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장치를 발명하자! - 비정규직 대학구성원 좌담회 안내>

 

 

연구모임 <아프콤>과 계간 <<문화과학>>이 2015년 2월 27일 도쿄 이레귤러 어사일럼에서 서울, 부산, 일본의 비정규직 대학구성원들과 <인문장치를 발명하자!> 연속 좌담회를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일시: 2015년 2월 27일 금요일 오후 2시

 

장소: 도쿄 <이레귤러 어사일럼>

 

주관/주최: 연구모임 <아프콤> / 계간 <<문화과학>>

 

문의: affcom11@gmail.com

 

 

 

대학의 안과 바깥을 넘나들며 살아가는 비정규직 대학구성원들의 위기, 연구자로서의 삶에 대한 이야기들로 구성될 이번 좌담회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10 : 시랑리 - 등 뒤에 타오르는 빛 

 

 

 

金 飛

 

 

 

 

 

 

 

 

 

   비가 갠 하늘은 시리고 서늘했다. 그토록 짙은 파랑은 아름답다고 말하는 수밖에 없을 듯한데, 내겐 모든 또렷한 것들이 그저 나를 겨냥한 것만 같았다. 흐릿하고 모호한 것들은 물러서라, 처연하고 우울한 것들에 사로잡힌 생각들은 집어치우라. 무작정 웃어라, 열광하라. 저 하늘의 순리마저 지상의 생명들에게 청청한 축제를 명하노니, 우리들의 책무는 그 아름다움을 마음껏 향유해야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러나 나는 몸서리치도록 투명한 풍경 앞에 말을 잃는다. 아름다운 것들을 향해 경탄하는 그들 뒤로 몸을 숨긴다. 그 모든 것들을 등지고 돌아서니, 또 다시 바다가 보고 싶어졌다. 위기의 순간마다 모성을 부르짖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습성인지, 나는 또 다시 그렇게 나도 모르게 바다를 부르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훼손되지 않은 온전한 바다를 만나기 위해, 나는 부산의 제일 끄트머리인 기장으로 향했다. 기장은 1914년에는 동래에, 1973년에는 양산에, 그리고 다시 기장이라는 이름을 얻으며 지금의 기장군이 되었다고 한다. 위쪽으로는 울산에, 서쪽으로는 양산에, 그리고 남쪽으로는 금정구에 맞닿아있는 기장군은, 갑화양곡(甲火良谷)이라 하여 원래 이름도 변두리마을, 혹은 큰 마을로 불리었다고 전해진다. 그 중에 기장읍의 시랑리로 향한 것은 온전히 축축하게 젖어만 있던 나를 (‘사랑이라는 말과도 닮은) ‘시랑으로라도 위로해주고 싶은 알량한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양산에서 버스를 타고 보니, 내가 가야할 길은 부산 해운대를 거쳐 다시 기장군 쪽으로 올라가는 노선이었다. 기장군은 양산 바로 옆에 위치해 있으니 그저 동쪽으로 가서 아래로 조금만 내려가면 될 듯했지만, 그렇게 갈 수 있는 버스 노선은 있지도 않을 뿐더러 있더라도 시간을 맞추어 일일이 갈아타며 갈 수도 없었다. 자동차를 몰고 갔다면 50여분 남짓 될 거리를, 하는 수 없이 나는 두 시간 반 넘게 걸려 양산에서 부산 해운대 쪽으로 갔다가 다시 해운대에서 송정을 지나 기장 쪽으로 올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가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가 닿을 수 없는 길이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마음으로 가 닿는 거리와 물리적으로 가능한 거리 사이의 간극은 언제나 그렇게 크고 넓기만 했다.

 

   그렇게 먼 길을 돌아가다 보니, 시랑리에 도착했을 때엔 이미 하늘에 저녁 기운이 무럭무럭 번지고 있었다. 길게 늘어지는 그림자 덕분에 마을의 정경은 더욱 조용하고 고즈넉하기만 했다. 엄마의 품에 안기듯 나는 마을 한 복판에 뛰어들었다. 앙상한 가지에 매달린 감들은 저녁 빛 때문에 더욱 붉었고 어느 집 마당에 높이 솟은 솟대는 당당하게 바다 쪽을 넘겨보고 있었다. 뒷짐을 진 어르신이 골목을 거슬러 올라갔고 언제나 그랬듯이 나는 안녕하세요.’ 인사했다. 그저 까딱 .’하고 그녀가 대답했던 것뿐이었는데, 어쩐지 마음은 훨씬 더 가벼워졌다. 이미 겨울 바람으로 돌변해버린 저녁의 기운은 쌀쌀했는데, 내 안에서 바스락거리며 무언가 말라가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바다 쪽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경쾌했다. 골목 여기저기에 자리한 조용한 집들을 사진 속에 담으며, 사람이 보이지 않아도 인적이 사라지고 없어도 괜찮은 정경을 기억하며, 나는 시간 속에 버려진 나를 쓰다듬고 있었다. 예상했던 것처럼 바다는 방파제로 가로막혔고 여기저기 작은 어선들이 몸을 기댄 채 쉬고 있었지만, 나는 그래도 그것이 사람들에 의해 점령당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위해 내어준 바다의 몸짓임을 알 것만 같았다. 바닷가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계신 노인분들을 다시 만났고, 사진을 찍어도 되겠느냐 청했다가 손사래를 받았지만 그래도 나는 속상하지는 않았다. 정중히 그 분들께 인사를 드리고 나와 다시 바다 쪽으로 몸을 돌렸는데, 저만치 포구 끄트머리에 할머님 한 분이 앉아 계셨다. 어스름 저녁 빛에 물들어가는 바다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머리에 수건을 두른 채 고즈넉이 그녀가 바라보는 바다는, 그녀의 머리 위에 날고 있는 새는, 매일 밤 그녀를 비추었던 가로등의 큰 키마저도, 어쩐지 오늘은 달라보였다.

 

 

 

 

 

 

 

 

 

   방해가 되지 않도록 그녀에게서 물러나, 나는 계속해서 방파제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커멓게 그을린 얼굴로 어부들이 어지럽게 엉킨 것들을 육지로 끌어 올리고 있었고, 나는 그 건너편 동해 상회라는 이름의 작은 건물에 눈을 빼앗겼다. 그저 남쪽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동해라니 누군가 장난이라도 치는 것 같아 엉성하게 웃고 말았는데, 셔터를 누르고 나니 여기가 남쪽이면서 동시에 동쪽이었다는 깨달음이 불현듯 스쳐갔다.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쪽으로 돌아서 나 혼자만 더욱 넓은 세상을 보고 있는 줄 알았는데, 나 역시 어쩔 수 없이 한 쪽으로 돌아서 있었다. 틀린 것은 그들이 아니라 나였고, 여기는 남쪽이면서 또한 동쪽이며 어딘가의 북쪽이면서 또한 서쪽일 수도 있다는 사실은, 궁지에 몰려있다고만 생각했던 내 등 뒤를 허물어내는 고마운 몰락이었다.

 

 

 

 

 

 

 

 

   방파제 위를 걸으니 그 좁은 길이 더욱 좁고 또한 멀게만 느껴졌다. 아니다. 어쩌면, 한 발 더 내가 걷는 그 길은 넓어졌고 또한 내 걸음으로 방파제는 당연히 가까워지고 있었을 것이다. 축축하다고만 생각했던 내 기억은 생명의 기운을 잔뜩 머금은 채였고, 그늘 속에 있다고 믿었던 여기는 그저 저녁 빛을 조용히 감내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늘이 밤이 되고 밤이 다시 새벽이 되어 또 다시 그늘이 드리우더라도, 여기 이곳의 아침은 조용히 세상의 하루를 기록할 것이다.

 

   슬프지만 울지 않은 채로, 나는 그렇게 바다 앞에 섰다. 주저앉고야 말았지만 쓰러지지 않은 채로, 나는 바다를 보고 있었다. 괜찮겠구나, 여기 이렇게 무기력하고 비겁한 삶을 살게 되더라도, 비통하게 오열하고 몸부림칠 수 없더라도, 나의 그늘은 또 그렇게 하루의 싹을 잉태하고 있겠구나.

 

   가장 남루하고 보잘 것 없는 삶을 부여받았지만, 처음으로 나는 내 앞의 시간에게 두 손을 벌렸다. 아무 것도 용서하지 않은 채로, 혹은 용서받지 못한 채로 나는 다시 내일을 꿈꾸고 있었다. 기꺼이 몸을 열어 그 혹독한 시간에 나를 내맡기면서.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시간을 내 스스로 품어 안으며.

 

   고개를 돌려보니, 잔뜩 웅크린 내 등 뒤에서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날개를 단 영혼들이 마음껏 하늘을 날았고, 시커멓게 밤의 기운으로 뒤덮인 어둠 속에서 황금색 저녁이 불을 뿜으며 폭발하고 있었다.

 

 

 

 

사진: iPhone 4S © 김비 2014

 

 

 

 

 

가마가사키를 걷다

 

 

 

장옥진(래인커머)

  

 

 

 

 

  

가마가사키의 코코룸은 여러, 다양한 만남들이 잦은 곳이다. 안심을 나눌 수 있는 예술 같은 공간, 코코룸의 좁은 문 안으로 들어서면 안쪽에 놓인 탁자가 보인다. 두 개의 탁자를 이어붙인 앉은뱅이 탁자. 신발을 벗고 자리를 채워 앉으면 맞은편엔 상대방의 얼굴이 보이고, 눈이 마주치면 씨익 웃는다. 코코룸의 운영자인 카나요상은 이 탁자에서 함께 점심을 먹는 프로그램도 진행한다고 했다.

 

카나요상과 얘기를 나누던 중 코코룸으로 엔도상이 들어왔다. 엔도상은 조금 서두르는 기색으로 우리 일행과 코코룸을 나갔다. 가마가사키를 걷기 위해서다. 이날 엔도상은 가마가사키를 안내해주었고 든든한 길동무가 되어주었다.

 

사진 촬영은 하지 말아 주세요.”

 

엔도상은 민감하다는 표현을 썼는데 이곳을 민감한 곳, 민감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 말하며 카메라를 주머니 속에 넣는 시늉을 해보였다. 우리는 들고 있던 핸드폰을 바지주머니 깊숙한 곳에 넣었고, 이것으로 우리의 가마가사키 걷기는 시작되었다.

 

코코룸을 나와 양쪽으로 이어진 상가를 지나 거리로 나섰다. 상가 앞을 지나는 사람들, 거리의 사람들은 유독 남자가 많았다. 평소 아저씨, 할아버지로 부르는 연령대의 사람들이 다소 허름한 옷을 입고 상가 앞에 앉아 있거나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고 있었다. 그저 일상을 보내고 있을 뿐인 그들 곁을 약간은 긴장한 채로 지나쳤다. 거리도, 사람도 특별히 찾아온 손님이라 하여 반기는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이것이 마음 편히 느껴지기도 했다.

 

엔도상의 설명으로 가마가사키는 일용직 노동자, 홈리스들이 많은 곳임을 알 수 있었다. 이곳은 1960년대 산업화가 되면서부터 국가가 전략적으로 형성한 노동시장이었고 이로 인해 일용직 노동자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거품 경제가 몰락하면서부터는 더 이상 일용직 노동자는 필요치 않게 되었고, 이 후 가마가사키에는 노동력이 있으나 일자리를 잃어버린 사람들, 갈 곳을 잃은 사람들, 세월이 지나 고령이 된 사람들이 남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남게 된 이들은 여전히 실업 문제, 고령화 문제 등을 안고서 가마가사키에서 살아가고 있다. 어둡고 좁은 거리에 몸을 누일 수밖에 없는 지친 이들의 모습에는 이러한 사연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해결해야 할 여러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는 만큼 이곳은 경찰과 주민들 간의 갈등이 많이 빚어진다고 하였다. 경찰의 무자비한 행위에 주민들이 집단적으로 반발하기도 하고, 이는 곧 폭력사태로 번지기도 한다. 이러한 사건들까지 겹쳐져 가마가사키는 대내외적으로 문제적인 곳이 되었다. 이에 오사카 정부는 가마가사키의 실추된 이미지를 쇄신하고자 아이린(愛隣) 지구라는 새로운 지명을 붙여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엔도상은 사랑하는 이웃이란 뜻의 저 지명이 오히려 폭력적이라고 힘주어 말하였다. 가마가사키 주민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지 않을뿐더러, 그렇게 불리는 것을 원치 않아 하기 때문이다. 이는 상당히 시혜적인 용어로, 그들은 우리의 이웃이므로 포용해야만 하고 도움 받아야 마땅할 존재가 된다. 우위의 시선에서 그들과 우리를 구별 지어버리는 것이다. 어느 초등학교 벽에 예쁘게 달아놓은 꽃과 이 꽃에 물을 주기 위해 설치한 관이 사실은 벽에 기대어 자는 노숙자들을 쫓기 위한 장치라는 것을 엔도상에게 들었을 때는, 그들은 사실 어디에서나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곳의 주민들조차도 서로를 이웃으로 환영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계속 해서 길을 걷다 한 건물 앞에 섰다. 쪽방, 일본말로는 야도라 한다는 이 건물은 독신의 일용직 노동자들이 사는 곳이라 하였다. 지금은 호텔의 형태로 개조된 곳도 많고 하룻밤 묵기에는 손색이 없지만, 실제로는 일용직 노동자를 위한 공간이라기보다 외국인 여행자들이 잠시 묵는 숙소에 가깝다고 하였다. 이에 엔도상은 사실상 노동자를 위한 호텔은 없다고 말한다. 가마가사키에는 주일 방, 달 방의 형태로 값을 치르고 사는 독거노인, 500엔 정도의 싼 방을 차지하고 있는 일용직 노동자도 있겠지만 갈 곳 없이 거리를 배회하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이다.

엔도상의 설명에 의하면 가마가사키에는 일용직 노동자가 아니더라도 이와 관계없이 오사카 시에서 지어준 건물에 거주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이는 가마가사키를 국가, , 부 차원에서 각각 보험 등록, 숙박 및 무료 의료센터, 직업교육 등을 지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오사카 부에서는 노동지원센터라 해서 일용직 노동자를 서포터해주는 곳을 운영하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직업교육, 연수 등 여러 강좌를 무료로 개설하고 있다. 엔도상은 이에 참여하는 연령대가 70~80세로 높으며 이들 역시도 고도 경제 성장기 때 모집되어 남겨진 사람들이라 하였다.

일용직 노동자들이 있는 노동복지센터에는 직접 방문했는데 아무런 가구도 없는 공간에 널브러져 있는 사람, 자는 사람, 그 안에서 굳어진 생활방식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건물 자체에는 쾌쾌한 냄새와 눅눅한 공기를 머금고 있었지만, 박스로 칸막이를 만들고 깨끗이 빤 수건을 널어놓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나치는 우리들 곁으로 방향제를 뿌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그들의 모습을 뒤로 한 채 엔도상은 한 쪽 모퉁이에서 이곳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는데, 오전 다섯 시에서 오후 다섯 시 사이에 홈리스와 노동자들을 위한 인력시장이 열리고 이들이 고용되기 위해서는 주민 등록이 필수라 하였다. 주민 등록을 하지 않으면 여러 복지 지원의 혜택을 받을 수 없고 더불어 고용의 기회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민 등록은 그들이 가마가사키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장치가 되어, 고령이 되어서도 일을 계속 하게 만들고 다른 지역으로 갈 수 없게 하는 등의 문제가 있다고 하였다. 단지 잠잘 곳이 없어 이곳을 방문했거나 일자리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 했던 사람들 또한 가마가사키에 남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일이 없을 경우 낮에 자고 있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이곳의 사람들 대부분은 고용 보험을 들게 되는데 일을 하지 않을 경우, 당연히 고용 보험의 혜택은 없다. 이는 곧 실업-노숙자로 이어지게 되고, 엔도상은 이런 지원센터들이 마켓기능을 상실함으로써 노동자가 노숙자가 되는 상황이 큰 문제라 하였다. 노동복지센터 건물을 나오며 이것이 지원인가에 대해 생각했고, 그들을 국가에 등록시키고 명목상 그들을 관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 국가의 지원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복잡해진 마음으로 거리를 걸으며 이외에도 다소 허름한 모양새의 공터, 여러 사람들을 지나쳤다. 엔도상의 안내에 따라 우리 일행은 성매매가 이루어지고 있는 일본의 토비타 신치를 걷게 되었다. 카메라를 절대 꺼내면 안 된다는 당부와 함께 두세 명씩 떨어져 걸음을 옮겼다. 젊은 여자가 야한 옷을 입고 가만히 전시되어 있으면 할머니들이 호객행위를 하는 형태가 길의 양 옆으로 쭉 이어졌다. 길의 끝에 다다를 때까지 시선을 어디에 둬야할지 몰랐고, 길의 끝에서 생각나는 건 오사카 거리에서 보았던 전통 등()이었다. 오사카 거리를 걸었을 때 느꼈던 화려함이 이곳에서도 묘하게 느껴졌고, 성매매가 일본에서도 불법이긴 하지만 경찰도 어찌하지 못하는 곳이란 설명을 들었을 때는 마치 범접할 수 없는 성역처럼 느껴졌다.

 

바삐 몇 걸음을 옮기자 눈에 들어온 것은 이제껏 뭘 보았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우뚝 선 대규모 아파트 단지였다. 반전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을 정도로 전혀 다른 풍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실제로 이 아파트에는 부자들이 살고 있다고 했다.

 

이렇게 가마가사키를 엔도상의 안내에 따라 걷고 나니 허기가 졌다.

 

코코룸 안으로 다시 들어오니 맛있는 음식 냄새와 함께 마주한 것은 허름한 옷차림의 웃음을 짓고 있는 할아버지였다. 거리에서 보았던 아저씨, 할아버지들과 다름이 없었다. 가볍게 인사를 하고 우리 일행은 처음 앉았던 탁자에 앉았다. 정성스레 차린 음식이 탁자 위에 차려졌고, 좁은 앉은뱅이 탁자에 앉아 서로 마주보며 밥을 먹었다. 가마가사키의 많은 사람들이 간신히 끼니를 때운다는 이야기를 곱씹으며 코코룸에서의 밥 한 숟가락을 꿀떡 삼켰다.

 

 

 

 

 

 

'国境通信' 카테고리의 다른 글

人文-裝置(dispositif) を「発明」しよう  (0) 2015.06.20
점과 점이 모여 선이 되기까지  (0) 2015.03.31
삭제된 섬, 삶, 말  (0) 2014.12.16
Valse  (0) 2014.10.27
  (0) 2014.10.14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