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zzang11

 

 

 

웰슬리의 심포중 한 패널은 리사 짐머만 선생이 기획한 <affect>에 관한 발표였습니다.

앞서 말한 튀빙겐 대학의 박사과정생 역시 이 패널에서 오끼나와인의 전쟁 기억과 어펙트에 대해 발표했습니다.

 

또한명의 흥미로운 발표는, 중국과 일본 문학 전공자이신 선생님의 티벳과 타이완 문학에서 affect/affectless에 대한 발표였습니다. 매우 인상적인 발표였습니다. 발표자 선생님은 아주 평화롭고, 다정하달까....그런 매너로 발표를 진행했습니다.

 

아주 인상적인 발표였으나, 저는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습니다. 그분 발표의 어떤 이면에서 affect는 무언가, 티벳과 타이완이 서구화되기 이전, 원래, 타이완과 티벳에 있던 <그 무언가>와 등가를 이루는 듯한 느낌. 반면 지적인 것은 서구적인 것, 외부에서 들어온 것, 그리고 affectless한 것으로 양분화되는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서구에 의한 식민화로 상실한 그 무엇과, 서구적 지식 세계의 이성우위의 사고에 의해, 가치가 절하된 affect의 위상이 겹쳐지면서, 이런 인상을 주게 된 것이지요. 이는 정념이나 정동에 관한 연구가 빠지기 쉬운 어려운 점이기도 하구요.

 

아감벤은 정념을 게니우스라는 차원에서 논의하기도 하는데. 그는 개별자에게 게니우스와 자아라는 것(서구적 개념으로서)은 마치 세익스피어의 {태풍}에서의 에어리얼과 프로스페로의 관계와 같다고 말합니다. 매우 흥미로운 논의이고, 정념에 관한 연구에도 많은 시사점을 주지만, 만일 이 비유가 서구와 식민지 사이에 대비될 때, 식민지는 <서양>이 잃어버린 <영적인 세계/정념/어팩트/:게니우스>의 선을 따라, 결국 다시 식민화되어 버릴 수 있으니까요. 혹시나 무례한 질문이 되지 않을까, 실례를 무릅쓰고 질문했을 때, 무언가 그 발표자 선생님의 예의 그 평정이 깨어지는 느낌이랄까....아, 아무래도 하지 말아야 할 질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왜냐면, 이러한 질문이 혹시라도, 아시안 스터디즈의 <원주민>인 동양인 학자가 서양인 학자인 <이방인>에게 던지는 주도권 홈타운의 주민의 발언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터이기 때문입니다.

 

뭐냐면, 아마도 그 발표의 요지 뿐 아니라, 발표자 선생님의 포지션은 암암리에 <티벳이나 타이완>에 대한 애착과 동경에 의해 이뤄진 것, 즉 <티벳과 타이완>이라는 "학문의 고향"에 대한 애착을 통해 구성된, 그래서 서구적인 '분열적' 정신과 달리 매우 평온하고, "다정한" 그런 매너를 갖출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 선생님은 심포에 참여한 누구보다, 제도적인 학자같은 권위주의적 태도나 형식주의적 매너와는 아주 거리가 먼, 정말 어펙트한 태도를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비록, 제 입장에서는 그 발표를 들으며 내내, 토마스 울프(? 기억이 가물)의 소설 제목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라는 구절이 자꾸 떠올랐지만, 그런 <고향>은 누구에게나 애착의 대상으로서, 그리고 이를 통한 안정감과 평정심의 원천으로서 필요하다 생각도 듭니다.

그러니까, 흥미로운 것은 이 드넓은 세상에서도, 결국 학자들이던 사람들이던, 한편에서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누군가는 결국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그런 두 선택지 뿐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궤적이 그렇게 간단한 것만도 아니라는 생각도 말이죠. 그리고, 그 발표장에서의 포지션과 고향과 제도와 매너와에 대한 생각들은 제 궤적, 혹은 포지션에 대한 생각으로도 자연스럽게 이어졌습니다. 짧지 않은 시간, 부산에서 저 나름으로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일들을 해왔다고 생각하지만,여전히, 저는 <왜 부산에서 일을 하지 않냐?>는 질문을, 팀 내부에서조차 듣고 있습니다. <부산에서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라는 화두는 제가 부산에 도착한 그날부터 지금까지 벗어날 수 없는 삶의 화두이고,

과연, 나는 <여전히, 이방인인것일까>라는 자문은 제 삶의 불안과, 외로움의 또하나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내 안의 이런 질문과는 또다르게, 외부로부터, 아니 <부산사람들>로부터 전해지는 <왜 부산에서 일을 하지 않느냐?>, <왜 부산 사람들과 만나지 않느냐?>는 질문은, 제게 어떤 폭력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웰슬리로 떠나기 전의 얼마간도 이런 질문과 분열에 시달렸던 날들이기도 했습니다.

아직 이런 분열이 가시지는 않았으나, 길고, 긴 비행의 시차 속에, 그 현기증 속에 막연히 떠오른 어떤 대답, 아니, 다른 질문을 돌려드릴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하고 있는 일들, 제가 만난 사람들, 제가 여기(이곳은 과연 어디일까요?) 서 살고 있는 일들, <이것은 왜 부산이 아니란 말입니까?> 이런 반문을 통해 생각해본다면 제가 <부산에서 일을 하지 않는다>거나, <부산 사람들과 일을 하지 않는다>는 질문, 평가, 혹은 요청은 거꾸로, 부산에서 일을 한다, 혹은 부산 사람들과 일을 한다는 것에 대한 어떤 확고한 배타적인 관점의 소산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즉, 제가 자주 듣곤 하는 <부산에서 일을 한다>,<부산 사람들과 일을 한다>는 말의 함의는 달리 생각해보면 부산에 이미 만들어진 제도나, 단체, 부산에서 이미 활동중이고 몫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 그 제도나, 단체, 인적 연계에 '가입'하고, '한 몫'을 할당받아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그래서 많은 <외지인>들이, 이렇게 이미 구성된 제도나, 인적 연계에 할당된 몫을 감당하는 방식이 아닌 다른 행로를 가게 되면 여지없이 <이방인>, <외부인>으로 간주되고, <지워져>버립니다. 그리고 거꾸로, 문제와 책임은 외지인과 이방인의 배타적 태도의 소산으로 간주되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 <이방인>들의 말은 들리지 않으니 말이지요.

 

웰슬리의 한 강의동에서, 질문자인 <동양인 여성학자>인 저와 <서양인 여성 학자인 그녀> 사이에 몫을 둘러싼 위치가 결코 단일 할 수 없었듯이, 또 그 질문들과 대답들 속에서 저와 그분 사이에 몫을 가진 위치에 대한 자기 방어(서구학자로서의 그녀/이때 저는 동양인 학자로서 마치 아시안 스터디즈의 홈타운의 주민으로서의 배타적 권리를 표명하는 것처럼 되어버리죠)와 갖지 못한 위치(아시안 스터디즈를 하는 서구 학자로서의 그녀, 혹은 서구 학계에서 아시안 스터디즈라는 몫없는 자리의 위치/고향이 없는 자로서의 위치)가 복잡하게 전도되고 얽혀있듯이

몫이 없는자와, 몫이 있는 자의 자리라는 것이 과연 그렇게 자명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기에 포지션과 몫의 할당, 권력 관계에 대한 고민이 많은 부분 <분열적 내면>을 형성하는 것이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일이 아닐까요? 이런 이야기 역시, 결국 이방인의 <애증>의 소산 쯤으로 치부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고향의 동지>나 <떠도는 이방인>이 되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는 것일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맞짱뜨는 여자가 된 이래, 이미 <고향>따위는 다 떠나버렸다고 생각했고, <이방인> 국외인으로서의 삶에 대해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생각했으나, 지역의 경계를 넘어서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맞짱뜨는 여자의 '본질'이란 게 있다면, 그것은 결국, <트러블>을 만드는 일(주디스 버틀러의 책에도 비슷한 구절이 있죠). 그러니, 따듯한 고향의 품이나, 고요한 평정심의 세계는 맞짱뜨는 여자의 세계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맞짱의 정념 교실은 여러분에게, 따듯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알려드리지도, 길을 잃은 당신들에게, 따듯한 안식처를 제공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니, 그대, 고향의 따듯한 품은 아비의 몫이니 아비의 너른 품은 언제나 활짝 열려있다는 사실도 잊지 마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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