요?

 

물론 소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조심스럽다. 소진과 피로에 대해 말하는 순간 다른 사람에게 그 피로가 전염되어 버리지는 않을까하는 걱정도 들고 무엇보다도 오히려 ‘저 이만큼 힘들었어요’하는 투정으로 비춰지는 역효과가 나는 것이 걱정스럽다. 게다가 간단하게 소진이라고 하였지만, 실은 여전히 이것이 ‘소진’인지도 긴가민가하다. 한편으로 일에 매진하면서 어떤 부분에서는 진행자로서, 선배로서 성장한 면도 분명히 있고 일이 손에 익어가는 과정에서 느낀 성취감도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그저 ‘성장통’일 뿐인데, 내가 그것을 ‘소진’이라고 생각하여 내 팀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도 불안하다. (실은 나에게 가장 큰 불안은 지역적재생산구조에서의 소외보다도 이것이다. 피곤하고 흔들리는 내 마음이 ‘소진’인지, ‘성장통’인지, ‘부대낌’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정하자고 하는 것에는, 결국 공동체의 건사는 이 ‘그 무엇’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가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라는 고민 때문이다.

 

 

성장통이라고 부르든, 소진이라고 부르든, 이것은 결국 공동체를 건사하는 사람이 마주하는 그 무엇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왜 소진되었나’를 묻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 무엇을 말할 것인가’이다. 왜 소진되었나를 묻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어떤 공동체든 간에 일은 많고 사람은 없고 관계를 건사해야겠다 싶으면 근육부터 쑤신다. 그러다보면 신경질이 나고 남 탓부터 하기 십상이다. 그렇다면 ‘왜’가 아니라 ‘어떤’ 소진인가를 말하자면 그것도 조심스럽다. 자칫하면 ‘피로자랑대회’가 되거나, 덜 피로한 사람이 더 피로한 사람에게 어쩐지 미안해하게 되어서 결국 ‘일’을 어떻게 나누어야 하는가에 대한 것으로 귀결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일을 잘 나누는 것은 공동체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런 것에 조심을 기하다 보면, 말하는 자체가 조심스러워져서 결국 자신의 상태에 대해 말하지 못하고 입을 닫게 되는 상황도 생긴다. 또는 더 이상 영혼에 대해 말하기도 지친 사람에게 넌 왜 그렇게 축 쳐져 있냐고 닦달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니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필요한 발명은 서로의 영혼에 대해 잘 묻고 말하는 방법, 그리고 그 건사를 통하여 그 무엇을 다른 에너지로 바꾸는 순환에 대한 것이다.

 

 

3. ‘그 무엇’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문제는 혼자서 ‘그 무엇’에 대해 골몰하다 보면 ‘내가 잘 하고 있나? 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 사람들을 잘 못 챙기고 있는 것 같은데? 어쩌지? 아 몰라, 일이나 하자.’ 하는 식의 공회전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공회전을 깨어주는 것이 바로 다른 사람의 목소리이다. 나를 흔들어 잠에서 깨워주는 목소리. 그 목소리는 단지 ‘잘하고 있어’라는 말이 아니라, ‘나는 이러이러한 점이 이런데, 너는 어떠니?’라는 두드림이다. 나는 거기에 답해야 한다. ‘너의 이러이러한 점에 나는 이러이러하게 응하고 싶어.’라고 말해야만 한다. 여기에서 소진과 성장통은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증상을 어떻게 체감하는가의 문제가 된다. 혼자 공회전하다가 삼켜버렸을 때, 그것은 소진이 되고,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나누어서 다시 되짚어 보았을 때 그것은 성장통이 된다.

권명아님의 「이행과 자기해방의 결속체」는 공회전에 빠진 나에게 ‘자기해방을 잊지는 않았니?’ 라는 물음이 되었고, 차가영님의 「이방인의 자기해방」은 누군가의 뜨거움을 내가 미처 몰랐다는 미안함과 뜨거움을 어떻게 받아 안을지에 대한 요동이었다. 그리고 엄준석님의 글은 내가 뒤로 밀어놓았던 시간들이 얼마나 반짝이는 것이었는지 다시 되새기는, 기쁨을 다시 캐내는 전이가 되었다. 아, 그랬구나. 우리가 정말 멋진 일들을 하고 있었던 것이 맞았구나. 어떤 치하보다도, 칭찬보다도 ‘나는 뜨겁고 싶었어’, ‘나는 참 기뻤어’와 같은 말들이 다시 일깨우고, 소진을 성장통으로 바꾸어주는 것이다. 1년간 나는 진행자로서 성장하였고, 어느 날은 마법사였고, 거리의 악사였고, 신경질적으로 몰아치는 사람이기도 하였고, 널브러져 있기도 하였다. 그리고 누군가를 챙기지 못하였고, 뜨거움에 응하지 못하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짬짬이 별 일 없냐고 안부를 묻기도 하였다. 그 전부가 이 시간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부대껴 온 시간에 비하자면 참으로 짧은 이 시간, 마음을 토로하고 써서 전하는 이 짧은 시간이 우리가 우리를 다시 만나는 공간이 되어, ‘부사적으로’ 그 긴 시간을 전혀 다른 시간으로 만들어 놓는다. 물론 이 마음의 파도가 그 간의 피로를 전부 씻은듯이 낫게 하지 못하고, 짧은 요동으로 그칠지도 모른다. 그러면 또 누군가가, 내가, 말해야만 한다. 우리 글을 써보지 않을래? 라고.

 

 

 

이방인의 자기 해방

 

 

차가영

 

 

누구나 꿈꾸는 공간이 있다. 우리는 그곳을 가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쓰지만 그 공간을 실제로 만들어내기는 참 어렵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곳들은 그것이 더 심하다. 다들 한 공간에 속해서 자신을 거기 맞추기에만 애쓰고 있고, 자신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 보려고 하지 않는다. 진짜 자신이 꿈꾼 공간이 아니기에 그 속에 속해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방인이 된다. 나또한 마찬가지였다. 어떠한 공간에 있어도 이방인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왔던 나에게도 그랬다. 무엇을 해도 그 공간은 내가 갈 수 없는 공간이라고 느꼈고, 그래서 이것저것 기웃거려 보고, 무엇이든 다 해보려고 욕심을 부렸다. 그런 나에게 연구모임 아프꼼의 행사는 이상적인 곳이었다. ‘함께 있는 공간’이라고 느꼈다. 구성원 모두가 행사에 몰입하고 푹 빠져있는 것을 느꼈다. 졸업을 하면, 아프꼼처럼 자신이 꿈꾸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애쓰고, 내 스스로 찾고, 만들 수 있기 위해 더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기에 아프꼼에 들어가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프꼼의 안은 내가 보았던 것과 달랐다. 꿈꾸던 공간에 들어왔지만 내가 이방인이라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정말 함께-있음의 온도차를 느꼈다. 나는 뜨겁게 달아오르려고 하는데, 사람들은 차갑게 식어 굳어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내가 행사 준비를 하는 도중에 들어왔기 때문에 아프꼼이 하려는 것에 대해 이해를 잘 못하고 있어서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서 사람들에게 계속 붙어 있으려 했다. 아프꼼에서까지 이방인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행사가 끝날 때까지 바뀌는 것은 없었고, 함께 있으면서도 춥다는 생각이 들었고, 사람들은 지쳐보였다. 나는 모든 것이 궁금하고, 묻고 싶었지만 사람들은 그 궁금함에 지쳐있는 것 같았다. 서로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끊임없이 말하고 있었지만 침묵 속에 들어와 있는 거 같았다. 새 공간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나는 무엇인가를 한다는 즐거움보다는 피로감을 느꼈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계속 이곳에 있을 수 있을까.사람과 부대끼는 것을 즐기고 있다고 생각했던 이 공간에 대해 내가 잘못 생각했던 것일까.

 

 

그런 순간에 보게 된 “이행과 자기해방의 결속체들-대안인문학운동의 곤경과 실험들”은 내가 아프꼼에 대해 조금 알게 되는 기회였다. 하나의 공간에 들어가기 위해 무턱대고 덤비면 버틸 수가 없어 결국 이방인인 채로 남을 수밖에 없고, 그런 내가 있는 공간은 나에게 오지 못하고 분열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이 공간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어렴풋이 깨달았고, 왜 팀원들이 피곤해하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아프꼼이라는 공간에 어떻게 있어야 할까에 대해 다시 고민할 수 있었다. 계속하지 않으면 지지부진해질 거라는 말이 이제야 피부에 와 닿았다. 그리고 나는 아직 계속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아직 래인커머가 아니었다.

 

 

올해의 아프꼼은 이제 막 들어온 나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아마 아프꼼이 생긴 후 가장 많이 변화 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을 한다. 절대 무너지지도, 모습을 바꾸지도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기둥 권명아 교수님께서 잠시 자리를 비우게 되시면서, 그 기둥 아래에 있던 아프꼼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제 기둥의 일을 아프꼼의 팀원들이 해야 한다. 그저 무너지지 않게 받치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둥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아프꼼 팀원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힘든 일이라는 것을 이번 행사를 통해 알게 되었고, 팀원 모두가 같은 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지만 ‘애씀’의 방향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지금의 아프꼼에서 만약 누군가가 나가고, 새로운 사람이 들어온다면 나와 같은 고민을 하게 되고 불안을 느끼다가 무너지게 될 것만 같다. 구성원은 적고 할 일은 넘쳐나지만, 우리가 앞으로 할 행동들에 대해 더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힘을 냈으면 한다.

 

 

대학은 계속 우리더러 나가라고 하고, 우리가 하는 일은 아무도 안하는 일이라며 놀림 받는다. 이런 공간에서 그들에게 우리는 이방인이다. 우리를 내쫓기 위해 계속 애를 쓴다. 이방인인 우리가 더 오래 머물기 위해서는 아마 지금보다 더 애를 써야하고, 더 지쳐야 한다는 생각을 글을 읽으면서 느꼈다. 이런 지속 불가능의 현실 속에서 우리가 우리의 공간을 만들고 그 속에서 계속 이방인이 되지 않고 생존하려면, 더 나아가 실험과 발명을 계속 할 수 있으려면 우리가 조금 더 뭉쳐야 하지 않을까. 이방인의 자기해방은 누군가와 함께하는 것으로 가능해지는 것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 뭉치는 것이 오히려 새로운 실험이 되고, 발명의 과정이 될 수 있지는 않을까.

 

 

 

 

<이행과 자기해방의 결속체들>

 

 

 

연구모임 아프꼼이 어느덧 8년차를 맞이합니다.

 

그 시간은 '공동체'라는 불가능한 이름을 향하여, '공동-공통'이 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묻고 실험해온 시간들이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 불가능한 길을 걸어온 여느 '공동체'라면 이심전심으로 알게 되듯이, 그 시간들은 공동체 안의 동료들에게도 바깥의 벗들에게도 서로 다른 시간, 다른 기억, 다른 온도로 새겨집니다. 라쇼몽처럼 모두가 다른 기억과 다른 이야기로 살아냈던 이 공동체는 그렇다면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무엇을 향해서, 무엇을 보고서, 무엇을 만들어낸 것일까.

 

결국은 하나의 덩어리로 모아지지 않는, 그 색색깔의 만화경의 환상이 바로 공동체라면,

이번에는 그 환상의 서로 다름을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그렇게 겪어내었던 다른 시간들을 풀어놓는 것이 단지 아프꼼만의 시간을 추억하고자 함이 아니라,

공동체를 그려내는 사람들이라면 이 온도차를, 낙차를, 다름을, 어떻게 함께 고민할 수 있을지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먼저 래인커머 권명아님의 <이행과 자기해방의 결속체들>로 시작해볼까요.

잡지 <안과밖>에도 실린 이 글은 공동체의 안에서, 그리고 밖에서, 또 지역의 안과 밖에서, 그 결속들이 어떻게 온도차와 낙차를 갖게 되는가-라는 질문인 동시에, 그 차이를 끊임없이 만들어내기도 하는 '애씀'에 대한 마음씀이고 걱정이기도 합니다.

(글은 첨부파일을 열어보시면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다른 래인커머들의 '응답'이 이어집니다.

 

 

이행과 자기해방의 결속체들, 권명아, 안과밖 35호.pdf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