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ign by 김비)




3회: 각혈하는 몸이란 무엇인가

 

 

 

 

윤인로

 

 

 

1) 단편 「지도의 암실」에 나오는 한 대목, 묵시적 끝의 통찰. “태양은제온도에조을닐 것이다 쏘다트릴것이다 사람은딱정벌러지처럼뛸것이다 따뜻할것이다 넘어질것이다 색깜한피조각이뗑그렁소리를내이며 떨어져깨여질것이다 땅우에눌어부틀것이다 내음새가날것이다 구들것이다 사람의피부에검은빗으로 도금을올닐것이다 사람은부듸질 것이다 소리가날것이다/ 사원에서종소리가걸어올것이다 오다가여긔서놀고갈것이다 놀다가가지안이할것이다.”(2: 154) 지도 제작술의 근대를 암흑의 암실로 인지하는 묵시적 힘. 그것은 가시지 않고 보존되는 사원의 종소리, 매회 매번으로 지속되는 신의 조종소리로 번지고 퍼진다. 증식하는 조종소리. 거기에 가브리엘 천사를 가브리엘천사균으로 적었던 이상의 근거와 맥락이 있다. 각혈의 아침중 한 대목을 보자.

 

별이 흔들린다 나의 기억의 순서가 흔들리듯/ 어릴 적 사진에서 스스로 병()을 진단한다// 가브리엘천사균(天使菌) (내가 가장 불세출의 그리스도라 치고)/ 이 살균제(殺菌劑)는 마침내 폐결핵의 혈담(血痰)이었다(?)(1: 208)

 

이상은 야만적인 법률을 침식하는 광부를 세균이라고 표현했고, 속이는 법의 저울을 달아 재는 신의 저울은 대천사 가브리엘의 것이었다. 가브리엘이 광부/세균과 하나의 계열체를 이루는 것은 법에 대한 기소과정 속에서이며, 그런 사정을 응축한 말이 가브리엘천사균이다. 이상에게 균(), 세균이란 무엇인가. 하나의 사상이었다. 다시 말해 하나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였다. 세균학의 창시자 로베르토 코흐가 결핵균을 발견했던 1882년 이래 세균은 병원체(病原體)’였다. 그것은 의학 사상의 패러다임만 바꾼 게 아니라 정치를 인지하고 표현하는 사고의 틀도 바꾸었다. 병든 국가를 치료해야한다는 말, 사회의 암적 존재를 뿌리 뽑아야 한다는 일상의 말에서 드러나는 건, 그 말들이 정치의 문제를 제1원인을 찾는 병원체의 사상에 근거해 사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학적 사상 속에서 국가의 암적 존재는 반드시 있어야만하는 것이 된다. 없으니까 없다고 진단되는 게 아니라 늘 개발되고 발굴되어야만 된다. 병원체라는 의학적 사상은 정치적 데마고기의 힘이다. 이상에게 세균은 병원체가 아니었다. 이상에게 세균은 병을 일으키는 원인이 아니었다. 병의 근본원인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의 정치적 이면을 투시했던 이가 이상이다. 정말 그런가. 그렇다. 어째서 그런가.

 

2) 이상은 결핵균이 사는 장소로서의 자신의 몸을 진단하는 의사들을 곳곳에서 신성의 이름으로 언급한다. “의사믿기를 하는님같이하는 그”(병상이후」, 3: 140), “예언자”(병상이후」, 3: 139), “반왜소형(胖矮小形)의 신()”(오감도 5호」, 1: 90), “하이한천사”(내과」, 1: 156), “()베드로”(각혈의 아침」, 1: 209)가 그런 예들이다. 과학적인/절대적인 의학적 지식을 위임받아 대행하는 의사의 진단과 치료란 그 자체로 신적 권능을 지닌 것이다. 그들의 진단은 병의 근본원인을 찾는 것이었다. 알다시피 원래 하나의 원인을 확정지으려는 사상이야말로 신학형이상학적인 것이다.”[가라타니 고진,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141] ‘의사가 곧 성직자라고 했던 건 계보학의 빛으로 계몽된 근대의 암실을 비추었던 푸코였다. 이상이 자신의 몸을 결핵균의 감염으로 진단하던 의사를 신성의 이름으로 표현했다는 것은, 의사야말로 진단하고 치료할 수 있는 힘의 절대적 주체가 되는 과정을, 그와 동시에 의사 앞에 앉은 이가 진단과 치료의 단순한 대상으로 되는 과정을 문제시했다는 것과 먼 거리에 있지 않다. 이상에게 의사는 사목(司牧)하는 목자였으며, 환자는 의사라는 목자의 보살핌과 계도를 치료와 구원의 아우라 속에서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신자였다. 이상은 의사와 환자의 그런 관계 속에서 의학적 형상-질료 도식으로 된 근대성의 위-(-)를 투시했다. 병의 근본원인을 찾는 의사/목자의 진단과 구원의 과정은 그 병의 원인이라는 것을 그 병의 발생과 등가적인 것으로 구성해 가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원인이 먼저 있어서 병이 발생된 게 아니라, 그 병을 병이라고 진단하고 확정하기 위해 원인은 사후적으로 그 병과 등가적인 것으로 끌어올려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신성한 제1원인을 찾는 병원체의 사상은 세속화된 신으로서의 화폐장치의 발생 및 운동과 상동적이다. 풀어 말해, 등가화될 수 있는 것들이 먼저 있고 그 다음으로 일반적 등가물로서의 화폐가 생긴 게 아니라 일반적 등가물로서의 화폐가 등가화될 수 없는 것들을 등가화될 수 있는 것들로 만들어냄으로써 자신을 확립해간 과정과 병원체의 사상은 유비적이다. 원인과 결과라는 하나의 계열 안에서 등가적인 것으로 될 수 없는 병원체와 병은 의학이라는 신학적 프로파간다에 의해 등가화되는 것이다. 병원체라는 사상은 의학 안에서 이뤄지는 화폐적 등가화의 과정이다. 그 의학적/화폐적 전도와 전치를, 그 유혈적 과정의 재생산을 보증하는 병원체의 사상을, 세균의 이데올로기를, -계에 봉헌하는 이데올로기로서의 세균을 살균(殺菌)’하는 일. 줄여 말해 세균이라는 제1을 박멸시키는 일. ‘가브리엘천사균이라는 살균제가 그 일을 행한다.

 

3) 이상에게 병이란 통계화(census) 가능한 상태로서의 국세(國勢)를 증진시키기 위한 내치의 중심요소로서의 의료시스템에 의해 진단분류되는 것이었다. 병은 어떤 분류표, 기호론적 체계에 의해 존재하며, 그런 한에서 병은 원래 시작부터가 의미를 부여하는 것”[가라타니 고진,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143쪽]이었다. 중앙집중화된 의료체계에 의해 분류된 병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 이미 언제나 절대적으로 받들어야할 국민건강이라는 의학적/정치적/신학적 의미의 카테고리 안에 들어있다. 자신의 병에 대한 의사의 진단행위에서 이상은 그렇게 분류된 의미의 위압성을 인지했다. 이상이 스스로 병을 진단한다.’라고 적었던 까닭이 거기에 있다. 히스테리의 몸이 의미의 질서에 한 조각, 한 지대의 시니피앙스-결여를 관철시키는 정치적 비판의 몸이었듯, 이상의 자기 진단된 병든 몸 또한 그러하다. 앞서 인용한각혈의 아침」에서의 가브리엘천사균은 각혈한 이상이 자신의 피와 가래에 섞인 폐결핵균을 표현한 것이다. 그 자기 진단은 그 자체로 의학적/정치적 병원체의 사상이 만든 의미의 매트릭스에 하나의 결여와 구멍으로서 발생하는 시니피앙스-결여(a-signifance)이며, 그것의 수행이고, (‘a-’)의 융기이자 기립이다. 그때 이상의 결핵은 국세의 내치에 봉헌하는 의미의 카테고리를 절단하는 병이 된다. 그때 이상의 폐결핵균은 세고 재고 쪼개는 저울로서 임재하는 대천사 가브리엘이 된다. 그렇게 이상의 병은 표준적 분류법을 깨고 그 바깥을 개시하는 신학적/정치적 비판의 의미를 획득하고 구성한다. ‘책임의사로서 스스로를 진단하던 진단 0:1의 소멸과 파국의 그 제로, 그 공백은 이미 좌표 바깥을 향해 있는 의미로서의 병의 한 사례이기도 했다(1회 연재분 참조).

 

4) 앞서 인용한 얼마 안되는 변해에서 문제의 별빛을 채광하던 그 광부, 파국의 파편들을 채집하고 수집하던 그 광부로 돌아오자. 그는 별빛의 광산을 채굴하는 자다. 그의 그 채굴은 폐허는 봄”(1: 200)이라고 말하는 자, 폐허로서의 봄의 도래를 기다리는 자가 수행하는 굴착과 한 계열을 이룬다. “나는 나의 모든 것을 묻어버리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나는 흙을 판다 // 흙속에는 봄의 식자(植字)가 있다// 지상에 봄이 만재(滿載)될 때 내가 묻은 것은 광맥(鑛脈)이 되는 것이다 (…) 봄이 아주 와버렸을 때에는 나는 나의 광굴(鑛窟)의 문을 굳게 닫을까 한다.”(1: 201) ‘을 파서 자신의 모든 것을 묻은 자. 지금 그는 자신의 그 모든 것이 흙속에 있는 폐허로서의 봄의 파편들과 혼재되는 시간 속에 있다. 광부가 별빛을 채광하고 수집하듯, 그는 흩어진 봄의 편린들을 그러모아 재배열함으로써 의미를 현현시키는 식자공이다. 이상은 산촌여정에서 낱글자들로 성경을 제작하고 있는 식자공으로 스스로를 표현한바 있으며, 그런 한에서 봄의 파편들로 구성되는 그 의미란 신성과 결합해 있다. 식자공/광부는 흙 혹은 지상, 이른바 대지의 법과 의미의 질서를 굴착하는 자다. 다시 한 번, 그는 지구를굴착하라”(1: 77)는 정언명령을 따르는 지하생활자였다.

 

5) 이상이라는 광부는 임박한 폐허로서의 봄이 대지에 쉼 없이 누적되고 적재될 때 자신이 굴착한 지하와 거기에 묻은 자신의 모든 것이 빛들로 된 광맥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에 반해 폐허라는 봄, 거듭 도래중인 그 파국의 봄이 이미-벌써 아주 와버린 것이 되었을 때, 다시 말해 그 봄의 임재가 완료완결완수된 사태로 마무리되고 말 때 그는 자신의 그 지하라는 장소, 광굴이 봉쇄되고 말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상에게 봄이란 무엇인가. 매번-매회 도래하는, 항구적으로 임재하는 메시아적인 것이다. 봄을 기다리는 광부는 최후의 종언을 기다리는 사도다. “폐허가된육신을 가진 사도, “갈갈이 찌어진 사도(使徒)”. 풍마우세(風磨雨洗)로 저절로다말라 업서지고”(3: 58) “마멸되는 몸”(1: 112). 이상은 앞서 폐허는 봄이라고 적었다. 그렇게 하나의 계열체가 만들어진다. 폐허=, 폐허=, 폐허===메시아적인 것. 폐허는 이상 자신의 몸이기도 했다. 그 몸이 곧 봄이다. 그 봄/몸이 곧 메시아적인 것이며 제헌적인 것이다. 갈갈이 찢어진 몸, 사도의 몸, 사도적 몸이 법을 기립시키고 재정초하는 장소가 된다. 그렇게 몸이 폐허가 되고, 찢어지고, 다 말라 없어지고, 마멸된다는 것은 사라진다는 것이다. “사라지는 모든 것은 흔적을 남긴다. 이건 () 신의 심판과도 같다. 신은 사라지지만, 그 뒤에 자기의 심판을 남겨둔다.”[장 보드리야르, 사라짐에 대하여, 31쪽] 이상이 말하는 최후의 종언’, 그 신의 심판은 언제 어떻게 도래하는가. 매번의 사라짐을 통해 매회 도래한다. 부과된 법의 지상에서 거듭 사라짐으로써, 다시 말해 관리되는 의미의 대지를 굴착해 만든 지하에서의 생활을 지속하고 보존함으로써 매회 도래하는 게 최후의 종언이다. 얼마 안되는 변해의 마지막 한 대목은 폭열(爆裂)하는 몸으로 끝난다. 그리고 그 몸은 무언가를 분만하는 중이다.

 

그는 아득하였다./ 그의 뇌수는 거의 생식기처럼 흥분하였다. 당장이라도 폭열할 것만 같은 동통(疼痛)이 그의 중축(中軸)을 엄습하였다./ 이것은 무슨 전조인가?/ 그는 조용히 사각진 달의 채광(採鑛)을 주워서, 그리고는 지식과 법률의 창문을 내렸다. 채광은 그를 싣고 빛나고 있었다./ 그의 몇억의 세포의 간극을 통과하는 광선은 그를 붕어와 같이 아름답게 하였다./ 순간, 그는 제풀로 비상하게 잘 제련된 보석을 교묘하게 분만하였던 것이다./ 그는 월광의 파편 위에 쓰러졌다.(3: 158)

 

폭발해서 찢어질듯 쑤시고 욱신거리는 몸. 이상에게 자신의 그런 몸은 어떤 전조(前兆)’로 인지된다. 그 기미 혹은 징후는 파국과 끝을 표현할 때 인유되던 과 그 빛들을 그러모으는 광부의 이미지에 이어진 것이다. 세계의 끝 속에서 지식과 법률에 의해 관리되고 구조화된 의미의 질서는 그 문을 닫는다. 법의 암전, 의미의 폐절. 이상이 말하는 전조가 그와 같다. 별과 달의 빛들에 실려 있는 빛나는 몸, ‘-섬광’(낭시)이 바로 그 전조를 실현한다. 당대의 전시상황을 지시하는 다음과 같은 한 구절, “이군웅할거를보라/ 이전쟁을보라/ 그들의알력의발열(發熱)의한복판”(1: 44)에서 이상은 비밀심문실에 구속된 채로 경찰의 취조를 받고 있는 피의자였다. 그 경찰은 이상에게 말한다. “「물론너는광부이니라/ 참고 남자의근육의단면은흑요석과같이광채나고있었다한다.”(1: 75) 전시의 체제로 도래중인 파국, 임박한 훼멸의 시간들을 캐고 수집하고 있는 광부의 몸은 빛으로 되어있다. 몸의 세세한 모든 곳으로 광선이 통과하고 있는 광부. 그는 빛의 인간이며, 그런 한에서 선에관한각서에 나오는 광속의 인간이다. 그가 지금 분만하고 있는 것, 그것이 보석이다. 분만된 그 보석은 어떤 의미의 계열체를 이루고 있는가. 이 마지막 질문을 위한 또 하나의 분만. “창부가 분만한 사아(死兒)의 피부전면에 문신이 들어 있었다. 나는 그 암호를 해제(解題)하였다. 그 사아의 선조는 옛날에 기관차를 치어서 그 기관차로 하여금 혈액임리, 도망치게 한 당대의 호걸이었다는 말이 기록되어 있었다.(1: 191) 무슨 말인가.

 

6) 세리(稅吏)와 창녀. 그들이 가장 먼저 천상으로 들어가리라고 했던 이는마태복음의 그리스도 예수였다. 이상에게 창녀는 때때로 마리아와 결합됨으로써 성창녀(聖娼女)의 이미지로 드러난다. 그녀는 성스러움과 속악함을 분리하는 척도적 기준을 작동 정지시키는 비식별역으로서의 경계 영역을 개시하고 구성하는 자다. 창녀가 분만한 아이는 분리와 분류의 무화 속에서 신성을 갖는다. 정전 바깥의 복음 중 한 대목은 이렇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아는 자는 창녀의 아들이라 불리게 될 것이다.”(도마복음105) 창녀와 창녀의 아이는 표준적이므로 지배적인 분류표 속에서 고아, 과부, 병자, 이방인만큼이나 핍박받고 내몰리는 자들이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진정한 생명을 봉헌하는 이들을 두고 창녀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그 말씀(logos)은 분류의 기준과 구획의 척도를 전복시킴으로써 분류표의 바깥을, 좌표 바깥을, 다시 말해 분류불가능한 경계의 장소를, 새로운 법과 생명이 정초되는 대지를 설립한다. 창녀의 아들은 그들척도를 들이미는 자들의 눈과 기준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게 되는 새로운 생명기준을 인식한 것이다.”[주원규, 창녀의 아들이라 불리게 될 것이다, http://blog.daum./innovator-bay(2013. 8. 16) 도마복음에 대한 주원규의 강해를 통해 그의 소설들을 예감하게 된다.]

 

7) 이상의 창녀가 분만한 아이는 죽은 아이로 드러나되, 피부 전면에 문신이 새겨진 아이로, 몸 전체가 암호인 아이로 드러난다. 그 암호와 그 암호를 해독하는 는 벨사살의 연회장 뒷벽에 적혀있던 신의 암호 같은 문자와 그걸 해독하는 다니엘에 겹쳐진다. 몸피에 새겨진 그 암호라는 것이 핍박받았던 선조들이 기관차와 싸워 승리했던 자들임을 고지하는 내용이었던 한, 그 암호는 벨사살을 저울에 달고 그 왕국을 쪼갰던 신의 문자와 상관적이다. 무슨 말인가. 선조들과 기관차의 충돌이 문제이다. 알려진 한 대목. “마르크스는 혁명이 세계사의 기관차라고 말했다. 그러나 어쩌면 사정은 그와는 아주 다를지 모른다. 아마 혁명은 이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사람들이 잡아당기는 비상 브레이크일 것이다.”[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관련 노트들」, 356쪽]이상이 말하는 선조들은 혁명이라는 기관차가 견인하는 발전의 역사, 그 직선적 레일을 절단한다. 선조들은 그 기관차의 승객이지만, 비상 브레이크를 잡아당겨 그 기관차의 엔진을 끔으로써 그 기관차의 속도를 거스른다. 비상 브레이크로 제동을 거는 그들 억압받던 선조들. 이는 삶의 진보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주의적인 입장과 파시즘의 공모 및 묵계를 기각하는 맥락에서 제출된 키워드들이다. 날개의 다음 한 문장은 경직된 마르크스주의의 혼미와 혼동과 퇴락을 지적하는 것일 수 있다. “아스피린, 아달린, 아스피린, 아달린, 맑스, 말사스, 마도로스, 아스피린, 아달린.”(2: 286) 더불어 이상은 3인터내슈날당원들한테서 몰매를 맞는 상황 속에서 지구의 재정이면을 엄밀자세히 검산하는 기회를 얻었다.”(1: 190)고 쓴다. 혁명의 기관차 속에서 이상과 이상의 창녀가 분만한 아이와 그 아이의 선조는 진정한 비상사태의 도래로서 함께 발생하는 중이다. 그들의 한 손은 혁명의 기관차가 주재하는 직선적 발전의 체제, 그 돌벽에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고 쓰면서, 동시에 다른 한 손으로는 그 직선의 레짐을 통째로 세고 재고 쪼개는 최후적 저울을 들었다. 저울 든 그들은 매번 매회 창녀의 아이로서 분만되고 있는 자들이다. 그들이 폭력적 질서에 의해 내팽개쳐진 분란과 불화의 , 그리스도의 그 칼을 다시 집어 드는 자들이며, 화평과 조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왔다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자신의 혀로 발화하는 자들이다. 그리스도의 그 작은 칼(小刀)이 거듭 다른 칼들을, 다른 그리스도들을 분만한다. “내동댕이쳐진 小刀는 다시 小刀를 낳고 그 小刀가 또 小刀를 낳고 그 小刀가 또 小刀를 낳고 그 小刀가 또 小刀를 분만하고 그 小刀가 또……”(1: 155) 칼이 칼을 분만한다. 심판이 심판을, 최후가 최후를 분만한다. 그 항구적인 의 분만들 속에서 누리고 구가하는 새로운 생명이 거듭 탄생한다. 이상이 말하는 분만된 보석의 뜻과 의지가 그와 같다.

 

 

 

..............................................................................................................

 

 

윤인로문학평론가하나의 체제가 스스로를 신성한 것으로 고양시키는 과정에 대해그리고 그 과정과 동시적으로 구성되는 주체들의 또 다른 신성한 힘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계간<오늘의문예비평>, 격월간 <말과활>의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此生輪廻: 이상(李箱연구노트

 

 

 

 

  (design by 김비)




4회: 이상이 읽은 것, 이상의 비교론: 요시다 잇스이, 메피스토펠레스, 지하생활자

 

 

윤인로

 

 

1) 2회 연재분에 들어 있던오감도 4호」의 그 회색 수열, 하늘에서 근대를 투시하는 그 까마귀의 시선은 당대 일본의 전위시 잡지 『시와 시론(詩論)의 요시다 잇스이(吉田一穗)를 변용한 것이다. 이상의 문학과 그 잡지 사이의 관련에 주목한 내실 있는 공동연구서(란명 외, 이상(李箱)적 월경과 시의 생성―『시와 시론』수용 및 그 주변』, 역락, 2010)에는 이상의 영향관계에 대한 세세한 연구들이 들어있는데, 아쉽게도 요시다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그 잡지의 창간호부터 시를 썼던 요시다의 까마귀를 기르는 차라투스트라」(시와 시론』 11)는 까마귀의 형상에 임재하는 신성의 이미지를 부여하면서, “()까마귀()”, “()”, “낙원재흥의 고려”[송민호·김예리 옮김, 란명 외, 앞의 책 부록, 467] 같은 시어들로 의미의 포인트를 삼고 있다. 이는 오감(烏瞰)이라는 신의 시선을 근대적/건축적 체제의 으로의 폭력적 형질전환과 결부시키는 오감도 4호」와 맞닿아 있다. 이에 미요시 다쓰지(三好達治)의 시 갈까마귀()(시와 시론』 6)1연 또한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그때 나는 문득 마른 풀 위에 버려진 어떤 한 장의 검은 상의를 발견했다. 나는 또 어디에선가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이형진 옮김, 란명, 앞의 책 부록, 477]. 그 미지의 목소리는 명령한다. 멈춰라, 너의 옷을 벗어라, 벌거벗어라, 그 검은 상의를 주워 입어라, 날아라!, 날아라!, 울어라!……. 까마귀를 입으라고, 까마귀로 비상하라고 명령하는 그 목소리 또한 이상이 말하는 오감의 의미/의지와 상관적이다. 시와 시론』에는 이상의 주요 시어들이 산적해 있다. 거울, 공복, 내과, 뇌수, 나비, 총구, 군화, 앵무, 열풍, , , (), 바둑판 등등. 그러하되 그 시어들은 이상에게선 대부분 철저히 변용되고 있는 것이라서 직접적인 영향관계를 엄밀히 따지는 것은 불필요한 작업이다. 그럼에도 내적 관련의 강도로 보자면 역시 요시다이며, 그의 신약(新約)(시와 시론』 1)은 이상 문학의 중핵과 만나고 있다.

 

2) 요시다의 신약」 1연의 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법정에서는 가발을 쓴 법관이 그들의 하늘의 돌을 가지고, 땅의 아들들의 손에 빌려준 망치와 낫을 깨부수었다. 우리들은 곧장 항소했다.”(위의 부록, 451) 하늘의 돌을 쥐고 신성의 외투를 걸친 법관들의 폭력에 의해 깨부수어지는 땅에서의 혁명(망치와 낫). 속죄를 염원하는 수인(囚人) 이상과 같이(수인이 만든 소정원」) 요시다의 인물들은 감옥에서 새로운 해의 출현을 두고, “미래에 목말랐던 젊고 아름다운 한 개의 태양을 두고, “우리들의 신약의 피다!”(451)라고 고함친다. 그 함성을 따르는 마지막 연은 이렇다. “우리들이 올라왔던 곳에 단두대가 있다. 공포에 매혹되었던 자빈코프가, 라 그리마·크리스테(ラグリマ·クリステ: 그리스도의 눈물)의 방순(芳醇)함을 알게 된 것 같이, 그 자신의 순수한 생명의 술잔을 기울이길 다하였다. () [논증과 규정의] 관념론을 부정하고 다시 옛 관념에 빠진 특히 스콜라 냄새 풍기는 유물론자는, 시온의 여인과 검을 가지고 혼약한다. 우리들은 먼저 어떤 사람보다도 자기 내심의 법도를 따라, 일체의 관념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하여 자유로운 감성을 가지고 출발하는 것일 테지, 예로 그것이 우리들의 가는 다마스코에의 길, 피에 목마른 불모의 땅이라고 해도, 내가 감성에 꽃피운 사막의 장미를 찾아낼 것이다.”(455) 유물론과 시온의 결합. 불화의 칼, 그 날끝에서 맹서한 약동하는 혼약. 그렇게 비약(Elan)하는 순수한 생명이 구제를 위한 다마스쿠스에의 길을, 그 불모의 사막을 순례한다. 앞질러 말하건대, 그 순례의 길이 바로 불세출의 그리스도로서 이상이 걸어가는 길이다.

 

3) 요시다에 이어, 이상이 읽었던 파우스트에 대해 내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이상의 다음 문장에서 시작하자. “건망이여, 영원한망각은망각을모두구()한다.”(1: 64) 지금부턴 이 문장이 들어 있는 파국의 설계도 다섯 번째 장을 들여다 볼 차례이다. ‘영원한 망각은 이름의 분류법을, 할당된 죄의 연관을 거듭 지운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한정되고 구속된, 대패질되고 못질된, 은폐되고 망각된 존재는 구원된다. 이상에게 이름의 망각은 심판하는 신의 도래이자 그 세속화이다. 그러므로 건망이여라는 부름은 폐지함과 동시에 구원하는 신의 소명과 사명에 대한 응대이다. ‘건망이여신이여와 먼 거리에 있지 않다. 그 부름, 그 소명과 함께 숫자의COMBINATION을망각하였던약간소량의뇌수”(1: 48)가 생기를 띤 채로 기립한다. 그런 한에서 숫자의 콤비내이션, 곧 사목적 벡터의 조합을 폭력적으로 삭제하고 송두리째 망각해버리는 인문적 뇌수의 회생과 함께 신의 폭력, 그 최후적 심판의 날은 매번 도래하는 중이다. 그 날을 두고 이상은 속도를 조절하는 날이라고 쓴다. “속도를조절하는날사람은나를모은다, 무수한나는말하지아니한다, 무수한과거를경청하는현재를과거로하는것은불원간이다, 자꾸만반복되는과거, 무수한과거를경청하는무수한과거, 현재는오직과거만을인쇄하고과거는현재와일치하는것은그것들의반복의경우에있어서도구별될수없는것이다.”(1: 64) 무슨 뜻인가.

 

4) 속도를 조절하는 날, 자기 구성적 속도를 통해 좌표의 숫자를 지워버리는 바로 그 날, ‘를 모으는 사람은 누구이고, 그 사람이 모으는 나는 누구인가. 이상이 말하는 그 사람은 좌표의 붕괴에 공포를 느끼는 사람이었고, 나는 저 ()렌즈를 통과한 방사의 에너지들로 좌표를 붕괴시키는 광선이었다. 지금 좌표의 붕괴, 실재의 개시를 두려워했던 그 사람은 나/광선이라는 파국의 힘을 맞이하고 상봉하는 중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사람은광선보다도빠르게달아나라.”는 이상의 또 하나의 정언명령을 수행한다. 그때 그들에겐 미래로달아나는것은과거로달아나는것”(1: 63)이었다. 도주하는 속도의 현재 속에서 미래와 과거는 둘이 아니라 하나로 합수된다다시 한 번 크레인에 대해 말해야 한다. 과거에 써진 유서와 미래에 써질 유서를 둘이 아니라 하나로 인지했던 건 크레인을 점거중인 김진숙이었다. 그 현장의 고통, 그 현재의 고통 속으로 과거와 미래를 합수중인 김진숙의 점거는 이상이 말하는 도주와 먼 거리에 있질 않다. 현실이 텍스트를 이끈다. 모든 텍스트가 현실보다 덜 긴급한 건 아니지만, 모든 현실은 텍스트보다 조금 더 긴급하다. 이에 대해선 졸고, 「파루시아의 역사유물론: 크레인 위의 삶을 위하여를 참조http://blog.aladin.co.kr/rororo/5188326 속도를 조절하는 날, ‘무수한 과거현재가 구별될 수 없이 일치하게 된다는 건 무슨 뜻인가. 이에 답하기 위해 다음 한 대목을 더 읽자. “파우스트를즐기거라, 메퓌스트는나에게있는것도아니고나이다.”(1: 63) 나는 누구인가. 나는 악령 메피스토펠레스이다. 이상은 악령나갈문이없다.”(1: 218)라고 썼고, 그런 그를 세속에 반항하는 한 악령이라고 지칭했던 건 이상의 죽음에 맞서 그를 추억하던 김기림이었다. 이 변주되고 있는 파우스트』의 한 장면을 보자. 파우스트의 변심을 놓고 주님과 내기를 하는 메피스토펠레스, 그와 같은 악령들을 단 한 번도 미워한 적이 없다고 말하는 주님. 어째서 그럴 수 있었는가. 파우스트를 꾀기 위해 만났던 그 첫날,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언제나 악을 원하면서도,/ 언제나 선을 창조하는 힘의 일부분이지요./ () 나는 항상 부정(否定)하는 정령이외다!/ 그것도 당연한 일인즉, 생성하는 일체의 것은/ 필히 소멸하게 마련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아무것도 생성하지 않는 편이 더 낫다는 겁니다./ 그래서 당신네들이 죄라느니, 파괴라느니,/ 간단히 말해서 악()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이/ 내 본래의 특성이랍니다.”[J. W. 괴테, 『파우스트, 이인웅 옮김, 문학동네, 2006, 41.] 메피스토펠레스는 항구적인 부정의 정령이다. 그는 생성을 소멸로 견인하는 필연의 법으로서, 불모와 절멸을 인입시키는 죄, 붕괴, 악을 수행한다. 그럼에도, 아니 그렇게 때문에 신은 그 악령을 내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은 쉽게 느슨해지고 무조건 휴식하려고만 하는 인간들을 각성시키려 했고, 그런 신의 의지를 받들어 대행하는 자가 메피스토펠레스였기 때문이다. 사도 메피스토펠레스. 그러므로 중요한 건 악령의 의지가 아니라 신의 의지였다. 악령은 신의 악역이었다. 그 악령은 신이라는 정(), 이미 합()인 정으로 온통 수렴되는 반()이다. “영원히 창조한다는 게 대체 무슨 소용인가!/ 창조된 모든 것은 무() 속으로 끌려들어가게 마련이다!”[J. W. 괴테, 『파우스트, 366라는 악령의 말은 이미 언제나 신의 주권적 의지 속에서 발화중인 말이며, 그런 한에서 신의 말의 대언(代言)이다. 이상이 말하는 방사된 나/광선은 그렇게 붕괴와 파국이라는 악령 메피스토펠레스의 일을, 사도의 임무를 행하는 중이다.

 

5) 그렇게 ()렌즈를 통과한 악령 메피스토펠레스가 바로 무수한 나이다. 그들 수없는 나/악령은 말하지 않고 침묵한다. 그 침묵이 악령의 것인 한, 침묵은 신성의 일이다. 침묵하는 악령들은 축적이라는 목적의 구조 안에서 불-(Un-Zeit)에 발생함으로써 그 목적의 흐름을 중절(中絶)시키고, 목적에 의해 합성되고 편성된 사람과 사물에 성스러운 무효용성’(M. 피카르트)을 선물한다. 무목적적인 침묵, 그것은 목적을 산산이 흩어버리려는 신의 심판에의 의지를 관철시킨다. 그렇게 좌표의 노모스를 내리치는 신의 파국의 도래 속에서 좌표의 보존을 위해 통합되고 단일화된 과거는 무수한 과거로 되고, 무수한 과거의 사건들은 서로의 대화를 경청하며, 현재는 그 경청의 상황과 만남으로써, 다시 말해 과거의 유일무이성과 특유함을 보존함으로써 과거와 하나로 합수한다. 그 합수의 상황이 최후의 날, 속도를 조절하는 날의 사건이다. 그 날을 발생시키는 자, 그가 바로 이상이 스스로를 두고 말했던 래도(來到)할 나이다.

 

6) 이상은 「차생윤회」를 비롯한 몇 군데에서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그 둘의 관계에 대해서는 김윤식의 진단이 앞서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2×2=4의 출입구를 향해 질주할 때 거꾸로 질주하는 한 아이가 이상이다. 공포에 질려 질주하기는 모두 마찬가지지만 그 방향은 서로 역방이었다. 이 점에서 이상 문학은 도스토예프스키, 사도 바울의 계보로 이어졌다.”[김윤식, 이상 문학과 지방성 극복의 과제세계사적 시선 속에서 바라보기」, 권영민 편, 『이상문학연구 60년』, 문학사상사, 1998, 47. 바울과의 관련에 대해서는 다음 연재로 넘기도록 하겠다.] 도스토예프스키와 이상은 근대적 속도, 이른바 질주정의 근대적 건축체제에 소멸과 파국의 제로()를 대치시킨다는 점에서 서로 연합한다(분량 때문에 여기 세세히 언급할 수 없음을 양해해 주셨으면 좋겠다). 이상은 「8씨의 출발」지구를 굴착하라”, “생리작용이 가져오는 상식을 유기하라같은 정언명령들로 김기림의 매개를 통해 알게된 마리네티/무솔리니의 질주정을 비판한다. 질주정, 이른바 속도의 통치는 속도의 미학화와 한 몸이다. 마리네티-무솔리니는 조각가-통치자이며, 그 두 쌍은 형상-질료의 짝과 동시적이며 등질적이다. 대중을 아끼고 사랑하면서 동시에 대중의 우매함과 미결정성을 혐오하고 매도하는 어떤 도착 속에 그들의 절대적 속도가 들어있다. 그런 도착적 속도 위에서 마리네티는 대중이라는 재료를 조각하며, 그 속도의 도착성 속에서 무솔리니는 대중을 이른바 갈채의 도가니로 휘몰아간다. 질주정이라는 신성의 공동정부의 수반들인 마리네티와 무솔리니는 형상-질료라는 착취적 도식을 깨는 자가 아니라 그 도식을 깨기 위한 작업복을 걸치고는 그 도식을 완성시키는 자들이며, 그런 한에서 그들은 그 도식의 적자(嫡子)이자 샴쌍둥이였다. ‘지구를 굴착하라는 정언명령은 그들 절대적 신성의 수반들을, 돌려 말해 질주하는 속도의 적그리스도들을 살해하라는 뜻이자 힘이었다. 그것은 도스토예프스키적이다. 지구를 굴착함으로써 시방 지하의 세계를 개창하고 있는 자, 이른바 파국의 지하생활자. 그는 분류표의 세계 안에 파괴와 붕괴의 게발트로, 방해의 바리케이트로 틈입하면서 어떤 이익을 발생시키는 중이다. “이 이익의 특징은 일체의 분류를 파괴하고, 인류애를 내세우는 자들이 인류의 행복을 위해 설정한 체계를 송두리째 때려 부수는 데 있다. 요컨대 이 이익은 세상의 모든 것을 방해하는 것이다.”[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하생활자의 수기』, 이동현 옮김, 문예출판사, 1998, 33쪽] 무슨 말인가.

 

7) 지하생활자는 상식과 과학이 가르쳐주면 인간은 그것을 반드시 해득하게 된다고 확신하는 자들을 조롱한다. 그런 확신은 인간의 자유의지, ‘자유로운 의욕을 단순한 질료로 치부함으로써 인간을 피아노의 건반이나 휴대용 오르간의 핀같은 것으로 격하한다는 것이다. Z백호가 가르치는 비상의 기예가 일방적으로 해득되어선 안 되는 것이라고 말했던 이상은 악기의 건반이나 핀이기를 거절하는 지하생활자와 한솥밥을 먹는다. 그들은 그렇게 서로 동거하면서 공동의 이익을 추구한다. 자유로운 의욕에 뒤따르는 이익. 다시 말해, 축적이라는 목적에 의해 분류된 좌표의 바깥을 발생시키는 힘에의 의욕이 생산하는 이익. 그 이익이 좌표화된 삶 속에서, 이른바 이름()의 분류 속에서, 환속화한 신의 방조와 묵인 속에서 분리와 분할로 재생산되고 합리적으로 관리되고 있는 숫자의 바둑판을 탄핵한다. 그 좌표-바깥으로의 힘을 향한 지하생활자의 의욕과 의지가 일체의 분류법을 작동 정지시킨다. 도스토예프스키가 평생을 앓았던 간질(epilepsy)이 일상의 정상성이 절단되는 시간의 발생이었던 것처럼, 분류법 일반을 폐절시키는 분류불가능한 힘에의 의지가 이데올로기로서의 인류애의 이름으로 설계되고 있는 정상적 이익의 생산을 저지하고 중지(picnolepsy)시킨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총파업, 지하생활자의 무위(無爲)”[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하생활자의 수기』, 28쪽]. 그 사보타지 속에서 분류불가능한/예외적 이익이 재생산되고 향유된다. 그 사보타지의 장소, 주이상스의 자리를 두고 이상은 엘리스의 나라라고 적었다. 거기서 통상의 법은 끝난다. “아리스나라가튼 불가사의한나라에제출된외교문서에 우리들이가지고잇는법률을적용하려고하는 것은 도로(徒勞)요 무효(無效)인줄압니다.”(3: 39)

 

8) 지하생활자는 자신의 좌표-바깥에의 의지와 의욕을 두고 이성도 비근한 생리작용도 모두 포함하는 인간의 전체생활의 발현인 것이다.”[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하생활자의 수기』, 40쪽]라고 적었다. 이성과 몸의 위계적 이분법을 거절하고 있는 이 문장은 즉각 「8씨의 출발」의 한 문장과 맞닿는다. ‘지구를 굴착하라와 동시적인 또 하나의 정언명령 생리작용이 가져오는 상식을 유기하라가 그것이다. 이는 먹고 자고 싸는 몸의 작용을 동물의 영역이자 이성의 빛이 뚫고 들어가지 못하는 암흑의 영역이라고 격하시킨 분류법의 지배적 통념과 상식을 내다버리라는 뜻이다. 함께 내다버리면서 지하생활자는 자신의 동시대인들을 향해 마땅히 정신적인 면에서 무성격적 존재여야 한다.”[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하생활자의 수기, 8라는 당위를 제출한다. 무성격적 존재, 또는 무성(無性, nihil-ism)의 존재. 그것은 일체의 분류법과 적대하는 지하생활자들의 파괴적 성격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무성격적이란 어떤 상태인가. 성격을 특정하거나 고정할 수 없는 상태이다. 성격을 특정할 수 있다는 건 성격을 분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분류된 성격이란 계산가능성 위에서 규격화한 성태성질이다. 무성격적이란 함부로 좍좍 그어지고 있는 분리선들, 구획들, 돌벽들에 대한 폭력적 망각의 지속이며, 그런 한에서 무성격적 존재란 분류법의 영토 안에 무(nihil)의 치외법권으로, 멸형의 공백(zero)으로 설립되고 기립하는 중이다. 무성격적 존재는 무성(니힐), 공백(영점), 멸형(파국)의 힘을 관철시키는 자다. 분류법에 따라 생산되지 않는 무성은 자기원인적이므로 어떤 절대이다(다시, “절대에모일것”). 절대적 무성은 신성의 한 조건이자 양태이다. 무성격적 지하생활자들의 사보타지, 무위의 힘은 무성의 한 조건이자 무성의 한 표출이었다.

 

9) 재갈물린 지하생활자가 기다리는 그 날, 물린 재갈을 풀고 둑이 터지고 홍수가 난 듯 말할 수 있게 되는 그 날, 그럼으로써 새로운 로고스/노모스를 개창하는 그 날, 다시 말해 지하생활자들이 세상에 뛰쳐나오는 [그]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하생활자의 수기, 54 비로소 소멸하게 되는 것은 이론도덕이다. 바로 그 날, “인간 자신의 이익의 체계로 온 인류를 갱생시키려는 이론인간에겐 무언가 도덕적인 훌륭한 의욕이 필요하다는 현인들의 확신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하생활자의 수기, 37에 파국의 조종이 울린다. 이론에 의해 보증되는 인간의 이익구조가 인류의 갱생이라는 이름으로 수행하는 그 어떤 분류법에도 귀속되지 않는 의지. 지배의 현자들/설계자들이 만든 도덕률로부터, 곧 마음을 죄의 생산공장으로 만드는 집단적 도덕률로부터 사람들 스스로를 폭력적으로 떼어내고 성별(聖別)시키는 독자적이고 독창적인 의욕. 줄여 말해 분류불가능한 무성격/무성에의 의지. 그 의지와 접촉하는 이상의 한 문장은 다음과 같다. “나의 내부로 향해서 도덕의 기념비가 무너지면서 쓰러져 버렸다. 중상. 세상은 착오를 전한다.”(1: 191) 착오의 사회를 굴착하면서 밝아지는 아침하늘天亮을 기다리는천량이올때까지”(1: 61) 기다리고 있는이상 곁의 도스토예프스키 곁의 니체 곁의 서광. 이 책에서 사람들은 지하에서 작업하고 있는 한 사람을 보게 될 것이다. 그는 뚫고 들어가고, 파내며, 밑을 파고들어 뒤집어엎는 사람이다. 그렇게 깊은 곳에서 행해지는 일을 보는 안목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가 얼마나 서서히, 신중하게, 부드럽지만 가차 없이 전진하는지 보게 될 것이다.”프리드리히 니체, 아침놀, 박찬국 옮김, 책세상, 2004, 9. 지하에서 수행되는 일들을 축적에 봉헌하는 이론과 도덕의 관점으로 환원하지 않는 것. ‘비판으로서의 비평의 하한선 혹은 마지노선이 거기에 있다.

 

 

 

 

 

 

..............................................................................................................

 

 

윤인로문학평론가하나의 체제가 스스로를 신성한 것으로 고양시키는 과정에 대해그리고 그 과정과 동시적으로 구성되는 주체들의 또 다른 신성한 힘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계간<오늘의문예비평>, 격월간 <말과활>의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즐거움과 뜨거움 주고받기

 

 


최혁규(문화연대

 

 

 

 국정원 선거 개입 규탄,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철도 민영화 반대 등 현 정권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연일 집회와 시위가 이어지고 각계각층에서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정권은 귀를 막아 우리의 의견을 묵살하고 우리의 움직임을 불법행위로 규정하며 경찰을 동원해 목소리를 틀어막으려 한다. 심지어 청년들이 안녕들하십니까라고 쓰며 서로의 안부에 관심을 두는 행위마저 비난하고 제지하고 있다. 여전히 권력을 잡은 자들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들을 자기 생각대로 왜곡해버리거나 그냥 무시하고 자기 생각대로 밀고 나간다. 공감의 능력 자체가 퇴화해버린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런 시국에 각 문제와 연대하며 자신의 투쟁을 묵묵히 이어나가는 여러 투쟁장들이 있다. 콜트콜텍 투쟁장은 그중에 하나고, 나는 문화연대 활동을 통해 콜트콜텍 기타노동자들의 투쟁에 함께하고 있다. 콜트 기타의 부당한 정리해고와 위장폐업에 맞서 싸운 콜트콜텍 기타노동자들의 투쟁은 지난 124일로 2500일을 넘겼다. 잘 알려진대로 한국 사회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장기투쟁 장이다. 개인적으로 작년부터 이들의 투쟁을 가까이서 봐왔는데, 밴드 결성, 시 낭독, 기타 만들기 워크샵, 연극 활동 등을 통해 문화적 주체로서 투쟁을 지속하고 있는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벅찼다. 또한, 투쟁에 함께하고 있는 여러 인권활동가와 문화활동가들 그리고 문화예술인들을 보며 가슴이 뜨거워졌다. 우리가 문화라고 부르는 것이 누군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손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최근 연극 <구일만 햄릿>과 콘서트 <기타 레전드, 기타노동자를 만나다>가 있었다. 연극 <구일만 햄릿>은 막무가내종합예술집단 진동젤리의 각색 및 연출로 기타노동자들 네 명과 문화연대 활동가 최미경이 세익스피어의 <햄릿>을 연기했다. 전문 배우들의 연기가 아니므로 일반적인 의미에서 연극적 완성도는 떨어지지만, 세익스피어의 작품이 담고 있는 죽느냐 사느냐라는 실존의 문제를 기타노동자들 당사자들이 콜트콜텍 투쟁의 맥락에서 소화하고 있는 이 연극은 말 그대로 하나의 의미 있는 작품이다. 또한 <기타 레전드, 기타노동자를 만나다>는 지난 111일 콜트콜텍의 박영호 사장이 만든 콜트문화재단의 주최로 열린 ‘G6 콘서트에서부터 시작한다. 이 콘서트에 참여했던 뮤지션 신대철은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부당해고한 곳에서 주최한 콘서트인 줄 몰랐다며 기타노동자들에게 사과의 메세지를 전달했고 기타노동자들의 투쟁에 꼭 함께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이 약속을 지킨 행사가 게이트플라워즈, 한상원, 신대철, 최이철이 참여한 <기타 레전드, 기타노동자를 만나다> 콘서트다. 기타 레전드들의 연주엔 기타를 연주하고 그들의 손길만이 아니라 기타를 만드는 노동자들의 손길이 함께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공연이었다. 연극 <구일만 햄릿><기타 레전드, 기타를 만나다> 콘서트는 기타노동자 자신들이 투쟁이면서도 함께 하는 많은 사람들이 연대한 즐거운 투쟁이었다. 함께 하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열기가 느껴지는 자리였다.

 내년 110()콜텍 기타 노동자의 정리해고에 대한 파기환송심 선고가 진행될 예정이다. 그래서 연말까지 릴레이 시위를 하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나를 포함한 3명의 활동가가 서초구에 있는 서울고등법원에 앞에서 재판부의 올바른 판결을 촉구하는 일인시위를 했다. 시위를 끝내고 돌아가려는데 어떤 분위기 지나가면서 쌍화탕 몇 병을 사서 건네주고 가셨다. 괜스레 마음이 뭉클해졌다. 손에 쥐고 있는 것은 작은 병 하나였지만 그 사람의 온기가 전달되고 있었다. 문득 나는 콜트콜텍 투쟁에 함께 하며 온기를 전달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과 함께 오히려 기타 연주, 시 낭독, 연극 등을 통해 문화적 주체로 거듭나고 있는 콜트콜텍 노동자들을 보며 내가 온기를 전달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대하고 함께한다는 것은 이렇게 즐거움과 뜨거움을 주고받는 것 아닐까?

 

 

 

**************************************

 

최혁규
문화연대
문화사회연구소 / 문화정책센터
(121-802) 서울 마포구 공덕동 120-10 백광빌딩 3층
Tel) 02-745-1603/ Fax. 02-737-3837
http://www.culturalaction.org/xe/

 

: 문화의 자리에서 정치적인 것을 꿈꿉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