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꼼' 연재에 들어가며

金 飛

소설가

 

 

  아마도 그건 오지 않은 도래(到來)였는지도 모르겠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찬란하게 빛났던 어둠이기도 했고, 초록의 이파리들이 까마득히 뒤덮인 숲 속 한 가운데서 느꼈던 질식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세상 모든 것들을 불태워버린 달의 빛이기도 했고, 어쩌면 그건 '기억'이라고 쓰는 순간 머릿속에서 지워져버린 망각이었던 건지도 모른다.


  언제나 나는 거기가 궁금했다. 내가 있었던 거기, 내가 지금 서 있는 여기. 세계나 세상을 떠올리지도 못한 채, 나는 항상 그저 내 두 발이 딛고 서 있는 이 자리가 궁금해 언제나 의문투성이였다. 그건 어쩌면 사춘기 시절에나 떠올렸을 법한 '내가 어디에서 왔을까?"라는 어리석은 질문을 닮은 원초적인 것이었는데, 나는 언제나 같은 질문 앞에 서 있었다.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혼자만의 의혹과 의심을 품은 채 내 생애를 끝마치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시감을 더욱 또렷이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여전히 모호하고 흐릿한 어딘가에 서서 무언가 꽤나 긴 것들을 쏟아낼 준비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저 눈감은 더듬거림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게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다. 어느 철학자는 인간과 세계, 혹은 그 너머를 아우르는 수 십, 수 백 권의 서적들을 탐독하고 또한 집필하는 거대한 시간이 바로 인생이지 않은가. 그토록 치밀하게 나누어진 시간의 편린 속에, 욕망을 짓고, 감정을 짓고, 이성의 테두리를 드리우는 것이 바로 인간의 삶이 아닌가. 그 엄청난 시간의 자장 속에 고작 '내가 서 있는 여기가 어디인가?' 따위의 가장 단순하고 기본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조차 찾을 수 없다니, 그것이야말로 게으름이거나 강박증이거나 비난을 피해갈 수 없는 패착이 아닌가.


  그러나 불행히도 나는 여전히 단 한 걸음도 어딘가를 향해 내밀지 못하고 있다. 똑같은 질문을 손에 들었다가, 엉덩이 밑에 깔고 앉았다가, 어디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하는지조차 모호해진 마흔 중반의 시간을 지나고 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고백하건데, 내게 그런 질문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다시 깨우친 것도 불과 최근의 일이었다.


  몇 십 년의 일생을 지나오는 동안, 흔들리면서도 나는 내가 왜 흔들리는지 알지 못했으며, 위태로우면서도 무엇이 나를 위협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했다. 그저 모호하고 흐릿하다는 것만을 알고 있을 뿐, 그건 한 마디로 쏟아낼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었다. 생각의 손에는 자꾸 핏자국이 묻어났지만, 어디에서 상처가 벌어졌던 건지 알지 못했다. 악몽을 꾸다가 깨어나 두려움에 몸을 떨었지만, 나를 짓눌렀던 그것들은 금세 망각 속으로 멀어져버리고 말았다. 내게 남은 것이라곤 영문을 알 수 없는, 나약하고 어리석은 단발의 신음소리 뿐이었다.


  '성별을 바꾸었다.'라는 선뜩한 명제마저도 당연히 옳지 않다. 내 기억이 존재하는 한, 나는 단 한 번도 내가 아닌 무언가로 나를 바꾸었다고 생각해본 적 없으며, 바뀐 것이라곤 서류 위에 적힌 숫자이거나, 온전히 나를 호출하지 못하는 이름에 불과했다. '남성으로 태어나 여성으로 살고 있다.'라는 정의 또한 틀렸다. 과연 내 모친의 자궁을 비집고 나온 것이 온전한 남성이었는지, 수술이라는 의료적 치료와 조치를 통해 비로소 지금의 내가 온전해진 거라면, 과연 여기 있는 나는 여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인지. 생물학적이고 의료적인 차원의 정의는 차치고서라도 내가 믿고 있는 내 영혼(이렇게 부르는 것이 옳은지조차 나는 알지 못하지만)에게 성별이 있다면 그것을 과연 온전히 남성이거나, 여성이라고 언급할 수 있는 것인지 조차, 나는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내 진단서에 일필로 적혀 있듯이 '남성도 여성도 아닌 중성의 상태'라고 나를 규정한다면, 나는 왜 그런 상태의 내가 되어야했던 건지, 나는 도대체 왜 이런 길의 삶을 걷고 있는 것인지, 또 다시, '나는 어디에서 온 것인지.'


커다란 바퀴를 굴리듯, 꼬여있는 띠 위를 달리듯 나는 그렇게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버리고 말았다. 질문들뿐이다. 한탄을 닮은 의문들뿐이다. 위에 언급한 겨우 한 가지에 불과한 배배 꼬인 질문들 조차도 나는 하나로 정리하는 능력을 가지지 못했다. 하물며 그런 나의 존재를 설명할 여러 가지 학술적 지식도 없을 뿐더러, 당연히 앞으로 여기에 적어내려가게 될 이야기들도 그 질문들에 대한 해답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단 하나 확실한 것은, 여기 이 기록은 지금 현 시대를 살고 있는 어떤 인간의 시선이자 생각이라는 것. 프로이트가 말했던 스스로에 대한 정신분석의 근방에도 미치지 못하는, 단순하고 무지한 자기 관찰에 불과하기는 하겠지만, 스스로 한 번도 시도해본 적 없는 솔직하게 나를 들여다보는 일일 것이다. 나 자신에게는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솔직하겠지만, 세상에게는 그저 낯설고 희한한 이야기일 수 밖에 없는 그런.

 

  결국, 그건 '경계'에 관한 이야기가 될 것 같다. 언제나 그 위에 살아오면서, 나를 배반하고 세상을 배반하며 떠오르는 난잡한 생각들이 있었음을 잘 알고 있다. 아마도 이 이야기들을 통해 나는 그런 난잡한 것들을 그나마 내 안에서 정리하여 흐릿하게 풀어놓게 되기를 바란다. 성별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고, 어쩌면 젠더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으며, 그게 아니라면 그저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금을 긋고 노는 땅 따먹기의 선 하나를 지우는 일에 불과할지도 모를 일이다. 단순히 텍스트나 사고의 과잉이라고 지적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이것은 최소한 개인적으로 한 번도 시도해본 적 없는 작은 실험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당연히, 이 의미 없을 수도 있는 ''라는 한 인간의 기록이 이분법적 세계를 뛰어넘는, 3의 세계에 대한 담론을 건드리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모쪼록 내가 쏟아낸 글들이 하나의 글로써 뒤틀리지 않고 받아들여질 수 있기를 소망한다. 이분법적인 세계를 가로질러 갈 수 밖에 없는 일이겠지만, 그 뿐이다. 위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양쪽 모두를 통합하여 새로운 대안을 창출하거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거나 하는 능력을 갖지 못했으며, 사실 그런 마음조차 없는 건지도 모른다.


  그저 잔잔한 물속에 던져 넣는 돌 하나가 되기를, 풀밭 위에 앉아 보드라운 바람을 느끼다가 문득 터져 나온 웃음이기를, 가능하다면 순수하게 마음속에 와 닿는 여행자의 말 한 마디 정도의 가치라도 가지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이천 십삼 년 유 월, 나조차도 알지 못하는 무언가로 태어나 그렇게 모호한 존재로 살아가며 이 글을 시작한다. 내가 태어날 때 내 손에 받아들었던 이름은 '병필'이었고, 내가 내 손으로 나에게 선물한 이름은 날지 못하는 '()'였다. 잘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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