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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짱의 정념 교실

15일 내부 강좌용 강의록중 일부.

올려드리는 강의팁은, 멤버들이 이론서 읽기나, 발제하기에 다소 어려움을 느끼기에. 기본적으로 텍스트를 독해하고, 이를 토대로 자기 글을 쓰기 위한 기초적 훈련에 도움이 되도록, 만들어본 것입니다. 자기 나름으로 글을 쓰거나, 혹은 일단 듣기에 집중할 사람들은 각자 재량껏 준비하시면 됩니다.

 

<세속화 예찬>은 <호모 사케르>와 쌍을 이루는 것으로 <호모 사케르>가 성스러운 것(신성/희생물)의 역사 철학적, 정치적 기원을 살펴보고 있다면, <세속화 예찬>은 성스러운 것의 세속화를 하나의 상상 가능한 공통적인 것의 구축이라는 점에서 살펴봄. 전자가 묵시록적으로 느껴지는 반면, 후자가 좀더 “흥겨움”을 감지할 수 있다. <역사적 파시즘>에서 “정념 연구‘로의 전환의 맥락도 이런 점과 결부시켜 생각해보고 싶다.

 

1. 게니우스

정념passionne은 우리와 게니우스 사이에 뻗어 있는 줄타기용 줄로, 우리의 곡예하는 삶은 그 위를 걷고 있다.(19)

 

이 장의 논의를 통해서, 개념을 정의하고, 그로부터 새로운 문제틀을 설정하는 방식을 함께 논의해봅시다. 아래 사항을 따라서 각자 노트를 만들어보는 것도 방법입니다.

 

<1> 어원으로부터 게니우스의 함의를 설명하는 방식을 자기 나름으로 재기술해보기.

게니오(낳다), 게네라레(낳다), 게니알리스한 대상으로서 침대(따뜻한 침대), 게네트랴코(생일), 인게니움(터어난 누군가가 생득적으로 갖게 되는 신체적이고 도덕적인 성질의 총합)

 

<2> 이 에세이들에서 아감벤은 어떤 제스처, 관행 등을 토대로 개념의 함의와 현실적 의미, 혹은 신화적 원천과 그 기원은 망각된 채 무의식적으로 수행되는 어떤 의례적 몸짓들의 상관관계를 흥미롭게 묘파한다. 예를 들면 게니우스와 ‘우리’의 삶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이마에 손을 짚는 몸짓”의 예를 들어 설명하는 방식. 이 설명은 무엇을 함의할까?

또 스페키에스적 존재에서 “모든 신분증명서에 사진을 붙이게 되어 있는 이유”.

 

<3> “만일 발제를 하기 위해, 일단 카페라테와 깨끗한 책상, 혹은 물티슈”가 있어야 한다면, 그리고 발제를 위해 이러한 준비물에 몰두한다면, 아마도 당신의 삶은 ‘게니알리스’하다 할 것이다. 이 의미는?

 

<4> 개념의 정의는 <무엇은 ~~~이다>라는 방식을 통해서도 이뤄지지만, <무엇은 ~~~이 아니다>를 통해서도 정의된다. 아감벤은 “게니우스는 ~~이다”라고도 정의하지만, 동시에 “게니우스는 ~~이 아니다”라고 정의하기를 병행한다. 예를 들어

게니우스는 성적 에너지의 인격화가 아니다.(10)

게니우스는 단순히 영성이 아니다.(14)

게니우스와 함께 산다는 것은 비의식의 지대와 항구적으로 관계를 맺으며, 낯선 존재와 내밀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 비의식의 지대는 억압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경험을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이동시키거나 전위시키는 것이 아니다.(14~15)

등. 이런 방식으로 게니우스를 정의하는 문장들을 좀 더 찾아보자. 그리고 각각의 함의를 정리해보자.

 

이런 방식을 토대로, 먼저 각자 메모를 만들어보고,

뒷부분의 글들에 대해서는 자기 나름으로 이런 식의 정리 주제나 정리 방식을 찾아본다. 이어지는 글에 대해서, 제가 제시해드린 방식을 따라서 정리해보는 것도 방법입니다. 

 

 

 

 mazzang11

 

 

 

http://www.thewarak.com/entry/내-마음이-들리세요

http://www.thewarak.com/entry/내-마음이-들리세요

(웬지는 모르나, 페북에는 링크가 되는데. 우리 홈피에서는 없는 글로 나오는군요. 제 페북 링크를 참조바래요.) 아님 와락 들어가서 보실 수 있어요.

페북의 링크들을 보다가. 우리 팀에서도 같이 보고 싶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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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11월 11일] 잘 자요, 당신
입력시간 : 2011.11.10 20:41:31
수정시간 : 2011.11.10 23:5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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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에 반대해 영도조선소 내 크레인 위에서 농성을 벌여온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이 10일 오후 농성을 풀었다. 김 위원과 배우 김여진씨가 기쁨을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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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그가 내려왔다. 309일 만에 땅을 밟았다. 그를 지키려고 올라가 있던 동료 노동자들도 137일 만에 내려왔다. 다행이다. 부디 무사히 내려오라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간절히 빌었던가.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의 35m 고공 크레인에 올라간 것은 지난 1월 6일, 칼바람 부는 캄캄한 새벽이었다. 8년 전 당시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김주익이 장기 농성 끝에 스스로 목을 맨 그곳에 홀로 오르던 심정이 오죽했을까.

계절이 세 번 바뀌었다. 겨울에서 봄, 그리고 여름, 가을. 8일은 입동이었다. 그가 또다시 겨울을 그곳에서 나지 않아도 된다 생각하니 그저 기쁘다. 김주익의 죽음 이후 겨울에도 보일러 한 번 틀지 않고 지냈다는 사람. 내려가면 목욕탕 가서 등 밀고 싶다던 사람. 그 좁은 크레인의 한뎃잠이 편했을 리 없다. 배우 김여진이 트위터로 그에게 띄운 인사를 다시 보내고 싶다. 잘 자요, 당신.

잘 자요, 당신. 이 따뜻한 인사가 생선 가시처럼 목에 걸린다. 그가 크레인에 올라가 있는 동안, 편히 자는 것이 미안했던 마음이 다시 묻는다. 나는, 우리는, 잘 자도 될까. 아직 다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에.

정리해고를 둘러싸고 지난해 연말부터 벌어진 한진중공업 사태는 노사 합의로 일단락됐지만, 해고자 복직 등 약속의 이행 여부는 더 지켜봐야 한다. 한진중공업이 다가 아니다. 쌍용자동차, 유성기업, 삼화고속, 재능교육, 콜트콜텍, 발레오공조…. 해고나 노동 조건을 둘러싼 그들의 투쟁은, 보는 사람에 따라 옳고 그름이나 현실적 타당성을 시비할 수는 있겠지만, 대체로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꿈을 향한 것이다.

자동차 엔진 부품 납품업체인 유성기업 노동자들은 '밤에는 잠 좀 자자', '노동자는 올빼미가 아니다'라고 외친다. 이게 지나친 요구인가. 밤을 꼴딱 새며 일해야 하는 주야 맞교대가 암을 일으킨다는 것은 9일 노동부 장관도 인정한 과학적 사실이다. 하루 20~21시간 노동시간을 18시간으로 줄여 달라는 삼화고속 노동자들의 요구는 기가 막히다 못해 슬프다. 그들은 서울과 인천을 오가는 광역버스 운전기사들이다.

쌍용자동차 사태도 현재진행형이다. 9일, 이 공장 노동자 정모(46)씨가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다. 18번째 죽음이다. 2년 전 2,600여명의 대규모 정리해고 이후 자살 또는 스트레스성 질환으로 이렇게 많이 죽었다. 생활고와 우울증으로 가정이 깨진 예는 허다하고, 아이들은 자살놀이를 하며 논다고 했다. 이들을 위한 심리치료센터 '와락'이 지난달 문을 열었다. 다섯 달 동안 5,600여명이 2억원을 모아 만들었고, 자원봉사자가 600명이 넘는다. 와락센터는 정리해고 이후 연락이 끊어진 채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모르는 노동자 가족들을 걱정하고 있다. 더 이상은 안 된다. 우리는 울고 싶지 않다.

잘 자요, 당신. 이 인사를 바꾸고 싶다. '아무도 잠 들지 말라'고. 관심을 갖고 지켜볼 것. 그리하여 그들을 외롭지 않게 할 것. 스스로 다짐하듯 하고 싶은 새로운 인사다. 남의 일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대륙의 일부이므로. 영도로 간 희망버스와 쌍용자동차 와락센터가 보여 준 사회적 연대와 우정에 박수를 보내며, 크레인에서 내려온 노동자들에게 다시 한 번 인사한다. 잘 자요,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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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짱의 정념 교실: 11월 15일 팀 내부 강좌입니다.

 

7. 스페키에스적 존재

<강의 주제>

아감벤은 스페키에스적인것과 인격적인 것이라는 구별, 혹은 “스페키에스적인 것이 인격적인 것으로 환원되고, 인격적인 것이 실체적인 것으로 환원”되는 현실 구조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통해서 <사랑/질투>, <세속화와 소유> 사이의, <흥겨움(/코나투스)와 폭력>사이의 경계를 탐색한다. 아래 예문들과 약간의 tip을 토대로, <사랑의 불가능성과 질투의 승리>에 대해서 토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스페키에스적 존재는 자기 자신의 소통 가능성만을 소통할 뿐이다. 그러나 이런 소통가능성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분리되며, 하나의 자율적 영역에서 구성된다. 스페키에스적인 것은 스펙터클로 변형된다. 스펙터클은 일반적인 존재의 분리이다. 즉, 사랑의 불가능성과 질투의 승리인 것이다.(88)

 

자신의 욕망을 이미지 없이 누군가에게 전달하는 것은 야만적이다. 자신의 이미지를 자신의 욕망 없이 누군가에게 전달하는 것은 지루하다(자신의 꿈이나 자신의 여행을 자세히 말하는 것처럼). 하지만 이 둘은 모두 쉽게 할 수 있다.

 

다른 한편, 이미지화된 욕망과 욕망된 이미지를 전달하는 것은 훨씬 어려운 과제이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뒤로 미룬다. 욕망이 충족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기 시작할 때까지. 그리고 이처럼 고백되지 않은 욕망이 바로 우리 자신, 즉 「우리가 만든」 지하실의 연원한 죄수라는 점을 이해할 때까지. (80)

스페키에스적 존재의 함의를, 어원에서 시작해서, 존재론적 규정으로 연계시키는 방식

 

어원: 스페키에스(像)

→용법: 거울, 이미지, 유령

→절합articulation(언어학적으로는 하나와 다른 것을 결합/분절, 이론적 함의는

참조) 이미지와 스페키에스를 결합: 이미지는 스페키에스, 즉 가시성이나 나타남을 본질로 하는 존재이다.

→규정/정의: 그 본질이 사람들의 눈에 보이게 되는 그 존재함과 일치한다면, 다시 말해서 그 상과 일치한다면, 그 존재는 스페키에스적이다.

→사랑의 ‘매개’를 통한 스페키에스적 존재의 재규정: 스페키에스는 각 존재가 자기 자신을 욕망하고, 자기 자신의 존재함 속에서 스스로를 보존하고, 자기 자시노가 소통하고자 욕망할 때의 긴장, 사랑에 다름 아니다.

 

다른 존재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것의 스페키에스를 욕망한다는 것, 즉 그 존재가 자신의 존재함 속에서 스스로를 보존하고자 욕망할 때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것을 뜻한다. (86) 8994769005_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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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슬리의 심포중 한 패널은 리사 짐머만 선생이 기획한 <affect>에 관한 발표였습니다.

앞서 말한 튀빙겐 대학의 박사과정생 역시 이 패널에서 오끼나와인의 전쟁 기억과 어펙트에 대해 발표했습니다.

 

또한명의 흥미로운 발표는, 중국과 일본 문학 전공자이신 선생님의 티벳과 타이완 문학에서 affect/affectless에 대한 발표였습니다. 매우 인상적인 발표였습니다. 발표자 선생님은 아주 평화롭고, 다정하달까....그런 매너로 발표를 진행했습니다.

 

아주 인상적인 발표였으나, 저는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습니다. 그분 발표의 어떤 이면에서 affect는 무언가, 티벳과 타이완이 서구화되기 이전, 원래, 타이완과 티벳에 있던 <그 무언가>와 등가를 이루는 듯한 느낌. 반면 지적인 것은 서구적인 것, 외부에서 들어온 것, 그리고 affectless한 것으로 양분화되는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서구에 의한 식민화로 상실한 그 무엇과, 서구적 지식 세계의 이성우위의 사고에 의해, 가치가 절하된 affect의 위상이 겹쳐지면서, 이런 인상을 주게 된 것이지요. 이는 정념이나 정동에 관한 연구가 빠지기 쉬운 어려운 점이기도 하구요.

 

아감벤은 정념을 게니우스라는 차원에서 논의하기도 하는데. 그는 개별자에게 게니우스와 자아라는 것(서구적 개념으로서)은 마치 세익스피어의 {태풍}에서의 에어리얼과 프로스페로의 관계와 같다고 말합니다. 매우 흥미로운 논의이고, 정념에 관한 연구에도 많은 시사점을 주지만, 만일 이 비유가 서구와 식민지 사이에 대비될 때, 식민지는 <서양>이 잃어버린 <영적인 세계/정념/어팩트/:게니우스>의 선을 따라, 결국 다시 식민화되어 버릴 수 있으니까요. 혹시나 무례한 질문이 되지 않을까, 실례를 무릅쓰고 질문했을 때, 무언가 그 발표자 선생님의 예의 그 평정이 깨어지는 느낌이랄까....아, 아무래도 하지 말아야 할 질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왜냐면, 이러한 질문이 혹시라도, 아시안 스터디즈의 <원주민>인 동양인 학자가 서양인 학자인 <이방인>에게 던지는 주도권 홈타운의 주민의 발언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터이기 때문입니다.

 

뭐냐면, 아마도 그 발표의 요지 뿐 아니라, 발표자 선생님의 포지션은 암암리에 <티벳이나 타이완>에 대한 애착과 동경에 의해 이뤄진 것, 즉 <티벳과 타이완>이라는 "학문의 고향"에 대한 애착을 통해 구성된, 그래서 서구적인 '분열적' 정신과 달리 매우 평온하고, "다정한" 그런 매너를 갖출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 선생님은 심포에 참여한 누구보다, 제도적인 학자같은 권위주의적 태도나 형식주의적 매너와는 아주 거리가 먼, 정말 어펙트한 태도를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비록, 제 입장에서는 그 발표를 들으며 내내, 토마스 울프(? 기억이 가물)의 소설 제목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라는 구절이 자꾸 떠올랐지만, 그런 <고향>은 누구에게나 애착의 대상으로서, 그리고 이를 통한 안정감과 평정심의 원천으로서 필요하다 생각도 듭니다.

그러니까, 흥미로운 것은 이 드넓은 세상에서도, 결국 학자들이던 사람들이던, 한편에서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누군가는 결국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그런 두 선택지 뿐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궤적이 그렇게 간단한 것만도 아니라는 생각도 말이죠. 그리고, 그 발표장에서의 포지션과 고향과 제도와 매너와에 대한 생각들은 제 궤적, 혹은 포지션에 대한 생각으로도 자연스럽게 이어졌습니다. 짧지 않은 시간, 부산에서 저 나름으로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일들을 해왔다고 생각하지만,여전히, 저는 <왜 부산에서 일을 하지 않냐?>는 질문을, 팀 내부에서조차 듣고 있습니다. <부산에서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라는 화두는 제가 부산에 도착한 그날부터 지금까지 벗어날 수 없는 삶의 화두이고,

과연, 나는 <여전히, 이방인인것일까>라는 자문은 제 삶의 불안과, 외로움의 또하나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내 안의 이런 질문과는 또다르게, 외부로부터, 아니 <부산사람들>로부터 전해지는 <왜 부산에서 일을 하지 않느냐?>, <왜 부산 사람들과 만나지 않느냐?>는 질문은, 제게 어떤 폭력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웰슬리로 떠나기 전의 얼마간도 이런 질문과 분열에 시달렸던 날들이기도 했습니다.

아직 이런 분열이 가시지는 않았으나, 길고, 긴 비행의 시차 속에, 그 현기증 속에 막연히 떠오른 어떤 대답, 아니, 다른 질문을 돌려드릴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하고 있는 일들, 제가 만난 사람들, 제가 여기(이곳은 과연 어디일까요?) 서 살고 있는 일들, <이것은 왜 부산이 아니란 말입니까?> 이런 반문을 통해 생각해본다면 제가 <부산에서 일을 하지 않는다>거나, <부산 사람들과 일을 하지 않는다>는 질문, 평가, 혹은 요청은 거꾸로, 부산에서 일을 한다, 혹은 부산 사람들과 일을 한다는 것에 대한 어떤 확고한 배타적인 관점의 소산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즉, 제가 자주 듣곤 하는 <부산에서 일을 한다>,<부산 사람들과 일을 한다>는 말의 함의는 달리 생각해보면 부산에 이미 만들어진 제도나, 단체, 부산에서 이미 활동중이고 몫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 그 제도나, 단체, 인적 연계에 '가입'하고, '한 몫'을 할당받아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그래서 많은 <외지인>들이, 이렇게 이미 구성된 제도나, 인적 연계에 할당된 몫을 감당하는 방식이 아닌 다른 행로를 가게 되면 여지없이 <이방인>, <외부인>으로 간주되고, <지워져>버립니다. 그리고 거꾸로, 문제와 책임은 외지인과 이방인의 배타적 태도의 소산으로 간주되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 <이방인>들의 말은 들리지 않으니 말이지요.

 

웰슬리의 한 강의동에서, 질문자인 <동양인 여성학자>인 저와 <서양인 여성 학자인 그녀> 사이에 몫을 둘러싼 위치가 결코 단일 할 수 없었듯이, 또 그 질문들과 대답들 속에서 저와 그분 사이에 몫을 가진 위치에 대한 자기 방어(서구학자로서의 그녀/이때 저는 동양인 학자로서 마치 아시안 스터디즈의 홈타운의 주민으로서의 배타적 권리를 표명하는 것처럼 되어버리죠)와 갖지 못한 위치(아시안 스터디즈를 하는 서구 학자로서의 그녀, 혹은 서구 학계에서 아시안 스터디즈라는 몫없는 자리의 위치/고향이 없는 자로서의 위치)가 복잡하게 전도되고 얽혀있듯이

몫이 없는자와, 몫이 있는 자의 자리라는 것이 과연 그렇게 자명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기에 포지션과 몫의 할당, 권력 관계에 대한 고민이 많은 부분 <분열적 내면>을 형성하는 것이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일이 아닐까요? 이런 이야기 역시, 결국 이방인의 <애증>의 소산 쯤으로 치부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고향의 동지>나 <떠도는 이방인>이 되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는 것일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맞짱뜨는 여자가 된 이래, 이미 <고향>따위는 다 떠나버렸다고 생각했고, <이방인> 국외인으로서의 삶에 대해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생각했으나, 지역의 경계를 넘어서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맞짱뜨는 여자의 '본질'이란 게 있다면, 그것은 결국, <트러블>을 만드는 일(주디스 버틀러의 책에도 비슷한 구절이 있죠). 그러니, 따듯한 고향의 품이나, 고요한 평정심의 세계는 맞짱뜨는 여자의 세계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맞짱의 정념 교실은 여러분에게, 따듯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알려드리지도, 길을 잃은 당신들에게, 따듯한 안식처를 제공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니, 그대, 고향의 따듯한 품은 아비의 몫이니 아비의 너른 품은 언제나 활짝 열려있다는 사실도 잊지 마시기를~

 

 mazzang11

 

 

웰슬리 대학 동아시아학과 초청 강연과, AAS(Association of Asian Studies) New England 발표를 무사히 마쳤습니다. AAS 공식 일정이 오늘로 마감되고, 저는 내일 오전 출발합니다. 사진과 포스터를 올리려 했으나, 파일 용량이 커서 안올라가는군요. 저는, 강연에서는 <한국전쟁과 commemoration>에 대해서 3시간 정도 강연을 진행 했습니다. 소강당에 학생들과 교수님들이 자리를 가득 메워주셔서, 아주 재미있는 논의들을 주고 받았습니다. 강연 전에는 학부생들 수업에 참관으로 들어가서, 학생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아주 진지하고, 활달하고, 지적 호기심에 가득찬 많은 학생들과 이야기를 하며 좋은 에너지를 나누었습니다.

 

이곳 웰슬리 대학은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여자대학 중 하나로, 지금도 워먼 스터디즈의 산실이기도 합니다. 초청 강연 이틀 전날에는 웰슬리 대학의 워먼 스터디즈 학과에서 주최하는 <작가 초청 낭독회>에 참가했습니다. 캐러비안 아메리칸인 시인과 재패니즈 아메리칸인 소설가 두 사람이 참석해서, 자기 작품을 낭송하고 이야기하는 자리였는데, 우리 서평회를 떠올리며, 흥미로운 대비를 해보았습니다. 우리 서평회도 이곳, 웰슬리의 낭독회 못지 않게 재미있고 흥미로운 자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작가들은 아주 진지하고도, 재미있게, 작품을 낭독했는데. 그게 그렇게 재미있을 수 있다는 게 참으로 흥미로왔습니다. 아마, 자유분방한 작가들이라, 그런듯도 합니다. 특히 캐러비안 아메리칸인 시인은 노래와 퍼포먼스에 가깝게, 그러나, 아주 문학적으로 자기 작품을 수행해서, 참으로 흥미로웠습니다. **이 낭독에 자극받아서, 다음 날 하루 종일 하바드 엔칭 연구소의 연구실에서 프리젠테이션 준비를 <다시>하게 되었다는 슬픈 소식도^^

 

옌칭 연구소는 워낙 유명해서, 꼭 가보고 싶은 곳이었는데,,,연구실만 가보았지만^^ 연구실 라이프, 혹은 연구원 라이프는 어디나 다 똑같다는 좀 서글픈 현실^^

거기서 만난 유학생들은 한국 연구원들이나 마찬가지로 도시락 싸들고, 하루 종일 연구실에서 세월을 보내고 있더군요. 그 유명한 ㅠㅠ 하바드 대학은 마치 관광지나 다름 없고, 약간 '속된' 냄새가 풍기는 곳이라, 다소 의아했습니다. 게다가 엔칭 연구소는 거기서도 거의 무슨 창고같은, 게다가 아주 찾을 수도 없을만한 구석탱이에 있어서, 이곳 학생들은 옌칭을 <아시안 게토>라고 부른다는군요. 하바드 거주자로서의 자부심과 게토 주민으로서의 위축감이 묘하게 겹쳐있는 풍경이 옌칭의 풍경이랄까요...물론 단 며칠간의 인상일뿐.

하버드, 웰슬리에서 많은 학생들과 연구자들, 대학원생들을 만났습니다.정신을 좀 쉬게 한다는 차원에서 미국에서는 가능하면, 내가 떠나온 곳에 대해서는 잠시라도 잊어버리자 생각했으나, 이들의 얼굴들 속에 우리 팀원들 얼굴이 어른거리는 것까지는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막겹쳐지는 인상이 그리 비관적이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문제는 어디서 공부하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공부하느냐>가 중요하다는 점을 다시 확인했달까요.

 

오늘 오전에 독일 튀빙겐 대학 박사과정 학생이 먼 길을 날아와서, 오끼나와에서 전쟁 기억에 대한 발표를 했습니다. 제가 했던 강연 논의와 연결점이 많아서,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 친구의 발표를 보면서, 한국에서 <지방 연구자>의 위치를 무언가,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그런 아이디어가 문득 떠올랐지만,,,,,계속 생각하면, 일을 하게 될 것 같아서, 떠오르는 생각을 멈추려고 무진장 노력했습니다. 약간의 단초라면, 외국에 나가면 동아시아, 또 그중에서도 티벳, 오끼나와...등등등 특정 로컬에 대한 관심이 정말 폭발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비해서 보면, 한국의 제주도나 광주는 왜 오끼나와나 티벳같은 <전지구적 문제틀>을 구성하지 못할까요? 실은 아주 단순하게, 이 로컬 전공자들이 전적으로 <지방이거나, 일국사적> 맥락외에는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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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기까지 적고 있는데. 저를 초청해주신 선생님께서, 저녁 초대를 하셔서, 잠시 다녀와야겠습니다. 다시 글을 올리던가, 아니면, 화요일 귀국 후에 다시 보고드리죠. 다들,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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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맞짱의 정념 교실 >1회, 10월 6일 (목)
<카페, 헤세이티>에서.



<맞짱의 정념 교실> 첫 수업이 부산대 카페 헤세이티에서 진행됐다. 첫 수업에선, 권명아 선생님/연구자의 궤적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 날의 수업이 인상적이었던 것은 학술 심포지움 장에서, 연구자로써의 선생님과 대안 공간(담론 생성의 장)에서 권명아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던 점일 것이다.


선생님의 연구의 큰 궤를 굳이 말하자면, 단연 역사작업을 언급해야 할 것이다. 페미니즘이 일반화된 이론 연구였다면, (비평이나 실천이 아닌)학문으로써의 젠더 연구는 구체성을 논의하는 연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주체화의 역사를 통해 이론을 뚫고, 다른 세계의 역사를 볼 수 있기 떄문이다. 현재, 선생님의 '풍기문란'연구는 어떤 저항성, 포섭되지 않는 "골칫 덩어리들"을 규명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을 것같다. 여기에서 다시 비롯된 '정념'연구는 이 "골칫 덩어리들" 즉, 부적절한 정념의 담지자들-병리적으로 간주되어온-에 대한 정체성 정치의 역사를 탐색하였다. 이 주체들의 정념은 이성의 언어로 번역되지 않는 잔여물들이라 간주되어져 왔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정념은 번역되어야만 한다.
'풍기문란'에 관한 자료 작업 중, 발견한 <<나나>>는 그것의 검열 문제와 유통과정, 독자층의 위치 변화에 대해서 살펴보게 되셨다고 한다. 이미 1924년에 발행된 <<나나>>,에밀 졸라, 가 1941년 검열이 되었다. 명목은 1)치안방해와 2)풍속괘란/풍기문란이었다. 치안 방해는 다시 말해, '사상'에 대한 검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풍속'의 문제는 다시 '민족'의 문제와 직결된다. 1926년 부터, 풍속 경찰과 풍속 영업에 대한 단속이 강행되며, 풍기문란에 대한 통제가 더욱 심해졌다. 당대에도 이 범위에 대한 논란은 있어왔다. 그런데 이 범위즉, '풍'mentality의 범위, 검열 기준은 다시 시대적인 도덕률을 반영한다. 게다가 <<나나>>의 유통과정을 살펴보면, 지식인이 읽어야하는 서양 고전 필독서에서, 여성 대중들의 읽을 꺼리로 주체의 위치가 변하며 부적절한 정념으로 담지되었다. 이러한 유통 과정은 주체들에게 정념을 배분하고, 주체의 위치를 나누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의 어떤 실패의 기록들을 통해 생긴 근원적인 낙관이 있다면, "언젠가는 변한다."라는 것이다. 당대의 논리로 변화가 불가능할지라도, 이후 오지 않는 미래를 만들고 있기에 무의미 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실패를 통해서만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상사나 위인전식의 패러다임이 아닌) 인격화된 연구(개별자의 삶과 목소리)를 진행하며 산자의 생애사적 역사(장정일¹, K씨²)를 다루기 시작하시면서 변화된 글쓰기 방식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었다. 5.16이후, 10대 미성년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며, 소년범죄에 대한 항목과 소년범에 대한 통제가 이루어진다. '소년범'이라는 풍기문란의 규준이 생기고 이것이 개인의 삶의 위치를 어떻게 배분하여 그의 삶의 반경을 만드는가에 대하여, '살아있는 자'를 통해 해석하는 연구를 진행하시고있다.


이 수업을 통해, 나 자신의 삶의 반경, 딛고 있는 '나'라는 주체적인 위치에 대해서 고민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나의 언어가 부재하고 남은 자리엔 선생님과 선배들의 언어를 따라 채워넣고, 세계를 엿배웠다. (비약이라 할지라도) 일제 감정기 식민지 조선인들이 그들 자신의 '말'을 잃고 대역본을 통해 세계를 배우는, 그 제3의 위치에 나의 갈등적인 지점을 투영한 것일지도 모른다. 번역의 과정 속의 어떤 주체성과 그들이 놓여있는 구조적인 맥락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각주

¹ 「소년범, 작가, 음란범-J의 탄생과 종말」, 냉전체제와 검열 심포지엄 발표문

² 「제국의 판타지와 게토 사이에서 타협하며 살기」, <<황해문화>>, 2010년 여름호 

  mazzang11

 

 

맞짱의 정념 교실 1회 강좌는

번개 형식으로 10월 8일 오후에 헤세이티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주제는 <음란함, 식민성, 그리고 에밀 졸라>라는 제 최근 연구 발표를 중심으로

제가 역사적 파시즘에서, 풍기문란으로 그리고 정념에 관한 연구로 이어져 온 행로와

글쓰기 방식의 변화 등에 대해서 함꼐 이야기했습니다.

맞짱의 정념 교실은 당분간 유동적이고 즉흥적인 번개 형식으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장소도, 시간도, 인원도, 정하지 않고

즉흥적인 번개로 진행하고자 합니다.

관련 사진 자료를 올려주세요.  

 mazzang11

 

 

내가 구원하지 못할 너

최승자

어두운 너의 내부를 들여다본다.

등 돌리고 홀로 서 있는 너,

슬픔의 똥, 똥의 밥이다.

(너의 두 손은 뭉그러져 있었다.)

내가 꿈에서도 결코 구원하지 못할 너.

나는 다만 행간에서 행간으로

너를 곁눈질로 읽으면서

행간에서 행간으로

너를 체념하거나 너를 초월하면서......

허무의 사제인 나는 오늘밤도

너를 위한 허무의 미사를 집행할 뿐이다.

.........................

"허무의 사제"라는 표현이 더없이 어울리는 그녀, 최승자.

검은 드레스에 담배를 피워물며, 긴 머리를 쓰다듬으며 최승자를 인용하는 그런 분위기가 싫어서

오래, 그녀를 멀리했다.

홀로, 고독하게 투병중인 그녀의 소식을 접한 날. 외롭게 홀로 투병중인 싱글 여성들에 대한 글을 써야겠다 생각했다.

그녀들의 '안부'를 묻기 위해 쓰려한다.

불/가능한 싱글 라이프  

선우

 

 

 

1. 또 한 번의 실험

정념세미나는 팀원들 각자의 역할과 가이드라인이 주어진 또 한 번의 실험이었다. 이러한 세미나의 정의, 한 문장은 언제나 '뒤늦은' 사후적으로 재구성 된 문장이다. 세미나 뿐 아니라, 여태까지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미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여태까지의 후기는 잘못된 것과 각자의 반성, 다짐이 대부분을 이루었고, 선생님의 평가와 어휘들로 치장 한 단어와 표현, 가치 평가가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이번 후기를 쓰는 데 있어서, 여태까지 몰랐던 것을 이제 알게 되었다. 라는 태도 즉 함께 있었던 1년간의 시간을 손쉽게 환원시키는 태도를 경계하였기 때문에 이번 후기는 내게 특히 더 어렵게 느껴진다. 게다가 몇 뼘의 공부로 빌려 적는 인용문이 오히려 불필요한 글이기 때문에 내 말은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 뒤늦은 체감들과 빌어 적는 단어들로 세미나를 '또 한 번의 실험'이었다고 여길 수 있었던 것, 모든 수행들이 완료 된 뒤 그 의미를 체감 할 수 있었던 것임을 숨기지 않겠다.

세미나라는 모임의 형식성은 함께 지정된 텍스트를 읽고 쓰는 것이다. 그 자리의 작은 약속이 곧 모두가 발 딛고 있는 (준비된)연극수행의 무대라고 비유될 수 있다면, 이렇게 세미나라는 형식에서 주어진 텍스트와 기본적인 역할분담을 통해 함께 할 수 있는 것을 다시 발견하고 기획하는 것은 '발전적 해체자'들의 몫이었다. 그들은 몫을 어떻게 전유하여 몸둘바를 기획하였나?

약속과 자발적 기획의 의미를 모두 합쳐 '세미나'라고 말할 수 있을 때, 번역 작업은 안에서의 부대낌이 단지 피로로 누적되지 않고 밖으로 나갈 수 있던 경험이었다고 생각된다. 일본어 번역이 가능한 사람 모두가 매주 논문 한편과 저자의 약력, 한국어 발제를 해와 각자의 능력이 세미나를 통해 더욱 값지게 발휘되었다. 그리고 선생님의 번역과 글 또한 세미나의 단단한 뿌리 같은 역할로서 모두에게 똑같이 분양된 지반이라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이를 통해서 서로의 미래와 기획을 나눌 수 없었던 것은 여전히 부족한 점이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세미나를 통해서 서로가 각자의 역할에 부담을 안고 있었던 만큼 함께 공부할 수 있음에 대한 기쁨을 서로 누리지 못한 것 같다. 실은 이를 계기로 각자의 계획들을 공유할 수 있는 장치의 의미와 더불어 각자의 공부 시점에 맞는 여러 세미나들이 태동할 수 있는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발전적 해체를 위한 세미나의 의미를 그 자체로 말하기엔 부족하다. 어떤 실험의 의미는 그 뒤, 계속 증폭될 수 있는 또 다른 실험들이 발생해야지만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함께 공부한 것에 대한 결과물을 내는 일이 될 수도 있고, 그 다음의 기획들을 도모하는 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함께 공부하는 것에 대한 기쁨을 단기간에 느낄 수 있었지만, 이것이 한 독립적인 '사건'이 되지 않기 위해서의 결과물과 기획은 연쇄되어야만 한다.




2. 학술운동과 자기수행,역할 사이에서

프로젝트의 사업과 연구모임의 학술운동의 궤적을 분리할 수 없듯이 1년간의 작업이 '학술운동'과 '공동체'의 맥락에서 어떤 의미였는지 말하고 싶다. 심포지엄은 그간의 작업들이 무엇이었는지 학술장에서 공식적으로 발화할 수 있게 된 중요한 자리였다. 심포지엄에서 부스를 준비하면서 그간의 자료들을 편집하고 함께 그 의미를 톺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 시간이 한 편으론 부대낌에 대한 고민과 반성 그리고 다짐의 메아리가 다시 반복되는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 반복에 대한 두려움과 심포지엄을 통해 다시 화두 된 net-a의 학술 운동적 맥락에 대한 '자기의견 부재'가 '역할'에 대한 고민을 구체적으로 해보게 된 계기가 될 수 있었다. 어떻게 net-a작업의 일환을 서사화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이번 후기를 쓰는 데 큰 부담으로 작용하기도 하였지만, 그 거대한 서사를 아우르려는 시도는 서두르거나 조급해 하지 않고 계속 골몰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부담감을 치루기에 앞서 우선 자기 역할에 대한 의미를 찾기 위해서 어떻게 실험을 했었는지 또한 다시 물어볼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무엇보다 팀 안에서의 자기 역할이 팀 전체의 운동성으로 외부화 되지 못했다는 것, 바로 그 실패의 경험들이 가장 중요한 지점인 것은 분명하다. 나는 아직 그 수많은 실패의 경험들 속에서 내 계획과 미래를 기약하는 글(관계맺음의 방식)을 모색하지 못한 것 같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나만의 문제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이 같은 자리 잡지 못함은 팀워크의 맥락에서 본다면, '공유되지 못하는 것들' 중 일부로 포함된다. 그렇다면 서로를 판독불가능하게 만들었던 공유되지 않았던 것은 무엇인가?

프로젝트는 모두가 '자립 연구자'의 삶이란 길을 가려는 목적을 위해 모일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여기서 함께 다른 모양의 삶을 기획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었고 그 가능성을 실험을 해본 것이다. 어울림의 발로가 나를 지우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프로젝트는 함께 할 수 있으려면, '나'(의 독해와 기획)를 꺼내보여야 한다. 함께 한 것에 대한 의미를 살피고, 기획할 수 있는 자리에서 자기의 입장 없음은 굉장히 난감하다. 1년간의 일들에 대한 다른 독해와 평가를 덧입히기 힘들다. 수많은 당위들을 말했지만, 결국 부딪히는 장벽은 '바뀌지 않는 몸'이었을까.

'바뀌지 않는 몸'은 다시 '윤리성'의 영역에서 논증될 수 있을 법하다. 공동체적인 조건들(시간과 장소) 안에는 무한한 관계의 양상이 열려있다. 무한한 관계의 양상은 (공동체적)일상을 통해, 기존의 나의 힘 관계를 전복할 수 있음에 대한 가능한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전복되지 않는 힘, 이전보다 조금씩 더 달라지고자 하는 욕망의 정도의 문제일까. 항상 당위로 끝나는 문장을 우회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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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콩떡1

 

 

세미나와 심포지움에 대하여, 그리고 우리의 지나온 시간들에 대하여, 동계훈련 세미나. 그러고보니 오랜만에 장시간 세미나를 하였다. 기억해보면 예전의 정념세미나도 항상 이정도 시간을 했던 것 같은데. 정념세미나와 4주세미나가 사뭇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4주 세미나 때는 ‘세미나를 할 수 있는 것이 감사한 일이다.’는 생각이 있었다. 정말 아주 정말 부끄럽지만 예전에는 내가 잘나서 하는 줄 알았던 것 같기도 하다. (그 생각은 무의식 근처에 있고 모호한 것이라 문장도 모호하다) 4주 세미나 중에 나는 한 번의 미션 실패를 했다. 나는 언제나 잘 타협한다. 그럼에도 이렇게 세미나를 마쳤다. 그동안 늘 모호하게 떠다녔던 단어들이 내 안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듯하다. 4주 세미나가 연구모임a를 조금씩 다시 되짚으며 해체해가는 과정이었다면, 심포지움은 프로젝트의 1년차를 마감하는 자리였을 것이다. 이것들로 우리는 어떤 쉼표, 를 찍었다. 쉼표, 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여기서, ‘연대기’라는 단어가 생각난다. ‘연대의 기록’이 될 수도 있고, ‘시간 순의 역사’가 될 수도 있는 단어. 사실 우리는 지금까지 이 ‘연대기’를 써온 것이다. 서로 간에 얽혀있던 기록과 지나온 시간에 대한 기억. 내가 하는 말이 ‘평가’와 ‘반성’의 기계적인 반복이 되지 않기를. 이 후기를 쓰기 위하여 ‘공동체’, ‘관계’와 같은 단어를 적어나가다가 문득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 왜 이 단어들을 주워섬기고 있는가. 반복해왔던 설명으로서가 아니라, 지금 나에게 이 단어는 정말로 무엇인가. 질문을 바꿔보니 잘 설명이 되지 않는다. 다들 ‘이’ 공동체가 무엇인지, 해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저 이상한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이’ 공동체에 대한 말을 재발명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상한 방향으로 생각이 튄다. 어떤 밴드가 있다. 무명이었다. 그들은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악기를 들고, 함께 죽을 동 살 동 연습하고, 작곡하고, 무슨 곡을 연주할지로 싸우고 작은 무대에서 연주하며 시간을 보냈다. 안타깝게도 좋아하는 것이 꼭 잘하는 것의 동의어는 아니라서, 관객은 몇 없었던 듯하다. 그럼에도 이들이 아주 신이 났었다는 것을, 당신은 짐작할 수 있으리라.

 

이 문장들은 과거형으로 씌어져있다. 이들이 드문 기회를 잡아 인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곡을 다시, 또 다시, 연주한다. 그 때마다 사람들은 열광한다. 반복, 또 반복. 어느새 그 밴드의 무표정함은 그들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이 신파조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마추어리즘적인 노스텔지어를 불러일으키고 싶어함은 아니다. (그리고 대개, 그런 것은 실제로는 별 쓸모없는 일이다.) 정말 마음을 담아서, ‘나’를 내지르는 것이었던 노래가 어느 샌가 그저 입에서 외워지는 것이 되었을 때, 우리는 그 마음을 잊어버린다. 처음에 ‘나’를 설명해줄 수 있는, 전달할 수 있는 새로운 말들을 발견하였을 때의 희열을, 순회공연같은 반복 속에서 그저 읊어대는 것이 되어버리지 않았는가. 익숙한 단어들을 반복하면서 우리는, 나는, 우리가 생각하였던, 정념과 공동체와 해방을 잊어버린 것이 아닌가. 늦은 생각이 든다.

재발명된 단어들로 우리의 사전, 또는 각자의 사전을 만들고 싶다. 일곱 개의 단어로만 만들어진 사전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였듯이, 다른 누군가에게 이런 말이 존재한다는 것, 너를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전을 만드는 것. 이것으로 ‘우리’가 무엇이었나를 말하지 않으면서도 말할 수 있는 것이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수희 선생님께서 ‘마지막 회의’ 때 했던 말을 다시 떠올린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해왔던 일들을 하나도 이룰 수 없었을 거예요.”

많은 일들을 해왔다, 는 말에는 그저 놀랐지만 이 말은 가슴을 울린다. 누군가가 주도를 하면 나머지가 미안하게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는 기획을 하고, 누군가는 처리를 하고, 누군가는 그들을 조율한다. (어느 샌가 부터는 그 밴드들처럼 되기도 하였지만)모두가 함께 잘해왔구나. 역시 뒤늦게 안다. 그럴싸하게 나를 반성하기보다는(‘반성’이 문제가 아니라, ‘그럴싸함’, ‘치열하지 못함’의 문제라는 것) 모두에게 고맙고 정말 함께, 열심히 해왔다는 말을 하고 싶다. 누구 하나 자신이 가진 것 중 많은 것을 투여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동안 다른 이들에게 고마움과 기쁨을 주는 것에 게을렀고, 인색하였다. 모두가 있어 내가 행복하게 되듯, 내가 있어 모두가 (잠시라도) 기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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