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과 벽에 대한 태도

 

 : 배수아의 새벽의 극장 리뷰

 

 

 

최성희

 

   

나는 오래된 기억처럼 이 극을 만난다. 흑백영화 같은 연극을 보는 것, 독백의 늪에 빠진 여성을 보는 것 모두 내게는 떠올리기 힘겨운 과거 같은 느낌을 준다. 만약 완성품을 보는 관객으로서만 참여했다면 그런 거리감은 줄어들지 않고 더 커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운 좋게도 이 연극을 구상할 때 옆에서 지켜보았고 2부 낭송극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처음 극단 새벽과 배수아의 소설을 결합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 이질적 결합이 어떤 결과물로 나올지 무척 궁금하였다. 그때까지 배수아는 내게 소문의 작가에 불과했고 그의 작품을 직접 접한 적이 없었지만, 소문들을 종합해서 나는 그녀가 꽤 모던적인 작가라고 여기고 있었다. 반면 극단 새벽은 열악한 부산 연극계에서 리얼리즘적인 성향을 지닌 채 버텨가고 있는 작고 오래된 극단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설과 연극의 만남은 특이할 것 없는 조합이다. 하지만 그것이 매개되는 방식은 특이할 수 있다. 아프콤의 <배수아와 새벽의 극장>은 그런 특이한 조합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내게 흥미를 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위험할 수도 있었을 시도여서 이 극이 만들어지는 중간중간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나도 모르게 귀를 쫑긋 세우곤 했다. 대중적이지도 뚜렷한 서사도 없는 이 소설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게 될까?

 

 

 

 

 

중간 점검 때 낭송극 참여자들과 함께 모여 본 극에서 연기할 배우들을 만났다. 처음엔 여리여리하고 순한 느낌을 주는 두 여 학생이라고만 여겼는데, 대사를 읊는 순간 그이들의 인상이 확 바뀐다. 마치 불이 켜지듯, 그들 속에서 연기가 돋아났다. 여리여리한 여학생은 사라지고 세상을 겪을 만큼 겪고 알 만큼 아는 단단한 여자가 거기 서 있었다. 순간 나는 약간 소름이 돋았다. 그래, 이런 게 연극의 묘미야! 그것을 연극이 자기도 몰랐던 모습을 끌어낸다고 말한다면 뭔가 미진한 느낌이다. 원래 있던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옮겨가게 하는 것 같다. 그것은 오히려 신들림에 가깝다.

공연 날, 막이 오르고 두 배우가 보이자 모두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다. 흑백의 무대는 몰입도가 높았고 배우들의 움직임은 하나하나 선명하고 아슬아슬하였다. 위에서 내려온 흑백의 긴 끈에 매달린 두 몸. 이 두 몸이 천을 견뎌낼 수 있을까. 이렇게 배수아의 밤이 염세적이다는 밤과 벽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염세적이다가 아닌 염세적이다라는 선명한 이유가, 밤이 단순히 낮의 이분법적 대비에 그치지 않고 그 자체의 몸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제시된다. 검은색 전신 타이즈를 입은 두 배우는 밤의 몸이다. 하얀 천에 둘러싸인 밤, 검은 천에 둘러싸인 밤. 두 밤이 흑백의 천속에서 손짓하며, 혹은 몸부림치며 말하기 시작한다.

한 배우가 벽 속의 벽, 벽 속의 벽. 나는 오직 말을 가지지 않은 물고기의 언어로 말할 수 있을 뿐이다.”라고 말할 때 심장이 조여 오기 시작했다. 스타카토로 끊어지는 그 말들이 내게는 아우성처럼 들린다. 누군가 홀로 잠자리에 누워 속으로 중얼거리며 세상을 원망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계속되는 오해와 곡해들, 그 소통의 불가능성에 참담함을 느끼면서 좌절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그 다음은 뭘까? 그녀는 밤을 고향으로 삼게 된다.

 

 

나는 오랫동안 밤을 살았다.

그건 처음에는 분명 처형이었으나

곧 내 나라 내 몸이 되었다. . .

나는 영원한 등록을 마쳤다.

고향이 어디냐는 물음에 나는 밤이라고 대답했다.

.. .....

 

 

나의 고향이 밤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이 되기까지 그녀가 겪었을 배타시와 체념들이 떠올라 아득해진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 무수히 많은 벽을 접해야 했던 사람들, 체념을 반복하다 그 꺼풀이 내려앉아 끝내 그 벽을 어떤 식으로든 긍정하는 방식을 찾아낸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고 어쩌면 우리 모두가 그런 사람들이 아닐까 하는 확신이 들기 시작한다. 각자 저마다 사정은 다를 것이나, 우린 누구나 누군가를 만나길 열망하지만 막상 만나면 어김없이 벽을 만나는 경험을 한다. 사람이 벽이라고 느끼는 것은 꼭 사랑하지 않거나 잘 몰라서가 아니다. 너무나 잘 아는 부모도, 연인도 벽이 될 수 있다. 서로 무던하게 지내는 형제도, 조카도, 친구도 벽으로 느껴지곤 한다. 공유하는 것이 너무 많아서 그 벽이 더 두터워지기도 하고, 공유하는 것이 적어서 불투명한 벽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예전에 내가 생각하는 벽은 사회적인 제도와 인식의 문제였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가까이 부대끼고 사는 사람 사이의 벽이 더 부각되기 시작한다. 배수아가 특별한 사랑이 특별한 벽의 언어이다라고 말하는 건 그 극단적인 경우일 터이다. 이는 연극에서 두 배우가 무대의 보이지 않는 벽에 손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표현된다. 지그재그로 오가는 몸짓을 하며 당신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요라며 말할 때 참 탁월하게 잘 표현하였구나 싶었다.

우리는 어떻게 벽을 대해야 할까? 소설에서 수니는 벽의 언어를 터득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밤의 삶으로 옮겨왔다고. 연극에서 배우는 노끈에 자신을 동여맨다. 항상 행복한 낮을 살기를 허무하게 희망하기보다 오히려 밤을 온전히 살아내는 것이 더 좋을지 모른다. 밤은 단지 네거티브가 아님은 밤을 온전히 사는 자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로선 아직 그 경지를 다 더듬을 수 없다.

 

나는 오롯이 이 공연 프로젝트를 통하여 배수아를 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기획이 시작된 이래 배수아의 몇몇 소설을 읽게 되었고, 이 작가는 20~30대의 자의식 강한 도시 여성들이 겪는 부침의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때론 너무 냉소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그건 젊은 여성들이 충분히 보일 수 있는 반응들로 이해되기도 했다. 오히려 그런 냉소에조차 너그러울 수 없는 나는 생생한 삶의 느낌을 잃어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돌아보곤 했다. 낭송극의 참여자로 건네받은 쪽지에는 배수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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