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기웃거리기의 힘

 

 

 

 

소설가 金 飛 

 

 

 

 






  그러나 '괴물'이 되라는 말은 어쩌면 지금의 제도와 관습에 익숙해진 모두에게 폭력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스스로 지켜온 인간의 모습이, 돈과 물질과 권력에 의해서 조종되고 통제되며, 오직 그것들을 통해 의미를 가지는 타의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지금 당장 괴물적인 '인간'의 모습을 벗어던지고, 인간적인 '괴물'의 모습을 받아들이라는 이야기는 어불성설로 들릴 것이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던 것처럼, 그건 필연적으로 불안이나 흔들림으로 환기될 것이며, 당연히 두려움을 동반한다. 변해야 한다는 노력들은 또다시 강박이 될 것이며, 그건 오랜 시간이 걸려 우리들을 피로하게 만들면서, 결국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게 할지도 모른다. 모든 꿈을 꾸는 사람들이 그러하듯, 결국 그건 꿈을 이룬 자들을 위한 들러리가 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한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이건 아주 비겁하고 치졸하다고 손가락질을 받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이제 괴물적인 인간이 아니라 인간적인 괴물이 되기로 했으니, 그 따위 손가락질 쯤 껄껄 웃어 넘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나 자신도 '괴물'같은 용기를 끌어올려 건네는 제안이다. 어차피 획일적인 삶에서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는 만큼, 이 길고 지난한 삶의 시간 속에 '외도'라고 손가락질 받을만한 일 쯤은 스스로에게 선물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것이 바로, '기웃거리기'다. 


  모든 변화는 두근거림이다. 그것은 새로운 무언가를 기대하고 바라는 설렘이기도 하고, 또한 현재의 무언가를 포기해버려야 할지도 모르는 두려움이기도 하다. 이 말은 곧 모든 설렘은 필연적으로 두려움을 지녔으며, 모든 두려움은 반대로 반드시 설렘을 동반하기 마련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모든 새로운 것 앞에서 우린 '두렵다' 혹은 '설렌다' 말하지만, 그건 결국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선택한 감정일 뿐, 그 어떤 새로운 것도 우리를 두렵게 하거나, 혹은 설레게 하지 않는다. 모든 변화는 두근거림이며, 또한 똑같은 심장박동이다. 

  앞에서 나는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억압하는, 이 경계로 나누어진 세계에 대해서 말했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을 사는 우리들은 어떤 모습으로든 이 세계의 억압이나 불안을 절감하고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시간을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정체성의 문제일 수도 있고, 환경적인 문제일 수도 있으며, 혹은 사랑이라는 관계에 대한 문제, 직업이나 취미에 대한 문제일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변화를 꾀하는 데 있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털어내는 일이다. 어떤 변화 앞에, 자신의 두근거림이 두려움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억지로 그것을 설렘이라고 자신에게 강박적으로 환기할 필요는 없다. 설렘의 두근거림을 지녀야 한다는 강박 대신에, 자신이 느끼고 있는 두려움을 먼저 조금씩 지워내는 일이 먼저다. 그러나 그것이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일까? 공포에 질린 누군가가, 자신이 심장박동을 제어할 수 있을까? 물론 그건 불가능하다. 그래서, 내가 제안하는 것이 바로 '기웃거리기'다.  


  어떤 경계가 있다. 당신은 경계 안쪽에 있다. 그러나 그 경계가 당신을 억압하고 불안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경계 너머의 무언가가 자꾸 당신을 끌어당긴다. 경계의 안쪽은 비인간적이며 괴물적이고 폭력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당신은 결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경계의 안쪽을 포기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경계로 다가가라. 


  그리고 두 발은 여전히 경계 안쪽에 단단히 디딘 채, 고개를 길게 빼서 경계 너머를 기웃거리는 것이다. 경계 너머에 있는 그들과 눈인사라도 나누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며, 가능하다면 그들과 몇 마디 이야기라도 나눌 준비를 하는 것이다. 

  분명히 그게 무슨 짓이냐고, 누군가 손가락질을 해올 것이다. 특히 당신이 의지하고 있던 경계의 안쪽에, 그 안온함과 권위, 혹은 계급은, 불안의 손가락이든, 비난의 손가락이든, 그게 아니라면 위협의 손가락이든 당신의 눈앞에 내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때 당신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당신이 디디고 서 있는 경계 안쪽의 두 발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어떤 비난과 위협의 손가락이 당신을 가리키게 되더라도, 당신은 자신이 디디고 있는 두 발의 단단함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언제든 돌아가겠다는 비겁함도 좋고, 너무 힘들다면 그저 경계 너머의 형편없음을 알기 위해 기웃거리는 중이다, 비겁하고 야비한 핑계도 상관없다. 기웃거리기 위해, 결코 당신은 당당하거나 떳떳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는 내게 성정체성 문제로 상담을 해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양쪽 모두의 가능성을 다 염두에 두라고 강조한다. 가능하다면 의료적 조치 이전에 양쪽 모두의 생활을 다 해보라고 이야기한다. 어느 정도 시기에는 여자로 살아보고, 또 다른 기간에는 남자로 살아보는 일을 직접 시도해 보라고 조언한다. 그저 반대성의 옷을 입고 사람들을 만나는 정도가 아니라, 반대성의 정체성을 스스로 인식하며, 스물네 시간 그 역할에 맞추어 스스로의 행동을 조절하는 것이다. 여자가 되고 싶은 트랜스젠더라면, 여성으로 옷을 입고 외모를 가꾸는 것만큼, 자신이 가지고 태어난 육체적 성인 남자로서 행동하고 남자의 성 역할을 최대치로 시도해보는 것이고, 반대로 남자가 되고 싶은 트랜스젠더라면, 남성의 옷을 입고 남성의 태도를 보이는 것과 함께, 여성인 자신의 모습으로 자신을 이완시켜 조금은 중성적인 여성의 모습으로 살아볼 것을 권한다. 그것마저도 자신과 맞지 않다면, 남자이거나 혹은 여자의 정체성을 모두 던져버리고, 어떤 때는 남자의 정체성으로, 또 다른 때는 여자의 정체성으로 이리저리 오가며 살아가는 것도 괜찮다고, 나는 감히 이야기한다. 자신의 두 발이 '인간'의 정체성을 단단히 디디고 있다면, 나는 그 어떤 것도 문제 될 것은 없다고 힘주어 말한다. 


  야비해도 괜찮다, 비겁해도 상관없다. '인간'을 잃고 있지 않다면, 당신은 어떤 경계를 넘어서든 상관없는 일이다. 


  기웃거림이라면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우리가 디디고 있는 두 발의 단단함을 믿고 있다면 어디로든 우리는 넘어설 수가 있는 것이다. 자신이 학생의 경계 안에 있다면, 그 경계의 끄트머리까지 달려가서 경계 너머를 기웃거리며 들여다볼 수 있는 일이고, 자신이 직장인이나 가족의 경계 안에 있다면 그 경계 끄트머리까지 달려가 그 너머를 슬쩍 들여다보고, 언제든 돌아서겠다는 마음가짐을 잃지만 않으면 되는 일이다. 혼자서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어느 방향으로든 자신이 위태롭다고 생각하는 경계의 끝까지 달려가, 마음껏 그 너머를 기웃거리다가 돌아오면 되는 일이고. '인간'이라는 단단하게 디디고 있는 두 발의 의미를 잃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나 생각만큼 첫걸음을 떼어 놓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수십 년 동안 자신을 길들여왔던 생각에서, 사고에서 벗어나기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다. 분명히 강박이고 선입견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한계를 넘어서는 일은 본능적인 거부감을 일으키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들에게 필요한 건, 우리들이 가지고 있던 어떤 생각이나 신념, 혹은 믿음도 지우지 않으며, 그 위에 모든 것들을 새롭게 만드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업데이트'다. 飛 





 

 

[생의 뜨락] ‘아무 말’, 불현듯 그 곳에 가고 싶게 되는.


 


최혁규(문화연대)


 

 

 

현재 문화운동은 어디쯤 머물러 있으며 어딜 향해 가고 있을까? 거리를 배회하며 술집을 어슬렁거리고 영화의 언저리에서 기웃거리다 보니 어느새 지금의 나는 활동가로서 문화운동을 고민하고 있다. 그리고 또한 시민운동의 안팎에서 기존의 시민운동에 대한 비판적 견해와 함께 새로운 시민운동을 논의하고 있듯이 지금 이 현실에서 어떤 시민운동이 가능할지에 대한 고민도 함께 하고 있다. 하지만 내 열정과 열정의 부족인지, 혹은 기존의 운동에서 물려받은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실무에 대한 피로감 때문인지 그게 생각만큼 녹록치 않다. 원인이야 무엇이든 일단 현상에 대한 진단을 해보면, 몸도 마음도 뻑뻑하니 스스로가 메마르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아폴리네르도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정신이 메마를 때는 아무 말이나 써놓고 곧장 앞으로 나가라”고. 그래서 이 글은 추동력을 얻기 위한 ‘아무 말’이다.

 

이전의 나를 돌이켜보니 이렇다. 비싼 등록금을 낸 학교엔 제대로 나가지도 않고 이곳저곳을 방황하고 돌아다녔다. 반항아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모범생도 아니었다. 갑자기 스무 살의 문턱을 넘자 그냥 모든 것이 지리멸렬해졌고, 술에 젖어 하루를 잊은 채 잠이 드는 게 좋았었다. 그러다 어떤 계기를 통해 시네마테크에 발길을 들이게 됐다. 그리고 그 곳에서 하루 줄곧 영화를 몇 편 보고 밤이 되면 거기서 만나게 된 친구들과 술잔을 부딪치며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 당시를 돌이켜보면, 그러다 보니 그 공간이 너무 소중해졌고 영화가 어떻게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새록새록 피어나기 시작했다. 누구의 말마따나 나에게 시네마테크는 학교였다. 또한, 놀이터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공간이 사라질 위험에 닥치게 되었고 나 포함 시네마테크에 애정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시네마테크를 지켜내는 게 정말 절실한 문제였다. 그때를 생각해보면 어떻게든 영화에게 진 빚을 갚고 싶었던 생각뿐이었다. 지금 그 당시의 릴레이 글 중 내가 썼던 글을 다시 읽어보니 여전히 그때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때 거대한 숲 속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다. 그때는 그곳이 밀림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숲길을 따라가기도 하고, 숲길을 개척해 나가기도 한다. 그 길의 초석을 마련해준 곳이 시네마테크다. 장황한 밀림 속에서 방황하고 갈피를 못 잡던 나(혹은 우리)에게 친절하게 여러 길을 안내해주고, 설명해주고, 쉬어갈 수 있게 해주는 인심 좋은 노인 같다고나 할까. 이 분은 모진 풍파를 견뎌낸 일화들을 즐겁게, 때론 슬프게, 때론 무섭게 이야기한다. 그리고 나 또한 그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으며(가끔은 졸기도 하고) 가야 할 길을 묻곤 한다. 시공간을 넘어선 영화와 대화, 동행자들과 대화, 그리고 곧 다가올 대화들. 숲길에서의 대화는 가끔 모진 돌에 걸려 넘어졌을지라도 다시 몸을 일으킬 수 있게 해준다. 시네마테크는 내게 그런 존재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을 만나서 영화 이야기를 하면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자주 있었다. “나도 한때는 영화 정말 좋아했었는데” 혹은 “나도 너만 할 때는 영화광이지” 등의 말들이었는데, 그 말들을 들었을 때의 나의 반응은 항상 하나였다. 나는 누군가에게 영화를 좋아한다는 말을 과거형으로 하고 싶지는 않다, 나에겐 항상 현재진행형이었으면 좋겠다고. 시네마테크에서 내가 처음 본 영화는 루이스 부뉴엘의 <잊혀진 사람들>이었다. 이 영화의 제목을 비유해서 이야기하자면, 지금도 앞으로도 나는 영화에게 잊혀진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글을 쓰다 보니 나는 항상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도 내가 원하는 것이 현재에도 내 삶을 구성하는 요소가 되길 바라는 것처럼 누군가도 그럴 것이라고.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그렇게 꾸려 나갈 수 있어야 한다고. 아직도 해야 할 일들이 눈앞에 산더민데 이렇게 글을 쓰다 보니 불현듯 그곳에 가고 싶다. 이 아무 말이나 써놓고 그곳으로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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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혁규
문화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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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아름다운 길

 

 

 

 

소설가 金 飛

 

 

 

 

 

 

  '변이'란 똑같은 종에서, 나이와 성별에 상관없이 서로 다른 종류와 모양, 혹은 개체를 가지는 것을 말한다. , 변이는 처음부터 정상, 혹은 비정상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 혹은 또 다른 하나의 개념으로 이해되어야하는 것이다.

  질서와 균형을 획일성이나 통일성으로 이해하고 있는 현대인들은, 자신과 다른 누군가를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이해하는 잘못된 습성을 지녔다. 정상과 비정상의 범주는 결국 주관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똑같은 자아를 가진 누군가를 존중하는 법 대신에 그들을 지배하고 그 우위에 서려는 집착을 드러내면서, 필연적으로 인간은 자신과 다른 누군가를 짓밟으려는 '괴물성'을 지녔다.

  자아의 영혼을 살찌우고 충만하게 하는 법을 채득했던 것이 아니라, 겉모습의 미추(美醜), 계급의 고저(高低)만을 보고 판단하는 습성을 지닌 현대인에겐, 처음부터 타인을 판단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었다. 한 인간의 내면이 어떤 모습이건간에, 그들의 외모가 자신들이 판단하는 '' 혹은 '화려함'에 부합하면 자동적으로 그것을 '긍정적'으로 치환해버고, 그 반대의 경우에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들을 나쁜 사람, 혹은 자신과는 다른 하등한 존재로 치부해버린다.

  그렇게 인간의 자아가 결여되어있는 이들은, 또한 언변이 뛰어나며 목소리 또한 크다. 누군가를 마음으로 움직이는 법을 배우지 못한 그들에겐, 모두를 단번에 끌어모으는 구호나,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하는 언변으로 자신의 권위와 지위를 유지하려 애를 쓰게 되는 경향이 있다. 그들에게는 자신들만의 논리와 이성이 따로 존재하며, 진실되게 마음을 울리는 그 어떤 경구(警句), 그들에게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권위를 뽐내기 위한 자랑거리로 전락해버린다. 그로 인해 추앙받고 존중받는 일들을 즐기면서 자신은 누구보다 단단하고 흔들리지 않는 인간적인 자아를 지녔다고 믿고 있지만, 그건 그것에 귀를 기울여줄 군중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두 한꺼번에 허물어지게 될, 화려하게 눈을 현혹하는 가면에 불과하다.

  자신의 삶을 나날이 새롭게 하는 창의적 방법을 모르는 그들에게는, 오로지 돈만이 유일하게 새로운 것들을 가져다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수십 수백 가지의 새로운 것을 돈으로 사들이고 그리고 너무도 쉽게 그것들에 흥미를 잃고 또 다시 새로운 무언가를 사들이지만, 돈이 자신의 영혼을 위로하는데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 수 없다. 또 다시 기계 속 부품 하나가 되어 거대한 무언가가 굴러가도록 하는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그렇게 소외되고 버려진 스스로의 자아는 어딘가에서 잔뜩 쪼그라들어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전혀 깨닫지 못한다.

  외향적으로나 태생적으로나, 그들은 자신과 다른 존재를 너무도 쉽게 '괴물'이라고 지칭하며, 그들에게 혐오를 드러내는 일을 망설이지 않는다. 자신과 다른 누군가, 혹은 자신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누군가를 괴물로 만들어야만 자신은 그토록 간절히 원하는 '인간'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기에, 그들을 향한 손가락질과 상처를 주는 말들은 더욱 무차별적이 되고 또한 무자비해진다.

 

  스스로 그토록 인간답고 이성적이라 말하면서, 자아를 잃어버린 그들은 그렇게 조금씩 괴물의 꼬리를 키워가고 있는 것이다.

 

  돈의, 물질의, 외향이나 계급의, 그리고 누군가가 그어놓은 경계의 하수인이 되어버린 그들이야말로, 참된 '인간'의 의미를 잃어버린, 기계의 톱니바퀴 하나를 닮은 '괴물'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괴물이 된 서로가 오로지 더 높은 계급, 더 많은 물질만을 추구하기 위해 발버둥치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로지 승리만을 위해 괴물적으로 집착하면서, 반대로 도태나 패배를 삶의 모든 것이라 규정하며 스스로의 삶을 모두 포기해버리는 극단적인 짓까지도 서슴치않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삶보다, 인간보다 더 위에 있는 것은 없다.

 

  우리는 인간의 삶을 살고 있다. 그러니 그보다 더 상위에 놓아야할 가치나 제도, 혹은 물질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들은 인간을 중심으로 순환되어야하는 일이며,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는 결국 인간을 위한 것이 되어야한다. 교육이란, 인간에게 인간의 의미와 가치를 심어주고 그 위에 제도와 물질의 의미라는 가지를 자라게 하는 것이어야하며, 나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그 명제 하나만으로도, 모든 타인은 나만큼이나 소중하고 존중받아야 할 증거라는 사실을 배워야한다.

 

  나는 경계로 인한 모든 불안과 억압을 떨치고 일어나는 방법을 말하기 위해 '변이'에 대해서 말했고, 그리고 다시 '인간'에 대해 힘주어 말하고 있다. 변이와 인간은 서로 다른 것이라고 여겨지지만, 그래서 사람들은 그걸 '괴물'이라고 부르고 자신도 모르게 우리들도 괴물이 되어버리긴 했지만, 그렇다면 나는 이제 우리 모두 '아름다운 괴물'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다른 누군가가 되려고 애를 쓰고 그 누군가가 되지 못해서 전전긍긍하며 나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존재하는 괴물성, 내가 원하지 않았지만 내게 주어진 세상의 경계에 대한 억압이나 불안을, 오히려 즐거움으로 인식하는 참으로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인 '괴물'이 되라고 말이다. 세상이 규정하는 보통 사람이 되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불안해하며 좌절하는 대신, 세상이 말하는 '보통'이나 '정상'과는 다른 나의 모든 것들을 오히려 더욱 소중한 나만의 것으로 만들어, 내 삶의 또 다른 정체성으로 만들어가는 그런 '괴물' 말이다.

  사람들과 한데 어우러져 사는 공동체적 세계에서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느냐 말하겠지만, 우리들은 이미 그런 '아름다운 괴물들'을 너무 여러번 목격해왔다. 장애나 가난, 혹은 다른 종류의 소수성이나 특수성은 획일적인 이 시대에 당연히 스스로를 억압하고 불안하게 만드는 근원이겠지만, 그들은 그것에 짓눌려있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딛고 일어서 세상이 말하는 인간적 삶을 뛰어넘는, 아름다운 괴물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괴물'이라는 한계를 끌어안고 태어나, 자신이 그런 '괴물'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면서, 그 어떤 인간도 구현하지 못한 참된 인간성을 보여주며 인간됨을 증명한다는 사실은, 이 사회가 매달리고 있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괴물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확실한 역설일 것이다.

 

  성전환자라는 이름의 내 안에도, 다른 사람들과 같은 평범한 인간이 되고자하는 집념 따윈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불안이나 혼돈을 지우기 위해, 그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너무 오래도록 발버둥치면서, 나는 그걸 모두 다 소모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오히려 나를 일으켜세웠던 것은, 이젠 내겐 아무런 선택이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이미 나는 경계를 넘어섰고, 경계 너머는 내가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그런 이상향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나는 그것이 오히려 더욱 심각한 불안과 억압을 내게 주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게 남은 것은, 또 다시 지금과 똑같은 속도로 지난하게 흘러가는 시간 뿐, 어차피 내게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무기력한 현실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이,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이, 오히려 나를 편안하게 이완시켰다. 텅 빈 존재가 되고 나니, 어디로든 마음껏 흔들리며 날려가는 나 자신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사람들이 '괴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어딘가로 나 자신을 띄워보내면서, 그제서야 나는 조금씩 내가 찾고자 했던 것을 알게 되었다. 남자나 여자 따위의 정체성이 아니라, 참으로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인간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었고, 창의적이고 즐거운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시간을 가질 수가 있었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도, 나 자신에 대해 남자나, 혹은 여자라는 정체성을 강조하고 역설하는 대신 그저 편안한 대로 판단하시라 말했더니, 아무런 강박이나 억압도 없는 가벼워진 나와 이야기를 나누던 그들은, 자연스럽게 나를 여성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나는 조금씩 억지로 만들고 꾸며진 내가 아니라, 진정으로 순수한 나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분명히 남자, 혹은 여자로 나뉘어진 세상의 눈에 나는 '괴물'처럼 보이겠지만(실제로 내 홈페이지에 글을 올린 몇몇 사람들은 그런 악의적인 말들로 나를 지칭하기도 했지만), 나는 그제야 ''라는 하나의 인간의 정체성을 천천히 알게 되었다. 그것은 참으로 고마운 깨우침이었으며, 가벼워진 인간만이 얻을 수 있는, 참된 인간의 무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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