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긴 어디 나는 누구>

지하도서실에서 밤을 새고 허기를 채우러 집으로 왔습니다. 마감은 코앞이나, 책 뚜껑은 이제 열었으니 밤을 한 번 지새는 걸로는 택도 없겠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 내내 깨어있는 것은 저만이 아니었지요. 나 외에도 모두가 깨어있었다는 것이 참 안쓰럽기도 하고, 그래도 혼자 깨어있지 않아서 이유없이 조금 힘이 납니다. <연구모임>이라는 것은 사실 이런 것인 듯도 합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시간에, 그래도 누군가 같이 있구나, 하는 것.

요 며칠 간은 12시 전에 헤어진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저야 체력이 좋다지만 (끈기와 집중력은 반비례) 다른 세 사람은 저러다 쓰러지는 건 아니겠지..? 하는 걱정도 간혹 듭니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이 지킴이님들은 '서로가' 괜찮을지 노심초사하고 있습니다. "서로가 괜찮을지 노심초사 한다." 활자로 쓰면, 당혹스러우리만치 평이하고 그저 착한 한 문장이 되어버리는 이 문장. 하지만 또 어딘가의 지킴이님들은 아마 알아차리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서로가 괜찮을지 걱정하고 추스린다는 것은 참으로 지난한 시간을 거쳐야 겨우 한 문장 써볼 수 있는 것인 듯합니다. 피로조차 챙길 수 없는 정신에도, 내가 멘붕하면 저이도 멘붕하겠구나, 내가 엎어지면 저이도 엎어지겠구나, 그럼 우리는 다같이 망하는구나ㅠㅠ....라고 머리가 알아도 몸이 끝내 배반하는 이 '함께-있음'의 피로를 다스리기까지, 아니 조금 다스려보기 시작하는 것도 이제 겨우 다시 시작인 듯합니다. 정동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음에도 무섭도록 그 전염력이 강하여, 너무나 쉽게 전혀 다른 것으로 모두가 휩싸여버릴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다스려보기 시작한다, 는 말도 실은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려운 말을 저는 적습니다. 이 것이 기쁩니다.

 

사람이 공간을 장소로 만드는 것일진대, 이 <장소>는 무엇이란 말이더냐

 

물론, 이는 당연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국경을 넘는 것이 어디 쉽던가요. 하지만 이번에는 선배-선생님들의 빈자리가 정말 크군요. 대체 예전엔 워크샵을 어떻게 했던 거야?! 라는 충격과 공포의 나날입니다.

지역적 한계를 넘고, 삶의 반경을 넘어, 국경을 넘어. 우리는 왜 그렇게 순례를 하였던 것일까. 작은 실수에도 기절할 듯 놀라고 송구해하며, 왜 그렇게 헤매고 다니는 것일까. 우리와 함께 할, 또 다른 얼굴의 친구를 찾기 위한 시도는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스스로에게도 질문을 해봅니다. 국경을 넘어서 삶의 반경이 아주 넓어졌을까? 저는 이 팀에서 <국경을 넘는> 일에 가장 많이 참여하였습니다만, 사실 여전히 대답은 쉽지 않습니다. 사실은 평생 비행기 한 번 타볼 일이 없이 살아오다가, 여러분들이 손을 잡아주어 뚜릿뚜릿하며 국경을 넘게 되었으니, 실로 진일보한 것이지요. 그럼에도 정말로 국경을 넘게 되는 것은 절박한 부딪힘과 스스로가 완전히 깨졌을 때, 가능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도든, 중앙이든 무엇이든. 지역을 넘어서 국경을 향한다고 할 때, 그 말 안에는 어떻게든 (중앙)이 들어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강고한 벽이 저에게는 언제나 물음표로 남아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일단 서울에 가본 일이 열손가락에 꼽을 정도이기도 하구요...)

이런 생각은 지난 밤에 읽은 책 두 권과 함께 찾아온 것이기도 합니다. 제가 관심을 갖는 주제인 <20대 담론>을 다루고 있는 두 권의 책에서 발화하는 '20대'들은 거의 대부분이 서울의 명문대이거나, 또는 서울의 갖가지 문화판/집회판 속에서 키워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외에도 모으면 열권 안되게 읽은 것 같은데, 심지어는 교지편집부 기자들이 <20대의 삶>을 주제로 자신의 삶을 소소히 쓰는 글을 묶은 책은, 전원이 서울대학교 학생이고, 우리도 똑같이 취업걱정하고 힘들다는 내용입니다. 뭐라고, 대체 뭐라고 해야 하는 걸까요. 그놈의 중앙이 뭐길래.

촛불판을 통해 키워져서 이까지 왔다고, 더 많은 사람들이 연대와 광장의 즐거움을 통해서 정치에 참여하게 되면 좋겠다고 가슴뿌듯하게 말하는 것을 보며, 저 역시도 부산에서도 크게 일어났던 2008년 촛불시위를 통해 여러가지 행동들에 참여하게 되었음에도 반가움보다는 거제도에서 한 열몇명 촛불 들고 있다가 동네 사람들에게 우스개가 되었던 고향친구가 생각나서 울컥하기부터 하는 것은 제가 거제시에 대한 애향심이 넘치기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미선이효순이 촛불광장, 노무현탄핵촛불광장, 쇠고기반대촛불광장, 그 많은 광장들. 자부심에 넘치는 그 광장의 사람들은 한 번도 광장을 가져보지 못한 채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요? (그래도 조본좌님의 책에선 거의 유일하게, <20대 세대론> 안에서의 지방과 중앙의 격차를 언급해주고 있죠..)

연구모임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갑자기 읽은 책 이야기로 흘러가버려서 수습이 안되네요.. 아 갑자기 뒷목이 땡기는 것은 내가 밤을 샜기 때문일 거야.

매일매일의 연구모임에서 일이든 관계든 공부든 뭐든 사유로 남기자고 시작하는 것인데, 첫번째부터 취지랑 어긋나버려서;;; 그냥 공황상태라서 그러려니 해주세요...

 

덧) 인터뷰어가 집이 잘사냐고 묻자, 우리집은 청담동이긴 한데 외곽이라 중산층이에요...라거나 아버지 약사고 어머니 교사신데 그냥 중산층이죠...라고 하질 않나, (중간계급욕망론이 요기잉네^^) '우연히' 좋은 학벌을 얻어 (진중권나 박민규나 등등 왜 명문대 가놓고 꼭 컨닝해서 우연히 간 거 뿐이라고 말할까 옛날부터 이런 말 하는 사람들 제일 짜증났다)회당 20만원짜리 과외를 했지만 자기는 과외학생에게 집회참가권유도 하고 저소득층 봉사활동도 한다고 하는 등등의 진보적 인터뷰이 미친놈들을 보면서, 나는 스스로를 부르주아라고 외쳐야겠다고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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