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위기와 폭력적 언어유희

 

 

 

권명아

 

 

 

 

 

 

   대공황이 다시 오는가? 경제학자들도 이에 대해 쉽사리 예측하지 못한다. 역사적으로 대공황은 파시즘의 득세와 세계 대전으로 이어졌다. 문화사적 자료를 참조해 볼 때 대공황의 시대는 격렬한 휘발성의 시대였다. 이 시대 사람들에게 대공황은 마치 세계가 격렬하게 휘발되고 있는 것 같은 공포로 다가왔다. 쓸모없는 종이더미가 된 지폐 다발들이 상징하듯이, 대공황은 기존의 물질적인 경제적 토대를 휘발시켜 버렸다. 그런 점에서 이 시대의 휘발성이란 단지 상징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이 시대가 '격렬한 휘발성의 시대'였다는 것은 아주 작은 불씨에도 금세 불타올라 버렸다는 의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정체가 모호한 '적'을 향해 불타오르는 증오와 적대감은 대공황 시대의 정동(affects)이었다. 
 


대공황, 경제를 잃고 적을 얻은 시대
 
   이런 점에서 히틀러는 대공황 시대의 전형적 산물이다. 히틀러와 파시즘이야말로 이 세계를 격렬한 휘발성으로 불태워 버리고자 했으니 말이다. 격렬한 휘발성은 파시즘 언어에서도 발견된다. 파시즘 시기 언어는 내용, 의미, 가치, 구체성, 책임성과 같은 실체를 상실한다. 프리모 레비는 이러한 '언어의 폭력적 변형'이 파시즘의 특이성이라고 지적한다. 이러한 현상을 찰리 채플린은 영화 '위대한 독재자'에서 흥미롭게 묘사하였다. 연설광이었던 히틀러가 적에 대한 증오와 선동으로 가득 찬 언어를 구사할 때, 말은 내용과 의미를 상실한 '이상한 소음'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경제 불황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낯익은 '적'을 불러내어 책임을 전가하는 소란이 잦아진다. 경제는 황폐해지고 사회 갈등이 고조되고, 공동체의 위기는 해결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 버린다. 오늘날 우리는 곳곳에서 이러한 격렬한 휘발성의 증상과 마주한다. 경제 논리를 정치로 환원하는 것을 넘어서, 이제 경제는 '적'을 비난하는 폭력적 언어 속에서 휘발되어 사라져 버렸다. 많은 전문가가 지적하듯이 대공황은 막을 수 없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당대 집권 세력들이 경제 불황을 해결할 실질적 대책을 무시하고, 책임을 전가하기 위한 적대와 증오의 말들로 그 책임을 휘발시켜 버린 결과 대공황이 도래한 것이다. 그리고 그 휘발된 언어에 휩쓸려 버린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은 너무나 가혹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2014년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경제 불황이 장기화되는 상황에서 누구도 그 책임을 지지 않는다. 집권 세력은 매번 낯익은 적을 불러내어 책임을 전가할 뿐이고, 이제는 언어의 폭력적 변형에 스스로 매혹된 것처럼 보인다. 평범한 사람들은 불황의 고통을 매일매일 감수하고 살아야 하고, 거기에 더해서 폭력적이고 무책임한 언어의 '향연'을 관람해야 하는 참담함까지 감내해야 한다. 

   한편 무책임한 휘발성의 언어가 발산하는 적대의 향기에 심취한 이들은 앵무새처럼 '적'을 공격하는 말로 현실의 고통을 해소한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그들은 자신의 주머니 속 화폐다발의 가치도 해소된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2014년 겨울,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세상은 마치 '시끌벅적하고 분노로 가득한 소리들이 넘쳐나지만 무의미한 영화'와도 같다. 과거나 현재나 대공황이란 경제와 언어와 정동의 특별한 결합물이다. 경제 위기의 실질적 해결과 책임이 '폭력적 언어유희'에 전가되어 버린 결과 우리 사회는 경제를 잃고 대신 '적'과 '적대의 언어'만을 얻게 되었다. 따라서 경제를 '파괴적 언어유희'로부터 구출해야만 경제 불황에 대한 책임도 물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언어의 가치를 살피는 일이야말로, 경제 불황의 긴 터널에서 빠져나가는 출발점이라 할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언어라는 문, 그 탈출구를 점거할 시간이다. 문은 이미, 항상 거기에 있다.


불황의 책임을 묻고 언어의 가치 살펴야 

   "귀청이 터질 듯한 배경 소리에 잠겨 허우적대는, 이름도 얼굴도 없는 사람들의 난리법석, 그럼에도 그 위로 인간의 말은 떠오르지 않는 영화. 잿빛과 검은빛의 영화, 유성영화인데도 말이 없는 영화." 목청을 높여 적들을 물리칠 것을 외치고 마치 적을 마주한 듯이 괴성을 지르며 법석을 떠는 어떤 종편 채널의 소리를 뒤로 하며, 수용소로 들어가는 것은 바로 폭력적 언어로 가득 찬 세계에 무기력하게 끌려들어가는 일이었다는 프리모 레비의 말을, 아무 소용없이 떠올려 본다. 겨울이 다가온다. 모두 무사하고 안녕하시길 마음 깊이, 그러나 역시 아무 소용없이 빌어 본다.

 

 

 

 

청년 이탈 100% 향해 진격하는 부산시

 

 

 

권명아

 

 

 

 

 

 

   2012년 부산시의회는 '부산 청년대학생 정책욕구 조사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자료에 따르면 부산에 있는 대학에 다니는 학생 중 졸업 후 부산에 계속 거주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학생은 51.2%에 불과하다. 또 이 조사에 따르면 부산 청년 대학생들이 부산에서 개선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점으로 꼽은 것은 인적 자원 개발 프로그램과 일자리 창출 노력이다. 달리 말하면 현재 부산 지역 청년 대학생들에게 부산에서 자신들이 어떤 '인력'으로 성장할지 미래를 그려낼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인재 양성 전망 등 '미래'를 달라는 청년들
 
   이는 청년들의 일자리에 대한 불만이 '일자리가 적다'는 식의 양적 문제가 아니라, 내가 커 나갈 수 있는 미래적 전망을 가진 일자리가 없다는 불만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 조사에서 많은 학생이 월급 때문이 아니라, '미래' 때문에 서울과 수도권으로 가고 싶다고 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다. 즉 청년들에게 부산에서의 자기 삶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는 청년들이 부산시의 인력 정책에 대해 다양성, 비전, 변화 가능성, 진취성과 같이 사람을 '키우는' 미래적 전망을 요구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청년들은 부산시에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상상력을 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는 청년들이 부산에서는 주체적인 미래를 만들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어려운 말이 아니다. 부산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영역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서울이나 수도권과 비교해 부산에서 젊은 세대가 주도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영역이 거의 없다는 것은 굳이 통계가 없이도 실감할 수 있다.

   청년들이 자기 미래를 꿈꿀 수 없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지역에 자립적 삶의 가능성이 없다는 의미이다. 미래는 꿈꾸는 것이다. 즉 미래란 그저 물리적 시간으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과는 다른 삶을 꿈꿀 수 있는 자립과 주체적 삶에 대한 열망으로 도래하는 것이다. 

   청년층의 부산 이탈에 대해 부산시가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또 청년층의 부산 이탈에 대한 논의가 부산의 인구 감소를 걱정하는 인구 통계학적 관점이 아니라 지역의 삶과 문화에 대한 성찰로 진전된 것도 최근의 일이다. 부산 청년 창업 지원센터 추진이나 부산 청년문화 육성 조례(2013년 5월 22일) 제정은 이러한 정책적 관심이 확대된 결과이다. 

   부산 청년문화 육성 조례의 경우 지역의 자립과 주체적 삶에 대한 열망을 청년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에서 구하려는 정책적 반영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실상 이 지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문화 정책이기도 하다. 문화(culture)의 원뜻이 '키우다'(cultura·경작하다)라는 문화 이론의 원론을 새삼 거론하려는 것만은 아니다. 문제는 실질적 차원에 있다. 

   예를 들어 부산시 의정지원 자료인 '부산문화재단 비전, 핵심가치, 추진 방향 분석'(2012년)에서는 '인재들의 역외 유출'을 부산시가 처한 총체적 위기 상황의 핵심 요인으로 진단하고 있다. 그리고 부산문화재단의 존재 이유는 이와 같은 총체적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문화 분권'의 초석을 놓는 일이라고 논하고 있다.


미래 키우는 일, 부산문화재단의 존재 이유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부산문화재단의 존재 이유는 문화 사업에 국한되지 않고, 부산의 자립적 삶의 기반과 문화주권을 정초하는 데 있다. 또 앞서 인용한 자료들은 부산시 자체에서 수립한 정책 자료들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계속 논란이 되고 있는 부산문화재단 민간 이사장 선정 문제는 단지 문화계의 진영 문제나, '인물' 품평에 국한된 일이 아니다. 오히려 부산문화재단 민간 이사장 선정 논란을 이런 방향으로 이끄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제기하지 못한 채 공전할 우려가 높다. 

   부산문화재단 민간 이사장 선정 논란의 핵심은 부산시가 청년들이 미래를 꿈꿀 수 있는 도시, 즉 자립과 주체적 삶이 가능한 지역을 만들겠다는 정책적 기조를 스스로 배반한 꼴이 되고 말았다는 점에 있다. 그런 점에서 부산문화재단 민간 이사장 선정의 문제점은 부산시가 그간 추진해 온 정책 기조를 스스로 부정해 버린 데 있다. 인사가 정책을 부정해 버린 전형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제 청년 이탈 100%의 기록을 세우는 일만 남았다.

 

 

 

 

예방과 검열, 사전 조치의 희극

 

 

 

 

권명아

 

 

 

 

 

 

   유효성에 대해서는 의학적인 논란도 있지만, 예방 접종은 질병 발생에 대비하는 유효한 사전 조치의 하나이다. 그러나 발생 가능한 질병에 대한 예방 조치가 때로는 과도한 건강 염려증과 감염 공포를 동반하기도 한다. 예방 조치란 개입의 시기와 발생 가능성에 대한 적절한 판단과 분석 능력에 따라 그 효율성과 가치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예방 조치가 적절하게 취해지는가, 아니면 부적절하게 취해지는가는 그 사회의 합리적 판단 능력과 분석 능력을 나타내는 근본적 지표이다. 물론 합리적 판단 능력과 분석 능력이 있을 때에만 예방 조치라는 것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다이빙 벨'과 에볼라, 사전 조치 필요 영역은?
 
   사전 조치에 대한 판단 능력과 적절성이라는 차원에서 최근 부산에서 벌어지고 있는 두 개의 사건은 참으로 흥미롭다. 하나는 ITU(국제전기통신연합) 전권회의와 관련하여 에볼라 감염 사전 조치 논란이며, 다른 하나는 부산국제영화제 상영 예정작 '다이빙 벨'에 대한 상영불가 조치 논란이다.
 
   10월 20일부터 열리는 ITU 전권회의는 정보통신기술 정책 논의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전 세계 193개국에서 참가자들이 모이기에 여러 다양한 절차와 사전 조치들이 당연히 필요할 것이다. 특히 에볼라 바이러스 감염에 대한 공포가 확산되면서, 이에 대한 사전 조치를 부산의 시민 단체들이 요구하고 있다. 먼저 전제를 하고 싶은 것은 몇몇 보도나 성명에서 '에볼라 발병국' 참가에 대한 우려라는 식의 표현이 자주 사용되는 것은 문제적이다. 특정 지역이나 국가를 그저 '에볼라 발병국'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지나치게 폭력적이며 인종차별적이기 때문이다. 일본을 '피폭국가'로 부르는 것이 폭력적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질병 감염에 대한 사전 예방 조치를 철저하게 수행하는 것은 국제회의를 주관하는 국가와 지방 정부의 기본적 역할이자 책임이다. 그런데도 ITU 전권회의 주관 부처인 미래창조과학부 관계자는 국제회의 참가자들에게 이러저러한 사전 조치를 할 수 없다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수수방관하고 있던 부산시는 논란이 커지자, "미래창조과학부와 협력해 에볼라 바이러스 발병국에 참가자 수를 최소화해 줄 것을 요청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에볼라 바이러스 감염에 대한 예방 조치가 부산 시민의 안전에 대한 기본권을 보장하는 문제임에도 이를 책임질 부산시의 대응은 참으로 느긋하다. 

   부산국제영화제의 '다이빙 벨' 상영에 대한 부산시와 부산시장의 대응이 매우 기민하고, 집요하고, 적극적인 점을 전권회의에 대한 질병 예방조치와 비교해 볼 때, 이 대비는 더욱 흥미롭다. 국제영화제 참가작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든 상영불가 압력을 넣는 것은 부당한 검열이며, 사전 조치라는 의미에서 사전 검열에 해당한다. 사전 조치를 취할 질병 예방에는 무관심하고, 시민의 판단에 맡겨야 할 표현의 자유에는 적극적으로 사전 조치를 취하는 이 역설적 태도는 실상 시민의 기본권을 침해한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적이다.


부산시, 시민 기본권 지켜야 할 책임 안 지켜 

   2012년 제정된 '부산광역시 인권 보장 및 증진에 관한 조례'를 보면 부산시(3조)와 부산시장(4조)은 '시민의 인권 보장과 증진을 위하여 인권 보장 및 증진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시행할 책임을 지닌다. 안전하게 살 권리와 표현의 자유는 인권의 기본이다. 혹시라도 발생할 수 있는 질병과 재난에서 시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사전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부산시와 부산시장의 기본적 책임이다. 마찬가지로 부산 시민들이 다양한 사상과 예술 표현의 자유를 구가할 수 있도록 보호하고, 이에 반하는 일들을 조사하고 예방하는 것 역시 부산시와 부산시장의 기본적 책임이다. 따라서 바이러스 감염에 대한 사전 조치에 무관심하고,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에는 적극적인 부산시의 행위는 부산시민의 기본권을 지켜야 할 자신의 최소한의 책임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조례도 지켜지지 않는 상황이라면 부산 시민은 도대체 기본권을 지켜 달라고 누구에게 요구해야 하는 것일까? 사전 조치의 적절성에 대한 부산시의 합리적 분석의 초점은 어디에 있는 것인지, 합리적 판단 능력의 여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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