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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전쯤 산 노트북이 고장이 났다. 그래서 급한 용무는 그 노트북보다 더 오래되고 하이텔스러운 컴퓨터로 해결하고 있는데 한 페이지가 넘어갈 때마다 1분에서 3분정도 소요되기에 매번 1분과 3분의 공백이 생겨나게 된다. 속도의 전쟁 속에서 1분과 3분은 견딜 수 없는 시간이 되어버린지 오래이다. 그만큼 몸은 세속화된 변화에 아주 빠르게 적응하며 그 편리함속에서 더 많은 편리함을 찾고 예전의 몸을 지워간다.


과도기를 거처 요즘은 1분에서 3분의 공백을 무난하게 견딜 수 있게 되었는데 중간 중간 책을 읽기도 하고 메모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느림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만큼 이미 만들어진 몸을 어디론가 이행시키는 것은 수고스러움이 따르는 일이지만(어떤 이행이냐에 따라 다르겠지만)막상 몸이 안정을 찾으면 익숙해지기 마련이여서 비-창조적인 몸이 되고 만다. 그만큼 몸의 이행은 어려움과 익숙함의 문턱에서 그 존재를 감추기 십상이다.


이 몸의 중요성은 인간이 자본화된 ‘몸’으로서 묾듬으로 인해, 인문적 맥락에서 중요한 형태로 얘기된바 있다. 인문이 ‘말’이 아닌 실천과 맞닿아 있을수록 이 ‘몸’의 행방은 더더욱 중요하다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몸은 값싸게 ‘말’할 수 있되, 행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세미나와 심포지움 뿐 아니라 서평회, 대중강좌, 국경을 넘은 워크샵들은 이 ‘몸’에 대한 실험들이 아닌였던가?

이미 ‘개인의 몸’이 아닌 ‘세속화된 몸’으로서 삶의 반경 안에 포획된 몸은 그 반경을 한치 앞도 벗어 날수 ‘없음’이다. 그 벗어날 수 ‘없음’을 알아차리기 힘들뿐더러, 알아차리는 순간 어떤 절망 앞에 혹은 희망 앞에 서게 된다. 그리고 그 희망을 가동시키고자 하는 몸부림의 형태가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희망의 몸’들을 요청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만들고 맺어온 몸의 결실은 학술 심포지움과 같은 외부를 만나는 장소에서 확연히 들어난다. 선생과 제자, 오로지 학연의 관계들로 뒤섞인 학술장안에서, 우리가 늘 곱씹었던 문장, ‘연구자와 박사, 학부생 아티스트’가 함께 활동하고 있는 팀의 색깔은 학술장안에서 그 특이성을 더 잘 헤아릴 수 있다. 학교의 관습과 제도속의 관계를 가로지르며 미흡하게나마 함께 만들어온 각자의 포지션과 그 속에서 일하고 깨우치며 공부해온 문맥들을 누구나 말할 수 있음이 우리가 만들어온 자리와 같다.


예를 들어, 차가운 복도에 마련된 부스를(프로젝트 1년간의 작업들을 사진, 영상, 소책자의 형태로 만든 아카이브) 외부에서 오신 선생님들에게 설명드리면서 몇 번씩이나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Q 음...자네는 어디소속이며, 박사수료는 했는가?

A 아 저는 동아대학교 사람이 아니라 부산에서 미술 관련 작업을 하고 있고 정념 프로젝트팀에서 아트워크를 맡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 팀에서 했던 요코하마와 관련된 미술작업이나 영상, 사진과 같은 결과물들이 이러 이러한 문맥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Q 음 ....

 

언제나 첫번째 질문에서 끝나고 마는 이 낯설음의 문맥에서도 내 몸은 학술장에는 특별한 자리가 없는 기이한 몸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있게 답할 수 있음으로 인해서 그 자리는 마련이 되는것이며, 그 자리는 그간 선생님들과 동료들이 가능하게 만들어준 자리이므로 ‘모두의 자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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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동체 안에서 ‘일하는 몸- 글쓰는 몸- 약속과 요청의 몸- 공부하는 몸‘으로서의 기나긴 이행이였으며 이-행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이- 에서 -행으로 맺지 못하고 ’ - ‘ 사이에서 몸의 행방을 잃어버리는 것을 어떤 ’슬픔‘이라 표현할 수 있을까. 공동체 안에서의 몸의 이행속에서 ’ - ‘ 사이에 잃어버린 몸을 기어 올릴 수 있는 것은 함께 이행하고 있는 동무의 결을 통해서일텐데, 동무를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동무가 되어주지 못할 때 ‘ - ’ 사이에서 슬픈 정동은 피어오르기 때문이다.


공동체와 동무는 고사하고 이 이행의 실험들의 의미를 통해서 자신의 몸의 상태를 진단하고 연구하며 깨닫는 것이 (알아 차리는것)제한된 삶을 뚫어내는 ‘공부하는 몸’, ‘작업하는 몸’, ‘연구하는 몸’과 같은 ‘창조적인 몸’을 만드는 과정이 될수 있을것이다.

 

1분과 3분 사이에서 길을 헤메지 않는 '몸'과 같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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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 불가능한 삶                                                                                                 mora

 

프로젝트 관련 일과 권명아 선생님 강의 참석 겸 해서 서울을 오랜만에 올라가게 되었다.
서울에 갈 때 마다 마음이 찹찹해진다. 주로 무궁화호나 버스를 타는데 무려 5시간이 걸리지만
선듯 ktx를 타지 못한다. 비용의 문제도 있지만, 서울은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려야 닿을 수 있는 곳으로 인식되
어 있는 듯하다. 아마도 예전에 부산과 서울을 꽤 오랫동안 오고갔던 버스나 기차 안에서의 기억이 남아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버스 안에선 잡 생각이 총 출동하고 불편한 과거들과의 만남이 늘 기다리고 있어서,

때론 잔인하다.

그럴땐 마지못해 억지로 뒤척이며 잠을 청하곤 한다. 그래서 인지 그 긴 시간은 늘 피.곤.하.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는 버스를 타고 올라가고 말았다.

푸른역사 아카데미에서 주최한 ‘네트워크와 칵테일로서의 한국 문학사 (1)’ 라는 주제아래 권명아 선생님 강의를
듣는 기회를 얻었다. 이날은 권명아 선생님의 전반적인 연구, 작업의 맥락들을 소개하면서 진행이 되었는데,
풍기문란과 정념, 불가능한 싱글 라이프까지 문학이라는 코드 와 그 밖을 넘나들며 강의를 해주셨다.

선생님의 전체적인 연구의 흐름들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는데, 들으면서 문득 그 기억이 떠올랐다.

기억하기론 동경에서 요코하마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선생님이 우스게 말로 ‘내 곁에는 문제아 들이 왜 이렇게
많은가’라고 하신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반대로 선생님의 연구 또한 그러한 문제아 혹은 문제들과 늘 만나고
있음을 세삼 느끼게 되었다. 풍기문란과 골치덩어리들, 공동체의 언어를 획득하지 못한 번역불가능한 삶 또한
그런 맥락과 닿아있다는 생각을 하며 그런 점에서 선생님과의 만남이 기묘하게까지 느껴졌다. 나 역시 문제아에
속하지 않던가 ....

 

선생님 저서와 논문 중 아직 다 읽어보지 못한 글들도 있지만, 그동안 팀원들과 선생님 사이에서 들었던 말들과
읽었던 문장들을 생각하며 강의를 들으니 리듬을 따라가는 것이 한결 가벼워서 새삼 뿌듯함을 느끼고 있었다.
동시에 연구자인 선생님의 고민들 또한 많이 와닿았는데, 연구자로서, 공동체의 언어에 속한 사람으로서 풍기
문란의 대상들, 골치덩어리들, 혹은 번역 불가능한 삶들을 어떻게 호출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연구자 혹은
작가들에겐 늘 풀어야 하는 숙제와도 같은것 같다.


아무래도 이날 뼈속까지 마음속에 들어온 것은 ‘번역불가능한 삶’ ...'번역 불가능한 삶' 이다.


물론 불/가능한 싱글 라이프에서 번역 불가능한 삶이라는 것이 번역가-여성작가로서의 삶, 특정 계급의
여성들의 이야기에 한정된 부분이 있지만 그것을 다시 번역해서 자신의 삶속으로 끌어당길 수 있는 것일
테다.


요즘 부쩍 주위에서 너무 지평 없는 삶이 아니냐, 미래에 대한 불안은 없는가, 등 요상한 질문들을 던지는데
마땅한 대처 방법이 없다. 그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되묻는 방식인데, 지평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미래
라는 것이 무엇인가? 대부분 그 말의 정체는 언제나 공동체안의 언어와 방식으로 다시 돌아온다. 특히 주위
친구들이나 지인들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듣게 되면 좀 곤혹스럽기도 하고 내 삶의 방식이 잘못된 것인지
묻게 되면서 힘을 잃곤 한다.


강의 마지막에 선생님이 하신 말씀처럼 내 삶이 그렇게 틀리지 않다는 것을 확신하는 데는 ‘비슷한 길을 가는
동무들’을 통해서 라는 것을 조금씩 실감한다. 그래서 서로의 생사와 안부를 잊지 않는 것이 함께 살아가는 
는 의미와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최근 어떤 젊은이로부터 인상적인 말을 들었다. “뜻이 있기 때문에” 라는 말인데 좀 더 설명하자면 어떤 일을
하던지 그것을 하는 ‘뜻이 있기 때문에’ 남들이 하찮다 할지라도 혹은 작은 일 일지라도 소신을 가지고 행하는
것을 말한다. 요즘은 듣기 힘든 말이 돼버려서 그 말이 참 귀하게 느껴졌다. ‘뜻’ 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사람들은 뜻을 버리고 뜻을 지운다. 때로 그 뜻은 현실적이지 못한 의미로 전략해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동력이 ‘뜻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은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온 ‘말’처럼 반갑다.


사람들의 프로필처럼 정리되지도 않고, 스펙도 없는, 이 번역 불가능한 삶,
언제나 아마츄어로 읽히고 무명인 이 삶을 ‘뜻'을 동력 삼아 슬기롭게 해쳐나갈 수 있을까?


내게 지평을 다른 말로 한다면 ‘말을 얻는다’는 것이 될 수 있을 터인데 그것은 체계와 만나고 엇갈리는
순간이며 스치는 그 지점이다. 말을 얻는 다는 것은 체계에 들어가는 통로가 아닌, 부딧치는 지점에서
얻어진 '말'이고 그 '말'로 스스로 언어를 만들어 보는 과정인 샘이다.
 
하지만 그 과정은 언제나 번역될수가 없다.  


.....

그렇다고 모험을 멈출수는 없을터, '미래를 신뢰하지 말것' 이다.

 

 

 

  mazzang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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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함께 살펴볼 자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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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팀의 계속된 작업의 뜻이었던 자립의 꿈에 대해

이번에 함께 시도해본 그린-그림과의 연계 워크샵이 도약점이 될 듯합니다.

일단, 오늘 자립출판 워크샵에서 얻은 자료들, 사진을 일단 올립니다. 헌데 여기 자료 중, <등단 제도 낙선작 출판물>이 누락되었네요.

진희씨가 좀 그린-그림쪽에 확인부탁드려요.

또, 여기 참여했던 분들의 많은 후기가 이어지길 바랍니다. 일단, 기록 차원의 데이터를 올립니다.

 mazzang11

 

 

 

“슨상님.....”

나를 꼭 “슨상님”이라고 부르는 신콩떡님이 야밤에 전화를 했습니다. 내일은 동아시아 공생 영화제. 낮에 도착한 일본 쪽 주관자 분들과 식사, 협의 사항 논의, 연구소 국제 심포지엄 참가 등등 뭐 연예인도 아닌데, 스케줄 꽉 차게 움직이며 밤늦게 귀가하여 한 숨 돌릴 새도 없이 앉았는데 전화벨이 울립니다. 내일은 영화제인데, 이제 몇 시간 안 남았는데, 상영작 한편의 9분이 에러가 났답니다.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신콩떡 님이 전화를 합니다.

헐헐 웃으며 “괜찮아, 기다려봐”라 하자, ‘대폭발, 피의 응징’을 받을 각오였던 콩떡님은 오히려 의아해합니다.

 

결말인즉슨, 도대체 능력의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으며, ‘어둠의 경로의 여왕’, 혹은 ‘오덕계의 여신님’으로 우리가 마음대로 추정하고 있는 우리의 ‘여신**’님이 해외 공유 싸이트에서 후반 9분 필름을 입수, 일어 자막까지 넣어서 공수....영화제는 성공리에 끝났습니다.

영화제에서 뒤풀이까지, 우리 팀 모두 나름 사회자로, 진행자로, 각자 자기 몫을 맡아서, 바삐 뛰고, 웃고 울며, 그렇게 해냈습니다.

 

콩떡님 전화가 오기 직전, 저는 내일 무슨 말을 하나, 생각하다가, 문득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해온 그간의 일들, 일들, 일들이 떠올라, 울컥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울컥”이라는 단어로밖에는 표현이 되지 않는 시간들이었습니다.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기에, 우리 팀 모두 우리의 첫 일본 워크샵이 올해 2월이었다는 것을, 매번 확인하며, 매번 신기해합니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기에, 아주 오래 전 일인 것 같습니다. 실은 저는 아직도 홈페이지에 올라있는 일본 워크샵 사진을 보는 게 괴롭습니다. 속이 울렁거리고, 짜증이 밀려온답니다. 그것은 피로감 때문만은 아닌, 무언가 불가해한 장면을 자꾸 대면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그런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밀려오는, 그야말로 정념의 불길에 휘말리는 순간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무엇을 나누고, 무엇을 얻었을까요? 아직도 저는 답을 알지 못합니다. 정답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던진 질문에 대한 답 말이지요. 저는 그간 “도대체 이 일들이 당신들에겐 어떤 의미인가”를 계속 묻고, 그 답을 듣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는 응답, 아니, 응답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답답함이 불안감, 피로감, 실망감 등등의 형태로 반복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생각도 조금 해봅니다. 그 응답은 실은 확인할 수 있거나,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그것은, 확인이나 답변의 형식, 혹은 나누거나 돌려주는 방식이 아닌, 어떤 다른 형식, 다른 곳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나눔이, 우리가 여러 일들을 하면서 함께 살아-낸, 살아-온 일들이 기존의 방식으로는 확인되지도, 나누어지지도, 혹은 되돌려줄 수도 없는 그런 것이 아니었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우리는 아주 다른 것들을 나누고, 그 아주 다른 나눔과 응답을 전할 말을 아직 찾지 못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해온 일들은 언제나, 다른 형식을 만들고 경험하는 것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고, 노력을 해왔다는 사실을 여기서 다시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첫 번째 콜로키엄에서부터, 우리는 어떤 내용을 나누거나 전달할 것인가보다는, 어떤 형식으로 이런 일들을 수행할 것인가에 대해서, 더 오래 고민하고, 더 오래 생각하고, 생각하지 않아도 될 일들까지도 생각하느라 많은 시간들을 함께 머리를 맞대고, 전화를 맞대고, 고민을 나누어왔습니다. 제가 말을 아끼고, 어떤 식으로든 우리 팀원들이 각자의 몫과 평등한 참여를 할 수 있는 모든 방법들을, 우리는 실험해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쩌면, 우리의 나눔과 경험을 설명하고, 나누고, 돌려줄 적절한 말을 아직 찾지 못했을지언정, 이미, 우리는 그런 형식을 얻은 게 아닐까, 우리 몸은 이제 그 형식을 체현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불화와 긴장과, 살얼음판 같은 위태로운 관계의 어려움 속에도, 우리가 동아시아 공생 영화제를 기쁜 마음으로, 즐겁게 해낼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연유가 아닐까요?

 

그러니 이제 서로가 서로의 수고와 배려와 노력과 마음들이 서로에게 가닿지 않는 것에 대한 불안감, 불편함, 부채감으로부터 훌쩍, 발걸음을 내딛어도 괜찮지 않을까요?

 

하지만 아직도 우리는 서로 함께 살아-낸, 살아-온 시간들에 대해 함께 나눌 말을 갖지 못한 것도 사실이지요. 해서, 그 말의 부재가 우리 관계의 불안감으로 항존 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도 듭니다.

 

동아시아 공생 영화제를 열면서, 동아시아는커녕, 과연 우리 팀원들은 같이 살아낼 수 있을까하는 자책과 의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것은 우리가 마주한 이런 상황과도 관련이 있겠지요? 허나, 동시에 이제는 너무 우리의 함께 살아-냄의 문제에 대해 골몰하는 것을 넘어선, 다른 지평이 필요한 때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우리 팀의 헌신과 열정에 찬사를 보내시며, 신명직 선생님이 보내주신 감사의 편지에 이런 구절이 있더군요.

 

“이제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짧은 우리 모두에게, 남은 인생의 짧은 시간이나마, 함께 걸어갈 수 있는 벗을 만나게 된 것 같아 감사하다.”

 

물론, 저를 제외한 우리 팀 모두는 살아온 날들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더 많이 남은 사람들이기에, 이런 표현이 부적절하지요. 그렇습니다.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짧은 사람과, 살아온 날들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더 많은 사람들이 만나서, 과연 어떤 삶을 함께 살아-낼 수 있을까요? 우리의 생애사적 시간 차이 역시, 함께 살기의 어려움의 한 요인이기도 하지요.

 

그러하기에, 우리가 함께 살아-내기 위해서는 건너야할 걸림돌이 아주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너무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도 한 방법일 듯합니다. 여러분과 저 사이에, 혹은 우리 팀 모두, 각자에게 인생의 시차뿐 아니라, 너무 많은 가변성들이 놓여있으니 말입니다.

 

우리의 삶이 예측 불가능한 우연성으로 가득 찬 것이라 할 때, 실상, 오늘 세우는 내일의 계획은 그저 ‘아름다운 바람’일 뿐이기도 하지요. 그 아름다운 바람은 그저 한갓된 꿈인 것이고, 그 꿈이 꿈인 한, 그것은 그저 한갓된 것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질 뿐이지요. 그러니 예측 불가능한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기보다, 그저 오늘 여기서 우리가 마주한 순간,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최인훈이 말했듯 “매일 매일을 열심히 사는 사람이야말로, 최고의 비관주의자”라면, 아마 이런 생각은 아주 비관적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차라리 그런 비관으로 매일매일 마주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낼 수 있는 길을 찾는 것, 그것이 오늘, 우리의 힘겨움을 조금은 털어버리는 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동아시아 공생 영화제를 개최하기 직전, 겨우 그때서야 이런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어쩌면 저는 그간 우리 팀원들의 응답 없음에 대한 무기력감과 응답에 대한 갈증 속에서, 실상 우리 팀원들에게 제대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전한 적이 없구나 하는, 그런 생각 말입니다. 이건 뼈아픈 자각이었습니다. 영화제 내내 공식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여러분께 반복해서 감사의 말을 전하려 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 뼈아픈 자책을 잊지 말아야 할 터인데 말이지요.

우리가 타자에게 전할 수 있는 유일한 인사는

 

“당신이 있어 감사하다.”

 

이 말뿐이라는 것을, 환대를 이론으로만 배워서 그런가봅니다.^^

 

허니, 아직도 미처 전하지 못한 인사, 그리고 이후에도 혹시 잊을지 모르는 인사를

오늘, 지금 전하려 합니다.

 

“당신이 있어 감사하다.” 

 mazzang11

 

 

 

무언가, 자각있는 여자가 되려는 적어도 1960년대 이후 태어난 한국 여성들에게 <전혜린>은 반드시 넘어야할, <질곡>이었다. <전혜린처럼 간주되는 것>은 일종의 <낙인>과 같았다.

 

얼마전, 어떤 중년의 남성 학자가 한국에 적응못하는 여성들의 태도를 <전혜린 병>이라고, 진심어린 충고를 하는 걸 보기도 했다.

역사적 사례로서, 전혜린이던, 누구던, 다 역사적 한계성을 지니며, 각기 계급적, 이념적 한계를 지닌다.

 

그러나, 유독 여성의 삶의 방식이나 여성 지식인들에 대해서는, 가혹하고, <전범적 가치>를 전적으로 부정하기도 한다.

전혜린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자기 반성을 모르는 남성 지식인들의 계몽주의적 장광설과도 결부된다.

 

물론 이런 계몽주의적 장광설이 남자만의 것은 아니다.

침묵 속에 길을 잃고, 자기 재현의 길을 잃어버린 어떤 존재들과

충고와 계몽과 정치의 이름으로 시끄럽게 범람하는 장광설의 틈새를

그 침묵과 장광설의 사이를,

그 사이의 언어를 갖고 싶다. 

 mazzang11

 

 

 

 

 

10월 15일 여성문학회에서 <불가능한 싱글 라이프>라는 제목의 발표를 했다.

전체적으로 지난 십년간의 페미니즘 연구의 공과를 논하는 자리였는데.

<오늘날> 페미니즘이 잘 안먹히는 이유, 혹은 요즘 젊은 세대가 페미니즘에 그닥 관심이 없는 이유에 대해 여러가지 논의가 제기되었다.

 

일단 주목을 요하는 점은, 대체로 자화자찬인 학계의 분위기와 달리, 이날 학회는 자기 비판에 진지해서, 재미있었다. 물론, 다소, 이게 페미니즘의 비관론이나 낙담론의 반영인듯하다는 느낌도 주었지만, 남 욕하고, 남 탓하기 바쁜 시절에 참으로 오래 들어보는 자기 비판이라 즐거웠다. 여러 흥미로운 이야기가 오갔는데. 그중 최근 젊은 여성들이 페미니즘에 관심이 없는 이유에 대해서 요즘 10대나 20대가 독립적인 의식이 희박하다느니, 취업준비에 바쁘다느니,,,따위의 관성적인 이야기는 정말 아주 조금, 언급되고(이런 점도 분명 잊지는 말자 정도)있었으나, 일단 무엇보다, 페미니즘 자체가 과연 이들에게 어떤 의미와 한계를 주는가를 점검하는 데 집중되었다.

 

두 가지 상이한 이유들이 흥미롭다고 생각되는데. 하나의 경우는 미국의 사례를 통해서, 이명호 선생님이 발표하신 내용 중에서, 미국에서 몇년 전에 벌어진 논쟁을 소개하시면서 소개해준 내용이 재미있었다. 요 논쟁서도 한국의 십대 '개새끼론'처럼 언니 페미니스트들과 "요즘 젋은 것들"에 대한 논란이 불을 땡겨서, 언니 페미니스트들이 정치 의식도 없이 노예근성에 사로잡힌 것들이라고, "요즘 젊은 것들" 맹렬비판했다가, 자폭했다는 둥의 이야기에 덧붙여 근의 젊은 세대 여성들이 페미니즘에 관심이 없는 이유에 대해 조사한 것 중

 

"페미니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었다.

하지만~~~~~~~남자를 뺏어갔다"

는 답변이 완전 재미있었다.

그렇지^^ 페미니즘은 지금 세대 여성들에게 <연애의 장벽> 으로 간주되거나, 페미니스트라는 것은 <남성의 기피대상>이라고 간주되는 게 현실이다. 다 집어치우고, 일단 연애를 하려면 페미니즘은 도움이 안된다. 아니 달리 말하면 페미니즘은 연애와 같은 삶의 디테일에 대한 새로운 윤리나 삶의 방식을, 적어도, 이들 "젊은 세대"에게는 전해주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정치적인 것에 대한 이론과 실천에 있어서, 삶의 세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전언은 어떻게 전달되어야 할까?

 

풀리지 않는 고민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한다. 사회주의이던, 페미니즘이던, 실상 정치적인 것에 관한 이론이 삶의 세부에 관여하게 될 때. 실은 어떤 <과도한 개입에 따른 도그마화>가 발생한다는 점 말이다.

어떤 원칙을 말할 수 있을진 모르지만, 삶의 세부를 재정의하고, 분석하는 것이 저어되는 점도 이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좋은게 좋은거다...라는 태도를 취하자는 건 아니지만, 현실의 간지를, 이론의 성긴 어휘로 얽어내는 것의 위험성에 대한 자기 경계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특히 삶의 정치를 논하는 이론적 입장일수록말이다.

 

그러하니.

페미니즘을 공부해도, 연애를 망치지는 않는다는, 아니, 페미니즘 때문에 <연애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그런, 느닷없는 이야기를 드리고 싶다는~~~~호호호

***아, 근데, 페미니즘이 현재 젊은 세대 여성에게 인기가 없는 이유, 특히 학문장에서...에 대한 진단은 아주 우울한 이야기인데. 실제로 한국에서 페미니즘이 전공으로 인정되지 않는 현실. 어떤 페미니즘 연구자도, <여성주의><여성문학> 등의 전공으로 교수가 된 사례가 없다는 점. 그날 거기 모인 모든 페미니즘 전공자 중 누구도 페미니즘으로 교수가 된 사람도 없을 뿐더러, 국문과나 영문과 같이 기존 학과에 정규직 교수로 재직중인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 그 자리에 참석한 학자들 중 3~4명도 안되었다는. 정년보장인 경우도, 교양학부교수이거나, 교양 관련 비정년인 경우가 대부분. 즉, 남성학자들이 선호하는 분야를 전공하지 않는 한 정년 보장 교수가 될 수 없다는 현실을 완전히 잘 보여주는 사례.

 

 

 

 


 

 mazzang11

 

 

 

세계 곳곳을 가본 곳은 별로 없지만,^^ 몇군데 가본 대학 중에 이른바 유명한 대학은 다들 <단체 관광> 열기로 몸살을 앓더라구요. 방학마다 자료 찾으며, 지하 서고에서 긴 시간을 보낸 와세다 도서관도, 넘치는 관광객 때문에, 결국, 일정 시간은 단체 관광과 해설 시간을 두고 있고, 이번에 잠시 다녀온 하버드는 아예 관광지가 되어 버려서, 곳곳에 <이 곳은 단체 관광이 안됩니다>라는 문구를 세워두고, 문 앞에서 출입을 제한할 정도라, 참 재미있는 현상이라는 생각도. 이번 미국행의 사진이나 에피소드를 시간되는데로, 간단하게라도 전하려 하는데. 시간이 여력이 참 안되네요. 생각날 때 짬짬이 올려볼게요.

 

아래 사진은, 하버드의 유명한 관광 사진 찍는 장소인데요. 며칠을 오가며 관심이 없었는데. 출발 전, 같이 간 분들과 그곳 분들의 <권유>에 힘입어, 저도 찍어보았어요.

이 동상은 이른바, 발을 만지면 <자식이 하버드 간다>는 전설로 유명하다나요^^ 해서, 난 <기원할 이유가 없다>고 몇번 고사했으나, 재미삼아 해봤어요.

이 동상에 얽힌 <비밀>이 있는데. 이 동상은 발을 만지면 자식이 하바드에 간다는 전설과 또달리, 세가지 거짓말의 표본이래요. 이 동상은 이른바 하바드 설립자 동상이라는데요. 그래서 전설이~

 

헌데. 실은

 

1. 이 동상은 공식 명칭은 존 하버드의 동상인데요 .(동상에 그렇게 적혀있네요) 실은 이 동상의 인물은 존하바드라는 사람이 아니래요. 실제 존하바드라는 사람 얼굴을 아무도 몰라서, 다른 어떤 사람 얼굴을 본따 만들었데요.

 

2. 이 동상의 공식 명칭은 <허버드 설립자 존 하버드 동상>이지만, 실은 존 하버드라는 사람이 허버드 설립자가 아니라네요. 에고, 그날도 알려주신 선생님이 3을 모르겠다 했다가, 단체 관광하는 가이드에게 물어봐서 알려주셨는데

 

역시 3번째 거짓말이 생각안나네요.^^

<발을 만지면 자식이 하바드에 간다>는 전설과 <.온통 거짓말일 뿐인 동상에 관한 이야기>,그리고, 동상의 공식 명칭 들 사이의 이 불일치가 참으로 재미있어서, 한컷.

잠시, 우리 삶이란, 이런, 공식의 언표와 전설과 거짓말, 진실과 기만과, 속고 속이는 하찮은 잔재주들과, 그 틈새에 번성하는 미신적 '믿음'과, 아주 잠시 얼굴을 내비치는 진실이라는 것 사이의 희극적이고 비극적인 유희에 다름 아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어요. 그리고, 우리 모두는 자신이 적어도 진실의 발을 만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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