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염세의 없음

 

 : 배수아의 새벽의 극장 리뷰

 

 

 

김비

 

 

 

  

 추운 날이었다. 나는 아마도 말해야 하는 말들을 손에 들고 있었을 것이다. '염세적'이라는 말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밤이 아닌 아침을 생각하고 있었다. 밤은 내게 익숙했고, 오히려 아침이 낯설었다. 내게 염세적이었던 것은 아마도 아침이었을 것이다.

 

 하필 맨 앞줄에 앉자, 두 개의 세계가 내 앞에 눈을 떴다. 하나는 바로 나의 눈앞에서 작지만 선명한 그림으로 나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고, 또 다른 하나는 그 너머에서 의미를 잃어버린 말들의 잔해에 의해 갈가리 찢긴 채로 벽 위에, 혹은 말 너머에서 내 앞에 흩어졌다. 두 개의 세계는 같은 것을 보여주고 같은 말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두 개의 세계 중 하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의 말을 듣고 있었다. 또 다른 하나를 지우고 망각하며. 소외시키고 소외되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마지막 유언처럼 한 글자 한 글자 정교하게 토해진 말들은 내 머리 위에 신음이거나 혹은 노래처럼 부유한다. 내가 보고 있는 하나뿐인 세계 속에 누군가 있다.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누군가가, 색깔을 잃어버린 세계가 스쳐 가듯 화면 속에 스며든다. 너무도 이질적이어서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던 말과 화면 속 세계가 기묘하게도 서로에게 다가간다. 말은 세계가 되고, 세계는 말이 되며 서로를 향해 허물어진다, 속도를 높인다. 어긋나거나 뒤틀리더라도 그것은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니다. 말이 소멸해버린 세계 속에도 말은 있을 것이며, 세계가 사라져버린 말 속에서도 세계는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조각난 말의 잔해들 속에서 알몸으로 우리 앞에 나온다. 서로 다른 몸으로 버려진 말 속에서 탄생한다. 그러나 그들을 맞이한 것은 벽이다. 벽으로 둘러싸인 세계다. 그들은 벽으로 둘러싸인 세계를 인식하며 벽 앞에 매달린다. 벽에게 말을 걸고 벽을 말하고 벽을 두드리며 벽을 향해 절규한다. 비명의 다른 이름인 말, 말을 절규한다. 그러나 벽은 꼼짝하지 않는다. 벽은 탄생하지 않았으며 그러므로 소멸되지 않는다. 그들처럼 우리를 두드리거나 우리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비명을 지르지도 않으며 우리들에게 매달리지도 않는다. 발버둥 치듯 이 세계의 벽을 뜨겁게 토해놓는 우리들에게, 벽은 그저 이렇게 말한다.

 

 '실례지만, 당신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벽에 맞서기 위해 하나가 된다. 나무가 되기도 하고, 밤이라는 고향을 지닌 올빼미가 되기도 한다. 날개를 펴지만, 그들은 어디로도 날아가지 못한다. 기껏해야 추처럼 앞 뒤로 오르내리고 있을 뿐, 의미 없는 웃음으로 제 자리를 돌며 자위하고 있을 뿐. 몸부림치듯 서로 다른 기호를 그리며 그들은 간절히 소통하고자 한다. 이해할 수 없음을 확인하며, 소통의 없음을 각인시키며 점점 목소리를 높인다. 서로 다른 기호로, 서로 다른 말들로, 그러나 조금도 다르지 않은 소통의 없으므로 그들은 소통한다. 소통하고 있음에도 그들은 다시 또 목소리를 높이고 서로가 이해할 수 없는 기호를 그리고, 또다시 똑같은 말을 토해놓는다. 간절히, 너무도 간절히 소통을 바라며. 겨우 간신히 '밤이 염세적'이라고 입을 모아 웅얼거리며.

 그럼에도 우리는 또다시 말할 수밖에 없다. 서로 다른 말들을 들고, 갈가리 분해된 문장들을 들고서 우리는 말을 말해야 하고 또다시 입을 벌려 비명을 닮은 소리들을 토해야 한다. 소통의 없음을, 사라진 세계를, 분해된 말들을. 서로 다른 목소리로 서로 다른 말들을 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렇게 반복되는 없음을 반복하며, 끝없이 그렇게 제 자리를 돌고 있다. 낙인처럼 누군가의 마음에 찍히는 말들, 흉터처럼 퍼렇게 멍들어 시간 속에 각인된 언어들.

 

 말의 남루한 몸을 들여다본 것만 같아 견딜 수 없는 슬픔과 우울이 밀려왔다. 입을 벌릴 때마다 염세로 뒤틀린 말들이 흐느적거리며 기어 나올 것만 같은 공포에 나는 사로잡히고 있었다. 나의 말이 부끄럽다. 아니, 나의 말이 자랑스럽다. 나의 말이 산다. 나의 말이 죽는다. 나의 말이 다가간다, 되돌아온다. 나의 말이 소외시킨다, 소외된다. 점점 더 소리를 높이며 다급해진 나의 말이 빨라진다, 차라리 비명이 된다. '밤이 염세적이다'고 말하지도 못한 채 뜨거워진 것들을 집어삼키며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오는데, 내 머리 위 어디선가 건들거리며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새처럼 울고 있었다.

 

 '실례지만, 당신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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