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지동-시간의 종은 울리지 않는다

 

 

金 飛

 

 

 

 

 

 

  지하철 하단역에는 부산의 서쪽으로 운행하는 많은 마을버스들이 선다. 보통은 지역마다 예닐곱의 노선, 많아봐야 열 개 남짓의 마을버스가 운행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하단역에는 21번까지 번호가 붙은 마을버스가 있다. 지역에 따라 숫자를 붙이는 방식이 다르기는 하겠지만 작은 버스들이 서로 다른 번호를 달고 바삐 오가는 모습을 보니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마을들이 얼마나 많이 뿔뿔이 흩어져 있는 걸까, 괜히 조바심이 나는 것만 같았다. 마을마다 버스의 크기 또한 달랐고 마을버스에 오르는 사람들의 차림새 또한 달랐으니, 우리가 사는 세계의 다가가기 쉽지 않은 거리감 또한 얼마나 먼 것인지.

  이번에 내가 목표로 한 곳은 강서구의 명지동이었다. 명지동은 이미 남쪽으로 대단지의 신도시가 들어서 있었고 부산 진해 경제 자유구역으로 지정되어 그에 속하는 건물들과 또 다른 신도시들이 건축 중이었다. 나는 이미 건축된 신도시와 그리고 건축 예정인 또 다른 신도시 사이에, 서쪽 바다의 끄트머리 마을인 '하신'을 목적지로 정하고 하단역에서 14번 마을버스를 탔다.

  여러 개의 비닐 봉투를 든 몇몇 어르신들이 작고 허름한 버스에 올라섰고, 이미 서로 면식이 있으신 분들인지 그들은 버스 안에서 편하게 대화를 주거니 받거니 하셨다. 서로 다른 정류장에 내리는 모습을 보니 이웃한 주민들도 아니었던 모양인데 매번 같은 곳을 가는 버스에 오르며 어르신들은 이미 서로 이웃인 모양이었다.

버스는 을숙도를 가로질러 부산의 서쪽을 향해 나아갔다. 다리 하나를 건넜을 뿐인데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사뭇 달라졌다. 조용한 시골 마을을 지나는가 싶더니 갑자기 버스는 덜컹거리며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창밖을 보니 황량한 벌판의 아득한 끄트머리에 시멘트 고층 건물들이 들어차고 있었고 버스가 달리는 도로 옆에서도 똑같은 건물들이 뼈대를 세우고 있었다.

  마을버스는 양쪽으로 황량한 건축 부지 사이를 요동치며 지나갔다. 과연 이런 곳에 사람이 사는 마을이 있을까, 그런 의구심을 가지게 될 즈음 버스는 거대한 건축 부지 옆으로 들어섰고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 쓴 마을의 집들이 나란히 일렬로 드러났다. 그 중에 한 정류장에 마지막 손님을 내려드리고 버스 기사는 맨 뒷자리에 앉은 나를 흘끔거렸다. '중신'이라는 곳에서 또 다시 버스가 문을 열었고 그곳에서도 내가 내리지 않자 기사는 거울 속으로 내게 소리쳤다.

  "어디 가시오?"

  "하신 가는데요? 이 버스 하신 가는 거 맞지요?"

  "그 마을 없어진지가 언제인데 거기를 간다고 그래요?"

  퉁명스럽게 그렇게 대답해놓고 기사는 나를 먼지가 뒤덮인 마을 끄트머리에 내려주었다. 나를 내려주고도 버스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섰다. 알고 보니 그 황량한 곳이 버스가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하단역으로 돌아가는 회차 지점인 모양이었다.

  "하신은 원래 어느 쪽인가요?"

  도저히 그대로 돌아갈 수 없어 물었더니 기사는 잘려나간 풀 숲 너머를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쪽으로 내려서는데 마구잡이로 파헤쳐놓은 길 때문에 발이 푹푹 빠졌다. 흉터처럼 남겨진 나무 몇 그루가 시퍼렇게 물들어가며 끈질긴 생명을 이어가고 있었고, 이제는 더 이상 버스도 사람도 오지 않는 정류장이 흉물처럼 흙더미 위에 홀로 섰다.

  나는 끊겨진 길을 따라 잘려나간 풀숲을 넘어 또 다른 흙더미 위로 올라섰다. 먼지를 뒤집어썼을지언정 그 너머에 내가 가고 싶었던 마을이, 사람들이 살아있던 그 풍경이 내 앞에 나타나주기를 나는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흙더미 위에 올라선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또 다른 황량한 벌판이었다. 어떤 건물의 흔적이었는지 시멘트 바닥이 발아래 썩고 있었고 용도를 알 수 없는 플라스틱 조각들이 나뒹굴었다. 그 너머에 바다 쪽으로 또 다시 잘려나간 풀숲이 보였지만 더 이상 다가갈 방법은 없었다.

 

  나는 그곳에 버려진 듯 서 있었고,

  모두에게 버려진 마을은 더 이상 그곳에 없었다.

 

  그렇게 알 수 없는 쓸쓸함이 온 몸을 휘감는 사이 멀리 풀 숲 속에서 커다란 봉지를 든 두 사람이 걸어 나왔다. 혹시나 아직 마을 주민들이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 물었더니 그들은 그저 쑥을 캐러 찾아온 외지인이었다. 그 풀숲 속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들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그만이었다.

 

 

 

 

 

 

 

 

  나는 그렇게 허허벌판을 서성거리다가 그대로 돌아 나오고 말았다. 명지동의 그 지역은 바다 쪽으로 다가가면서 상신, 중신, 하신으로 나뉘는 모양인데, 좀 전에 내가 보았던 먼지를 뒤집어 쓴 마을이 바로 '중신'이었다. '하신'은 이미 사라져버리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한 쪽에는 공사장을 가로막은 거대한 회색 벽을 두른 채 중신의 평성마을은 마지막 시간을 기다리듯 고요하게 그곳에 있었다. 과거 어느 시간 속에 열심히 땅을 갈고 곡물을 키웠을 농기구들이 패잔병처럼 회색 벽 아래 놓여 있었고 미래를 꿈꾸었을 작은 나무 주택마저 사람을 잃고 한 쪽이 무너져 있었다. 골목의 끄트머리 녹이 슨 철문 너머로 노란 꽃송이 몇 개가 나를 반기듯 고개를 내밀었지만 허탈하고 쓸쓸한 마음은 쉽게 위로가 되지 않았다. 건축 부지 반대편에는 초록의 곡식이 익어가는 벌판이 보였지만 내게는 그저 황량한 세계의 전조처럼 보였다.

 

 

 

 

 

 

 

  마을 사람들이 간절히 무언가를 기도했을 교회 앞에 서서 나는 한참을 서성거렸다. 시절도 모르고 푸르게 이파리를 키워가는 나무들을 올려보며 한숨을 쉬는데, 나무들 사이에 커다란 첨탑 하나가 보였다. 그 속에 시커멓게 녹이 슬어 더 이상 울리지 않는 종이 있었다. 언젠가 기억 속에서 누군가를 위해, 어떤 미래를 위해 마을에 울려 퍼졌을 종소리.

  찍어낸 듯 똑같은 건물들이 높이 들어선 새로운 마을에도 그렇게 종은 울려 퍼질까. 어떤 미래를 떠올리며 자신들이 살던 마을을 져버렸을 사라진 주민들은 지금쯤 그 종소리가 그립지는 않을까. 머지않아 그 아픈 기억마저 사라져버릴 미래 속에 우리는 후회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더 이상 울리지 않는 종탑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여러 가지 생각들이 두서없이 떠올랐다. 고향이 사람을 지킨 것은 아니겠지만, 사람을 지킨 것은 결국 사람이겠지만 새로운 고향 속에서 모두들 사라져버린 마을을 그리워할 필요가 없게 되었으면. 시절을 후회하고 참혹해하며 우리들의 손으로 망가뜨린 시간과 그리움들을 안타까워하지는 않았으면.

 

  헛된 바람을 떠올리고 있는 내 머리 위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사라져버린 시간의 눈물처럼 아픈 비였다.

 

 

 

 

사진: iphone 4S © 김비 2014

 

 

 

 

 

 

 

달팽이를 만나다

 

 

 

정선욱(래인커머)

 

 

 

 

 

이성민 선생님은 1984년 극단 새벽을 창단하고 삼십 년째 동인제 극단으로 극단을 이끌어오고 있다. 극단 새벽의 상임 연출가로서 극단의 주요 작품들을 직접 쓰고, 연출한다. 요즘은 효로 연극학교를 통해 부산의 연극인을 길러내는 일을 하고 있다.

 

그에 대한 내 첫인상은 커다랗고 오래된 잠바를 입은 작고 마른 몸에 희끗희끗하게 흰머리가 나 있지만 눈썹이 곧고 눈빛이 똑바른 조금 무서운 할아버지였다. 하지만 몇 번 만나고난 뒤 나에게 그는 따듯하고 귀여운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는 키우는 강아지 봄둥이에게 무릎에 앉을 거예요 내려갈 거예요? 하고 존대를 하기도 하고, 항상 들를 때 마다 밥은 먹었어요? 안 먹었으면 같이 먹어요. 하면서 찰기가 도는 현미밥을 한 그릇 뜨고는 수저를 턱 내 주기도 했다. 나랑 친구가 웃긴 말을 하거나 하면 괜히 웃음을 감추면서 윗입술만 살짝 움직여 웃곤 했다. 그렇게 내 머릿속에서 무서웠던 할아버지는 사라지고 따듯한 느낌만 남아있었다. 나는 그런 마음으로 인터뷰 요청을 했고, 그는 나를 왜 인터뷰해요 하면서도 흔쾌히 허락했다.

 

그러면, 극단 사무실로 오세요.”라는 말에 한동안 매일같이 들렀던 극단 새벽 사무실을 향했다. 근현대사 박물관을 지나고 중앙성당을 지나 골목으로 들어가니 극단 새벽의 사무실 간판이 보였다. 아래층의 밥집을 지나 왠지 바닥이 찐득찐득한 좁은 계단으로 올라가면 벽마다 지난 공연의 포스터들이 여기저기 붙어있었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하얀 강아지 두 마리가 왕왕 짖어대며 반겼다. 공평하게 한 마리씩 안아줘야만 조용해지는 강아지들이었다.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긴 기둥에는 지역예술인들을 지원하는 민들레의 꿈 프로젝트에 대해 적혀있었다. 사무실의 반 이상이 책으로 둘러싸여있었고, 책 사이에 놓인 테이블에는 극단 새벽 사람들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민들레의 꿈 프로젝트가 떠올라 민들레 차를 사갈까 하다가 국화차를 사왔다는 내 말에 다들 웃었다. 웃으면서도 멋쩍게 인사를 하고 그가 있는 방안으로 들어갔다. 커피를 마시면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서로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지 약간 어색하기도 했고, 인터뷰를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하기도 한 마음에 사실 처음에는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 몇 분을 그를 쳐다보기만 하며, 그는 천천히 커피만 마시며 흘려보냈다. 입을 열어서 질문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요즘 잘 지내시는지, 저는 학교 다니느라 불규칙해져서 살이 또 찌고 있다든지 하는 얘기들만 계속 해 댔다. 그는 또 윗입술만 슬쩍 올려 웃으면서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한마디 했다.

 

흐흐, 인터뷰 할 줄 모른다. 보니까.”

 

그는 반쯤 웃으면서 말을 꺼냈다. 이야기는 그의 고등학교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고등학교 시절의 그는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아버지의 사업이 망하고, 어머니는 어릴 때 일찍 돌아가셨고, 동생들은 어리고, 할머니는 나이가 드셨다. 이런 여러 이유로, 그는 낮에는 학교를 가고 밤에는 일을 하면서 동생들의 학비를 대는 가장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학교를 마치자마자 부산역으로 가서 기차에서 내려온 썬데이서울을 팔고, 그걸 팔고나면 미군부대 근처의 바 텍사스촌에서 껌이나 담배를 팔았다. 그리고 한밤중이 되어 그 바의 여종업원들이 미군들과 여인숙에나 들어갈 때쯤이 되면 여인숙 거리를 다니며 여종업원들에게 찹쌀떡과 김밥을 팔았다. 일이 끝나고 집에 들어오면 네 시쯤, 그는 두어 시간쯤 잠들었다가 다시 학교를 가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특별하거나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당시 친구들도 다들 신문 배달 알바 같은 정도는 다 했었고, 다들 어려웠다. 그는 그저 학생치고 많이 벌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꽤 바쁜 학교생활을 하던 고등학교 시절, 2학년 때 만난 담임선생님은 그에게 많은 충격을 주었다. 선생님은 매우 이상한 사람이었다. 마치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캡틴 같은 선생님이었다. 국어 선생님인데도 역사를 더 많이 가르치고, 교과서에 나오지도 않는 내용들을 중요하게 이야기하면서,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줬다. 심지어 그는 유신이었던 당시 시대가 얼마나 야만적이고 비정상적인지를 틈만 나면이야기 했다.

 

그때 주로 말했던 게 뭐냐면 1인분주의 사회, 지금으로 따지면 개인주의 같은 거죠. 이런 삶을 살면 자기는 행복한지 몰라도 결국에는 미필적 고의에 의해서 타인한테 고통을 주게 된다. 그렇게 된다. 본인은 못 느낀다. 그래서 세상에게 무관심하고 세상에 대해 자세히 알려고 하지 않고 그냥 자기 행복을 추구하는 일생을 살다가게 되면은 자기는 행복할지 몰라도 자기 외에 불행해 지는 사람이 한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했어요. 그게 제일 큰 영향을 준 것 같아요. 감수성도 예민했고.”

 

그 선생님의 영향이었을까. 그는 그 후로도 부산의 신발공장에서 일하는 여공들에게 야학을 하며 수업을 해주기도 하고, 구로공단에서 일하면서 노동조합을 만드는데 가담하게 되고, 해고되고, 수배되기도 했다. 여공들을 가르치고, 구로공단에서 전구소켓을 만들면서 그는 여공들과 노동자들에게 진짜 현실의 세상을 오히려 배웠다. 그리고 이런 경험들 때문인지 그는 작품을 쓸 때 어딘지 아프고 소외된 사람들로 글을 쓰게 되었다. ‘철수와 영희를 위한 콘서트에는 10대 탈학교 학생인 영희와 20대 지방대 백수인 철수를 위로하는 4050대 삼촌과 이모, 엄마의 모습을 그려냈다. 그리고 우리는 안드로메다에서 왔다.’에는 소녀였던 시절을 떠올리면서 서로를 위로하는 4050대 여성들의 모습을 그렸다. 그는 그것이 자신이 살아온 경험들이기 때문에,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아직도 다수로 근처에 지천에 존재하기 때문에 그렇게 그들에 대해서 쓸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항상 사람들을 만나고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떠오르는 단상들을 기록해나갔다. 그 단상들이 겹쳐지고 겹쳐지면 어느새 그 생각들은 서로 연결 되었고, 하나의 구상이 되었다.

 

사람을 많이 만나요. 일단 어, , 사는 얘기 하다보니까 노동자들도 여성들도 많이 만나고 학생들도 만나고. 관련된 것들을 그때그때 사람만나고 얘기하는 게, 일이예요 나는. 그 사람만나고 이야기 하는 그 속에서 작품이 그려지고 하는 거죠.”

 

이렇게 글을 써서 그런지 그는 절대 다작하는 극작가는 아니었다. 사람들을 만나고 또 만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쉬엄쉬엄 지치지 않게 계속해서 글을 쓰고 또 그것을 무대에 올리고 공연했다. 그에게 있어서 글을 쓰는 일이란 그다지 어려운 일도, 억지로 해야 할 일도 아니었다.

 

그니까 글 쓰는 거는 식욕하고 같아요. 막 허기를 느끼고 밥 먹는 것처럼 쓰고 싶으면 쓰여져요. 그냥 아니 뭐 자연스럽게 그렇게 쓰여지는 거지 억지로 쓸라고 하면 글도 막 어거지가 되고 일상에서 느끼는 게 중요한 거죠. 반응을 자꾸 해야 돼요. 그때그때 느껴지는 것들을 언제 글을 쓰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냥 잡다한 것에 느껴지는 것을 쭉 기록 해 놓는 거죠. 그냥 단편적인 생각을 그러면 아무 상관도 없는 단상들이 결국 연결이 될 수도 있고, 글 쓰는 사람이 많이 생각하고 많이 느끼고 부지런히 기록하는 거예요.”

 

그는 억지로 뭔가를 느끼려고 노력하거나 느껴지지 않는다고 힘들어하지도 않았다. 그저 뭔가 느껴지고 마음에 와 닿으면 그것이 뭘까 왜 이렇게 느껴지는 걸까 하고 계속 생각하고 끝없이 고민했다. 그는 그 와닿음충격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만성적으로 생각하고 있던 그 무언가를 다시생각하게 하는 어떤 충격. 그게 웃긴 일이 될 수도, 슬픈 일이 될 수도, 화날 일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중요한 것은 왜 웃었을까, 왜 슬펐을까, 왜 화가난걸까 하고 생각해보고 돌이켜보는 것이었다.

 

그가 기억하는 첫 번째 충격은 할머니에게서였다. 그는 어릴 때 할머니와 같이 살았고, 그 집 앞마당에서 토끼를 키웠다. 하지만 동물을 기르기에는 그가 너무 어렸던지 토끼는 자주 아프고 점점 약해져갔다. 어느 날 그가 학교를 마치고 집에 왔더니 키우던 토끼가 온데간데없었다. 할머니는 토끼가 아파서 어디 보냈다고만 했다. 하지만 그가 저녁을 먹을 때 나온 고기는 왠지 평소와 식감이 달랐고, 이상하게 기분이 묘했다. 그는 직감적으로 내 토끼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는 충격을 받았다. 그에게 있어 할머니는 거의 전부 같은 존재였고, 그런 사람이 자기가 기르던 토끼를 가지고 요리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어린 그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일로 그는 한 달이나 넘게 할머니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흔한 이야기이지만 그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는 왜 할머니가 그럴 수 있는지 계속 생각했고. 어린마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할머니를 몇 년이 지나고 나이가 들어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충격이 내가 생각을 자꾸 하게 되는 계기가 되거든요. 그게 뭐 삶과 죽음과 이런 것들은 복잡한 문제들인데 그 복잡한 생각들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하는 거고. 그담에 이제 사람이 철들어 가는 게 끊임없이 믿었던 사람한테 배신당하고 상처받으면서 세상을 알아가요. 연애하다가 상처받기도 하고, 또 무엇을 함께 도모하다가 상처받기도 하고 계속해서 그담에 일상에서 뭘 할라고 목표를 세우면 자꾸 안 되고, 좌절당하고, 그러면서 성숙해가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얘기가 잘되고 원하는 대로 되면 이 생각이 발전을 안하는 거예요. 그냥 그렇게 사는 거지. 근데 그게 안 되기 때문에 인간의 사고가 자꾸 깊어지고 또 예술가는 거기서 이제 창작이라는 생각으로 성장하는 거죠. 예술이 그런 거죠. 우리가 사는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예술이 나오지, 아무 문제없다고 하는데 예술 할 일이 없지. 아무 문제가 없는데, 무슨 소재가 없어지는데, 모든 예술 작품의 기본은 갈등인데 이 갈등이라는 거는 세상의 문제거든요. 갈등이 없는 소설을 누가 읽고 갈등이 없는 드라마를 누가 봐요. 그거를 아무 재미도 없는데.”

 

그러고 가장 기본적인 갈등은 인간이 추구해야할 인간다움과 자기 본능 사이의 괴리에서 부터 출발해요. 그 본능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갈등 구조가 항상 있어요. 그게 예술이라는 게 그래요 그래서 예술가는 불온한 상상력을 갖게 되는 거예요. 그러고 자기 안에 지금의 세상과는 다른 세상이, 갈구하는 세상이 있어야 되요. 왜냐면 지금 사는 세상이 별로 다른 세상을 꿈꾸지 않는 다라면 예술을 해야 될 이유가 없는데. 그니까 식욕이 없는 사람은 의욕이 안 생기는 거랑 똑같아요. 창작욕구도 그런 건데 창작 욕구는 허기예요. 허기. 삶에 허기진 거예요. 끊임없이 배고프고 그런 거예요.”

 

그는 끝없이 허기졌고, 끝없이 식욕이 돌았다. 그는 계속해서 생각해 낼 힘만 있다면, 기본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조건만 되면 언제든지 떠오르는 생각을 글로 써 내거나 표현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극단을 운영하면서 모든 단원들이 생존할 수 있게 할 만큼 돈을 벌기란 거의 불가능 했다. 그는 삶을 때때로 돌아보고 반성했다. 정말 필요한 것인지 되묻게 되었고, 딱히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봐 내려고 애썼다.

 

글 쓰는 거는 두 가지가 중요한 거 같아요. 글 쓰는 사람이 경제적으로 다 누리고 살려고 하면 그 생각을 좀 버리고 자기 삶을 재구성 하는 게 좀 필요하고 최소한의 내가 꼭 필요한 것만 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마인드를 가지는 게 중요한 거 같애요. 두 번째는 그 최소한의 것을 충족하게 하는 이를테면 조건을 만드는 거예요. 아르바이트나 자기 시간을 좀 할애할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하면서 나머지 시간을 글 쓰는데 주고 그러면 되요. 내가 돈 잘 벌고 하겠다 하면서 글도 쓰겠다 하고 생각하면 글 쓰는 거는 포기하는 게 좋아요.”

 

그는 또 생각했다. 다 같이 살면 안 될까. 그는 극단의 이름으로 연립주택 한 채를 통째로 샀고, 그와 단원들은 방을 하나씩 가질 수 있었다. 그것은 그들에게 우리 집이면서 내 집이었다. 그들은 각자의 시간을 보내면서도 함께 살 수 있었다. 그것은 어떻게 보자면 그가 꿈꾸는 세상이기도 했다.

 

내가 꿈꾸는 세상은 그 굉장히 단순해요. 그니까 그 내 것이 있는 우리 것이 소통되는 세상이죠. 이전 사회주의라는 나라와 지금 자본주의가 무엇이 문제냐 하면 이전 사회주의를 했던 몰락한 국가를 보면 우리 것만 계속 강조하는 거예요 자본주의는 내꺼만 계속 내 것이 있는 우리 사회가 가능한데 그걸 해결을 해야 한다고 보는 거죠 그게 안 되면 너무 하나만 강조되면은 나는 그 우리에 귀속이 되는 거예요. 우리로 뒤섞이잖아요. 그러면 개인의 고통을 딛고 우리가 존재하는 그런 세상이 된단 말이에요. 그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봐요. 자본주의는 소위 그 우리가 없죠. 우리라는 개념이 실종되어버리니까 또 유일하게 우리가 비집고 들어오는데 그 이름이 민족이니 지역이니 국가니 이따위 것들이 들어오는데 웃기지.”

 

그는 끊임없이 그가 꿈꾸는 세상을 무대 위에 올린다. 아마 그가 꿈꾸는 세상이 올 때까지 그의 극본은 무수히 만들어 질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또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하고 그가 몰랐던 또 다른 세상을 마주할 것이고, 어떤 충격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생각하고 써나갈 것이다. 그에게 있어 이 흐름은 매우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다. 패닉 이라는 그룹의 달팽이라는 곡이 있다. 그 노래가사에서 달팽이는 뜨거운 해가 높이 떠서 몸을 녹이고, 열심히 달린 몇 시간이 다른 이의 고작 몇 발자국이라 하더라도 저 넓고 거친 세상 끝에 바라던 바다가 있을 거라는 걸 믿고 꿈꾸고 상기하면서 모든 걸 바쳐서 바다를 향해 간다. 그걸 듣는 나는 항상 어디선가 바싹 말라버릴 달팽이를 생각하며 불쌍해하기도 하고, 그럼에도 계속 가는 달팽이를 대단하게 여기기도 했다. 말꼬리를 늘이며 천천히 이야기 하는 그를 보며 그 달팽이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가 보여준 달팽이의 삶은 바싹 말라 쭈글쭈글해지지 않았고, 무언가 한 발자국이 달에 착륙하기라도 한 것처럼 대단하다는 듯이 자축하지도 않았다. 달팽이의 삶은 멀리서 보기에는 가물었지만 달팽이는 또 다른 달팽이들과 함께 수분을 나누었고, 걸을 수 있을 때, 걸을 수 있는 만큼 더 나아가며 끝없이 나아갔다. 그는 항상 나 때문에 말라갈 다른 누군가를 생각하며 지내는 것 같았다. 또한 그의 한걸음이 큰 것일지 작은 것일지는 신경 쓰지 않고 바라는 세상이 있는 곳으로 꾸준히 발끝을 향하며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삼십년이 넘는 시간동안, 어쩌면 그의 생 내내. 그는 바다에 가까워지길 바라며 그렇게 조급하지 않게, 하지만 여전히 멈추지 않고 걸어가고 있었다.

 

 

 

 

 

 

 

금성동-참새와 제비가 사는 마을

 

 

金 飛

 

 

 

 

 

 

  어떤 이름에는 분명하게 환기되는 것들이 있다. '바다'라고 하면 푸른빛 물결과 모래사장이 떠오르지만 우리는 그 바다에 기대어 살고 있는 사람들을 잊게 마련이고, 그 바다가 허락한 존재의 시간을 감히 가늠하지 못한다. ''을 떠올리면 반드시 올라가야하는 정상이나 초록의 풍경들을 생각하지만, 진정한 산의 이름을 우리는 결코 알 수 없으며 그 어떤 산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다.

 

  기억한다는 것은 망각한다는 것이며,

알고 있다는 것은 곧 모르고 있다는 참혹한 고백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부산을 알기 위해 그래서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바닷가가 아니라 산자락이었고, 익히 알고 있는 마을이 아니라 모르는 마을이었다. 금정산은 부산의 지붕이라 하여 가장 높은 봉우리를 자랑하며 17킬로미터의 금정산성이 길게 뻗어 있어 일 년 내내 등산객들과 관광객들이 분주히 오고가는 명산으로 잘 알려져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나의 눈길을 끈 것은 금정산이나 금정산성이 아니라 그 산 자락에 파묻혀 길게 뻗어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그 곳이 바로 내가 이번 연재를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찾아간 금성동이었다.

  금성동은 크게 공해부락이라고 알려진 공해마을과 죽전마을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나는 그 중에 죽전마을로 향했다. 금성동 주민센터에서 버스에서 내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금정산을 향해 산성 쪽으로 올라간 반면 나는 그들에게서 홀로 떨어져나와 마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금정산과 금정산성을 찾는 등산객이나 관광객들을 위한 음식점과 카페들이 커다란 간판을 드리우고 있는 너머에, 주민들의 마을이 조용히 자리하고 있었다.

  마을 쪽으로 조금 걸어 올라가니 꽃 한 송이와 악어 한 마리가 지키고 있는 금성초등학교의 교문이 보였다. 초등학교에 들어서서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던 것은 운동장 한 켠의 스탠드를 빽빽이 채운 아이들의 그림이었다. 보통은 다양한 이름의 화가들이 자신들의 그림을 채워넣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곳엔 아이들 스스로가 예술가가 되어 자신들의 그림을 빼곡히 채워넣고 있었다. 예술가의 작품이 아니라, 예술가의 꿈을 목격하는 일은 참으로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초등학교를 빠져나와 나는 마을의 바깥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벽에는 무수히 많은 낙서들이 포개져 시간의 문양을 만들어 놓았고, 양지 바른 곳에 내어놓은 의자 옆에 엄마의 심부름을 하는지 여자 아이 하나가 쓰레기봉투를 내어놓다가 나를 보았다. 외지인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챌 수 있을 텐데도 아이는 스스럼없이 '안녕하세요?' 먼저 인사를 건네왔다. 그리고 나도 아이에게 '그래, 안녕?' 말해주었다.

  그 곳에 살고 있는 누군가의 인사 한 번으로 나는 환대라도 받은 듯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조금 더 위쪽으로 올라가니 봄꽃들이 흐드러지는 봄날 한 낮인데도 어느 집의 굴뚝에서는 새 하얀 연기가 폴폴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직도 뜨겁게 데워져야하는 시간이 필요한지 새 하얀 구름과 뒤섞이며 그 풍경은 묘하게 나를 채근하고 있었다. 거대한 돌들이 박혀 있는 비탈에 세워진 허름한 집과 그 건너편에 새로 지은 근사한 전원주택은 괜스레 들뜬 마음을 시리게 했고, 나는 산비탈에 위태롭게 세워진 집 쪽으로 다가가려고 작은 나무다리를 건너다가 다시 돌아내려왔다. 나의 발걸음이 그들의 일상을 침범하는 것은 아닐까, 누군가의 남루한 시간이 반드시 악몽은 아니란 것을 알기에 나는 그 앞에서 멀리 사진 몇 장을 남기고 그대로 돌아섰다.

 

 

 

 

 

 

  또 다른 골목을 가로지르며 나는 새로 지어진 주택들과 시간의 무게에 짓눌린 허름한 집들이 뒤섞여 있는 풍경을 보았다. 똑같이 소중한 시간을 지나온 그들의 현재가 서로에게 상처나 쓸모없는 박탈감을 주지 말았으면, 나는 그렇게 엇갈리는 풍경들을 마주할 때마다 자꾸 여러 가지 감정이 뒤엉켰다. 다행히 빼꼼히 열린 허름한 집의 문틈 속에서 어느 가족은 봄 햇살을 받으며 여유로운 점심 식사를 나누고 계셨다. 그 정겨운 시간에 폐가 될까 나는 그 집 대문 옆에 나란히 달린 문 두 개를 사진 속에 담고는 또 다시 다른 골목으로 발길을 옮겼다.

  따스한 햇살 아래에서 쪽파를 심은 화분 몇 개는 줄을 맞춰 나란히 몸을 말리고 있었고, 새로 지어진 연립의 벽에는 똑 같은 모양의 계량기가 다른 숫자를 턱 밑에 새기고 나란했다. 아무리 서로 다른 시간을 건너왔더라도, 우리의 미래나 희망의 간극은 그토록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더라도 결국 우리는 그렇게 나란히 있을 수밖에 없는 일이겠구나.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고 끊어져버린 골목을 다시 거슬러 내려오면서 나는 어느새 모두가 서로에게 잊혀지지 않는 이웃이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또 다시 등산객들이 분주한 큰 길을 건너 아래쪽으로 내려가니 사슴에서 사람으로 변하는 공존의 이미지를 새긴 난간이 보였고, 누군가 벽에 그려넣은 여러 가지 시구절들도 눈에 들어왔다. 그 중에 하나 '제비가 철새고 참새가 주인인데, 제비가 참새를 죽일 수 있겠소.' 하는 구절은 이곳에서 일상의 삶을 지어가는 그들의 바람이자 믿음처럼 읽혔다. 아무리 달라지고 변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기를 바라는 바람, 여기에서 나고 여기에서 살아가는 그들의 생이 오래도록 계속 이어지리라 믿고 싶은 그들의 믿음.

 

 

 

 

 

 

  종점인 죽전 마을 정류장에서 나는 다시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벚꽃이 흐트러진 가로수길을 따라 공해마을로 가니 일찍 부지런을 떨었던 등산객들이 벌써 내려오고 있었다. 남문 정류장에서는 또 다른 무리의 등산객들이 버스에 몸을 실었고 자신들의 특별한 여정을 기억하느라 그들의 목소리도 점점 높아졌다. 고불고불 이어지는 금정산 산자락을 따라 버스는 다시 시내 쪽으로 향했고, 맨 앞자리에 앉아 창밖만 바라보던 나는 어리석게도 하늘 속에서 참새와 제비가 나란히 같이 나는 풍경을 상상하고 있었다. 이름이 없는 하늘을 훼손하지 않으며, 서로가 서로의 터전과 유영을 존중하며 즐거이 노닐 수 있는 광경을. 그러나 속상해선지 부끄러워선지 자꾸만 내 얼굴은 붉어지고 있었다.

 

 

 

 

사진: iphone 4S © 김비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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