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이 아니어도 ‘살 권리’

 

 

권명아

 

 

 

 

 

 

   20대 총선을 전후하여 혐오 논의는 ‘진보’의 함의를 묻는 가늠자가 되었다. 소수자 차별을 당 정책으로 제시한 기독자유당은 선거 공보에서 “동성애와 이슬람, 차별금지법을 합법화하려는 세력”을 “대한민국을 크게 위협”하는 집단이라고 ‘홍보’했다. 선거 이후 시민권과 혐오에 관한 다양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지만, 막상 이슬람 차별에 대한 논의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혐오가 만연한 한국 사회 문제를 진단한 방송 프로그램 ‘헬조선과 게임의 법칙’은 “난 내가 나고 자란 한국에서 나는 낙오자가 되기 싫어”라는 랩으로 마무리된다. ‘헬조선’이라는 표현은 “국가를 향한 청춘의 혐오”라고 해석된다. 혐오는 ‘국민적’ 문제가 되었다. 혐오가 국민이나 시민(권)의 문제로 환원되는 현상은 총선과 혐오에 대한 논의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이슬람 차별이나 인종 차별 문제가 사라져버린 것은 전형적이다.

 

 

    이런 측면에서 현재 혐오에 대한 논의는 혐오 발화와 증오 정치를 비판하고 대응해나가는 문제와는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듯하다. 이론적인 분석이나 사회 비평에서조차 혐오에 대한 논의에 인종 차별 문제가 거의 중요하게 고려되지 않는 현상은 그런 점에서 징후적이다. 물론 혐오가 한국 사회에서 ‘새로운’ 현상으로 대두한 것은 증오를 조장하여 ‘국민 내부’를 분열시키고 분리 통치하려는 보수 정권의 전략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혐오라는 정서 상태가 혐오 발화(차별 선동)나 증오 정치와 연결되는 지점을 고민하고 비판하기 위해서는 인종 차별이나 지역 차별과 같은 오래된 증오 정치의 역사를 복합적으로 논의하고 대처해나가야만 한다. 또한, 인종차별적인 혐오 발화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혐오 논의가 시민이나 국민의 ‘내부 갈등’ 차원으로 수렴되어서는 안 된다. 물론 최근의 혐오 논의에서 인종 차별 문제가 주변화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인종 차별은 한국 사회에 엄연히 존재하는 심각한 차별이지만, ‘새로운’ 현상으로 여겨지지 않기에 담론 공간에서도 새롭게 ‘이슈화’되지 않는다. 또 선거나 정치 의제 차원에서 이주민 인권과 이주민 차별반대 문제는 ‘이자스민 의원’의 상징으로 환원되면서 ‘진보 의제’로 거의 다뤄지지 않게 되었다.

 

 

   국회를 떠나는 이자스민 의원에 대한 인터뷰에는 ‘다문화 1호 의원’이라는 제목이 달려 있다. ‘다문화’라는 단어는 ‘설명충’, ‘한남충’처럼 혐오를 담은 ‘표현’이 아니지만, ‘동남아시아 출신 이주 노동자’를 차별적으로 범주화하는 언어 수행적인 효과를 발생시킨다. ‘혐오 없는’ 차별, 혐오를 동반하지 않는 혐오 발화는 이런 사례 말고도 너무나 많다. 인종 차별 문제에 관해서 한국 사회는 아직도 ‘차별적 표현’을 비판하고 문제시하는 것조차 미흡한 상황이다.

 

 

   이주민이나 난민에 대한 차별에 반대하는 일은 국민이나 시민이 아니어도 ‘살 권리’를 요청하는 것이다. 혐오 논의가 1등 시민과 2등 시민의 경계를 맴돌고, 비국민으로 배제될 가상의 공포에 몰두해 있는 사이 부지불식간에 시민과 국민의 경계 바깥은 이 논의에서 보이지 않게 되어버렸다. 물론 최근의 혐오 논의가 주로 선거 국면에 대한 비판적 개입에 치중한 결과 예기치 않게 이런 편향을 보이게 되었다고도 하겠다. 그러나 혐오 발화와 차별 선동, 증오 정치를 비판하고 사회적 의제로 다루는 일은 시민이나 국민이라는 이미 주어진 경계로 환원되지 않는 삶의 권리를 고민하는 일이다. 혐오는 만연해 있고, 혐오 발화는 차별적인데 역설적으로 혐오 논의는 ‘선별적’이다. 선거 국면에 몰두해 있던 혐오 논의가 ‘다른’ 지평으로 나아가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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