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홍규, 함석헌과 간디의 종교관 비교: <바가바드기타>에 대한 해석을 중심으로

 

 

 

 

 

 

간디와 그의 비폭력주의는 영국의 식민지인 인도에서 일어난 해방운동이라는 점에서, 식민지기의 조선에 민족해방의 문제와 관련지어져 수용되었다. 1922년 조만식이 주도한 조선물산 장려운동은 간디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으며, 당시 조선의 좌익 인사들도 간디의 사상을 나름으로 판단하여 비판적인 입장을 세우는 등, 간디의 사상은 식민지기 조선에 있어 하나의 참조점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식민지기 조선에 있어서 간디의 비폭력주의를 민족해방의 노선으로 채택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일반적이었던 측면도 존재했다. 이후 간디가 보다 적극적으로 수용된 것은 해방 이후 한국의 간디라고 불리는 함석헌에 의하여 재조명되면서부터이다.

 

 

 

 

함석헌의 사상은 해방 이후 한국의 민주화와 민중 신학에 있어 중요한 이론적 준거가 되어왔다. 따라서 간디의 사상이 한국에 수용되는 과정에 있어서 함석헌의 사상은 가장 중요한 참조점이 된다. 또한 간디의 비폭력주의가 식민지기를 거쳐 한 동안 잊혀졌다가 냉전기에 다시 부상하여 재조명되는 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냉전기의 한국에서 민중운동에 대한 인식이 식민지기를 새로운 준거로 삼아 재편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기에 중요하다.

 

박홍규는 이를 앞서 발표된 함석헌의 간디 사상 수용(<석당논총> 53,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2012)에서 함석헌을 통하여 식민지기 이후 간디와 그의 사상이 수용된 궤적을 다시 되짚었다. 이를 통하여, 20세기 초의 식민지 인도에서 탄생한 간디의 사상이 20세기 후반 냉전기 한국의 함석헌을 통과하며, 사회주의적인 면이 탈각되고 기독교중심적이고 국가주의적인 면이 부각되었음을 보았다.

 

 

 

 

그리고 본 논문인 박홍규의 함석헌과 간디의 종교관 비교: <바가바드기타>에 대한 해석을 중심으로에서는 이전의 논의를 보다 심도 깊게 논증하였다. 전쟁에 대한 이야기인 <바가바드기타>는 힌두교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경전 중 하나로, 간디는 이를 폭력이 아닌 비폭력으로 재해석하였고, 이는 간디의 비폭력주의의 근본을 형성했다. 또한 간디는 <바가바드기타>의 재해석을 통하여 식민지 상황에서 멸시된 인도의 문화적 전통을 재흥시키고,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함석헌은 1963년 이후 <바가바드기타>를 접하여, 1985년에 처음으로 책으로 출판하였다. 그러나 함석헌이 재해석한 <바가바드기타>에는 간디의 해석이 중요하게 인용되었음에도, 가장 중요한 비폭력주의에 대한 부분은 거의 삭제되어 있었다. 또한 간디는 <바가바드기타>를 통하여 사회주의를 설교한다고 보려고 하였지만, 함석헌은 사회주의를 주장하지 않았으며 <바가바드기타>가 사회주의를 설교한다고 보지 않았다. 또한 함석헌은 힌두교 경전인 <바가바드기타>를 기독교의 입장에서 해석하면서 여전히 기독교 중심론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는 그동안 함석헌의 <바가바드기타>에 대한 해석 중 중요한 부분으로 여겨졌던 종교다원론에 대한 재검토를 촉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간디와 함석헌의 사상을 수용사적 측면에서 비교 검토하는 본 작업은 냉전기에 재편된 민중과 운동에 대한 인식을 넘어 간디의 사상을 현재 사회 전체의 새로운 비전으로 제시하기 위한 중요한 토대가 된다. 이는 나아가 간디의 사상을 비폭력주의에 한정하지 않고 시민저항을 위한 전략적 수단으로서의 비폭력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인권운동에 대한 고민의 시발점이이기도 하다.

 

함께 있음의 온도차, 애씀의 인터페이스

-로컬처와 쉬플레망 사이를 오가는 발걸음의 기록

권명아

1. 패배를 급진화하기: 현실주의와 역사적 전망의 낙차

2012년 12월 역사의 반복에 대한 무거운 예감 속에, 많은 이들이 절망과 환멸의 끝자락에 서 있다. 국민이라는 것 내부의 격렬한 대립 속에서 과연 우리 앞에 어떤 미래가 다가올지, 혹은 그 미래라는 것이 있기는 한 것인지 예측과 분석과 전망들이 어렵사리, 혹은 다급하게 전해진다.

문득, 1940년의 어떤 시간이 떠오른 것은 역사를 통해 오늘을 되돌아보는 자의 관성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런 역사를 떠올리며, 절망과 환멸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는 날들이다. 일제 말기의 자료들을 보며 언젠가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1944년, 1945년 이런 시점에서 식민지 조선인들은 어떤 미래를 전망했을까? 지금처럼 정보에 대한 접근력이 높지 않은 시점이었지만, 지식인들의 세계 정세 판단이 그리 뒤떨어졌다고는 보기 어려웠던 시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파시즘 동맹의 주축이던 독일도 항복한 시점에서 여전히 일본을 지지하고, 전시협력을 주장하며, 뒤늦게 전시협력 단체에 가입하여 열렬한 지지를 표명한 이들도 있었다.

훗날의 역사가의 시점에서 보자면 이들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자들’이었지만, 당대에는 오히려 이 시점에서의 전시협력이 더욱 열렬하고 적극적이었다. 그 시점에서 일본의 패전을 전망하기란 그리 쉽지 않은 일이기도 했거니와 역사란 그런 전망이나 관측만으로는 온전히 ‘알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역사적 불가지론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역사란 ‘전문가’의 식견만으로 온전히 파악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전문가의 식견이란 것과 역사적 전망을 갖는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 아닐까.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당대에나 훗날에도 주의주의나 근거 없는 낙관주의로 평가받기도 했던 지하로 잠복한 ‘극단적 아나키스트들’의 제국주의 필패론 같은 것은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역사적 전망이라는 것을 선취한 사례인지도 모른다. 즉 당대에 구현된 현실이라는 맥락이 아니라, 이후에 도래할 미래라는 차원에서 볼 때 오히려 역사적 전망에 입각한 삶-실천의 어떤 양상의 하나로 생각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니까 <지금-여기>에서 이기느냐 지느냐, 혹은 자신의 이념이나 실천이 인정을 받는가 아닌가는 현실주의자에게는 중요할 수 있으나, 역사적 전망에서 보자면 그리 중요하지 않다. 현실의 동향과 경향을 잘 파악하는 것이 리얼리스트에게 매우 중요한 안목이기는 하지만, 역사가 보여주는 바 이러한 안목이 현실 ‘개입’에서 현실에 충실하다는 의미의 현실주의로 변용되는 것 또한 빈번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역사적 전망에 입각한 삶-실천은 때로는 시대착오적일수도 있지 않을까. 비록 그것이 우둔한 정신승리에 불과할지라도, 시대착오, 지금-여기의 흐름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것 또한 필요하지 않을까.

의식적인 우둔함, 혹은 의식적인 패배. 혹은 패배를 역사적 전망 속에서 급진화하기. 이왕 패배할 것이라면, 더욱 적극적으로, 더욱 급진적으로 패배할 것.

2012년 12월의 어떤 동선을 그려나가며 문득 이런 단상을 떠올려본다. 그리고 다시금 되뇌어본다. “적극적으로, 더욱 급진적으로 패배할 것.”

 

2. 함께-있음의 온도차, 로컬처와 쉬플레망을 오가며

 

그림 1. lo-culture 합평회 < '함께-있음'의 '사이-공간' >의 자료집. 특히 이번 합평회는 팀원들의 힘을 '모아 모아', '십시일반'으로 만든다는 의미를 살려, 자료집도 손수 제작하였다.

2012년 12월 19일 아프콤은 한자리에 모여 개표방송을 보았다.20일에는 합평회를 위한 사전 모임, 21일에는 아프콤의 고유한 기획 로컬처의 새로운 버전인 <합평회>를 모퉁이 극장에서 진행했다. 새벽이 다되어서 자리를 파하고, 21일 오전에는 서울에서 열리는 상허학회 2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 참가했다. 상허학회와의 오랜 인연도 인연이지만, 20주년 기념으로 발간되는 <상허 별책-쉬플레망>의 좌담에 아프콤의 멤버 두 사람이 참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합평회 자리에서 누군가 물었다. <아프콤은 어떻게 이렇게 적은 인원으로 그렇게 많은 일을 하는가? 조금 쉬거나 일을 줄이는 것이 좋지 않은가?> 그렇다. 숨 쉴 틈 없는 일정들을 무엇이라 말해야 할까. 이런 비유가 과도할지는 모르지만, 매일매일 출근하는 회사원들보다 파업 중인 노동자들이 쉴 틈 없고 해야 할 일이 끝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회사원들 (혹은 회사원이 되고 싶어 하는 이들)의 일상의 피로가 성과 주체의 증상이라면, 파업 중인 노동자의 고단함을 피로사회의 징후로 환원해서는 안 되지 않을까? 마찬가지로 거대 프로젝트 수행자들의 성과주의적 피로와 아프콤의 고단함을 같은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하지만, 단언하기는 어렵다.

 

그림 2. 2012.12.21. 아프콤 lo-culture 합평회, 모퉁이 극장. 부산. 철학자 양창아씨와 아프콤, 아프콤의 초대 손님들이 모여서 함께-있음의 의미와 그 실패에 대해 함께 말을 나누었다.

 

고단한 일정, 무거운 발걸음으로 이곳과 저곳으로 나아가는 발걸음을 전하는 것이 아프콤의 중요한 기록이기도 하다. 이번에는 합평회와 쉬플레망을 오가며 얻는 단상을 전하고 싶다.

“부산은 따뜻하죠?”

서울에서 만난 누군가, 아직도, 가끔 이렇게 물어온다. 오늘도 누군가 이런 질문을 건네 온다. 이런 질문을 하는 ‘분들’과는 길게 말을 하지 않는다. 물론 그 질문을 한 상대방이 난생 처음 만난 사람, 예를 들어 택시를 탔는데, 내가 부산에 살고 있다는 걸 알고 질문을 던진 기사분이라면, 나도 무언가 그에 걸맞은 대답을 할 것이다. 그러나 학문장이나 문학장 등 내가 오래 함께 해온 장의 누군가가 그런 질문을 할 때는 나는 그저 “아, 예.”라고 말하고 만다. 이런 질문에는 지방에 관해서는 ‘날씨, 먹을거리, 풍경’ 같은 것 외에는 궁금해할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전형적인 식민주의적 태도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부산 연구자들이 무엇을 공부하는지, 부산의 문화적 풍경은 어떠한지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것이다. 아니 이런 태도는 지식과 문화, 혹은 정치마저 온통 ‘서울의 것’이기에 지방에 대해서는 지적이거나 문화적으로 궁금해할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전형적인 식민주의의 소산이다.

부산으로 삶의 거점을 옮긴 초반에는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점차 이런 질문의 빈도수가 줄어든다. 대선을 전후해서는 “부산 분위기는 어때요?”라고 진정 궁금해 하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대선 결과를 보고 ‘여전한 지역주의 투표’에 대해 한심한 표정을 짓는 이들도 많이 만나게 된다. 지난 지방 선거 때도 페이스북을 도배한 지역에 대한 비난과 환멸을 담은 글을 보며 이런 비슷한 표정들을 만났다. 이들에게는 투표 결과만이 중요하지, 과연 지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는 관심 밖의 일이다. 아니 관심이 있어도 “과연 지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는 달리 알기 어려운 일이거나,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이란 알아도 별 차이가 없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들”일 정도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과연 지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이런 질문에 대해 부산에 거주한지 고작 몇 년밖에 되지 않는 나로서도 대답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는 단지 경험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실상 이런 질문 자체가 ‘앎’에 대한 어떤 오만함, 혹은 계몽주의적 태도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는 “타자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온전히 알 수 있는 것일까? 이런 온전한 앎에 대한 욕망이나, 계몽주의적인 자부심이 오히려 우리의 앎을 맹목으로 이끄는 지도 모른다.

 

그림 3. 상허학회 20주년 기념 학술대회는 “지금 여기, 문학연구(자)의 벡터”라는 주제로 진행되었다.

새벽이 가까워 마무리된 아프콤 합평회의 잔상을 뒤로하고, 아침부터 발걸음을 재촉하여 서울로 날아갔다. 150여명이 넘어 보이는 청중들, 수십 명에 달하는 발표자와 토론자들, 20년의 긴 역사를 함께 해온 수많은 연구자들과 선후배들의 자부심 넘치는 표정들. 따스하고 훈기 넘치는 그 공간에 앉아, 길고 긴 이동의 시간에서 오는 몸의 피로 만은 아닌, 온몸의 근육이 움츠러드는 것 같은 느낌도 받았다.

그것은, 아직도 잔상으로 내 망막 어딘가를 떠도는 지난 새벽까지의 어떤 자리의 인상과 짧은 시간차와 긴 거리차를 갖고 있는, ‘지금 이곳’의 인상 사이의 어떤 낙차 때문이었으리라. 

열 명을 조금 넘는 참가자들, 모퉁이 극장의 재정이 불타오르는 것만 같아 타오르는 것을 보기가 차마 안타까웠지만, 결국 공간을 덥히기에는 역부족이었던 석유 난로와, 저마다 애쓰며 꾸려나가고 있지만, 여전히 힘 겹기만 한 지역의 작은 모임들에 대한 말들이 오가던 자리. 채 몇 년을 넘기지 못하고 사라져버리는, 작은 기록조차 갖지 못한 채 그저 소실되어버리는 ‘지역 공동체’의 ‘역사 없음’에 대한 안타까움이 마치 불타버리는 모퉁이 극장의 재정 상태마냥 안타깝기만 했던 자리. 

그 두 영상이 오고 가며, 규모와 온도와 역사와 기록과 기념의 낙차가 어지럽게 머리보다 먼저 몸에 내려앉았다. 그러나 이런 낙차의 어지러움에서 오는 움츠림 속에서 머리보다 먼저 근육이 움직인다. 어깨를 펴고 숨을 고른다.

 사실 서로 다른 자리를 오가는 이에게 이런 낙차에 대한 실감은 현실이기도 하다. 서울로 올라가는 자리에서 아프콤의 김대성 선생은 끝없이 내게 “피곤해보이면 안 된다. 힘들어해서도 안 된다. 그저 심상하게 자리에 참여하고 마치고 와야 한다. 왜냐하면 그곳의 사람들은 우리가 이렇게 가는 것을 알지도 못하고 알 수도 없기  때문이다.”라고 끝없이 자기에겐지 나에겐지 알 수 없는 말을 되뇌었다. 그런 다짐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이곳과 저곳 사이의 낙차에 심상해지기 위해서는 말이다.

그 낙차가 현실이다. 그 현실을 감당하는 것이 온전히 아프콤만의 몫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실은 그것은 낙차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서로 다른 두 세계의 모습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아프콤에게는 아프콤이 대면하고, 발 딛고 서있는 세계가 있다면, 쉬플레망에는 쉬플레망이 대면하고 발 딛고 서있는 세계가 있다. 상허 역시 마찬가지이다. 두 세계는 참으로 이질적이지만, 두 세계와 대면하는 모습에서는 많은 부분 닮아 있기도 하다. 합평회 자리에서 그리고 시간과 장소를 달리한 상허 자리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서로 저마다 다른 세계 속에서 자기가 대면한 세계를 조금은 다르게 변화시키고자 노력하고 그 노력을 통해 거기에 작은 현장을 만들어내고, 그 현장에 많은 사람을 초대하고 공대하려는 애씀의 모습들이었다.

 

그림 4. 상허학회 20주년 기념 별책 『쉬플레망』. 신진연구자의 생애사적 기록의 일환으로 좌담이 마련되었다. 아프콤의 김대성, 양순주 두 사람이 이 좌담에 참여하였다

그런 점에서 신진연구자들의 생태계를 분석한 논문 「한국현대문학 예비연구자들의 연구 환경 고찰」(정기인, 이성근, 정인관)과 그 논문에 대한 토론(임태훈, 천정환)은 이러한 서로 다른 세계에 대한 중요하고도 어려운 문제를 내포하는 것이었다. 신진연구자들의 생태계를 분석한 논문은 3인의 연구자가 서울 지역의 6개 대학의 대학원생에 대한 설문조사를 토대로 한 양적 연구에 입각한 결과를 보여주었다.

신진연구자들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불안의 온도 차이가 많은 부분 “교수가 될 가능성”에 대한 전망의 격차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이 이 논문에서 밝힌 중요한 지점이다. 또한 “교수가 될 가능성”에 대한 전망은 “본과 출신 남자 대학원생”이 가장 높고 “타과 출신”과 “여자 대학원생”은 상대적으로 낮다는 것이 이 연구의 결과이다. 즉 “교수가 될 가능성”에 대한 ‘개인적’ 전망은 많은 부분 주관적 판단에 입각한 것만이 아니라, 자신의 ‘출신 성분’에 대한 객관적 판단에 입각한 것이다. 그리고 슬프지만 이 객관적 판단은 한국 학계에서의 “교수 입문의 지표”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리고 이 지표는 지방과 서울 사이에도 차이가 없고, 오히려 지방의  경우 이 “교수 입문의 지표”는 거의 성스럽게 지켜지기도 한다. 그리고 지방의  경우 이 지표는 지방 내의 배제의 표지로 전혀 해석되지 않고, 지방 대 서울의 대립 구도로만 간주된다. 즉 지방대에서 본과/모교 출신을 교수로 임용하는 것은 외부(서울/타학교) 인력에 대한 ‘본교출신자’의 ‘열악한 지위’를 보호하는 당위이자 요청으로까지 신성화되어 있다.

물론 이 연구에서는 지방대의 사정은 다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대해 토론에서 임태훈 선생이 날카로운 지적을 하기도 했다. 공동 연구자들은 설문 조사와 양적 조사라는 연구방법론 상 양적 토대를 갖춘 대학, 즉 현대문학 전공 대학원생이 과정생으로서 20명 이상 재학 중인 대학으로 연구 범위를 한정했다고 밝히기도 하였다. 임태훈 선생의 날카로운 지적에 동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나는 ‘이 연구’가 꼭 지방이나 서울 지역의 여타 대학 모두를 포괄했어야만 하는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이 논문은 연구 대상의 한정된 범위를 의식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임태훈 선생의 질문도 이런 문제의식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고 보인다.)

실상 모든 연구가 모든 대상을 다 포함해서 다룰 수는 없다. 다만 자신의 연구의 한정된 범위를 인지하고, 그 한정된 범위에서 논의할 수 있는 의제를 구축하는 것, 거기서 보편성과 특이성, 특수성의 문제들을 명료하게 하는 것이 모든 연구자가 감당할 문제라 할 것이다. 많은 부분 이 연구가 서울 지역 6개 대학을 대상으로 한 것은 이 연구가 발생한 자리의 여러 조건에서 비롯된다고 보인다. 따라서 이 연구는 그 발생의 문맥을 충족하는 차원에서의 논의로서는 그다지 문제가 없을 수도 있는 것이리라. 발표 자리에 참여한 참가자들 대부분이 해당 연구의 대상이 되는 대학의 대학원생이었으리라는 것도 쉽게 짐작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연구는 그 논의의 현장에 가장 적합하고도 필요한 연구 자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대형 대학에서의 교수 임용에 있어서의 배타적 독점의 기제는 이 연구도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단지 임용의 차원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연구자의 생애사적 전망과 연구 방법, 삶의 태도 전반에 깊숙하게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교수임용에 있어서의 이러한 배타적 독점의 기제가 그러하니 국문학 연구의 현장에서의 연구방법론과 지식 생산의 배타적 독점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은 누구나 알지만, 공적 담론으로는 밝혀진 바가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이 지점 또한 토론 자리에서의 중요한 논제이기도 하였다.

 현대문학 과정생이 20명이 넘는 대학을 현장으로 두고 있는 교수나 연구자와 대학원생을 통틀어도 3명이 넘지 않는 대학을 현장으로 두고 있는 교수나 연구자가 감당하고 다루어야할 문제들은 공통점도 있지만, 아주 이질적인 부분이 더욱 많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 대학 제도는 이러한 이질성과 각기의 특이성들로 구성된 전체이다. 그러나 자주 ‘대학’ 혹은 ‘연구자’의 문제는 이런 이질성과 특이성의 차원이 아니라, 특정한 대표성의 차원에서 논의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대표성을 비판하고 문제시하는 것만으로는 아무 의미도 없다고 감히 단언하고 싶다. 서울 중심의 대학 구조나, 서울 거대대학의 독점 구조를 비판하고 한탄해보았자 아무 의미도 없다, 이런 비판과 한탄은 그 의도의 정치적 올바름에도 불구하고 결국 ‘시혜적 주체’에 대한 요구로 귀결될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학 제도 ‘안’에서도 우리는 모두 다른 현실과 다른 세계를 살고 있다. 제도의 ‘안’이라는 단일한 공간도 없거니와 제도의 ‘바깥’이라는 영역 또한 단일하지 않다. 문제는 각기 서 있는 현장 속에서 이러한 배타적 독점화에 저항하는 저마다의 실천을 구축해내는 일이다. 이런 실천을 통해서 비로소 실천의 특이성이 구축되는 것이며, 저마다의 현장에서 구축되는 이러한 특이성을 통해서 우리는 대학/지식/문화 제도 내에서의 배타적 독점의 구조와 배제와 절멸의 기제에 저항하는 보편적 투쟁을 일궈낼 수 있는 것일 터이다. 

3. 분열(증)의 몸, 어소시에이션의 신체: 기이한 열정의 자리들

“혹시 연애하는 것 아닌가요?”

“왜 서울로 올라올 생각을 안하냐?”는 질문에 여러 번 같은 응답을 하여도 사람들은 그저 고개를 갸웃한다. 그리고는 무언가 생각난 듯 이렇게 질문하곤 한다.“혹시 연애하는 것 아닌가요?” 그렇다.서울 태생이고,서울을 중심으로 한 학계에서 나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부산에 있기를 고집하는 것, 혹은 부산에서 무엇인가에 열심을 부리고 의욕을 부리는 모습이 서울에서 함께 공부하던 지인들에게나 서울에 근거를 둔 연구자들에게는 기이하게 보일지 모른다. 나 자신도 나의 이런 태도가 과연 ‘현실적인가’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게다가 아프콤이라는 정체불명의 모임과 함께 해나가는 일들에 대해 누군가는 격려를, 누군가는 의구심을 표명하기도 한다.

게다가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동안 부산을 거점으로 대안적 연구모임을 구축해왔으나, 지역에서의 ‘거점’을 구축하는 데 있어서 그렇다할만한 ‘성과’를 내놓고 있지도 못한 것이 사실이다. 또 아프콤의 활동에 대한 지역의 응답 또한 거의 부재한 형편이다.부산 지역의  경우 지역에서의 인문학과 문화 관련 실천에 있어서도 역시 지역 출신이 중심이 되어 진행이 되어 왔고 외부인에 대한 배타적 시선은 여전히 강고하다.현대문학 연구자들의 경우도 지역출신의 선배들이 중심이 된 거점을 토대로 움직이는 것을 더욱 선호하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그리고 이러한 지역의 관성과 예비연구자들의 동선에는 앞서 살펴본 서울 소재 대학에서의 예비연구자들의 조건들과 다르지 않은 문제들이 복잡하게 개입되어 있다.물론 이는 이러한 지역의 관성을 변화시키기에는 아프콤의 활동이 역부족이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어찌 보면 무의미하고 실패로 점철된 ‘지역에서의 함께-있음’을 과연 계속해나가는 것이 현실적인 의미가 있는지 아프콤 내외에서도 회의의 시선이 팽배해있는 것도 현실이다.사정이 이러하니, 도대체 왜 이런 일을 해나가는지, 혹은 왜 이런 방식의 함께-있음의 실천을 고집하는지에 대해 해석과 판단이 불투명한 것 또한 아프콤이 처한 현재적 상황이기도 하다. 

아프콤의 합평회가 있던 날에도 아프콤의 극진한 말들과 응대를 다소 기이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다.그러나 그 자리에 함께 한 사람들 중 지역에서 작은 대안적인 모임들을 꾸려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긴 설명이 없이도 아프콤의 이러한 기이한 열정을 자신의 것 마냥 이해를 하였다.다른 지역의 경우를 논하기는 어렵지만 아프콤을 해나가면서 부산 지역의 작은 모임들과 함께 고민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부산 지역의 인문학이나 문화를 중심으로 한 대안 공간의 사정은 다들 비슷하다.적은 인원, 열악한 재정 상태,그로 인하여 한정된 인원이 열정을 불태우고 소진해버리면 사라져 버리고마는 장소들.그러나 그렇게 열정을 불태우지 않으면 시작도, 계속도 불가능한 그런 사정들.하여 이런 작은 대안 공간은 외부에서 보기에는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기이한 열정으로 채워져 있다.그리고 이 대안의 자리, 그 장소들은 이 열정을 에너지로 해서 움직인다.하여 이 자리를 움직여나가기 위해 한 명 한 명 씩 마치 온몸을 불사르고 사라지는 촛불처럼 그렇게 꺼져간다.

외부에서 이 작은 대안공간을 채운 기이한 열정을 바라보는 이들에게는 마치 이 작은 공간의 구성원들이 자폐적이거나 동일화된 ‘은밀한 연대의 쾌락’을 영유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그 열정은 온 몸을 불사르는 고통을 동반하는 것이기도 하다.아마도 사정을 모르는 이들이 내게 “혹시 연애하는 것 아닌가요?”라고 물은 것은 이러한 기이한 열정의 낌새를 조금은 감지한 결과이겠으나, 이들에게 그 열정의 원천으로 참조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연애’와 같은 ‘현실적인 것’ 외에는 달리 없을지도 모른다.

물론 연애와 같은 현실적인 열정과 타인과의 함께 함의 양식을 부정하거나 비하할 필요는 없다.오히려 새로운 삶을 위한 결속(연대이던 결사이던 혹은 어소시에이션이던)의 원리에서 ‘연애’(연애와 사랑은 다르지만)와 같은 정념의 자리를 배제해온 것이 기나긴 진보 정치의 역사의 한계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아프콤이 정동과 코뮨이라는 이질적인 두 키워드를 연결시켜 모임의 이름으로 가져온 것도 이러한 사정에서 비롯된다.하지만 아직은 우리에게 어떤 이해관계도 없이 낯선 타인과 함께 하는 열정의 자리는 ‘연애’라는 세속적 장치 외에는 달리 그 형태를 갖추고 있지 못하다.바타유에서 낭시에 이르기까지 ‘연인들의 공동체’를 코뮤니즘이라는 한계의 언어와 결합하고자 하는 사유와 실험은 아직은 ‘미래의 것’으로 남겨져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념과 함께-있음의 문제에서 우리들이 대면해야 하는 현실적인 것은 사랑이라는 진리 공정(바디우)이 아니라,너로 인해 ‘나’가 산산이 부서지고 박탈되는 것에 대한 불안과 분열증이다.아프콤의 지난 역사 역시 이러한 분열의 시간이기도 했다.그러나 그 분열을 단지 불화라 치부해서는 안될 것이다.코뮨이 너와 나가 하나 되는 황홀경으로 구성될 때의 위험성을 우리는 코뮤니즘의 이론과 역사를 통해서 ‘잘 알고’ 있다.그리고 너와 나의 차이와 단수성의 인정이 도래할 코뮨에서 중요하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막상 현실의 코뮨에서 이는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현실에서 너와 나는, 너와 나의 차이는 해소될 수 없는 갈등과 대립과 균열을 함께-있음의 시간과 자리에 끝없이 기입한다.아프콤의 고유한 기획인 로컬처의 새로운 버전인 합평회는 바로 이런 함께-있음의 사이에서 발생하는 정념을 나누는 자리였다.아프콤과 철학자 양창아씨는 각자 자신의 경험을 통해 함께-있음의 자리에서 발생하는 대립과 균열, 혹은 슬픔과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때로 이 대립과 균열은 새로운 관계로의 변환과 접속을 거부하는 몸의 완강한 관성적 완력으로 함께-있음을 파괴하기도 한다.아프콤 역시 이러한 관성적 완력 속에서 버팅기고 파열하기를 지속해왔다.그러나 한편으로 이 대립과 균열은 ‘나’가 전혀 다른 ‘너’라는 또다른 신체와 만나 변용해나가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나’라는 관성적 몸의 파열과 열림의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는 것을 합평회의 긴 시간을 통해서 나는 새삼 깨닫게 되었다.

함께-있음은 현실의 연애와 같은 달콤한 환희나 즐거움을 주기보다는 너로 인한 찢겨짐과 파열의 고통을 동반하는 일이기도 하다.그래서 불가능한 실험을 위해 제 몸을 불사르고 사라져버리는, 그 기이한 열정은 함께 있음의 달콤한 환희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파열과 찢겨짐의 고통에서 비롯되는 것이다.그러니 그 기이한 열정에 대해 그저 ‘아름답다’거나 ‘의미 있는 일’이라고 감히 말하지는 말자.

부산에서 서울로, 아프콤에서 쉬플레망으로 걷고, 뛰고, 달음질치는 동선 속에서 내가 경험한 현기증은 그런 점에서 실은 지난 아프콤의 역사 속에 고스란히 담겨졌던 ‘나’의 분열의 어떤 결산처럼 보인다.고백은 반칙이지만, 고백하건데 나는 부산에서 대안적 연구 모임을 해온 지난 몇 년간 어떤 분열증에 시달린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서울과 부산 사이에서,교수와 코뮨의 오거나이저 사이에서,학자와 실천가 사이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서 그 많은 사이에서 나는 무수한 낙차와 차이들과 조우했다.그러나 오랜 시간 나는 그 낙차나 차이들에 단지 ‘시달려’왔던 게 아닐까 자문해본다.그러나 아프콤에서 쉬플레망으로 이동하는 어떤 시간 속에서 혹은 어떤 허공에 매달려서 나는 그 낙차와 차이가 단지 내가 시달려야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내가 서 있는 자리들의 이질성과 그 자리들 사이의 차이라는 것,그리고 그 서로 다른 자리에서 변용되거나 변용되기를 거부하는 몸의 어떤 증상이었음을 어슴프레 인지한다.

또한 그 시달림은 단지 내 몸의 증상만이 아니라,내가 ‘너’라는, 때로는 나를 압박하고, 때로는 나를 부정하고, 때로는 나에게 반역하는 그 온전히 알 수 없는 ‘너들’과 조우했던, 조우하고 있는 그 파열의 몸살이라는 것을 또한 희미하게나마 인지하게 된다.이런 의미에서 지난 시간 열병처럼 나를 들뜨게 했던 기이한 열정과 그로 인한 몸살과 시달림은 단지 피로나 환멸, 실패의 기록만이 아니라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는 ‘너들’, 그 타자의 압력 속에서 다른 몸이 되어가기 위해 앓아야했던 몸살이라는 것을 비로소 생각해본다.아프콤의 긴 균열의 역사 역시 그런 점에서 단지 불화와 실패의 시간이 아니라 서로 다른 타자들이 함께-있음의 새로운 인터페이스를 구축해나가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한 그런 파열에서 비롯된 긴 몸살의 시간이었던 것이다.

하여 나도, 너도, 아프콤도, 긴 몸살의  끝에 너-나의 인터페이스로 구성된 다른 몸이 되어가고 있는 게 아닐까.그 몸이 비록 비례와 균형이 맞는 그런 몸도 실전에 잘 응전할 수 있는 ‘선수들’의 몸도 아닌,뜯기고 파열되고 너덜너덜한 그런 몸일 지라도 그렇게 아프콤은 다른 몸이 되어 새로운 시작을 기약하고 있다.그래서 ‘우리’의 새로운 시작은 함께 있음의 은밀한 환희나 황홀경에서가 아니라 너와 내가 서 있는 세계의 너무나 다른 낙차 속에서,함께-있음의 그 온도 차이 속에서,불화와 파열음 속에서, 그 대립과 분열 속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닐까.그 긴 여정  끝에 이런 말을 아프콤과, 그리고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분열을, 대립을 파열을 두려워하지 말자.그것이야말로 내가 너와 함께 있음의 지울 수 없는 표지일 터이니 말이다. 

 

 

 

 

 

 

 

 

 

 

* <aff-com과 어소시에이션>은 부대낌의 노동이 생성해나가는 삶-공부의 이행의 순간들을 글쓰기를 통해서 전하며, 민족문학사연구소 홈페이지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http://www.minmun.org/

 

한 명의 연구자가 된다는 것은 자신만의 연구 영역을 구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연구 영역이란 단지 자신이 탐구하는 연구 주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연구자가 구축해가는 영역은 계량화된 지표의 집적물로 채운 공간이 아니라 연구를 삶의 중요한 부분으로 삼아 애써 일군 장소적 개념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한 명의 연구자를 만난다는 것은 그가 애써 일구고 가꾼 장소에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연구자가 서 있는 장소 또한 누군가의 안내를 통해, 누군가의 만남을 통해, 누군가의 돌봄을 통해 조형된 곳일 테다.

 

양창아의 <한나 아렌트, ‘-기쁨’/ ‘-고통’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어떤 장소에 대한 사유>라는 글은 그렇게 조형한 장소와 닮아 있다. 아렌트라는 연구 대상을 만나게 된 시작점에서부터 연구 주제를 잡고 그것을 검질기게 탐구해간 궤적은 연구자가 되어간 궤적과 다르지 않다. 흥미로운 것은 그 궤적에서 우리는 한나 아렌트라는 ‘사상가의 말’뿐만 아니라 한 연구자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관계의 말들’을 함께 만나게 된다는 데 있다. 공적 영역으로부터 추방당한 이들의 ‘말’과 ‘행위’의 회복과 정치적 권리의 복원이라는 아렌트의 기획을 양창아는 텍스트에 대한 독해만이 아닌 연구자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 속에서 만난 이들과의 ‘말’과 ‘행위’의 나눔을 통해 접근하고 있다. 이를 통해 '연구를 한다는 것'은 ‘말’과 ‘행위’의 나눔을 실천하고 실험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니 한 연구자가 탐색하고 탐구하는 연구란 나눔과 돌봄의 궤적과 다르지 않다 하겠다. 연구와 현실, 이론과 실천 사이의 거리를 직시하고 바로 그 거리를 연구의 자리로, 삶의 현장으로 삼고자 하는 태도에서 우리는 삶-연구의 한 양식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 한 명의 연구자가 된다는 것은 나눔과 돌봄을 통해 조형한 작은 공동체를, 작은 코뮌의 실험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라 하겠다. 어소시에이션의 실험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김대성(연구모임 aff-com)

 

 

 

 

 

 

 


한나 아렌트, ‘말-기쁨’/‘말-고통’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어떤 장소에 대한 사유*


 

 

 

양창아

 

 

 



나는 그녀를 독점할 수 없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에 대한 강연을 하기로 마음먹은 첫 번째 이유는, 우습지만, 그녀의 이름은 누군가가 “전공이 뭐에요?”라고 물었을 때 내가 대답하는 고유명사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질문에 항상 “나의 전공은 한나 아렌트입니다”라고 답한다(물론 그녀가 남긴 많은 말들이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여러 문제들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참고할 만하다는 판단도 있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그러한 판단을 하게 된 것도 몇 년간 내가 그녀의 글을 꽤 집중해서 읽었고 그 독해의 결과를 논문으로 써냈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이런 질문과 대답이 오가면 뭔가 미묘한 불편함에 시달리는데, 문득 그 불편함을 이루는 요소들 중 하나가 그 대답과 더불어 다른 사람이 그녀에 대해 묻는 모든 질문에 내가 대답해야만 하며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요구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요구는 어느 순간 내 속에서 저절로 일어난다. ‘너의 일은 그녀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니 너는 그녀에 대해 모든 것을 알아야 하며 대답할 의무가 있다. 그들은 너의 대답을 통해 그녀를 만나게 될 것이다.’ 책을 읽다가 그녀의 이름이 나오면, 다른 그 누구보다도 더 날카롭게 날을 세워 그녀를 보는 관점이 어떠한지 살피고 재단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어느 순간 ‘나는 여기 있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그녀와 가까우며, 그러니 그녀에 대해 더 잘 알 수밖에 없다’고 착각하는 일까지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애인(A라고 하자)에 대해 누군가가 묻는 것과 유사한데, “A는 지금 뭐하고 있나요? A는 무슨 음식을 좋아하나요? A는 이러저러할 때 어떻게 하나요? 그렇게 하면 A가 싫어하지 않나요?”라는 질문에 나는 B나 C나 D와는 달리 어느 정도는 자연스럽게 대답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현재 그 누구보다도 가까이 있으면서 생활의 많은 부분을 나누는 사람이 있을 때, 우리는 그가 어떤 눈으로 세계를 감각하고 바라보는지 짐작하고, 또 (적어도 다른 사람보다는) 알고 있다고 착각한다. 나는 그러한 착각이 그 또는 그녀를 독점하고 싶은 욕망(그것을 뒷받침하고 북돋우는 독점의 관습)과 더불어 생겨난다고 생각하는데, 누군가를 전공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도 이러한 욕망이 알게 모르게 작동한다.


내가 한나 아렌트를 처음 만난 것은 2004년 봄이었다. 김정현 선생님의 소개를 받아 그녀를 만났는데, 처음에는 그녀가 나보다 나이가 꽤 많은데다가 외국인이어서 그런지 도대체가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뭔가 모를 매력에 이끌려(그러나 실제로 이 일을 지속시킨 것은 학위논문을 써야 한다는 강박이었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그녀가 한 모든 말들을 찾아 읽고 받아 적고 생각하는 일종의 스토커 짓을 시작했다. 나의 하루는 그녀를 이해하기 위한 일들로 조금씩 채워지기 시작했고, 그런 하루들이 반복되면서 어느 순간 나는 그녀가 사용하는 말들로 세상을 보게 되고 말하게 되며, 그녀가 보는 방식으로 말들을 읽게 되고, 그러한 해석을 통해 얻게 된 잣대를 통해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판단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말하니 그녀를 숭배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다. 아무리 내가 그녀를 통해 세상을 보게 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나의 위치라는 게 있어서, 그녀의 말 중에는 동의할 수 없고 나를 짜증나게 하는 것들도 있다. 올해 8년차라 콩깍지가 벗겨진 탓일까? 이해했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더 눈에 들어오고, 나의 뜻대로 그녀의 말을 다시 쓰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나의 자리는 그녀의 자리와 다른데, 왜 내가 그녀의 말에 휘둘려야 하는가? 더 이상 그녀의 뜻대로 내가 따라가길 바라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누군가가 그녀에 대해서 좋지 않은 말을 하면 괜히 내가 억울함을 느끼고 항변하게 되는 걸 보면 아직 떠날 때는 아닌가보다. 그리고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렇게 항변하는 나를 보면 내 안에 그녀를 혼자 갖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 그리고 짧은 시간이지만 정신을 차릴 수 있을 때, 그러니까 거리라는 것을 둘 수 있을 때 그녀와 나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다음과 같은 꽤나 현명한 결론이 나기도 한다. 그 욕망이 강할수록 나는 그녀의 또 다른 면모를 절대 볼 수 없을 것이다.


배수아의 장편소설 『북쪽 거실』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어느 순간을 형상화하여, 그로 인해 무한대의 ‘나’ 중의 하나의 ‘나’를 ‘나’라고 지칭함으로써 가시적인 존재로 만들어 보인다는 뜻이다.”(33쪽) 이 말에 공명하여 나는 이 글에서 보이게 될 나와 그녀의 만남의 한계(또는 조건)를 밝히고 싶다. 즉 그녀는 그 자신이 표현한 말들 속에서 일정 부분만을 드러내고(동시에 숨겨지며), 그 부분 가운데 어떤 부분이 ‘나’(이 역시 수많은 ‘나’ 중의 하나일 수밖에 없다)를 통해 드러날 것이다. 이 말은 곧 내가 여기서 한나 아렌트의 사상을 ‘객관적으로’ 전달할 수 없음을 드러내고 있으며, 그저 그녀와 나의 관계의 한 모습을, 더 정확히 말해 그녀와 나의 만남의 기록을 일부 전달할 것임을 알리는 것이다. 그 일부란 아렌트가 그다지도 강조했던 ‘공적 영역’이 의미하는 바를 소개하고, 그것이 결국 사람들이 맺는 ‘관계의 형식’을 문제 삼는 것임을 얘기하는 것이다. 특히 이 글을 쓸 때 염두에 둔 것은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그 중에서도 ‘우리’가 느끼고 있는 어떤 긴장, 묘한 감정들이 얽히고설킨 채로 있어서 말로 표현하면 할수록 상황이 꼬여버릴 것만 같은 느낌을 주는 이 긴장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이 글을 시작하게 한 문제(지금 내가 부딪히고 있는 문제 상황)이다.




공적 영역, 그것의 다른 이름은 ‘사이-공간’이다


가장 잘 알려진 책, 인간의 조건Human Condition(다른 제목: 활동하는 삶Vita activa oder Vom tatigen Leben)에서 아렌트는 근대 사회를 경제적인 것에 의해 정치적인 것이 잠식되어, 결국에는 정치적 영역 자체가 사라져버린 공간으로 진단․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그녀는 많은 경우 “공적 영역의 상실”로 표현하는데, 덕분에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그녀의 사상이 ‘사적인 것=경제적인 것’과 ‘공적인 것=정치적인 것’을 확실히 구분하면서 앞의 것보다 뒤의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으로 해석하고 끝내거나, 조금 더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이러한 면모 덕분에 그녀의 사상이 자본주의 사회의 주요 문제인 경제적 모순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이 틀리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결론 격 지적은 너무도 단순한데, 그 이유는 그녀가 근대의 정치체제가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인간 배제의 형식을 문제 삼으면서, ‘공적인 것’, ‘사적인 것’, ‘정치’ 또는 ‘정치적인 것’의 의미를 다시 쓰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이 말이 무슨 뜻인지를 세 가지 면으로 나누어서 얘기해보자. 1. 누군가가 인간 대우를 받기 위해 또 다른 인간은 인간 대우를 받지 못하는, 역사적으로 어느 시대에나 있었던 바로 그 상황이 근대의 시작과 더불어 확실시되고 정교화되었다. 왜냐하면 근대의 정치체야말로 모든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선언과 더불어 탄생했기 때문이다. 일례로 그 전까지 사람들은 자신이 천한 신분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에 맞는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으나 그 이후의 사람들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는’ 데도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지 못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무능력이나 개인적인 운명 때문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아렌트는 특히 망명자로 생활하면서 인권 선언이 추상적이라는 것을 통렬하게 경험한다. 그에 따르면, 인권선언은 근대 사회에서 실질적으로 시민의 자격을 갖지 못한 사람은 인간이 아닌 자가 되어 버린다는 점에서 지극히 추상적이다. 이 추상성은 그 안에서 실제로는 사람들이 평등하지 않은 데도 이 체제가 법을 통해 자신의 정당성을 지키면서 그러한 비인간화 또는 억압이나 불평등을 예외로 취급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교묘하고 기만적이다. (그런데 이 시민의 자격이라는 것이 사회 자원을 이용할 수 있고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정치적인 일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라는 점을 염두에 둘 때, ‘대의제’라는 정치 형태에서 시민으로 인정받은 자들조차 진정 그런 힘을 가지고 있는지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이러한 내용에 대해서는 『전체주의의 기원, 이진우‧박미애 옮김, (한길사, 2006), 특히 9장을 참고할 것].


2. 시민으로 인정받은 자들에게 사적 영역은 공적인 업무에서 지친 몸을 누이고 쉴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이자 프라이버시의 공간일지 몰라도, 사회에서 배제된 사람들에게 사적 영역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게 하는 공간이자 유폐된 공간일 뿐이다. 나치 시대에 유대인이자 무국적 난민으로 살았던 그녀는 공적 영역에 접근할 수 없는 자의 고통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는데, 이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성적 소수자’, ‘장애인’, ‘노숙인’, ‘백수’, ‘잉여’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들에게도 해당된다. “사회가 추방된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그리고 주고 있는 가장 큰 상처는 그 스스로 자기 존재의 현실성과 존재 의의를 의심하게 하여, 자기 눈에도 자기가 ‘비실재(non-entity)’의 위치에 놓인 자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Hannah Arendt, “The Jew as Pariah: A Hidden Tradition,” in The Jewish Writings, eds. Jerome Kohn and Ron H. Feldman, (New York, Schocken Books, 2007), p. 289.]


3. 따라서 아렌트는 주장하길, 이 사회에서 설 수 있는 자리를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동정도 시혜도 아니며 억압받는 그 이름으로 당당히 제 한 몸 설 수 있는 자리를 갖는 것, 기존의 삶의 형식 또는 인간관계의 형식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공간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녀가 말하는 정치(the political)는 “너희 같은 (인간 같지 않은) 이들은 말하지 말라, 반항하지 마라. 너희는 이곳에서 말할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는 그 ‘좋은 사회’ 속에서 그에 대항하여 “우리가 여기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 말은 연약하고 금방 제압되기 쉽지만, 그 사회가 숨기거나 지우고자 하는 ‘그것들’이 나타남으로써 그 사회의 ‘정당한’(legitimate, 적법한) 말이 얼마나 추상적이고 기만적인지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강력하다.


이런 맥락에서 아렌트는 ‘사적인’(private)을, 그 용어의 다른 의미들 중에도 ‘박탈된’이라는 의미를 강조하여 사용하며, 이때 박탈은 ‘타인의 부재’에서 기인하는 (1) 현실성의 박탈, (2) 타인과의 객관적 관계의 박탈, (3) 삶 그 자체보다 더 영속적인 어떤 것을 성취할 수 있는 가능성의 박탈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인간의 조건, 이정우‧태정호 옮김, (한길사, 1996), 112쪽 참고]. 그러므로 ‘공적인’(public)은 그녀의 다양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과 있음으로써 비로소 느낄 수 있는 현실감’, ‘타인과의 관계 맺음’, ‘삶(생존) 그 자체보다 더 영속적인 어떤 것을 성취할 수 있는 가능성’의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러면 다시 이 절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그녀가 근대 사회를 공적 영역이 상실된 곳이라고 진단했을 때, 그 말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 ‘다른 사람과 제대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장소가 없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그녀가 전 저작에서 촉구하는 ‘공적 영역의 회복’은 사람들이 소유권을 가진 고립된 원자로서가 아니라, 타인(또는 타자)과 관계 맺음으로써 자기 자신을 (구성하고) 드러내는 자로서 서는 것, 그런 관계를 통해 나와 타자가 공유하는 세계에 대해 논의할 수 있는 공간을 구성해내고 (그러한 공간을 구성해냄으로써) 자신들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듯 공적 영역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생겨난 공간,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나와 당신, 그와 그녀가 만날 때에만 생겨나는 ‘사이-공간’(in-between)이다. 덧붙이자면, 아렌트가 ‘세계의 상실’ 또는 ‘세계로부터의 소외’라고 말할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도,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를 보고 듣는 공간이자 그들 사이에 존재하면서 그들을 맺어주기도 하고 분리시키기도 하는 ‘사이-공간’으로서의 ‘세계’가 더 이상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앞의 책, 102-6쪽].


그런데 이미 사라진 어떤 관계의 경험을 회복해야 한다는 아렌트의 주장을, 많은 이들이 (그녀가 든 예시 중 하나인)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에서 경험했던 형태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하곤 하는데, 그렇지 않다. 시간을 되돌리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어떤 관계 형태를 ‘되돌린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회복은 타자와의 관계를 제대로 맺기 위해 지금과도 다르고 이전과도 다른 새로운 관계를 창출해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가 상실한 관계는 본질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불행히도 또는 다행히도) 새롭게 구성해야 할 것이며, 특정한 과거의 정치체가 아니라 ‘무한한’(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과거로부터 재료를 찾아 함께 생각해야 할 과제이다[이 문단은 다음의 논문에서도 썼던 내용이다. 양창아, 「한나 아렌트의 ‘혁명론’의 시작: 배제된 자들의 관점과 정치적 경험의 회복」, 코기토 71, (2012, 2), 365쪽].



‘사유-행위’는 ‘말-기쁨’/‘말-고통’이 생겨나는 관계의 장소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과제는 얼마나 골치 아픈가! 지금까지 내가 맺어 왔던 관계 형식을 지우개로 슥슥싹싹 지우고 백지에 상상한 것을 그리듯 새로운 관계 형식을 그려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가 일하는 방식, 사랑하는 방식, 쉬는 방식, 꿈꾸는 방식까지 일정한 형태로 굳어져 있고, 그 형태를 뒷받침하는 생각들은 복잡한 말들로 짜여져 있다. 그리고 그 말들은 우리의 갖가지 경험과 엉켜서 우리 몸에 듬성듬성, 그러나 꾹 각인되어 있다. 그 말들이 우리의 경험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우리를 괴롭히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숨통을 옥죄고 있다고 느낀다면 기존의 관계를 변화시키는 일을 (어떤 방식으로든) 시작이라도 하겠지만, 그렇게 느끼지 못한다면 이런 논의조차 불필요해질 것이다. 다행히 관계의 이상 징후 또는 아픔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관계를 변화시키려는 일이 시작된다고 하더라도, 기존의 관계를 뒷받침하는 그 단단한 말들의 힘에 저항하여 그것을 뚫어내는 일은 (그 질은 다르겠으나 그 강도强度는) 이전의 고통만큼이나 고통스러울 것이며 힘들고 고단할 것이다.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관계 변화의 시작이 되는 ‘말’ 또는 그 시작을 알리는 ‘말’은 기존의 논리에 저항할 수 있는 정교한 대항 논리를 마련하는 일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여기 있다”고 말하는 하나의 행위이며, 그것은 또한 기존의 사회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감지하고도 또는 감지했기 때문에 그 받아들일 수 없는 몸을 드러내는 사유-행위이다.


이러한 종류의 ‘말’이 사유-행위인 이유는 역설적으로 이전의 관계를 완벽하게 대체할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일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불가능함은 우리의 ‘몸’이 하나의 균질한 덩어리가 아니라 복잡하기 짝이 없는, 서로 다른 조각들로 누덕누덕 기워진 프랑켄슈타인의 이름 없는 괴물의 몸과 유사한 데서 비롯된다. 이 몸의 조각들은 많은 부분 과거의 것인데, 그것들은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는 현재의 조각들, 그리고 앞으로 생겨날 미래의 조각들과 끊임없이 부딪히며 문제를 일으키고, 또 바깥에서 그 몸을 정리하고 조정하고 다스릴 어떤 힘(그러한 힘이 있다고 한다면)에 좀처럼 굴복하지 않는다. 달리 말하면 ‘나’의 몸은 나의 것이 아니라 내가 맺고 있는 여러 관계(사회와의, 자연과의, 타인과의, 사물과의 관계)의 결과물이며, 지금 ‘내’가 맺고 있는 관계들은 이미 형성된 틀에 따라 만들어져 있거나 (어찌할 수 없이 또는 당연히) 나의 통제 아래에 있지 않다. 많은 경우 우리는 어느 순간 기존의 관계를 대체할 새로운 관계의 정답을 바라지만 그런 것은 없으며, 관계의 탐색과 실험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 새로운 관계가 기존의 관계보다 완벽하지 않다거나 별 것 없다는 판단이 그러한 탐색과 실험을 멈출 이유는 되지 못하는 것이다. 관계 변화의 시작이 되는 말은 그 시작과 더불어 이미 앞으로 이어질 또 다른 사유-행위의 지난한 과정을 포함하고 있다.


그 결과가 어찌되었든 갖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역사 속에 간신히 남겨진 사람들의 저항 경험은 자유를 만끽하는 기쁨의 감정으로 표현되는데, 그 기쁨의 내용을 아렌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람들은 사회가 억압을 통해 은폐하고 유폐시켰던 자신의 모습을 (동료들과 더불어 그들이 구성해낸 세계에) 드러냄으로써 이전과는 다르게 새롭게 무엇인가를 시작한다는 데서 어떤 힘(power)을 느낀다. 자기 현시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만한 그 ‘드러남’(appearance)은 타인의 폭력에 의해 발가벗겨지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더불어서만 만들어질 수 있는 권력의 느낌을 포함하고 있다. 그녀의 개념 구분에 따르면, ‘폭력’(violence)은 수많은 말들을 침묵시키고 단 한 사람으로도 가능하지만, ‘권력’(power)은 혼자서 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다양한 사람들을 설득시킬 수 있을 만한 많은 말들을 필요로 한다.


누군가를 비인간화하면서 배제시키는 체제와 그 체제 내부에서 점점 더 비인간적으로 변하는 인간관계의 연속성을 끊고 새롭게 관계를 시작하는 일은 고립된 한 개인의 탁월한 능력이 아니라, 실수투성이고 구질구질해 보이겠지만 ‘일정한 방향’(이 방향은 뚜렷한 목적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어슴푸레하지만 버릴 수 없는 하나의 방향을 앞의 논의에 따라 정의하면 ‘그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사회’ ‘비인간화의 체계로 작동하지 않는 사회’쯤 될 것이다)을 향해 나아가는 방법을 소란스럽게 의논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통해 가능하다. 아렌트의 ‘공적 영역’은 이러한 ‘모임’, 즉 동료들과 주고받는 소란스런 말들을 통해 구성되는 일종의 관계망이며, ‘사유-행위’란 그 어떤 다른 곳도 아닌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든) 거주하고 있는 바로 이 세계 안에서, 이 세계와 관련하여 다른 세계의 길을 내는 일을 뜻한다. 그녀는 그러한 과정을 겪어내는 사람들의 정조를 ‘기쁨’으로 표현하지만, 그것은 ‘고통’과 더불어 있다. 무엇인가를 새롭게 시작하는 데서 얻는 기쁨은 귀찮고 거북하고 지긋지긋한 것과 엮어져 있을 때에만, 그것을 감당하며 겪어내는 과정 속에서만 생겨날 수 있다.



소란스러운 말들이 부딪히며 생겨나는 거북스러움 없이 ‘사유-행위’는 시작되지 않는다


아렌트는 때때로 ‘행위’(action)를 ‘퍼포먼스’(performance)의 은유를 통해 말하곤 했는데,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무언가를 만드는 ‘창조예술’이 작업의 과정이 공개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그 과정과 독립적으로 작품이 존재하게 되는 것에 비해, ‘공연예술’은 명백히 자신의 ‘기교’(virtuosity)를 보일 관객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며, 관객과 만날 수 있는 공간을 필요로 한다[과거와 미래 사이, 서유경 옮김, (푸른숲, 2005), 210쪽]. 이러한 타인 의존도를 고려하면, 어떤 공간에서 ‘나-배우’가 ‘타인-관객들’에게 어떤 ‘말-행위’를 했을 때 나의 ‘보여줌’의 행위는 이미 그들에게 해석할 권한을 넘겨주는 일이다.


우리는 타인에게 이해를 바라며 무언가를 전하고자 하지만, 동시에 자신을 오해할까봐, 아니 정확히 말해 자신도 알 수 없는 그 무언가가 드러나 버릴까 봐,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동료들이 혐오하는 것이 될까봐(이는 동시에, 그 시선이 자신에게 돌아와 자기 자신을 보는 시선에까지 영향을 미칠까봐) 두려워한다. 이 두려움에 대해 아렌트는 (공적 영역에 자신을 드러낼) ‘용기’라는 덕목을 제시하는 것(우리는 그러한 오해를, 즉 타인을 통해 자신을 보게 되는 불편한 일을 견뎌낼 힘을 가져야 한다고 말이다) 이외에는 더 이상 말하지 않는데, 우리는 이러한 용기가 갖는 의미를 다음과 같이 상상할 수 있다. 동료와 만나 누리게 되는 ‘기쁨’과 동료를 만나 겪게 되는 ‘고통’은 (비유하자면) 등을 맞댄 채 눈에 보이지 않는 실로 꿰매어져 있다. 우리는 그 이음매 위에 서서 두 감정을 모두 느낀다. 그리고 그곳에 서서 균형을 맞추어 가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복잡한 욕망들을 비로소 알게 되며, 그 욕망에 의해 추동되고 또 그 욕망과 더불어 사유-행위를 시작하고 이어가는 힘을 갖게 된다 [부산대학교 앞 카페 <헤세이티>의 김동균 선배와의 대화의 결과물이다. 특히 “이음매 위에 서는” 일이라는 표현은 그의 말을 빌려온 것이다. 전직 목수였던 그가 지붕 위에 올라 걸을 때 이음매 위에 서면 위험하지 않다는 얘기를 해주었는데, 뜬금없이 이 문장이 생각났다. 기쁨과 고통을 동시에 느끼면서 균형을 잡는 일의 어려움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있는 와중에, 그의 말은 일종의 노하우처럼 들리기도 했다].


유제니오 바르바는 배우들을 위한 책 『연극인류학-종이로 만든 배[유제니오 바르바는 대략 4-5년 전에 친구 정인지가 소개해주어 알게 된 연극연출가이다. 그는 오딘 극단과 함께 세계의 곳곳을 여행하며 연극을 했는데, 『연극인류학-종이로 만든 배는 그 여정에서 배우들과 관계 맺으면서 극단을 꾸려가면서 깨달은 어떤 생각들의 모음이며, 특히 배우들을 위해 쓴 책이다. 이 책도 본문에 괄호로 쪽수를 표시한다]에서 배우들이 기본자세들을 익히는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힘들지만 사치스런 균형에 도달하기 위한 것”(40쪽)이라거나 “모든 배우는 자기의 기본자세에 맞는 기울임의 정도를 찾아야 한다.”(43쪽)거나, 그러한 탐구를 위한 에너지는 “단순하고 기계적인 균형의 변화의 결과가 아니라 길항하는 힘들 사이의 긴장이다”(49쪽)라고 말하는데, 우리는 이러한 말들에서 다시금 앞서 언급했던 사유-행위의 한 형태(또는 방법)을 본다. 배우는 ‘자신만의’ 연기 방식을 찾는 과정 속에 있는데, 그 탐구는 그가 다른 동료와 맺는 어떤 관계, 기쁨과 고통을 모두 주는 그 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들 사이에서 생겨나는 힘의 밀고 당김을, 그는 “그들은 일치하여 행동하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서로 떨어지려 하고, 서로를 놀라게 하고, 그들 각자의 템포를 깨뜨리려 한다. 그러나 그들을 대립하게 하는 독특한 관계와 접촉을 끊을 정도로 멀어지지는 않는다.”(49쪽)라고 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다른 곳에서 ‘거북스러움’이라는 말로도 표현된다. 물론 이 말은 “마임은 거북스러움 속에서 편안해진다.”(50쪽)에서와 같이 말 그대로 기본자세를 익히는 몸의 움직임을 설명하는 말이지만, 그 거북스러움은 배우가 방향을 분간할 수 있게 하는 나침반의 역할을 한다는 얘기까지 참고하게 되면, 우리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만났을 때 일어나는 일들에 그대로 적용해도 좋을 듯하다.


앞서도 말했지만 동료는 나와 똑같은 견해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이 세계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나눌 수 있는 자이다. 그렇다고 해도 실제로 우리가 어떤 사건이나 사물 또는 사람에 대해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견해가 일치하지 않거나 아예 대립될 때 우리는 ‘거북스러움’을 느낀다. 부끄럽지만 나 같은 사람들은 이 거북스러움을 견딜 수 없어 그냥 그 문제에 대해 얘기하지 않아버리거나 그 사람이 그리 좋지 않으면 만나지 않겠다며 도망가 버리는 일이 잦은데, 바르바와 아렌트의 말을 곱씹다 보면 그것은 자기 안에 틀어박혀 그저 홀로 사는 일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한 종류의 홀로 삶은 무엇보다 그 사람 자신에게 좋지 않은 일일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자기 안에 틀어박힘으로써 세계를 풍요롭게 하는 또 다른 하나의 시선이 사라졌다는 점에서 세계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다.


어쨌든 그렇다면 그 거북스러움을 받아들였을 경우에는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가? 동료들과 있을 때 서로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다르고, 느끼는 것이 다르고, 반응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파악했을 때, 우리는 동시에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게 되고 그 판단들 사이에서 자신이 갈 길의 방향을 가늠한다. 동료 A와 B와 C가 생활하고 행동하는 방식과 어떤 일에 대면하여 보이는 태도와 일을 해나가는 방법 등을 서로 나눌 수 있을 때에만 나의 생활 방식과 태도와 일의 방식이 어떠한지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이러한 만남의 기회를 통해서만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나에게 자연스러운 것이 좋은 것이라고 여기고 습관적으로 행하던) 나의 일상적인 생각과 행동들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도 있게 된다. 나는 너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에만 자동적이고 기계적이지 않은, 자신을 변화시킬 수도 있을 어떤 ‘사유-행위’를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역시나 거북스러움을 받아들이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바르바는 그러한 종류의 고통이야말로 자신이 가고 있는 배움의 길이 나쁜 것인지 아닌지를 스스로 가늠할 수 있게 하는 지표라고 말한다. “만일 그 자세가 아픔을 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나쁜 자세인 것이다.”(50쪽)(그 문장 뒤에 “[그렇다고] 그것이 아픔을 준다는 것이, 그 자세가 반드시 올바르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문장이 이어진다는 것을 빠뜨릴 수 없다.) 결국 ‘세계에 대한 진리를 나누는 관계’, ‘서로의 다름을 즐길 수 있는 관계’, ‘함께-사는-방식을 다르게 고민하면서도 나눌 수 있는 관계’는 배움의 과정을 함께 하는 관계로서, 그들 없이는 이러한 과정도 불가능한 것이다. 누군가는 배움의 길은 홀로 가는 길이라고도 하지만, 나는 질척거리고 지지부진한 만남의 길을 걷지 않고서는 홀로 걷는 일도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배움의 과정에 있는 자의 ‘사유-행위’는, 바르바의 문장을 약간 변형시켜서 표현하자면, ‘습관적이지 않은, 기존의 자기 일상에서 벗어나는 긴장들이 자신의 몸 안에 살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나와 다른 동료들과 만나는 경험을 통해서만 사유할 수 있으며, (너무도 잘 굳어버리는) 이미 갖고 있던 ‘생각’도 그러한 만남의 경험을 통해서만 화석화되지 않을 수 있다. 자기와 타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껄끄럽고 거북스러우나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어떤 긴장. 그 긴장은 우리가 그 긴장 속에서 변화의 방향을 찾게 하고, 어느새 만들어져 있는 ‘자기’ 안에 머물러 있지 않는 어떤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 이 글은 2012년 7월 27일에 공간초록에서 강연했던 것을 연구모임 aff-com의 요청에 의해 수정, 보완한 것이다.


** 나는 ‘연구모임 비판과 상상력’(이하 ‘비상’)에서 연구하고 활동하고 있다. 대략 2009년부터 부산교대 근처 <공간초록>에서 모임을 하게 되었는데, 이곳은 2006년 지율스님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천성산 도롱뇽 소송의 끝에 새로운 생태문화공간을 꿈꾸며 만든 장소이다.(http://www.spacechorok.com/home/introduce) 이곳은 비어 있는 곳, 그래서 이곳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누구도 주인이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또 누구나 주인이다. 그 덕분에 이곳은, 머물다 떠나기를 반복하는 사람들에 의해 그 모양과 색깔이 달라진다. ‘비상’은 서로 다른 전공(철학, 사학, 문화비평)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만나 함께 책을 읽고 얘기를 나누는 모임으로, 처음에는 이 대학 저 대학 돌아다니며 공부하다가 이광욱 선생님이 <공간초록>을 알게 되어 머물게 되었다. 이 고마운 공간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고 강연이라든지 ‘독서모임 산책’(http://cafe.daum.net/choroksancheck/)이라든지 ‘초록영화제’(http://cafe.naver.com/shootinggreen/)와 같은 일들을 함께 하면서 즐거움과 괴로움을 느끼며 ‘위태롭게’ 모임을 꾸려가고 있다.

 

 

필자소개

양창아 : <연구모임 비판과 상상력>에서 여러 동료들과 함께 이래저래 부딪히며 공부하고 활동하고 있다. 한때 많은 시간을 혼자서 한나 아렌트의 정치사상과 여성학을 공부하는 데 보내고 있다가, 이 동료들을 만나 <공간초록>에 드나들게 되고 또 다른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만남(또는 관계맺음)’의 문제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다. 홀로 공부할 때도 갖고 있던 이 질문, ‘우리는 누구와(무엇과) 어떻게 관계맺고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다르게 관계맺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지금은 전혀 다른 질()로 나를 괴롭히고 움직이게 한다(부산대학교 철학과 박사수료).


 

 

 

 

by_mora

 

 

 

연구실에서 공부와 업무를 병행하다보면 그 앞의 풍경을 놓쳐버릴때가 많다. 비좁은 버스에서 내려서 오르막길을 걸어 연구실에 닿을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것은 연구실 창밖으로 보이는 승학산과 나무들인데, 꽤나 가깝게 펼쳐져 있다. 복에 겨운 풍경이지만 도시적인 삶의 패턴들이 둘러싸고 있는 문제들 앞에서, 혹은 내 삶의 문제들 앞에서, 풍경을 바라볼수 있는, 혹은 풍경속으로 들어갈수 있는 여유는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민족문학사연구소>의 주최로 열리게된 심포및 답사에 참여하기 위해 찾게된 노근리는 도착하자 마자 그 푸르고 선명한 풍경안에 내가 들어왔음을 느낄수 있었다. 노근리를 찾기전 노근리 학살과 관련된 책들과 영화들을 통해서 그 배경들에 주목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벼운 마음맘은 아니였음에도 노근리에 도착하는 순간 1950년대의 학살을 생각할수 없을 정도로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노근리 평화공원의 관계자분이 언급하신것처럼 '사슴이 살고 있을듯하다'는 말은 과언이 아닌듯 했다.

 

전날  <전쟁과 (국가)폭력> 심포지움에 참석하기전 함께 노근리 학살 사건과 관련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는 평화공원의 <평화기념관>을 둘러보았다.

 

 


 

평화기념관

 

 

평화공원의 학예사로 계시는 정구도 선생님께서 기념관의 자료들을 전반적으로

설명해주셨다.민족문학사연구소 선생님들과 답사에 함께 참석한 선생님들 모습도

함께 담았다.

 

대전 전투에서 패한 미군은 1950년 7월 21일 영동으로 후퇴하였는데 당시 영동 방어선 

붕괴는 인민군의 부산 진격을 의미하는 매우 중요한 전투였다고 한다. 정구도 선생님이

몇가지 설명을 덧붙이셨는데 미군이 5일 동안의 무차별적이고 참혹한 학살의 배경으로

당시 미군이 북한군에게 계속 패배함으로서 심리적인 압박감을 가지고 있던 상태였고,

노근리 학살사건의 투입된 미군들은 대부분 17~18살의 스무살도 넘기지 않은 청년들이

였다고 한다. 그러나 사건이 일어나기전, 이러한 상황을 전혀 모르는 영동읍 주곡리와 임

계리  마을의 주민들은 이따금 들리는 전쟁의 포성속에서도 한해 풍년을 기약하는 김매기

에 여념이 없었다고 한다

 

미군이 주민들을 피난시켜주겠다는 면목으로 임계리에서 주곡리를 거처 노근리 학살이 일

어난 장소까지의 이동동선을 볼수 있게 되어있다. 사진으로는 담기지 못했지만 노근리학살

사건을 경험했던 주민들의 증언과 당시 노근리 사건에 투입되었던 미군들의 증언이 기록된

영상도 자료로 볼수 있었다.

사건의 전반적인 배경을 살펴보고 나면 쌍굴다리를 재현한 설치물을 건너갈수 있도록

되어있다

쌍굴다리를 지나면 학살당한 이들의 이름이 새겨져있는 명패가 벽면에 전시되어 있고

맞은편에 이 분들을 기리고 위로하는듯한 영상이 함께 전시되어있다. 1층은 노근리 사

건이 일어난 배경과 실제 사건 경위, 이를 증언하는 기록들, 사건이 일어났던 현장의 재

현등 영상과 설치등의 다양한 전시방법으로 시각적인 것뿐만 아니라 몸소 체화할수 있

는 부분이 많았다

2층 전시실은 노근리 학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배경과( 노근리 학살 사건이

한국과 미국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된것은 90년대 들어서야 가능했고, 그 진실을

알리기 까지 당시 노근리 학살사건에서 살아남았던 이들의 끈질긴 노력이 있었다)

노근리 사건을 담고있는 책,영화, 언론보도와 같은 자료들이 아카이브 되어있다)

 

평화 기념관을 빠져나오면 당시 노근리 학살의 현장인 <쌍굴다리>가 길 건너 편에

보인다. 그래서 당시의 배경과 기록들을 체화하고 당시 사건 현장을 직접 체험할수

있는 동선은, 무엇보다 노근리 평화공원의 큰 이점이라고 할수 있을것이다.

 


 

쌍굴다리

 

 

평화공원을 가로질러 노근리 학살 사건현장인 쌍굴다리 입구. 입구에는 사건이 일어난 개요

와 동선등의 안내판이 마련되어 있고, 현장의 다녀간 이들이 글을 남길수 있도록 방명록도

마련되어 있었다. 노근리 쌍굴다리는 1934년 경부선 철도용 다리로 건축되었으며 2003년

6월 30일에 문화재청에서 등록 문화재로 등록되었다. 1999년 철도청이 쌍굴다리 내부에

콘크리트를 덧씌우는 보강공사를 하면서 총탄 자국등 그 당시 흔적이 많이 훼손되었다고 한다 

쌍굴다리를 감싸고 있는 벽면의 총탄의 자국들이 남아있는데 동그라미로 표시된것

총탄으로 확인된 흔적이고 세모는 외부의 훼손인지 총탄의 자국인지 미확정된 흔적

들이라고 한다. 이 흔적들은 주민들을 쌍굴다리쪽으로 몰아넣고 미군이 반대편에

거점을 두고 4일 동 쉬지  않고 사격한것이다

 

입구로 들어가서 쌍굴다리를 빠져나오면 쌍굴다리로 피신하기 전 본격적인 폭격이

가해졌던 철도와 연결되어 있다. 아래의 사건 이동경로를 살펴보면 좋을듯 하다

 

1950. 7. 23 정오 영동읍 주곡리마을 소개명령(영동읍 주곡리 주민 → 임계리로 피난)

  • 1950. 7. 25 저녁 영동읍 임계리에 모인 피난민 (임계리, 주곡리,타지역주민) 500~
  • 600명을 미군이 남쪽 (후방)으로 피난 유도
  • 1950. 7. 25 야간 영동읍 하가리 하천에서 미군에 의해 피난민 노숙
  • 1950. 7. 26 정오경 4번국도를 이용 황간면 서송원리 부근에 도착한 피난민
  • (미군의 유도에 따라 국도에서 철로로 행로 변경)
  • 1950. 7. 26 정오경 미군 비행기 폭격 및 기총 소사로 철로위 피난민 다수 사망
  • 1950. 7. 26 오후 ~ 7. 29 오전 노근리 개근철교(쌍굴)에 피신한 피난민에 대해
  • 미군의 기관총 사격으로 다수의 피난민 사망
  • 첫번째 사진은 미군의 유도에 따라서 철로로 행선을 변경하면서 실제적인 폭격이 가해

    졌던장소이다. 미군은 비행기에서 폭격및 기총을 사격했고 이때 피난민 다수가 사망했

    다고 한다. 이 철길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철길밑으로 내려오면 바로 보이는 (아래

    사진 참고. 철길에서 멀지 않은 시야에 쌍굴다리가 보인다) 쌍굴다리로 피신하게 된다.

    노근리 사건과 관련한 영화나 책에서도 이와같은 사실은 아주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지

    만 현장에 직접가서 체감하는 온도는 조금 놀라웠다. 특히나 노근리 사건이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벌여진 학살이기때문에 그 이동의 동선을 실제로 경험할수 있다는 것은 

    사실적인 자료를 통해서 얻을수 없는 감각일테다. 기차가 지나가는 순간 마치 그날의

     총격소리가 울리는듯 했다.

    철길에서 내려와 저 쌍굴다리로 몸을 숨긴 피난민들의 반대편 입구로 수천만의 총격이 가해

    졌고 총성또한 4일동안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시체는 끊임없이 쌓이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시체를 방패삼아 총격을 피하기도 했고, 8월의 무더위속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고여있는

    핏물을 마시기도 했다고 한다. 4일동안 미군은 총격을 가한후 쌍굴다리로 직접 내려와서

    다리안의 상황을 파악한후 다시 총격을 반복하는 과감함과 잔인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번 심포에 함께 참석한 연구모임 아프꼼의 멤버들
    권명아, 송진희, 양순주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사진을 찍어준 신현아씨도 포함)

     

     

     


     

     

    마침 이날은 제26주기 제14회 <노근리 사건 희생자 합동 위령제>가 열려서 참석할수 있게되었다.

     

    노근리 사건 희생자 합동 위령제

     

     

    평화공원안에 위치한 위령탑안에서 진행

    평화공원 조성 위원회분들부터 노근리 시민들과 아이들도 참석

    위령제에 앞서 열린 식전행사에서는 향토예술인들이 희생자의 넋을 추모하는 진혼무를

    추고 전통 상여놀이를 펼쳤다.

    노근리 학살을 다룬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 >를 쓰신 정은용 선생님

    의 말씀이 이어졌다 이 소설은 노근리 미군양민학살 사건을 토대로 노근리를 무

    대로한 소설로서 이 책은 당시의 실황을 소상히 밝혀 한미양국의 노근리사건 진상

    조사팀이 반세기 전에 있었던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데 고심하고 있을 때 사건의

    경위와 피해 상황 등을 양국 조사관들에게 제시함으로서 조사의 진척을 도왔다고

    한다.  이 소설을쓰신 정은용 선생님은 사건당시 아들과 세살배기 딸을 잃고 부인

    마저 중상을 입은 노근리 사건 피해자 가운데 한사람이며  노근리 사건이 공식적

    으로 세상에 알려지기까지 중심에서 가장 많은 역할과 헌신을 하셨다. 노근리 학

    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서 홀로 고군분투 하시다가 <노근리양민학살대책위원회

    >를 들어서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연합뉴스, 한겨레등에서도 취재하면서 노근

    리학살의 진상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피해자 증언채록, 노근리 학살이 있었던 기간

    의 신문기사와 미군기록을 조사하여 노근리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기병연대가 가

    해자인 노근리 학살이 실제로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객관적인 증거들을

    수집등의 활동으로 지금의 평화공원 조성까지 오게 되었다. 하지만 희생자들의 피

    해보상및 지원들의 문제들은 아직 해결되고 있지 않다고 한다.

     

    무더운 더위속에서 한번의 미동도 없이 자리를 지키시고, 미리 준비해오신  글들을

    덤덤히 읽어나가시는  모습에서 그 애씀의 시간들이 베어있는듯하여 거창한 말보다

    도 더욱 인상 깊었다

    공식적인 행사의 끝맺음으로 진혼무의 마지막 장면 . 오른쪽 사진은 유가족들이 직접 함에 인사를 올림

     

     

    위령제의 앞과 뒤, 옆으로 자리를 이동하면서 수많은 프레임속에 이 위령제에 참석한 이들또한 기록되어야 할것이다

     

     

     

     

     

     

                                                         by_mora

     

    노근리 심포에 참석하기 전부터 연구팀원들은 세미나를 통해서 열전에서 냉전으로의 정동된 신체에 관하여 작업을 진행하고 있던터라 이론적인 문맥위에서가 아닌 , 현장을 경험하는것은 또다른 의미인 동시에 고민들을 안겨준다고 할수 있다. 특히 노근리 같은 경우 실제 사건을 경험했던 이들이, 현재 평화공원을 만들기까지 오랜시간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말할수 없을 만큼의 노력을 했다는것이 평화기념관, 전쟁기념관들이 가지고 있는 관제적인 기록들에서 벗어날수 있게해준 가장 큰 힘이였던거 같다. 급급하게 쓰여진 이날의 기록들 뒤에 남겨진 말과 의미들을 기어올리는것만이 남아 있는것일테다

     

     

     

     

     

     

     

     

    가을하늘

     

     

     

    출판강좌를 만나고 난 이후에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한 생각을 조금은 따르게 해보지 않았나 싶어요. 그러면서도 내가 어떠한 원고를 가지고 출판사에 찾아가 이런 글이 있으니 한 번 책을 내주지 않겠는가. 하고 말하는 것에 대한 한없이 높은 벽을 체감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만든 책의 제목은 ‘K’s Story‘입니다. K는 제 이름의 첫 글자를 딴 K입니다. 나름대로 저의 이야기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에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어린시절 일기장에 적혀있는 동시들을 보면서, 아 나는 어렸을 때도 이렇게 쓰는 것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구나 하고 스스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글을 잘 쓰고 못쓰고를 떠나서 그런 발견이 또 다른 의미로 다가와서 제게 하나의 힘이 되어 줬다는 사실이 어떠한 기록물로 남겨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과거에 제가 썼었던 동시를 책에 담고, 제가 감상한 인상에 대해서 설명해놓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제가 써놓은 짤막한 글과 힘들었던 때 적었던 시도 함께 실었습니다. 저는 우선 중앙 스템플러 제본을 하였습니다. 많은 분량도 아니었거니와 가운데 중철 된 모습이 제가 상상하는 책의 모습과 닮아 있어서 그렇게 했습니다. 사실 스템플러를 가장자리에 찍어놓는 제본은 제가 누군가에게 작성한 글을 보여줄 때, 그런 제본방식으로 보여주곤 했었습니다. 그때는 이게 책이라는 개념이 아니었는데, 여기와서 보니 책이라는 게 그렇게 거창하게만 만들어지는 게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거창한 책의 모습이 아니더라도 내가 이렇게 만들어낸 제작물을 손에 쥘 수 있다는 점에서 참 매력적인 수업이었습니다.

    책을 만들고 나서 내가 글을 쓰는 점에 있어서 좀 더 세심한 정성을 기울여야겠구나, 싶었습니다. 작은 책이지만 총 세 권의 책을 만들면서 이 책에 담길 이야기들에 대한 애착이 좀 커졌습니다. 그래서 아! 정말 더 잘 써야하는 구나 싶어서 그래서 조금 부끄럽기도 했네요.

    이번 워크샵을 하면서 책의 제작이라는 것이 그리 어려운 것만은 아니라는 걸 배웠지만, 또 다른 면에서 책을 만들고 살아간다는 게 참 힘든 거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떠한 꿈을 같이 이뤄서 갈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린그림 관계자 분들을 보면서 괜히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그러면서도 아직 나는 좀 어리구나 하고 생각하며 또 우울해지기도 했지만요.

    워크숍을 진행하면서 다양한 생각을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저는 괜히 그런 모습을 좀 유심히 보는 편인데, 저랑 생각이 다르거나 다른 것을 좋아하더라도 그런 것에 대한 공유가 있으면 괜히 친해지고 싶어지더라구요. 이번에 실제본을 하기도하고 저처럼 중철을 하기도 하고 소창연에서 만든 책을 보기도하면서 이렇게 몇 사람 안 되는데도 생각이 다양하구나 하고 느낄 수 있는 기회여서 좋았습니다.

     

    사실 이런 후기를 마감시한에 맞춰서 올렸어야 했는데, 왜 조금의 기억조차도 제 머릿속에서 떠오르지 않았을까요. 그러면서 교수님께 죄송하다고 말씀까지 드렸는데도 참 정신이 없었네요. 죄송합니다. 그때 만났었던 분들 참 잘해주셨는데 그만큼의 반도 저는 마무리를 잘 못하고 있다고 생각이 들어서 죄송하다는 말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다시 한번,.... 죄송하다는 말씀 드리고 싶어요. 에휴 마무리가 좋지 못하면 그 인상이 그리 좋지 않은데 말이죠. 저는 항상 이렇네요. 고쳐야 할텐데... 

    ajaㅋ

     

     

     

    심포지움은 지난 1월 정념 동계 훈련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동안 정념이라는 프로젝트 주제에 대해서 관심과 더불어 노력했어야함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못(안)했다고 부끄럽지만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12월 모두가 저에게 ‘공부하라’라고 요청해주셨기 때문에 그 요청을 수락하고 수행해야한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는 이해가 느렸을지 몰라도, 공부노트나 번역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저 나름대로는 약속을 지켰다는 부분에 있어서는 성취감이 있었던 1월이었습니다.

     

    그 1월의 성취감을 좀 더 확실히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 심포지움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도 듭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선생님의 발표에서 ‘어, 세미나에서 들었던 이야기네,’하는 정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전히 이해의 수준까지는 도달하지 못하고 있고요. 그러나 심포지움을 통해서 다시 확인 한 것은 정말 프로젝트가 선생님의 연구와 맞닿아있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좀 더 노력했다면 훨씬 이전에 프로젝트와 공부가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프로젝트 내부에서 항상 세미나가 이루어졌지만 이 세미나에서 들었던 배웠던 것들이 프로젝트에서 행하는 여러 행사들과의 접점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거든요. 이것도 따로 인 것 같고, 저것도 따로 인 것 같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지금 글을 쓰면서 지난 6개월 게을렀던 그 시간이 꽤나 후회가 됩니다. 프로젝트 팀원들과의 관계에서도 소홀하지 않았나, 공부는 두말 할 것도 없이 소홀했었고, 번역은 잘했던가, 팀원들에게 내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던가. 늘 행사 끝에 한 마디 할 때 저 스스로 “학부생으로써 할 수 없는 귀중한 경험”이라고 말 해놓고 그 귀중한 경험을 제대로 누리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지난 회의에서 여러 가지 변화가 다가오며 그 이후의 몫은 각자가 노력하기 나름이라는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그 노력이 그 이전부터 필요했던 것임을 이제야 깨닫게(마음속에서 우러나는,,) 되네요. 이제 후회는 그만하고 앞으로 어떻게 노력해야 내 몫을 잘 누릴 수 있는지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난 6개월간의 경험을 토대로 나는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 수 있을까. 바뀌는 내 환경에 어떻게 이 경험을 잘 활용할 수 있을까 계속 고민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계속 생각하고 던져보고 아님말고 던져보고 생각하고 반성하고 던져보고 아님말고, 소극적이었던 저를 바꾸는 방향으로 던져봐야 할 것 같습니다.  

     

    신콩떡1

     

     

     

     

    그린그림의 1, 2회 워크샵을 마치고 우리는 각자의 책 또는 노트를 갖게 되었다. 워크샵이 끝나고 나는 곧바로 인디자인 프로그램을 구했고, 추가로는 큰 스탬플러와 그린라이트紙를 갖고 싶어 하게 되었다. 2회 워크샵에서 우리가 Don't Do It Yourself (D.D.I.Y)에 관한 ‘선언문’을 읽고 시작하였던 것을 생각하면 바보같은 일이다. 이 장작개비 같은 충동심을 긍정적으로 생각해본다면, ‘나도 책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고, 사실은 ‘책을 만들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인 듯하다. 책을 만들게 해주고 싶었다.

     

    내 주위의 모두에게, 너희들의 글은 모두 그 자체로 가치가 있으니, 자신의 이야기를 써서 가지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글을 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아닌 것은 문제인 듯도 하다......) 내 주위에는 책을 읽는 것도 좋아하고, 각자가 관심있는 공부의 분야도 있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또는 전혀 길을 몰라서 그냥 ‘흥미’로만 아련하게 간직하고 접어버리는 사람들이 몇 있다. 그들을 생각하며 마치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훔쳐낸 마냥, “여러분! 고기를 구웁시다!”하고 외치고 싶은 마음인 것이다.

     

    자신의 손에서 만들어 질 수 있는 수많은 창작물 (요리, 목공, 또 무엇) 중에서 책이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 ‘저자’가 된다는 경험일 것이다. 무형의 파일로 떠돌던 자신의 글이 물질화되어 지면을 얻고 안착한다는 것. 이것은 나의 말이 공적인 곳에서 퍼질 수 있다는 기쁨과도 비슷할 것이다. 그러니, 책을 만드는 것은 역시 굉장히 두근거리는 경험이다. 그 첫 번째 경험은 우리가 이전에 <풍기문란 밤놀이>를 진행하며, 관련 책자를 만들었던 것이다. 각자의 글을 써서 모으고 편집하고 인쇄해서 제본하여 각자가 결과물을 받아보았을 때 참 뿌듯하였다. 그래서 2회 워크샵 때 제본에 관한 설명을 들으며 나는 자꾸만 “맞아요, 맞아요”라고 하며 연신 주억거렸다. 생각해보면 ‘나..나도 해봤다는..! 나도 안다는..!!’하는 창피한 제스쳐이지만, 그래도 책을 만들어보았다는 것이 나 스스로에게 특별한 경험으로 남았으며, 워크샵 과정 중에서 그 경험이 소중한 것이었음을 다시 보게 되었다는 제스쳐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은 대부분 그리 많지 않다. 나는 일전에 불었던 ‘20대 저자’ 열풍을 생각한다. ‘공적인 장에서 말을 갖기 어려운 자 (20대)들에게 말을 할 수 있게 하자, 그들도 자신의 발화를 물질화 할 수 있게 하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20대 저자’는 몇몇의 스타저자를 만들어내는 것에서 그치고 말았다. 그리고 이후 간간이 이어지던 ‘대안적인 20대 관련 서적’은 출판시장의 틈새상품으로 잠깐 빛났다가 금새 잊혀졌다. 우리는 이 ‘저자’라는 자리를 보다 더 ‘민주화’할 필요가 있다. (운동권적인 어투가 아니기를 빈다) 그저, 더 많은 사람들이 글을 쓰고 책을 갖고 기뻐하면 좋겠다는 것이다. 이분법과 ‘또 다른 이야기’라는 구도가 아니라, 원래부터 이야기는 수만가지가 있다는 것을 나누고 싶다. 소규모 출판이 그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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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동궈니즘으로 쓴 것이 아닙니다. 오해하지말아주세요 ㅜㅜ

    닉네임은.. 아이디 비밀번호를 못찾아서.. 새로 가입했습니다........

    선우

     

     

     

       


     

     

     

     

    (grgm 내부 사진, 책뿐만 아니라 쉽게 구하기 힘든 음반들, 핸드메이드 노트와 에코백들도 있다.)



    부끄러움을 만나는 공간, '비언어적 정당성을 획득하는' 일은 책을 만드는 행위일 것이다.



    어떤 글도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제야 텍스트의 행간의 가능성, 그 의미를 직시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한 권의 책이란 보다 구체적으로 grgm에서 책을 만드는 과정의 노동을 일컫는 것인데, 텍스트의 의미와 그 성질을 헤아려 글을 배열하고 종이(텍스트의 물질적 이동)를 고르고 제본의 방법 등을 따지며, 즉 행간의 가능성을 가시화하는 일을 말한다. grgm(그린그림)은 부산에 있는 (소규모)독립 출판사이다. grgm을 찾는 이들은 아직 글을 쓰는 사람보단, 이미지 작업을 하는 이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누구나'가 자신의 책을 만들 수 있을 때, 이미지 작업을 하는 사람보다 활자 작업을 하는 사람의 방문이 훨씬 적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대개 글 쓰는 이들은 자신의 글에 대해 잘 부끄러워한다. 부끄러움과 글쓰기의 등치는 이미 책 한권의 소재거리가 될 만큼 떼어내기 힘든 감정의 부산물인데, 그런 의미에서 글은 '가장 나 자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부끄러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글에서 '나', "자기만의 개별성을 지울 수 있을 때, 읽을 만한 글이 탄생"(오웰)할 수 있다는 말에 이미 여러 차례 빚을 진바가 있다. 나는 여기서 '글'의 본질적인 역설이자 그 역설을 담지하고 있는, '글쓰기'라는 행위가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 글 밖의 '외부성'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블랑쇼는 작품을 두고 "찢겨진 내밀성"이라 표현한 바 있다. 텍스트 그 자체의 내밀성은 한 편의 글이 쓰여 지기까지, 자신의 글과 마주하고 끊임없이 분열, 대립하는 과정을 겪은 작가 자신의 경험을 대입해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작품이 작품으로 남는 한 결코 양립될 수 없고 진정되지 않는 상반되는 것들의 내밀성이고 격렬함 양립될 수 없으나 그것들을 대립시키는 이의제기 속에 충만함을 얻는 대립 작용의 상반성에 마주하는 내밀성"은 곧 담론 속에 내던져짐으로써만, 읽혀짐으로써만 생동하는 것인데, 블랑쇼는 텍스트 자체의 속성으로서, 텍스트가 행하는 '상반되는 것들의 고귀한 결합'이라는 작품 자체에 대한 찬미를 통해 다시 주목해야 할 것은 작품의 주체적인 의미가 아니라, 작품이 그 자체의 본질을 비로소 얻게 되는 작품 '외부'에 대한 관심이다.

     

    그것은 저자와 독자라는 실체적인 누군가일 수도, 담론장이 될 수도 있을 것인데, 나는 여기서 글, 즉 언어적 행위 후에 이루어지는 그 다음의 과정, 책을 만드는 행위라는 이 비언어적 행위(그 책에선 아무도 이것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책을 만드는 사람은 독자인가 저자인가?)또한 글쓰기의 외부성이라 칭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와 독사 사이에 있는 그 외부성을 통해 오늘날의 글쓰기가 가지는 의미에 더 주목하고 싶다, 그리고 나아가 글 쓰는 이들의 실천적 동기를 이 비언어적 행위를 통해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최근 나는 '후기'라는 형식을 통해, 함께 있었던 이들의 몫을 마련하는 글쓰기에 의욕을 내고 있었다. 그것이 곧 어울림의 발로라고 생각되었기에 그들의 목소리를 인용하며 그 자리의 의미를 만들고, 재현하는 글쓰기에 대한 고민을 가지고 있었기에, 한 편의 세미나 후기와 발제문이자 후기이자 내 글이라고 생각되는 글 한 편을 들고 워크숍에 참석했다. 그런데 책을 만들려 했던 애초의 목적이 두 편의 글을 노트의 표지로 만들게 되었다. 표지가 되버린 글은 노트로서의 상품 미학적 열정을 가졌고 역설적으로 나의 부끄러움은 기이하게 드러나 버린 꼴이 되었다. 나는 왜 책을 만들지 못했나. 물론 워크숍 당시 책이 아닌 노트의 형식을 택한 것은, 더 좋은 글을 쓰고자 이전의 글을 통해 다음 글을 '잇자' 라는 다짐의 의미였지만 결국 나는 그 글을 한 권의 책으로 '잇지' 못했다.

     

    책을 만드는 노동을 통해서야 비로소 내 글을 돌보지 않은 것에 대한 책임 회피, 그 다짐 한 켠에 있었던 부끄러움을 마주 할 수 있었다. 시간을 맞춰 가장 간단하게 '혼자서도 책을 만들 수 있다'라는 걸 일깨우기 위했던 워크숍은 책을 만들기 위한 기획토론을 거쳐 종이를 고르는 수고, 직접 책을 엮을 실색을 고르고, 내 손으로 제본(직접 손으로 엮는 실 제본을 했다.)을 하고 책의 양 페이지를 맞추기 위해 재단의 과정을 모두 거쳐 진행되었다. 몸의 수고가 동반되었을 때, 원고지 몇 매의 분량을 채우지 못하는 몇 문장 혹은 단어들의 나열이, 소셜 네트워크의 몇 백자로 제한된 단문들이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는, 단문의 잠재성 또한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책을 만드는 행위는 글이 곧 자기 자신이 되어버리는 부끄러움을 만나고 벗어날 수 있는 과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이 곧 한 권의 책을 만들 수 있다는 말과 상응할 때, 한 편의 글을 쓸 수 있다. 그러니 한 문장을 쓸 때 이 단문이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는 그 잠재성을 알아차려야 한다. 글의 비약은 비언어적 행위를 통해 비로소 그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부터 설명을 덧붙이자면, 김가을하늘님의 <K스토리> 신콩떡님의 <장님의 말>, 박냐옹님의 노트, 나의 노트이다.


     

    김가을하늘님은 워크숍의 텍스트 분량 제한으로 자신을 인터뷰한 글을 가지고 오셨다. 하지만 다음엔 단편 소설을 책으로 만들고 싶다고 하셨다. 신콩떡님은 그간의 발제문과 단문들을 <장님의 말>이라는 제목의 책을 만들었다. 두 책 모두 스템플러로 제본되었다. 아직 책을 읽지 못했음을 밝힌다..^^; 박냐옹님은 얼마전 하늘로 간 강아지와의 추억을 책으로 만들고 싶어 사진을 직접 프린트해오셨다. 레이저 프린터인지라 노트 제작 내내 손에 잉크가 묻어 고생을했다. 노트 제작은 모두 실제본을 하였다. 실제본은 간격을 맞추어 직접 손으로 책이 흩어지지 않게 제본해야되는지라 초보자는 이 과정이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박냐옹

     

     

     

    1. 그린그림에서 작업한 나의 작업물은, 생각외로 간단한 '노트'였다. 처음부터 그럴싸한 작업물을 생각하고 멋드러지게 만들어보고 싶었던 욕심이 경험이 부족한 나에겐 버거운 것이었다. 작업을 위해 준비해갔던 것들이 도움이 되기보다 오히려 '노트밖에 안되겠다'라는 준비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이 더욱 도움이 되었다는 생각도 들기도 한다.)

    어쨌든, 내가 만든 노트는 결과적으로는 의미 깊고 애착 있는 물건이 되고 있다. 처음 만들어내고 싶었던 작업은, 조금 무리스러웠지만 사진과 글을 조합하는 앨범형 책자였다. 개인 작업이 가능하다는 말에, 지금 나에게 아주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일이었던 나의 작은 가족을 기리는 작업을 하고 싶었다. (10년을 함께한 강아지가 몇일 전에 무지개다리를 건넌 관계로..) 하지만 준비해 간 사진들의 책의 내용물로서 배열이 맞지 않았던 관계로, (^^;) 또한 그렇지만 준비해 간 것들을 없애지 않고 모두 활용한다는 의미에서 노트를 만들게 되었다.

    내가 손수 제작한 노트는, 단순히 이쁜 그림과 무언 갈 쓸 수 있는 공간이 있는 종이덩어리만은 아니다. 이 노트 속에는 그동안 하고 싶었지만 무지하고 게으른 탓에 실천하지 못했던 '행동'이 들어 있으며 이 같은 작업들이 충분히 '할 수 있는' 것들이라는 의미 또한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물론 개인적으로는(이건 아주 개인적인) 사랑하는 작은 가족을 기리는 작업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내가 만든 노트는 총 5권이다. 그린그림의 배려 속에 몇 번의 연습과정을 경험하게 해주어서 연습의 작업까지 포함해서 5권의 노트가 탄생했다. 노트의 특성상 ‘실제본’을 통해 제작하게 되었으며 5권의 노트 모두 내가 가져온 사진과 그림을 활용하였다. 표지는 내 개인 준비물들을 모두 활용하여 만들었고 속지와 간지를 사용하여 노트를 완성했다. 내가 만든 책자에 나의 흔적인 비록 표지에만 나타나고 있지만, 이 실패와 도전 속에 언급한 의미들이 숨어있으리라 생각한다.

     

    2. 앨범형 책자를 만들고 싶었다.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간드러지는.

    하지만 막상 혼자 사진과 글을 준비하고자 하니 첫 번째로, ‘실제본’을 위해 내용글들을 배열하는 것이 꽤나 머리 아프고 복잡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과정은 질문과 해결을 통해 이루어졌고 결국은 하나의 완성물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한권을 책을 위해 한 장의 종이 안에 어떤 순서로 글들이 정리되어야 하는지, 단면과 양면의 배열은 어떠한지.. (결국은 나는 이 작업을 실패했다.) 고민하던 것들이 그린그림에서는 아주 간단히 해결되었다. 이미 종이를 만들어놓고 번호를 쓰라는 것! 그리고 무작정 손으로 다 그려놔보라는 것이다. 왜 번호를 쓸 생각을 못했을까.. 라는게 경험의 차이인가.

     

    두 번째, 사진을 쓰고 싶은 맘에 기껏 준비해서 프린트까지 해갔지만 아무 종이나 써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내가 선택한 두껍고 튼튼해보이는 종이는 이쁘게 프린트되어 있는 잉크를 열심히도 내뱉어내어 버린 관계로 모든 노트가 잉크투성이가 되어버렸다.

    세 번째, 실제본을 위한 바느질도 순서가 있다는 것이다. 잘못된 바늘구멍이 양옆으로 3개나 뚫려 너덜너덜한 나의 노트를 보며. 노트의 제작과정은 생각보다 쉬우면서 어려웠다. 혼자서 하기에 충분했으나, 과도한 시행착오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종이의 배열, 용지 사용, 제작 과정 등은 실수투성이였지만 이 같은 실수와 과정을 통해 완성된 노트를 얻어내게 되었다.

     

    3. 하고 싶어하는 욕심은 많았다. 거기에 맞게 몸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이번 그린그림의 워크샵은 이런 의미에서 더 깊은 인상을 남겼다. 실행하기 꺼려했던 나태한 나를 깨우고 고민하고 행동하게 만들었던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계기를 통해, 어렵거나 두려워 할 일이 아니라 일단 시작해볼 수 있는 일이란 것을 배우게 된 것도 좋았다.과도한 욕심을 버리고, 일단은 시작해 본다는 마음으로 하나를 행동하는 것에 대한 중요함을 조금은 알게 되었던 것 같다. 오히려 더 편하고 가볍게 시작하는 '행동'을 만들어나가보자는 생각도 함께.  

    관리자

     

     

     

     

    조금 늦은 글을 남깁니다.

    서울에서 수요집회 1000회가 열릴때 도쿄에서도 위안부 집회가 열렸습니다.

    신콩떡님과 도쿄에 체류중이던 일정과 겹쳐서 저희도 참석하게 되었어요.

    다른분들에게 간단하게나마 전달될수 있으면 좋을거 같아서 사진과 글을 올려봅니다 .

    혹시나 기타등등인님에게도 도움이 될까요? ^^ 이번 참석에는 요코하마 레지던시 기간중 만난 다케우치상의 긴급연락을 받아서 움직일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위, 현장, 집회와 같은 성격의 장소는 처음이여서 약간의 긴장감이 있었어요. 그 긴장감은 현장에 배치된 일본 경찰들과 대형 일장기를 들고 있는 우익단체들을 보는 순간 더더욱 고조되더군요.

     

     

    다케우치상과 신콩떡님

     

     

     

     

     

     

     

     

     

    다케우치상을 비롯한 일본의 활동가들의 안내 덕분에 큰 무리없이 집회 프리젠테이션 현장에 도착할수 있었습니다 프리젠터이션 현장엔 많은 인원때문에 미처 안으로 들어오시지 못한분들도 계셨어요. 다케우치상의 간단한 번역을 통해서 현장에서 어떤이야기들이 오고가는지 전해들을수 있어서 몇가지 메모를 했습니다. 이날 집회는 우익 단체와 국회위원들의 반대속에 진행되었고, 일본정부가 태도를 바꿀수있는지 확신할수 없다는 상황을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날 열린 서울집회의 현장모습을 실시간으로 공개해서 바로 볼수 있었어요. 일본쪽에서도 국회의원들이 많이 참석했는데, 서울집회보다 인원이 더 많은거 같군요.

    국회의원들의 발언은 대체적으로 국회안에서도 이와 관련된 논의들을 마련하는 어려워서, 많은 성과를 얻지 못한 미안함과 해결할수 있는 법안을 함께 만들기를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예전과 달리 일본의 젊은이들이 위안부와 관련된 설명을 일일이 하지 않아도 그뜻을 이해하고 참여하며 역사적 문제이기도 하지만 여성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인식하고 있다고 하는군요

     

     

    위안부 집회 프리젠터이션 현장

     

    이어서 송신도 할머님께서 자리해주셨는데 ,말씀이 기억에 남네요 "전쟁을 하지 않으면 좋겠다. 전쟁으로 인해 위안부는 죽었다. 전쟁은 안된다. 돈준다고 해도 안하겠다. 일본의 정치가가 하는 일들을 보니, 걱정이 된다. 정치가도 바보야! " 전쟁을 학습과 자료, 영상으로만 접한 '우리'로서는 할수 없는 말인거 같았습니다. 마지막 발언에서 모두 한바탕 웃고 말았지만 위안부 관련 관계자나 참여자, 정치가의 '말'과는 분명 다른 '말' 이라고 생각됩니다. 짧은 관심과 참여로는 뭐라고 말할수 여지가 좁은거 같습니다. 하지만 위안부와 관련된 문제를 일본에서 참여하는것은 묘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또한 예전에 여성과 관련된 자료를 찾다가, 위안부와 기지촌 기록들이 쓰여진 책을 읽으며 '분노' '격분' 이런식의 감정부터 치솓았던 기억들을 다시금 상기시키며 이날의 묘한 감정의 출처를 생각하며 그 자리를 빠져나왔습니다.

     

    고엔지로 가기위해 지하철로 내려가는 길에 국회의사당 앞쪽에 원전반대단체가 공간을 점거한 캠프가 꾸려져 있어서 잠시 들렀습니다. 일본에서는 원전을 더 많이 만들기로 선포를 했다는군요.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뒷목이 뻐근해짐을 느낄수 있었어요.

     

     

     

    캠프 전경- 밤이 되니 악기들을 하나씩 연주하셨어요

     

     

     

    캠프 내부

     

     

    캠프에 모인 사람들 여기서 부터는 신콩떡님과 제가 일본말을 거의 못알아듣고 한국-부산에서 왔다는 이유로 많은 관심과 친절을 받았습니다. 원전반대를 위해 모인이들의 실천과 활동들을 보면서 응원하고 힘을 보태면서 동시에 저도 힘이 생기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초콜렛과 귤을 받고 똘망똘망한 눈빛과 미소를 보내오고, 피켓과 사진찍기를 권유받으면서 이런방식이 교회와도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곳에서도 묘한 기운을 받고 말았네요. 하지만 이곳을 지나치지 않았다는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날은 전체적으로 이와 유사한 현장에서의 '운동'을 경험한 바가 없어서 스스로가 어떻게 인식해야하는지 몸과 머리가 잘 따라주지 않았던거 같아요. 또한 현장에서의 '운동'을 경험한 바가 없다는것은 무엇인지, 글을 쓰면서 묻게 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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