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_mora

 

 

 

연구실에서 공부와 업무를 병행하다보면 그 앞의 풍경을 놓쳐버릴때가 많다. 비좁은 버스에서 내려서 오르막길을 걸어 연구실에 닿을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것은 연구실 창밖으로 보이는 승학산과 나무들인데, 꽤나 가깝게 펼쳐져 있다. 복에 겨운 풍경이지만 도시적인 삶의 패턴들이 둘러싸고 있는 문제들 앞에서, 혹은 내 삶의 문제들 앞에서, 풍경을 바라볼수 있는, 혹은 풍경속으로 들어갈수 있는 여유는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민족문학사연구소>의 주최로 열리게된 심포및 답사에 참여하기 위해 찾게된 노근리는 도착하자 마자 그 푸르고 선명한 풍경안에 내가 들어왔음을 느낄수 있었다. 노근리를 찾기전 노근리 학살과 관련된 책들과 영화들을 통해서 그 배경들에 주목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벼운 마음맘은 아니였음에도 노근리에 도착하는 순간 1950년대의 학살을 생각할수 없을 정도로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노근리 평화공원의 관계자분이 언급하신것처럼 '사슴이 살고 있을듯하다'는 말은 과언이 아닌듯 했다.

 

전날  <전쟁과 (국가)폭력> 심포지움에 참석하기전 함께 노근리 학살 사건과 관련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는 평화공원의 <평화기념관>을 둘러보았다.

 

 


 

평화기념관

 

 

평화공원의 학예사로 계시는 정구도 선생님께서 기념관의 자료들을 전반적으로

설명해주셨다.민족문학사연구소 선생님들과 답사에 함께 참석한 선생님들 모습도

함께 담았다.

 

대전 전투에서 패한 미군은 1950년 7월 21일 영동으로 후퇴하였는데 당시 영동 방어선 

붕괴는 인민군의 부산 진격을 의미하는 매우 중요한 전투였다고 한다. 정구도 선생님이

몇가지 설명을 덧붙이셨는데 미군이 5일 동안의 무차별적이고 참혹한 학살의 배경으로

당시 미군이 북한군에게 계속 패배함으로서 심리적인 압박감을 가지고 있던 상태였고,

노근리 학살사건의 투입된 미군들은 대부분 17~18살의 스무살도 넘기지 않은 청년들이

였다고 한다. 그러나 사건이 일어나기전, 이러한 상황을 전혀 모르는 영동읍 주곡리와 임

계리  마을의 주민들은 이따금 들리는 전쟁의 포성속에서도 한해 풍년을 기약하는 김매기

에 여념이 없었다고 한다

 

미군이 주민들을 피난시켜주겠다는 면목으로 임계리에서 주곡리를 거처 노근리 학살이 일

어난 장소까지의 이동동선을 볼수 있게 되어있다. 사진으로는 담기지 못했지만 노근리학살

사건을 경험했던 주민들의 증언과 당시 노근리 사건에 투입되었던 미군들의 증언이 기록된

영상도 자료로 볼수 있었다.

사건의 전반적인 배경을 살펴보고 나면 쌍굴다리를 재현한 설치물을 건너갈수 있도록

되어있다

쌍굴다리를 지나면 학살당한 이들의 이름이 새겨져있는 명패가 벽면에 전시되어 있고

맞은편에 이 분들을 기리고 위로하는듯한 영상이 함께 전시되어있다. 1층은 노근리 사

건이 일어난 배경과 실제 사건 경위, 이를 증언하는 기록들, 사건이 일어났던 현장의 재

현등 영상과 설치등의 다양한 전시방법으로 시각적인 것뿐만 아니라 몸소 체화할수 있

는 부분이 많았다

2층 전시실은 노근리 학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배경과( 노근리 학살 사건이

한국과 미국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된것은 90년대 들어서야 가능했고, 그 진실을

알리기 까지 당시 노근리 학살사건에서 살아남았던 이들의 끈질긴 노력이 있었다)

노근리 사건을 담고있는 책,영화, 언론보도와 같은 자료들이 아카이브 되어있다)

 

평화 기념관을 빠져나오면 당시 노근리 학살의 현장인 <쌍굴다리>가 길 건너 편에

보인다. 그래서 당시의 배경과 기록들을 체화하고 당시 사건 현장을 직접 체험할수

있는 동선은, 무엇보다 노근리 평화공원의 큰 이점이라고 할수 있을것이다.

 


 

쌍굴다리

 

 

평화공원을 가로질러 노근리 학살 사건현장인 쌍굴다리 입구. 입구에는 사건이 일어난 개요

와 동선등의 안내판이 마련되어 있고, 현장의 다녀간 이들이 글을 남길수 있도록 방명록도

마련되어 있었다. 노근리 쌍굴다리는 1934년 경부선 철도용 다리로 건축되었으며 2003년

6월 30일에 문화재청에서 등록 문화재로 등록되었다. 1999년 철도청이 쌍굴다리 내부에

콘크리트를 덧씌우는 보강공사를 하면서 총탄 자국등 그 당시 흔적이 많이 훼손되었다고 한다 

쌍굴다리를 감싸고 있는 벽면의 총탄의 자국들이 남아있는데 동그라미로 표시된것

총탄으로 확인된 흔적이고 세모는 외부의 훼손인지 총탄의 자국인지 미확정된 흔적

들이라고 한다. 이 흔적들은 주민들을 쌍굴다리쪽으로 몰아넣고 미군이 반대편에

거점을 두고 4일 동 쉬지  않고 사격한것이다

 

입구로 들어가서 쌍굴다리를 빠져나오면 쌍굴다리로 피신하기 전 본격적인 폭격이

가해졌던 철도와 연결되어 있다. 아래의 사건 이동경로를 살펴보면 좋을듯 하다

 

1950. 7. 23 정오 영동읍 주곡리마을 소개명령(영동읍 주곡리 주민 → 임계리로 피난)

  • 1950. 7. 25 저녁 영동읍 임계리에 모인 피난민 (임계리, 주곡리,타지역주민) 500~
  • 600명을 미군이 남쪽 (후방)으로 피난 유도
  • 1950. 7. 25 야간 영동읍 하가리 하천에서 미군에 의해 피난민 노숙
  • 1950. 7. 26 정오경 4번국도를 이용 황간면 서송원리 부근에 도착한 피난민
  • (미군의 유도에 따라 국도에서 철로로 행로 변경)
  • 1950. 7. 26 정오경 미군 비행기 폭격 및 기총 소사로 철로위 피난민 다수 사망
  • 1950. 7. 26 오후 ~ 7. 29 오전 노근리 개근철교(쌍굴)에 피신한 피난민에 대해
  • 미군의 기관총 사격으로 다수의 피난민 사망
  • 첫번째 사진은 미군의 유도에 따라서 철로로 행선을 변경하면서 실제적인 폭격이 가해

    졌던장소이다. 미군은 비행기에서 폭격및 기총을 사격했고 이때 피난민 다수가 사망했

    다고 한다. 이 철길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철길밑으로 내려오면 바로 보이는 (아래

    사진 참고. 철길에서 멀지 않은 시야에 쌍굴다리가 보인다) 쌍굴다리로 피신하게 된다.

    노근리 사건과 관련한 영화나 책에서도 이와같은 사실은 아주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지

    만 현장에 직접가서 체감하는 온도는 조금 놀라웠다. 특히나 노근리 사건이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벌여진 학살이기때문에 그 이동의 동선을 실제로 경험할수 있다는 것은 

    사실적인 자료를 통해서 얻을수 없는 감각일테다. 기차가 지나가는 순간 마치 그날의

     총격소리가 울리는듯 했다.

    철길에서 내려와 저 쌍굴다리로 몸을 숨긴 피난민들의 반대편 입구로 수천만의 총격이 가해

    졌고 총성또한 4일동안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시체는 끊임없이 쌓이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시체를 방패삼아 총격을 피하기도 했고, 8월의 무더위속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고여있는

    핏물을 마시기도 했다고 한다. 4일동안 미군은 총격을 가한후 쌍굴다리로 직접 내려와서

    다리안의 상황을 파악한후 다시 총격을 반복하는 과감함과 잔인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번 심포에 함께 참석한 연구모임 아프꼼의 멤버들
    권명아, 송진희, 양순주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사진을 찍어준 신현아씨도 포함)

     

     

     


     

     

    마침 이날은 제26주기 제14회 <노근리 사건 희생자 합동 위령제>가 열려서 참석할수 있게되었다.

     

    노근리 사건 희생자 합동 위령제

     

     

    평화공원안에 위치한 위령탑안에서 진행

    평화공원 조성 위원회분들부터 노근리 시민들과 아이들도 참석

    위령제에 앞서 열린 식전행사에서는 향토예술인들이 희생자의 넋을 추모하는 진혼무를

    추고 전통 상여놀이를 펼쳤다.

    노근리 학살을 다룬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 >를 쓰신 정은용 선생님

    의 말씀이 이어졌다 이 소설은 노근리 미군양민학살 사건을 토대로 노근리를 무

    대로한 소설로서 이 책은 당시의 실황을 소상히 밝혀 한미양국의 노근리사건 진상

    조사팀이 반세기 전에 있었던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데 고심하고 있을 때 사건의

    경위와 피해 상황 등을 양국 조사관들에게 제시함으로서 조사의 진척을 도왔다고

    한다.  이 소설을쓰신 정은용 선생님은 사건당시 아들과 세살배기 딸을 잃고 부인

    마저 중상을 입은 노근리 사건 피해자 가운데 한사람이며  노근리 사건이 공식적

    으로 세상에 알려지기까지 중심에서 가장 많은 역할과 헌신을 하셨다. 노근리 학

    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서 홀로 고군분투 하시다가 <노근리양민학살대책위원회

    >를 들어서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연합뉴스, 한겨레등에서도 취재하면서 노근

    리학살의 진상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피해자 증언채록, 노근리 학살이 있었던 기간

    의 신문기사와 미군기록을 조사하여 노근리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기병연대가 가

    해자인 노근리 학살이 실제로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객관적인 증거들을

    수집등의 활동으로 지금의 평화공원 조성까지 오게 되었다. 하지만 희생자들의 피

    해보상및 지원들의 문제들은 아직 해결되고 있지 않다고 한다.

     

    무더운 더위속에서 한번의 미동도 없이 자리를 지키시고, 미리 준비해오신  글들을

    덤덤히 읽어나가시는  모습에서 그 애씀의 시간들이 베어있는듯하여 거창한 말보다

    도 더욱 인상 깊었다

    공식적인 행사의 끝맺음으로 진혼무의 마지막 장면 . 오른쪽 사진은 유가족들이 직접 함에 인사를 올림

     

     

    위령제의 앞과 뒤, 옆으로 자리를 이동하면서 수많은 프레임속에 이 위령제에 참석한 이들또한 기록되어야 할것이다

     

     

     

     

     

     

                                                         by_mora

     

    노근리 심포에 참석하기 전부터 연구팀원들은 세미나를 통해서 열전에서 냉전으로의 정동된 신체에 관하여 작업을 진행하고 있던터라 이론적인 문맥위에서가 아닌 , 현장을 경험하는것은 또다른 의미인 동시에 고민들을 안겨준다고 할수 있다. 특히 노근리 같은 경우 실제 사건을 경험했던 이들이, 현재 평화공원을 만들기까지 오랜시간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말할수 없을 만큼의 노력을 했다는것이 평화기념관, 전쟁기념관들이 가지고 있는 관제적인 기록들에서 벗어날수 있게해준 가장 큰 힘이였던거 같다. 급급하게 쓰여진 이날의 기록들 뒤에 남겨진 말과 의미들을 기어올리는것만이 남아 있는것일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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