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중한 봄

-서울 시립 청소녀 건강센터 <나는 봄>의 백재희 선생님과의 만남

 

 

 

장수희, 정선욱(래인커머)

 

 

 

 

 

 

 

 

   아프꼼은 여성인권지원센터 살림과 함께 한국의 여성 활동가/연구자와의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살림에서는 성매매특별법 시행 10주년을 맞이하여 이에 대한 인터뷰를 준비하였고, 아프꼼에서는 여성 연구자/활동가로 활약하고 있는 여성들을 만나 선배들의 경험을 듣고 싶었다. 이 기록들은 여성 연구자/ 활동가 선배들과의 만남의 기록이며, 아프꼼과 살림의 네트워킹과 움직임의 기록이다.

 

   1112일의 일본 워크샵 이후, 아프꼼은 서울에 가서 살림의 변정희 선생님과 정경숙 소장님과 함께 <나는 봄>을 찾았다. 마당의 흡연 공간에서 자유롭게 담배를 피고 있는 소녀들-이것이 <나는 봄>에 들어서면서 처음으로 본 것이었다. ‘청소녀 건강센터라 뭔가 엄격하고 병원같은 분위기일 것이라는 예상은 여지없이 깨어졌다. , 자유로운 곳이구나, 그리고 대화를 할 수 있는 곳이구나 하는 느낌적인 느낌!

 

   서울특별시청소녀건강센터 <나는 봄>은 가출과 성매매 위기에 노출된 청소녀들이 스스로의 몸을 돌보고 상처난 마음을 치유할 수 있도록 의료지원, 심리지원, 교육지원을 하고 있는 곳이었다. <나는 봄>지원은 구체적으로 산부인과, 치과, 가정의학과 등의 진료와 정신보건 상담을 할 수 있는 의료지원, 가출 중 이곳을 찾는 청소녀들에게 음식나눔을 하거나, 생일상 이벤트를 하는 등 청소녀들의 기운을 북돋을 수 있게 해 주는 공간이었다.

 

 

청소녀 지원의 현장

 

   우리가 인터뷰 한 공간 바로 옆에는 자활학교가 있어서 많은 청소녀들이 들락날락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청소녀들이 창문사이로, 혹은 문을 살짝 열고 백재희 선생님께 인사하거나 손을 흔들면 선생님도 같이 손을 흔들고 그 아이의 일정을 묻곤하셨다. 그러면서 이렇게 안해주면 삐져요.” 하고 웃는다.

백재희 선생님은 소녀들과 같이 지내면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나는 봄>에 하나씩하나씩 구비하고 만들어 나가는 형식으로 일해왔다고 한다. 제일 먼저 신경썼던 것은 음식과 질병. 보통의 감기나 배앓이 같은 것은 편의점에서도 약을 살 수 있지만, 소녀들의 입장에서 치과나 산부인과 진료 같은 것은 돈도 많이 들고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장소였다. 물론 기존의 병원과 연계하여 소녀들을 지원할 수도 있었지만, 그만큼 소녀들도 연계된 병원이라는 공간의 눈치를 봐야했다. 그러면 소녀들은 자유롭게 오지 못하게 될 경우도 많고, 자신의 이야기나 상황에 대해서 마음을 열고 털어놓지 않을 때도 많다고 했다. 소녀들은 조금 더 친해지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도 별로 놀라지 않겠다라고 생각되어야만 자기의 이야기를 한다. 마음을 열고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 소녀들은 선생님들에게 종종 엄마라고 부르기도 한다. 심하게 어리광을 부리기도 하고, 생일상을 차려주는 행사 때는 진짜 엄마가 해줬던 음식을 차려달라고 요구하기도 한다고 했다. 어느 정도 친해진 뒤에 엄마의 모습을 한 선생님이 니 내한테 엄마 같다고 그랬제, 세상에 어느 엄마가 딸이 밖에서 자는 거를 좋아하겠냐.’라고 말할 때도 있다고 한다.

   백재희 선생님은 해가 갈수록 <나는 봄>을 들락날락 거리는 소녀들의 연령이 낮아지는 것을 보면서 이들보다 더 어린 친구들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소녀들이 이곳을 마음껏 마음껏 드나들고, 편하게 와서 밥도 먹고, 밥도 싸가기도하고, 진료도 받고, 성교육이나 교육도 받는 곳이 되기를 바란다고 하셨다.

 

 

성매매피해자에 대한 지원

 

   막달레나 상담소, 용감한 여성 연구소에서 연구와 활동을 병행해 오신 백재희 선생님. 막달레나 상담소에서 만난 용산 성매매집결지의 언니들과 했던 <판도라>라는 사진작업을 소개해 주셨다. 다큐멘터리 <꿈꾸는 카메라>에서처럼 마음대로 남기고싶은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주세요라고 했을 때, 언니들은 아무렇게나 마음껏 사진을 찍어왔고, 사진을 하나하나 설명해 가면서 같이 모여서 봤다고 한다. 우리들의 눈에 보여진 것들이, 당사자들에게는 어떤 의미였을까? 백재희 선생님은 그 사진 하나하나에 얽힌 의미가 너무 거대해서 그 작업은 절대 다 정리할 수 없을 것 같은 과제라고 하신다.

   백재희 선생님은 용산 성매매집결지가 사라질 즈음의 당사자들은 용산이라는 장소에 대한 감정이 수몰지역 사람들과 비슷하지 않았을까라고 말씀하셨다. 당시 용산집결지가 사라지고 재개발 되면서 가장 큰 성매매 업주의 집 마당에서 다함께 고별미사를 드렸다고 한다. 그리고 모두 다 같은 임대 아파트를 신청했고, 운좋게도 한 동에 우루루 모두 당첨되었다고 한다.

   성매매 당사자들은 집결지 내에서만 생활해왔기 때문에, 혼자서 이주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혼자가 되는게 너무 무서워서 이주 할 생각을 하지도 못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이사 간 낯선 동네가 두려워서 언니들은 다 같이 손잡고 지하철을 타고 용산으로 나들이를 매일같이 나갔다고 한다. 그 공간과 분리되기 위해서 걸리는 시간들을 그렇게 보냈던 것 같다. 당사자들은 용산과 분리가 되고 또 새로운 공간에 적응하기 위해서 애쓰기도 했다. 언니들은 지역성당에서 새로운 사회생활을 만들어나가기도 하고, 친구들에게 나 교수친구 있다.’ 하고 자랑하기도 하면서 각자의 삶을 살아나갔다고 한다. 매년 만나서 술먹고 놀고 하지만 그런걸 준비하면서 언니들이 소속감도 느끼고, 싸움도 하고 놀기도 하고 한다고 얘기해주셨다.

 

 

연구자와 활동가

 

   용감한 여성 연구소는 막달레나 공동체를 위해 만들어진 곳이다. 이 연구소의 제 일원칙이 연구위원이 안나오는 것에 대해서 뭐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백재희 선생님의 말에 따르면 날라리처럼 살고싶은 사람들이 날라리처럼 모인 곳이라서 무조건 연구소에 출근해야 하는 강압 보다는 하고 싶을 때, 할 수 있을 때, 하고싶은 만큼만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한다고 했다.

   첫 책은 실무자가 글을 가져야 의사소통 할 수 있는 무기를 가질 수 있다는 마음으로 우리가 이런 사람들을 만나서, 이런 실수를 해서, 내 생각이 이렇게나 깨졌다.’라는 실패의 기록들을 적어나간 것이라고 한다. 그 책이 바로 『용감한 여성들(늑대를 타고 달리는)』이다. 책을 만드는 도중에는 글들 중에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글에 다 드러나서, 당시 같이 글을 쓰고 연구했던 어린 활동가들과 글을 함께 쓰고 읽으며 격론을 나누었다고 한다. 실무자들은 활동가인 우리가 왜 글까지 써야 하느냐는 반발도 했었지만, 연구자가 아닌 실무자, 활동가가 가진 자신만의 언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힘겹고 어렵지만 진행했던 것이 이 책을 만드는 작업이었다고 회상하였다. 백재희 선생님은 그것은 활동가가 연구자를 미워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었나 싶다고 하신다. 연구자들은 현장 활동가들의 자료들을 빼먹어가는 사람들, 돌아오지 않는 화살 같은 존재로 받아들여졌던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현장의 활동과 연구가 서로 소통되기 위한 것, 그래서 활동가의 자신의 언어를 갖기 위한 작업, 노력이 바로 글쓰기작업이었고, 연구였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당사자들이 원하는 이야기, 하고싶어하는 이야기들을 모아내는 사업을 하고 싶다고 하신다. 활동가들이 언어를 갖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것처럼, 당사자들도 그 언어를 쟁취하기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을 것이다.

 

 

   백재희 선생님과의 인터뷰에서 기억나는 한마디는 내가 잘 쉬어야만 상대편을 잘 대해주고, 배려해주고, 지지해 줄 수 있다는 말이었다. 여러 행정적인 일들과 인력부족으로 소모되기 쉬운 연구자/활동가들에게 정말 필요한 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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