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살아남는 법을 생각한다. 

 

 

 

소설가 金 飛

 

 

 

 

 

 

 

 

  나는 살아남는 법을 생각한다.

 

  누군가는 삶의 대의를 위해, 나를 둘러싼 세계에 대해 치열하게 투쟁하고 싸우며 스스로의 삶을 일으키지만 나는 이기적이게도 여전히 나의 생존만을 고민한다. 날마다 나를 위협하는 이 세계와 그리고 여전히 모호하고 흐릿할 수밖에 없는, 존립 자체를 흔드는 나의 정체성으로 인한 위협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친다. 내가 아닌 나를 만나고 내가 아닌 나조차 받아들이지 않는 세계 속에서 나는 너무 자주 말을 잃지만, 그럼에도 또다시 생존을 꿈꿔야 한다. 꿈이 아니라 여기 이곳에서 만나야 한다.

 

  나는 흔들리고 위태로운 존재들을 위해 이 글을 썼다. 고작 제 목숨 하나 건사하기 쉽지 않은 생명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스스로의 삶을 딛고 일어서기를 바라며, 부끄러운 나의 이야기를 빗대어 어쭙잖은 이야기들을 적어 내려갔다. 경계 위에 살 필요가 없었던 누군가에게 이 글은 자의식 가득한 개인적 서사에 불과할 것이며, 보다 큰 뜻과 의미를 지닌 삶을 목표로 한 또 다른 누군가에게 이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뻔 한 말들의 반복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말해야 한다. 누구나 알고 있는 그 이야기마저 매일 환기해야 하는 생명들을 알고 있기에, 까치발을 딛고 경계 위에 살아야 하는 존재들을 알고 있기에.

 

  인간적이지 않은 삶이어도 상관없다. 정의롭거나 희망에 가득 찬 삶이 아니어도 괜찮다. 우리도 모르게 우리의 가슴 속으로 들고 나는 단 한 번의 호흡만으로도 우리들의 생은 폄하되거나 소외되어서는 안 될 당위를 지녔다.

 

  여러 가지 형용할 수 없는 위협과 불안으로 짓눌려있는 생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당신이 칼끝 같은 당신의 삶 위에 꼿꼿이 서는 묘기를 보여주기 바란다. 당신의 발에서 흐른 피가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걸작으로 발아래 그려지기를 바라고, 당신이 외치는 비명이나 절규가 토해지고 토해져 한 권의 신음으로 세상 속에 펼쳐지기를 바란다. 그들의 값 비싼 서가에 꽂혀 끝내 외면당하더라도 당신들의 삶이 선뜩하게 어딘가에 남겨지기를 간절히, 너무도 간절히 바라고 있다.

 

  당신의 불안을 모르거나 강박이라는 말의 의미조차 헤아리지 못한다더라도, 당신이 밟아가고 있는 그 시간의 칼날들은 그 어떤 생의 시간보다 또렷한 족적을 남길 것이다. 당신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는 것조차 힘겹고 고통스럽다면, 입을 크게 벌리고 온몸을 찢으며 당신을 집어삼키고 있는 아픔을 쏟아내시라. 목이 끊어져 그 자리에서 갈가리 흩어지더라도, 볼썽사나운 꼴로 엉엉 울며 그곳에 몇 개의 살덩이로 조각나더라도, 있는 힘을 다해 당신의 삶을 토하라, 외치라, 절규하라.

 

  그 누구도 이해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당신의 삶을,

  당신만이라도 사랑해야겠기에.

  거기, 살아있는 당신이 바로 사랑이기에.

 

  불안으로 흔들리는 당신을 알고 있다. 강박에 짓눌린 당신을 알고 있다. 견디기 힘들 정도로 외롭고 고독한 생을 알고 있다. 고독하다는 말조차 사치스러울 수밖에 없는 당신의 시간을 알고 있다. 아름답고 찬란한 문명으로 갈가리 찢겨버린 당신의 미래를 알고 있다. 흉측한 세상의 말로 얼굴을 가리고 혼자서 엉엉 울고 있는 당신을 알고 있다. 여기에 서 있는 나는 무슨 짓을 하더라도 모를 일이지만, 그래도 나는 알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이 우리가 그리워한 언어임을 알고 있기에.

 

  언제나 부끄러운 것이 글이어서, 나는 또다시 얼굴이 붉어진다. 그럼에도 나는 뻔뻔스러운 나를 기억하기로 한다. 나의 생존이 곧 세상의 희망임을 새기며, 이 글의 마지막을 적는다.

 

  돌아볼 근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위태로움일 것이다. 사무치게 고독하고 외로울 때 그리워하고 추억할 수 있는 근원을 스스로 지워버린 내게, 삶은 날개 없는 비상을 닮았다. 날마다 뛰어내려야 하는 추락일 것이다. 떨어져 내려야 하는 것이 나의 숙명이라면 낙화처럼 나풀거리며 떨어질 것이며, 흔들리는 것이 나의 미래라면 온몸을 뒤틀며 세상에 없는 춤을 출 것이다. 무엇으로든 나는 그곳에 반드시 생존할 것이다.

 

  그동안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어디에서든 낮은 곳으로, 가장 밝은 곳으로부터 등을 지고 걸을 수 있는 용기를 잃지 마시기를 부탁드린다. 고독한 당신의 걸음은 곧 인간을 향한 걸음이다. 어떤 색의 발자국이든 누군가 뒤따를 수 있는 소중한 이정표가 될 것이다. 그곳에서 그리고 이곳에서 계속해서 꼬리를 물며 이어질 우리들의 생존에, 나 또한 찬사를 보낸다.

 

 

'쓸쓸하여도 오늘은 죽지 말자.

앞으로 살아야 할 많은 날들은

지금까지 살았던 날들에 대한

말없는 찬사이므로.'

 

장정일의 시 '지하인간' 에서

 

 

 

 

 

 

 

 

 

제17화 해체 (3)  

 

 

 

소설가 金 飛

 

 

 

 

 

 

 

 

 모두가 말하듯이, 결혼은 사랑의 도착점이 아니다.

 

 결혼이라는 것은 어쩌면 사랑에 대한 약속일 것이다. 결혼이라는 제도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에 따라 논쟁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어쩌면 순진하게도) 결혼이라는 것은 반드시 사랑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어차피 모성의 몸체에서 떨어져나온 고독을 운명처럼 지니고 살아야 하는 인간이, 삶이라는 시간 속에 잠시나마 누군가와 함께 그 고독을 위로하는 법을 배우다가 다시 또 홀로 죽음이라는 삶을 마무리하는 고독한 시간으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에 관한 것이 아니라면 결혼에 대한 그 모든 논의는 무의미하다. 그 어떤 제도나 사회적 제약이 있건 없건, 어차피 모든 결혼은 사랑이라는 몸체를 지녔고 그 나머지는 그곳에서 뻗어나온 무수히 많은 부수적 논쟁이나 논란일 것이다. 21세기의 결혼 앞에 사랑은 어딘가에 내동댕이쳐진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결국 모든 결혼이라는 관계가 그것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시대와 현실이 아무리 그것을 농락하려고 해도, 사랑은 결국 사랑일 것이다.

 

 또 하나, 혼란 속에서 경계 위에서 살아온 삶을 돌아볼 때 반드시 해체해야 할 것은 '가난'이다. 어쩌면 '가난'이라는 말은 자본주의가 득세한 이 시대를 환기할 때 가장 치명적이고 위태로운 현실을 일깨우는 말인지도 모른다. 자본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계는 어차피 필연적으로 인간을 소외시킬 수밖에 없다. 인간으로 살고 있기에 인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이 물질문명의 자본주의 세계는, 그래서 계속해서 '인간'이나 '사람'이라는 말을 끊임없이 되뇌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난'은 자본주의 시대의 가장 어두운 그늘이지만 나는 그러한 '가난'의 풍경을 조금 다른 시각으로 보고자 한다.

 

 가난하다는 말은 자본의 시대에서 도태되어 있다는 선뜩한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자본주의와 가족중심주의의 한국 사회는 서로 주고받으며 자본과 부를 대물림한다. 결국, 가난의 운명은 쉽게 전복되지 않으며, 사회나 시대에 대한 박탈감은 더욱더 그러한 숙명을 지닌 개인을 억압하게 마련이다. 거기에 '교육'이라는 이름을 잊어버린 교육 현실이 가난을 더욱 고착화시키고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교육을 통해 계층 이동은 일어나지 않는다. 교육은 단순히 계층의 대물림을 합리화해주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홍세화)는 말은 이 시대의 잔혹한 현실을 날것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가난'이야말로 비로소 인간에게 다가갈 수 있는 참으로 맞춤인 현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끔 떠올리게 된다. 자본에 지배당하지 않는 인간, 오직 자신의 몸뚱이 하나밖에는 없는 인간. 도태되고 소외되어 홀로 떨어진 자유로운 인간. 물론 그러한 인간의 모습은 가장 피폐하고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이 시대에 떠오르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한 개인이 자본이라는 세상의 틀을 벗어버리고 오롯이 개인의 인간됨을 사유하고 그것을 확장하여 소외되고 버려진 인간성을 끌어올릴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이 사회에 필요한 것이 아닐까? 이 척박한 사회가 도착하게 될 미래의 어느 어두운 모퉁이에 생명의 빛처럼 내리쬘 수 있는 고귀한 힘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닐지.

 나 스스로도 내 생각이 너무도 이상적이고 판타지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녹록지 않았던 나의 가난을 떠올리며 나는 왜 그때의 그 가난에 매몰되어 있기만 했던가 하는 아쉬움이 드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스물네 시간을 정신없이 짓누르는 가난한 일상이 나의 사유와 고민의 여유마저 앗아가 버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러한 가난 속에서 인간을 사유하고 생을 사유하는 일이 참으로 사치스러운 것처럼 느껴지리란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나는 가난에 짓눌려있던 그 시간이 가끔 몸서리치도록 후회스럽기도 하다.

 가족이라는 굴레를 벗어버리고 정체성이라는 혼돈을 짓밟고서, 세상으로 나아가 하나의 가치 있는 생을 살기 위해 나만의 즐거움을 위한 삶을 살고자 하는 욕망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추구할 수 있었다면, 자본주의의 틈바구니에 피어난 경계 위의 꽃처럼 가난이 부끄럽지 않은, 가난해도 괜찮은 삶을 꿈꿀 수 있었을 텐데. 자본이나 물질이 아니라 인간을 깨우치는 삶을 받아들여, 평생 가난 속에 묶여있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 함께 즐거울 수 있는 삶의 방식을 보여주며 공존하는 생을 살아갈 수도 있었을 텐데.

 

 지금의 현실에서 누군가에게 가난은 숙명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인간의 삶을 매몰시키는 증거가 되리라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경계 위에 서 있는 위태로움은 때로는 탁월한 균형감을 훈련할 수 있는 좋은 여건이 되기도 한다. 생이 존재하는 한 그 어떤 최악의 조건이나 환경도 삶의 마지막이 아니며, 그곳은 또다시 가볍게 몸을 털고 일어날 수 있는 자유로운 삶을 부여하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반드시 어느 것이든 '예술'에 흠뻑 몸을 담가보라고 말하고 싶다. 안타깝게도 엄청난 돈을 들여 '예술'이나 '예술가'를 사고파는 시대가 되어버리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술의 의미가 훼손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모두가 인간이기에 인간의 삶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듯 예술 또한 모든 인간에게 떼어놓을 수 없는 인간의 삶을 향유하는 그 중심일 것이다. 당연히 그것은 돈이나 물질에 기댈 필요는 없는 것일 테고.

 이 잔혹한 자본주의 시대에 의해 자신이 몸담고 있는 가난이 농락되도록 허락하지 않으며, 가난과 고통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변주하여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내 앞에 예술로 탄생시켜 놓을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이 척박한 현실을 뚫고 일어선 기적의 풍경일 것이다. 가장 혹독하고 가혹한 시련의 한가운데일수록 그렇게 태어난 나를 위한 예술품들은, 그 어떤 화려한 자본의 생산품보다 뼛속까지 나를 위로하는 고마운 생의 선물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인간은 모두 가난하다. 자본의 유무, 혹은 부의 크기에 따라 가난을 가늠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인간에게 만족하는 부유함이란 존재할 수 없기에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모두 가난의 정서를 공유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가난이기도 하고 또한 결핍이기도 할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 결핍되어있기에 공존해야 하는 근거가 되는 것이기도 할 테고.

 그러므로 나는 인간은 반드시 가난이나 결핍을 향유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으로부터 도피하거나 벗어버리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난이나 결핍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고 사유할 수 있는 삶의 여유를 지켜야할 것이다.

설령 그 속에서 그 어떤 예술이나 생의 의미를 찾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하물며 그 안에서 인간이나 삶을 건져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가난을 외면하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의 결핍이나 가난은 분명히 위로되고 위안받게 될테니 말이다.

 

 왜냐하면 그 안에 바로 나의 삶이 있을 것이기에, 그 누구도 아닌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나 자신이, 바로 그러한 결핍과 가난 속에 존재하고 있을 것이기에.

 

 

 

 

 

 

 

 

 

우리 사이에 경계가 없다면,

너를 만날 수도 없을꺼야.

 

 : 배수아의 새벽의 극장 리뷰

 

 

 

변정희

 

 

 

 동아대학교 석당홀은 고급 공연장인 채로 늙어버린 듯한 인상을 주었다. 아프꼼과의 그 숱한 만남 속에서도 가장 크고 가장 서늘한 장소였다. 지난해 12월 13일 금요일 저녁, 이곳에서 아프꼼과 극단 새벽이 공동 기획한 배수아와 새벽의 극장이 열렸다. 그것은 말과 이미지들로 쌓아올린 무대를 통해 우리에게 왔다. 단 하루 열렸다 닫히는, 지구상의 유일무이한 이 극장에서는 총 4개의 프로그램을 상연하였다. 말-이미지의 극장에서는 Werner Fritsch 감독의 <ATEM DES LAOTSE>을, 새벽의 극장에서는 <밤이 염세적이다>(원작: 배수아, 각색: 아프꼼의 권명아, 연출: 극단 새벽의 이성민, 출연: 장옥진, 정선욱)를, 목소리의 극장에서는 낭독 공연을, 정동의 극장에서는 <환을 켜다>를 만날 수 있었다.

 흰 천과 검은 천이 드리워진 무대 위에서, 어지럽게 배돌고 있는 글자들은 한때 배수아 작가의 말들이었으나 지금으로서는 아무 의미를 찾을 수가 없는 이미지이기도 하였다. 무대 위에서, 영상 속에서 이미지가 된 말들은, 우리 사이에 숱하게 주고받은 말들이라기보다 차마 주고받지 못한, 미처 대화가 되지 못한, 도저히 이해받지 못한, 너에게로 가 닿을 수 없는 그런 말들이었다. 그간 아프꼼의 독창적인 실험들이 ‘함께, 있는, 우리, 사이’에 숨겨진 텍스트들을 무수히 끄집어내었다면, 밤으로부터 시작한 이 새벽의 무대는 텍스트조차 되지 못한 무수한 말들을 통해 거꾸로 ‘우리 사이’를 비추었다.

몇 번의 극장이 열리고 닫히는 동안 말과 글자들은 이미지에서 사람의 몸으로, 목소리로, 다시 이미지로 돌고  돌았다. 사람의 몸을 타고 흐르는 글자들이 이런 말들을 내뱉고 있었다. “밤이 염세적이다.”, “밤이 무거운 신음을 토한다.” 과연 밤은, 실체를 알 수 없는 검은 피조물들의 시간. 저 글과 말과 이미지들이 경계 없이 쏟아져나오는 시간. 국적없는 모든 것들이 허용되는 시간. 밤이 점점 아늑해지기 시작하지만, 결국 침묵과 소란스러움으로 뒤엉켜 모든 것을 덮어버리고 말 것이므로, 염세적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허용하는 밤이 염세적이라면, 그렇다면 너는, 아침의 흰 빛에 눈이 멀어버리지 않을 자신은 있는가?

 밤과 아침,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선 극장 안에서, 나는 이미지를 겹치듯 안젤라 카터의 <서커스의 밤>을 떠올렸다. 날개달린 여인, 광대와 서커스, 거짓과 웃음과 혼돈의 검은 밤은 이윽고 시베리아의 대평원으로 무대로 옮겨가고, 흰 눈으로 뒤덮인 평원은 속속들이 밤이 뒤덮고 있던 것들을 지상 위에 전시하면서 날카로운 대조를 이끌어냈다. 살아있는 것들의 검은 밤(正)이 하얀 세상을 만나고 난 뒤(反)에 그것이 죽음이 될지, 새로운 세계를 경유하는 통로(合)가 될지 알 수는 없는 것이다.

 

 

 

 새벽은 흰 빛과 검은 빛이 충돌하는 시간이다. 그러나 흰 것이 종이요, 검은 것이 글자이듯, 그토록 ‘밤이 염세적’임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토록 염세적이었기에, 흰 빛을 만나기 시작한 새벽의 극장은 온갖 글자들을, 말들을 쏟아내었다. 흰 빛과 검은 빛이 부딪쳐서 글자가 되고 소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흰 빛과 검은 빛, 그 충돌과 갈등의 생산성!

 연극 <밤이 염세적이다>는 어둠 속에서 두 배우가 이렇게 외치는 말로 시작한다. “벽을 유심히 보아야 한다. 벽 말고는 다른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우리는 밤이 지나고 아침이 찾아오는 그러한 순차적인 시간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선택하고, 결정해야만 한다. 이 새벽에 밤을, 이윽고 다가올 아침을, 너를, 나를, 이해받지 못하는 나와 너와의 만남을 선택하고, 결정해야만 한다. 새벽은 새로운 벽이 아니던가? 저기 저 새-벽을 보라. 저 벽이야말로 너를 만나게 되는 바로 그 경계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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