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무엇을 알겠는가

아프콤 에세: 권명아 

 

  • 만일 내가 서울에서 계속 살았더라면 이 많은 이야기들을 나는 친구들에게 했을 것이다.....(중략)

    함께 말을 나눌 사람이 없던 나날 동안, 그러니까, 내가 '이름없는 나날'이라고 부르는 이 나날 동안 나는 혼자서

    먼먼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서울에서 살았던 나날 동안 외로운 저녁이면 함께 만나서 밥을 먹고 깔깔거리고 걱정 나누고, 했던

    서울 사는 육년 동안 만났던 그이들. 그이들이 있어서 좋았던 그 저녁을 위하여, 그 저녁을 위하여, 나는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잔을 올려야 하리라.

    허수경, <<길모퉁이의 중국식당>>, 중에서 

 

예니 에르펜베크의 <<그곳에 집이 있었을까>>의 한 인물은 긴 삶의 우여곡절 끝에 이렇게 되뇌인다.

"사람이 무엇을 알겠는가. 그의 발밑에서 판자 통행로의 널빤지가 가볍게 흔들리고, 그는 생각한다."

또 이렇게도 되뇌인다.

"몸을 돌리는 일은 그가 터득한 하나의 기술, 혹은 그를 터득해버린 기술이니, 사람이 무엇을 알겠는가. 똑바로 앞을 향해서 헤엄치든가 아니면 턴을 하든가 어느 쪽이든 수영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그날 밤 그는 함께 술을 마셨던 친구와, 농담처럼 시작하다가 정말로 강물로 뛰어들었고, 그 친구는 아직까지도 몸을 돌리지 않고 있다."

이제는 사라져버린, 동독에서 나고 자란 그는 대학 시험을 앞둔 어느날, 친구와 함께 서독으로 탈출하려고 강물에 뛰어들었다. 헤엄쳐서 서독으로 넘어가기 위해. 친구는 아직까지도 몸을 돌리지 않고, 강물 속에 있고, 그는 붙잡혀 감옥에 다녀온 후, 대학 시험에도 합격했으나,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노동자로 살아왔고, 그렇게 생을 마감하려 한다.

<<그곳에 집이 있었을까>>는 호숫가의 집이 주인공이다. 소설은 이 집을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일순간, 어느 국면들을 짧게 전한다. 그 짧음은 실은 아무 의미도 없다. 거기 '모든' 것이 있기에.

 

 

  • 하루는 길고 세상은 늙어가나,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은 같은 자리에 서있을 뿐이다. 한 명이 가면 한 명이 뒤를 이으면서,
  • 게오르크 뷔히너, <<보이체크>> 

소설은 뷔히너의 유명한 희곡의 한 구절로 시작된다.


<<그 곳에 집이 있었을까>>는 '그 집', 아니 그 집이 있던 장소인 호숫가의 기원인 빙하기부터 시작되어 흘러흘러 가는 사람, 삶, 운명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렇게 흘러 간다. 모든 것이.

그러나, 그 핵심에 놓인 것은 '역사'이기도 하다. 일차 세계 대전과 이차 세계대전을 지나면서 이 호숫가의 집은 폭력으로 얼룩진다. 그런 점에서 <<그곳에 집이 있었을까>>는 매우 특이한 '역사서사'이기도 하다.

하여 이 소설에서 삶과 사람의 인생은 어떤 점에서는 고였다가는 흘러가버리는 호수의 물처럼 혹은 똑바로 가던, 턴을 하던 결국 은 강물 속에서 헤엄치고 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인 것처럼, 흘러가버린다는 점에서 모두 덧없는 것이다.

모든 위대한 소설이 그러하듯이. 이 소설 역시 그런 덧없음 속에서 바로 삶의 의미를 길어올린다. 유한한 인간의 무한함.

이런 구절을 사랑한다.

"지금 그의 등 뒤에 놓인 호수, 끝이 보이는 그 호수 가운데서 끝없음을 느꼈듯이, 혼란의 소용돌이라는 지표를 뚫고 행복은 자라난다."

이런 덧없음의 유한성 속에서 깊은 무한성을 길어올리는 또다른 작품이 떠오른다. 아주아주 다른 이야기이지만.

 

 

  • 나는 다만 들려주고 싶다. 두 사람 사이에 생겨나는 한순간이 얼마나 아름답고 깊으며 또한 얼마나 복합적인가, 하는 것을.

 

 

막심 빌러

 

눈치 빠른 독자들은 알아차렸겠지만, 작가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 두 작품에 관심을 갖게된 중요한 이유는 실은 작가보다는 번역자 때문이다. 예니 예르펜베크의 <<그곳에 집이 있었을까>>는 배수아가 번역한 작품이고, 막심 빌러의 <<사랑을 위한 일곱 번의 시도>>는 허수경이 번역한 작품이다.

그러하니, 여기서 말하는 책들, 혹은 책에 관한 이야기는 그저 우연적인 연쇄고리에 의해 연결된 것일 뿐이다. 별다른 목적도, 이유도 없이 실은 배수아와 허수경의 글을 읽어나가며, 그저 읽고 있는 중이랄까.

아니 허수경의 <<길모퉁이 중국식당>>의 표현을 빌면 함께 말을 나눌 말 사람이 없던 그 시절 동안, 먼먼 그들에게 말을 건네는 외로운 저녁의 독백 같은 것일지 모르겠다. 그렇게 나는 그녀들에게 말을 걸며, 그런 의미로 이 책들을 따라간다.  

이름없는 시간이라 허수경이 불렀던 그런 시간, 그건 '나'의 이름 없음이 아니다. 내 이름을 불러줄 사람의 없음.

"명아야"

하고 불러줄 사람이 없으니, 바로 이름 없는 시간인 것이다.

이름없는 시간에 하여 말보다 글에 집착하게 되듯이, 그렇게, 글에, 글 속의 당신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배수아, 허수경.

이렇게.

 

  • 허수경, 그녀 자신의 경험이 많이 녹아있는 소설.
  • <<박하>>

<<사랑하기 위한 일곱 번의 시도>>의 옮긴이의 말에서 허수경은 이렇게 말한다.

 

살아가는 한 우리에게는 사랑의 순간이 있다. 막심 빌러의 <<사랑하기 위한 일곱번의 시도>>는 그런 이야기이다. 삶의 순간순간을 지나가는 사랑, 삶을 열어주는 사랑, 삶을 닫아버리는 사랑.

사랑하는 자들이여, 그대들에게 축복 있으라.

불우한 사랑의 역사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축복 있으라.

 

허수경을 빌어, 나도 기원한다.

당신들 모두에게 축복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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