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상자 인간

 

소설가  金 飛

 

 

 

 

 

  독일의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나치의 득세를 기술하고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심리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인간이 외부의 권위에 의존하게 되는 메커니즘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자아의 힘이 약해질수록 인간은 초자아나 외부의 권위에 의존하게 된다는 그의 이야기는 경계와 불안을 떠올리고 있던 내게도 어떤 깨달음을 환기시키는 것이었다.

  앞에서 나는 경계를 긋는 행위를 통해 인간의 상실과 불안은 필연적이라고 했는데, 실제로 인간에게 불안이 쌓여간다는 의미는 그만큼 자아의 힘이 약화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또 다시 인간이 그러한 자신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하여 외부의 권위와 권력에 의존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한 인간에게 안정감과 위안을 주는 가장 거대한 외부의 권력이란 경계를 만들었던 '보이지 않는 손'이며, 또 다시 계속된 불안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은 그러한 보이지 않는 손을 모방하여, 스스로 또 다른 경계를 그어가며 불안을 지우려고 애쓰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경계를 긋는 행위는 상실이며 불안이고, 그것이 또 다시 스스로의 불안을 지우려는 일환으로 다른 경계를 긋게 만드는 근거가 되어, 불안에 내던져지고 다시 경계를 긋는 행위를 지속하는 어리석은 악순환을 계속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그런 유사한 예는 우리들의 주변에서도 흔히 발견된다. 흔히 뉴스에서 보게 되는 정치가들의 이합집산이나, 한 사람의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자신과 타인의 경계를 그어 스스로를 안전하게 유지하려는 노력이나, 생각이나 사상이 같은 사람들의 무리 속에 자신을 두어 경계 안의 안정감을 꾀하려는 일은 모두, 외부의 경계든 스스로가 만든 경계이든 불안을 지우려고 다시 경계긋기에 매달리는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이다.

직장에서는 상사나 경영자의 권력에 다가가기 위해 또 다른 경계를 그으며 다른 경계 안으로 편입되거나, 학교에서는 힘 센 아이의 권력에, 혹은 교사라는 권력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하여, 혹은 그들의 눈에 벗어나는 불안을 겪지 않기 위하여 다시 또 어떤 경계를 그어 자신을 그 안쪽에 놓으려고 한다

처음부터 인간이나, 인간이 만든 세상에는 '경계 긋기'에 대한 자격이나 권위가 주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인간은 갖가지 방식으로 경계를 나누고, 다시 또 다른 경계를 나눔으로써 스스로의 불안을 지우고 안정을 도모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보면 이것은 어떤 사상이나 특정 종교의 이름으로 성소수자들을 억압하고 인정하지 않으려는 일부 사람들의 모습과 정확하게 일치하는데, 처음부터 그들에게는 똑같은 인간이라는 이름의 성소수자들을 단죄하거나 억압할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내미는 근거란 결국 우리들도 알지 못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 만든 경계 임에도 불구하고, 공공연히 그것이 신의 뜻이라는 둥 인간의 섭리라는 둥 처음부터 가능하지 않은 근거들을 들어 자신들의 폭력적인 행위들을 합리화하고, 자신들의 불안을 지우며 알량한 안정감을 얻기 위해 외부의 권위에 기대어 또 다른 경계를 긋는 행위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경계로 인한 불안을 지우려는 인간의 몸부림은 경계긋기라는 적극적인 행위만이 전부는 아니다. , 외부의 권위에 의존해 또 다시 경계를 만듦으로써 그 안에서 안정감을 도모하려는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세상이 만든 혹은 자신이 만든 경계와는 상관없이, 경계가 아닌 작은 상자 안에 갇혀버리게 되는 경우이다.

이러한 상자 속에 있는 인간은 자신은 물론이고 외부의 세계와는 전혀 아무런 소통도 하지 않으며, 눈을 닫고 귀를 막은 모양새다. 어떤 이야기를 해도 그는 대답하지 않으며, 어떤 것을 보여주어도 그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부인하는 몸짓조차 보여주지 않는다. 그에게 탄생은 그저 탄생이며, 인간은 그저 인간이고 세상은 그저 세상이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몸을 굴리고, 어디론가 떨어져내리면 작은 상자 안에서 잔뜩 몸을 웅크리면 그 뿐 자신을 밀어낸 것이 어떤 것인지 생각조차하지 않는다. 작은 상자 안에 세계가 자신의 세계이며, 그 속에서 살다가 죽는 것이 스스로가 원하고 바라는 유일한 삶인 것이다.

얼핏 느끼기에 그것은 굉장히 자족적이고 자유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소통을 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그건 굉장한 위험성을 수반한다. 상자 속에서 그는 자기 자신의 기준으로 수십 개의 경계를 그리고 목록을 만들지만 그건 낙서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만든 경계 속에는 아무도 없으며, 그가 만든 목록은 그저 글자의 배설일 뿐 무언가를 기록하거나 남기는 의미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좁고 답답하지만 무엇보다 안전한 자기 세계 안에 있으니 그보다 더한 안정감은 없을 듯하지만, 불행하게도 그가 들어앉은 상자는 마음껏 몸을 펴고 움직일 수 있는 거대한 상자가 아니라, 기껏해야 밥솥 하나가 겨우 들어가는 작은 상자에 불과하다. 몸을 구부려 억지로 끼워 넣었을 , 그는 스스로 자초한 왜곡된 육체와 정신의 세계 속에서 불안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운, 몸으로 체현하는 불편에 시달리며 평생의 삶을 살아야하는 것이다.

심리학적으로 그것을 무어라고 지칭하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실제로 물질문명의 발달로 점점 소통의 방식이 변하고, 왜곡되며, 어딘가에 고립되거나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아무도 그 조그맣고 답답한 곳에 사람이 들어가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지만, 그에게는 그 곳이 바로 자신의 세계이며 자신의 삶인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렇게 상자에 갇힌 인간의 모습은 외부의 권위에라도 의지해서 자신들의 안정을 꾀하는 부류들보다 더 불안하고 위태로워 보인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사회적으로 소외된 계층들 속에서 그러한 부류의 사람들이 더욱 많이 발견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개인적으로 성전환자라는 이름을 가진, 사회의 가장 변방으로 밀려난 우리들의 안에서 그렇게 상자에 갇힌 모습들을 목격하게 될 때, 나의 마음은 안타까움을 넘어 참혹함이 느껴진다. 자신들의 알량한 생존만을 위해 무수히도 많은 경계를 긋고 많은 것들을 소외시켜버린 폭력적이고 비겁한 세상의 지붕 아래에서, 그들은 상자 속에 갇혀 결국 인간으로 태어난 즐거움을, 남자든 여자든 하나의 인간으로 살 수 있는, 그들에게도 주어진 참으로 고귀하고 아름다운 축복을 외면하고 포기하며 살다가 끝내 쓸쓸하고 외로운 상자 하나의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을 마주하게 되면, 참혹한 자괴감에 몸서리가 쳐지는 것이 사실이다.

 

경계는 상실이며 불안이지만, 상자 속의 삶에 비할 수 있는 위태로움일 수는 없다. 경계 안에 있는 사람도 불안한 사람이지만, 상자 속에 갇힌 사람들은 불안함을 넘어 위태로운 사람들이다. 그리고 누군가의 절박한 위태로움을 외면한 채, 내가 폐기해버린, 나의 경계로 만들어진 어떤 상실 된 것들을 소외시킨 채, 좁고 편협하고 이기적인 안정을 꾀하며 사는 일이, 부인할 수 없는 이천 년대의 바로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다.

 

경계를 긋거나, 상자에 갇혀있거나, 불행하게도 우리 모두는 불안을 지우기 위해 발버둥치는 나약하고 안쓰러운 모습이거나, 누군가를 잔혹하게 상자 안에 밀어 넣고 있는 폭력적인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연세대 문화학 협동과정 2013-1 콜로퀴움

사랑과 혁명, 그리고 문란함

2013. 7. 19 (금)

 

아프꼼의 권명아 선생님의 <음란과 혁명>을 주요 텍스트로 하여 진행되는 이번 콜로퀴엄은 사랑! 혁명! 문란! 음란!과 같은 화끈하고 섹시한 개념어들을 통해서 진행될 예정이오니 관심 넘치시는 여러분들의 많은 참석을 기대하겠습니다.

 

 

 

 

 

 

제2화 보이지 않는 손 

 

소설가  金 飛

 

 

 

 

 

 

 

  이 전에 나는 경계를 긋는 일, 목록을 만드는 일로 인해 우리가 필연적으로 상실을 동반하게 된다고 정의하였다. 그러나 나 역시 어느 정도 인간의 역사가 필연적으로 어떤 선택을 피할 수 없었으며, 그것으로 인해 인간의 문명과 사회가 지금의 발전을 거듭해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경계'라는 구분마저 없었다면 '절제하지 못하는' 인간은 인간됨의 참 의미를 버리고 몰락과 파멸의 길을 걸었을 것이라는 주장은 어딘지 조금 성급하며, 모두가 완벽하게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상이란 이론 속에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일 뿐이라는 것을 역사가 증명했듯이 인간은 필연적으로 어떤 것으로 인해(돈이든 권력이든) 나뉘고 구분되며 지배하고 지배당하는 일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이야기는 너무 슬픈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것이 인간이 지나온 시간이었다는 현실을 나도 부인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시간이나 역사의 선택으로 인해 버려진 것들은 어떤 것들일까? 그것들은 과연 패배와 몰락의 당위성을 가진 것이며, 우리가 걷고 있는 이 현실이라는 길은 과연 최선의 길이었을까? 최선의 길이 아니었다면 적어도 차선의 길쯤은 되는 것이 맞는 걸까?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란 물질이나 기계일 뿐, 그런데 왜 인간들은 자꾸 무엇으로부터 소외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하는 것일까? 이토록 평화롭고 발전된 세계 속에서 왜 우리는 더욱 더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것들 앞에 무기력하게 내동댕이쳐지고 있는 걸까?

조심스럽게, 나는 그 원인을 '경계 너머'에서 찾고 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필연적으로 어떤 경계 안에 자리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그 순간 반드시 상실을 동반한다. 우리는 성장이나 사회화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또한 버려진 것들의 축적이며 거듭해서 반복되는 상실의 기억이다. 지금 인간을 위협하며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들은, 우리가 언젠가 기억 속에서, 어떤 시간 속에서 선택하지 않았던, 버려두었던 것들을 닮아있지 않은가? 우리가 폐기했다고 믿었던 것들이 어느새 우리들의 생활과 문명을 옥죄어오고 있는 것이 바로 지금의 현실이니, 이 세계를 직시하기 위하여 경계 너머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폐기해버렸던 것들의 세계를 들여다보아야하는 일은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물론 내게는 그 거대한 사회 담론을 수용하고 그것에 대해서 토론하거나 문제점을 제기할 능력이 없다. 철학적으로도, 사회학적으로도 나는 그것들을 논하고 이야기할 깜냥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언제나 어떤 경계 위에 살고 있으면서, 불안이나 상실을 삶의 일부분으로 수용하고 끌어안는 시간들을 지나오면서, 어쩌면 그것은 나 혼자만의 경계, 혼자만의 상실이나 불안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보통'이나 '정상'이라는 일반적인 의미로 호출되지 않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한 사람의 현대인으로써 내가 생각하는 경계나, 상실, 혹은 불안은 어쩌면 그렇게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먼 생각까지 도달하게 되었음을 부끄럽게 고백한다.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의 상실과 불안은 어느새 현대 문명의 뒤편이 되어버렸으며, 그것들은 필연적으로 끊임없이 논의되어야하는 것임에도 언제나 외면되고 있다는 현실은 바로 내가, 우리가 만들어낸 안타까운 지금의 이야기일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나의 상실은 무엇이었을까. 나의 불안이 시작되었던 거기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일까.

 

  모두가 그러하겠지만, 나 역시 어떤 경계 너머에서 태어났다. 나 자신이 선택하고 주체적인 나의 삶을 위해 내가 선택한 무언가가 아니라, 불행하게도 그건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경계였고, 외부의 목록화였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건 단순히 기다란 책상에 금을 그어 내 영토를 또렷이 하는, 작은 공간이라도 내 것을 가지고 있는 소유의 경계가 아니라, '나의 경우에는' 엉뚱한 곳에 도착해있는, 어떤 경계 바깥이었다. 내 영토 앞의 내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넘어서지 말아야할 ''의 자리에 가 앉아 있는 꼴이었다.

  그나마 내게 주어진, 경계로 나뉘어진 작은 공간 속에는 내 물건이 아니라 짝의 물건만 가득했다. 내가 읽고 공감할 수 있는 노트들이 쌓여있는 것이 아니라, 낯설고 이물스러워서 폭력적으로까지 느껴지는 것들이 수북했다. 분명히 여기가 내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에 몸을 일으키려고 하면, 경계를 그었던 외부의 힘이 나를 짓눌렀다. 세상의 경계가 그어진 반쪽의 상실만으로도 불안감은 충분한데, 그 위에 낯선 곳에 버려졌다는 고립감이 더해졌다. 내 어깨를 짓누르며 나를 억압했을 뿐만 아니라, 고립되어버린 나의 세계를 비아냥거리는 비겁한 짓을 했던 것이, 바로 내가 이 세상에 나와 마주했던 여러 겹으로 한꺼번에 몰려온 '불안'이고 '상실'이었다.

  그것이 비단 성전환자라는 특수성을 가진 나와 같은 극소수의 집단에만 유효한 불안이고 상실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여러 겹의 상실과 불안을 동시에 겪어야했던 사람들은 수두룩하다. 세상이 만들어놓은 경계에 구겨넣어져 필연적인 상실을 동반했음에도 불구하고, 가난이라는 겹쳐진 경계로, 혹은 장애라는 극복할 수 없는 고립감으로, 처음부터 불안과 상실은 이중 삼중으로 우리들의 어깨에 내려앉아, 성장이라고 말하는 외부의 경계로 만들어진 ''의 방향으로 우리들을 밀어낸다.

  물론 우리들을 짓누르는 경계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특정한 지역에 국한된 학교라는 경계 안에서도, 성적이라는 경계로 다시 한 번 우리들은 나뉘어지며 불안을 떠안고, 불안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것만으로도 그건 충분히 또렷해지는데, 그 위에 다시 부모가, 사회가 만들어놓은 어떤 경계 안으로 우리는 떠밀리듯 편입되며 또 다시 더 커다란 겹겹의 불안을 짊어지게 된다.

  사람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누군가를 만나는 것은 순수하게 자유로운 나의 의지로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이미 세상이나 부모가 정해놓은 지역이나 혹은 종교의 경계 안의 만남에 불과하며, 그것이 자유로운 본인의 의지에 따른 것이라는 확신이나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경계로 나뉘어진 상실로부터 근원적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외부의 경계에 의한 것이지만 그것이 나 자신에게 바람직하고 긍정적인 효과나 결과를 가져올 것이기에 미련없이 받아들이며, 그래서 내게는 불안이 존재하지 않을 거라 확신한다면, 그 말만으로 이미 충분히 거대한 불안의 전조임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왜냐하면 '불안하지 않다.'고 말하는 목소리의 불안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설령 진실로 (물론 가능하지 않은 일이겠지만) 자신의 삶에는 단 1퍼센트의 불안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하더라도, 우리가 폐기해버린 불안은, 혹은 세상의 경계로 인해 버려진 것들로 인한 불안은 반드시 내가 볼 수 없는 바깥의 어딘가에서 쌓여가고 있으며, 그것은 또 다시 부인할 수 없는 불안의 원인으로 환기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경계나 상실 따위의 복잡하고 어려운 구분이 아니더라도, 시간의 흐름만으로, 망각이라는 것만으로도 우리들은 반드시 모두들 상실된 것들을 가지게 되며, 그건 당연히 불안의 감정을 수반한다. 분명히 알고 있었는데 순간 기억나지 않아 전전긍긍했던 불안을 모두들 적어도 한 번 씩은 가져본 적이 있었던 것처럼.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우리는 선택을 해야했을 것이다. 아무리 그 상실이 불안이 되어 내 안에 축적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선택하지 않는 삶이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다. 선택하지 않는 삶을 선택하는 일이란, 불행하게도 인간에게는 처음부터 허락되지 않은 것이었다. 아무리 이분법적으로 나뉘어진 세계에 대해 손가락질을 하고 욕설을 퍼붓고 싶어도, 결국엔 우리에게도 운명은 어떤 선택을 드리울 것이며, 우리들도 둘 중에 하나를 고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그 불안을 지울 방법은 없는 것일까? 그 모든 상실과 불안을 끌어안고 생존해 나아가는 인간의 동력은 무엇일까?

 

  당연한 일이겠지만 경계를 나눈, 상실이나 불안의 시간들이 계속 반복되어왔던 것처럼, 마찬가지로 그런 불안한 요소들을 지우려는 인간의 노력 또한 똑같이 계속되어왔다. 어쩌면 몸부림이라고 불러야할지도 모르는 그러한 노력들은, 그러나 불행하게도 또 다른 상실의 시작일 뿐이었을 것이다. 그게 아니었던 거라면, 지금쯤 인류는 모든 상실이나 불안을 지운 채, 참으로 안정되고 평화로운 세계 속에 살고 있어야하는 걸 테니까.

 

 

어쩌면 거긴 끝이 아니라,

다시 시작이었는지도 모른다.

 

 

 

 

 

 

(김비 작가님이 직접 쓴 캘리그라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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