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 발화와 표현의 자유

 

 

권명아

 

 

 

 

 

 

 

   롯데의 외국인 투수 쉐인 유먼이 인종차별적인 혐오발화(發話)를 비판하는 의미로 '말조심' '누군가 듣고 있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티셔츠를 만들었다고 몇몇 신문이 전한 바 있다. 서울의 한 음식점에서는 '에볼라 바이러스 때문에 당분간 아프리카 사람을 받지 않습니다'라는 문구를 거리에 내걸었다. 세계적 모델 에릭 오몬디는 이에 대해 '인종주의는 그만(Stop Racism)'이라는 제목의 비판 글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리기도 하였다. 어떤 기사에서는 인종차별이 한국만 심각한 건 아닌데, 이런 사태가 마치 한국만의 문제인 것처럼 과장하면 안 된다고 논평을 하기도 했다.
 


피해자를 공격하고 소수자를 증오하는 사회
 
   오히려 근본적 문제는 한국 사회에는 이런 식의 언어 표현이나 행동이 혐오 발화나 증오 행동과 같은 특수한 형태의 폭력이라는 것에 대한 인식이 거의 부재하다는 점에 있다. 즉 자신이 하는 말과 행동이 폭력이라는 인식이 없고, 그 행동에 대한 문제제기 역시 폭력 비판이라는 차원에서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역으로 이런 식의 폭력이 마치 표현의 자유이기라도 한 것처럼 전도되는 사례도 빈번하게 나타난다.  
 
   혐오 발화는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지역차별주의와 같이 이미 구성된 사회적 배제와 적대를 토대로 형성되는 상징적 폭력이다. 특히 혐오 발화는 사회적 약자가 지닌 '차이'를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다. 한국인들이 가장 잘 알고 있는 혐오 발화는 '조센징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외치는 일본 극우파의 발언이다. 일본 내에서 이런 혐오 발화와 증오 행동을 이끄는 단체의 이름은 '재일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재특회)'이다. 일본 내의 소수 민족인 '조선인'의 권리 요구가 재특회에게는 특혜로 간주된다. 재특회는 조선인 학교 주위를 돌며 "조선학교를 일본에서 내쫓아라" "스파이의 자식들"이라고 확성기로 외치며 시위를 하면서 이를 표현의 자유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본 법원은 이에 대해 이들의 행위가 "(일본도 비준한)인종차별철폐조약에서 규정한 인종차별에 해당하므로 위법"이라며 시위를 금지하고 배상 명령 판결을 내렸다. 일본 사회에서는 혐오 발화에 대항하는 교육과 시민운동이 대학과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확대되고 있는 추세이다. 

   이 지점에서 이 글을 읽는 많은 독자의 분노 에너지가 급상승하고 공감 지수도 높아질 것으로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혐오 발화를 일본 문제로 환원해 버리면 참 속이 편하니 말이다. 그러나 이 경우는 어떤가. 단식 투쟁 중 병원에 이송된 김영오(유민이 아버지) 씨에 대한 악의적 논란은 전형적인 혐오 발화의 특성을 보여 준다. 기소권과 수사권이 있는 특별법을 요구하며 단식 중인 김 씨의 진정성이 의심된다면서 인터넷을 중심으로 퍼진 글들에는 여러 형태의 공격이 담겨 있다. 지역차별(호남출신 공격), 계급차별이 뒤섞인 이 혐오 발화 사례에는 가족 형태에 대한 한국 사회의 전형적 편견까지 가세하고 있다. 이혼한 아버지의 자격과 진정성을 비판하는 글들은 법적 결속, 이성애적 결속 등 이른바 '정상 가족' 이념에 근거한 차별 의식을 전형적으로 반복한다. 이 차별적 의식은 법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가족이나, 이른바 '정상가족'의 범위에 들지 못하는 다양한 가족을 '부적절하고 자격이 없는 것들'로 배제하는 논리를 함축한다. 


폭력성에 대한 법적 규제와 교육, 사회관심 필요 

   일본의 경우 혐오 발화와 증오 행동 단체에 대해 법적 처벌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혐오 발화의 폭력성에 대해 무관심하고 무책임한 한국 사회에도 이러한 법적 책임을 묻는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다. 그러나 혐오 발화와 증오 행동의 폭력성과 책임을 묻는 일은 법의 심판만으로 완수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적 규제와 교육, 사회적인 관심의 확대는 혐오 발화의 위험성을 줄이는 가장 최소한의 필요조건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최소 조건에 대해 논하기에는 한국 사회의 실상은 참으로 비참하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공감하기는커녕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 일이 인간으로서의 근본적 윤리에 위배되는 일이라는 '최소한의 윤리'조차 부재한 것이 한국 사회의 현실이다. 혐오 발화에는 증오를 에너지로 소수자를 불태워 버렸던 파시즘의 망령이 일렁인다는 점에서 혐오 발화가 넘쳐 흘러나는 한국 사회는 역사의 심판대에 올라 있다 할 것이다.

 

 

 

로봇과 살고 있어요

 

 

권명아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위해 아들은 보좌관 로봇을 보낸다. 보좌관 로봇은 아버지의 식사와 청소를 담당할 뿐 아니라, 건강관리를 맡아서 해 준다. 아침 식사를 차려 놓고 아버지를 깨우고, 운동 좀 하라고 잔소리도 한다. 잔소리 좀 그만하라는 아버지와 잔소리 듣기 싫으면 말 좀 들으라는 로봇의 대화는 부자관계의 대화와 다르지 않다. 영화 '로봇 앤 프랭크'(제이크 슈레이어 감독, 2012)에서 보여 주는, 로봇과 함께 사는 시대는 이제 더 이상 먼 미래의 일이 아니다.
 

청소 로봇과 '가족 로봇'
 
   미국의 한 연구팀이 세계 최초 '가족 로봇'을 출시했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과는 다소 거리가 먼 이야기로 느껴졌던 로봇과 함께 사는 삶이 현실이 되고 있다. 국내에서는 로봇 청소기 정도가 일상에서 만나는 로봇의 모습이고, 로봇 청소기조차 일반인들이 사용하기에는 아직은 가격이 비싼 편이다. 한국의 일반인들 인식 속에서 로봇은 로봇 청소기처럼 아직은 생활을 돕는 기계일 뿐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삶에서 로봇이 도구적 기계가 아닌 '가족'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물론 이 '가족 로봇'이 실제로 어느 정도의 기술적 진전을 이뤄냈는지는 아직은 확인이 어렵다. 다만 현재까지 제공된 정보를 토대로 볼 때 흥미로운 것은 '가족 로봇'이 인간을 위한 기능적 보조나 기술적 도구성보다 인간과의 정서적, 사회적, 인지적 관계 맺음을 주요한 기능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로봇과 함께 사는 미래, 혹은 인간과 로봇의 경계가 없어지는 미래에 대해서는 아주 오래 전부터 비관론과 낙관론이 팽팽하게 대립해 왔다. 따라서 이 글에서 그런 비관과 낙관의 어떤 입장을 굳이 다시 설명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페미니스트 생물학자 대너 해러웨이는 인간과 로봇의 경계를 설정하는 것 자체가 이미 무의미하다고까지 말한다. 즉 그녀에 따르면 우리는 이미 '사이보그'이기 때문이다. 사이보그라면 공상과학 영화나 만화에 나오는 무수한 캐릭터들을 떠올릴 사람이 많을 것이다. 사이보그는 신체의 일부나 전체를 로봇이나 기계로 대체한 존재이다.

   많은 공상과학 영화에서 사이보그가 위험한 존재로 자주 등장하는 것은 사이보그가 유기체로서의 인간의 완전성에 대한 믿음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우리의 신체 일부를 비유기체로 대체하며 살고 있다. 철이나 플라스틱으로 이뤄진 안경, 입안의 인공보철, 관절 속의 보철물들까지 우리 인간 신체는 이미 비유기체와 함께, 비유기체를 통해 구축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유기체인 인간이 비유기체인 존재들(로봇, 기계적 보충물 등)과 함께 사는 시대는 이미 도래해 있는 것이다.

   물론 '사이보그로서의 우리'는 아직은 기계나 비유기체를 인간 신체의 작동을 위한 보충물이나 도구로서 사용하고 있다. 기계가 인간의 친구가 되거나 가족이 되는 것은 여전히 공상과학적 상상이거나, 과도한 기술 낙관주의로 간주될 수도 있을 것이다. 기계와 인간, 테크놀로지와 휴머니즘 사이에는 넘기 어려운 경계가 여전히 설정되어 있다. 

인간, 사이보그, 로봇 

   인간이 오랫동안 인간을 닮은 로봇을 동경하면서도 두려워해 온 이중적 욕망의 구조는 이러한 인간의 경계, 테크놀로지의 경계와도 관련이 깊다. 이러한 논의들은 '포스트 휴머니즘'이라고 불리는 일련의 학문 경향들에서 천착하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반면 로봇 공학이나 사이버네틱스와 같은 학문들은 점점 더 휴머니즘적 주제들, 즉 감정, 사회적 관계, 인지적 연결 등의 문제에 보다 깊게 천착하고 있다. '가족 로봇'의 개발자가 "기술을 인간화(humanize)하자"고 제안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기술은 공학이 아니라, 인문의 영역에 도달한다. 고도기술 사회에서 '나는 누구인가' '누구와 함께 살 것인가'라는 가장 고전적인 인간적, 사회적 질문이 도래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게 로봇과 인간 사이, 휴머니즘과 테크놀로지 사이, 기술 공학과 인문학 사이, 미래적 상상력과 현재적 기술 발전 사이의 경계는 이미 무너지고, 새로운 흐름이 오늘 여기에 도래해 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떠신가? 아직도 자신이 '휴먼'이라는 데에 자부심을 느끼시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아마 과거에서 온 사람일지도 모른다.

 

 

 

 

 

 

 

 

 

 

청룡동 - 나무들이 살아요

 

  

 

 

 

 

金 飛

 

 

 

 

 

 

 

 

 

 

 

   어차피 일방적인 약속이었다. 그리움은 오직 나 혼자만의 감정이었고, 너무 많은 것들이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으니 말이다. 슬픔이나 안타까움 앞에 담담한 우리를 비관적이라 말하지 않고 현실적이라고 말하게 된 것은, 여기 이 시대가 가르친 생존의 방식이기도 할 테고 어느새 여기까지 와버린 우리들의 퇴화인지도 모른다. 그때의 내 기다림 이후 몇 분이 둘 중 무엇이든, 나는 뒤돌아보거나 기웃거리지 않고 예정된 길을 따라 마을로 향했다.

 

   오늘 내가 목적지로 정했던 곳은 청룡동의 상마마을이었다. 부산의 입구인 금정구의 청룡동은 쉽게 말해 범어사를 중심으로, 범어사역에서 금정산 쪽으로 이어진 제법 광범위한 지역을 이른다. 이웃한 노포동 혹은 남산동은 고속버스터미널이나 외국어대학교의 분교가 위치해 있어 그 이름이 익히 알려졌지만, 실제로 청룡동은 부산시민들에게도 익숙지 않은 이름이라고 한다. 매일 지나치며 가까운 곳에 있음에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자리하지 못 했던 청룡동이란 이름은, 우리들의 바깥이 물리적인 거리나 지역 차에 의한 것이 아니라 반복해서 호출하고 기억하는 마음 씀에 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변함없이 이번에도 나는 청룡동의 가장 외곽에 자리한 마을을 점찍어두었고, 그렇게 혼자서 그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상마마을은 금정산 자락에 위치한 부락으로서, 범어사 바로 아래에 있다. 대부분의 관광객이나 등산객들의 시선이 범어사혹은 금정산에 머물러 있으리란 것을 알고 있기에, 나는 그들의 관심 바깥에 있는 부락의 주민들과 마을 정경이 어떤 모습일지 자못 설레었다.

   버스는 범어사를 지나 얼마 가지 않은 내리막 위에 나를 내려놓았다. 다음 정류장이 하마마을이라고 했으니 마을이 위아래로 나뉘어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는데, 그래서 버스에서 내려 이정표를 찾을 수 없었지만 나는 망설임 없이 언덕 위쪽으로 거슬러 올랐다. 겨우 몇 분 남짓 걸음을 떼자, 산속으로 향하는 상마마을이라는 이정표는 몇 개의 암자 이름과 뒤엉켜 도로 위에 불쑥 나타났다. 화살표를 따라 조금 가파른 언덕을 오르니, 산자락에 위치한 마을답게 들어서는 입구 양 옆에 우거진 나무들이 예사롭지 않았다. 나무 둥치에 압류딱지 같은 식당 간판이 붙어있긴 했지만, 그 너머에 소담스레 자리하고 있을 마을 풍경이 나는 더욱 궁금해졌다.

 

 

 

 

 

 

 

 

 

   그러나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버렸다. 식당 간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거슬러 올랐지만, 뒤이어 다른 간판 하나가 또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손님들을 끄는 간판이 아닌 마을을 안내하는 도로명 주소 표지판에 눈을 두면서 걸음을 옮겼지만, 이내 또 다른 간판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어쩔 수 없이 간판을 따라 올라가니, 외제차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거대한 주차장이 나타났고 그 너머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냄새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골목은 그 식당 앞에서 뭉텅 잘려있었다.

   하는 수 없이 갔던 길을 되짚어 내려오다가 더 깊숙한 곳으로 방향을 트니, 길 끄트머리엔 여지없이 또 다른 식당이 거대한 철문의 입을 벌리고 있었다. 아무리 두리번거리며 주민들이 사는 집들을 찾아보아도 식당이 아닌 건물은 찾을 수가 없었다.

 

   길을 잘못 들었구나 싶었다. 왔던 길을 다시 거슬러가면서도 내 생각은 그뿐이었다. 다시 큰 길로 나오다 보니 잘 생긴 나무 둥치마다,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작은 골짜기마다 식당의 평상들이 한자리씩 차지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이 곧 그곳에 사는 주민이고 그것이 곧 마을의 풍경임을 알고 있었지만, 산자락에 고즈넉하게 자리한 평화로운 마을을 만나고 싶은 간절함은 그래서 더욱 짙어지기만 했다. 큰 길까지 나와 나는 길을 따라 다시 더 위쪽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개구진 아이들처럼 여기저기 나무 위에 매달린 간판들을 피하지 않고서, 눈앞에 나를 이끄는 길만을 생각하며 차분히 내 걸음만 세었다.

 

   그러나 계속해서 뒤엉킨 간판들은 내 앞 길을 막아섰고, 사람이라곤 조화(造花)처럼 화려한 색으로 친친 감은 등산객들이 전부였다. 골목을 끝까지 올라갔지만, 거대한 철문을 드리운 암자 하나가 길 끄트머리에 자리하고 있을 뿐 어디에도 내가 상상했던 마을의 풍경은 만날 수가 없었다. 식당들 사이에 오래된 주택 서너 채가 보이긴 했지만, 손님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간판들 사이에서 그건 마을의 주인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닮은 낯선 외지인처럼 보였다.

 

 

 

 

 

 

 

 

 

   마을 꼭대기 암자 앞에서 나는 한참 동안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분명 휴대폰을 들어 사진을 찍기는 했는데, 무엇을 담았는지 도통 기억이 나질 않았다. 암자 앞에 쪼그리고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니 간판이 없는 사진이 거의 없었다. 나무에 매달려 있거나 멀리 지붕 너머에 우뚝 솟아 있거나, 그게 아니라면 마을과 어울리지 않는 고급차의 뒤꽁무니가 삐죽 나와 있어서 마을이 아니라 상가 뒷골목을 담은 것만 같았다. 내가 잘못 찾은 걸까, 애초부터 나는 오지 말아야 할 곳에 와 있는 걸까. 더 이상 이어지지 않은 길 위에서, 나는 한참을 멀뚱히 섰다. 그런 나를 놀리듯 어느 식당에서 통속적인 대중가요 가락이 흥얼거리며 쏟아져 나왔다.

 

   그대 없이는 못 살아

   나 혼자서는 못 살아

   헤어져서는 못 살아

   떠나가면 못 살아

 

   외지인임이 분명한 누군가의 추임새가 흥겨운데, 산자락에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를 듣고 있으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누가 떠나고 누가 남았을까, 왜 떠났고 또 왜 떠나지 않았을까. 금정산 자락을 들썩이며 울리는 노랫소리는 맴을 돌듯 계속 이어지는데, 나는 흥겨운 가락을 들으면서도 자꾸 어깨가 무너졌고 다리가 풀렸다. 어느새 우리의 즐거움은 이웃을 잃고 여기 이 마을은 언제 주민을 잃었던 걸까.

 

 

 

 

 

 

 

 

 

   다시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여전히 간판들은 사진 속 눈엣가시 같았는데, 문득 간판에게 몸을 내어준 나무들이 보였다. 그저 잘생겼다고만 생각했는데, 간판에 몸을 붙들려놓고도 어쩌면 그리도 풍채들이 좋으신지. 패이고 꺾이며 철사줄을 꽁꽁 둘러매고도 하늘을 향해 뻗은 가지들은 어쩜 그렇게 씩씩한지.

 

 

 

 

 

 

 

 

   떠나가고 돌아온 것은 애초부터 없었구나. 사라진 것도 잃어버린 것도 아니었구나. 그제야 나는 눈을 들어 다시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곧 꽃을 피우고 잎을 늘어뜨릴 나무들은 마을 곳곳에 우람하게 자리한 채,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누구든 무엇이든 떠나든 돌아오든 돌아오지 않든, 허약한 기다림마저 지워버리고, 또 한 해를, 그렇게 몇 십 년을, 어쩌면 몇 백 년을.

 

   더 이상 길이 없는 끄트머리에서 나는 암자 너머를 올려보았다. 수백 번의 겨울을 지나며 다시 부활하고 또 살아났을 산자락의 주인들이, 빼곡히 어깨를 걸고서 나를 내려보고 있었다. 겹겹이 나를 둘러싼 채, 따스해진 봄바람을 내 두 볼에 휘휘 불면서. 주인의 너른 품을 활짝 펼치며, 누구든 오시라 우리는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정겨움으로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반기면서.

 

 

 

 

 

 

 

 

 

 

   인사라도 하듯 나는 그제야 산자락을 향해 활짝 웃었다.

   사람이 없다고 속상해하던 마음 따위 슬그머니 지워버렸다.

결국 그날 나는 아무도 만나지 못했는데, 마을을 내려오는 걸음은 충분히 가벼웠다. 너무 많은 주민들의 환대라도 받은 것처럼 명치 아래가 훈훈했다. 기다린 것들은 오지 않았고 떠나간 것들은 사라져버린 그곳에서, 나는 제일 융숭한 대접이라도 받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그곳엔,

   나무들이 산다.

 

 

 

사진: iPhone 4S © 김비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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