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경계의 배반

 

소설가  金 飛

 

 

 

 

  지금이야 아이들 모두 각자의 책상을 가지고 있으니 찾아보기 힘들겠지만, 80년대에 초등학교를 다녔던 우리들의 어린 시절에는 학기 시작 무렵에 나란히 같이 앉아 공부할 누군가를 설레며 기다렸던 때가 있었다. 일 년의 시간을 가늠하며 새 담임선생님을 만나는 일도 설렘이며 걱정이었지만, 그것 못지않게 곁에 앉아 같이 공부를 해야 할 이 누가 될까 하는 일도 어린 우리들에게는 적지 않은 설렘이며 또한 걱정이었다. 물론 단순히 잘 생기고 예쁜 아이였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가장 먼저이기는 했지만, 아무리 잘 생기고 예쁜 아이가 곁에 앉게 되더라도 결국엔 꼭 한번 싸움을 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기다랗게 하나로 붙어있는 책상을 두고 벌어지는, 두 아이의 영토전쟁이다.

   대개는 손톱만큼이라도 여자 아이들이 남자아이들보다 더 많은 공간을 차지하며 끝을 맺게 되는데, 남자 아이들 쪽으로 경계선이 바짝 오그라들었음에도 어쩐지 여자 아이들의 눈에는 그 정도는 되어야 동등하고 평등하다고 느껴졌으며, 말싸움에서 밀린 남자 아이들은 대게 입술을 삐죽이며 잠자코 그 불평등한 경계선을 받아들여야했다. 짝이 감기에라도 걸려 나오지 않는 날에도, 책상 위에 선뜩하게 그어진 선을 넘어가지 않기 위해 우리들은 괜히 몸을 사리며 그 경계선을 자꾸만 신경 쓰던 그런 기억이 있다.

   생각해보면 내가 더 많이 차지하겠다고 열심히 그어가며 싸웠던 그 경계라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던 것이었는데, 두 사람 사이의 공유라는 전제 조건이 달려있기는 했지만 오히려 그 경계를 긋는 행위를 함으로써 우리에게 주어진 건 결국 제일 작은 몫일 수밖에 없는 건데, 어리석게도 우리는 한 학기 내내 그렇게 그 영토를 지키기 위해 애를 쓰며 지냈다. 상황에 따라 언제든 넉넉한 품을 가질 수 있는, 경계 없는 온전히 기다란 책상 하나의 소유보다 더 넓은 경계란 처음부터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이었는데 말이다.

   그렇게 학기가 지나고 나면 교실 안에 있던 우리들 모두의 책상은 너나할 것 없이 그런 갖가지 모양의 경계들로 패이고 낙서가 된 채였고, 우리는 가장 협소한 울타리 속에서 자기 자신을 위안하며 지냈다는 사실을 깨닫지도 못한 채, 그 시간들을 그렇게 망각 속에 던져버리고 만다.

 

   그 때 우리가 지워버린 경계는 이미 사라져버린 것 같지만, 어쩌면 그건 여전히 우리들 곁에 다른 모습으로 남아있는지도 모른다. 정리를 하고 목록을 만드는 행위도 그런 그 시절의 경계를 긋는 것과 어느 정도 닮아있다. ‘깨끗하다’, ‘말끔하다와 같이 바람직하고 긍정적인 의미의 말들로 대표되는 정리나 목록화에, 그 때의 우리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모르는 어떤 어리석은 오류나 강박이 있지는 않았는지 곰곰이 생각해볼 일이다.

   여기에서 나는 이것을 강박이라고 말했는데, 실제로 이것은 단순히 폄하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나 자신도 잘 알고 있다. 내 경우에도 원고를 집필하고, 다시 쓰고 또 쓰는 재고를 거듭하며 쏟아지는 원고뭉치를 정리하는 일이, 내게 가장 바람직한 효율성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나는 이미 경험을 통해 깨닫고 있으니 말이다. 목록을 나누고 원고들을 구분해놓음으로써 작업을 조금 더 빠른 시간 안에 끝낼 수도 있고, 재고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지난 원고들을 재빨리 찾아볼 수 있는 것은 분명 부인할 수 없는, 정리 혹은 목록화의 효과이다.

   그러나 내가 여기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그러한 효율성의 유무 혹은 가부가 아니라, 그러한 정리나 목록화의 경계 긋기가 우리에게 효율성이라는 달콤함을 제공함으로써 그것이 우리에게 우리들 자신도 모르는 오류나 어리석음을 제공하고 있지는 않은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습관이나 습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들의 생각 속에 하나의 선을 긋게 됨으로써 우리는 그것으로 인해 불안해하며 혹은 집착을 보이기까지 한다. 그것이 바로 내가 위에서 강박이라는 힘 센 용어를 사용했던 이유다.

   요리의 재료를 찾을 때, 옷들의 종류를 쉽게 찾을 때, 그리고 청결한 주변을 만들어 이로운 세균보다는 해로운 세균을 제거할 때, 그러한 강박은 오히려 긍정적인 효과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효율의 개념 안에서만 머물러야하는 일일 뿐 강박으로 확장되어서는 안 되는 일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그렇게 자신도 모르는 강박증을 갖게 된 것일까? 그것들은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이며, 언제부터 우리는 그런 습성을 가지게 되었을까? 무슨 일을 하기 전에, 어떤 생각을 떠올리기 전에 반드시 정리를 하고 목록을 나누며, 서로 간의 경계를 만들어 놓음으로써, 우리는 무엇을 얻고 또 무엇을 버리게 되는 것일까? 경계를 만듦으로써 폐기해버렸던 생각이나 물건들은 과연 아무런 가치가 없었던 것일까?

   나는 우리가 그 동안 갖가지 경계의 안쪽에서 누렸던 안정감과 안위를 확신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글을 읽는 동안에는 잠시 잠깐 우리들을 옭아매고 있는 경계들을 내려놓으시라고 권하고 싶다. 우리의 일상을 너무 꽁꽁 싸매고 있어서 내려놓을 수 없는 거라면, 손을 느슨하게 하자마자 갑작스런 공포가 밀려오는 거라면(이 정도라면 그건 분명 상담이나 치료를 요하는 강박임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시고) 그저 깊은 숨 한 번 내 쉬고 온 몸을 이완시켜보기를 권한다. 생각해보면 모든 것은 나도 모르게 스며든 타인의 경계일 뿐, 추락이나 몰락과는 어쩌면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경계가 있다는 말은 결국 잃어버린 반쪽이 있다는 말이다.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 그려진 어떤 선으로 인해, 내가 내 것이라고 상상도 해보지 못했던 어떤 것이 내 등 뒤에서 안타까운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무엇이든, 분명한 것은 그건 내가 지금 안전하게 향유하고 있는 것들과 마찬가지로 내게 주어진 내 것이었다. 그토록 내 것을 지키고 내 안전을 지키려는 철저한 몸짓으로, 우리는 그만큼의 무언가를 놓치고 잃어버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 경계를 긋는 일에 대한 맹신을 재고하라고 함으로써, 그 동안 우리가 우리들 자신도 모르게 가지고 있었던 어떤 경계, 옳고 그름, 혹은 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한 스스로의 선입견을 잠시 내려놓으시라 말하고 있다. 그런 위험스러운 발언이 어디 있느냐, 목소리를 높이고 싶은 분들이 있겠지만, 다수든 소수든 어떤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경계를 가진 채 그 안쪽에 자리하고 있든 간에, 부인할 수 없는 분명한 한 가지는 결국엔 모두들 놓쳐버린, 잃어버린 것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얼마나 추하든 더럽든, 그릇된 것이든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든, 우리는 모두들 분명히 무언가를 잃어버린 채, 소외시킨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 아무리 손대기도 싫고 생각하기조차 싫은 끔찍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건 분명히 나와 같은인간됨의 한 쪽을 차지하고 있었던 거라는 것.

 

     경계 너머를 들여다보는 일은,

     결국 우리들의 상실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김비 작가님이 직접 쓴 캘리그라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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