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깃발이 드높다

 

 

 

권명아

 

 

 

 

 

 

   히틀러의 ‘그것’에 대한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그것’은 바로 여러분이 상상하는 ‘그것’이다. 히틀러의 ‘그것’에 대한 논의는 그가 동성애자라거나 위장한 동성애자라는 소문으로도 이어졌다. 히틀러는 동성애자를 유대인만큼이나 혐오했다. 동성애에 대한 히틀러의 강박적 혐오 때문에 히틀러의 ‘그것’에 대한 뜬소문이 끊이지 않았다는 논의도 있다. 그래서 미국이나 영국과 같은 반파시즘 진영에서 동성애 코드를 활용하여 나치를 희화화하는 방식이 자주 나타나곤 했다. 역사적으로 파시즘과 반파시즘은 동성애를 ‘절멸의 대상’이나 ‘선전의 도구’로 이용하였다.

 

 

   <한겨레>가 동성애 혐오 발화를 전면 광고로 게재하여 물의를 빚었다. 논란이 일자 한겨레 쪽이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 입장을 가진 의견 또한 정보”라고 해명했다. 이는 혐오 발화의 폭력성에 대한 무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혐오 발화는 ‘의견’이 아니고, 표현의 자유로 보장될 사안이 아니기 때문이다. 혐오 발화를 하나의 ‘의견’이라고 하는 것은, 나치가 유대인을 학살한 것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이 사태를 통해 우리는 한국 사회가 여전히 혐오 발화의 폭력성을 사유하고 대처해 나가는 데 무지하다는 점을 거듭 확인해야 한다. 파시즘은 증오 정치를 동력으로 진행된다. 파시즘은 낙인찍기, 혐오 발화, 증오 행동을 거쳐 대량 학살로 향했다. 혐오 발화가 하나의 ‘의견’이나 ‘보수적인 정치적 견해’가 아니라, 학살의 예고편이라는 것은 무수한 사례가 보여준다. 그 사례들에 따르면, 혐오에는 이유가 없다. 혐오란 이유가 없이, 대상을 바꿔가며 들러붙는 신체적 힘들의 결집체이다. 파시즘이 여성, 성적 소수자, 인종적 타자를 혐오하며 절멸시킨 데에는 어떤 논리적 이유도 없다. 물론 이들이 혐오의 대상이 된 것은 이들 집단이 당대 주요하게 부상한 ‘새로운 세력’이라는 점과도 관련된다. 대표적인 파시스트인 무솔리니는 파시즘이란 “현존하는 모든 것에 대한 안티테제”라고 주장했다. 즉 파시즘의 혐오는 논리적 근거가 아닌, ‘안티’의 역학을 따라 촉발된다.

 

 

   최근 한국 사회의 혐오 세력이 특별한 공통점이 없는 집단들을 향해 혐오 발화와 증오 행동을 수행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볼 필요가 있다. 이들은 그때마다 ‘쟁점이 되는’ 집단을 찾아다니며 혐오 발화나 방해 시위를 자행하고 있다. 혐오가 특별한 이유가 없이, 대상을 바꿔가며 들러붙는 신체적 힘들의 결집체라는 건 바로 이런 뜻이다. 혐오가 대상에게 부정적으로 들러붙는 속성을 지닌다면, 그 강도가 높을수록 혐오의 주체는 대상에 들러붙어 휘감겨버린다. 히틀러가 동성애를 혐오하는 강도가 높아질수록, ‘그것’에 대한 추문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한편 최근 서울시민인권헌장을 둘러싼 사례에서도 보이듯이, 혐오의 강도는 이에 맞서는 저항의 강도를 높이기도 한다. 물론 혐오 덕분에 저항이 가능해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혐오에 맞선 사랑은 추상적으로 논의된 사랑의 정치성에 구체적인 현실성을 부여했다. 이 일은 ‘나른한’ 진보 이론의 대가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혐오에 맞서 행동한 수많은 사람에 의해 이루어졌다. 2014년 한국 사회는 혐오에 맞서는 새로운 ‘사랑의 깃발’과 그 사랑으로 형성된 새로운 정치적 주체들을 만난 해로 기록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혐오의 공허한 열광을 마주하며, 우리는 단지 파시즘의 도래만을 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한국 사회의 정치적 지형도가 다시 그려지는 현장을 보고 있다. 2014년, ‘진보’라는 말로 다 포함할 수 없는, 혐오에 맞서는 새로운 저항의 정치가, 사랑이 일어나고 있다.

 

 

 

 

 

 

 

무상급식과 유턴 정치

 

 

 

권명아

 

 

 

 

 

   지방대 교수들끼리는 매사 너무 지나치게 열심인 동료를 두고 “그 사람 요즘 편입 준비하나 보다”라며 냉소적으로 이야기하곤 한다. 기회만 되면 서울로 ‘유턴’하는 지방대 교수들의 풍토를 보여주는 씁쓸한 사례이다. 지방을 서울로 유턴하기 위한 반환점 정도로 생각하는 대표적 집단이 교수와 정치인이다. 이들에게 지방은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업적을 쌓는 거점일 뿐, 돌보고 지키고 함께 살아가는 터전이 아니다. 이들이 쌓는 업적도 결국 서울로 돌아가기 위한 목적에 부응하는 일일 뿐 지방을 돌보는 일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이들을 ‘유턴족’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교수나 정치인이나 ‘유턴족’들이 지방에 와서 하는 일은 주로 서울로 ‘돌아가기’ 위한 유턴 정치뿐이다.

 

 

   현재 과격한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무상급식 폐지 선언은 그 본질에 있어서 정치인들의 유턴 정치의 무책임한 결과이다. 무상급식 폐지 논란이 왜 경남에서 선정적일 정도로 선동되는지를 이런 맥락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경남에서는 무상급식을 ‘경남의 자부심’이라고도 표현한다. 그러나 무상급식 논란에서 막상 경남 지역은 사라져버렸다. 홍준표 지사는 이 논란 덕택에 대선 주자로서 한자릿수의 지지율을 얻는 ‘결실’을 얻었다고 한다. 도지사가 ‘아이들 밥그릇’으로 유턴 정치에 열심인 사이, 도민들의 자존심은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홍준표 도지사가 내동댕이친 ‘아이들 밥그릇’은 실은 김두관 전 도지사의 ‘작품’이기도 했다. 야권 불모지 경남에서 53.5%의 높은 득표율을 기록한 김두관 전 도지사가 ‘대권’을 위해 유턴해버렸고 경남도민의 자존심은 처참하게 짓밟혔다. 홍준표 도지사의 당선은 그런 점에서 김두관 전 도지사의 유턴 정치에 대한 도민들의 강력한 심판 의지의 결과였다. 유턴 정치에 대한 심판으로 당선된 도지사가 다시 유턴 정치를 위해 경남도민의 ‘밥그릇’을 내동댕이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 대해 왜 경남도민들은 일어나서 분노하지 않느냐는 질타를 받기도 한다. 결국 보수정당 텃밭인 경남 사람들의 정치 성향이 문제라는 비판도 들린다. 자주 듣는 진단이고,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런 비판을 하는 이른바 지식인들도 결국 선거 때 말고는 지방의 사정에 관심이 없다. 이런 식의 지방 비판은 지방을 두 번 죽이는 일이다. 선거 결과만으로 고질적 지역주의 운운하는 사람들이나, 지방을 표밭으로만 보는 정치인들은, 지방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살고 가꾸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을 줄 모른다. 도지사들이 차례로 밥상 뒤엎는 모양을 내내 지켜보아야 했던 경남도민들은 분노하기보다 냉랭하다. 이 냉랭함이 정치 무관심과 같은 것일까? 내동댕이쳐진 밥상으로 더렵혀진 방구석을 치우는 이들은 화를 내기보다, 냉정하게 이를 앙다문 채 뒤치다꺼리를 할 수밖에 없다. 뒤치다꺼리를 하는 일이야말로, 살림을 꾸리는 이들이 맡아야 하는 몫이기 때문이다. 화를 내는 건 살림을 하지 않아도 되는, 떠나면 그만인 ‘유턴족’들과 멀리서 불구경하는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유턴 정치는 모두 서울 중심주의의 결과이지만, 교수의 유턴이 학벌 사회와 관련된다면 정치인의 유턴은 지역 자치가 불가능한 정치 구조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런 구조가 변화되지 않는 한 선거는 결국 지방을 피폐하게 만들 뿐이다. 선거는 근본에서 대의민주제의 한계를 지닌다. 하지만 지방의 맥락에서 선거는 지방을 중앙의 식민지로 만드는 노예화의 도구에 불과하다. 분탕질 뒤끝의 심판도 살림도 결국 지방 사람들의 몫이다. 그 뒤끝이 선거 결과만으로 한정되지 않을 것이다. 뒤끝의 매서운 맛을 볼 날이 오리라.

 

 

 

'막장 달인'들이 지배하는 사회

 

 

 

권명아

 

 

 

 

 

   태풍이 불면 바다 심연에 있던 것들이 기슭으로 올라온다. 태풍이 지난 후 백사장을 가득 채운 쓰레기 더미는 충격적이었다. '저 바다 깊은 곳에 이런 쓰레기가 가득했었구나.' 그 쓰레기들은 항상 바다 저 멀리 심연에 있었을 터이지만, 사람들이 사는 기슭으로 올라오기 전에는 누구도 알아채지 못하는 것이었다. 2014년 한국 사회에는 일 년 내내 태풍이 불고 있는 모양이다. 매일매일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무수한 쓰레기가 '한국 사회'의 기슭으로 올라온다. 이제 한국 사회가 바닥을 보인다는 말도 너무 자주 듣고 말해서 물려 버렸다.
 


심연의 유령들, 고딕 판타지의 시작
 
   그런데 이제, '심연, 바다' 같은 표현을 더는 심상하게 쓸 수 없다. 2014년 바닥을 보인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심연, 바다' 같은 표현조차 집단적 트라우마를 환기한다. 우리는 이미 상징이나 비유가 아닌 현실로, 생생하게 한국 사회의 바닥을 보았다. 
 
   태풍이 불지도 않았는데, 바닥을 드러낸 채 뒤집힌 세월호는 '바닥' '심연'을 상징 차원에서 현실로 불러들였다. 바닥을 드러낸 세월호가 무슨 전조이기라도 한 것처럼, 줄줄이 한국 사회의 심연에서 '유령'들이 밀려온다. 심연으로 사라진 아이들은 돌아올 줄 모르는데, 사라진 줄 알았던 과거의 유령들은 죽지도 않고 되돌아온다. 파시즘이 지배했던 스페인을 고딕 판타지로 그려낸 영화 '판의 미로'에는 아이를 살아 있는 채로 잡아먹는 괴물이 나온다. 피 맛에 굶주린 이 괴물은 그 자체로 파시즘의 상징이다. 고딕 판타지 장르를 빌려 말하면, 오늘 한국 사회에는 바다의 심연에서 아이들을 살아 있는 채로 잡아먹은 유령들이 피 맛에 굶주려 배회하는 모양이다. 남미의 문학이나 영화는 고딕 판타지나 마술적 리얼리즘이 지배적인 장르로 활용된다. 폭력과 학살로 점철된 남미의 역사적 경험은 통상적인 사실주의나 리얼리즘으로 재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도 말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 역시 리얼리즘이 불가능한 고딕 판타지의 세계로 넘어가는 듯한 조짐을 보인다. 

   1930년대 식민지 조선에는 '에로-그로'라는 장르가 유행했다. 일본에서 유행하던 이 장르는 에로티시즘과 그로테스크가 결합한 독특하고도 복합적인 성격을 지녔다. '에로'와 '그로'가 결합해서 만들어내는 미적, 정치적 효과는 다양했다. '에로-그로' 장르에서 나타나는 '과도한' 성적 표현은 성 해방에 대한 열망과는 직접 관계가 없다. 오히려 1930년대를 전후하여 나타나는 폭력의 기괴함과 폭력에 몸을 내맡기는 대중의 충동이 '파괴적인 죽음 충동'으로 충만한 '에로-그로'라는 장르를 만들었다고 평가된다. 일본의 파시즘이 극단화되면서 '에로-그로'는 전쟁 광기를 선동하는 수단으로 동원되기도 하였다. 

   파시즘의 역사를 참조해서 오늘날 한국 사회를 살펴볼 때 눈여겨볼 지점은, 파시즘의 폭력성은 매우 다양하고 이질적인 장르 복합체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파시즘의 역동성과 '자발적 광기의 분출'은 이런 면모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파시즘의 폭력성과 그 전조를 단선적인 회색 톤의 억압적이고 건조한 장르로 생각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일면적이다. 파시즘의 폭력은 일방적이지만, 그 폭력의 형태는 그야말로 '버라이어티'했다.


버라이어티 장르, 파시즘 

   2014년 정치 뉴스는 '19금' 경고 자막이라도 넣어야 할 만큼 어처구니없이 에로틱하다. 사회 뉴스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그로테스크하다. 게다가 '에로'와 '그로'는 종종 몸을 바꾸고, 때론 이종 교배를 일삼는다. 이런 버라이어티 장르를 창출하는 것은 물론 지배적인 미디어와 정치 집단이다. 그러나 이런 버라이어티에 열광하는 대중 또한 파시즘이라는 복합적인 장르의 발명자들이다. 물론 대중을 이렇게만 규정할 필요는 없다. '에로-그로', 고딕 판타지, 이름 붙일 새도 없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무수한 막장 장르를 한국 대중들은 아주 오래도록 '관람'해 왔다. 한국 사회는 여러모로 막장의 달인들이 지배하는 사회이다. 막장 장르의 주도권이 지배 집단에 있는 듯하지만, 막상 관람자의 자리에서 채널의 주도권을 놓지 않고 있는 대중 역시 만만치 않은 막장의 달인들이기 때문이다. 

   지루하게 무한 반복되는 막장 드라마를 끝내고 새로운 장르를 발명할 기회는, 그러니까 이제 우리 모두에게 달렸다. 2014년이 고딕 판타지로 마무리되고 있는 바로 오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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