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ra

 

 

net-a가 신미나토 마을에서 진행한 프로젝트 아지트 a는 신미나토마을이라는 특수한 장소에서 만나게 된 다른 아지트를 우리의 장소로 초대해서 서로의 작업을 소개하고 비평하는 형태로 진행되는 인터뷰입니다. 이 기획은 일본에서 전세계로 실시간 방송되었습니다.

 

아지트-a 두번째 기획은 블랑클래스 + 네트에이 + D매거진 디렉터 박선의 의 만남입니다.

 

 

블랑클래스

먼저 신미나토 마을의 주민으로 처음 만난 블랑클래스는 폐관된 미술교실을 개조하여 만든 공간을 요코하마에서 아티스트들과 함께운영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예술가들이 이 빈 공간의 특성을 찾고 의미를 부여함으로 인해서 '특별한 장소'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버려진 장소에 의미를 부여하고 예술가들이 자립적으로 공간을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net-a의 활동과 연계될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여 신미나토 마을에서 눈여겨 보며 대화를 나누었던 팀입니다.

 

 

 

 

매거진 D 디렉터 박선우

D매거진은 패션의 한계를 한정짓지 않고 삶속에서 발견되는 모든것에서 나름의 패션을 실험해보는 장입니다. 또한 아티스트와 연계하며 작업하고 젊은 디자이너들을 육성하는 일들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이날의 인터뷰는 굉장히 독특한 조합의 세팀이 net-a의 공간에 모여서 실시간 방송을 통해(스카이프) 서로 처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인문과 예술 그리고 패션이 결합된 이 자리는 각자의 분야에서 추구하고 있는 주제와 활동들을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장르와 분야가 다름에도 세팀이 서로 개입하며 서로의 작업에 대해 질문할수 있었던것은 제도에 얽매이지 않고, 장르를 넘나들며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는 점 일것입니다.

 

 

 

인터뷰 진행을 맡고 있는 net-a 김대성.신현아 김선우

 

 

 

net-a와 블랑클래스, 통역을 도와주신 김정희님, 뒷벽면에 스카이프영상을 통해 박선우씨의

모습이 ....거의 안보이는 군요.

 

 

  

 

 

 

  net-a부스에서 진행된 아지트 -a 

 

 

 

월경의 매력이 '갑자기' '돌연' 출연하는 어떤종류의 상황과 만남의 형태라면 이번 아지트- a의 기획에서 만난 세팀이야 말로 그것을 잘 반증해준다고 봅니다. net-a의 구성원들 또한 각자의 자리에서만 고군분투 하는것이 아니라 월경을 통해 새로운 만남을 가지고 그들의 작업을 가늠하면서 일을 도모할수 있는 좋은 에너지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날 진행에 도움주신 블랑클래스와 서울에서 접속해주신 박선우씨게 감사드립니다.

 선우

 

9월9일부터 9월 10일까지, 2011 한일 워크샵 <동아시아 공생 네트워크와 정념 커뮤니티>가 개최됩니다. 

9일 Session1 <이동ㆍ소유권ㆍ공생네트워크>세션에서  발표하게 될 「이방인・외국인・지구인」한국어 발표자료와  10일 Session2 <passion/affect, representation, and subject positioning>세션에서 발표하게 될 「어린이/청소년 문학에 재현된 일본군 위안부 연구ㅡ정념 교육을 통한 공감의 공동체의 생산방식에 관하여」  일본어 발표자료, 10일 Session3 <함께 살기, 둘, 혹은 무언가의 사이>세션에서 발표하게 될「국제결혼의 실례를 통해 조망하는 두 역사의 실천적 공생」일본어 발표자료입니다.

 

 

 

 

 

국제결혼의 실례를 통해 조망하는 두 역사.pptx

 

어린이청소년 문학에 재현된 일본군 위안부.pptx

 

이방인,외국인,지구인.pptx

 

 

 mora

 

 

아프리카 티비

 

http://afreeca.com/atoa 전체 영상클립에

 

요코하마/ 신미나토 마을 와깡에서 진행된 net-a 와 김윤환.김강팀의 인터뷰 영상이 있습니다.

 

실시간 방송못보신 분들은 들어오서요!

 

 

 

 기타등등인

 

 

요코하마는 오래된 도시이다. 명치-대정-쇼와-평성으로 이어지는 시간동안 변화와 발전에 관한 사진들과 건축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그래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도시에는 박물관, 역사관, 자료관이 아주 많다. 내가 주로 다니는 미나토미라이 선 주위에도 있지만, 요코하마 역으로 가서 시영지하철이나 JR을 타고 갈 수 있는 시립 박물관, 자료관도 있다.

 

 

 

요즘 요코하마의 전시실들에서는 <쇼와30년>경의 풍경들이 한창이다. 요코하마도시발전기념관에서는 <카메라가 찍은 쇼와30년경의 요코하마:자동차가 있는 풍경>을 전시하고, 요코하마개항자료관에서는 <쇼와 30년경의 길거리:요코하마 노스텔지어>, 요코하마시사자료실에서는 <노게산의 「쇼와」:고갯길과 공원의 이야기>라는 전시를 하고 있다.

 

 

 

쇼와30년.

나는 이게 도대체 몇년인지 감이 잘 안왔다. 요코하마시역사박물관(이름이 비슷비슷하지만 지금 이 이름은 이 글에서 처음 나온다)에에 갔을 때, 거기에도 <쇼와30년>경의 생활에 관한 전시가 있었다. 설명하시는 분께 물어봤더니 “음,,, 1945년이 쇼와 20년이니까, 10년후니까 1955년?” 아마도 일본 사람들에게는 서기보다는 연호가 더 편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한테도 안물어봤는데 내일 누군가 만나면 물어봐야겠다.

 

쇼와 30년.

이게 왜 그렇게나 중요한가? 왜 이 박물관, 자료관, 역사관 모두가 <쇼와30년>을 불러내고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1955년.

1955년은 우리나라에서는 한국전쟁이 끝나고, 낙동강 밑으로 밀려 내려와있던 피난민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고, 사회적으로 <반공>의 이념이 고착되기 시작할 즈음이다. 일본에서는 1945년 패전 후 미국 점령군이 일본에 주둔하고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외부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당시가 배경이 된 영화를 보면, 꼭 신문에 '조선 전쟁발발'이라는 기사가 크게 난다. 전쟁에 참여할 수 없는 국가지만, 전쟁 무기 생산으로 한국전쟁의 최대 경제적 수혜자가 되었던 일본은 아마도 1955년쯤이 전후 최대의 호황기를 맞게 된것이 아닌가 추측해본다.(책이 있으면 찾아보면 좋겠구만!) 1955년-아마도 이 최대의 호황기를 맞고 있을 때의 일본이 아닐까. 패전의 폐허와 비참함-그 "참을 수 없음을 견뎌"(폐전 선언할 때, 천황이 국민들한테 "참을 수 없음을 참으라"고 했단다)내고, 공장을 건설하고, 수출을 증가시키고, 뭔가 아직 불안하지만, 힘을 내려고 하는, 그리고 그것을 눈으로 감각하는 시기.

 

이렇게 생각하고 요코하마 트리엔날레2011의 제목을 보면 이 <쇼와30년>에 관련된 전시들이 트리엔날레와 같은 맥락에서 나오게 된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 요코하마 트리엔날레2011의 표제는 <OUR MAGIC HOUR>이다. "우리들의 마법같은 시간"이라... 일본인들에게 <쇼와30년>경이 그런 시기가 아닐까.

 

 

트리엔날레의 오픈 스튜디오의 하나이자, Net-a가 작업하고 있는 곳은 <신미나토 마을>이다. 이 곳은 새로운 마을이 통째로 만들어지고 있다. 재활용품들을 활용하고, 도쿄전기에서 만들어내는 전기를 사용하지 않으려고 에어컨을 틀지 않지만, 나는 이 공간들이 기본적으로 <진공의 공간>으로 느껴진다. 하나의 진공의 마을이 만들어지는 곳인 것이다. 새로운 마을이 통째로 <만들어 지고> 있다는 것-신미나토 마을과 다른 맥락에서 생각해보자면, 조금은 기형적일 수 있다는 말이다. 진공의 완벽한 마을이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있는 곳.

 

이곳에서는 여러 전시들을 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하치노헤 리뷰>이다. 3명의 작가가 전시하고 있는 것인데, 하치노헤는 이번 일본 지진 때문에 피해를 많이 입은 곳이라고 한다. 처음 우리가 요코하마에 도착했을 때, 호소부치상이 이 공간은 이번 지진때 피해를 본 마을의 사진이 전시 될 거라고 했었다. 나는 또 고통이 전시된다거나, 참혹함을 드러낸 사진들이 걸리겠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이 곳의 전시는 사람들의 인물사진이었다. 지진 이후의 사진이 아니라, 지진 이전의 사진. 88명의 하치노헤 마을 사람들의 사진과 인물의 스토리가 사진과 함께 전시되고 있다. 대부분 웃고 즐거운 사진들이라 사진만 보면 웃음이 난다. 그렇지만, 이 사람들의 마을은 어떻게 되고, 목숨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일본의 상황이 아닐까.

 

 

 

일본의 상황.

지진과 쓰나미 때문에 삶의 터전을 잃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다. 도쿄전력의 원자력 발전소 사고 때문에 마을을 잃은 이주민이나, 방사능의 피해를 입은 주민들도 있다. 그래서 여기저기에서 “간바로우 니뽕” 외친다.

이 힘든 시간들 속에서 <Our Magic Hour>이었던 <쇼와 30년>을 떠올리거나, 파라다이스와 같은 <신미나토 마을>을 만들거나 하는 것은 참으로 적절한 시기를 잡은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노게산의 「쇼와」:고갯길과 공원의 이야기>에서 주로 전시되어 있었던 것은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폐허가 되었던 사진들에서 곧장 미군 점령시기의 사진들로 이어지고, 또 다시 쇼와 30년경의 뭔가 활기차고 즐거워 보이는 사진들로 이어져 있다. 관동대지진(폐허)-폐전과 점령기-쇼와 30년경(부흥)으로 이렇게 시대를 뭉텅뭉텅 뛰어넘는 이 감각들이 나는 조금 불안하다. 재해의 시간들을 <새로운 마을>을 건설하는 것으로 뛰어넘으려는 감각, 재해의 시간들을 경제 부흥기의 <쇼와30년>의 기억으로 대체해 버리려는 감각들이 은폐하고 있는 전쟁과 침략의 역사들이 꿀떡 삼켜지지 않고 자꾸만 목에 걸리기 때문이다.

 

 Alice11

 

 

요코하마에서 허덕허덕 하는 여러분들에게

 

가기 전에도 가고나서도 어떻게든 전하고 싶었던 말들이 있엇지만, 그게 잘은 되지 않겟죠.

 

원래의 계획은 서로 <멀리 떨어져> 독자적으로 <제발> 각자 일을 해보자...

 

-----나이브하게 말하면, 더이상, <6426>도 <15층입니까>도 없는 그런 시간들을 갖고 싶었으나

 

제 팔자가^^

 

올 2월에도, 8월도, 자꾸 일본에 가니까, 어쩜 누군가들에게는 그 흔한 <세계화>,라던가 <국제화>의 선봉에 우리가 서있는 것 처럼 보일지 모르겠어요.

 

너무너무 어려운 경로와 과정을 거치면서도, 여러분을 다른 세계로 자꾸 내모는 이 일들의 <의미>를 다 전달할 수 있을지요?

 

아마, 그 말은 도착하지 못할 거예요.

 

저도, 제가 왜 자꾸 이러한 무모한 일들에 제 인생을 <탕진>하고 있는가, 곱씹는 나날들입니다.

 

지난 주말, 거의 가지 않는 서울의 어떤 출판사 모임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어요.

 

정규직이 되어  부산에 내려온 후, 그간 만났던 후배들에게(단지 후배들에게)

 

언제부턴가, 너무 극단적으로 모든 것에 맞서서 싸우지 말고, 어떻게든 무언가 <너의 것을 만들어라>라는 말을 많이 한다는 이야기를 <다시> 햇어요.

 그 이야기를 이전부터 들었던 후배도 그 자리에 있었으나, <교수되니, 변했다>는 반응...이라 참 훙미로왔어요.

 

아마,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그렇죠. 제가 어떤 포지션이 되어가고 있는지, 제가 다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없으니말이죠.

 

다만, 제가 정규직이 된 후, 그리고 여전히 어려운 많은 비정규직 연구자들, 후배들, 그리고 여기서 만난 많은 친구들과...함께 한 시간들 속에서

제가 후배들에게 해야 하는 일들은 <나는 이렇게 맞짱뜨고 살았는데, 너희들도 그래야지> 혹은 <너네는 그렇게 살면 안된다> (물론 그렇게 말ㅎ해주고픈 이들은 너무 많지만^^) 그런 것보다........

 

후배들에게는, 꼭 후배들에게만은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모든 걸 부정하고, 삶의 윤리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먼지처럼 사라져버리는 그런 삶이 되지는 말았으면 하는

 

그런 안타까움이었어요.

 

맞장뜨는 여자로서,,,,학회도, 선배도, 책돌리는 것조차, 매사 모든 것을 부정하며

결국, 홀로 외롭게, 벼랑끝에 서서, 최후의 순간을 곱씹는 그런 시간들이

그렇게 되는 과정이 무엇인지 조금은 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혹자는 여전히 SKY출신이 징징거린다고 하셔도 감수하겟지만.....그 순간들을 어떻게 말로 할 수 있을까요?)

 

그러던 어느날, 의무적으로 참여해야했던 프로젝트 사업으로  일본에 며칠씩 갈 일들이 생겼습니다.

 

나가사키의 어느 호텔 방, 교토의 유스호스텔 등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 울며 지새던 날들을 기억합니다.

홀로,,,,,교토, 오사카, 나가사키, 등을 어딘지도 모른채 해메던 시간들도.

 

깊은 밤, 저 어둠의 심연을 바라보던, 나가사키의 어떤 숲을 다시는 가보지 않았습니다.

그런 시간들 끝에,,,,,

 

교토 대학의 카페테리아에 앉아, 100엔짜리 밥을 먹고, 하루종일 뜨거운 복사기 앞에 서서, 다리를 절때까지 책을 복사하며

<그래, 이렇게 살자>

 

라고,,,,아마, 수중에 단돈 1000엔이 남았던 교토 역 앞의 어떤 호텔에서, 천엔을 부여잡고 울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그 천엔으로, 신칸센을 타고, 도쿄로 가서,

 

다시 복사기 앞에서, 이렇게 살자 , 이렇게라도 살자

 

하면서

 

몇년을 보내다보니

 

한국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어떤 세계>가 열렸어요.

 

한국에서는 저는 세계가 없는 인간이었어요. 교류할 인간도, 대화를 나눌 사람도, 고통과 기쁨을 나눌 사람도.

그러나, 그 복사기 앞에서 저는 어떤 세계를 갖게 되엇답니다. 그게 무엇일까를

 

과연 말할 수 있을까요.

 

아마, 저는 그래서 과도하게

 

후배들에게는 너무, 무모하게 모든 것을 부정하지 말라 <변절자의 충고>를 건네며

여러분에게는 한국을 떠나야 <세계>를 만날 수 있다고

 

말도 안되는 충고와 강변을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과연, 그게 타당한 일일까?

 

이젠, 저도 모르겟슶니다.

 

그러니, 여러분에게

 

세계는 과연 어떤 것인지

 

제게 말해주면 안될까요.

 

요코하마에 다녀와서

 

여러분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네요.

 

아마도. 제겐 이야기해주지 않겟지만

 

 

 mora

 

 

요코하마에 와서 일주일동안 작업의 방향은 하루하루 수정되고 모호해지는 경험이였습니다. 기존의 플랜을 진행하기 위해 신청했던 장비를 제대로 할당받을 수 없음으로 작업의 방법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 이였습니다. 또한 기획서에 제출했던 공간도 할당받지 못해서 전시의 아웃풋 또한 같이 수정되고 변경될수 밖에 없었습니다. 일이 계속 수정되고 변경되는 상황 속에서 정신적으로도 끊임없이 변덕을 부리며 이런 상황 속에서 작업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뱅크 아트 측과의 대화를 통해 특정한 전시공간을 할당 받기 힘들고 미나토 마을의 주민으로서 net-a를 새로운 방식으로 보여 달라는 뱅크 아트 측의 요구를 통역을 통해 전해 들었습니다. 

 

그 이후에 요코하마 팀은 오전 11시를 시작으로 저녁 8시 정도까지 현재는 신미나토 마을의 외관에서 지내면서 회의를 하고 공간을 조금씩 업데이트 시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사용하고 있는 외관 쪽은 인터넷이 안 되고 찜질방수준의 열기를 견디며 더위와 싸우고 있습니다.


처음 기획했던 제로베이스와 리빙 뉴스페이퍼는 현재 신마나토 마을에서는 하루 하루 진행 하기 힘든 문제가 있어서 다른 작업의 방식으로 수정하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진행했던 제로베이스는 일단 수정된 아래의 작업들을 원활히 진행시키고 판단을 해보아야 할 거 같습니다.


 

-작업의 기조

 

net-a의 'a'는 자신이 살아가고 싶은 삶의 방식을 자립적으로 만들어가는 누구나anyone입니다. 다시, 'a'는 개인인 'a‘(anyone)들의 노력으로 만든 장소를 기반으로 하는 진지agit들의 연합입니다. 다시, 'a'는 공동체인 ‘a'(agit)들이 관계의 실험을 통해 새로운 결속 방식으로 구축하는 未-來의 연합체association를 모색하는 network 운동입니다. 지역에서 지역으로(local to local), 국경의 안팎에 흩어져있는 수많은 개별자(a)들과 그들이 미처 진지화하지 못한 장소와 공간들을 서로 이어주고 살려내는 더 큰 네트워크 구축을 위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런 net-a를 활동을 중심으로 뻗어나가는 네트워크들을 net-a의 키워드(agit, anyone, a to a- 어소시에이션)

중심으로 부산의 아티스트나 대안매체와 신미나토 마을의 주민(작가)들과 함께 새로운 결속을 실현하고 net-a의 움직임이 하나의 파동이 되어 서로를 연결하고 만나게 하는 네트워크의 형상을 그려낸다.


net-a 키워드

 

첫번째 아지트-a

 

아지트는 -‘무한경쟁’이라는 체제는 우리에게 생존 아니면 추방이라는 좁은 길 위에서 타인을 밀어내며 앞으로 나아갈 것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사회가 정해주는 좁은 생존의 길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공생’이 가능한 ‘장소’를 만들고자 합니다. 이 ‘장소’는 공동의 노력으로 만들어내는 특별한 공간인 동시에 경쟁을 요구하는 체제와 함께 싸울 수 있는 ‘진지’이고, 독립적인 삶을 지속가능하게 살 수 있도록 해주는 지반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우리들의 진지를, ‘agit'라고 부릅니다. net-a의 아지트와 (부산자취인연대, 로 컬쳐, 웹진아지트 등) 신미나토 마을에 주민으로 입주한 작가/단체의 아지트를 서로 소개하고 개입하는 인터뷰 형식의 생중계 방송 

 

현재 예상중인 리스트

 

첫 번째- 아지트 a 와 문래동의 김윤환/ 김선팀

두 번째 -아지트 a 와 미술작가겸 사회적 기업대표 최선


두 번째- anyone-a

 

기존의 매체나 미디어에서 포착되는 사람들이 아닌 누구나의 말이 공적인 장소에서 발화되고 공유될 수 있도록 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신미나토 마을의 ‘누구나’와 접속하면서 언어와 국경의 사이에서 좌충우돌하는/ 만나기 위해서 읽고 쓰는 현장을 자유롭게 vj형식으로 담아낸다.


세 번째- a -to- a

 

net-a는 여러 형태의 포지션을 가진 이들이 자신의 삶을 구축하고 있는 만큼 자신의 포지션과 연결되고 교류해온 국경안과 국경밖의 아티스트, 대안매체들을 함께 만남으로서 새로운 결속의 방식을 실험해본다. net-a와 네트워크를 가졌던 부산의 여러 대안공간들과 아티스트를 신미나토 마을의 주민(작가)들과 연계시켜 실시간 영상통화를 통해 서로 작업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으로 시작은 net-a 구성원들이 가지고 있는 포지션에서 출발하여 각자 기획해본다.


현재 섭외하려는 한국측 은 net-a 아트워크 송진희의 포지션을 시작으로 부산문화잡지 보일라의 강선제씨, 독립영화 단체 진상필름대표 우정태씨, 뮤지션 10 / net-a의 프로그래머 김선우의 포지션으로 패션,아티스트 인큐베이팅 D매거진의 박선우씨/ 문학비평가 김대성의 포지션으로 미술평론가 김만석씨등과 접속될 수 있는 신미나토 마을의 주민들(아티스트)을 섭외하려고 합니다.


이번주 안에 아지트-a와  애니원-a, a to a에서 함께 네트워크 할 수 있는 사람들을 구축해서 진행해보려고 하고 있고 통역과 실재 방송을 위한 기술적인 구축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간바레! 하겠습니다 .

 

 

 

   

 

  

 

 선우

 

<그 곳에서 나온 말 1. 만남의 낌새를 느끼다>




1.


 신미나토마을에 가장 먼저 도착하고 매일 방문해서 그곳 사람들과의 인사와 대화 속에서 아마 트리엔날레에 참가하는 누구보다 그들의 마을 구축 리듬을 내내 잘 유지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오늘(pre open day)은, 진행과정을 계속 보고 왔었지만 각 부스 별로 아티스트가 모여 그들 각자의 자리를 만들어 가고 있는 마을의 모습이 분명 어제와는 달랐다. 아직도 채 완성되지 않았기에, 각 공간 마다 팀들은 그들의 공간을 위해 여전히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지만 페인트칠을 하고 목재 건물을 보수하면서도 외부 초대인을 통제하지 않고 만들어가는 모습을 보니, 어쩌면 지금 이 마을은 이미 들어와 있는 모두의 공동 결과물이라는 지극히 당연하고 간단해서 잊고 있었던 하나의 명제가 떠올랐다.


 

 

 

 

 

 

 

 

 

 

 

 

 

 

 


 

 신미나토마을에 방문하기 위해선, 경계를 넘어야한다. 비행기 표와 여권의 형식을 착용하여 만든 신미나토마을 안내 자료는 재미있는 하나의 형식일지도 모르지만, 신미나토마을을 넘어가는 데 있어 중요한 아이콘이기도 하다. 


 

 

 

 

 

 

 

 


 신미나토마을은 관객이 없으면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는 작업들이 많다. 500엔을 넣어주면 검은 상자 안에서 그림을 그려 다시 되돌려주는 작품, 컨셉은 간단한 헤어숍일지 몰라도 <become works!!>의 작업은, 손님과의 대화 속에서 그들이 원하는 헤어스타일을 미리 그려주고 컷트가 끝난 뒤엔 이 미용실의 몇 번째 워커(worker)가 되는 프로그램 진행 등, 신미나토마을에선 정적인 전시와 (관객과)만나야 하는 작품이 적절히 공존한다.

 

 


2. <익숙한 공통감각>




 창조적인 마을을 만들어 내려는 그들을 보는 내내, 나 또한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작업을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공동작업에 대한 익숙한 리듬감을 감지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큰 하나는, 부산에 거점을 두고 창조적인 패션 문화 복합공간으로 발돋움 하려했던 129.35atelier에서의 경험치 혹은 기억이다. 매월 다른 컨셉을 가지고 12명 디자이너들의 옷을 며칠 동안 패션문화(패션쇼/패션 사진/패션 강연/패션 영상/음악)로 준비해, 온갖 프로그램들을 적절히 배치하여 보여 줘야했다. 그 규모는 다를지 몰라도, 사람이 모여 어떤 자리를 만들어내는 일은 그 자리 주변에 모인 사람들이 서로 함께 호흡을 맞추는 것이다. 어쩌면 NET-A in Yokohama의 여태까지의 동선 또한 당장의 결과를 내려는 것 보단, 각자 다른 곳(부산과 요코하마)에서 작업해오던 리듬감을 서로 감지하기 위해 '어쨌든' 신미나토마을에 가는 것이었다. 비록 아직 공간에 대한 확답을 듣지 못했지만, (함께 준비해야하는)그 자리에서 눈을 마주치고 다른 이들의 움직임을 계속 관찰하고 동선을 파악하여 다시 우리의 동선을 함께 놓고 보는 것이 자리/마을을 만드는 공동작업에 대한 큰 기조가 아닌가.


3. <요코하마의 역사를 더듬다.>

 아직 우리는 길눈이 어둡다. 숙소 앞 5분 거리 하나, BankART1929근처 두세 가지 거리만 기억하며 더듬더듬 그날의 목적지를 찾아 가고 있다. 오늘은 요코하마의 트리엔날레를 준비해온 사람들의 행사가 연이어 준비된 날이다. 오후1시부터는 요코하마 시립 미술관에서 작품들을 미리 볼 수 있다. 그리고 6시부터 파시픽 요코하마(요코하마의 국제 컨벤션센터)에서 초대 아티스트/프레스 등이 모여 (저녁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요코하마 트리엔날레 시작 전, 교류/비지니스의 장이 준비되어 있고 8시부터는 (다시)신미나토마을에서 프리오픈(pre-open)진행을 시작한다. 그렇다면 저녁을 먹기 전까지의 동선을 생각해야 하는데, 막상 요코하마에 온 뒤론 애초에 생각했던 '가야할 곳'들이 뒤죽박죽 얽혀버린 상황에, 동선에 갈피를 잡지 못한 5일째였다. 때마침 장수희 선생님이 요코하마에서 열리는 행사 중, 개항기념관에서 열리는 <요코하마 노스탤지어>사진 전시를 보러가자는 제안을 주셨다. 우리들이 뱅크아트에서 항상 점거하고 있는 회의실에 하나 둘 씩 각종 인포메이션 자료들이 놓여 지기 시작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그 전시였다. 우리의 요구사항만을 전하기 위한 동선이 아니었기에, 그 곳에서 죽치고 있으면서 얻게 된 또 다른 장소로의 이동은 뱅크아트 요코하마에 보낸 첫 기획안-마을에서 마을로, 혹은 장소에서 장소로-을 수행하고 있다는 생각을 낳았다. 

 

 

 

 

 <요코하마 노스탤지어>는 개항 당시의 장면들로 기획된 전시이다. 기념관엔 특히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많았다. 비록 일본어를 알아듣진 못했지만, 사진 한 장, 한 장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끊임없이 대화하는 그들의 모습은 단순한 옛 시절의 회상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닌가란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에 대한 그리움인가, 개항 이후 새로운 문물을 제일 먼저 받아들이는 요코하마에 대한 자부심일까, 혹은 그리움의 정서로 설명하기 부족한, 다른 공간으로의 넘어감일까.

 
4. <OUR MAGIC HOUR>


 5개월 전 동북지방의 지진 이후, 일본 전 열도는 홀로 감당하지 못할 고통 부담에 네트워크(혹은 미디어)의 필요성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알리고 있다. 요코하마에 있는 동안, 나는 그들에게 외국인, 여행객 즉 이방인이지만, 내가 과연 요코하마가 일컫는 "국제적인 네트워킹"의 대상일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나는 과연 완전한 타자와 "네트워킹"할 수 있는가. 요코하마 트리엔날레-신미나토마을-는 무엇/누구 인가?
 나는 패션이라는 기치아래,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요코하마 트리엔날레가 말하는, "예술"을 통해, 나는 과연 그들과 접속할 수 있을까. 요코하마 트리엔날레의 our magic hour의 타이틀은 예술을 통해, 끝나지 않는 불안과 언제 입 열지 모르는 자연의 침묵 속에서 "우리들의 상상력"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2011 요코하마 트리엔날레의 서사는 다음 문장 안에서 벌어지고 있다. <OUR MAGIC HOUR; how much of the world can we know?> 그리고 <look, nurture and connect>라는 구호를 외치며, 아티스트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누군가들'과 소통, 네트워킹을 선두에서 외치고 있다. 그렇다, 질기디 질긴 생존과 한 순간의 폐허 앞에서 옴짝달싹하지 못한 채 그들은 타인을 부르고 있다. 함께 "우리의" 고통을 견뎌줄 타인. 3개월 동안의 트리엔날레 혹은 환상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그들은 과연 어떤 심정일까?

 

 신콩떡

 

 

 

 

 

 

여기는 요코하마입니다.

 

팀원들, 그리고 여기에 올 여러 사람들에게 편지쓴다 생각하고 올립니다.

 

벌써 5일째입니다. 지금은 모두가 나간 방에서서 혼자 라면도 먹고, 엎드려서 여기저기 전화도 하고, 책도 한 권 읽었고, 그동안 한 것들을 정리해보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지금 있는 작은 방에는 햇볕이 잘 들고, 에어컨이 시원하고, 이불이 가벼워서, 이대로 시간이 100일은 지나도 모를 것 같습니다. 이렇게 있다 보면 여기가 정말 외국일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아마 방 안에만 있다보면 언제나 모를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도 5일째 되어서 하는 말이고, 정말 4일간은 충격과 공포의 뺑뺑이였습니다.

 

일단 출발. 1일

 

출발한 후에는 다들 두리번거립니다. 뭔가 잡아내야겠다는 매의 눈부터 시작해서, 이국의 풍경을 무심히 흘려보내는 눈까지. 하지만 저에게는 그것이 꼭 일본, 이국이라서 자꾸 관찰하게 된다기 보다는 하단 밖이기 때문에 열심히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제 요코하마로 들어갑니다.

 

 

 

 

오오 근대식건물 오오

요코하마로 진입하는 중이기 때문에, 신기해서 찍어놓았는데 여기에 오니 널린 것들이 이런 건물이더군요. 

 

 

 

창밖을 보는 진희씨. 줌을 당기는 대신 몸을 내밀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

 

 

의자 뒷모습이 "요코하마에 잘왔어" 하고 빵끗하는 듯해서 찍어놓았습니다...

.....만...이때는 요코하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전혀 몰랐습니다........

 

 

그리고 2일, 3일, 4일은........

 

 

This is 외국!!!

아아 실감난다. 말은 안통하고 상황은 어긋나고 미래는 예측불능입니다!

 

우선, 장비, 전시공간, 예산 등이 예측과 너무 달랐고, 우리 팀이 가장 먼저 도착하여 그 것들을 몸소 확인하는 것을 시작으로 한국에서 오신 작가분들이 하나 둘 씩 충돌이 일어나고 있는 중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너무 절망(?)하지 말고, 느긋하게 기다리면서 시간을 갖고 조율하자, 는 조언대로 해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장비 없이 뭔가 진행하고 있는 우리의 상황

* 인터넷에서 주운 사진입니다.ㅠㅠ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나니 주변을 둘러볼 마음도 생겨났는데요, 신미나토마을은 생각만큼 크지는 않았습니다. 완전히 하나의 마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왔는데, 큰 공간 안에 여러가지 아기자기한 부스들을 설치하여 '마을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이더군요. 그것이 꼭 요코하마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저희가 있는 숙소 근방인 <야마테> 역시도 예쁘고 깔끔하고 큰 주택들이 모여있는 동네입니다. '마을'이지만 사람의 기척이 잘 느끼지지 않는 곳, 진짜보다 더 진짜같은 가짜, 잘 꾸며진 세트장같은 느낌이 요코하마와 미나토를 같이 놓게하는 듯 합니다. (보드리야르옹의 디즈니랜드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나기도 하네요.)

 

그리고 어찌되었든 할 수 있는 것, 즉 가지고 간 장비들로 사진을 찍고 , 남기고, 매일 이야기를 나누고, 그렇게 지냅니다.

 

 

외국인묘지를 촬영중입니다. 야마테지구는 부촌이기도 부촌이지만, 개항 이후 외국인들이 많이 살게 되면서 근대식의 유럽풍 건물들이 많이 남아있는, 역사깊은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지금은 그 외국인지구 안의 외국인 묘지에 와 있는 것입니다. 저마다 다른 모양들의 납골묘들이 들어서있는데, 죽음마저도 신기하고 이국적인 것으로 '관광'되고 있다는 것, 어떤 엄숙함도 없이 그저 동네 속의 한 부분이 되어있다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도덕적 가치판단을 제한 감상입니다.)

 

 

 

 

 

대성샘의 외국인묘지 촬영 사진은 그냥 나오지 않았습니다. 뭔가 투혼을 발휘하고 있다! 는 느낌이 들어서 찍지 않을 수 없었던 포즈...

 

 

저 장소는 꽤 높고 위험했는데도 올라가서 찍고 있었기 때문에, 역시 진희씨는 프로페셔널하다고 혼자 감탄했었습니다.

 

 

 

 주로 반나절은 이렇게 돌아다니면서 곳곳에 대한 사진을 찍고 감상을 생각하고, 나머지 반나절은 회의를 하거나 밥을 먹거나 하면서 보냅니다.

 

 

 

사진의 맨 왼쪽은 그렇게 우리와 함께 하고 있는 최선 작가님이십니다. 사회적 기업의 대표로서 아동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는 것과 작가로서의 작업을 병행하시고 계시고, 지금까지 일본에 있는 동안 우리에게 항상 웃음과 에너지를 주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여기는 누구나 쓸 수 있는 세미나실인듯 한데, 저희가 1일부터 와서 죽치는 것을 시작으로, 최선 작가님도 여기로 오시고, 김윤환 선생님과 다른 한국 작가분들도 여기로 이야기하러 오시고 하게 되면서 어느 샌가 "코리아 아티스트 룸" 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여기가 석당 자료실이구나! 하면서 웃기도 했는데, 우리가 우리만의 공간을 하나 점거해나가고 있다는 생각도 들어서 마음에 드는 곳입니다. 여기를 거점으로 사람들이 지나가고, 소개받고, 모이고, 그렇게 미나토마을 안에서 누구도 제공해주지 않는 <우리들의 방>을 만들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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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의 기록을 충실히 정리하기 보다는 지금까지의 장면들을 꽤 두서없이 올리게 되었습니다. 5일간 제가 이곳에서 지내는 동선이 그랬던 것인가, 하고 반성해봅니다. 그래도 가장 하고 싶은 말은 우리는 이렇게 부딪히고 깨지고 웃으면서, 잘, 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끔 한국에 계시는 분들이 함께 있었다면, 하는 생각도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많이 궁금합니다.

 

 기타등등인

 

 

1.

까악 까악 까악

아침에 이렇게 우는 새는? 이라고 수수께끼를 낸다면, 한국인들은, 까치! 라고 하겠지? 요코하마에서의 둘째날도, 셋째 날도 나는 이 까마귀 소리에 잠이 깼다. 작은 산새도 아니고 시커먼 까마귀가 아침부터 시끄럽게 울어서.

보통 그렇듯이, 6시 15분쯤에 잠에서 깼는데, 오늘은 일어나 움직이기가 싫어서 자다 깼다를 반복하다가 9시쯤 일어난다. 회의가 11시니까, 어제처럼 조깅은 못하더라도 그전에 산책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샤워를 하고, 주섬주섬 챙겨서 밖으로 나간다. 우리가 묵고 있는 숙소는 <에리스만 저>이라는 서양식 주택 옆의 골목길에 있다. 골목을 나가면, 수풀 속으로 야외 풀에서 수영을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아침부터 햇볕이 뜨거워서, 물 속에 있는 사람들이 부럽다. 수영장이 200엔 정도 밖에 안한다고, 통역을 해주시는 시철씨가 말해줬으니, 조만간 수영하러 가야겠다.

 

 

 

조금 걸어 나오다가 보니, 어제 새벽에 조깅할때는 닫혀있던 <에리스만 저>가 열려있다. 에리스만 저, 일본어로 찾아보니까, <에리스만 테이>다. 뭐하는 곳인가 머리를 들이밀고 들어가본다. 분위기가, 부민동에 있는 <임시수도기념관>과 분위기가 닮았다. 다만 <임시수도기념관>은 뭔가 휑~한 느낌인데, 여기는 직원도 좀 있고, 찌라시도 많이 있고 주변의 서양식 건물들에 대한 지도도 구비되어 있다. 신발을 벗고 슬리퍼를 신고 안으로 들어가본다. 창이 많고, 응접실등이 구비되어 있는 아름다운 서양식 건축양식을 보존하고 관광 상품으로 만든 것이다. 남쪽으로 테라스를 만들어서 해가 항상 잘 들게 설게 되어 있다고 설명문이 있다. 지난 2월에 일본에 왔을때는 표지판 읽는것도 힘들었던 것 같은데, 혼자 다녀도 생각보다 설명이 잘 읽혀져서 놀랍다. 여하튼 만화책에나 나올만한 서양식 건물을 둘러보는데는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다만, 2층에 테이블이 놓여 있는 방에 <방명록>이 있길래 잠깐 누가 다녀갔나~스윽 읽어보느라 잠시 머물렀다. 꼬마들이 그림을 그려놓은 것도 있고, 진지한 일본어로 두페이지를 적은 사람도 있다.(길어서 읽어보지는 않았다) 마침 한국어도 보이길래 읽어본다. 이기리스 관(영국관)부터 이동네를 다 걸어 다녔다는 내용이다. 그제서야 이 동네에 서양식 건물이 많이 있다는걸 깨닫고 지도를 한참 들여다 본다. 허허... 한국에는 한옥마을, 독일마을, 프랑스 마을 등등이 있는데, 일본에도, 서양식 건물 마을이 있군! 외국인들이 많이 살던 동네라 그런가보다. 외국인 묘지도 이 동네의 관광 명소중의 하나란다. 일행중 한분은 달맞이 고개가 계속 이어지는 듯한 느낌이라는데,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가까우니까 또 와야지" 하고 방명록에 남겨두고, 1층으로 내려오니까 찻집이 1층에서 운영되고 있다. 서양식 가구가 있고, 들어가 보니까, 커피와 케익을 판다. 그러고 보면 <서양식 양과자집>같은 분위기다. 오호라! 5개 사서 가져가면 일행들이 완전 기뻐하겠군!하며, "케-키, 고레 고레 고레 고레 고레 쿠다사이"한다. 파시는 분이 눈 똥그랗게 뜨는데, 싸간다는 일본말은 생각나지 않는다. "플리즈 팩 디즈 케-키" 하니까 테이크 아웃은 안된다고 한다. 그럼 됐어! 하고 나오기도 뭣하고 누룽지 씹어 먹으면서 돌아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일단 테이블에 앉는다. 테이블은 창가쪽에 반원들이 붙어 있는 형태인다. 앉으면, 큰 창으로, 우거진 숲들이 아름답다. 케익은 여러가지 종류 중에서 제일 이뻐보이는 스트로베리 케익으로 한다. 곧 커피와 케익이 나온다. 와우! 음악도 없이 조용하고 밝은 아침의 서양식 건물 속에서 맛있는 커피와 갓 만든 케익을 먹다니. 계획하지 않은 일이지만, 뭔가 기분이 이상하다. 나만 맛난거 먹어서 일행에게 미안하기도 하다. 쩝. 뭔가 메모같은걸 해야겠다고 생각이 드는데, 나올때, 전자사전이랑 지갑만 달랑 들고 나와서, 메모할 것이 없다. 카운터에 가서, 메모종이와 볼펜을 달라고 말한다. 마음대로 "메모 카미 토 보루펭가 히츠요-데스"(메모 종이랑 볼펜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할려고 한거다 ㅋ)하니까, 케익 주문서 뒷면을 쓰라고 준다. 호~신기하다. (나마 케-키)라고 써있는 건, 생크림 케익인것 같다.

 

메모지를 들고 와서 볼펜으로 메모를 시작한다. 뭐 특별한 걸 쓰는게 아니라, <오늘의 할일>정도? 쓰다가 보니, 늘 쓰던걸, 늘 쓰던 시간에 쓰고 있는 것 같아서, 뭔가 잘못된 것 같기도 하다. 늘 하던 것을 바뀐 공간에서도 똑같이 하고 있는 건, 관성인가, 저항인가.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회의하러 집으로 간다.

 

 

2.

오늘 일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아침 회의의 주된 내용이다. 오늘은 늦은 회의라서 천천히 뱅크아트로 갈 생각이다. 뱅크아트로 가서 체크할 것을 체크한다. 결과물을 내야하는 크리에이티브 팀은 아직 받아야 할 기자재가 있다. 함께 뱅크 아트로 가서 기자재를 받고, 각자의 일정대로 움직이는 걸로 한다. 김대성 선생님은 둘째날의 기록을 오늘 집필하고 올리기 위해서 신야마토마을이 지어지고 있는 신코피아에 머무르려고 한다. 크리에이티브 팀은 기자재를 받으면 랜드마크 빌딩 옆에 있는 큰 서점에 가보려고 한다. 그 전날 시철씨에게 소개받은 곳이다. 나는 <요코하마 국립대학> 도서관에 가보려고 한다. 먼저 답사하고 크리에이티브 팀과 함께 가는 것으로 한다. 선우씨는 어제부터 눈에 띄게 바뀌고 있는 <신 미나토 마을>에 대한 기록과 전시 공간에 들어오는 사람들과 이야기 해보고 싶어 한다. 그래도 낯선 곳이고, 일본이고, 거대한 공간이고, 준비하느라 이케다상을 비롯한 스태프들이 자기들 일이 바쁘고 힘들어서 예민해 보이고 그래서 뭔가 말을 건네거나 사람들을 사귀는 것이 어렵다. 우리가 만들어온 명함을 건네는 것이 가장 쉽고 자연스럽게 얘기하고 서로를 알리는 방법일 수 있다는 얘기와 함께, "오늘 열명한테 명함 주고 명함 받아와오세여~"라고 하고 서로 웃는다.

 

집을 나선다. 뱅크아트까지 가는 길에 <가나가와 근대 문학관>이 있어서 거기에 함께 들러 보는 것으로 한다. 벌써 12시가 넘었다. 햇볕이 뜨겁다. 어제 조깅할 때 가본 <항구가 보이는 공원> 근처에 <가나가와 근대 문학관>이 있다. 표지판을 보니 한국 영사관도 근처다. 국제학교와 몇개의 서양식 건물들을 지나 골목길로 들어가라는 가나가와 근대 문학관 안내 표지판이 보인다. 뚤뚤뚤 내려가 정문에 있는 게시판을 보니 8월 6일부터 전시를 시작한다고 하고, 전시를 쉰다고 한다. 문학관이 쉬는건가 하고 돌아서려다가 건물앞 자동문 앞에 서본다. 의외로 문이 열린다. 들어가보니, 근대 문학 잡지 및 근대문학 자료 만여점을 보유하고 있는 작은 도서관형식의 문학관이다. 자료 몇개 없이 인테리어화 된 한국의 몇몇 문학관과 비교된다. 우리 보다 먼저 온 사람 한명 이외에는 자료를 이용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북적거리는 관광도시의 도서관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한쪽 벽면에는 근대문학 잡지들 의 목차들이 쭉 꽂혀 있다. 50년대 일본 잡지 <신여성> 목차, 30년대 <신려원> 목차, <여성>, <중앙공론>, <전후 아나키즘 운동 자료>, <주부지우>, <부인지우>, <사상의 과학>, <동경남부 서클 잡지 집성>, 등의 총 목차와 <소화 신문잡지서적 발금 연표>, <점령기 여성 잡지 사전>등이 막 꽂혀있다. 일본어가 빨리 읽히지 않아서, 이 책장 앞에서 계속 서성거리며 서 있었다. 한국에서 한국어 책들이 꽂혀 있는 서가 앞에서 제목들을 쑤욱 읽어보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시간이 걸린다"

 

시간이 걸린다....라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한국과 이곳의 시간이 다르게 흘러가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한국의 시간이 한국어 서가 앞에서의 시간처럼 뭉텅 날라가버리는데, 요코하마의 시간은 일본어 서가 한줄을 읽는 데 걸리는 시간으로 흘러간다. 우리는 느리게 흐르는 시간에 서 있다.

책이 있는 서가 앞, 책을 읽기 위한 용도의 테이블. 익숙하게 느껴진다. 사흘만에 만나는 서가 앞과 책상인데 100년만에 만나는 것 같다. 김대성 선생님, 신현아 선생님, 김선우씨-갑자기 신이 났다. "와우! 여기 너무 좋아! 또 오자!"

 

진희씨가 없다. 도서관에서 좋아하느라 진희씨가 어디있는지 잊었다. 건물을 나가니, 진희씨가 건물 그늘 밑에 누워있다. 바닥이 돌이라 차갑지 않을 것이다. 온돌. 이곳엔 따뜻한 바닥이 없다. 우리 방에 물이 샜을 때, 축축한 바닥이 빨리 마르라고 우린 당연히 한국을 생각하고 보일러를 틀었다. 한참 뒤에, 아 여긴 한국과 다른 방식으로 난방을 하지! 했다. 바닥이 따뜻해지지 않는 곳. 다른 방식으로 따뜻해 지는 곳. 우리는 지금 그런 곳에 있다. 같은 방식으로 따뜻해지려고 해봤자, 아무 소용 없는 곳이다.

조용한 그늘 아래에 누워있는 아티스트(!). 어제 김윤환씨와 얘기를 나눈 후, 좀 마음이 편해진 것 같다. 진희씨는 잠깐동안 얼만큼 깊이 잠들었을까.

 

근대문학관 속에서 요코하마에 관한 자료를 열심히 본 선우씨가 가까운 곳에 100엔 버스가 선다고 알려준다. 빨간 버스에는 <아까이 쿠츠>라고 써있다. 빨간 구두. 근대문학관에서 걸어 나오는데 한 30미터 앞에 빨간 버스가 먼저 출발한다. 대성샘이 잡으러 뛰어간다. 우리는 뒤에서 놓칠 거라고 천천히 걸어가는데, 버스가 신호에 걸렸다. 대성샘이 버스기사에게 태워달라고 바디랭귀지를 한다. 그동안 우리는 뒤에서 대성샘 쪽으로 같이 뛴다. 버스 문이 열린다. 탄다. 버스기사님이 "뭐라뭐라뭐라" 하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냥 앉는다. 교토에서 타본 버스는 내릴 때 돈을 냈었다. 잠시 후에 버스 기사님이 또 우리를 보고 "뭐라뭐라뭐라"한다. 잘은 모르겠지만 뉘앙스가 돈내라는 말인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이 버스는 뒷문이 있어서 앞으로 돈을 내면서 내리는 버스가 아닐 것 같기도 하다. "하이"라고 일단 대답하고 대성샘이 일단 돈을 낸다. "고닌 데스"

 

3.

차가 멈추고, 연세가 많으신 분들이 타기 시작한다. 대성샘은 뒷자리로 자리를 옮긴다. 연세가 지긋하신 할머니가 내 옆에 앉으면서 뭐라뭐라뭐라 말을 재빨리 말을 거신다. 선우씨는 "젊은 아가씨들이 날씨 좋은데 다들 어디가노?"라는 뉘앙스였다고 한다. ㅋ 한참 듣다가 "와카리마셍"(모르겠습니다)이라고 하니까 웃으시면서, "아, 너희들 중국에서 왔니?"라고 물어본다. 이 할머니, 모른다고 했는데, 저 말도 디기 빨리 말한다. 겨우 알아듣고, "아녀, 우린 한국인이예여"라고 한다. 계속 말씀하시는데 넘 빨리 말하시고 잘 못알아 듣겠어서 "우리는 아카렝카 창고까지가요"한다. 할머니는 (요약하자면) "너희들 바쁘지 않니? 이거 타고 가면 대단히 돌아가. 바쁘면, 요 배 앞에서 내리면 걸어서 5분밖에 안걸려. 거꾸로 가야 더 가까운데." 라고 말한 것 같다. 우린 버스에 앉아서 좀 쉬고 싶었기 때문에 그냥 타고 간다. 할머니한테는 "둘러보고 싶어서" 라고 말해둔다. 이렇게 말했지만, 역시 이 버스는 대단히 돌아가고 있다. 관광 명소를 다 들르고 있어서,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어떤 전시를 하는지 외관 플래카드를 보고 알수 있다.

 

버스에서 내려서 걸으며 우리가 보내고 있는 시간에 대해 얘기한다. 대성샘은 시간 낭비로 구축되는 시간이라고 명명한다. 재미있다. 시간 낭비로 구축되는 새로운 시간. "시간 낭비"라는 한국에서의 우리 시간 감각이 여기서 다른 어떤 것으로 "구축"되고 있다.

 

 

신코피아의 신 미나토 마을에 도착했다. 카메라 장비 준비를 확인하고, 우리가 늘 머무르는 곳에 노트북을 연결하기 위한 전선을 요청한다. 이곳은 인터넷이 되는 곳이다. 따라서 이 곳을 우리 모든 작업의 거점으로 삼을 수 밖에 없다. 이 방에 새로운 테이블이 생기고, 그곳에 새로운 찌라시가 놓여진다. 검은 티셔츠를 입은 분이다. 선우씨와 함께 그분과 얘기해 본다. 당신은 어떤 작업을 하냐?라고 하니까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분이라고 하신다. 명함을 주고 받았다. 이이다상. 찌라시는 이이다상이 만든 다큐멘터리 제목들이 적혀 있다. <아시가라상>, <「홈리스」와 우연히 만난 어린이들>, <후츠-노 시고토가 시따이>등과 개와 고양이에 대한 다큐, 다운증후군에 관한 다큐도 있었다. 직접 만나고, 뛰고, 이야기한, 주로 인터뷰 방식으로 만든 것 같이 보이는데, 제목만 보아도 흥미롭다. “후츠-노 시고토”가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니까, 너무 오래 일하고, 너무 힘든 일을 하는 일이라고 영어로 설명한다. 찌라시에는 “과로사, 격차 사회, 워킹푸아(POOR 인것 같음), 비정규고용, 일용파견, 장시간 노동, 하청머시기(잘모름), 넷토카페 난민”이라는 단어들이 쓰여져 있다. 이 분의 다큐 꼭 보고싶다는 생각이 든다. 찌라시의 사진을 보면 이이다상이 주인공과 함께 직접 출연하기도 한다. 다큐 씨디도 전시되어 있다. 컴퓨터로 볼 수 있으면 놓여진 씨디로 봐도 좋다고 한다. 오늘 못봤으니까 내일 봐야지.

 

 

최선 선생님이다. 이분은 뼈가루를 뿌리는 어떤 작업을 준비하고 계신데, 뱅크 아트 측에서 반대를 하는 듯 하다. 우리에게 세미나(?) 토론회(?)와 관련된 것들을 제안해 왔다. 좋은 제안이긴 하지만, 어떤 방향에서 어떻게 풀어가야 할 지는 아직 나도 잘 모르겠다.

 

 

a White painting from milk mother’s milk on cotton 46×53cm 2005 젖동냥 그림
캔버스 위에 모유 46×53㎝ 2005 The breast milk that I gathered from 10 nursing mothers runs down on a canvas. The work derives from my critical point of view to the Monochrome Painting which was prevailing in the Korean art circles in the 1970’s. I intended to provoke ironical disgust with a painting completed by begged breast milk and its stinking smell. 젖동냥으로 만든 흰 그림과 캔버스 위에 남겨진 찌꺼기가 부패하면서 발산하는 악취로 모유의 숭고함이 역겨움으로 바뀌는 과정을 보여주고자 했다.(www.ssunya.net)

어제 본 최선 선생님의 포트폴리오 중에서는 모유를 이용한 작품이 인상적이었다. 제목은 <젖동냥>. <모유>가 어떻게 악취를 내면서 변질되어가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만들었다고 했다. 모성, 가족, 국가-‘너를 지켜주는 소중한 것’이라고 교육받아온 이 이데올로기들이 어떻게 악취를 내며 변질되고 썩어가는지를 눈에 보이는 작품으로 만든 것 같아서 놀라웠다. 지금 그 작품은 비닐에 싸여 있는데, 곰팡이가 한뼘정도 번식하고 있단다. 모성도, 가족주의도, 국가도, 곰팡이가 한뼘정도 번식하고 있는 것일까. <팡이제로>사러 가야겠다.

 

4.

신 미나토 마을이 너무 더워서 오래 있지 못하고 퇴근하기로 한다. 3일간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서, 오전 오후 5시~6시 정도까지 일을 보고 7시에 신미나토 마을로 모이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동선 변경을 회의때 건의해야겠다. 오늘 못간 <요코하마 국립대학>은 내일로!!!

 

저녁은 시철씨가 권해준 저렴 파스타 레스토랑에서 먹었다. 음료와 차가 따로 계산되는 줄 모르고 막 먹다가, 따로 계산되는 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래도 한명당 500엔도 안되는 돈으로 한끼를 레스토랑에서 떼웠다.

밤 12시쯤에 대성샘이 글 올리려고 와이파이 찾으러 선우씨랑 나갔다가 2시 넘어서 들어왔다. 두시간 사이 폭삭 늙었다. 두시간동안 우여곡절이 많았나보다. 숙소를 나가는 그 순간 우여곡절의 시작이다. ㅋ 내일 아침에 와이파이 되는 곳을 찾으러 가야겠다.

 

헉! 날 샜다. ㅡ,ㅡ

 mora

 

 

일본에 도착하고 첫날 숙소에서 인터넷과 관련된 상황들이 해결되지 않아서 오늘 신 미나토 마을에서 , 8월 1일 일정을 하루 늦게 올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우선은 여기의 상황을 전달하는것이 중요할거 같아서 어제 하루 진행되었던 일들을 기준으로 첫날 일정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8월 1일 김해공항에서 요코하마 신 미나토 마을로 출발하는  5명(김대성, 장수희, 신현아, 김선우, 송진희 )이 만나서 출국 심사 를 받고 나리타 공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습니다. 

1시간 30분 정도 비행기를 타고 나리타 공항에 도착해서 미리 받아놓은 미나토 마을 연락처로 전화한 후 요코하마 리무진을 타고 미나토미라이 근처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제일교포3세이자 요코하마에서 AAA 갤러리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김시철씨가 저희를 픽업하러 오셨고 저희와 관련된 일들의 통역을 며칠동안 맡아 주신다고 전해들었습니다. 리무진 버스를 타고 창밖으로 바라본 일본과 요코하마는 수많은 선과 도형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추상적인 것들이 없는 오로지 구상화된 프레임을 반복해서 보는듯했습니다.


자연적인 나무들도 흐트러짐 없이 정갈하게 자리잡고 있는 모습이 제가 처음 바라본 일본/요코하마의 인상입니다. 도착한 미나토마을은 현재 개장준비로 스텝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고 현장에서 작업하고 계신 분들은 미나토마을의 건축을 담당하시분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 공간에서 전시할 아티스트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김시철씨 안내를 받고 호소부치상과 간단한 인사를 나눈뒤, 미나토 마을 공간 설명을  함께 이동하면서 듣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미나토 마을은 전기를 쓰지 않고 입구에 고야나무와 태양열을 이용해 운영하고 있으며 크게 네가지 공간이 이어져 있었습니다.

 

첫번째 스페이스는 1층과 2층이 미로처럼 연결된 구조로(쌈지길과 흡사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현재는 패션샵 정도가 구색을 갖추고 있었고 나머지 공간은 계속 설계중이였습니다.  주로 일본에서 특정한 성격을 가지고 작업하는 프로젝트 팀이나 단체들이 공간을 할당받아 플랜을 세우고 전시를 하는 형태로 짐작됩니다. 

 

두번째 스페이스는  작은 집들과 마을들로 구성되어질 예정이고 스트로폼과 같은 재활용들을 이용해서 공간을 만들고 있는 것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이어진 세번째 스페이스는 모형 동물원과 라이브러리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마지막 네번째 스페이스는 바다가 보이는 곳으로 카페와 전시장이 뒤섞인 형태이고 이곳에 조선통신사의 건축물이 제작되고 있었고 건축물은 한국의 한옥과 일본의 전통 가옥을 믹스한 형태로 구상중이였으며 8월 5일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모든 공간 만들어지고 있는 상황이여서 자세한 파악은 8월 6일 개장하기전에 알수 있을듯 합니다

공간을 둘러보고 사무실에서 호소부치상과 장비와 예산에 대한 토의를 했습니다. 우리가 요청한 장비는 현재 사용할 수 없는 것으로 일단 전해듣고 사용할 수 있는 장비와 예산은 다음날 11시로 미팅을 잡고 저희는 숙소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숙소로 이동하면서 신미나토 마을에 도착한 한국인 아티스트 최선씨와 만나게 되었고 최선씨는 서울문화재단에서 지원을 받고 두달동안 레지던시를 하시고 신 미나토 마을에서 작품전시를 하는 플랜을 가지고 계신다고 전해들었습니다.

시간상 간단하게 인사나누고 요코하마에서 Paris 갤러리를 운영하시는 모리타씨와 함께 숙소로 이동했습니다. 도착한 숙소는 야마떼에 있는 고양이 박물관옆 게스트 하우스로 두개의방을 배정받았습니다. 도착해서 생필품과 사용관련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오늘 통역등 진행에 도움을 주신 김시철씨와 저녁식사를 했습니다. 저녁식사는 중화가 지역으로 야마떼와 모토마찌와 가까운곳이였고 그 주변을 돌아 보며 숙소로 돌아와서 내일 아침 회의 내용(요코하마 일정과/프로젝트 일정)을 간단하게 정리하고 각자 짐정리하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요코하마 뱅크측은 개장을 며칠 앞두고 있어서 모든 스텝들이 분주하고 정신이 없는듯 했습니다. 개장전까지는 우리가 요구했던 사항들과 이쪽에서 해줄수 있는것들을 협의 하고, 미나토 마을의 작업 분위기와 우리가 한국에서 가져온 플랜들을 이 공간에서 어떻게 풀어나갈 수 있을지 많은 고민을 해야 할듯 합니다.  


요코하마에서 송진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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