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가 여기 살고 있다

-불가시화에 저항하며

 

 

 

 

 

얀베 유우헤이(山家悠平)_일본근대여성사 연구자

번역: 장수희_연구모임 아프꼼 연구원

감수: 다지마 테츠오(田島哲夫)_연세대 국학연구원 전문연구원

 

 

 

 

 

 

 

 

 

 

   문득 생각나는 사람의 이름이나 사건이 있다. 중앙난방의 건조한 방이나 라디오에서 흐르는 아니 디프랑코(Ani DiFranco)의 음악 소리, ‘안티 헤테로섹시즘(이성애중심주의 반대)’라는 벽돌 벽의 낙서, 코인 세탁소의 싸구려 유연제 냄새가 불러일으키는 기억과 함께 구체적인 사건이 선명히 의식 속에 떠오른다. 영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유학생으로서의 경험은, 그 때에 실시간으로 이해하거나 반응 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만큼,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되돌아가 질문하는 기억의 지점이 되어 몸에 새겨져 있다.

 

   그 겨울은 특별한 겨울이었다. 199810월 와이오밍주 라라미라는 시골 마을에서는 21세의 대학생 매튜 셰퍼드가 눈이 내리는 밤에 살해당했다. 셰퍼드는 대학에서도 게이임을 오픈하고 있었고, 그 밤은 우연히 그 지역의 바에 혼자 있었다. 같은 세대인 아론 맥키니(Aaron McKinney)와 러셀 헨더슨(Russell A. Henderson)이 셰퍼드에게 말을 걸었고, 집에 데려다 준다는 제안으로 맥키니가 운전하는 픽업트럭에 탔다. 그러나 차는 집으로 향하지 않고 마을 밖 들판 한가운데에 멈추었다. 거기서 셰퍼드는 차에서 끌려내려져 나무 말뚝에 포박당하고, 총부리로 두개골이 함몰될 정도로 심하게 구타당한 뒤 그대로 방치되었다. 18시간 후에 자전거로 그 곳을 지나던 같은 와이오밍 대학의 학생에게 발견되지만 그가 이송되었던 콜로라도주의 병원에서 5일만에 의식이 돌아오지 못한 채 죽었다.[각주:1] 맥키니와 헨더슨은 셰퍼드가 발견되기보다도 전에 마을에서 히스패닉 젊은이 2명과 싸우는 중에 체포되었고 나중에 종신형에 처해졌다.

   내가 유학하고 있었던 안티오크 대학의 신문 디 안티오크 레코드(The Antioch Record)에는 나는 메튜 셰퍼드(I am Matthew Shepard)라는 사건의 개략을 전하는 서명기사가 1014일에 났다. 기사는 대형 미디어가 했던 보도를 요약한 것인데, 와이오밍 대학의 홈 커밍 퍼레이드에 셰퍼드 사건에 대한 항의자 약 450명이 참가했다는 것과 오하이오주의 콜럼버스에서 게이 활동가들이 촛불을 밝히고 셰퍼드를 추도하는 밤샘 모임을 기획했다는 것이 실렸다. 또한 한편에는 임신중절 반대파가 셰퍼드의 죽음에 대해 성명을 발표하고 반혐오범죄(Hate Crime)법의 제정으로 레즈비언이나 게이에게 시민권을 인정하는 것을 강하게 반대하고 있는 것 등을 전하고 있다.[각주:2] 콜럼버스는 안티오크 대학에서 한 시간 정도인 곳에 있고 기사에 있는 1013일 밤샘 모임에는 많은 학생들이 참가했다.

   셰퍼드 사건은 안티오크라는 작은 커뮤니티에도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 캠퍼스에서도 지금 안전하다고 생각할 수 없다.’디 안티오크 레코드(1013)에 실린 한 학생의 발언에도 밝혀져 있듯이 이성애중심주의 사회에서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로서 산다는 것은 모든 장소에서 항상 폭력과 직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안티오크 대학의 퀴어 커뮤니티나 각 학생들이, 어떤 방식으로 셰퍼드 사건과 같은 직접적인 폭력뿐 아니라 일상적인 대학생활 내의 폭력에 대해 소리를 높이고, 상황을 바꾸기 위해 행동했는지 당시의 학내 신문과 나의 기억을 의지하여 살펴보고 싶다. 그들의 실천은 17년이나 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현재에도 이성애중심주의와 LGBT의 불가시화 문제를 고찰할 때 중요한 시점을 제시하고 있다.

 

 

 

안티오크 커뮤니티와 퀴어센터

 

   안티오크 대학은 오하이오의 옐로우스프링스라는 인구 3,500명 정도의 작은 마을에 있다. 마을의 중심가인 제니아 에비뉴를 따라서 도서관이나 작은 영화관, 여러 개의 카페 등이 있는데, 5분 정도 걸으면 마을을 벗어나 광대한 글렌헬렌의 숲에 다다른다. 거의 숲 속에 있다고 말해도 좋은 대학의 캠퍼스 중앙에는 19세기에 개교 했을 때 세워진 독일 뤼베크의 성마리엔 교회를 방불케 하는 탑이 있는 대학본부가 솟아 있고, 주위에 교실과 학생 기숙사가 흩어져 있다. 1998년 당시의 캠퍼스 학생 수는 신입생을 맞이하는 9월임에도 400명 정도였을 것이다. 주말이 되면 차를 가진 학생들은 근처의 마을이나 쇼핑몰로 외출해, 나뭇가지 사이로서 얼굴을 슬쩍슬쩍 내비치는 다람쥐 모습이 사람보다도 더 자주 눈에 띄었다.

 

   대학에 들어가면 바로 나누어주는 『안티오크 대학 서바이벌 핸드북(Antioch College Survival Handbook)』의 서두에 안티오크는 대단히 독특한 대학인데 그 많은 대부분은 커뮤니티 정부(government)의 형태에서 연유한다.’[각주:3]라고 쓰여 있는 것처럼 안티오크 대학 내 자치제도는 대단히 급진적이었다. 예를 들면 커뮤니티 정부는 대학의 관리 운영 부분인 AdCil(Administrative Council)과 학내 생활에 관한 입법 부문인 ComCil(Community Council)이라는 두 개의 조직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AdCil은 이사 2, 대학 총장, 교원 대표, 커뮤니티 매니저(학생자치회장), 직원 투표에 의해 선출된 직원 1, 교원 투표에 의해 선출된 교원 2, 학생 투표에 의해 선출된 학생 3명과 교원 2명이 참가하는 것으로 성립된다.

   학생의 활동도 왕성하고 학내의 인권적 마이너리티의 상황 개선을 목적으로 하는 TWA(Third World Alliance), 성희롱·성폭력(sexual harassment)이나 섭식장애, 여성의 신체 이미지 등에 대해 생각하기 위한 공간을 운영하는 여성센터 등 다양한 그룹이 있었다. 나는 교토 세이카 대학에서 간 10명의 유학생 중 한 명으로 8월 말에 오하이오에 도착하여 밀즈라는 학생 기숙사에서 신입생들과 섞여 생활을 시작했다. 교토에 있을 때는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과 섹스워크론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지만, 안티오크에 와서는 영어가 어려운 포스트모던 페미니즘 수업은 피하고 인류학 코스를 이수하고 있었다. 학내에서 자주 눈에 띠는 퀴어센터의 활동에 관심을 가진 것은 10월의 내셔널 커밍아웃 데이(National Coming Out Day)[각주:4] 즈음부터이다. 앞에서 말한 『안티오크 대학 서바이벌 핸드북』에 따르면 퀴어센터는 게이나 레즈비언,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 그리고 섹슈얼 아이덴티티를 사회의 주변에 위치시키고 있는 사람들을 지원[각주:5]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그룹으로 학내의 퀴어 이벤트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한 통의 투서

 

   셰퍼드 사건이 전 미국의 미디어를 통해 알려진 주는 1011일 일요일, 내셔널 커밍아웃 데이를 맞이해 안티오크 학내에서도 퀴어센터 기획에 의한 상영회와 댄스파티 등이 열린 주였다. 8일에는 학내 카페에서 퀴어 커피 타임이 있고, 9일에는 밤 11시부터 새벽 2시까지 퀴어 댄스파티, 10일과 11일에는 퀴어 영화제가 개최되었다.

   9일 금요일 밤에 유니온 빌딩(학생 동아리 방이 모여 있는 건물)2층 댄스 공간에서 열린 파티에는 많은 학생이 여장이나 남장의 이성으로 변장하여 참가하고, 댄스가 특기인 학생은 무대 위에서 적극적으로 퍼포먼스를 했다. 파티는 밤 11시경에 시작해 방으로 돌아간 것은 심야 2시경이었다. 당시 내 기록을 보자면 왠지 이상한 느낌이라고 휘갈겨 쓴 듯한 메모만 남아 있다. 이제 와서 읽어 보아도 분절화되지 않은 이 한 문장으로는 그 위화감이 어디서 온 것인지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전체적인 인상은 여장한 신입생들이 떠들고 있는 모습이 두드러졌다는 것이다.

   그 파티 며칠 후에 디 안티오크 레코드에 게재된 안티오크는 퀴어친화적이지 않다라는 한 통의 투서가 그 때의 문제를 여실히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투서는 퀴어 입장에서 학내의 이성애자를 중심으로 한 퀴어친화적인 포즈의 기만성을 비판하고 있었다.

 

 

 

커뮤니티에게

 

   모두 잘 들어. 나는 퀴어라고 안티오크에서 말할 때 전혀 기분이 좋지 않아.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겠어? 안티오크는 퀴어친화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지만 여자친구에 대해 말할 때나 퀴어 이벤트(확실히 준비한 기획, 그것이 단순히 모두에게 안녕 나는 다이크[각주:6]라고 주장하기 위한 것인데도)에 대한 제도적인 지원을 의뢰할 때 나는 불쾌해. 그건 말이지, 그런 말을 하면 사람들이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기 때문이야. 사람들은 모든 것에 이성애(Straightness)를 가정하기 때문에 내가 말을 하면 기묘한 것을 본 것 같은 눈을 해. 그렇지 않으면, 그들 자신들을 퀴어친화적이라고 생각하고, 퀴어에 대한 말은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다고 느끼고 있는 것인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나뿐만이 아냐.

   좋은 예 하나. 이번 주말은 내셔널 커밍아웃 데이였고, 원래는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가 밖으로 나와 긍정되어야하는 날이었어. 그런데 내가 본 것은 전혀 정반대의 광경이었지. 친구들은 대학 캠퍼스에 분필로 퀴어에 대한 긍정적인 메시지를 써서 비난당했어. 토요일 밤 퀴어 파티는 원래 퀴어의 역사와 문화의 축제여야 했어. (이렇게 써도 맨디와 리즈의 파티를 위한 노력에 감사! 고마워 소녀들!)

   내가 본 것은 파티가 퀴어를 성적인 존재로밖에 보지 않는 이성애자들에게 강탈당한 모양이었어.(별로 퀴어가 섹시하다는 것을 부정하고 싶은 것은 아냐. 그래도 우리들은 그것만 생각하며 사는 것도 아니고, 먹고 있는 것도 아니고, 호흡하고 있는 것도 아냐. 그런데도 우리들이 여기에서 퀴어에 대해 말하거나 축복하거나 하는 것이 허용되는 것은, 성적인 존재일 때뿐인 듯 해. 도대체 그게 뭐야?) 일 년에 단 하루만 드레스를 입고 여()장 한다고 해도 너희가 퀴어친화적이 되는 것은 아냐. (내가 다닌 고등학교 축구 선수들은 학교의 격려회 때 언제나 치어리더로 분장을 했었어. 그들은 젠장 틀림없이 퀴어친화적이 아니라 단순히 여성을 바보로 만들고 있었던 것뿐이야.)

 

   ---내가 말하는 것은 나쁜년이란 느낌? 난 그래. 나는 나쁜년 다이크이고, 그리고 죽을 만큼 화가 났어. 왜냐하면 모두들 전혀 공감적이지 않고, 안티오크에서 퀴어라고 말할 때 기분이 더러워지기 때문이야. 내가 퀴어 문제에 대해 말하면 모두들 놀라고 혼란스러워하는 듯해. 왜냐하면 안티오크는 안전한 장소이기 때문에’? 누가 그렇대?[각주:7]

 

 

 

 

   이 투서를 한 A.로튼은 4학년생으로 기사에는 신념을 가진 다이크라는 서명이 있다. 여기에서 인용한 것은 투서의 일부분이지만 전체를 다 읽으면 댄스파티 때의 불쾌함은 어디까지나 일례이고 그 불쾌함은 일상적으로 뿌리내리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로튼의 투서에는 사람들이 자신을 보는 시선의 문제(‘나를 이상하게 본다’), 이성애 규범의 억압에 대한 불쾌(‘다들 아직 내가 스트레이트라고 가정한다’)가 빈번히 등장한다. 즉 애당초부터 문제가 있다고 간주되지 않는 일상적인 현장에서 이성애주의가 가하는 억압의 체험을 로튼은 언어화하여 비판하고 있다. 더하여 퀴어를 성적인 존재로만 파악하려는 시선의 폭력성도 지적하고 있다.

   투서가 있고 8일 후인 1022, 로튼의 비판을 뒷받침하는 듯한 사건이 일어났다. 두 남성이 키스하고 있는 퀴어센터 홍보 포스터가 스포트라는 기숙사 입구에 붙어 있었는데, 그 포스터에 패그즈(Fags, 게이자식들)’라고 낙서된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같은 기숙사 엘리베이터의 퀴어센터 포스터에는 나치스의 하켄크로이츠가 그려져 있었다. 디 안티오크 레코드는 곧바로 호외를 발행하고 그 행위들을 커뮤니티가 대응해야하는 호모포비아라는 명확한 의사표시를 하고 있다.

 

   기사에 의하면 낙서가 발견된 목요일 심야에 커뮤니티 매니저(학생대표와 같은 입장)에게 이 사실이 보고되었고, 그 후 옐로우스프링스 경찰에게 알리는 한편, 대학의 경비원에게도 신고했다. 오전 115분부터 약 30명의 학생으로 구성된 긴급회의도 이루어졌다.[각주:8] 23일 오후에 식당에 가자 40명 이상의 학생들이 원형으로 모여, 사건에 대한 항의집회를 하고 있었다. 거기에서 말해지고 있는 내용은 대부분 알 수 없었지만, 참가하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으로 뭔가 심각한 사건이 있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당사자에 의한 운동의 고양과 가시화

 

 

   신문의 호외는 퀴어는 침묵하지 않는다(Qeer will not be silenced)’, ‘견딜 수 없는 침해(Violation intolerable)’라는 타이틀로, 학내의 레즈비언이나 게이 당사자의 소리를 소개하고 있다. ‘이성애자도 나서서 목소리를 높일 필요가 있다[각주:9]는 주장도 소개되어 있다. 이처럼 신문이 전하는 메시지들뿐 아니라 23일 밤에는 차별낙서를 비판하는 전단(flier)도 등장한다. 전단은 지극히 심플하게 만약 퀴어의 단결을 호소하는 포스터에 하켄크로이츠를 쓴 것이 너무 재밌어 죽겠는 사람이 있다면, 다음엔 뻔뻔스럽게 내선번호도 적어라!’[각주:10]고 주장한다. 25일 일요일에는 안티오크에서 옐로우스프링스 마을로 향하는 반혐오(hate) 행진과 집회가 기획되어 있다.

   일련의 반혐오 액션의 고양은 1027일 커뮤니티 회의(매주 화요일에 열리는 전학집회)에서 절정에 달했다. 집회는 퀴어와 그 지지자에 의해 기획되었던 것인데, 30명의 멤버가 핑크 트라이앵글을 가슴에 붙이고 발언자로 참가했다. 200명에 가까운 참가자 앞에서 3학년인 K. 프랭크는 미국에서 LGBT가 피해자가 된 범죄통계를 소개하고, 교실에서 나갔다. 다른 멤버들도 교실의 여러 장소에 서서 역시 레즈비언이나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가 피해자가 된 사건의 메모를 크게 읽은 후 프랑크 뒤를 따라 나가, 마지막에는 회의 장소에 핑크 트라이앵글을 붙인 멤버가 한 사람도 남지 않게 되었다. 회의 장소에 남은 3학년생인 H. 골만이 이것이 퀴어인 사람들이 없는 세계다라고 발언한다.

   지금 당시의 커뮤니티 회의를 촬영한 비디오를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비디오 플레이어에 넣어 영상을 본다. 맥그리거 홀의 갈색 오크나무 벽 앞에 선 그리운 얼굴, 얼굴, 얼굴. 이발에 실패해서 앞머리가 극단적으로 짧아져 있던 나도 찍혀있다. 핑크 트라이앵글을 붙인 멤버가 한 명도 없어지고 고요해진 교실. 다시 문이 열리자 나갔던 사람들이 이번에는 손을 이어 잡고 교실에 들어왔다. 그리고 먼 사례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퀴어는 아니고 트랜스젠더인 레즈비언이라고 말하는 학생도 있다. 내가 그때보다 영어를 알아들을 수 있게 되어 들어 보면, 말하는 사람에 따라 스스로의 섹슈얼리티를 고하는 말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러나 퀴어,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 이들 중 어느 말로 자신을 표현한다고 해도 많은 발언자들이 그 아이덴티티를 심한 고통의 기억과 연관시켜서 말하고 있다. ‘나는 퀴어야. 그것 때문에 여동생은 학교에 가면 따돌림을 당해.’ 짜내는 듯한 목소리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발언하는 교원. ‘나는 게이다. 그것은 내가 내 부친과의 관계가 이제 끊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살아있는 단 한명의 부모님인데.’ ‘나는 퀴어다. 지금은 그것을 어머니에게 말하는 것이 두렵다. 아직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집회의 마지막에는 디 안티오크 레코드에 투고를 한 A. 로튼이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낭독하였다. “역사적으로 말해서 피억압자들 그룹은 각각 그룹끼리 대립하도록 하게 만들고, 자유를 구하는 싸움은 분열되어 왔다. 억압자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전통적으로 이 방법을 사용한다. 우리들은 그런 고통으로 가득 찬 무익한 역사를 따라가면 안 된다. 이 액션의 목적은 퀴어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소리를 공유하고, 대립을 넘어선 연대를 구축하는 것이다.”[각주:11] 이 말대로 커뮤니티 회의를 포함한 안티오크 학내에서의 반혐오 액션은 먼저 다양한 경험을 서로 말하는 것을 통해 이성애자도 포함된 커뮤니티 멤버 안에서 공유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커뮤니티 안에서 생활하는 LGBT가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경험을 말하는 것은 당사자의 권리임과 동시에 이성애를 자명하게 생각하는 시선과의 직접적인 싸움이기도 하다. 경계 지어져 있는 당사자의 정신적 고립감을 불식시키는 것과 동시에 학생에 의한 에스코트 활동(정신적 신체적 위기를 느낀 학생이 전화를 하면 언제든 카운슬링의 트레이닝을 받은 학생이 찾아가서 대응하는 활동)이나 학생에 의한 학내 순찰 단체의 결성 등 물리적 의미에서의 지원도 적극적으로 실천되었다.

   이들 액션은 결과적으로 안티오크라는 작은 커뮤니티 속에서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가 자유롭게 발언하는 것이 가능한 공간의 확대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9월에 갓 입학한 신입생들이 디 안티오크 레코드에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발언을 하고, 기숙사의 벽돌 벽면에 안티 헤테로섹시즘(이성애중심주의 반대)’‘Qeers live here(퀴어가 여기 살고 있다)’라는 두 개의 큰 그래피티를 그렸다. 조금 시간이 지난 뒤 학내 구석구석까지 남아 있었던 우리들은 여기에 있다는 강한 메시지를 보았다. 나는 이성애중심주의 사회 속에서 불가시화 되었던 것이 당사자의 발언과 행동을 통해 여기에서 처음으로 눈에 보이는 형태로 부각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안티오크로부터 멀리 떨어져

 

   처음으로 17년 전 미국에서의 체험을 다시 정리해보고 생각한 것은 그 때의 다양한 말하기와의 만남이 생활 속 이성애중심주의나 젠더 규범을 고쳐 묻는 하나의 원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언젠가 이 사건을 확실히 쓰겠다고 생각했었는지 오려두었던 신문기사 조각도 골판지 안에 정리되어 있었다. 이번에 원고를 쓰게 되어서 실은 당시 캠퍼스에 있었던 다른 학생들을 찾아 그 때의 인상을 듣고 싶었지만, 시간의 제약이 있어 할 수 없었다. 당연히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학생은 나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얻었을 것이고, 보다 상세하게 인상을 말하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다른 시점의 의견으로 신문에 남아있는 커뮤니티 회의에 대한 감상을 두 개 소개하고 싶다. 교육학의 H. 랫슨 교수는 정말 훌륭하다. 우리들이 함께 행동할 계기가 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 회의 기획자들이 퀴어 커뮤니티 속에 있는 차이를 확실히 마주보는 것이 정말 좋았다고 생각했다. 통상 그런 차이는 그다지 중요시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각각의 다른 말하기를 존중하는 형태로 집회가 기획된 것을 평가하고 있다. 2학년인 E. 칼리로는 ‘K가 방을 나갔을 때가 정말로 가슴에 깊이 박히는 듯한 순간이었다. 호모포비아를 나 자신과 가까운 문제로 느낀 순간이었다. 나는 잘 알고 있는 그가 지독한 범죄의 희생자가 되는 장면을 상상했다. 그것은 정말로 최악이었다. 그래도 그 경험은 나의 눈을 뜨게 해주었다.’라고 상상하는 것으로 가까운 친구와 호모포비아의 문제가 연결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각주:12] 신문에 소개된 것은 기본적으로 액션에 대한 긍정적인 견해인데, 이들 속에도 이성애중심주의를 커뮤니티에서 맞붙어야만 하는 문제라는 인식을 가진 사람이 많다는 인상을 받았다.

   안티오크라는 작은 커뮤니티의 이야기에서 일단 멀어져, 보다 큰 사회 상황을 생각하면 1998년부터 17년 동안 LGBT를 둘러싼 법제도적 상황은 크게 변화했다. 예를 들면 미국에서는 2009년에 섹슈얼리티와 장애를 이유로 한 범죄를 혐오범죄(Hate Crime)으로 규정하는 매튜셰퍼드법이 버락 오바마의 서명으로 성립되었고, 20156월에는 최고재판정이 동성결혼 금지를 위헌으로 판단했다. 일본에서도 성적 마이너리티에의 차별을 금하고 이성간의 혼인관계와 같은 제도적 지원을 보장하는 남녀평등 및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를 추진하는 조례가 시부야구에서 가결되어 올해 41일부터 시행되고 있다.[각주:13] 77일에는 동성혼 인권구제 변호단(LGBT 지원 법률가 네트워크 유지[有志])이 일본에서 동성혼이 인정되지 않는 것은 인권침해라고 일변련(日弁連)에 인권구제 제기를 하고 있다. 다만 동성 간 파트너십의 확대에 대해 말한다면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과 같은 당사자의 불가시성을 약하게 하는 계몽적인 가능성을 가지면서도, 그것으로 이성애중심주의가 흔들리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도 다시 주의가 필요하다.

   나는 미국 유학을 끝내고 교토에 돌아와 얼마 지난 후에 사쿄구(左京区)에서 집 한 채를 빌려 대학 친구와 살기 시작했다. 16년간 주민은 몇 번이나 바뀌었지만 지금도 같은 집에 살고 있다. 겨울마다 히에이잔(比叡山)산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을 맞아온, 지은 지 45년 된 2층짜리 집은 결코 깨끗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봄에는 수국이 흐드러지게 피고, 가을에는 방안에 금목서 향이 나고, 매일 아침 동틀 녘에는 현관 쪽에서 들고양이가 싸움을 하는 한가로운 환경이다. 1층에는 이 집에는 동성애자가 살고 있습니다라는 한 장의 종이가 붙어있다. 옛날 이 집의 주민이며 섹슈얼리티를 오픈하고 있었던 게이 친구가 10년 정도 전에 쓴 것이다. 함께 생활하면서 어떨 때는 부엌에서 요리를 하거나, 어떨 때는 버려진 개를 돌보거나, 때로는 고양이 간병을 하면서 많은 말을 나누었다. 함께 살기 시작했던 즈음에 그는 대학에서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오픈하고 있는 것에 대해 예를 들어 내가 여기에 안주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한층 더 교묘한 클로젯(closet, 벽장)일지도 몰라. 일상적으로 게이로 있으려면 커밍아웃 하든 하지 않든 간에 보다 신중한 클로젯(closet)과의 대결이 필요하다고 쓰고 있다.[각주:14] 클로젯(벽장)이란 커밍아웃하지 않은 동성애자가 둘러싸인 어두운 공간의 비유이지만, 설령 커밍아웃 했다고 해도 새로운 인간과의 만남이나 다른 장소를 방문할 때마다 게이인 것이 상정되지 않는, 불가시화의 폭력과 계속 대치해야한다는 어려움이 여기에 서술되고 있다. 물론 그것은 쉐어하우스라는 작은 커뮤니티에서도 다르지 않다. 친한 관계 속에서 게이라는 것을 전해도 이성애중심주의와 젠더 규범에 대한 비판이 공유되지 않으면, 그리고 무엇보다도 게이로서 살아온 경험을 확실히 들을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면, 그곳은 다시 새로운 벽장이 되어버린다. 그런 문제의식도 있고, 내가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있기도 해서, 그가 살고 있었던 7년간은 생활 속에서 이성애중심주의나 섹슈얼리티, 젠더에 대한 대화를 반복하는 매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의 대화는, 이 장소가 LGBT의 소외나 성차별이 없는 공간이면 좋겠다는 현재의 내 생각과도 직접적으로 이어져 있다.

   지금도 섣달그믐이 되면 그도 포함해 과거의 이 집 주민과 친구들이 집에 모인다. 섹슈얼리티를 오픈하고 있는 사람, 하지 않고 있는 사람, 전혀 위화감 없이 이성애 규범을 살고 있는 사람, 젠더 트러블 문제를 떠안고 있는 사람, 잘 모르는 사람, 갓 결혼한 사람들 등이 같은 테이블에 둘러 앉아 TV를 보거나, 해넘이 소바를 먹거나 한다. 나는 부엌에 서서 요리를 만들 때가 많지만 어떤 이야기가 나오는지 때때로 귀를 기울인다. 당사자의 발언이 무화되지 않도록, 일반화되어 버리지 않도록, 주의 깊게 말을 찾을 때도 있다. 결코 한 모양이 아닌 다양한 이야기 속에 솟아나는 당사자의 경험과 그 이야기를 들었던 때의 감촉, 그리고 그것을 상상하는 일이,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상황을 바꾸어 가는 하나의 힘이 된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 이 글은 일본근대여성사 연구자인 얀베 유우헤이(山家悠平)현대사상(現代思想)201510월호에 발표한 퀴어가 여기 살고 있다-불가시화에 저항하며(Queers live here-不可視化して)를 옮긴 것이다. 최근의 저서인 遊郭のストライキ: 女性たちの二十世紀序説(共和国, 2015)가 주목 받고 있다. 얀베 유우헤이는 모교인 교토 세이카 대학에서 근무했던 2010년 겨울에 1년씩 3년까지밖에 계약할 수 없는 대학의 고용상한제에 대해 젊은 연구자들이 쓰고 버려진다.”라며 문제제기를 하고, 고용한도 철폐를 위해 동료 5명과 일주일간 단식 투쟁을 한 바 있다. 지금은 효고현 내에 있는 오테마에 대학 학습지원센터에서 학생 상담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北海道新聞>, 2015. 5. 3 참조. http://dd.hokkaido-np.co.jp/cont/books_visited/2-0026968.html).-옮긴이

 

 

* 이 글은 『문화과학』겨울 84호(2015)에 실렸습니다. 

 

 

  1. 1) The New York Times, 1998. 10. 10, 13. [본문으로]
  2. 2) K. Franck, “Gay student killed in Wyoming Hate Crime: I am Matthew Shepard,” The Antioch Record, 1998. 10. 14(신문에 실린 기사의 서명은 실명이었지만, 발표 매체가 적은 부수의 학내 신문인 것, 현재 어떻게 LGBT 활동과 연관되어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집필자, 발언자 모두를 가명으로 하였다. 일본어로의 번역은 모두 필자가 했다). [본문으로]
  3. 3) Antioch College Survival Handbook 1998-1999, 8. [본문으로]
  4. 4) 1987년에 워싱턴DC에서 레즈비언과 게이 퍼레이드를 한 날로, 그 다음해 1988년에 이를 기념하여 제정되었다. [본문으로]
  5. 5) Antioch College Survival Handbook 1998-1999, 77. [본문으로]
  6. 6) Dyke. 레즈비언 용어 중 하나. 원래 남성적 특징이 강한 레즈비언을 비하하여 지칭하는 말이었으나, 지금은 이 단어에 대한 의미 투쟁을 통해 레즈비언이라는 단어와 함께 여성 동성애자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옮긴이 [본문으로]
  7. 7) A. Lawton, “Antioch is not queer friendly,” The Antioch Record, 1998. 10. 14. [본문으로]
  8. S) Holman, “Anti-Queer Graffiti Found in Spalt,” The Antioch Record(special edition), 1998, 10. 23. 사건이 발생한 현장에서 즉시 경찰에 알렸다는 사실로도 셰퍼드 사건 이후의 안티오크 대학 내의 위기감 고조를 볼 수 있다. [본문으로]
  9. 9) The Antioch Record(1998. 10. 23)에 실린 C. McArleton의 발언. [본문으로]
  10. 10) The Antioch Record, 1998. 10. 24. [본문으로]
  11. 11) The Antioch Record, 1998. 10. 28. [본문으로]
  12. 12) 두 발언 모두 The Antioch Record(1998. 10. 28)에서 재인용했다. [본문으로]
  13. 13) 한편, 이 조례에는 핑크워싱(Pinkwashing, LGBT친화적인 자세를 어필하여 그 외의 다른 인권침해나 폭력을 은폐하는 것)적 측면이 있다. ‘다양성 존중’을 동성 간 파트너십의 근거로서 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부야구는 2014년 말에 구내에 있는 미야시타공원(宮下公園)을 폐쇄하고 야숙자들을 완전히 내쫓았다. [본문으로]
  14. 14) ナカタニカウヤ, 「セイカ大における‘日常’としてのクローゼット」, 『イツカノユウグレ』 創刊号. 『イツカノユウグレ』는 주로 교토 세이카 대학 내에서 배포하고 있는 무가지로, 창간 이후 현재까지 필자가 편집을 직접 하고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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