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등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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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1000회 수요집회에서, <버자이너 모놀로그>의 배우들이 시위를 하러 모인 군중들을 한번에 숙연하게 만들었다면, 사람들이 하하하 웃으면서 “할머니 파이팅!” 하게 만들었던 할머니 한 분이 있었다. 커다랗고 짙은 색깔의 썬글라스를 쓴 멋쟁이 할머니는, 햇살 기지촌 여성 센터의 할머니였다.(나는 사진을 못찍었는데, 인터넷에서도 찾기가 어렵다.ㅜㅡ) 할머니는 일본 대사관에다가 “왜 사죄를 안하노!”를 외치고 시위 현장에 있던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언니들~ 사랑합니다~!”라고 연대 발언을 마쳤다. 연대 발언을 들으면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할머니가 된 기지촌 여성들과도 교류가 있나 보다라고 생각 하고 넘겼었다.

오늘은 동북아 역사재단에서 <동아시아 미군기지 문제와 여성인권>이라는 주제로 심포지움이 있었다. 심포 여는 인사를 윤미향 정대협 대표님이 하셨다. 원래 인사말을 기지촌 여성 인권 연대의 대표인 우순덕 선생님이 하시기로 한 듯 한데, 아마 도착을 안해서 대신 하신 듯 하다. 빨간 후드티를 입은 윤미향 대표님은 저 기지촌 여성 센터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교류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3년 전부터 일본군 위안부와 비슷한 성폭력 경험을 갖고 있는 햇살 기지촌 여성 센터 여성들이 어버이 날을 같이 보내고 있는데, 서로 자매애를 갖고 연대하는 모습이 감동적이라고 일화 하나를 소개 해 주었다.

일본군 위안부였던 길원옥 할머니가 기지촌 여성들에게, ‘부끄러워 하지 말라, 우리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가 부끄러운 것이다. 일본 정부든, 한국 정부든 요구를 해라. 우리가 언니니까 도와주겠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얘기를 들으니까, 어제 그 연대발언 하셨던 할머니가, “우리 언니들한테 사과 해라! 왜 사과를 안하노!!!”했던게 어떤 맥락이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오늘 심포의 발표 순서는 다음과 같았다.

1. 기지촌의 역사적 구성 과정과 여성운동 : 이나영(중앙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2. 미군자료로 보는 미군의 성매매정책과 성폭력 : 하야시 히로후미(칸토학원대학 교수)

3. 한국의 기지촌 여성 인권운동의 역사 : 고명진(파주여성인권센터 Shego 센터장)

4. 군사주의를 용납하지 않는 국제여성 네트워크-젠더 시점의 기지철폐 글러벌 네트워크 : 아키바야시 코즈에(리츠메이칸 대학교)

5. 기지촌 여성 문제는 국가(한국, 미국)의 책임 -소송 제기와 입법 운동의 당위성, 그리고 방향 : 안정애(주한미군범죄근저운동본부 대표)

6. 일본에서의 미군의 성매매 성폭력-이와쿠니 기지를 중심으로 : 후지메 유키(오사카 대학교)

후기는 6개 발표 다 소개할려고 하는데, 몇회에 나누어서 업데이트 할 생각이다. 나는 고명진 선생님 논의와 후지메 유키 선생님 논의가 내가 생각해 보지 못했던 지점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시고, 내 연구에도 어떻게든 그러한 지점에 대해서 논의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우선, 고명진 선생님 발표.

고명진 선생님은 성매매 근절을 위한 한소리회 25주년 기념 국제심포지움 「성매매, 기지촌, 그리고 인권」에 실린 유영님 두래방 원장님의 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유영님 원장은 기지촌 여성 인권 운동의 역사를 크게 세 시기로 분류하고 있다. 제 1기는 1986년부터 1992년 윤금이 사건 이전까지이고, 제 2기는 1992년 윤금이 사건부터 2004년 성매매특별법 제정 이전 시기까지, 제 3기는 2004년 성매매 특별법 제정 이후의 시기와 기지촌 여성 인권 연대의 결성을 통한 최근의 운동까지이다. 고명진 선생님은 파주 여성 인권 센터에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파주 용주골에 대한 논의를 집중적으로 하였다. 파주의 용주골은 미군부대에 의존한 기지촌으로 먼저 발전한 지역인데, 71년에 동두촌으로 미군 기지가 이전하자, 축소되었다가 1990년대 중반에 한국인 대상의 성매매 집결지로 변화하게 된 곳이라고 한다. 고명진 선생님은 이 미군 기지촌->한국인 성매매 집결지로의 변화하는 용주골의 공간에 주목하고 있다. 즉, 미군 부대에 기대고 있는 기지촌 성매매는 미군 부대가 이동을 하여 기지촌이 없어진다고 해도, <용주골>이라는 공간이 남게 되는데, 이 공간이 없어지지 않는 이상 성매매는 계속 된다는 것이다. 즉, 포커스는 군사시설이 아니라, 성매매가 되어야 하며, 공간에 대한 논의와 사유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얼마 전 송연옥 선생님의 강연에서 들었던 내용을 떠올리게 했는데, 송연옥 선생님은 식민지 시대의 장소는 그 시대만 바뀔 뿐 비슷한 업종이 그 장소에 그대로 있다는 내용이었다. 즉 식민지 시대에 은행이 있었던 장소에는 해방 이후에도 은행이 세워지는 장소가 되고, 식민지 시대에 공창이었던 곳은, 해방 이후에도 매매춘이 집결하는 장소가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라면, 고명진 선생님의 말대로, 미군 기지촌이 있던 자리에, 미군이 없어진다고 하더라도, 그곳에 있었던 매매춘은 계속 된다는 말은 설득력이 있으며, 또,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는 실례도 찾기 어렵지 않다.

즉, 남겨진 공간이 또다른 성매매 공간이 된다는 것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고명진 선생님은 그것에 대해서 강조했다. 용산 미군기지 이전이 된다고 해서 이태원이란 장소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또 성매매 공간으로 남게 되는 것은 아닌가라는 우려. 이러한 군사 문화로 인한 성매매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미군기지나 기지촌이 있는 지역의 생활의 문제로 포커스를 넓혀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논의가 고명진 선생님이 주장하는 내용이다. 경제적인 이유로 기지촌에 있었던 사람들은 매매춘 여성들 뿐만이 아니라 기지촌 주변의 시민들도 그러했음을 간과해서는 안되며, 성매매 하지 않는 사람들도 경제적 문제 때문에 그곳을 떠나지 못하는 피해자임을 고려해야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미군 기지촌 운동을 한다는 것은 지역의 정서와 생활을 함께 고려하는 것임을 자각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기타등등인

 

 

 

수요 집회 1000회.

얼마 전에 <한국영상자료원>에 가서 <낮은 목소리>를 봤다. 시리즈가 3개 있는데, <낮은 목소리>, <낮은 목소리2>, <숨결> 이렇게 있다. 원래 <낮은 목소리>는 디비디가 아니라 비디오 밖에 없어서 <한국영상자료원>까지 찾아간 거였는데, 최근에 DVD가 나온 듯 하다. 야튼, 첫 <낮은 목소리>에는 일본군 ‘위안부’의 일본 대사관 앞 수요집회 100회째가 찍혀 있다. 그 100회를 10번이나 더 한 날이 바로 이번 주 수요일 1000차 수요 집회였다. 일본군 위안부의 재현에 대한 연구를 완보(緩步)로 진행하고 있는 나로서는, 이 집회에 참가하는 것이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사실, 한번도 수요집회에 참가하지 못해서, 언젠가는, 언젠가는, 하고 있었다. 트위터에서 일본군 위안부 관련 글이 트윗이 올라오면, 무조건 리트윗 하고.

 

 

야튼, 역사의 현장에 참여한다고 생각하니까, 밤에 잠이 안왔다. 새벽까지, 일본 대사관 찾아가는 길을 찾고, 서울가는 동안 읽으려고 <20년간의 수요일>도 챙기고, 또 계속 설레고 하느라고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래서 늦잠을 자버렸다. 눈뜨자마자 부랴부랴 챙겨서 12시에 겨우 일본 대사관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권해효씨가 집회 진행을 하고 있었다. 할머니들도 한마디씩 하시고, 연대발언도 돌아가면서 했다. 먼저 윤미향 정대협 대표, 한명숙씨, 정몽준씨, 이정희씨 등의 정치인들이 연대발언을 했다. 이정희씨는 수요집회 처음 할때 집회를 준비하고 참가했다고 했는데, 정치인들의 연대 발언 중에는 이정희씨의 연대발언이 좋았던 것 같다. 한명숙씨와 정몽준씨는 ‘사죄하지 않는 일본’에 대해서만 비판했는데, 이정희씨는 50년간 모른척한 한국 정부도 함께 비판했기 때문이다. 고등학생 자원봉사자들은 수줍게 올라와서 당당하게 발언했다. 이 연대 발언의 마지막은 모두들 “사랑합니다”였다. 연대 발언 제일 마지막에는 배우 김여진과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 배우들이 함께 <버자이너 모놀로그>의 대사 일부분을 낭독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배우들의 목소리에 숙연해지고, 가슴을 먹먹해졌다. 이날 시위에서는 강하게 일본 대사관 쪽을 향해 항의 하기도 하고, 이 수요 시위가 과거를 위한 시위가 아니라, 미래의 평화를 위한 시위임을 강조하고 있었다. 약간씩은 다른 의견이지만, 모두들 자신의 방식으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그것에 대해 반응했다. 정몽준씨가 발언할때는 내려가라고, FTA 해결하라고 했고, 쑥스러워하는 여고생들에게는 박수로, 구호는 3번씩 같이 반복. 나는 12시에 겨우 맞춰 도착했기 때문에 찍은 사진들이 엉망이다. 원래 사진을 잘 못찍기도 하지만, 나눠주시는 보라색 피켓을 입에 물고 현장을 기록할 수 있는 사진 몇장을 찍었다. 현장이 잘 찍힌 사진들은 기자님들이 기사에 많이 올려주셨다.

 

 

 

 

때마침, 도쿄에서 신콩떡님의 문자가 도착했다. 신콩떡님은, 일본 국회 앞에서 연대 수요집회를 하고 있는 현장에 있었다. 서로, 각자가 있는 곳에서의 현장감을 교환했다.

신콩떡 : 여기는 일본 국회의원회관입니다! 저쪽에는 송신도 할머니가...

기타등등 : 여기도 1000회 수요집회 선언서 낭독! 집회는 끝났음.(사진을 함께 보냈다.)

신콩떡 : 멀티메일을 볼 수가 없습니다 ㅠㅠ 트위터 여성주의 저널 [일다]에는 1000회 수요집회 기념으로 일본군 위안부 인터뷰 시리즈가 계속 올라왔고, 마이니치 신문 트위터에서는 곧 있을 한일수뇌회담에 들어갈 일본군 위안부 관련 기사도 올라오고 있다. 집회를 마치고는 <바위처럼>을 부르면서 해산했다. 참가한 사람들 모두가 자신의 방식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수요집회에 기여하고 있었다. 나는 오늘 집회 참가와 열심히 리트윗을 했지만, 내 연구 주제를 더욱 파고들어서 내 연구로 기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ajaㅋ

 

 

 

아핫, 영화제가 끝나고 이제 약 일주일이 지나가네요, 미키오의 말을 빌리면 '화려한 피날레' 였던 동아대에서의 영화제는 저에게 어떤 의미였을까를 글을 써가며 정리해보고 싶습니다. 사실 밖에서 커피 부스를 지키고 있어서 강의실에서 오고갔던 이야기들을 제대로 듣지 못해서 아쉽습니다. 하지만 뒷풀이에서 학부생 친구들을 보면서 저의 '행운'에 대해서 다시한 번 느끼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우연하게 카르마에 들어가게 된 것이 지금 제가 프로젝트에서 활동할 수 있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하면 참 신기하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솔직히 카르마에 들어가게 된 마음도 솔직히 책 - 토론 - 면접 뭐 이런 생각으로 들어갔지요. ,,, 모르고,,,, 들어갔지요. 그 때 만약 카르마에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아마 토익 동아리 이런 데 들어가지 않았을까싶습니다. 그 곳에 온 학부생들이 어떤 마음으로 영화제에 왔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이번 영화제를 통해서 와서 다행이다 생각하고 신선한 경험에 그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고민은 생깁니다. 저번 워크샵이 끝나고서도 저는 많은 것을 느꼈고 결심도 했습니다. 어정쩡한 상태로 있지는 않을 것이다. 얼마 시간은 지나지 않았지만 제가 그 때의 어정쩡함에서 얼마나 벗어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프로젝트 팀원이 되었고, 유학이라는 새로운 기회가 생겼고 앞으로 할 일은 많이 있지만 제 마음가짐은 그리 다잡아지지는 않은 듯 합니다. 행사를 통해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항상 저의 어정쩡함을 확인하는 계기가 됩니다. 주어진 것만을 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아야 할 텐데요.

영화제를 통해 잊었던 어정쩡함을 확인하는 것은 스스로를 슬프게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저번 워크샵 이후로 제가 가만히 앉아만 있지 않았던 것도 확인 할 수 있었으니까요. 1mm는 움직이지 않았을까요.

..

아.. 정말 느낌을 글로 쓴다는 것은 엄청난 일인 것 같습니다... 이번에도 겨우 이정도네요..ㅜㅜ 정말 영화제 준비하시고 홍보하시고 ,, 수고 많으셨습니다.  

mora

 

 

 

 

 

이번 제 4회 동아시아 시민 공생영화제 in Busan 이 막을 내렸습니다. 구마모토에서 출발하여 후쿠오카를 거처 부산에서는 동아시아 시민 공생영화제 2011 실행 위원회 팀과 저희 프로젝트 팀이 함께 준비하며 주최하게 되었습니다. 올해로 4회를 맞는 본 영화제는 2007년 '동아시아 이주 공생 영화제' 라는 이름으로 시작하여 '이주'의 측면을 강조하며 3회를 개최하였고, 올해는 이주의 개념을 좀 더 포괄적인 '동아시아 시민'의 이름으로 바꿈으로 해서 '동아시아 시민 공생 영화제' 라는 타이틀로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영화제 전 준비 모습과 참여해주신 분들의 모습

 

         

언제나 그렇듯~ 김대성 선생님의 사회로 영화제가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정념커뮤니티와 감각적 결속과 인간관계에 대한 고찰 연구팀 책임자이신 권명아

선생님의 인사 말씀

 

 

동아시아 공생영화제를 계속 해서 이끌고 계신 구마모토 가쿠인 대학에서 한국문학 교수로 계시는 신명직 선생님의 말씀

 

 

영화상영에 앞서 구마모토 가쿠인 대학의 미키오상 의 동아시아 공생커피에 관한 프리젠터이션 이날 미키오상은 한국어로 프리젠테이션을 준비해오시는 열의를 보여주셨지요

 

 

영화상영- 레오니즈이야기- 태양광택시로 세계일주를 - 도쿄 핵 발전소

 

 

세편의 영화상영후 신명직 선생님의 동아시아 시민 네트워크 발표가 있었습니다.

 

 

이번 영화제는 오랜시간동안 동아시아 공생에 관해 실천적으로 활동하고 계시는 신명직 선생님의 연구와도 깊은 연관이 있다고 할수 있을것입니다. 동아시아의 중심 도시들이 아닌 그 나머지 도시와 이주민들, 노동자들과 함께 공생하고자 하고 그와 관련된 문제들, 고민들을 던져주시는 자리였습니다. 동아시아 시민의 공생네트워크라는 테마로 진행된 강좌는 1987년 6월 항쟁이후 사라진, 하지만 현재 새로운 형태의 한국 의 난장이들과 국경넘어 동아시아의 수많은 난장이들의 발견으로 시작했습니다. 또한 '한국화' '글로벌'의 상품속에 사실은 수많은 노동자들의 노동력 투여되고 있음을 '메이드인 코리아? 메이드인 저팬?'이라는 의문을 통해서 다시 인지 시켜주셨는습니다. 또한 동아시아는 하나의 생활권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인지하고 함께 고민해야하는 지점이 필요할텐데 이런 부분들이 이번 동아시아 시민 공생영화제의 중요한 맥락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신명직 선생님 강좌가 끝난후 신명직 선생님과 정귀순 선생님의 토크 자리가 마련되었습니다

 

 

부산 이주민 인권 NGO 대표이신 정귀순 선생님은 부산에서 15년동안 이주민과 관련한 다양한 활동들을 하고 계십니다. 현재는 이주노동자, 이주여성과 다문화 가족, 아시아의 평화와 인권을 생각하는 단체, 연구소 와 인권교육을 하는 시스템을 구축하시며 실질적인 활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날은 정귀순 선생님이 그동안 활동해오셨던 것들을 토대로 이야기가 진행이 되었는데요 정귀순 선생님의 말씀중 인상깊었던것은 아시아에서 한국과 일본은 이주노동자들이 가장 원하는 '목적지' 일텐데 이주를 받아들이는 두 나라에서 진보적인 생각과 그에 따른 정책이 필요한데 한국정부의 이주민 정책은 이주민을 위한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이주민들의 활용할수 있는가' 와 ' 한국화'를 시키는것에 초점이 맞춰 있어서 억압적인 부분이 있고, 그런점에서 한국과 일본은 아시아에서 큰 책임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비단 한국정책의 문제 뿐 아니라 그들을 같은 시민의 시선으로 보지 않는 우리의 수준과도 깊게 관련이 되어 있는거 같습니다. 우리 모두가 '외국인'이라는 말을 다시 인지 한다면 이주민들은 타자화 되어야 되는 대상만은 아니라는것을 생각해볼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영화제를 준비하고 참여하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것이 생각에 머물러 있는 지점이 있겠지만 공생이 삶을 살아가는 태도와 관련이 있다면 생각-실천은 그리 멀리있는것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듭니다. '원전'과 '반핵' 그리고 '동아시아의 공생'은 우리삶에 얼만큼 피부에 와닿아 있는 질문들 일까요. 이번 영화제를 통해 이것이 우리 삶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파악해보는 것은 실로 중요한 부분인거 같습니다. 그것은 말로 글로서 맺음할수 있는것이 아니라, 삶의 태도와 실천속에서 그 의미가 더 번득이게 되는것은 아닐런지요 생각이 공부의 실체가 아니듯, 각자가 생각하는 공생으로 나아갈수 있는 작은 실천 , 꾸준함 같은것들이 필요하리라 봅니다. 영화제 시작 전, 권명아 선생님이 말씀하신것처럼 함께 한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지만 바꿔 생각하면 함께 하기 때문에 '힘듬'은 감수해야 하는 '무엇'이 아닐까요. 중요한것은 그것을 감수 하면서, 지금 우리가 함께 인 이유겠지요.
함께 나눌수 있는 이들이 있다는 것에 저는 절망보다는 희망을 느낍니다. 바램이 있다면 동아시아 시민 공생 영화제가 좀더 다양한 곳에서 많은 사람들과 만날수 있기를 바래보고

값진 시간들이 이어졌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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