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살해를 쓰다

 

 

권명아

 

 

 

 

 

   강남역 살인 사건은 자신을 생존자로 규정한 여성들의 추모 릴레이가 없었다면 그저 신문 사회면 귀퉁이를 장식한 기사로 남았을 것이다. 이 사건의 개념 규정에 대한 논란도 뜨겁다. 개념의 정확한 규정도 중요하지만, 혐오, 차별 선동, 죽음과 살해로 이어지는 소수자 차별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와 연구가 더 시급하다. 여성 혐오를 비롯한 소수자 혐오가 신자유주의적 현상이라고 하지만, 특정 사회의 차별 구조와 역사가 혐오의 구체성을 좌우한다. 일례로 오언 존스의 <차브>를 보면 영국 사회에서는 ‘차브 혐오’라는 하층 계급 혐오가 지배적이다. 또 일본의 경우 차별 선동을 주도하는 ‘재특회’가 상징하듯이 인종 차별이 지배적이다. 인종 차별이나 계급 차별이 지배적인 사회에서 여타의 소수자 차별이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계급 차별이 지배적인 경우, 성차별이나 지역 차별이 계급 차별의 지배적 규정하에 작동한다는 의미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 사회는 성차별이 지배적이다. 성차별에는 여성 차별과 성소수자 차별이 모두 포함된다. 성소수자 차별이 최근 들어 차별 선동의 대상이 된 것은 성소수자들이 한국 사회에서 이제야, 겨우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 사회에서 성소수자 차별이 유례없이 난폭했다는 증거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번 강남역 살인 사건에 대해 젠더 규정보다, 사회구조와 계급 문제가 우선적이라고 조언한 여러 ‘진보’ 집단의 충고는 ‘원론’으로만 옳다. 현실과 역사가 없이 원론만 반복하는 ‘진보이론’은 곤란하다. 물론 젠더 규정과 계급 규정을 둘러싼 이런 마찰은 한국에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에토스를 지닌 집단 사이의 이런 마찰을 정동 연구자 벤 하이모어는 자신의 판단 감각을 의심하지 않는 “거드름을 피우는 에토스”의 산물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정치적 중요성, 긴급성, 정동의 강렬도에서 서로 다른 에토스를 지닌 집단들 사이에서 이런 마찰이 발생할 가능성은 항상 있다. 젠더 이론이나 페미니즘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 여성 살해와 성폭력 범죄가 이어지는 것은 한국 사회가 이제야 이 사건들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그간 여성 살해는 너무 만연해서 주목되지 않거나 주목되어도 사회병리 현상이라는 담론구조로 환원되었다. 이런 담론구조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여성 연예인에 대한 담론구조이다. 한국에서 연예산업이 활성화된 1990년대 이후에 국한해도 여성에 대한 폭력과 차별과 노예화는 선정적이고 성애화된 담론구조와 우울증과 같은 병리 담론 사이를 반복했다. 일반 여성에 대한 폭력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로 간주하여 주목되지 않았다면 여성 연예인은 이례적인 주목 대상이 되어 이중의 폭력에 노출되었다. 그리고 이런 이중 폭력은 끝없이 이어진 여성 연예인 자살로 나타났다. 자살이 궁극적으로는 사회적 타살이라는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한국에서 소수집단의 자살은 혐오의 구조적 결과라는 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통계로도 기록되지 않는 성소수자의 자살은 뿌리 깊은 혐오와 차별의 결과이다.

 

 

   ‘장자연 유서 파동’이 상징하듯이 ‘살해된’ 여성이 남긴 필사의 기록은 쉽게 부정되었다. 죽은 여성의 이야기는 음모론과 유서 진실 공방과 선정적 스캔들과 병리학 서사로 계속 환원되었다. 여성 살해의 구조는 바로 이 담론 생산구조이기도 하다. 강남역에 쓰인 추도와 생존자의 서사는 그런 점에서 이 오래된 반복을 깨뜨린 사건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은 보이지 않는 심연에서 필사의 저항을 계속해온 여성, 그리고 소수자 집단의 저항의 역사 속에서 출현했다.

 

 

 

 

 

시민이 아니어도 ‘살 권리’

 

 

권명아

 

 

 

 

 

 

   20대 총선을 전후하여 혐오 논의는 ‘진보’의 함의를 묻는 가늠자가 되었다. 소수자 차별을 당 정책으로 제시한 기독자유당은 선거 공보에서 “동성애와 이슬람, 차별금지법을 합법화하려는 세력”을 “대한민국을 크게 위협”하는 집단이라고 ‘홍보’했다. 선거 이후 시민권과 혐오에 관한 다양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지만, 막상 이슬람 차별에 대한 논의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혐오가 만연한 한국 사회 문제를 진단한 방송 프로그램 ‘헬조선과 게임의 법칙’은 “난 내가 나고 자란 한국에서 나는 낙오자가 되기 싫어”라는 랩으로 마무리된다. ‘헬조선’이라는 표현은 “국가를 향한 청춘의 혐오”라고 해석된다. 혐오는 ‘국민적’ 문제가 되었다. 혐오가 국민이나 시민(권)의 문제로 환원되는 현상은 총선과 혐오에 대한 논의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이슬람 차별이나 인종 차별 문제가 사라져버린 것은 전형적이다.

 

 

    이런 측면에서 현재 혐오에 대한 논의는 혐오 발화와 증오 정치를 비판하고 대응해나가는 문제와는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듯하다. 이론적인 분석이나 사회 비평에서조차 혐오에 대한 논의에 인종 차별 문제가 거의 중요하게 고려되지 않는 현상은 그런 점에서 징후적이다. 물론 혐오가 한국 사회에서 ‘새로운’ 현상으로 대두한 것은 증오를 조장하여 ‘국민 내부’를 분열시키고 분리 통치하려는 보수 정권의 전략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혐오라는 정서 상태가 혐오 발화(차별 선동)나 증오 정치와 연결되는 지점을 고민하고 비판하기 위해서는 인종 차별이나 지역 차별과 같은 오래된 증오 정치의 역사를 복합적으로 논의하고 대처해나가야만 한다. 또한, 인종차별적인 혐오 발화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혐오 논의가 시민이나 국민의 ‘내부 갈등’ 차원으로 수렴되어서는 안 된다. 물론 최근의 혐오 논의에서 인종 차별 문제가 주변화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인종 차별은 한국 사회에 엄연히 존재하는 심각한 차별이지만, ‘새로운’ 현상으로 여겨지지 않기에 담론 공간에서도 새롭게 ‘이슈화’되지 않는다. 또 선거나 정치 의제 차원에서 이주민 인권과 이주민 차별반대 문제는 ‘이자스민 의원’의 상징으로 환원되면서 ‘진보 의제’로 거의 다뤄지지 않게 되었다.

 

 

   국회를 떠나는 이자스민 의원에 대한 인터뷰에는 ‘다문화 1호 의원’이라는 제목이 달려 있다. ‘다문화’라는 단어는 ‘설명충’, ‘한남충’처럼 혐오를 담은 ‘표현’이 아니지만, ‘동남아시아 출신 이주 노동자’를 차별적으로 범주화하는 언어 수행적인 효과를 발생시킨다. ‘혐오 없는’ 차별, 혐오를 동반하지 않는 혐오 발화는 이런 사례 말고도 너무나 많다. 인종 차별 문제에 관해서 한국 사회는 아직도 ‘차별적 표현’을 비판하고 문제시하는 것조차 미흡한 상황이다.

 

 

   이주민이나 난민에 대한 차별에 반대하는 일은 국민이나 시민이 아니어도 ‘살 권리’를 요청하는 것이다. 혐오 논의가 1등 시민과 2등 시민의 경계를 맴돌고, 비국민으로 배제될 가상의 공포에 몰두해 있는 사이 부지불식간에 시민과 국민의 경계 바깥은 이 논의에서 보이지 않게 되어버렸다. 물론 최근의 혐오 논의가 주로 선거 국면에 대한 비판적 개입에 치중한 결과 예기치 않게 이런 편향을 보이게 되었다고도 하겠다. 그러나 혐오 발화와 차별 선동, 증오 정치를 비판하고 사회적 의제로 다루는 일은 시민이나 국민이라는 이미 주어진 경계로 환원되지 않는 삶의 권리를 고민하는 일이다. 혐오는 만연해 있고, 혐오 발화는 차별적인데 역설적으로 혐오 논의는 ‘선별적’이다. 선거 국면에 몰두해 있던 혐오 논의가 ‘다른’ 지평으로 나아가야 할 때이다.

 

 

 

 

 

<대졸 영수증 발급 이후> 프롤로그

: '로 찍는 다큐멘터리

 

 

 

장옥진(래인커머)

 

 

 

 

태어나서 유년기까지 나에 대한 기록은 부모님이 해주셨던 것 같다. 1993522, 음력 42일의 달력을 시작으로 집에는 내가 과거에도 로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들이 있다. 나를 담은 세 개의 앨범, 유치원 졸업식 때 대표로 읽었던 정원동산을 떠나며답사문, 초등학교 1학년 때 경필쓰기대회에서 무려 최우수상을 받아 지금도 액자에 걸려 있는 그 원본, 초등학교 교내 신문에 얻어걸리듯 나온 체조하는 사진, 초등학교 6년동안의 생활통지표와 받은 상장들. 부모님은 그렇게 커 가는 나를 가장 곁에서 지켜보면서 하나둘씩 모아두셨다. “해줄 수 있는 것도 별로 없는데 그거라도 결혼할 때 가져가라, 이게 다 내 재산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나에 대한 기록을 내가 처음으로 한 것은 그림일기, 생활일기를 써서 검사를 받았던 초등학교 저학년 때가 아닐까 싶다. 모두가 한 번쯤은 써봤을 그때의 일기라는 것은 하루단위로 생활을 돌아보며 주로, 재밌고 슬펐던 일과 같은 감정들을 솔직하게 담을 수 있는 하나의 장소일 것이다. 물론 지금 나에게는 하루를 돌아보는 것에, 나의 감정을 돌보는 것에 소홀해져서 잃어버린 장소이기도 하다.

여기까지다. 내가 과거의 나를 만날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왜곡되지 않은 기록들은 말이다. 그리고 지금 <대졸 영수증 발급 이후>라는 제목으로 나에 대한 기록을 해보려고 한다. 주인공 는 대학교를 졸업했고, 주변의 사람들이 보기에 영락없는 취업준비생, 백수이다. 진전 없이, 멈춰 있는 시간 속에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나말고도 이러한 시간 속에서 지내는 청년들은 많고, 그렇기에 이러한 기록은 필요하지 않을까. 이들이 멈춰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도, 나 스스로도 이 시기를 멈춰 있던 때로 기억하지 않기 위해서도 말이다. 다큐멘터리처럼 실제의 시간을 담고, ‘로 나의 생활을 찍어내려고 한다.

 

 

올해 2, 1차로 국어국문학과 졸업 학위증, 그러니까 대졸 영수증을 받아 부모님께 드렸다. 엄마, 아빠는 번갈아가며 한 번 스윽 쓰다듬더니 졸업 사진은?” 하고 물었다. 유치원 졸업 때의 장난감같은 학위가운과 학사모 말고 진짜를 입은 모습을 보고 싶어 했다. 별 필요 없다는 건 쉬운 내 생각이었고, 부모님의 서운한 표정을 이길 수 없어 스튜디오에 가서 졸업 사진을 찍었다. 326, 2차로 부모님께 대졸 영수증을 드렸다. 엄마, 아빠는 액자를 싼 비닐에서 졸업 사진을 조심히 꺼냈고 뭐 묻을까 쓰다듬지도 않았다. 한참 액자를 쳐다보더니 아이고, 됐다. 네 방에 걸어줄게.” 했다.

 

 

그렇게 나는 대학교를 졸업했다.

 

 

 

 

[『마이너리티 코뮌』 서평]

 

 

"소리 소문들의 비밀스런 공명장치"

 

 

 

수희(래인커머)

 

 

 

 

 

 

   연구자 생활정보지 <바람의 연구자>2013년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해외배송도 몇 번 하기도 하고, 온라인으로 pdf를 보내기도 했던 것 같은데, 경제적인 문제와 온라인으로 배포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맞추어 현재 한국에서만 배포중이다. 신지영 선생님께는 <바람의 연구자> ‘창간준비호창간호를 메일로 보내드렸었다. 일본에 계시는지, 미국에 계시는지 궁금해하면서 선생님께 메일을 보냈던 기억이 있다. <바람의 연구자>를 받자 마자 다 읽어버렸고, 다음엔 우리의 전전긍긍끙끙거림도 부탁한다는 리뷰를 답장으로 받았었다. 그 답장을 받고, 너무 좋아서 읽고 읽고 또 읽었었던 것 같다.

 

 

   신지영 선생님을 만난 것은 2011년 아프꼼(당시에는 아프꼼의 전신인 Net-A였음)의 첫 국제 워크숍에서였다. 사람의 물결이 넘실대는 신주쿠 역이었다. 아프꼼 멤버들과 만난 신지영 선생님이 제일 먼저 함께 가보자고 한 곳이, 나이키 공원이 되기 직전의 야마시타 공원이 내려다보이는 육교 위였다.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JR을 타고 밖을 내다보면서 야숙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남아 있다. 생각해 보면, 이 워크숍은 처음으로 몸을 움직여 부산 밖의 연구자들을 만나고, 연구자들의 움직이는 몸이라는 것을 으로 만났던 기억인 것 같다. 그 때 우리가 얼마나 환대받았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몸둘 바를 모르겠다. 일본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단 서너 명을 위해 인문평론 연구회의 와타나베 나오키 선생님과 신지영 선생님이 교대로 우리가 참가했던 서평회에서 동시통역을 해주셨다. 두고 두고 선생님들의 수고가 생각이 난다. 그리고 그 환대를 어떻게 연구자로서 잘 돌려드릴 수 있을까, 혹은 받았던 환대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눌 수 있을까가 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잘은 모르지만, 신지영 선생님도 일본과 미국의 마이너리티 코뮌들, 마을들에서 받았던 환대를 섬세하게 기록함으로서 돌려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연구자가 자료찾기와 이론공부, 생계유지 사이의 갈등을 떨치고 집회에 참가했을 때 느끼는 안전감혹은 해방감은 집회에 모인 사람들이 주는 환대의 에너지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 속에서 신지영 선생님이 느꼈던 아직은 아무것도 아닌 안심이 무엇을 기록하고 있는지, 복잡한 상황에 대면했을 때 어떻게 많은 사람들을 섬세하게 고려하며 말하고 있는지가 이 책 마이너리티 코뮌에 있다. 반빈곤 활동, 오키나와 미군기지 반대 활동, 반 올림픽 활동, 반혐오 활동, 전쟁법 반대 활동, 반인종주의 활동 등 거리에서 만들어지고, 이어지는 마이너리티 코뮌들과 신지영 선생님이 접속했을 때의 현장이 아카이빙된다.

 

 

 

▲ 신지영, 『마이너리티 코뮌』, 갈무리, 2016. 

 

 

   이 책은 동아시아에서 만들어지고 스러지는 마을의 목격자가 되고, 증언자가 되면서, 연구자로서의 자신이 어떤 위치에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자기검열하며 쓰여져 있다. 신지영 선생님은 들려(오지 않는) ‘소리 소문들을 가능한 한 상세히 귀 기울여 듣고-쓰고사유와 만남의 근거로 삼기 위해서 몸을 낮춘다. 그는 사유하고 연구하는 지식인 의 말을 쓰고 누군가가 듣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소리 소문들의 비밀스러운 공명장치라도 되면 좋겠다고 책을 마무리 한다. 단 서너명을 위해 일본어 서평회의 모든 말들을 통역해주었던 신지영 선생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반대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마이너리티 코뮌들의 소리 소문들을 들릴 수 있게 공명하는 선생님의 듣고-쓰기가 있다. 이것이 아마도 신지영 선생님의 연구하는 몸이자 투쟁의 방법일 것이다.

 

 

   가제본된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사진을 전혀 못봤다. 소중한 사진들이 많이 수록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프꼼 멤버들이 함께 원고를 읽고 차가영 선생님의 디자인에 피드백 하면서 완성한 책 표지에도 마을의 현장들과 소리들이 다 실려 있는 것 같아서 좋다. 아프꼼의 이야기들도 목소리들도 이 표지에 함께 실려 있다. 아프꼼도, <바람의 연구자>마이너리티 코뮌이라는 공명장치를 통해서 저곳의 동료들의 안녕함을 전해 들었다. 신지영 선생님이 저곳들의 동료들에게 이곳 마이너리티 코뮌의 이야기도 전해주고 있을 것 같아, 작고, 소중한 이곳의 이야기를, 소리 소문들을 계속 만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는 싸움'을 '하는' 이유  

 

 

권명아

 

 

 

 

   선거는 ‘이기는 싸움’일 때만 의미가 있을까? 이번 선거에서 녹색당이나 노동당에 쏟아진 ‘걱정’은 한마디로 어차피 지는 싸움에 표를 ‘낭비’한다는 것이다. 어차피 ‘지는 싸움’이라면 그저 무시하면 될 터인데 왜 그리 걱정하고 말리지 못해 안달일까? 생각해보니 선거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의 여러 문제에서 이른바 ‘지는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이나 집단이 부대끼는 문제는 참으로 유사하다. 어차피 질 싸움에 왜 소모적으로 인생을 낭비하느냐는 점잖은 훈계와 조언, 현실을 좀 알라는 계몽적 충고, 비현실적인 태도를 수정하라는 질책, 결국 이 모든 일이 뭔가 ‘현실적인 싸움’에 방해가 된다는 짜증, 그리고 경멸적인 비아냥거림과 근거 없는 모욕. 이런 부대낌은 차례로 나타나기도 하고 뒤섞여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런데 어차피 ‘지는 싸움’이라면 무시하면 될 터인데 왜 이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런 식의 복잡한 반응들이 나타나는 것일까?

  

 

   선거에 국한하지 않아도 ‘지는 싸움’에 휘말려 인생을 건 결단에 내몰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런 결단에 내몰리지 않아 본 사람들은 한국 사회에서 정말로 혜택받은 사람이다. 변화되지 않는 제도와 권력 앞에서 아주 작은 것이라도 문제를 제기하려면 ‘지는 싸움’의 덫에 빠져 인생을 소진하게 된다. 그래서 기성세대나 안전지대에 서 있는 이들은 젊은 세대나 소수자들이 이런 싸움에서 소진되지 않도록 배려하고, 경계해야 할 책임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싸워서 아무것도 변화될 가능성이 없는 싸움에 휘말리는 일은 그 자체로 존재를 뒤흔드는 공포이다. 하여 사람들이 이런 공포 속에 인생을 소진하지 않도록 경계할 필요가 있고, 또 이런 싸움을 ‘낭만적으로’ 독려하는 것이 무책임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밀양 투쟁, 반원전 투쟁의 경험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지는 싸움’이라고 어떤 싸움을 미리 규정하는 일은 그런 걱정을 하는 이들의 선의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싸움의 가치를 미리 앞당겨 재단하는 일이기도 했다. ‘지는 싸움’이라는 규정은 싸우기도 전에 패배의 전조와 환멸과 불안을 예고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그런 점에서 ‘지는 싸움’이라는 규정은 지금 현재의 인식 지평에 제한된 시각으로 아직 알 수 없는 미래의 결과를 앞당겨 예측하는 행위이다. 물론 이런 예측이 지성의 산물이라고 자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예측에서 미래는 현재의 연장일 뿐이다. 미래에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알 수 없는 싸움을 이미, ‘지는 싸움’이라고 단정하는 태도는 실상 미래가 현재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의 산물이다. ‘지는 싸움’을 계속하는 이유는 역설적이지만, 이런 걱정의 이유 속에 담겨 있다. ‘지는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에 대해 ‘이기는 싸움’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짜증과 훈계를 멈출 수 없는 것은 사실 이 싸움이 ‘이기는 싸움’만 하는 사람들이 경험해본 적도, 상상할 수도 없는 어떤 미래를 자꾸만 불러들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지는 싸움, 그만해!”라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계속 싸우는 사람은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길 수 있어!”라고 답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런 미래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말을 돌려주고 있다. 그래서 ‘지는 싸움’을 계속하는 일은 이기는 싸움만 하는 사람들이 경험해보지도, 상상해보지도 못한 미래를 도입하려는 싸움이다. ‘지는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이미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 미래는 이미 변하였다. 오늘의 선거가 비록 ‘지는 싸움’이었을지 모르지만, ‘계속 싸우는 일’을 멈추지 않았기에, 미래는 이미 변하였다.

 

'나'들의 힘으로 어떻게 내일의 삶을 직조할 것인가

- [서평]구라카즈 시게루의 '나 자신이고자 하는 충동'

 

 

신현아(래인커머)

 

 

 

▲ <나 자신이고자 하는 충동>, 구라카즈 시게루, 한태준 옮김, 갈무리, 2015.

 

 

 

 

 

   이제 더 이상 우리의 생존을 보장하는 것은 없다. 내동댕이쳐진 삶 그리고 생존을 위협하는 지옥도는 무한맵으로 펼쳐져 있고 지뢰와 바리케이드는 ‘각개격파’해 나가야 겨우 생존을 보장받을 수 있다. 멈추지 않는 재난의 심연을 마주한 한국 사회에서 우리 모두는 이러한 상황을 몸서리치게 느끼고 있다. 재난 앞에서 무력함의 아가리를 사정없이 드러내는 시스템이 말해주는 것은, 사실 이 시스템은 애시당초 삶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일 뿐이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재난을 마주한다. 당장 다음 달의 재고용을 보장받을 수 없는 고용불안, 빈곤의 심화, 혐오와 증오의 증대처럼 일상의 모든 것들이 재난으로 돌변할 가능성을 안고 있다. 살얼음 위를 아무리 조심스럽게 걸어도 우리의 발밑은 날카롭게 베이고 그 피를 마시며 시스템이 증식되어왔음을 보게 된다. 시스템은 안전보장의 장치로 지배와 통치를 이루어내는 게 아니라, 무능과 방치를 통해서 시스템의 능력이 마치 있는 것처럼 보완해야 할 것처럼 상상하게 만드는 효과를 통해서 지배를 지속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러한 사정이 다만 한국이라는 국민국가적인 조건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일본도 그러하다. 신자유주의라는 초국가적인 상태 하에서 “개인은 조직 외부에 매달”린 채로, 끝없이 창조적이고 자유롭게 ‘자기계발’할 것을 강요받는다. 조직/공동체가 더 이상 개인의 안정된 삶을 더 이상 책임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3.11이라는 재난 앞에서 그 무능은 더욱 사정없이 드러났다. 우리는 3.11 이후 이른 바 국민들이 시스템에 의해 내팽개쳐지는 것을 목도하였다. 마치 버블경제의 붕괴 이후 동경의 공원에서 내팽개쳐진 사람들이 노숙을 시작했고 곧 대도심에서 지워지듯 이들을 구제하는 각종 장치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곧 사라질 것이다. 혹은 모욕주기를 통해서 침묵이 지속되거나 말이다. 이렇게 재난을 마주하여 자신을 보호할 보호고치도 없이 그저 내팽개쳐진 수밖에 없는 개인은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가 없다. 모두가 내팽개쳐진 상황에서 내가 살아있는 것은 단지 우연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나 자신이고자 하는 충동>의 저자는 ‘미적 아나키즘’을 발굴해낸다. 먼저 ‘관동대지진에서 태평양전쟁 발발까지의 예술 운동과 공동체’라는 부제에 주목하자. 이 책의 시대적 배경으로 등장하는 관동대지진이 보여준 재난의 심연은 단지 ‘자연재해’에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관동대지진 직후 군대와 자경단이 아나키스트와 노동운동가를 살해하고, 조선인·중국인을 학살했던 것이야말로 재난이 드러낸 시스템의 어둠이었다. 저자는 이 역사적 상황으로 돌아가 재난 앞에서의 예술과 주체는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되짚고자 한다. 우리의 안전을 보장해주리라 믿었던 시스템이 오히려 우리를 죽음으로 내몰 수 있는 것임이 드러나는 지점, 재난 이후 우리는 단지 우연적으로 살아남은 것이라는 지점, 이제는 그 무엇도 개인의 삶의 의미를 담보하지 못하는 지점이라는 세 꼭짓점을 통해 저자는 “우리는 모두 아나키즘적인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13)고 말하는 것이다.

   물론 저자가 우리를 1923년부터 1937년까지의 역사적 상황 속으로 데리고 가는 것은 단지 그 시간이 재난을 당한 때라는 이유만은 아니다. 그는 재난 이후에 내팽개쳐진 생명을 어떻게 다시 가치있는 것으로 자리매김할 것인가의 문제에 주목한다. 미적 아나키즘을 다시 캐내는 것은 그처럼 우연적인 것으로 세계에 내던져진 ‘나’의 의미를 되찾고자 하는 시도이다.

 

   다이쇼에서 쇼와 초기에 걸쳐서, 그동안 아무 것도 아니었던 개인의 ‘생명’이 지닌 창조성을 최대한으로 강조하는 예술상이 존재했다. 그 사상은 고독하지만 독자적인 개인, 무한히 산출되고 있는 개인이라는 모델을 내세웠다. 그것은 ‘나’라는 단독적인 생명 이상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아나키즘에 가까웠고, ‘나’는 세계의 일부인 것만이 아니라, ‘나’야말로 세계를 창조한다는 생각이었다는 점에서 유아론적이었다. (11)

 

   미적 아나키즘은 보호막 없이 세계에 내던져진 개인을 다시 공동체로 환수하는 것에 앞서 ‘나’의 의미를 세우고자 한다. 그 어떤 공동체에 대한 이론보다도 먼저 ‘나’의 생명(삶)을 긍정할 수 있는 에너지를 찾는 것, 그것은 저자가 말하는 나의 내부에 존재하는 ‘생명’을 발견하는 것인 동시에 ‘능산적 자연’의 힘을 믿는 것이기도 하다. ‘나 자신이고자 하는 충동’은 그처럼 “오히려 부단한 전개와 표출, 새로운 자기의 획득, 끝이 없는 변화이자 결국엔 미적인ㅡ세계를 창출함과 동시에 새로운 ‘나 자신’을 만들고, 표현한다는 의미에서ㅡ창조하는 주체 구성의 원리인 것이다.” (15) 그렇다면 미적 아나키즘이 발견한 ‘나 자신이고자 하는 충동’은 신자유주의적 시스템 하에서 끊임없이 자유롭게 창조적이기를 강요받는 것과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는가가 문제가 된다. 예술은 바로 이 지점에서말로 유효한 것이 된다. ‘예술’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묻는 것을 통해서 ‘나 자신이고자 하는 충동’은 신자유주의적 주체와 국가 공동체에 포섭되는 위험을 계속하여 아슬아슬하게 비껴가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건축, 고현학, 독실, 민예, 영화, 동화 등을 만화경처럼 펼치며 주유한다. 이 궤적은 단지 미적 아나키즘의 위대한 승리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떻게 미적 아나키즘이 위태롭게 시스템에서 비껴나가는가의 ‘위태함’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으로 읽힌다. 일본은 다이쇼 시기에 접어들며 다이쇼 데모크라시와 생활 개선 운동 등을 통해 ‘일상의 행위를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규범에 따라 분절화하고 조직’(46)하고자 하며, 도시 또한 단순히 상부로부터의 통제를 넘어서 삶 전반을 분절하고 배치하여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 그 자체로 구성된다. 그러나 관동대지진 이후, 그러한 배치와 효율이 무너진 자리에 ‘부락’이 들어선다. 피난민들이 마구잡이로 지어 올리는 부락은 단지 비바람을 피하는 임시가옥이 아니라, 분절된 배치를 넘어서 자신의 취향과 기지와 의지와 자아를 드러내는 장소가 된다. 이 ‘부락’을 둘러싼 다키자와 마유미와 곤 와지로의 논쟁은 흥미롭다. 둘 다 효율을 앞세우는 것에 반대하여 자아 그 자체의 발현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다키자와는 건축가로서의 자아의 발현을 드러내는 것이 ‘미’라고 하는 것에 비해 곤 와지로는 피난민들이 발현하는 자아와 욕구를 그 자체로 긍정하고 드러낼 수 있는 것이 바로 ‘예술’임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락 장식사>를 만들어 피난민들의 부락을 장식해주었던 곤 와지로에게 이처럼 ‘나 자신이고자 하는 충동’은 단지 ‘나’에 한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 관여되면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곤 와지로가 고현학을 통하여 예측불가능한 삶의 흐름 속에서 통계와 숫자를 ‘추출’해내는 것이 아니라 세상 만물의 수집을 통해 단지 ‘흐름/리듬’을 그려내고자 했던 것의 한 편에는 ‘독실’이 존재한다. 곤 와지로가 효율/분절/배치에 맞서 예측불가능한 리듬을 살리고자 했던 것처럼 ‘집’의 내부에서도 위생/실용/분절의 힘은 오히려 ‘독실’이라는 예측불가능한 밀실을 낳았다.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수많은 통계, 선거, 조사 등을 통하여 모두를 하나라는 숫자로 열거하는 동안 다이쇼 시기의 작가들은 밀실 속에서 오히려 열거되지 않는 무한한 신체와 욕망의 차원이라는 다른 ‘리얼’을 발견해낸다.

   그러나 ‘나 자신이고자 하는 충동’이 자연의 산출력에 근거하고 있다고 하여 단지 삶의 흐름 속에 흩어져버리는 것이거나 반대로 밀실 속에서만 존재가능한 고립된 것이 아니다. 저자는 야나기 무네요시를 끌어와 ‘자연의 산출력’을 근거로 삼는 것이 어떠한 양면적 성격을 띠는지를 짚는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익명의 집합적 주체들인 민중들이 만들어내어 일상 속에 녹아들어간 ‘민예품’이야말로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자연의 능산성)이 나타나는 실천적인 예술임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저자는 야나기 무네요시가 말하는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근대를 비판하기 위한 것이었음에도 결국은 근대 미학에 근거하고 있었으며, 한 편으로 ‘인간’을 덧없는 것으로 지워버리는 위험을 갖고 있음을 짚는다.

   이처럼 저자는 재난을 마주한 신자유주의적 주체ㅡ늘 창의적이고 새롭게 자신을 ‘알아서’ 갱신하라ㅡ의 다른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미적 아나키즘의 ‘나 자신이고자 하는 충동’을 제시하지만, 그것을 간단히 ‘대안’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나 자신이고자 하는 충동’이 가능성이자 동시에 위태로움임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은 6장 ‘혈통의 생성’이다. 무수한 이미지를 통해 ‘나 자신’의 주관을 미적 경험으로서 전달하며 역사를 소거했던 야스다 요주로는 결국 신화적 혈통에 자신의 주체성을 의탁하며 국수주의로 급격히 경사된다. 저자는 야스다 요주로를 끌어와 다시, 미적 아나키즘과 파시즘의 사이에 존재하는 틈새를 벌려 다른 주체성을 만들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보고자 한다. 또한 이러한 가능성은 지금 자본주의적으로 생산되고 있는 하위문화에서 어떻게 ‘자연’의 능산성을 캐낼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다시 돌아가서, 우리는 어떻게 재난에 마주해 우연적으로 남겨진 삶에서 의미를 캐어낼 것인가. 우리의 ‘자연적 능산성’은 지금 어디에서 출현하고 있는가. 자연적으로 분출된 ‘나’들의 힘은 어떻게 시스템이 아닌, ‘자기 통치’로서의 삶의 예술이자 ‘아나키’적인 것이 될 수 있을까. 책이 미처 다 답하지 못한 부분들을 우리는 내일의 삶을 직조해나가며 이야기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디자[]문학]이다

 

 

기재성(래인커머)

 

 

 

 

 

 

   대학교 2학년 때 디자인사 수업이 있었다. 하루바삐 남들이 모를 포토샵 기술을 익히고 깜짝 놀랄 그래픽을 만들어야 할 텐데 생뚱맞게 역사 공부를 시키나 싶었다. 문자가 없던 시절에 벽에 그림을 그려서 메시지를 남기던 시절의 이야기부터 산업혁명으로 인간의 존엄성과 노동의 가치가 훼손되어 이를 회복하고자 일어난 미술공예운동이야기, 그리고 팝아트, 포스트모더니즘 등... 그래픽 소프트웨어를 잘 다루는 훈련을 하는 게 시급한 것 같은데 책을 보고 텍스트를 다뤄야 하는 상황이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수업시간마다 졸았고 시험기간에는 교수님이 짚어주는 대목만 부랴부랴 읽고 가까스로 통과했다. 그림을 그려야 하는데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게 못마땅했다.

 

 

 

 

 

▲ 대학시절

 

 

 

   졸업 후 잠깐의 회사원 생활보내고 디자인 사무실을 열었다. 회춘프로젝트라는 지역문화예술활성화사업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되어 사무실을 시작한 이후로 지역의 문화예술 관련 단체,기관의 일을 주로 했다. 그런 일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나는 클라이언트의 사업에 참여했던 사람이 아닌데 그 과정과 결과를 정리한 원고를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 시안을 만든 것 같다는 피드백을 받았을 때이다. 나는 한글파일과 사진을 받아서 보기 좋게 꾸며주면 되는 입장인데 왜 내가 그 내용을 다 파악하고 작업해야 하나 싶었다.

 

 

 

   꽤 오래전의 일이라서 기억이 흐릿하지만 어릴 때 글을 많이 썼고 중학교 때교내외 백일장 및 경시대회에서 받은 상장으로 내 방의 한쪽 벽면을 다 채울 정도였다. 누구나 이 정도의 리즈 시절이 있을테니 자랑하고 싶은 것은 아니고... 그냥 그랬다는거다.

 

 

 

   어릴 때의 기억을 되짚게 된 계기는 개념미디어 바싹 활동을 시작하였을 때다. 이 역시도 회춘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알게 된 인연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글도 쓰고 그림도 그려야 하는 세상에 발을 디딘 것은 아닌가 싶다.

 

 

   그런 생각을 한 후로 원고를 받게되면 정독은 못해도 속독하고 눈길이 가는 부분은 더 읽어보고 시안을 잡게 되었다. 어떤 상황을 무슨 말로 표현하는지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특히 아프꼼과의 인연을 통해서 시작하게 된 계간 문화/과학의 편집디자인을 맡게 되면서부터 더욱 글을 읽는 것에 다시 흥미를 붙였다.

 

 

 

  내가 2부터 미술학원을 다니고 디자인학과를 입학하게 된 최초의 이유는 내 생각을 그림으로 그리고 다른 사람의 공감을 얻는 것에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더 거슬러 올라가면 중학생일 때는 글을 써서 다른 사람의 공감을 얻고 칭찬을 받는 것에 희열을 느꼈다. 나는 내 생각을 표현하고 공감을 얻어내는 것을 좋아했다. 글을 쓰느냐, 그림을 그리느냐 하는 것은 이를 위한 방법들 중의 하나이다.

 

 

  인간적으로나 비즈니스적으로나 인연을 맺어오던 인문학모임 아프꼼에 정식으로 가입하게 되었다. 1 때 국어선생님의 개인 첨삭지도를 받으며 경시대회를 준비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글이든 그림이든 좋다.

  [디자[]문학]이다.

 





 

 

 

 

 

 

 

 

 

 


눈과 입들이 만나는 길

 

 

 

 

래인커머 정선욱

 

 

 

 

 

 

   민주공원에서 사람들이라는 이름의 토크콘서트를 했다. 싸우는 사람들, 잊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다. ‘사람들토크콘서트의 주제였다. ‘사람들토크콘서트 에서는 세월호 유가족들과 밀양송전탑 대책위에서 오신 할머니들을 만날 수 있었다. 유가족분과 할머니들은 침을 삼키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어쩔 때는 피식 웃기도 하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모습 그 자체가 어떤 운동이 되는 것 같아보였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앉아서 그 이야기를 들었다. 허리를 세우고, 몸을 앞으로 숙여가면서 듣고 있었다. 관객들은 모두 유가족분과 할머니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 개가 넘는 눈과 귀들은 조명 밖 어둠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히 온 신경을 조명 속 그들에게 기울이고 있었다. 사람들은 입술을 깨물기도 하고, 다리를 떨기도 했다. 어둠 속에서 박수치던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은 모두 눈을 고정하고, 귀를 기울이면서 조명 속에서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사람들을 계속해서 지켜보았다. 그 시선들이 조명 속 사람들을 지켜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토크콘서트가 거의 끝나갈 쯤 밀양 송전탑 대책위의 할머니들이 세월호 유가족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감상을 이야기했다. 할머니는 전혀 다른 이야기 일거라고 생각했지만 너무나도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고 했다. 밀양의 일과 세월호의 일이 결국 같은 해법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할머니는 유가족 분들께 힘을 내서 끝까지 버티면 뭔가 바뀌기도 한다고 말했다. 유가족 분들은 할머니와 손을 마주 잡았다.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가며 각자의 조명을 가지고 있던 두 사람이 일어나서 손을 잡았을 때, 바라보고 있는 나에게도 어떤 힘이 생겼다. 왜인지 외롭지 않게 되었고, 더 많은 눈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눈들은 어떤 입 주위에 들러붙는다. 눈과 입이 뻗어내는 길은 다른 눈과 입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 된다. 길들이 만나는 곳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그들은 하나가 되기도 하고, 오히려 멀어지기도 하면서 계속해서 움직일 것이다. 자신의 눈길이 가는 곳으로 길을 내고, 길을 따라 말하고, 다른 길과 만나고, 길로부터 변화한다. 길은 완벽하게 하나로 만나기도 하지만 아슬아슬한 거리를 두고 만나기도 한다. 하지만 만나는 곳에서 말이 전달되고 어떤 다른 눈길을 가지게 된다. 그 만나는 곳은 어떤 식으로 변하기도 한다. 그 변화가 나쁠 수도 있겠지만, 또 어떻게 변하게 될지는 알 수 가 없다.

 

 

 

 

'來人커머 > <눈으로부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잡고 놓음 사이에 있는 눈  (0) 2015.12.12

다양한 지배, 다양한 저항

 

 

 

 

스나가와 히데키(砂川秀樹)_LGBT 인권활동가

번역: 장수희_연구모임 아프꼼 연구원

감수: 다지마 테츠오(田島哲夫)_연세대 국학연구원 전문연구원

 

 

 

 

 

 

 

 

 

 

들어가며

 

 

   2015719일 핑크 닷 오키나와(Pink Dot Okinawa)[각주:1]의 행사장에서 나하(那覇)시장이 성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도시 나하 선언’(통칭 레인보우 나하 선언’)을 낭독하는 형식으로 발표했다. ‘레인보우 나하 선언은 행정이 LGBT를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지원해 가겠다는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2013년에 오사카부 요도가와구(淀川区)가 발표했던 ‘LGBT 지원 선언다음으로 전국에서 두 번째가 된다. 도쿄에서 멀리 떨어진 땅인 탓인지 전국적으로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대도시가 아닌 지역에서 이런 선언이 나왔다는 것은 현재 일본에서 LGBT에 관한 관심과 이해의 확산을 상징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행사장을 이용해서 발표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레인보우 나하 선언에 큰 영향을 준 것 중 하나가 핑크 닷 오키나와이다. 핑크 닷 오키나와는 ‘LGBT 등의 성적 소수자가 보다 살기 좋은 사회를원하는 사람들이 핑크색으로 된 물건을 몸에 걸치고 모여, 그 의사를 표현하고 연대를 보여주는 이벤트이다. 핑크 닷은 싱가폴에서 2009년에 시작되어 퍼레이드와는 다른 형식의 프라이드 이벤트(LGBT의 가시화, 현재화를 위해 행하는 이벤트)로서 몬트리올이나 유타주, 홍콩, 대만 등에서도 개최되어 왔다.

   오키나와 최초의 프라이드 이벤트로서(일본 최초의 핑크 닷으로) 2013년에 시작된 이 핑크 닷 오키나와는 사실 내가 공동대표로 일하고 개최했던 것이다(또 한명의 공동대표는 이 이벤트를 계기로 신문을 통해 오키나와에서 최초로 실명을 드러내며 공적으로 레즈비언임을 커밍아웃한 미야기 유카(宮城由香)이다). 나는 도쿄에 살기 시작한 1990년부터 HIV/AIDS에 관한 시민활동에 참가하는 것을 시작으로 2000년에는 도쿄 레즈비언&게이 퍼레이드의 실행위원장이 되었고, 그 후에 이 퍼레이드의 모체가 되는 도쿄프라이드의 대표가 되는 등 2011년에 고향인 오키나와로 돌아오기까지 도쿄에서 21년에 걸쳐 LGBT에 관련한 활동에 관여해 왔다. 따라서 일본의 LGBT를 둘러싼 상황이나 변화를 말할 때 그것에 크게 관계해 온 나는 자기성찰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또 나는 신주쿠 2초메를 주요한 필드로 조사를 하면서 그 거리에서 게이커뮤니티 의식이 발생한 배경, 도시에서의 인간관계 형성 등을 테마로 연구를 해 온 문화인류학자이기도 하다. 이 문화인류학자로서의 조사연구와 앞서 기술한 게이액티비스트로서의 활동은 내가 각각을 상대화하는 시점을 항상 견지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서두에서 나 자신의 배경에 대해서 기술한 것은 이 테마에 대해서 논할 때 나의 경험이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논고는 도쿄에서 오키나와로 거점을 옮겨 계속해 온 25년간의 활동 경험과 문화인류학자로서의 사고 사이를 왕래한 결과이다.

 

 

 

 

2개의 지향성

 

 

   근 4, 5년간에 일본에서도 LGBT라는 단어가 널리 침투되기 시작해 기업을 포함한 다양한 영역에서 LGBT가 주목을 받는 과 같은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붐이라고 하면 일찍이 이와 유사한 상황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1990년대 전반에 대중매체가 게이에 주목하여 활발하게 거론했던 게이 붐이라고 불리는 시절이 있었다. 여성을 주요한 독자층으로 하는 잡지 CREA(문예춘추사)게이 르네상스91’이라는 제목의 특집을 꾸리고, 1992년에는 후지텔레비전(FujiTV)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인 <NONFIX>에서 핑크 트라이앵글-맨얼굴의 동성애자들편이 방송되었다. 1993년에는 일본텔레비전(NTV)이 제작한 게이 주인공의 연속 드라마 <동창회>가 큰 화제가 되었다. 그 사이 많은 잡지, 텔레비전 프로그램 등에서 게이가 거론되었다.

   사실 붐에 선행하는 형태로 1980년대 후반부터 게이 해방운동이 활발하게 시작되었다. 앞서 말했던 다큐멘터리 핑크 트라이앵글-맨얼굴의 동성애자들편은 어커(OCCUR)[각주:2]ILGA일본[각주:3] 등 도쿄를 거점으로 게이 해방운동을 이끌어 온 단체를 추적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이들 운동이 게이 붐의 흐름에 포함될 수 있는 부분은 적다. 또 당시 운동 속에서 이 붐은 대중매체가 제멋대로 떠들고 있는 것이어서, 현실에 뿌리를 내린 것은 아니라는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는 의견도 있었다.

   실제로는 서로 영향을 주고 있던 터인 동시대에 융성했던 대중매체의 움직임과 해방운동이, 하나의 흐름으로서 위치지어질 수 없었던 배경은 필시 그것들이 각각 다른 지향성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두 개의 지향성이란 널리 사회에 받아들여지기 위해 주류의 지배적인 가치관이나 표상에 맞추어 가려고 하는 이른바 동화주의와, 사회를 보다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고 하는 급진주의(radicalism)의 지향성이다. 이것은 다양한 사회변혁운동, 특히 마이너리티운동 속에서 반드시라고 말해도 좋을 만큼 생겨나고 있고, 따라서 지금까지도 빈번하게 지적되어 왔다. 그 때문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새삼스러운이야기이기는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LGBT에 관한 움직임에 대해서 논하는 중에, 굳이 새삼스러운이야기를 들고 나온 것은 LGBT에 관한 활동이 활발하고 다양한 입장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참여하는 사람이 늘어난 지금, 이 두 가지 지향성 사이의 마찰이 눈에 띄게 되었기 때문이다(여기에서는 사회변혁운동, 마이너리티운동이라고 의식하지 않고 사회에 대해 행동하는 사람을 포함하는 의미에서 활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동성애 파트너십을 행정이 인정하는 움직임 속에서, 혼인제도 그 자체에 반대하는 입장에 서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한 쌍의 파트너 관계를 하나의 단위로 보고 더욱이 이를 최상의 관계인 것처럼 표상하고 나아가서 그 관계를 나라나 지방 행정 등이 관리하는 시스템에 비판적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러한 시스템에 동성 커플이 등록되는 것을 비판한다. 이것은 가장 급진적인 입장 중 하나이다. 물론 그 대척점에 있는 동화주의에 위치하는 주장은 이러한 내용을 무비판적으로 환영하는 입장일 것이다. 시부야구의 파트너십증명서는 구청장에 의한 허가를 필요로 하고 그것을 얻기 위한 전제가 될 법적 보장 때문에 경비가 든다. 그러나 동화주의적인 입장에서는 이성애자의 혼인과 큰 차이가 나는 이 점(법적 보장에 경비가 드는 것)보수파로부터의 반발을 초래하지 않기 위해(보수파의 태도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이성간의 혼인과 다른 점을 비판하고 가능한 한 동일한 취급을 바라는 입장은 혼인을 요구한다는 의미에서 동화주의적이긴 하나, 차이를 만들어 안심하는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관을 변화시키는 것을 요구한다는 의미에서는 급진주의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LGBT 활동 내에서의 의견 대립, 마찰이 생길 때 사회변혁 자체를 바라지 않고, 활동 그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이 때라는 듯이 그것을 왈가왈부하고 운동의 추한모습인 것처럼 포착해 SNS 등을 통해 선전한다. 또 활동에 공감을 하는 사람, 혹은 관여하는 사람도 왕왕 이와 같은 대립 그 자체를 비판하고 부정적으로 말할 때도 있다. 그러나 역시 이러한 대립은 없애버려야 하는 것일까. 혹은 없앨 수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 생각한 다음에 중요한 것은 사회 속의 지배적 가치관과 규범의 다원성이나 다면성, 다층성 등에 기반하는 다양성과 그 속에서 생겨나는 저항에 대해서이다.

 

 

 

 

겹쳐지고 접합하는 프레임

 

 

   여기서 잠깐 내 최근 저작인 신주쿠 2초메의 문화인류학[각주:4]에서 논한 것을 요약해서 사회의 가치관이나 규범의 다양성과 이에 대한 저항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나는 이 책에서 동성애를 둘러싼 지배적 언설과 이에 대한 저항을 3개의 프레임으로 분류했다. 이 프레임은 플루그펠더(Pflugfelder)[각주:5]가 제시하고 있는 일본 섹슈얼리티 역사의 패러다임이나 메이지 시대의 계간법(鷄姦法) 제정과 폐지에 관한 후루가와 마코토[각주:6]의 분석을 참고해 정리한 것이다.

   시대가 지나면서 동성애를 파악하는 시점은 -취미 프레임에서 병리 프레임으로, 그리고 성적 지향 프레임으로 이행해 왔다. 사에키 준코[각주:7]에 의하면 메이지 이후 사랑()’이 도입되기 이전 일본의 섹슈얼리티는 ()’이라는 개념으로 파악되었다고 한다. 그 프레임에서는 남색이 받아들여지고 있었다고 이야기되는 경우가 많다. 그 후, 메이지기에 성과학(sexology)이 도입되면서 병리 프레임에 의한 동성애가 인식되게 되고, 이에 대해 당사자가 중심이 되어 저항적으로 확장되어 온 성적 지향 프레임이 등장하게 된다.

   이 개념들의 개념틀(여기에서 말하는 프레임)의 이행을 지적하는 것 자체는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나의 논점에서 중요한 것은 각각의 시대에서 다양한 가치관이나 관념이 항상 존재했다는 것, 새롭게 등장한 듯 보이는 프레임도 그 프레임을 견인한 사상이 이전부터 이미 존재했다는 것, 그리고 이들 프레임은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다른 개념과 접속하면서(예를 들면 취미와 접속하면서) 병존하고 다층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언제를 시발점으로 잡아도 그 때의 사회가 획일적인 섹슈얼리티관으로 뒤덮여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남색이 수용되었다고 말하는 시대에도 부정적으로 보는 가치관은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메이지 시대에 구미의 크리스트교 가치관이 들어와서, 일본에서는 동성애가 억압되게 되었다.’라는 견해가 너무 소박하다는 것도 지적했다. 애당초 부정적인 가치관이 있었기 때문에 병적 프레임을 형성하는 새로운 개념이 받아들여지고 지배적인 힘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동성애를 -취미혹은 병리로 보는 프레임은 뿌리 깊게 존재해 동성애를 억압하는 힘이 되고 있다.

   그리고 각각의 프레임 속에서도 다양한 언설이 서로 밀고 당기며 동성애를 표상하고 있었다는/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 이들 표상은 다른 프레임으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겹쳐지는 것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게이는 멋쟁이가 많다라는 말하기는 칭찬의 말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일종의 편견이다. 이 말하기 속에는 타고난 성질로서 위치 지어진 성적 지향을 토대로 -취미와 친화성이 있는 유흥과 관계하는 이미지, 그리고 다른 사람과는 다르다는 의미에서는 병리에 가까운 일탈성의 의미가 접합된 표상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물론, 경험적인 것으로, 게이로 커밍아웃 하기 쉬운 직업 영역과의 관계도 있겠지만, 그 커밍아웃 하기 쉬움과 앞의 설명은 순환구조에 있다.)

  

 

 

 

모순을 포함하는 지배적 힘

 

 

   여기서 구체적인 운동과 연결 짓기 어려운, 약간 추상화된 논의를 전개한 것은 사회를 바꾸어가는 활동이 저항하는 대상이 될 프레임과 그 속에 존재하는 표상들 자체가 일관된 것이나 획일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파악해 둘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사고방식은 인문·사회계의 학문 세계에서는 이미 고전적인 것 중 하나이다. 내가 이 논의를 처음으로 접한 것도, 초판이 25년 전에 나온 셰리 오트너의 젠더·헤게모니[각주:8]에서였다. 고전이 된 논의이지만 지금도 유효하고, 더 널리 학계 밖에도 알려져야만 하는 시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녀는 젠더·헤게모니에서 레이몬드 윌리엄즈(Raymond Williams)가 그람시로부터 받아들인 헤게모니 개념을 참조하면서, 남성우위의 보편성을 둘러싸고 인류학에서 일어났던 논의를 넘어서려고 했다. 그녀는 어떤 사회/문화에서도 남성이 권위를 가지는 축, 여성이 권위를 가지는 축, 양성이 평등인 축이 복수로 있고, 나아가 젠더와 관계가 없는 권위축도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모순이 없는 사회/문화는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어떠한 경우에서도 논리나 언설, 실천에는 복수적이고, 어느 것은 지배적(헤게모니적)이고, 다른 어떤 것은 반헤게모니적(전복적, 도전적)이고, 또 다른 어떤 것은 단지 다른 것으로 존재하기도 한다고 말한다.

   지배의 축이 다양하고 그 속에는 모순되는 것이 있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그에 대한 저항으로 발생하는 것도 일관성이나 획일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AB라는 서로 모순된 시스템이나 언설이 마이너리티를 억압하고 있는 경우, 그것에 대해 일어나는 반()A, B도 서로 모순된다(젠더에서의 여성에 대한 약하고 비호해야하는 존재’/ ‘여성은 강하다, 만만치 않다라는 언설과 이에 대한 저항을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그러나 원래부터 지배하는 힘에 내재하는 모순이 문제시 되지는 않지만, 저항으로 일어나는 반A와 반B의 사이의 모순에는 비판이 쏟아진다. 또 반A와 반B의 사이에도 AB에 거의 생기지 않는 대립이 생기기 쉽다. 그것은 마이너리티가 항상 획일적이길 요구하는 힘이 가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이너리티에게 획일적일 것이 요구되는 것을 둘러싼 논의는 이전에 내가 변동하는 주체의 상상/ 창조라는 논고에서 이미 다룬 바 있다.[각주:9] 거기에서 나는 마이너리티는 주체에 관해 0/1(=있느냐 없느냐) 어느 한 쪽의 존재 방식을 강요당하는 입장에 있다는 것을 말했다. 주류는 0~1의 주체성 속에서 매 번 변동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마이너리티는 마이너리티로서 주체화되거나 완전히 억제되거나 하는 힘이 가해지기 쉽다.

   그것은 각 주체의 구축론이지만, 집단에 대해서도 같은 힘이 가해지고 있다. 주류가 항상 다양한 측면을 가지고 흔들림이나 모순이 허용되어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마이너리티는 그 주체성의 구축에 있어서 각각에 0/1의 주체성이 요구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집단에도 획일적이고 일관된 정체성에 기반한 주체화가 요구된다. 이와 같이 획일적이고 일관성 있는 듯한 정체성을 요구하는 힘이 마이너리티에게 가해지고 있는 최대의 억압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면 예를 들어 ‘LGBT 활동으로 범주화되는 것들 속에 모순되게 보이는 경우가 있는 것은, 그것 자체가 획일화라는 최대의 억압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고, 강하게 비판되어야하는 것은 아니다(지배 자체가 모순을 품고 있는 이상, 저항의 모순도 불가피하다). 그 모순 때문에 대립이 강해지고 때로는 활동이 분열되기도 할 것이다. 나 자신, 스스로가 깊이 관여해온 HIV/AIDS 활동에서도 동경의 퍼레이드에서도 분리를 경험하고 있다. 활동의 분리는 개인적인 권리욕에 의한 주도권 다툼으로 보이기 쉽지만, 실제로는 각각이 실현하고 싶은 저항 형태의 다름에 의한 대립에 기반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물론, 분리가 자주 발생하면 이로 인해 활동 전체의 에너지가 저하되기도 하고, 바람직한 것도 아니지만 강하게 부정될 것도 아니다. 때때로 분리는 다양화를 초래하기도 한다. 이 대립과 분리에 관해 활동에 깊이 관여하는 사람이 가장 주의해야하는 것은 서로간의 저항의 다름(모순)에서 생기는 대립에 에너지를 너무 많이 소비하지 않는 것, 분리를 최악의 일처럼 다루지 않는 것, 분리한 상대를 공격하지 않는 것이다. 거기에 에너지를 너무 많이 투여하면 마이너리티를 가장 억압하고 있는 근본, 즉 획일화하려는 지배적인 힘을 그대로 놓아두게 된다.

 

 

 

흔들림, 왕래의 필요성

 

 

   LGBT가 크게 부상하여 붐 같은 양상을 드러내고 있는 상황에서 지금까지와 가장 다른 인상을 받는 것은 기업이 LGBT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동경에서 퍼레이드와 같은 큰 LGBT 이벤트에 스폰서로 지원하기 시작하고, 어떻게 직장을 LGBT가 일하기 쉬운 환경으로 정비할 것인가라는 테마에 대해서도 논의하게 되었다.

   이 흐름은 외국자본계의 글로벌 기업으로부터 시작하여 일본의 대기업도 따르는 형태를 띠고 있다. 그 속에서 이들 기업과 제휴한 활동은 상업성이 강해지고 (활동 그 자체가 이익을 얻는다기보다 스폰서가 야기하는 표상성이라는 의미에서) 사회 전체 속에서 지배적인 힘을 가진 자가 가지는 문화에 접근하여, 이른바 중상류층과 상류층 중심의 활동이 된다. 물론 실제로는 그와 같은 활동에 다양한 계층의 사람이 참가 하고 있고, 다른 지향성을 가지는 사람도 활동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표상적, 전체로서의 지향성 말이다. 그 흐름에 대해 LGBT의 빈곤 문제, 정신위생 문제 등 곤궁한 측면에 주목하고 문제의식을 강하게 가진 사람들로부터는 비판이 쏟아지기도 한다. 이는 미국 등의 퍼레이드에서도 반복되어 온 비판이다. 또 동성 간 파트너십의 법적 보호 실현을 중심적 과제로 하는 활동에 대한 위화감을 듣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 또한 미국에서 동성 간 결혼의 실현(결혼의 평등화)LGBT 활동의 주된 목표인 것처럼 전개되어 온 것에 대한 비판과도 통한다.

   내가 2010년에 동경에서 퍼레이드의 대표가 되었을 때, 글로벌 금융기업이 부스 설치를 해 주었다. 이와 같은 대기업이 퍼레이드에 부스를 낸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때마침 경제격차를 낳고 있는 요인 중의 하나로서 금융기업에 대한 비판이 높아지고 있는 시기이기도 했기 때문에 이들 기업의 부스 설치에 대해 SNS를 통한 비판이 쏟아졌다. 또 그 한편으로 나는 홈리스사람들의 자립 지원을 위한 잡지 빅이슈(THE BIG ISSUE)와 협력하여 같은 퍼레이드 행사장에 빅이슈의 판매 공간을 설치했다. 이 같은 연대에 대해서 어느 이벤트 오거나이저로부터 퍼레이드는 이제 홈리스의 이벤트가 되었나요?’라고 야유를 당하기도 했다. 그 말이 나온 배경에는 다른 사회운동(게다가 화려하지 않은 것)과의 연대를 불쾌하게 생각하고, 클럽문화 같은 것을 전면적으로 드러내고 싶어 한 실행위원의 잘못이 있었다.

   각각 다른 입장에서 비판이나 반발을 받았던 이 지원/협력은 어떤 의미에서 모순하는 것으로 비칠 것이다. 그러나 LGBT 활동 전체에 모순하는 것이 있는 것처럼 하나의 활동 속에도 때로는 모순되는 것은 존재할 수 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공존 불가능한 모순도 있을 것이다. 그 때에는 앞에서 논한 것처럼 분리해서 새로운 활동을 시작하면 좋지 않을까. 다만 그 때 일단 분리한 활동도 활동 과제가 일치 할 때에는 함께 활동한다는 자세가 중요하다. 어느 단체에 소속하는지, 혹은 이전에 대립이나 충돌이 있었다고 하는 것을 넘어, 활동 과제에 따라서는 공동 투쟁하는 것이 그 분야의 활동을 향상시켜 갈 터이다.

   내가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핑크 닷 오키나와는 2013년에 최초의 핑크 닷이 끝난 후, 2개의 세미나에 관여하게 되었다. 하나는 우리가 스스로 주최한 것으로 미국에 유학하고 있는 일본인 대학원생이 미국 퀴어액티비즘의 최신 논의를 소개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재오키나와미국영사관이 주최하고, 우리가 후원한 미국 최대의 LGBT권리운동 단체 ‘Human Rights Campaign(HRC)’의 법무부장에 의한 것이었다.

   앞의 세미나에서는 미국 주류’ LGBT운동이 신자유주의나 국가주의와 연결되어 있는 것에 대한 비판, 결혼의 평등화가 최우선이 되는 것은 중상류층의 요구에 의한 것이라는 비판이 일고 있는 것에 대한 보고였다. 그리고 HRC의 세미나에서는 다름이 아니라 주류’ LGBT운동 전략에 대해서 듣게 되었다. 그가 지역 신문의 인터뷰에 동석했을 때, 신문기자가 미국에서 어떻게 호소해 왔습니까라고 질문하자, ‘우리들은 이성애자와 똑같다는 점입니다라고 대답했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 두 개의 세미나가 끝난 뒤, 핑크 닷 멤버들이 감상을 공유했을 때에는, 크게 제도를 바꾸어 나갈 때 전략적으로 지배적인 문화에 맞추어가야 할 때가 있다는 것, 그러나 그대로 지배적인 문화와 일체화하거나, 큰 사회적 흐름에 포섭되어버리는 것의 위험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결론은 이 축을 항상 의식하면서 흔들리는 것, 혹은 그 사이를 왕래할 필요성이었다.

   아무리 의식해도 모두 의식할 수 없는 부분은 있지만, 지금 우리들은 어떤 입장을 취하려고 하는지, 어떤 지배적인 가치관이나 문화에 어디까지 동화하려고 하는지, 혹은 변혁하려고 하는지를 항상 의식하는 것, 또 모순을 내포한 지배력에 대해 저항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모순된 저항들 간에서, 그 모순이나 대립점을 확인하고, 때로는 그러한 문제점을 상호간에 전달하면서도 상대방에 대한 비판에 에너지를 너무 들이지 않는 것, 또 그 모순이나 대립을 과하게 부정적으로 다루지 않는 것, 그리고 언제라도 같은 활동 과제 하에 모이는 것, 이 의식이 지금부터의 LGBT 활동을 담당하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아닐까. 이것들을 의식하는 것이 획일화시키려고 하는 최대의 억압에 저항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들은 달관한 입장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 지금도 활동의 한가운데에 있고 갈등하거나 번민하거나 하는 일이 많은 나 자신에게 타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 이 글은 문화인류학자이자 LGBT 인권활동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스나가와 히데키(砂川秀樹)현대사상(現代思想)201510월호에 발표한 다양한 지배, 다양한 저항(多様支配多様抵抗)을 옮긴 것이다. 스나가와 히데키의 저서로는 カミングアウト・レターズ(太郎次郎社エディタス, 2008), 性的なものはプライベートなものか?』(グラディ出版, 2013), 新宿二丁目文化人類学: ゲイ・コミュニティから都市をまなざす(太郎次郎社エディタス, 2015) 등이 있다. 그는 공식 홈페이지(http://www016.upp.so-net.ne.jp/sunagawa/) 공식 블로그(http://hidekiss.exblog.jp/) 통해 오키나와에서의 LGBT 인권활동의 기록과 연구자로서의 행보 등을 보고, 발표하고 있다.-옮긴이

 

 

 

* 이 글은 『문화과학』 겨울 84호(2015)에 실렸습니다.

 

 

 

 

  1. 1) 2015년 핑크 닷 오키나와(Pink Dot Okinawa) 개최에 대한 정보는 홈페이지(http://pinkdotok.jp)에서 확인할 수 있다.-옮긴이 [본문으로]
  2. 2) NPO법인 어커(OCCUR, http://www.occur.or.jp/about.html)의 정식 명칭은 ‘움직이는 게이와 레즈비언 모임’으로 레즈비언과 게이로 구성된 그룹이다.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과 사회적 고립, 자기 비하 등 당사자가 처한 어려운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해 1986년에 설립되었고, 1999년 12월에 에이즈 서비스 사업체로서 또 동성애자 사회 서비스 사업체로 일본에서 처음으로 관할청에 특정 비영리 활동 법인(NPO법인)의 인증을 받았다. 어커(OCCUR)는 동성애와 HIV/AIDS에 대한 “올바른 지식·정확한 정보의 보급”, “차별·편견 해소”, “네트워크 구축”을 활동 목표로 하고 있다. 현재 일본 전역에 약 350명의 등록 회원과 2,500명의 등록 지원자들이 있으며, 도쿄 사무소에는 약 50명이 자원 봉사 스탭이 활동에 종사하고 있다. 어커(OCCUR)는 레즈비언/게이의 전화 상담, AIDS/STD정보 라인, 법률 상담 등의 각종 전문 상담과 에이즈 예방 홍보 행사 등 사회 서비스 사업을 비롯한 인권 옹호, 조사 연구, 정책 제언, 국제 협력 등 각 분야의 사업을 종합적으로 전개하고 있다(홈페이지 ‘단체소개’ 참고).-옮긴이 [본문으로]
  3. 3) 국제레즈비언・게이협회(International Lesbian, Gay, Bisexual, Trans and Intersex Association)는 레즈비언과 게이, 트랜스젠더, 인터섹스 관련 단체 600개 이상이 참여하는 국제적인 협회이다. 인권과 시민권 영역에서의 LGBT 권리를 위한 캠페인과 유엔 및 각국 정부를 대상으로 탄원서명운동을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ILGA일본(ILGA日本)에는 어커(OCCUR), G-Front간사이(G-Front関西, http://www5e.biglobe.ne.jp/~gfront), 홋카이도성적소수자협회삿포로 미팅(北海道セクシュアルマイノリティ協会札幌ミーティング, http://pablo1974.com/hikokai_hsa/index.html), 게이재팬뉴스(ゲイジャパンニュース, http://gayjapannews.com/news2007/news226.htm)가 가입했다.-옮긴이 [본문으로]
  4. 4) 砂川秀樹, 『新宿二丁目の文化人類学: ゲイ・コミュニティから都市をまなざす』, 太郎次郎社エディタス, 2015. [본문으로]
  5. 5) Gregory M. Pflugfelder, Cartographiesof Desire: Male-Male Sexuality in Japanese Discourse, 1600-1950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9). [본문으로]
  6. 6) 古川誠, 「「性」暴力装置としての異性愛社会ー日本近代の同性愛をめぐって」, 『法社会学 法と暴力』第54号, 2001, 80-93. [본문으로]
  7. 7) 佐伯順子, 『「色」と「愛」の比較文化史』, 岩波書店, 1998. [본문으로]
  8. 8) Sherry B. Ortner, "Gender Hegemonies," Making Gender: The Politics and Erotics of Culture (Boston: Beacon Press, 1996). [본문으로]
  9. 9) 砂川秀樹, 「変動する主体の想像/創造」, 『現代思想』 Vol.28-14. [본문으로]

 

 

퀴어가 여기 살고 있다

-불가시화에 저항하며

 

 

 

 

 

얀베 유우헤이(山家悠平)_일본근대여성사 연구자

번역: 장수희_연구모임 아프꼼 연구원

감수: 다지마 테츠오(田島哲夫)_연세대 국학연구원 전문연구원

 

 

 

 

 

 

 

 

 

 

   문득 생각나는 사람의 이름이나 사건이 있다. 중앙난방의 건조한 방이나 라디오에서 흐르는 아니 디프랑코(Ani DiFranco)의 음악 소리, ‘안티 헤테로섹시즘(이성애중심주의 반대)’라는 벽돌 벽의 낙서, 코인 세탁소의 싸구려 유연제 냄새가 불러일으키는 기억과 함께 구체적인 사건이 선명히 의식 속에 떠오른다. 영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유학생으로서의 경험은, 그 때에 실시간으로 이해하거나 반응 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만큼,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되돌아가 질문하는 기억의 지점이 되어 몸에 새겨져 있다.

 

   그 겨울은 특별한 겨울이었다. 199810월 와이오밍주 라라미라는 시골 마을에서는 21세의 대학생 매튜 셰퍼드가 눈이 내리는 밤에 살해당했다. 셰퍼드는 대학에서도 게이임을 오픈하고 있었고, 그 밤은 우연히 그 지역의 바에 혼자 있었다. 같은 세대인 아론 맥키니(Aaron McKinney)와 러셀 헨더슨(Russell A. Henderson)이 셰퍼드에게 말을 걸었고, 집에 데려다 준다는 제안으로 맥키니가 운전하는 픽업트럭에 탔다. 그러나 차는 집으로 향하지 않고 마을 밖 들판 한가운데에 멈추었다. 거기서 셰퍼드는 차에서 끌려내려져 나무 말뚝에 포박당하고, 총부리로 두개골이 함몰될 정도로 심하게 구타당한 뒤 그대로 방치되었다. 18시간 후에 자전거로 그 곳을 지나던 같은 와이오밍 대학의 학생에게 발견되지만 그가 이송되었던 콜로라도주의 병원에서 5일만에 의식이 돌아오지 못한 채 죽었다.[각주:1] 맥키니와 헨더슨은 셰퍼드가 발견되기보다도 전에 마을에서 히스패닉 젊은이 2명과 싸우는 중에 체포되었고 나중에 종신형에 처해졌다.

   내가 유학하고 있었던 안티오크 대학의 신문 디 안티오크 레코드(The Antioch Record)에는 나는 메튜 셰퍼드(I am Matthew Shepard)라는 사건의 개략을 전하는 서명기사가 1014일에 났다. 기사는 대형 미디어가 했던 보도를 요약한 것인데, 와이오밍 대학의 홈 커밍 퍼레이드에 셰퍼드 사건에 대한 항의자 약 450명이 참가했다는 것과 오하이오주의 콜럼버스에서 게이 활동가들이 촛불을 밝히고 셰퍼드를 추도하는 밤샘 모임을 기획했다는 것이 실렸다. 또한 한편에는 임신중절 반대파가 셰퍼드의 죽음에 대해 성명을 발표하고 반혐오범죄(Hate Crime)법의 제정으로 레즈비언이나 게이에게 시민권을 인정하는 것을 강하게 반대하고 있는 것 등을 전하고 있다.[각주:2] 콜럼버스는 안티오크 대학에서 한 시간 정도인 곳에 있고 기사에 있는 1013일 밤샘 모임에는 많은 학생들이 참가했다.

   셰퍼드 사건은 안티오크라는 작은 커뮤니티에도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 캠퍼스에서도 지금 안전하다고 생각할 수 없다.’디 안티오크 레코드(1013)에 실린 한 학생의 발언에도 밝혀져 있듯이 이성애중심주의 사회에서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로서 산다는 것은 모든 장소에서 항상 폭력과 직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안티오크 대학의 퀴어 커뮤니티나 각 학생들이, 어떤 방식으로 셰퍼드 사건과 같은 직접적인 폭력뿐 아니라 일상적인 대학생활 내의 폭력에 대해 소리를 높이고, 상황을 바꾸기 위해 행동했는지 당시의 학내 신문과 나의 기억을 의지하여 살펴보고 싶다. 그들의 실천은 17년이나 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현재에도 이성애중심주의와 LGBT의 불가시화 문제를 고찰할 때 중요한 시점을 제시하고 있다.

 

 

 

안티오크 커뮤니티와 퀴어센터

 

   안티오크 대학은 오하이오의 옐로우스프링스라는 인구 3,500명 정도의 작은 마을에 있다. 마을의 중심가인 제니아 에비뉴를 따라서 도서관이나 작은 영화관, 여러 개의 카페 등이 있는데, 5분 정도 걸으면 마을을 벗어나 광대한 글렌헬렌의 숲에 다다른다. 거의 숲 속에 있다고 말해도 좋은 대학의 캠퍼스 중앙에는 19세기에 개교 했을 때 세워진 독일 뤼베크의 성마리엔 교회를 방불케 하는 탑이 있는 대학본부가 솟아 있고, 주위에 교실과 학생 기숙사가 흩어져 있다. 1998년 당시의 캠퍼스 학생 수는 신입생을 맞이하는 9월임에도 400명 정도였을 것이다. 주말이 되면 차를 가진 학생들은 근처의 마을이나 쇼핑몰로 외출해, 나뭇가지 사이로서 얼굴을 슬쩍슬쩍 내비치는 다람쥐 모습이 사람보다도 더 자주 눈에 띄었다.

 

   대학에 들어가면 바로 나누어주는 『안티오크 대학 서바이벌 핸드북(Antioch College Survival Handbook)』의 서두에 안티오크는 대단히 독특한 대학인데 그 많은 대부분은 커뮤니티 정부(government)의 형태에서 연유한다.’[각주:3]라고 쓰여 있는 것처럼 안티오크 대학 내 자치제도는 대단히 급진적이었다. 예를 들면 커뮤니티 정부는 대학의 관리 운영 부분인 AdCil(Administrative Council)과 학내 생활에 관한 입법 부문인 ComCil(Community Council)이라는 두 개의 조직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AdCil은 이사 2, 대학 총장, 교원 대표, 커뮤니티 매니저(학생자치회장), 직원 투표에 의해 선출된 직원 1, 교원 투표에 의해 선출된 교원 2, 학생 투표에 의해 선출된 학생 3명과 교원 2명이 참가하는 것으로 성립된다.

   학생의 활동도 왕성하고 학내의 인권적 마이너리티의 상황 개선을 목적으로 하는 TWA(Third World Alliance), 성희롱·성폭력(sexual harassment)이나 섭식장애, 여성의 신체 이미지 등에 대해 생각하기 위한 공간을 운영하는 여성센터 등 다양한 그룹이 있었다. 나는 교토 세이카 대학에서 간 10명의 유학생 중 한 명으로 8월 말에 오하이오에 도착하여 밀즈라는 학생 기숙사에서 신입생들과 섞여 생활을 시작했다. 교토에 있을 때는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과 섹스워크론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지만, 안티오크에 와서는 영어가 어려운 포스트모던 페미니즘 수업은 피하고 인류학 코스를 이수하고 있었다. 학내에서 자주 눈에 띠는 퀴어센터의 활동에 관심을 가진 것은 10월의 내셔널 커밍아웃 데이(National Coming Out Day)[각주:4] 즈음부터이다. 앞에서 말한 『안티오크 대학 서바이벌 핸드북』에 따르면 퀴어센터는 게이나 레즈비언,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 그리고 섹슈얼 아이덴티티를 사회의 주변에 위치시키고 있는 사람들을 지원[각주:5]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그룹으로 학내의 퀴어 이벤트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한 통의 투서

 

   셰퍼드 사건이 전 미국의 미디어를 통해 알려진 주는 1011일 일요일, 내셔널 커밍아웃 데이를 맞이해 안티오크 학내에서도 퀴어센터 기획에 의한 상영회와 댄스파티 등이 열린 주였다. 8일에는 학내 카페에서 퀴어 커피 타임이 있고, 9일에는 밤 11시부터 새벽 2시까지 퀴어 댄스파티, 10일과 11일에는 퀴어 영화제가 개최되었다.

   9일 금요일 밤에 유니온 빌딩(학생 동아리 방이 모여 있는 건물)2층 댄스 공간에서 열린 파티에는 많은 학생이 여장이나 남장의 이성으로 변장하여 참가하고, 댄스가 특기인 학생은 무대 위에서 적극적으로 퍼포먼스를 했다. 파티는 밤 11시경에 시작해 방으로 돌아간 것은 심야 2시경이었다. 당시 내 기록을 보자면 왠지 이상한 느낌이라고 휘갈겨 쓴 듯한 메모만 남아 있다. 이제 와서 읽어 보아도 분절화되지 않은 이 한 문장으로는 그 위화감이 어디서 온 것인지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전체적인 인상은 여장한 신입생들이 떠들고 있는 모습이 두드러졌다는 것이다.

   그 파티 며칠 후에 디 안티오크 레코드에 게재된 안티오크는 퀴어친화적이지 않다라는 한 통의 투서가 그 때의 문제를 여실히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투서는 퀴어 입장에서 학내의 이성애자를 중심으로 한 퀴어친화적인 포즈의 기만성을 비판하고 있었다.

 

 

 

커뮤니티에게

 

   모두 잘 들어. 나는 퀴어라고 안티오크에서 말할 때 전혀 기분이 좋지 않아.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겠어? 안티오크는 퀴어친화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지만 여자친구에 대해 말할 때나 퀴어 이벤트(확실히 준비한 기획, 그것이 단순히 모두에게 안녕 나는 다이크[각주:6]라고 주장하기 위한 것인데도)에 대한 제도적인 지원을 의뢰할 때 나는 불쾌해. 그건 말이지, 그런 말을 하면 사람들이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기 때문이야. 사람들은 모든 것에 이성애(Straightness)를 가정하기 때문에 내가 말을 하면 기묘한 것을 본 것 같은 눈을 해. 그렇지 않으면, 그들 자신들을 퀴어친화적이라고 생각하고, 퀴어에 대한 말은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다고 느끼고 있는 것인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나뿐만이 아냐.

   좋은 예 하나. 이번 주말은 내셔널 커밍아웃 데이였고, 원래는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가 밖으로 나와 긍정되어야하는 날이었어. 그런데 내가 본 것은 전혀 정반대의 광경이었지. 친구들은 대학 캠퍼스에 분필로 퀴어에 대한 긍정적인 메시지를 써서 비난당했어. 토요일 밤 퀴어 파티는 원래 퀴어의 역사와 문화의 축제여야 했어. (이렇게 써도 맨디와 리즈의 파티를 위한 노력에 감사! 고마워 소녀들!)

   내가 본 것은 파티가 퀴어를 성적인 존재로밖에 보지 않는 이성애자들에게 강탈당한 모양이었어.(별로 퀴어가 섹시하다는 것을 부정하고 싶은 것은 아냐. 그래도 우리들은 그것만 생각하며 사는 것도 아니고, 먹고 있는 것도 아니고, 호흡하고 있는 것도 아냐. 그런데도 우리들이 여기에서 퀴어에 대해 말하거나 축복하거나 하는 것이 허용되는 것은, 성적인 존재일 때뿐인 듯 해. 도대체 그게 뭐야?) 일 년에 단 하루만 드레스를 입고 여()장 한다고 해도 너희가 퀴어친화적이 되는 것은 아냐. (내가 다닌 고등학교 축구 선수들은 학교의 격려회 때 언제나 치어리더로 분장을 했었어. 그들은 젠장 틀림없이 퀴어친화적이 아니라 단순히 여성을 바보로 만들고 있었던 것뿐이야.)

 

   ---내가 말하는 것은 나쁜년이란 느낌? 난 그래. 나는 나쁜년 다이크이고, 그리고 죽을 만큼 화가 났어. 왜냐하면 모두들 전혀 공감적이지 않고, 안티오크에서 퀴어라고 말할 때 기분이 더러워지기 때문이야. 내가 퀴어 문제에 대해 말하면 모두들 놀라고 혼란스러워하는 듯해. 왜냐하면 안티오크는 안전한 장소이기 때문에’? 누가 그렇대?[각주:7]

 

 

 

 

   이 투서를 한 A.로튼은 4학년생으로 기사에는 신념을 가진 다이크라는 서명이 있다. 여기에서 인용한 것은 투서의 일부분이지만 전체를 다 읽으면 댄스파티 때의 불쾌함은 어디까지나 일례이고 그 불쾌함은 일상적으로 뿌리내리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로튼의 투서에는 사람들이 자신을 보는 시선의 문제(‘나를 이상하게 본다’), 이성애 규범의 억압에 대한 불쾌(‘다들 아직 내가 스트레이트라고 가정한다’)가 빈번히 등장한다. 즉 애당초부터 문제가 있다고 간주되지 않는 일상적인 현장에서 이성애주의가 가하는 억압의 체험을 로튼은 언어화하여 비판하고 있다. 더하여 퀴어를 성적인 존재로만 파악하려는 시선의 폭력성도 지적하고 있다.

   투서가 있고 8일 후인 1022, 로튼의 비판을 뒷받침하는 듯한 사건이 일어났다. 두 남성이 키스하고 있는 퀴어센터 홍보 포스터가 스포트라는 기숙사 입구에 붙어 있었는데, 그 포스터에 패그즈(Fags, 게이자식들)’라고 낙서된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같은 기숙사 엘리베이터의 퀴어센터 포스터에는 나치스의 하켄크로이츠가 그려져 있었다. 디 안티오크 레코드는 곧바로 호외를 발행하고 그 행위들을 커뮤니티가 대응해야하는 호모포비아라는 명확한 의사표시를 하고 있다.

 

   기사에 의하면 낙서가 발견된 목요일 심야에 커뮤니티 매니저(학생대표와 같은 입장)에게 이 사실이 보고되었고, 그 후 옐로우스프링스 경찰에게 알리는 한편, 대학의 경비원에게도 신고했다. 오전 115분부터 약 30명의 학생으로 구성된 긴급회의도 이루어졌다.[각주:8] 23일 오후에 식당에 가자 40명 이상의 학생들이 원형으로 모여, 사건에 대한 항의집회를 하고 있었다. 거기에서 말해지고 있는 내용은 대부분 알 수 없었지만, 참가하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으로 뭔가 심각한 사건이 있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당사자에 의한 운동의 고양과 가시화

 

 

   신문의 호외는 퀴어는 침묵하지 않는다(Qeer will not be silenced)’, ‘견딜 수 없는 침해(Violation intolerable)’라는 타이틀로, 학내의 레즈비언이나 게이 당사자의 소리를 소개하고 있다. ‘이성애자도 나서서 목소리를 높일 필요가 있다[각주:9]는 주장도 소개되어 있다. 이처럼 신문이 전하는 메시지들뿐 아니라 23일 밤에는 차별낙서를 비판하는 전단(flier)도 등장한다. 전단은 지극히 심플하게 만약 퀴어의 단결을 호소하는 포스터에 하켄크로이츠를 쓴 것이 너무 재밌어 죽겠는 사람이 있다면, 다음엔 뻔뻔스럽게 내선번호도 적어라!’[각주:10]고 주장한다. 25일 일요일에는 안티오크에서 옐로우스프링스 마을로 향하는 반혐오(hate) 행진과 집회가 기획되어 있다.

   일련의 반혐오 액션의 고양은 1027일 커뮤니티 회의(매주 화요일에 열리는 전학집회)에서 절정에 달했다. 집회는 퀴어와 그 지지자에 의해 기획되었던 것인데, 30명의 멤버가 핑크 트라이앵글을 가슴에 붙이고 발언자로 참가했다. 200명에 가까운 참가자 앞에서 3학년인 K. 프랭크는 미국에서 LGBT가 피해자가 된 범죄통계를 소개하고, 교실에서 나갔다. 다른 멤버들도 교실의 여러 장소에 서서 역시 레즈비언이나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가 피해자가 된 사건의 메모를 크게 읽은 후 프랑크 뒤를 따라 나가, 마지막에는 회의 장소에 핑크 트라이앵글을 붙인 멤버가 한 사람도 남지 않게 되었다. 회의 장소에 남은 3학년생인 H. 골만이 이것이 퀴어인 사람들이 없는 세계다라고 발언한다.

   지금 당시의 커뮤니티 회의를 촬영한 비디오를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비디오 플레이어에 넣어 영상을 본다. 맥그리거 홀의 갈색 오크나무 벽 앞에 선 그리운 얼굴, 얼굴, 얼굴. 이발에 실패해서 앞머리가 극단적으로 짧아져 있던 나도 찍혀있다. 핑크 트라이앵글을 붙인 멤버가 한 명도 없어지고 고요해진 교실. 다시 문이 열리자 나갔던 사람들이 이번에는 손을 이어 잡고 교실에 들어왔다. 그리고 먼 사례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퀴어는 아니고 트랜스젠더인 레즈비언이라고 말하는 학생도 있다. 내가 그때보다 영어를 알아들을 수 있게 되어 들어 보면, 말하는 사람에 따라 스스로의 섹슈얼리티를 고하는 말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러나 퀴어,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 이들 중 어느 말로 자신을 표현한다고 해도 많은 발언자들이 그 아이덴티티를 심한 고통의 기억과 연관시켜서 말하고 있다. ‘나는 퀴어야. 그것 때문에 여동생은 학교에 가면 따돌림을 당해.’ 짜내는 듯한 목소리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발언하는 교원. ‘나는 게이다. 그것은 내가 내 부친과의 관계가 이제 끊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살아있는 단 한명의 부모님인데.’ ‘나는 퀴어다. 지금은 그것을 어머니에게 말하는 것이 두렵다. 아직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집회의 마지막에는 디 안티오크 레코드에 투고를 한 A. 로튼이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낭독하였다. “역사적으로 말해서 피억압자들 그룹은 각각 그룹끼리 대립하도록 하게 만들고, 자유를 구하는 싸움은 분열되어 왔다. 억압자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전통적으로 이 방법을 사용한다. 우리들은 그런 고통으로 가득 찬 무익한 역사를 따라가면 안 된다. 이 액션의 목적은 퀴어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소리를 공유하고, 대립을 넘어선 연대를 구축하는 것이다.”[각주:11] 이 말대로 커뮤니티 회의를 포함한 안티오크 학내에서의 반혐오 액션은 먼저 다양한 경험을 서로 말하는 것을 통해 이성애자도 포함된 커뮤니티 멤버 안에서 공유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커뮤니티 안에서 생활하는 LGBT가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경험을 말하는 것은 당사자의 권리임과 동시에 이성애를 자명하게 생각하는 시선과의 직접적인 싸움이기도 하다. 경계 지어져 있는 당사자의 정신적 고립감을 불식시키는 것과 동시에 학생에 의한 에스코트 활동(정신적 신체적 위기를 느낀 학생이 전화를 하면 언제든 카운슬링의 트레이닝을 받은 학생이 찾아가서 대응하는 활동)이나 학생에 의한 학내 순찰 단체의 결성 등 물리적 의미에서의 지원도 적극적으로 실천되었다.

   이들 액션은 결과적으로 안티오크라는 작은 커뮤니티 속에서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가 자유롭게 발언하는 것이 가능한 공간의 확대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9월에 갓 입학한 신입생들이 디 안티오크 레코드에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발언을 하고, 기숙사의 벽돌 벽면에 안티 헤테로섹시즘(이성애중심주의 반대)’‘Qeers live here(퀴어가 여기 살고 있다)’라는 두 개의 큰 그래피티를 그렸다. 조금 시간이 지난 뒤 학내 구석구석까지 남아 있었던 우리들은 여기에 있다는 강한 메시지를 보았다. 나는 이성애중심주의 사회 속에서 불가시화 되었던 것이 당사자의 발언과 행동을 통해 여기에서 처음으로 눈에 보이는 형태로 부각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안티오크로부터 멀리 떨어져

 

   처음으로 17년 전 미국에서의 체험을 다시 정리해보고 생각한 것은 그 때의 다양한 말하기와의 만남이 생활 속 이성애중심주의나 젠더 규범을 고쳐 묻는 하나의 원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언젠가 이 사건을 확실히 쓰겠다고 생각했었는지 오려두었던 신문기사 조각도 골판지 안에 정리되어 있었다. 이번에 원고를 쓰게 되어서 실은 당시 캠퍼스에 있었던 다른 학생들을 찾아 그 때의 인상을 듣고 싶었지만, 시간의 제약이 있어 할 수 없었다. 당연히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학생은 나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얻었을 것이고, 보다 상세하게 인상을 말하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다른 시점의 의견으로 신문에 남아있는 커뮤니티 회의에 대한 감상을 두 개 소개하고 싶다. 교육학의 H. 랫슨 교수는 정말 훌륭하다. 우리들이 함께 행동할 계기가 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 회의 기획자들이 퀴어 커뮤니티 속에 있는 차이를 확실히 마주보는 것이 정말 좋았다고 생각했다. 통상 그런 차이는 그다지 중요시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각각의 다른 말하기를 존중하는 형태로 집회가 기획된 것을 평가하고 있다. 2학년인 E. 칼리로는 ‘K가 방을 나갔을 때가 정말로 가슴에 깊이 박히는 듯한 순간이었다. 호모포비아를 나 자신과 가까운 문제로 느낀 순간이었다. 나는 잘 알고 있는 그가 지독한 범죄의 희생자가 되는 장면을 상상했다. 그것은 정말로 최악이었다. 그래도 그 경험은 나의 눈을 뜨게 해주었다.’라고 상상하는 것으로 가까운 친구와 호모포비아의 문제가 연결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각주:12] 신문에 소개된 것은 기본적으로 액션에 대한 긍정적인 견해인데, 이들 속에도 이성애중심주의를 커뮤니티에서 맞붙어야만 하는 문제라는 인식을 가진 사람이 많다는 인상을 받았다.

   안티오크라는 작은 커뮤니티의 이야기에서 일단 멀어져, 보다 큰 사회 상황을 생각하면 1998년부터 17년 동안 LGBT를 둘러싼 법제도적 상황은 크게 변화했다. 예를 들면 미국에서는 2009년에 섹슈얼리티와 장애를 이유로 한 범죄를 혐오범죄(Hate Crime)으로 규정하는 매튜셰퍼드법이 버락 오바마의 서명으로 성립되었고, 20156월에는 최고재판정이 동성결혼 금지를 위헌으로 판단했다. 일본에서도 성적 마이너리티에의 차별을 금하고 이성간의 혼인관계와 같은 제도적 지원을 보장하는 남녀평등 및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를 추진하는 조례가 시부야구에서 가결되어 올해 41일부터 시행되고 있다.[각주:13] 77일에는 동성혼 인권구제 변호단(LGBT 지원 법률가 네트워크 유지[有志])이 일본에서 동성혼이 인정되지 않는 것은 인권침해라고 일변련(日弁連)에 인권구제 제기를 하고 있다. 다만 동성 간 파트너십의 확대에 대해 말한다면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과 같은 당사자의 불가시성을 약하게 하는 계몽적인 가능성을 가지면서도, 그것으로 이성애중심주의가 흔들리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도 다시 주의가 필요하다.

   나는 미국 유학을 끝내고 교토에 돌아와 얼마 지난 후에 사쿄구(左京区)에서 집 한 채를 빌려 대학 친구와 살기 시작했다. 16년간 주민은 몇 번이나 바뀌었지만 지금도 같은 집에 살고 있다. 겨울마다 히에이잔(比叡山)산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을 맞아온, 지은 지 45년 된 2층짜리 집은 결코 깨끗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봄에는 수국이 흐드러지게 피고, 가을에는 방안에 금목서 향이 나고, 매일 아침 동틀 녘에는 현관 쪽에서 들고양이가 싸움을 하는 한가로운 환경이다. 1층에는 이 집에는 동성애자가 살고 있습니다라는 한 장의 종이가 붙어있다. 옛날 이 집의 주민이며 섹슈얼리티를 오픈하고 있었던 게이 친구가 10년 정도 전에 쓴 것이다. 함께 생활하면서 어떨 때는 부엌에서 요리를 하거나, 어떨 때는 버려진 개를 돌보거나, 때로는 고양이 간병을 하면서 많은 말을 나누었다. 함께 살기 시작했던 즈음에 그는 대학에서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오픈하고 있는 것에 대해 예를 들어 내가 여기에 안주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한층 더 교묘한 클로젯(closet, 벽장)일지도 몰라. 일상적으로 게이로 있으려면 커밍아웃 하든 하지 않든 간에 보다 신중한 클로젯(closet)과의 대결이 필요하다고 쓰고 있다.[각주:14] 클로젯(벽장)이란 커밍아웃하지 않은 동성애자가 둘러싸인 어두운 공간의 비유이지만, 설령 커밍아웃 했다고 해도 새로운 인간과의 만남이나 다른 장소를 방문할 때마다 게이인 것이 상정되지 않는, 불가시화의 폭력과 계속 대치해야한다는 어려움이 여기에 서술되고 있다. 물론 그것은 쉐어하우스라는 작은 커뮤니티에서도 다르지 않다. 친한 관계 속에서 게이라는 것을 전해도 이성애중심주의와 젠더 규범에 대한 비판이 공유되지 않으면, 그리고 무엇보다도 게이로서 살아온 경험을 확실히 들을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면, 그곳은 다시 새로운 벽장이 되어버린다. 그런 문제의식도 있고, 내가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있기도 해서, 그가 살고 있었던 7년간은 생활 속에서 이성애중심주의나 섹슈얼리티, 젠더에 대한 대화를 반복하는 매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의 대화는, 이 장소가 LGBT의 소외나 성차별이 없는 공간이면 좋겠다는 현재의 내 생각과도 직접적으로 이어져 있다.

   지금도 섣달그믐이 되면 그도 포함해 과거의 이 집 주민과 친구들이 집에 모인다. 섹슈얼리티를 오픈하고 있는 사람, 하지 않고 있는 사람, 전혀 위화감 없이 이성애 규범을 살고 있는 사람, 젠더 트러블 문제를 떠안고 있는 사람, 잘 모르는 사람, 갓 결혼한 사람들 등이 같은 테이블에 둘러 앉아 TV를 보거나, 해넘이 소바를 먹거나 한다. 나는 부엌에 서서 요리를 만들 때가 많지만 어떤 이야기가 나오는지 때때로 귀를 기울인다. 당사자의 발언이 무화되지 않도록, 일반화되어 버리지 않도록, 주의 깊게 말을 찾을 때도 있다. 결코 한 모양이 아닌 다양한 이야기 속에 솟아나는 당사자의 경험과 그 이야기를 들었던 때의 감촉, 그리고 그것을 상상하는 일이,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상황을 바꾸어 가는 하나의 힘이 된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 이 글은 일본근대여성사 연구자인 얀베 유우헤이(山家悠平)현대사상(現代思想)201510월호에 발표한 퀴어가 여기 살고 있다-불가시화에 저항하며(Queers live here-不可視化して)를 옮긴 것이다. 최근의 저서인 遊郭のストライキ: 女性たちの二十世紀序説(共和国, 2015)가 주목 받고 있다. 얀베 유우헤이는 모교인 교토 세이카 대학에서 근무했던 2010년 겨울에 1년씩 3년까지밖에 계약할 수 없는 대학의 고용상한제에 대해 젊은 연구자들이 쓰고 버려진다.”라며 문제제기를 하고, 고용한도 철폐를 위해 동료 5명과 일주일간 단식 투쟁을 한 바 있다. 지금은 효고현 내에 있는 오테마에 대학 학습지원센터에서 학생 상담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北海道新聞>, 2015. 5. 3 참조. http://dd.hokkaido-np.co.jp/cont/books_visited/2-0026968.html).-옮긴이

 

 

* 이 글은 『문화과학』겨울 84호(2015)에 실렸습니다. 

 

 

  1. 1) The New York Times, 1998. 10. 10, 13. [본문으로]
  2. 2) K. Franck, “Gay student killed in Wyoming Hate Crime: I am Matthew Shepard,” The Antioch Record, 1998. 10. 14(신문에 실린 기사의 서명은 실명이었지만, 발표 매체가 적은 부수의 학내 신문인 것, 현재 어떻게 LGBT 활동과 연관되어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집필자, 발언자 모두를 가명으로 하였다. 일본어로의 번역은 모두 필자가 했다). [본문으로]
  3. 3) Antioch College Survival Handbook 1998-1999, 8. [본문으로]
  4. 4) 1987년에 워싱턴DC에서 레즈비언과 게이 퍼레이드를 한 날로, 그 다음해 1988년에 이를 기념하여 제정되었다. [본문으로]
  5. 5) Antioch College Survival Handbook 1998-1999, 77. [본문으로]
  6. 6) Dyke. 레즈비언 용어 중 하나. 원래 남성적 특징이 강한 레즈비언을 비하하여 지칭하는 말이었으나, 지금은 이 단어에 대한 의미 투쟁을 통해 레즈비언이라는 단어와 함께 여성 동성애자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옮긴이 [본문으로]
  7. 7) A. Lawton, “Antioch is not queer friendly,” The Antioch Record, 1998. 10. 14. [본문으로]
  8. S) Holman, “Anti-Queer Graffiti Found in Spalt,” The Antioch Record(special edition), 1998, 10. 23. 사건이 발생한 현장에서 즉시 경찰에 알렸다는 사실로도 셰퍼드 사건 이후의 안티오크 대학 내의 위기감 고조를 볼 수 있다. [본문으로]
  9. 9) The Antioch Record(1998. 10. 23)에 실린 C. McArleton의 발언. [본문으로]
  10. 10) The Antioch Record, 1998. 10. 24. [본문으로]
  11. 11) The Antioch Record, 1998. 10. 28. [본문으로]
  12. 12) 두 발언 모두 The Antioch Record(1998. 10. 28)에서 재인용했다. [본문으로]
  13. 13) 한편, 이 조례에는 핑크워싱(Pinkwashing, LGBT친화적인 자세를 어필하여 그 외의 다른 인권침해나 폭력을 은폐하는 것)적 측면이 있다. ‘다양성 존중’을 동성 간 파트너십의 근거로서 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부야구는 2014년 말에 구내에 있는 미야시타공원(宮下公園)을 폐쇄하고 야숙자들을 완전히 내쫓았다. [본문으로]
  14. 14) ナカタニカウヤ, 「セイカ大における‘日常’としてのクローゼット」, 『イツカノユウグレ』 創刊号. 『イツカノユウグレ』는 주로 교토 세이카 대학 내에서 배포하고 있는 무가지로, 창간 이후 현재까지 필자가 편집을 직접 하고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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