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장치를 발명하자’ 연속 좌담 2회

 


 

 

NPO와 공생 카페
: 지역 생협으로 발명한 ‘동아시아 공생 대학’

 

 

권명아

 

 

   이번 좌담은 일본 구마모토 가쿠엔 대학의 신명직 선생님에 대한 인터뷰로 이루어집니다. ‘운동을 하는 것’과 ‘운동을 사는 것’에 대해 이즈음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운동이 삶을 소진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사는 방법이 될 수 없을까? 이 좌담은 기본적으로 노동운동가에서 연구자로, 다시 일본으로 늦은 나이에 이주하여 ‘한국계 규슈인’으로 정착하기까지 신명직 선생님의 생애사를 따라가면서, 운동 방식의 변화를 되새겨보고자 했습니다. 생애사의 운동사를 연결해서 생각해보고 싶었습니다. 또 대학과 지역사회, NPO법인을 연결하여 새롭게 인문장치를 발명해온 과정을 한국 상황과 비교해서 들어보았습니다. 은퇴 후의 계획을 묻는 필자에게 동아시아 공생을 위한 엄청난 계획을 말해주시는 신명직 선생님 이야기를 들으며, ‘운동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며 미소를 짓기도 했습니다. 단지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이 삶이 될 때, 지치지 않는 ‘기쁨’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게 아닐까? 모두가, 즐겁고 신나하던 2015년 구마모토 가쿠엔 대학의 동아시아 공생 영화제 풍경은 그 증거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1980년대 부천 노동법률상담소에서, 
‘난장이는 없다’는 ‘난시(亂視)’ 시절을 거쳐
동아시아의 ‘가리봉 공단’을 만나기까지

 


권명아: 10월에 동아시아 공생 영화제가 성대하게 끝났습니다. 임흥순 감독의 <위로공단>의 일본 첫 개봉이기도 했는데요. 저도 참여했습니다만, 구마모토 가쿠엔 대학의 동아시아 공생 영화제에서 <위로공단>을 본다는 것이 참 상징적이고 의미심장했습니다. 또 <위로공단>의 서사가 마치 신명직 선생님이 걸어온 지난 생애사와도 겹쳐져서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좀 소개 겸 감회를 말씀해주세요.

 

신명직: 영화 <위로공단>을 작은 프리뷰 화면으로 보면서 좀 뭉클했습니다. 80년대 가리봉 그 시절 그 사람들 얼굴에서 세월의 흔적을 발견했는데, 돌이켜보니 저 역시 예외가 아니더라구요. 훌쩍 30년 넘게 흐른 세월들을 임흥순 감독님이 잘 포착해 주셨어요. 하지만 영화 <위로공단>이 그때 그 시절을 단지 회고하는 영화였다면 아마도 우리 영화제에서 상영하지 않았을 거예요. 한반도 국경을 넘어 동아시아의 가리봉으로 공단을 확장시켰다는 점에서 너무 반가웠어요.

   사실 1992년 무렵, 그러니까 87년 노동자들의 대투쟁 이후 임금도 많이 오르고,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노동조합도 많이 생겨나면서 제 자신이 무척 초라해 보인 적이 있어요. 그 때 노동법률상담소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고생고생해서 함께 노조를 만든 간부들이 어려운 일이 생기면 저희들 대신 인권변호사를 찾아가더라구요. 처음엔 무척 섭섭했는데, 생각해 보니 그게 바로 우리가 바라던 세상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 이상 우리와 같은 존재가 필요하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는 건 박수치고 환영할만한 일이었던 거죠. 사실 노동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도 70년대 말에 나온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으면서 난장이의 벗 ‘지섭’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거든요. 이젠 떠날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때 전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이제 난장이는 없다.’

   하지만 ‘이제 난장이는 없다’고 했던 제 말이 틀렸다는 것은, 제가 대학원에 들어가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습니다. 보다 싼 임금을 찾아 중국과 베트남 등지로 빠져나간 한국계 기업들이 그곳에서 어떤 일들을 벌이고 있는지 알게 되었거든요. 문제는 ‘국경’이었습니다. 한국이라는 ‘국경’을 들어내고, 경계를 동남아시아까지 확장시키자, 너무도 많은 ‘난장이’들이 ‘전태일’들이 한꺼번에 뚜벅뚜벅 걸어왔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네요.

   영화 <위로공단> 속 캄보디아 이야기는, 한국 국경 너머 존재하고 있는 동아시아의 ‘난장이’를 찾아 떠난 저의 궤적과 일치하는 것이어서 무척 반가웠습니다. 물론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한국의 ‘난장이’ 역시 사라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난장이①=가리봉 ‘외딴방’ 여공에서, 난장이②=가리봉 이주노동자와 난장이③=비정규직 노동자로 형태만 바뀌었을 뿐이었던 것이지요. 87년 대 투쟁 이후 오른 임금 인상분이 글로벌 자본의 집요한 공격으로 다시 원위치되고 말았다는 것. 결국 ‘난장이가 없다’는 저의 말은 ‘착각’이거나 ‘거짓’이었던 거죠. 영화 <위로공단>은 바로 저와 같은 난시자들을 향한 조용한 외침으로 다가왔습니다.

 

 

 

‘NPO법인 동아시아 공생 문화 센터’ 6년,
본국으로 돌아간 네팔과 방글라데시 등지의 노동자와
한국, 일본을 연결하기 위한 ‘한국계 규슈인’의 여정.
대학이라는 현장과 이주노동, 공정무역을 어떻게 연결할까?

 

 

권명아 : 먼저 한국 독자들을 위해서 선생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기본적인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일본에서는 NPO법인 형태로 대학, 시민사회, 지역이 연결되는 ‘운동체’ 형식이 활발하게 진행되는 것 같습니다. NPO법인은 어떤 형태인가요? 설립 과정, 국가나 대학, 지역사회의 지원이나 연계 방식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또 NPO법인과 대학, 지역의 ‘그린코프’ 같은 협동조합을 연결하는 방식은 일본사회에서 일반적인가요? 아니면 선생님 나름의 경험의 결과인가요? 한국은 최근 대학 위기 속에서 ‘협동조합’ 형식으로 대안 대학이나 협동체를 만드는 것이 이제 시작 단계입니다. 협동조합 운동과 NPO 형식은 좀 다른 것 같은데요. 이에 대해서도 선생님 의견은 어떠신지요?

신명직: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은 ‘한국어능력시험’ 장소를 구마모토에도 유치하는 것이었어요. 규슈에서 후쿠오카에 있는 규슈 대학 다음으로 저희 대학에서 한국어능력시험을 치를 수 있게 되었지요. 그 다음으로 케이팝과 한국어 스키트(촌극)를 경연 형식으로 치루는 한국어대회를 시작했고, 이어서 동아시아 공생 영화제와 동아시아 공생 커피 사업을 새로 시작하면서 NPO법인을 만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사업을 공식화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죠. NPO는 일종의 사회적 기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법인화된 NGO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예산, 결산 상황을 지역사회에 지속적으로 보고해야 할 의무가 따르죠. 일정 규모가 되지 않을 경우 좀 번거로운 게 사실입니다. 일본엔 생활협동조합은 있지만, 최근 한국에서 많이 생겨나고 있는 협동조합 개념은 그다지 활용되지 않고, NPO유형의 법인체가 최근 크라우딩 펀드를 기반으로 발전해 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나온 10년을 돌이켜보면 가장 발전한 것이 안정성과 지속성인데, 여전히 불안한 것 역시 안정성과 지속성일 것 같습니다. ① 동아시아 공생 커피를 지역생협에 공급하고, ② 동아시아 공생 카페를 오픈해 지역의 장애인 단체에서 쿠키를 구입, 판매하는 등 지역사회와의 연계를 이루고, 관련 교육과정을 개발할 뿐 아니라, ③ 동아시아 공생 영화제와 한국어대회 학생 스태프 역시 적극적이고 안정적인 자체 시스템을 구축하긴 했지만, 이 모든 것을 연결시킬 전문 인력 없이는 유지, 발전되기 힘들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전문 인력의 양성과 이들의 경제적 자립이 가능할 만큼의 파이를 키워내야 비로소 안정적인 재생산 시스템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국과 일본 이외에 최근 다른 동아시아 지역과의 연계에 힘을 집중하고 있는 곳은 라오스입니다. 라오스 볼라벤 고원의 자이커피 생두를 수입해서 로스팅한 ‘라오스의 향기’를 구마모토 지역사회와 대학에 공급하고 있는데요. 학생들과 함께 라오스 볼라벤 고원에서의 현지 워크숍, 한국의 ‘아름다운 커피’ 관련 대학생 그룹과의 공동 워크숍 등이 앞으로 계획하고 있는 과제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라오스 커피마을과의 교류가 어느 정도 안정적인 궤도에 오르면, 러시아 연해주 고려인들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는 대규모 유기농 콩농장, 지금까지 함께 오랜 여정을 함께해 온 네팔의 커피마을 등과도 지속적으로 공생 네트워킹을 계속해나갈 예정입니다.

   제가 ‘NPO법인 동아시아 공생 문화 센터’를 만든 지도 벌써 6년이 지났네요. 글로벌한 신자유주의 시스템을 넘어선 대안의 시스템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만들어 가야할지를 고민하던 끝에, ‘한국계 규슈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이런 것 아닐까 싶었습니다. 저희 NPO가 하는 일 중 하나는 ‘공정무역 커피 사업’을 하는 것입니다. 95년 대학원에 들어가자마자 접한 파키스탄의 전태일 ‘이크발마시’(아동노동을 세계에 고발하다 죽음을 당한)를 찾아 꽤 오랫동안 네팔을 방문해 왔는데, 아동노동 문제 역시 글로벌한 경제 시스템-양극화(격차)의 한 형태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죠. 그 때 발견한 것이 공정무역이었습니다. 거대한 글로벌의 바다에 돌을 던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달리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서 이주노동운동을 하다 네팔과 방글라데시 등지로 돌아간 이주노동자들이 대안의 시스템을 구축해갈 중요한 동력이 될 수 없을까 생각하면서, 한국의 이주노동자 단체와 한국과 일본의 공정무역 단체의 도움을 받아 네팔의 커피 생두를 수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직접 신용장도 작성하고 세관 검사까지 다 받은 뒤, 차를 몰고 후쿠오카에서 구마모토로 생두를 실어 나르던 어느 날 하루 해가 저무는 고속도로 휴게실에서 하늘을 쳐다보다 문득 이건 너무 원시적이다 싶었습니다. 비슷한 고민을 해온 사람들과의 연계가 필요하다고 느꼈죠. 수소문 끝에 지역 생협에 저희 공정무역 커피를 소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히말라야의 향기’(네팔 커피)에서 ‘라오스의 향기’(라오스 볼라벤 고원 커피)로 중심축을 옮겨가고 있는 중입니다. 공정무역도 사업인지라, 역시 ‘규모의 경제’가 필요한 곳이었습니다. 직접무역 방식에서 일본의 ATJ(Alter Trade Japan)를 통해 커피 생두를 공급받는 간접무역 방식으로 형식을 바꾸었습니다. 최소한 컨테이너 규모로 생두를 수입하지 않으면 단가가 비싸져서 ‘공정’의 정신 역시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저의 ‘현장’이 대학이라는 것. 현장에 기반을 두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학을 변화시킬 뿐 아니라, 대학과 지역사회 사이에 글로벌한 시스템을 네트워킹할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 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까 싶었죠.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동아시아 공생 북카페’입니다. 아직은 걸음마 단계지만 대학과 지역사회를 연결시킬 단단한 사회적 기업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NPO법인 동아시아 공생 문화 센터’는 구마모토 가쿠엔 대학을 기반으로 ‘동아
시아 공생 영화제’를 지속해왔고,최근에는 동아시아 공생 북카페를 학교 내에
열었다. 이 일들은 모두 학생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뤄지고 있다. 
공생 문화 센터와 영화제, 공정무역 카페 등이 학생들을 어떻게 변화시켰을까?
또 이런 경험과 활동을 대학제도 내에 정착시킬 방안은?

 

 

권명아 : 초기의 동아시아 공생 영화제에 비해 금년 영화제 때는 학생들 참여도 훨씬 많아졌고, 동아시아 공생 카페 역시 학생들의 자원봉사로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학생들을 어떻게 변화시켰나요? 또 대학에서의 이른바 일반적인 교육 방식과 어떤 다른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하시나요?

 

신명직: 저는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내는 일이 신나고 즐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비장한 목소리와 결의에 찬 눈빛도 때론 중요하겠지만, 그건 그리 오래 가지도 여럿이 함께 하지도 못하는 것 같아요. 최근 일본 젊은이들이 자기목소리를 내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되는데, 이들이 목소리를 내는 방식 역시 이전 세대들의 그것과 달리, 진지하지만 흥겹고 경쾌하다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저희 학생들도 동아시아 공생 영화제나 동아시아 공생 카페를 하면서 모두들 즐거워하는 것 같아요. 물론 처음엔 다들 소극적이었죠. 하지만 적극적으로 참여해 나름의 성과를 내자 학생들의 눈빛이 바뀌기 시작했어요. 크고 작건 간에 일하는 과정이 즐거울 때, 또 자신들이 한 일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박수를 받을 때, 힘들어도 이겨내고 또 다른 성과를 만들어 내는 것 같았습니다.

   특히 동아시아 공생 카페를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운영하면서, 사람(교육과 배치), 물건(물품), 돈(회계)을 관리할 시스템을 정착시켰는데, 이를 통해 학생들은 카페 운영을 안정적이고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가고 있습니다. 물론 학생들의 자발성이 늘 일정한 것이 아니어서, 자발성의 진폭이 큰 만큼 시스템을 보다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더 많은 고민과 연구가 필요한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이를테면 시스템을 학제화하여, 학부를 넘어선 학제간 실습(혹은 인턴) 커리큘럼 같은 것을 만들어, 실습이 가미된 학과간 공통 옴니버스 수업을 제도화함으로써 지속가능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유럽의 옥스퍼드 대학과 옥스팜, 혹은 페어트레이드 대학 같은 것들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이런 실험들이 위기에 처한 대학 교육과 인문학 교육에 어떤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을까? 
구마모토 지역 주민과 구마모토 가쿠엔 대학은 서로 어떻게 연결될 수 있었나? 
그리고 한국학 교육이 신나고 재미있는 실험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권명아: 일본에서 한국어 교육이나, 한국학은 점점 더 위기에 봉착하고 있고, 대학제도 내에서 매우 협소한역할에 할당되어 있다고 생각됩니다. 또 교수자의 경우도 ‘한국어 교육’만으로는 매우 제한된 역할을 하게 되어서 교육자로서의 보람을 찾는 것이 힘들다고 말하는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선생님이 하시는 일들은 기존의 일본 대학에서의 ‘한국학 교육’이나 ‘한국어 교육’의 제한된 역할을 넘어서려는 노력이자 결과라는 생각도 듭니다. 한국의 대학에서 인문학 역시 사실 일본에서의 ‘한국학 교육’처럼 제한된 역할에 한정될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선생님의 경험에 비춰보자면 동아시아 공생 영화제나 공정무역 카페, NPO법인과 지역 생협과의 연계 활동이 이런 대학의 위기를 어느 정도 타개했다고 평가하시는지요?

신명직: 일본 학생들이 한국에 관심을 갖고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배우고자 한다는 것 자체가 무척 소중한 지점 아닐까 싶습니다. 언어와 문화의 ‘국경’을 넘어서고자 하는 의지를 지닌 학생들인 거죠. 제가 학생들과 함께 추진해가고 있는 동아시아 공생 영화제나 공정무역 카페는 그러한 학생들의 의지를 조금 더 확장시키고 심화시킨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일본에서 한국에 관심을 갖고 있는 학생들의 70~80퍼센트는 케이팝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케이팝에 대한 관심은 예전보다 그 규모가 작아졌지만 심도는 훨씬 더 깊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어를 배울 기회가 없는 고등학교 시절 독학으로 한국어를 체득한 학생들을 발견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교육 환경을 만드는 것, 곧 케이팝을 함께 즐기고 나눌 수 있는 교육 환경을 만들어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싶었죠. 지금까지 8년에 걸쳐 ‘함께 말해 봐요 한국어대회’를 개최해 왔습니다. 한류 붐이 한창이던 시절의 여세를 몰아, 다소 주춤하긴 했지만 여전히 매년 200여 명이 출전하고 500여 명이 함께하는 ‘축제’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한국어 촌극과 케이팝을 중심으로 한 축제에 한국 드라마를 사랑하는 지역 주민들이 함께 참여하여 보여주는 열정도 학생들에게 큰 자극이 되고 있습니다.

   초기에는 한국어대회 기간과 영화제 기간에 한정해서 공정무역 카페를 준비・운영해왔는데, 이를 통해 한국만이 아닌 더 넓은 세계로 시야를 넓힐 수 있게 되었죠. 그렇게 8년여를 준비한 끝에, 학교 안에 학생들의 자원봉사로 운영되는 상설 공정무역 카페가 만들어질 수 있었습니다.

   학생들의 능동성을 유발시킬 다양한 실험이 절실한 사회적 요구와 맞아떨어질 때, 대학의 위기 혹은 인문학의 위기는 넘어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출산과 고령화, 에너지 대량 소비와 원전, 경제성장률의 둔화, 글로벌화로 인한 양극화(격차) 등은 대학사회에 그 돌파구를 요청하고 있고, 다양한 인문학적 상상력과 실험을 통해 이를 돌파할 대안을 제시할 경우 대학은 물론 지역사회 역시 크게 환영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구마모토에서의 10년여의 실험은 이제 실험 단계를 거쳐 제도화에로의 진입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의지와 전망 모두 그리 어두운 편은 아닌 듯합니다.

 

 

 

노동운동에서, 일본 정착까지 
“초심을 잃지 않되 새로운 방식으로 자신의 현장을 바꾸어가기”

 

 

권명아: 젊은 시절 노동운동을 하시다가 대학원에 늦게 진학하시고, 일본으로 가서 정착을 하셨습니다. 사실 일본에 유학을 하신 것도 아니신데 일본 대학에 직업을 갖고 정착하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이 과정에 대해서 좀 알고 싶습니다.

신명직: 아마도 ‘한류’가 저를 일본에 정착시키지 않았나 싶습니다. 제가 일본에 와서 정착을 고민하던 시점이 한류가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하던 1차 시기와 일치하기 때문이죠. 2002년 한일월드컵, 2004년 <겨울연가> 현상이 저를 일본에 정착하게 만든 배경인 것 같습니다. 사실 <겨울연가> 현상은, 근대 이후 일본문화가 대륙으로 건너갔던 것과는 거꾸로 대륙 쪽의 문화가 일본으로 건너온 최초의 현상 아닐까 싶습니다. 대중문화가 정치, 외교 혹은 경제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실감했죠. 이 ‘한류’ 현상을 어떤 방향으로 몰고 가느냐 하는 것이 저에게 주어진 과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한국이 아닌 일본에서의 한류는 ‘동아시아의 공생’과 무관하지 않죠. 구마모토에 정착한 이후 한류를 동아시아의 공생과 관련된 새로운 시스템의 동력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전념해 온 것 같네요.

   제가 좋아하는 웹툰 <송곳>이 최근 드라마로 만들어져 방송되고 있더군요. 1990년대 초에 그 유효기간이 끝났다고 생각했던 노동상담소를 2010년대 브라운관에서 다시 만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습니다. 하지만 2010년대의 노동상담소는 좀 다른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대중문화와 디지털 혹은 글로벌한 로컬사회와 보다 긴밀하게 결합된 새로운 방식이 필요한 게 아닐지요. 그러고 보면 지금하고 있는 일들이 예전 그러니까 젊은 시절 스스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초심을 잃지 않되 새로운 방식으로 자신의 현장을 바꾸어 가려했던 것 같습니다.

 

 

 

뿌리내릴 지역사회로서의 구마모토 발견
한류에서 시작된 동아시아 공생의 꿈
한국어대회에서 공생 영화제로, 다시 꿈꾸는 다큐영화 제작

 

 

권명아: 처음 일본에 가셨을 때는 다큐멘터리 작업에 관심을 가지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셨을 때랑, 구마모토에 이주해서, 대학을 기반으로 이주노동과 지역사회를 고민하면서 동아시아 공생 영화제를 만들면서, 이어지면서도 달라진 지점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변화와 연속은 어떤 것들일까요? 그 변화 속에 도쿄와 구마모토라는 지역적 차이는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신명직: 제가 도쿄에 있을 때는 뿌리내릴 지역사회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구마모토라는 곳에 와서야 비로소 뿌리내릴 지역사회를 갖게 되었죠. 하지만 다큐멘터리 영상 작업에의 꿈은 아직도 유효합니다. 지금까지의 성과를 바탕으로 새로운 다큐멘터리 한 편을 만들어 보는 게, 저의 남은 대학생활 10년 동안의 꿈이기도 하죠. 동아시아 공생 영화제를 하면서 다큐멘터리 제작을 향한 제 꿈은 점점 더 커진 것 같기도 합니다. 대단한 다큐멘터리를 만들려 하기보다 제 주변의 일상을 조금씩 담아나가려 하는데요. 의미 있는 다큐멘터리가 되기 위해선 보다 의미 있는 일상을 살아가야겠죠.

 

 

 

이주노동과 동아시아 공생을 로컬에서 접목시킨다는 것의 의미
대학이 지역사회와 만나는 길목에 위치한 동아시아 공생 카페
동아시아 공생 마을과 거리 만들기, 그리고 공정무역 마르셰(시장)

 

 

권명아: 선생님의 생애사의 변화와 이른바 ‘운동 방식’의 변화가 흥미롭게연결되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요. 청년기의 노동운동, 일본 이주, 도쿄에서의 다큐멘터리 운동과 구마모토에서의 이주노동의 관점에서 동아시아 공생 평화 문화운동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생애사의 변화와 관련이 깊은 것 같습니다. 그런 의식을 하셨는지요? 이제 어떤 점에서는 ‘은퇴’를 준비하실 나이이기도 합니다. 일본사회의 뉴커머로서 이후의 삶과 지역을 연결하는 어떤 또 다른 ‘운동의 형식’을 고민하고 계신지요?

신명직: 제가 학생들과 함께 하는 공정무역 카페, 지역 생협과 함께 하는 공정무역 커피 사업은 여전히 영세한 규모를 면치 못하고 있지만, 한국의 ‘아름다운 커피’나 스페인의 ‘몬드라곤’처럼 사회에 영향력을 미칠 만큼의 규모로 성장하길 희망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점’에서 ‘선’으로 변모되어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동아시아와 규슈를 포괄하는 작지만 큰 ‘면’을 이루어가는 꿈을 늘 꾸고 있죠. 네팔이나 라오스의 커피마을뿐 아니라 구마모토를 비롯한 규슈에서의 새로운 고용-노동의 창출로 이어지길 바라고 있습니다. 기존의 ‘노동’이 아닌 새로운 ‘노동’을 향한 실험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학생들과 함께 하는 공정무역 프로젝트는 ‘이주노동’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초기 네팔 커피 생두를 수입하던 시절, 저에게 가장 큰 힘을 준 것은 한국에서 이주노동 운동을 하다 귀국한 네팔 청년들이었습니다. 네팔 현지에서 새로운 지역 만들기 운동을 하는 이들은 동아시아를 새롭게 만들어갈 중요한 동력-에이전트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실 한국의 노동 문제에서 이주노동 문제로 넘어온 것은 저의 존재와도 무관하지 않죠. 제 자신이 전문직 이주노동자이기 때문입니다. 1국의 노동 문제에서 글로벌한 노동 문제로 트랜스내셔널화했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런데 동아시아의 이주노동 문제와 오랫동안 접하면서 느끼게 된 것이지만, 이주해 온 노동자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이주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보다 중요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아시아 커피마을 사람들뿐 아니라, 유기농 콩, 혹은 유기농 면화 등을 생산하는 마을 사람들이 이주하지 않고도 자립할 수 있는 마을을 만들어가는 게 더 중요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거죠. 그런 의미에서 노동과 이주노동, 동아시아 공생 프로젝트는 어디에 방점을 찍느냐의 차이일 뿐, 별개의 분리된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종종 도쿄나 서울의 우뚝 선 대기업 건물 앞에 서게 될 경우, 주눅이 드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지금 하고 있는 구멍가게가 과연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 같은 거죠. 하여 남은 10년 동안 지금의 파이를 키우는 일에 보다 전념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동아시아 공생 마을 만들기’ 프로젝트도 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 지역사회 공정무역 단체와 함께 추진하고 있는 ‘공정무역 마르셰(시장)’, 대학 공정무역 카페를 거점으로 확장시켜 갈 ‘동아시아 공생 거리’ 만들기 사업 등이 이에 해당될 것 같네요. 지역사회와 보다 밀착한 프로젝트를 통해, 가능성을 현실로 바꾸어 갈 생각입니다. 어디까지 가능할진 모르지만 가는 데까지 가 봐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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