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업데이트 혹은 판올림

 

 

 

 

소설가 金 飛 

 

 

 

 


 

   '날마다 새로워지고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사실 우리는, 날마다 '구식'이 되어가고 있다. '급변하고 있다'고 묘사되는 이 세계의 미친 속도는, 날마다 우리 모두를 구시대적이고, 고리타분한 시간 속에 던져놓고 만다. 우리들은 그저 제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는데, 어느새 우리는 시대를 따라 뛰고 있는 근육질의 사고를 하는 인간들의 무리 가장 끄트머리에서, 질질 끌려가며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근육질의 사고와 생각으로 뛰고 있는 그들도, 최첨단의 이름을 부여받지는 못한다. 결국, 그들도 자신들의 앞에 누군가를 따라 정신없이 뛰고 있을 뿐이다. 그토록 있는 힘을 다해 뛰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몸짓은 그렇게 시시각각 변하며, 온몸에 미래와 희망이라는 피를 돌게 하는 심장의 펌프질은 그토록 절박하게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 또한 고작 외향적인 몸짓을 커다랗게 불리고만 있는 짓일 뿐, 생각이나 사고란 애초부터 그렇게 '미친' 속도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욱 빠르고 세심한 속도로 움직이는 생각과 사고란, 그래서 더욱 느려지고 지난한 것일 뿐, 이 세계의 미친 속도를 따라 움직이는, 그런 근육질의 사고와 생각은 절대 같지 않을 것이다.

 

  그건 생각이 아니라, '기계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명령이거나 혹은 복종일 뿐이다.

 

   근육질의 몸집으로 누군가를 따라 최전선에서 뛰고 있든, 그 중간 즈음 어디에서 무리에 휩쓸려 어정쩡한 모습으로 뛰고 있든, 맨 뒤에 질질 끌려가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무리의 끄트머리에 매달려있든, 그럼에도 우리는 스스로 날마다 또다시 변화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진보든 보수든, 미래지향적이든 과거 회귀적이든, 모두가 지금 이 순간 날마다 '구식'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생각이나 사고의 새로움이란 기계처럼 레버를 올려갈 수 없으니만큼) 급변하고 있다고 말하는 이 시대의 '미친' 속도는, 우리들의 사고를 새롭게 하려고 뒤따라야 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우리는 날마다 구식이 되어가다 못해, 스스로 믿고 있는 것들을 맹신하며, 자신들의 생각을 '미친' 속도로 합리화하며 이미 '구식'이 되어버린 것들에 사로잡혀 있다. 가장 '최신의 구식'이 되어야 한다는 필요성도 절감하지 못한 채, 서로 다른 지점에 스스로 생각의 뿌리를 박아놓고, 그 위에 가지를 뻗어, 사람들의 발길을 엉뚱한 곳으로 이끌어놓고 만다. 뿔뿔이 흩어지며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내달리고 있는 그들이 향하고 있는 거기는, 모두가 그토록 간절히 바라는 '밝은 미래'도 아니요, '안정되고 평화로운 세계'도 아니다.

 

  거긴 그저, 언젠가 고립된 자신을 발견하게 될

어두운 모퉁이일 뿐이다.

 

   업데이트가 필요하다고 말했던 건, 그런 이유다. 업데이트란 '판올림'이다. 언뜻 생각하면 그건 전환이나 치환처럼 들리겠지만, 판올림은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혹은 하나의 것을 다른 것으로 바꾸거나 옮기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업데이트에는 바뀌는 것이 존재하지만, 바뀌지 않는 것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 변화이며 혁신이기는 하지만, 그건 포기하거나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다. 판올림은, 변화를 변화시키는 것이며, 혁신이란 이름에 다시 한 번 또 다른 가능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저 변화를 꾀하고, 가능성을 부여하는 일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또 그 위에 또 다른 변화를, 또 다른 가능성을 부여하며, 모든 것을 그 자리에 머물게 하지 않는다. 언제나 새로운 에너지로 이미 새로워진 것에 다가가며, 또다시 그것을 다른 층위로 도약시키려는 새로운 세계를 꿈꾼다. 변화가 시작되고, 가능성이 현실이 되기 시작할 즈음에, 이미 우리들의 머릿속은 몇 번씩이나 새로워지며 더 먼 미래를 꿈꾸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업데이트, 혹은 판올림의 진정한 의미다.

 

   그렇게 시시각각 새로워질 수 있는 생각의 판올림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열린 시각이 중요할 것이다. 이 세계의 모든 현상, 모든 현실에 닫혀있고, 또한 등을 돌리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경계 안쪽에 갇혀 있거나, 상자 속에 갇힌 것에 불과하다. 기껏해야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전환을 위해, 똑같은 강박으로 또 다른 불안에 떨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가능성을, 모든 변화를 떠올리며 자신만의 방향성을 찾는 것이, 진정한 판올림이며 또한 업데이트이다.

   업데이트의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바로 시기의 규칙성이다. (각자에게 알맞은 판올림의 시기는 모두 다 다를 테니) 일정한 시기를 정해 스스로 생각이나 사고, 혹은 생활 방식을 점검하고 새롭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어떤 경계 너머를 들여다보는 일이니, 당연히 불안을 동반하겠지만, 그때마다 자신이 딛고 있는 두 발의 힘을 믿어야 한다. 이것이 경계를 넘는 일이거나 전환이 아니라, 그저 어딘가를 향해 길게 목을 빼 기웃거리는 것에 불과한 '업데이트'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몰랐던 것을 깨우치는 일이며, 그것은 또 다시 어떤 방식으로든 나의 삶을 새롭게 할 것이고, 나는 또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며 다른 가능성을 떠올리고 생각하면서, 날마다 나의 삶은 새로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여기, 오늘도 구식으로 사는 우리가 있다. 머릿속에 든 모든 것들은, 내가 오늘 또다시 마주한 이 현실은, 금세 내 앞을 지나치며 업데이트라는 임무를 내게 떠넘기고, 과거 속으로 사라져버릴 것이다. 내가 이해하고 깨우치고, 고개를 끄덕인 모든 생각과 신념은, 또 다른 가능성을 그 위에 부여해야 하는 밑그림일 뿐, 절대 흔들리지 않는 진리도 아니며,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계시도 아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동쪽에서 떠올라 서쪽으로 지는 태양뿐, 아니, 어쩌면 인간들이 모르는 사이, 우리들이 변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는 태양도, 날마다 조금씩 다른 각도로 지고 있는 건지도 모르는 일이다. 인간보다 더 빠른 속도로 시시각각 변하며, 인간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하는 격변을 위해 준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 디디고 있는, 이 변하지 않는다고 맹신하는 자연의 이치인지도.

 

   또다시, 두려울 것이다. 결코, 납득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달라져야 하는 것은, 결코 한곳에 머무르지 않는, 여기 이 시간을 사는 우리 인간의 책무다. 언제나 거기에 머물러있는 것을 자책하며 불안하게 느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서 있는 바로 그 자리가 아니라, 우리들의 머릿속에 기억으로 새겨진 어떤 흔적일 것이다. 물론 그 위에 다른 모양의 시간을 기록해야 하는 임무가 내일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고. 飛 


 

 



此生輪廻: 이상(李箱연구노트


  (design by 김비)

 

 

 

2회: 이상의 그리스도, 제로에의 의지


 

윤인로



1) 이상(1910~1937)이라는 작가에 대해 이렇게 써도 좋을까. 근대와 그 정신의 어떤 불모에서 시작했던 자, 시작과 동시에 좌초를 직감했던 자, 폐허와 공포 속에서 전율할 수만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장전할 수밖에 없었던 자, 폐허라는 공포 속에서만 시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근대의 방법이자 태도였던 기하학으로 충전할 수밖에 없었던 자. 그런 이상의 형상은 다음 한 문장을 받아쓰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아무런 정신의 땅이 없었던 당시의 현실에 주목해서 바라볼 때, 기독이라든가 기하학으로서의 자기 충전은 충분히 불가피한 분출구였는지 모른다.”[김주연, <시문화의 의미와 한계>, 김용직 편, <이상(李箱)>, 문학과지성사, 1977, 146] 이상의 기독(基督), 이상이라는 그리스도. <각혈의 아침>에서 자신을 불세출의 그리스도라고 치겠다는 한 문장을 보았을 때, 그것은 우스웠고 이상했다. 그런데, 이상이 작성한 두 개의 이미지-시에 골몰하면서부터 이상이 말하는 최후의 종언’(<얼마 안되는 변해>)에 대해, 그 파국에의 의지에 대해 미약한 논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강의실의 학생들에게나 옆 사람에게 거듭 이상의 그 이미지들에 대해 말하면서 논리를 풀었다. 책임의사 이상이 반복하며 변이시켰던 그 두 개의 진단서, 두 개의 이미지-시란 바로 <진단 0:1>(<조선과 건축>, 1932. 7)<오감도 시 제4>(<조선중앙일보>, 1934. 7)이다.

 


 

   



 

2) <오감도(烏瞰圖)> 또는 <조감도(鳥瞰圖)>. 조감도는 투시도와 먼 거리에 있질 않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전지적 시점에서의 관찰, 해부, 투시. 그것이 이상의 조감도다. 전지적 조감은 전체를 인지하는 신의 시점과 멀지 않다. 그런 신의 시선을 통해 이상은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식민지 근대를 상품의 거대한 집적체로, 그 상품들의 교환 효과로, ‘세계의 세속화된 신으로 경배받는 화폐의 절대적 힘의 관철로 투시(透視)해낸다. 그 투시의 속성은 엑스선(X-ray)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한 번쯤 찍어보았으니 얼마간 알지 않는가. 엑스선에 의해 투시된 물체는 그것이 무엇이건 희고 검은 회색의 계열로 드러날 뿐이다. 이상은 이렇게 쓴다. “까마귀는흡사공작과같이비상했고, “그리하여무엇이건모두회색(灰色)의명랑한색조”(1: 233)로 현상하게 된다고. 까마귀()의 시선(), 그것은 그렇게 세계를 온통 투시된 회색으로 인지하는 삶의 방법이자 태도다. 일단 이렇게 요약해 놓자. 여기 조감하는 까마귀 한 마리가 있다. 그 새는 전지적이기에 신적이다. 그 신의 시선은 투시하는 엑스선이다. 식민지의 수도 경성의 모더니티가, 결핵성 뇌매독을 앓는 이상 자신의 몸이, 연인과 우정과 가족이라는 타인과의 관계가 바로 그 엑스선에 의해 관통되어 이면의 회색으로 드러난다. 이는 이상이 경성 미쓰코시 백화점의 위용을 일말의 매혹이나 두려움 없이 앙상한 철골과 유리로, 그것들을 접합하는 수식과 방정식으로 투시했던 것과 등가이다. 이상은 그렇게 투시하며 걷는 까마귀/신이다. 그는 경성의 모더니티 속을 걷는, 혹은 그 위를 날고 있는 산보자이다. 그런데 그가 걷는 곳은 모더니티의 수도파리가 아니었다. 죽었다 깨도 그는 파리의 산보자일 수 없었다(그리고 그 사실조차가 이상의 엑스선에 의해 투시된다). 그는 걷되 모조되거나 위조된 근대의 경성을 걷는 중이다. 걷되 절름발이로 걷는다. “아아이부부는부축할수없는절름바리가되어버린다무사한세상이병원이고꼭치료를기다리는무병(無病)이끗끗내잇다”(1: 99) 절름거리는 신, 불구의 신은 말한다. 무사태평한 근대성이야말로 병원이라고, 치료되어야 할 질환을 가졌음에도 병이 없다고 믿는 이들이 바로 근대를 사는 사람들이라고. 그러므로 이제 근대라는 질병을 진찰했던 책임의사 이상의 진단서 두 장을, 오감도라는 신의 투시도를 보면 되겠다.

 

3) 위에 인용된 이미지-<오감도 4>의 거꾸로 된 숫자열에 대해서는, 가치체계의 전도(임종국), 수적 환상과 양가치적 표현(김종은), 욕구와 현실의 균형 붕괴(정귀영), 원순열의 선순열로의 치환(송기숙) 등의 해석이 있다. 이상전집의 편집자 중 한 사람인 이승훈은 <오감도 4>에서 이분법적 합리주의의 대립들을 읽는다. 합리주의와 비합리주의의 대립, 질병과 건강의 대립, 남녀의 대립 등등. 그는 진단의 결과를 가리키는 진단 01’이라는 한 구절에서 무(0)와 유(1)의 대립, 나아가 죽음과 생활의 대립을 읽는다. 이와 같은 독법의 카테고리 안에 <오감도 4>에 대한 최근의 연구들 또한 들어 있다. 내게 <오감도 4>는 당시 병참학(logistics)의 규율체제로 재편되고 있던 근대성의 운용을 메시아적 파국의 입장에서 재정의하도록 이끄는 텍스트였다. 그런 사정은 근대성의 문제를 다시 다르게 끌어안을 수 있다는 믿음의 조건을 되씹어보도록 한다. 이렇게 물으면서 시작하자. 저 두 장의 진단서에 내장된 반복과 차이는 어떤 힘을 내뿜는가.

 

4) <진단 0:1>은 일본인 독자를 염두에 둔 월간지에, 일본의 국어로, 김해경이라는 본명으로, <건축무한육면각체>의 계열로, 시가 아니라 만필로 기고되었다. <오감도 4>는 조선인이 읽는 일간신문에, 조선어로, 본명을 가린 이상이라는 이름으로, <오감도>의 일련번호를 달고서, 시로 기고되었다. 하지만 나열해 놓은 이 차이들의 의미는 끝내 잠정적일 수밖엔 없다. 위의 두 텍스트는 의미의 공백을 품은 채로 기호화되어 있으며, 너무 간소화되어 있고, 그 두 텍스트가 이루고 있는 각각의 계열들 또한 일관된 하나의 의미로 집중되지 않고 흩어져있기 때문이다. <진단 0:1>에 있는 어떤()’이라는 단어가 <오감도 4>에는 없는 것이 특별한 의미를 지닌 건지는 확정할 수 없다. 통념적으로 불특정 다수를 가리키는 어떤이라는 단어가 없어진 <오감도 4>가 거울 속의 자신을 진찰할 수 없음에 섭섭해하던 이상의 자가진단이라고 볼 여지가 있지만, 그 여지 속으로 위의 두 텍스트가 갖는 차이의 효과가 모두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잠정적인 것 속에서도 확실한 것은 위의 두 텍스트를 병치시켰을 때 드러난다. 가만히 보면 <진단 0:1>의 똑바로 선 수열의 데칼코마니된 거울상이 <오감도 4>의 수열임을 알 수 있다. 수리적 합리성의 인과율과 수량화가 근대적 폭력의 원천들 중 하나가 맞는다면, 저 데칼코마니 속에서 전개되고 있는 수열의 의미야말로 책임의사 이상이 진단한 근대의 질환과 직결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내게 <진단 0:1><오감도 4>의 공통적 반복을 가리키는 가장 선명한 한 구절은 이것이다. ‘0으로 도달하는 급수운동’.

 

5) 경성고등공업학교의 건축과에서 기본적인 수학과 작도법을 익혔던 이상은 급수라는 것이 일정한 법칙성을 따라 증감하는 수의 배열임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수학자 김명환은 <진단 0:1>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고 있는 콤마들을 소수점으로 본다. 그때 이상의 수열은 한 줄씩 아래로 내려갈 때마다 10분의 1씩 곱해짐으로써 0으로 수렴해가는 등비급수였다. 수학자의 이상론. “첫째 줄에 모든 숫자가 소수점의 영향을 받지 않은 채 온전하게 나열된 것을 합리주의적 세계관에 의하여 완벽하게 장악된 세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면, 책임의사 이상은 그러한 합리주의의 질환을 가진 세상의 미래가 소멸하리라는 진단을 내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김명환, <이상의 시에 나타나는 수학기호와 수식의 의미>, 권영민 편, <이상문학연구 60>, 문학사상사, 1998, 171] 이 한 대목에 들어 있는 합리주의의 질환이란, 이미 이상의 한 구절 1234567890의질환의구명과시적(詩的)인정서의기각처 복창하고 복기한 것이었다. 구절 속에 들어 있는 ‘12345678890’<진단 0:1>의 첫 줄에 있는 수열과 다르지 않다. 이윤을 목표로 하지 않는 시적이고 반성적인 감응의 수수와 증여, 그 마음의 전 과정을 기각해버리는 폭력의 자리. 그렇게 기각하고 소각하지 않으면 자신을 재생산할 수 없는 시스템의 운용원리. 바로 그 통치적 합리성이야말로 <진단 0:1>의 수열이 겨냥하고 있는 타켓이다. 삶을 인도하고 견인하고 배양하는 사목적(司牧的) 통치성의 표상으로서의 ‘1234567890’이 가진 호명과 관리의 권력이 ‘0.123456789’로 극소화되는 과정, 그렇게 제로로 수렴해가는 바로 그 과정/소송이란 무엇인가. 이윤을 위한 법, 이윤이라는 법을 향해 직진하는 통치이성의 끝장이며, 그 최후로의 육박이자 그 육박의 궤적이다.

 

6) <진단 0:1><오감도 4>의 병치를 다시 보자. <진단 0:1>의 가로쓰기와는 달리 <오감도 4>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읽도록 세로쓰기로 인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은 일간신문의 세로쓰기 편제를 모르지 않았겠지만, <진단 0:1>을 데칼코마니한 <오감도 4>가 위에 인용한 이미지 그대로 인쇄될 거라고 예상했었는지는 확언할 수 없다. <오감도 4>를 인쇄된 그대로 읽으면 <진단 0:1>에 이어져 있는 희미한 차이를 감지할 수 있다. <진단 0:1>의 진단서가 ‘1234567890’에서 ‘0.123456789’로 나아가는 제로로의 수렴이었다면, <오감도 4>의 진단서는 ‘1111111111’에서 ‘0000000000’으로의 전면적이고 전폭적인 전환 혹은 전복으로 드러난다. 이상에게 제로()시스템의 절멸이자 재시작을 위한 영도(零度)였다. 그런 한에서, <진단 0:1>제로로의 수렴은 말 그대로 제로로의 무한한 근접이지 아직 제로가 아니며 끝내 제로가 아니다. <진단 0:1>의 제로로의 수렴에 들러붙어 있는 콤마 이하의 수들이 통치하는 힘의 꺼지지 않는 불씨이자 탄력적인 잔여라고 했을 때, <오감도 4>에선 그것조차가 완전히 잘려나가고 없다. 이상은 이렇게 적어 놓았다. ‘내가 발견한 모든 함수상수의 콤마이하를 잘라없앴다.’ <오감도 4>의 수열, 까마귀/이상의 진단서. 그 고공에서의 전지적 엑스선이라는 신의 시선이 근대적 통치합리성의 폭력을 투시함으로써 작성해 놓은 처방전을 한 마디로 축약하면 이런 것이다. 숫자의 소멸’. 소멸하는 숫자, 제로에의 의지. 그것은 분명 역사철학적이다. 아니 역사신학적이다. 이상이 상상하고 감행했던 파국의 역사신학(이에 대해선 다음 연재를 참조). 그것이 절대적 제로의 신성한 힘으로 고양될 수 있는 잠재성을 겨냥한 것인 한, 그것은 분명 정언명령적이다. ‘절대(絶對)에 모일 것.’ 다시 쓴다. 절대에 모일 것. 그렇게 절대에 모인다는 것은 어떤 신성에의 도달에 다름 아니다. 그렇게 절대적 신성으로 고양된다는 것은 세계의 절멸을 예감하고 기다리며 끝내 고지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신성한 폭력에로의 육박이다. 다시 말해 절대에 모일 것이라는 이상의 정언명령은 장치들의 항구성에 종언을 선포하는 절대적 시작의 다른 표현이다. “저항과 메시아주의는 모두 절대적 시작이라는 이념을 공유하고 있다.”[다니엘 벤사이드, <저항>, 김은주 옮김, 이후, 2003, 45] 절대적 시작의 게발트. 어떻게 끝날지가 아니라 어떻게 시작할지를 말하러 왔다고 했던 건 <매트릭스>의 부활한 네오였다. 그의 메시아성, 시스템에 대한 그 폭력적 파산과 중지의 도래. 엔딩의 이미지를 이상의 데칼코마니된 진단서 이미지들과 다시 한 번 병치시킴으로써 조금 더 말하자. ‘모든 기구(機構)[system]는 연한(年限)이다.’라는 끝의 선포. 그것은 이상의 것이면서 동시에 네오의 것이었다.

 


 


 

위의 이미지는 네오(the One/‘’)라는 메시아적 힘의 시점으로 본 매트릭스의 통치원리이다. 그것은 무작위적 수의 변환과 구획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이상이 <진단 0:1><오감도 4>의 데칼코마니라는 신의 투시도를 통해 통치의 이면과 원리를 수와 수식으로 인식했던 것에서 그리 먼 거리에 있지 않다. 그 수식의 작용을 정지시키는 ‘FAILURE’란 무엇인가. 시스템에 기능부전과 장애와 불이행과 불신임을 도래시키는 힘, 줄여 말해 최고도의 불복종의 지속을 인입시키는 메시아적 힘의 선포. 그것은 절멸의 제로의 고지이다. 네오와 이상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인간발전소의 그 감옥을, 사막 같은 그 실재(the real)를 함께 체감했었다. 그들은 그러므로 동시대인이다. 그들은 신화적 폭력의 시스템을 걷어치우는 신성한 힘을 통해 축적의 동력으로 은폐되고 저당 잡혀 있던 바로 그 실재를 개시하고 해방한다. 그들의 표현은 신의 힘을 정치적 세속화의 강건한 도상 위로 전용하고 전위시킬 수 있게 하는 일리 있는 경로들이다. 그들은 기가 막히는 초월적 기적을 불러일으키는 자들이 아니라, 정체성의 분할을 통해 축적하는 시스템의 구획선들을 초과하고 위반하는 자들이다. “신은 우리가 물리적인 분리의 한계를 초월할 때 나타나는, 우리 자신의 확장으로 보아야 한다.”[제임스 롤러, <우리가 !>, 슬라보예 지젝 외, <매트릭스로 철학하기>, 이운경 옮김, 한문화, 2003, 184] 그들 신인(神人)이 하는 일이 바로 저 절대적 시작이다. 그들의 끝내주는 시작이 바로 절대적 시작인 것이다.

 

7) 근대의 질환을 진단하던 이상은 <진단 0:1><오감도 4> 사이 <각혈의 아침>(1933. 1. 20)에서 약한 목소리로 자신을 가장 不世出의 그리스도”(1-1: 208)라고 지칭한다. 그를 두고 절대의 애정을 갈구했던 한 프로테스탄트라고 썼던 건 김기림이었다. 그에게 이상은 저 노아의 홍수, 그 칠흑 같은 암야를 뚫고 타는 눈으로 절대를 향해 치달아 올랐던 시인이었다. 그 절대란 무엇인가. 다시 물어, 그리스도란 무엇인가. 신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신의 예감을 체현하고 신의 말을 고지하는 자이다. 이상이라는 그리스도. 그는 적그리스도가 설계한 건축체계 속으로 사멸(死滅)의 가나안, ‘도시의 붕락(崩落)’수도의 폐허(廢墟)’를 통고한다. ‘그런다음에는세상것이발아치안는다 그러고야음이야음에계속된다’. 수식화의 관리와 관할이라는 적그리스도의 영토는 이제 그 무엇도 발아하지 않는 야음의 지속에 놓인다. 그것이 이상이 말하는 최후의 이미지다. ‘사과한알이떨어졌다. 지구는부서질그런정도로아펐다. 최후(最後). 이미여하한정신도발아하지아니한다.’(<최후>) 뉴턴의 사과에서 출발했던 근대의 끝, 그 어떤 정신도 발아할 수 없게 된 최후의 사막. 그곳에 이상과 함께 섰을 때에 할 수 있는 말의 힘은 어떤 질감을 가진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해 좀 더 대답할 수 있지만, 그 물음이 우리들 공통의 질문일 수 있는가라는 물음 앞에서는 주저하게 된다. 초고를 끝낸 지금, 정직하게 말하자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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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인로문학평론가하나의 체제가 스스로를 신성한 것으로 고양시키는 과정에 대해그리고 그 과정과 동시적으로 구성되는 주체들의 또 다른 신성한 힘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계간<오늘의문예비평>, 격월간 <말과활>의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얄밉고도 고마운 짓

 

 

 

 

소설가 金 飛 

 

 

 

 





  L이라는 친구가 있다. 그가 어느 날, 두터운 붉은색 코트를 둘러 입고, 할 말이 많은 얼굴로 입을 삐죽 내밀고 내게 찾아왔다. 평소 사람들 속에 잘 어울리지는 못하지만, 그 주변을 서성거리며 여러 가지 다양한 관심들을 가지고 많은 책을 읽고, 또한 쓰며,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던 그였는데, 아직도 여전히 하지 못한 말들이 남았는지, 잔뜩 주둥이를 내민 채였다. 분명 작년에 내가 소개해주었던 그의 여자친구 R 때문임이 틀림없었다.

 

  싫다, 됐다, 하는 놈을 억지로 끌어다가 그녀를 만나는 자리에 앉혀놓으니, 언제 싫다는 이야기를 했었냐는 듯, 그는 처음 만나던 그 자리에서 서로 사귀기로 했다고 연락을 해왔다. 그리고 참 어려운 둘이 만났으니 골치 꽤 아플 거로 생각했는데, 자기들끼리 무슨 거사를 치렀던 건지, 그다음 달에 둘이 함께 찾아와 서로는 분명히 만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고, 사랑에 감사하고, 삶에 감사하고, 그리고 나를 예언자라도 되는 듯 추켜올렸다.

 

  가장 좋았던 것은 소통이라고 했다. 그토록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잘 읽어내는 사람은 처음이라 이야기하며,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낯간지럽게 바라보면서, 쓰다듬고 조몰락거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뭐가 들어맞기는 단단히 들어맞은 모양이구나, 내심 벨이 꼴리면서도, 그래도 다행이라는 생각에 오랜만에 좋은 일이라도 한 것처럼 한동안 기분이 좋았는데, 지난여름부터 이것들이 번갈아가며 나를 찾아와, 서로에 대한 미심쩍은 생각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데다가, 둘 다 참 다가서기 쉽지 않은, 생각 많고 내밀한 성격인 걸 알고 있었으니,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서는 아무 이야기도 제대로 하지 못하다가, 이것들이 만만한 내 앞에만 오면 통성하는 날나리 신자처럼 시시콜콜한 것까지 모두 쏟아놓았다. 물론 너나 할 것 없이 첫 마디는, '그 사람이 내 마음을 알아주는 줄 알았는데...'였다. 그러고는, 자신의 지나온 삶, 사랑, 그리고 복잡하고 사연 많은 가정사까지 모두 털어놓고 돌아가곤 했다.

 

  물론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있다고 했다. 서로의 마음에 깊숙이 가닿고 싶다고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마음속에 담긴 말들을, 전해주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의 마지막 말은 언제나, '잘 모르겠어.'였다. 그들이 이야기한 삶과 사랑과 그리고 가족 이야기 중에는 이따금 나까지도 깊이 감동하게 하는 구석이 있었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그런 이야기들을 한 번도 전해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서로서로 마음을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아는 사이라 믿었고, 자신들의 소통은 그 어떤 것보다 부드럽고 유연하다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만들어가고 싶은 미래는, 반드시 도달하고 싶은 거기는, 가만히 듣고 보니 서로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것이었는데, 그들은 그저 다른 단어를, 다른 표현을, 다른 몸짓을 이용해 자신들의 미래와 희망과 행복을 말하고 있었던 것뿐이었는데, 그들은 끝내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고서는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섣불리 말을 꺼냈다가 언성을 높여 싸우기만 하고는, 이내 나를 찾아와 하지 못했던 말들을 털어놓곤 했다.

 

  똑같은 곳을 향해 걸어가면서, 서로 전혀 다른 곳을 가고 있다고 말하는 그들의 이야기는, 답답하고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이 쏟아놓은 말들은 전혀 달랐지만, 그래서 종종 그건 서로에게 존재하지 않는, 서로가 알지 못하는 말들이었지만, 결국 그들은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다만 그들 스스로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을 뿐. R은 몇 년 동안 독일로 유학을 갈 생각이고, 그의 남자친구 L은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 주체적이고 생산적인 자신의 미래를 찾아 어디론가 바람이라도 쐬고 와야 할 것 같다 이야기했다.

 

  결심이 필요했다. 그들의 결심이 아니라, 나의 결심이었다. 이미 서로 모든 걸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그들에게는,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아무런 소통도 이루어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모두 알고 있다.'는 자신의 영리하고 명민한 지식이, '전혀 모르고 있다.'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무지만큼이나 쓸모없는, 이해할 수 없는 두 사람이었다.

 

나는 조금씩 멀어지고 있는 그들의 중간에, '전달자'의 역할로 섰다. 그리고 그동안 서로에게 들었던 말들을, 듣게 되는 말들을 상대방에게 전해주기 시작했다. 어차피 똑같은 말이었지만, 서로에게 익숙한 표현으로, 때로는 없는 말들을 보태가면서, 쓸모없이 감정을 드러내는 몸짓의 언어들은 지워가면서, 최대한 서로가 받아들이기 쉬운 말을 이용해, 서로의 언어가 아니라, 마음을 전달하였다. 때로 그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상대방이 진실로 그런 이야기를 했던 건지, 서로들 그건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였는데, 내가 듣고 싶었던 이야기였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며, 내 입을 통해 전달되는 상대방의 말들을 차분히 곱씹으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이내 자신들의 마음속에 전해지는 똑같은 바람, 똑같은 사랑, 혹은 똑같은 마음을 확인하고는 훌쩍거리며 눈물을 훔치고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하고 반성했다.

 

  그리고 다시 서로 만났을 때, 그들은 이제 또다시 말하지 않아도 서로 알고 있는, 그런 두 사람이 되었다. 그저 웃는 것만으로도, 서로의 손을 쓰다듬는 것만으로도 두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서로의 이야기들로, 서로 상대방이 자신을 위로하며 어루만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나는 내가 들었던 그들의 이야기를 모두 다, 고스란히 상대방에게 전달했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그 사람이 내 마음을 알아주는 줄 알았는데...', '잘 모르겠어.' 따위의 말들은 당연히 단 한 번도 전달하지 않았다. 물론 그들은 서로, 그런 자신의 흔들리는 마음마저 헤아려주는, 참으로 고맙고 품이 너른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었을 테고.

 

 

  어떤 관계든, 두 사람 사이에 끼어 말을 전달하는 일이란, 십중팔구 욕먹기 십상이다. 그렇다고 욕먹는 걸 두려워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두 사람을 맞붙여놓고, 고래고래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만 소리 질러 이야기하다가, 등을 돌리게 내버려두는 일 또한 옳지 않다. 욕을 먹더라도,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 해 서로의 마음을 읽어내어,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일이 중간에 선 자의 임무일 터. 물론 전혀 다른 이야기이더라도, 두 사람이 다시 하나가 되어 서로 행복하게 잘 살았더라, 하는 해피엔딩을 위한 목표라면, 아무리 엉뚱한 말들을 자기 마음대로 덧붙이고 빼는 얄미운 짓거리라도, 결국 그들은 고마워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아, ! 혹시 오해가 있을까봐 해두는 말인데, 나에게는 L이라는 친구도, R이라는 지인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특히 사랑 문제 때문에 왈가왈부하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건 내 지랄 맞은 성격과도 어울리지 않고. L은 내가 지금 번역하고 있는 책<사랑의 예언자: 에리히프롬의 생애>의 저자, 로렌스 프리드먼(Lawrence Friedman)의 첫 알파벳이었고, R은 독자(Reader)를 의미하는 첫 알파벳이었다. 물론 나는 내가 하고 있는 번역이라는 작업이, 결국 독자와 저자 두 사람 모두 헤피엔딩으로 마무리 될 수 있는, '얄밉고도 고마운 짓'이 되기를 바라고 있고.

 

 




사진: 로렌스 프리드먼(Lawrence Friedman)의 <사랑의 예언자에리히프롬의 생애>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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