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이에 경계가 없다면,

너를 만날 수도 없을꺼야.

 

 : 배수아의 새벽의 극장 리뷰

 

 

 

변정희

 

 

 

 동아대학교 석당홀은 고급 공연장인 채로 늙어버린 듯한 인상을 주었다. 아프꼼과의 그 숱한 만남 속에서도 가장 크고 가장 서늘한 장소였다. 지난해 12월 13일 금요일 저녁, 이곳에서 아프꼼과 극단 새벽이 공동 기획한 배수아와 새벽의 극장이 열렸다. 그것은 말과 이미지들로 쌓아올린 무대를 통해 우리에게 왔다. 단 하루 열렸다 닫히는, 지구상의 유일무이한 이 극장에서는 총 4개의 프로그램을 상연하였다. 말-이미지의 극장에서는 Werner Fritsch 감독의 <ATEM DES LAOTSE>을, 새벽의 극장에서는 <밤이 염세적이다>(원작: 배수아, 각색: 아프꼼의 권명아, 연출: 극단 새벽의 이성민, 출연: 장옥진, 정선욱)를, 목소리의 극장에서는 낭독 공연을, 정동의 극장에서는 <환을 켜다>를 만날 수 있었다.

 흰 천과 검은 천이 드리워진 무대 위에서, 어지럽게 배돌고 있는 글자들은 한때 배수아 작가의 말들이었으나 지금으로서는 아무 의미를 찾을 수가 없는 이미지이기도 하였다. 무대 위에서, 영상 속에서 이미지가 된 말들은, 우리 사이에 숱하게 주고받은 말들이라기보다 차마 주고받지 못한, 미처 대화가 되지 못한, 도저히 이해받지 못한, 너에게로 가 닿을 수 없는 그런 말들이었다. 그간 아프꼼의 독창적인 실험들이 ‘함께, 있는, 우리, 사이’에 숨겨진 텍스트들을 무수히 끄집어내었다면, 밤으로부터 시작한 이 새벽의 무대는 텍스트조차 되지 못한 무수한 말들을 통해 거꾸로 ‘우리 사이’를 비추었다.

몇 번의 극장이 열리고 닫히는 동안 말과 글자들은 이미지에서 사람의 몸으로, 목소리로, 다시 이미지로 돌고  돌았다. 사람의 몸을 타고 흐르는 글자들이 이런 말들을 내뱉고 있었다. “밤이 염세적이다.”, “밤이 무거운 신음을 토한다.” 과연 밤은, 실체를 알 수 없는 검은 피조물들의 시간. 저 글과 말과 이미지들이 경계 없이 쏟아져나오는 시간. 국적없는 모든 것들이 허용되는 시간. 밤이 점점 아늑해지기 시작하지만, 결국 침묵과 소란스러움으로 뒤엉켜 모든 것을 덮어버리고 말 것이므로, 염세적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허용하는 밤이 염세적이라면, 그렇다면 너는, 아침의 흰 빛에 눈이 멀어버리지 않을 자신은 있는가?

 밤과 아침,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선 극장 안에서, 나는 이미지를 겹치듯 안젤라 카터의 <서커스의 밤>을 떠올렸다. 날개달린 여인, 광대와 서커스, 거짓과 웃음과 혼돈의 검은 밤은 이윽고 시베리아의 대평원으로 무대로 옮겨가고, 흰 눈으로 뒤덮인 평원은 속속들이 밤이 뒤덮고 있던 것들을 지상 위에 전시하면서 날카로운 대조를 이끌어냈다. 살아있는 것들의 검은 밤(正)이 하얀 세상을 만나고 난 뒤(反)에 그것이 죽음이 될지, 새로운 세계를 경유하는 통로(合)가 될지 알 수는 없는 것이다.

 

 

 

 새벽은 흰 빛과 검은 빛이 충돌하는 시간이다. 그러나 흰 것이 종이요, 검은 것이 글자이듯, 그토록 ‘밤이 염세적’임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토록 염세적이었기에, 흰 빛을 만나기 시작한 새벽의 극장은 온갖 글자들을, 말들을 쏟아내었다. 흰 빛과 검은 빛이 부딪쳐서 글자가 되고 소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흰 빛과 검은 빛, 그 충돌과 갈등의 생산성!

 연극 <밤이 염세적이다>는 어둠 속에서 두 배우가 이렇게 외치는 말로 시작한다. “벽을 유심히 보아야 한다. 벽 말고는 다른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우리는 밤이 지나고 아침이 찾아오는 그러한 순차적인 시간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선택하고, 결정해야만 한다. 이 새벽에 밤을, 이윽고 다가올 아침을, 너를, 나를, 이해받지 못하는 나와 너와의 만남을 선택하고, 결정해야만 한다. 새벽은 새로운 벽이 아니던가? 저기 저 새-벽을 보라. 저 벽이야말로 너를 만나게 되는 바로 그 경계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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