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불어오는 곳

 

 

권명아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2월27일, 도쿄의 ‘이레귤러 리듬 어사일럼’에서 좌담회가 열렸다. 몇번이나 찾아갔던 길이지만, 여전히 또 길을 헤매었다. 그날 좌담회에서는 “인문 장치를 발명하자”라는 주제로 한국과 일본의 연구자들이 다양한 고민과 모색을 함께 나누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이야기 도중 문득 누군가 한탄 조로 조용하게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라고 되묻던 장면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3월15일에는 오사카의 ‘시어터 세븐’에서 <구럼비, 바람이 분다>(조성봉 감독) 상영회가 열렸다. 헤노코와 요나구니 섬과 강정을 서로 연결하여 논의하는 토론 시간이 흥미로웠다. 한 청중은 헤노코와 강정을 논하며, “엄청난 공권력의 힘 앞에서 춤추고, 노래하고 맨몸으로 싸우는 일이 때론 무기력하게 느껴진다”며 “과연 이런 싸움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도쿄와 오사카의 자그마한 공간에 모인 사람들은 불안한 미래를 위해서든, 평화를 위해서든 함께 손을 잡고 걸어 나아가야 한다는 공감을 나누었다. 유명 초청 인사도 거창한 기자회견도 없이, 작은 자리에 함께한 사람들의 만남은 이른바 ‘한-일 관계’라는 외교적 수사의 맥락에서는 아무 의미 없는 일인지 모른다. 또 만남과 대화와 연구를 해나가도 도무지 변할 것 같지 않은 엄혹한 현실 앞에서 이런 자리는 그저 무의미한 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계속 시도해도 제자리로 돌아오는 느낌, 무엇을 해도 결국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다시 떨어져 버리는 악순환에 대한 공포는 불안한 미래 앞에 선 모든 이들이 껴안고 있는 정동이다. 그런 상태를 벗어날 수 있는 해결책은 없지만, 적어도 그런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만나서 함께 걸어 나아가는 것인지 모르겠다.

 

 

   첨단기술의 지도로도 도무지 찾을 수 없던 장소들을 찾아 며칠, 몇년을 헤매던 시간 속에서 문득 길 찾기에 대한 오랜 비유를 떠올리곤 했다. 길이 끝난 곳에서 다시 길을 만들어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밀고 나아가는 일이라는 오래된 비유법 말이다. 누구도 길의 끝을 보지 못했지만, 먼저 걸어간 자취가 있어 길이 끝난 곳에서 다시 길을 만들어나간다. 인류라는 이름은 이렇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어온 발걸음의 총합으로 얻어진 이름이다. 인간을 역사적 존재라고 하는 건 이런 뜻이다. 역사적 존재로서 인간은 앞서 걸어 나아간 이들로부터 무언가를 물려받기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일 수 없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 몰려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삶이 몰역사적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 투쟁이란 그 누구도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내몰리지 않게 만들기 위한, 존재를 내건 싸움이다. 역사 투쟁이 분과학문의 몫이나 과거사 논쟁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도 이런 연유이다.

 

 

   가령 <구럼비, 바람이 분다>에서 구럼비에 부는 바람은 자연사의 순환이나 인간의 역사로 환원되지 않는 그런 ‘역사’를 상기시킨다. 온몸으로 맞서도 결코 무너질 것 같지 않던 저 거대한 힘들도 언젠가 저 바람에 무너지고, 또 다른 세계가 열릴 것이다. 그 세계를 내가 살아 만나지 못할지라도 지금, 여기에 부는 바람을 느끼는 이 순간만큼은 우리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감지한다. 그렇게 구럼비에도 도쿄와 오사카의 지도로도 찾을 수 없던 그 자리들에도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2015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해방’ 혹은 ‘종전’ 70주년을 기념하는 잔치들이 떠들썩하다. 몰역사적인 기념식장의 야단법석은 내버려두고, 죽은 시인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한국도 일본도 말고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한번 가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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