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음 이 홈페이지, aff-com.net이 만들어진 것은 지역을 기반으로 한 연구공동체인 아프꼼이 “저, 여기 있어요.”라는 목소리를 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지역의 안/팎으로, 국경의 안/팎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기록을 남겨, 지금의 aff-com.net은 수많은 행적들이 흔적으로 남겨진 장소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우리들이 연구와 활동을 통하여 당신들과 함께 삶의 자장 안에서 움직이며, 그 지평의 한 부분을 넓혀나가고 있음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저, 여기 있어요.”라는 말은 실은 “당신과 만나고 싶어요.”라는 말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가닿은 곳에서 “지켜보고 있어요.”라고 응답해주는 또 다른 목소리들이 있어, aff-com.net은 연구모임 아프콤이 여러분에게 다가가는 곳이자 여러분이 아프콤에게 다가오는 곳, 모임의 자리이자 글쓰기의 인터페이스인 ‘매체’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여, 그렇게 만들어진 이 자리에 또 다른 목소리들을 초대하고자 합니다. 아프콤 with는 그런 자리로서 만들어졌습니다. 이는 아프꼼이 닿아온 다양한 면/면들을 전하는 interface로써, 그리고 만남의 약속처럼 때맞춰 새로운 글이 올라오는 매체로써, 조금씩 이행해 나가고자 하는 움직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이행의 단초를 김비작가님의 <경계인간:Marginal Human>의 연재로 열어보고자 합니다. 김비작가님의 에세이인 <경계인간:Marginal Human>은 매 달 2, 4주차 수요일에 연재될 예정입니다. aff-com.net에 그간 실려온 글들이 장르적 경계를 넘어 삶과 실천을 글로 투과시키는 것었다고 할 때, 경계의 감각을 실존으로서 녹여낸 김비 작가님의 <경계인간:Marginal Human>은 그 의미가 더욱 깊을 것입니다.



“결국, 그건 ‘경계’에 관한 이야기가 될 것 같다. 언제나 그 위에 살아오면서, 나를 배반하고 세상을 배반하며 떠오르는 난잡한 생각들이 있었음을 잘 알고 있다. 아마도 이 이야기들을 통해 나는 그런 난잡한 것들을 그나마 내 안에서 정리하여 흐릿하게 풀어놓게 되기를 바란다.”

(본문 중에서)




* 김비 작가님 소개


경기도 문산 출생, 작가는 어린 시절도 그곳에서 보냈다. ‘나는 누구일까?’를 끊임없이 묻게 되는 나이에, 그녀는 ‘남자’ 김병필이 아닌 ‘나’ 김비를 찾아냈다. 그리고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으로 글과 사진을 선택했고, 후회 없이 미친 듯이 쓰겠다는 다짐으로 줄기차게 집필에 몰두했다. 1998년 성적소수자 월간지 ‘버디’에 실린 단편소설 <그의 나이 예순넷>을 시작으로 창작활동에 발을 디뎠다. 에세이집 <못생긴 트랜스젠더 김비 이야기>(2001)을 출간했고, 이듬해 성장소설이자, 첫 장편소설인 <개년이>를 출간하며 긴 글에 대한 호흡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2005년에는 중편소설 <입술나무>를, 2006년에는 개인 소설집 <나나누나나>를 발표하면서 힘든 현실을 이겨내며, 글을 통해 더 커다란 목소리를 내기로 다짐했다. 사람들에게 한발 더 가깝게 다가가기 위하여 2006년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의 시나리오 자문을 맡았다. 또 다른 ‘김비’인 주인공 ‘오동구’를 통해 세상 껴안기를 시도했다. 2007년, 제 39회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플라스틱 女人>이 당선되어 세상과 소통하는 또 하나의 길을 찾아, 힘찬 첫 발걸음을 내딛는다. 이후 2001년에 펴낸 <못생긴 트랜스젠더 김비 이야기>에서 시간 순서라는 골격을 그대로 둔 채 생각과 글을 다듬고, 그 후 10년 동안 있었던 일들을 보태 다시 써낸 에세이집 <네 머리에 꽃을 달아라>(2011)와 장편 소설 <빠스정류장>(2012)을 발표했다.


링크: http://www.kimbee.net/

한겨레신문

[교양-잠깐 독서: 당대의 모순과 싸운 ‘풍기문란’]

2013년 6월 10일

 

당대의 모순과 싸운 ‘풍기문란’

음란과 혁명-풍기문란의 계보와 정념의 정치학

 

 

 

‘정동’(affect)과 ‘공동체’(commune). 부산에 거점을 둔 연구모임 ‘아프-꼼’의 이름이자 이 모임을 주도하는 권명아 동아대 교수(국문학)의 핵심 주제다. 그는 ‘정동’을 “슬픔이나 외로움, 불안, 환멸, 사랑과 같은 ‘정념’을 정치화하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거칠게 말해, 일상화된 냉전(파시즘) 아래 찌꺼기처럼 가라앉아 있는 정념들을 만나고 여기에 정치적 생명력을 부여하는 것이다.

권 교수는 이 책을 이전에 펴냈던 <역사적 파시즘>, <식민지 이후를 사유하다>와 묶어 “한국 근현대사 연구에 대한 3부작”이라 말한다. 1930년대 일제시대부터 현재까지 한국 근현대사에서 ‘풍기문란’을 어떻게 규정하고 법제도와 담론을 동원해 통제해왔는지 고찰했다. 왜 풍기문란인가? 그는 “풍기문란 연구는 당대에 부적절한 것으로 간주된 정념이 정치적 열정으로 이행하는 역사적 맥락을 추적하는 작업”이라 한다. 곧 부적절한 정념의 담지자가 되어 주체의 자리에서 쫓겨난 이들로부터 ‘통치의 선’을 읽어내고, 이로부터 새로운 정치적 주체를 불러올 역사적 전망을 쌓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일제시대 작가 이기영의 소설 <서화>를 당시 농촌공동체 마을에서 풍기문란에 대한 규제가 어떻게 작동했는지 보여주는 자료로 다시 읽어내는 등 새로운 해석을 내놓기도 한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링크: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59109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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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와 함께 읽으면 좋은 구절

 

 정동은 질 들뢰즈가 스피노자의 이론에서 어원의 함의를 빌려 정의했듯이, 정서와는 구별되는 촉발되는 것, 이로 인한 이행을 뜻한다. "정동은 그런 점에서 힘 또는 힘들의 충돌과 동의어이다." 물듦이 만남에서 비롯되듯이, 정동은 대면·관계·부딪침·충돌·접촉의 한가운데서 솟아오르는 것이다. 정동은 이러한 부딪침에서 솟아오르는 힘이자, 그 부대낌의 힘 자체라는 점에서 '강렬도intensity'를 특징으로 한다. 이런 차원에서 정동은 부대낌의 힘이라는 함의에 더욱 가깝다.

 

권명아, <<음란과 혁명>>(책세상, 2013), 61쪽.

 

 

 

 

국제신문

색을 통제해 민중을 규율하다

-1970년대 미니스커트 규제 등 일제때 조선인 통치법과 상통

2013. 06. 07

 

1975년 정부의 물놀이 퇴폐풍조 단속 풍경. 국가기록원 제공

 

이 책 표제에서 나타난 두 개 낱말의 연관성을 우선 따져본다면 고개가 갸우뚱거려진다. 선뜻 연결고리를 찾기 어려워 보이지만, '풍기문란의 계보와 정념의 정치학'이라는 부제에서 내용의 일단을 읽어낼 수 있다. 그래도 낯설다. 풍기문란에 관한 연구 결과물을 담은 음란과 혁명의 낯선 이미지가 혼란스럽다는 뜻이다. 무거운 연구 결과물이지만, 일그러진 우리 근현대사의 민낯을 특별한 주제와 연결해 보여주고 있어 끈기를 갖고 일독하면 얻을 것이 많다. 일제 강점기부터 2000년대 지금 시점에 이르기까지 풍기문란 통제의 변천사를 개괄하는 즐거움도 있다.

   
저자는 '한국에서 풍기문란이라는 개념이 형성되고 재생산된 과정은 일본의 식민 통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일제가 식민지 민중의 일상을 장악하기 위해 마련한 경찰범 처벌규칙(1912년)이 현재의 경범죄처벌법의 모태가 된 것처럼,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풍속 통제의 이념과 법제, 제도의 틀은 청산되지 않고 오히려 누적되면서 진화 발전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1920년대 후반 풍경을 살펴보면 이런 것이 나온다. 동성애, 근친 간 성행위, 매음, 외설과 추태, 도박, 복권 등의 사행적 행위나 신사·불당·묘소 등에 대한 불경 행위, 만취해서 도로를 배회하는 행위, 미성년자의 음주·끽연, 외설 문서의 유포·판매·진열, 풍속영업 등 이 시기 풍속 통제는 일상 전반에 걸쳐 있었다. 그리고 해방 이후 1950년대 한국 사회는 취약한 주권에 관한 불안과 직결된 풍기문란이 팽배했다.

   
4월 혁명의 실패와 5·16쿠테타로 상징되는 1960년대와 70년대에는 관제문화와 이른바 '한국적인 것' 등이 버무려져 풍기문란의 각축장이 됐다고 한다. 냉전체제와 분단, 개발 독재가 공고해진 이때가 풍기문란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시점이었다고 저자는 전한다. 실제 이때부터 학생과 청년 세대 문화에 대한 단속이 강화됐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장발·미니스커트 단속 등이 떠오른다. 반대급부로 건전가요, 건전 출판물, 우수 영화 등과 같은 관제문화 보급이 급증했던 시대이기도 하다. 이후 무엇이 변했을까. 1987년 민주화 이후 풍기문란 통제와 관련한 법제와 정책에 많은 변화가 이뤄졌다. 1988년에는 경범죄처벌법 개정에서 '장발자'나 '저속 의상 착용자' 등의 규정이 삭제됐다. 그러다 1994년 개정에서는 '장발이나 저속 의상, 문신 노출로 타인에게 혐오감을 주는 경우'가 추가됐다. 그래서 저자는 '통제의 이념과 기본 시스템이 변하지 않은 채 단속이나 통제의 내용만 변화한 측면이 강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한국 사회에서 풍기문란 통제가 해방 이후 일제 강점기와 같은 방식으로 재생산되는 측면을 날카롭게 파헤친 부분은 특별히 시선이 간다. 이 책을 통해 풍기문란에 관한 연구가 정치적 주체화와 관련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한국 사회의 어두운 단면이 여전히 이어지는 현실을 또다시 발견하는 것은 무척 아프게 다가온다.

링크: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500&key=20130608.2201520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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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보.

[문화-책꽂이: http://news20.busan.com/controller/newsController.jsp?newsId=20130608000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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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와 함께 읽으면 좋은 책 구절]

1960년, 17세의 소년은 차가운 강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2년 뒤, 그 강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또 한 소년이 태어났다. 이 두 소년의 죽음과 삶을 이렇게 연결해서 생각하는 것은 조금 지나친 발상일지도 모르겠다. 이른바 역사란, 숙명론적 굴레라든가, 또는 서로 간의 일생이 알지 못한 채 어떤 인연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는 식의 비합리적인 사유가 아닌 합법칙적 관점에서 인간의 삶을 바라봄으로써 비로소 탄생하는 것이 아니던가. 그러니 서로가 옷깃 한 번 스친 적도 없이 죽고(아니, 살해당하고) 태어난 두 소년의 죽음과 삶이 연루되어 있다는 논의는 어떤 인연의 사슬이나 숙명의 굴레 같은 비합리적인 서사처럼 보일지 모른다. 물론 그런 숙명이나 인연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4월혁명 이후 냉전체제에서 풍기문란과 관련된 여러 조직과 법제ㆍ제도가 파시즘적으로 재구성되는 과정을 장정일/J의 인생과 대비해서 살펴보다 보면 장정일이 1996년 ‘음란범’이라는 이름으로 치욕스러운 운명에 놓이게 된 것은 1960년 한 소년이 살해당하던 그 시점에 이미 ‘정해져버린’ 것처럼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장정일이 ‘음란범’이 되어버린 것은, 숙명인지 모른다.

1962년부터 1996년까지 평생에 걸쳐 장정일/J는 이 숙명을 거스르기 위해 싸워왔지만, 그 숙명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렇다. 어떤 한 개인 존재에게 삶이란 결사적으로 싸워도 결국 제한된 굴레를 벗어날 수 없도록 정해져 있다. 아니, 혹자는 말한다. 세상에는 많은 선택지가 있다고. 제 할 나름이라고. 그렇다. 그런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다른 많은 이들에게 삶에는 선택지가 없다. 인생이라는 것, 태어나서 살아가며 걷는 인생길이 이미 태어날 때 정해져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한 인간 존재의 삶의 반경을 제한하고, 조정하고, 정해버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 사회의 구조이고 체계이고 이데올로기이며 통치성이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는 어떤 이들에게는 무궁무진한 인생의 무대를 제공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아주 제한된 삶의 반경만을 제공한다.

그래서 어떤 이들에게 삶은, 인생은, 그저 정해진 굴레를 맴도는 숙명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숙명은 곧 사회 구조의 다른 이름이며, 누군가의 삶을 숙명으로 환원시키는 그런 구조는 바로 폭력 그 자체이다. 즉 누군가의 인생이 숙명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도록 제한되어 있다면, 바로 그러한 인생들을 생산하는 사회야말로 가장 강력한 폭력이 작동하는 사회이다. 내가 풍기문란이라는 문제틀을 통해서 살펴보려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결사적으로 도망쳐도 도망칠 수 없는 숙명의 법칙을, 필사적으로 싸워도 제한된 삶의 반경을 넘어설 수 없는 사람들의 삶을, 그것을 숙명이나 내 탓으로 간주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던 사람들의 삶을 생각해보는 것 말이다.

(본책, 307~3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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