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회 맑스 코뮤날레 '세계자본주의의 위기와 좌파의 대안'에 다녀왔어요! (5월11일-5월12일)
김선우




  새로운 어휘를 얻는다는 것은 이전과는 다른 세계가 개창되는 일임에 틀림없다. 각자의 특정한 삶의 이력들 속에서 이름을 얻지 못한 채 지나쳐버린 것들과 다시 조우하는 '순간'일 것이며 풀리지 않았던 '내 삶의 깊숙한 곳에 있던 체중'이 뻥 뚫리는 순간일 것이다. 그렇기에 새로운 어휘는 삶의 막다른 곳에서 다시 길(삶)을 내어주는 지렛대이자 삶보다 한 발짝 먼저 가 있는 곳이다. 어쩌면 이 막바지에서 제 6회 맑스 코뮤날레가 개최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날 진보적 지식인들이 터해 있는 이 시대에서는 아직 가지 못한 곳을 향한 실험으로서 맑스주의-생태주의-페미니즘, 즉 '적-녹-보'의 힘-관계들 속에서 삼일간 '새로운 삶'의 자리를, 서로의 어휘들을 뒤섞으며 각자가 처한 위기 너머를 상상해볼 수 있는 장이 열렸다.

  새벽6시. 아프꼼의 후기들의 특징이랄만한 것이 있다면 서울에서 혹은 일본에서부터 시작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기행기 역시 무사히 서울에서부터 쓰이지 못하고 '부산에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는데, 이는 단지 필자가 부산에 살고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지역에서 올라오신 한 선생님이 장난스레 불평하시듯 하신 말처럼 서울의 10시란 부산의 6시이기 때문이다. 4시간이라는 '시간차'란 이전과 비교해 짧다면 짧아진 거리일지도 모르지만, 그 사이 일곱 여개의 지역들을 거치는 동안 무시할 수 없는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다산관. 높다란 천장 아래에 벌써부터 수많은 목소리가 들린다.


콜트콜텍 해고 노동자들,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반대운동의 목소리, 사진작가들이 만드는 달력 '빛에 빚지다'가 담은 현장의 목소리들, 최저임금 1만원 10인 서명을 기다리는 '알바연대', 갈무리, 메이데이 등 사회과학서적 출판사들, 강제퇴거금지를 외치는 방화동 카페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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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집운동과 협동조합운동


 11일 오전 10시부터 시작한 분과회의는 총 8개가 강의실에서 각각 진행되고 있었다. <민중의집운동과 협동조합운동>을 선택해 들어간 강의실에는 이미 30여명의 사람들이 자리해 있었다. 첫 번째 발표는 마포 민중의집 공동 대표이시자, 『민중의 집』(2012)의 저자 정경섭 선생님의 발표가 <민중의집 운동의 역사와 전망>이라는 주제 아래에서 민중의 집의 역사적 전개과정과 이탈리아의 역사적 사례를 통해 도출해낸 공간의 정치적 의미와 마포 민중의 집의 사업들을 소개하셨다.





  민중의 집 역사는 100년 가까이 되었고 벨기에 민중의 집(제2인터내셔널회의가 여기서 열렸다.)에서 유럽 전역으로 확장되었다. 당시 노동자들은 카페 출입이 금지되었고 공간 임대도 어려웠기에 당시 협동조합 운동 이후 매장 조합원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공간이 현실적으로 필요했다고 한다. 그래서 노동자들의 생활비를 제외한 푼돈을 모아 만든 공간이기에 초기에는 '잔돈의 집'이라 불리기도 하며 서로의 생활양식과 규율들을 만들어 갔다. 하지만 노동조합원들이 스스로 함께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것의 어려움도 있었다고 하는데, 생산현장에서는 노동자 객체였지만 대안적 세계를 만들어가는 사람으로 '특권의식'을 가지고 스스로 '규율'을 만들어가는 주체로 이동하는 것에서 부딪히는 어려움 때문이다. 하지만 민중의집은 고용에 기반 하여 단합하는 노조와 달리 다양한 조직들을 한데 묶는 복합적인 구조라는 특색이 있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자면, 오늘날 민중의집의 역할 또한 지역 내 노동조합, 협동조합, 진보전당, 시민단체 "공동의 공간전략"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발표의 후반부에서는 정경섭 선생님이 직접 운영하고 계신 마포 민중의 집이 어떻게 꾸려지고 있는지를 설명하셨다. 민중의집의 모토를 간추려 말해보자면, 한 명의 "독립생활인"을 위한 생활공동체 사업과 정치사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교육사업-생활공동체 사업-정치사업-조직"이라는 패러다임으로 정경섭 선생님은 지역 내 진보 인프라(상인, 노동조합조합원, 독립생활인, 중고령 여성노동자, 학부모)를 구축하는 것에 좀 더 힘을 쏟는다고 하셨다.


 이에 대해 이명원 선생님의 토론으로 유럽의 민중의집 운동과 한국의 민중의집 운동의 역사적, 지역적 차이와 비교했을 때 한국의 가능성에 대해서 그리고 도시 안에서 지역 공동체를 만들고 있는 마포라는 지역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 더 이루어졌다. 정경섭 선생님은 지역성이 강한 이탈리아의 사례나, 노총과 사회주의노동자당이 조직화 전략으로 민중의집을 운영하였던 스페인의 경우와 비교해 한국의 경우 노동조합이 주도성을 갖고 추진해가야 할 필요를 강조하셨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사자들의 생산현장과 생활현장이 결합되는 공간적 전략의 중요성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리고 정경섭 선생님의 사례를 돌이켜 보았을 때, '한 사람'마다의 네트워크 작업이 중요성에대해서도 언급하시며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공간 하나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니라, 이 공간에 올 수 있는 사람들을 직접 호명하고 그들이 올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하셨다. 일례로 '중고령 여성 노동자 컴퓨터 교실'이라고 현수막을 걸었을 때 이들이 지역의 무료 컴퓨터 강좌들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당신들을 직접 부른 이 공간에 오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분과회의에서 공통된 쟁점 하나로, '정치사업의 부재'라는 문제가 토론의 문제로 언급되었는데, 이명원 선생님 또한 초기에는 여러 사람들과 만나기 위해 정치적 의제는 거의 논의되지 않느냐는 질문을 던지셨다. 자기 통치와 주체화에 대해서 진보적 전략을 언급하는 데도 불구하고 정치의제는 생활 이슈에 함몰되고, 실용적인 기능에 빠지게 되는 경우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정경섭 선생님은 오히려 이에 대해 근본적으로 정치적 이슈를 만들어가는 기획들을 창출해내지 못하는 진보정당의 문제 또한 고려해야 한다는 답변으로 첫 발표가 마무리되었다.


 두 번째 발표는 시사IN의 차형석 기자님의 <세계의 협동조합>발표가 이어졌다. 본인이 2010년부터 2012년 2년 동안 이탈리아 볼로냐, 스위스, 네덜란드, 캐나다 퀘벡의 협동조합을 방문하고 취재한 기록들을 통해 아직 협동조합이 익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한국의 협동조합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시사점을 제공해주셨다. 볼로냐의 경우만 보더라도, 협동조합은 빼놓을 수 없는 그들의 역사였다. 이탈리아에서 "나는 꼽(co-op)'에 간다"라는 말이 "나는 시장에 간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정도로 생협이 일상에 깊이 천착해있음을 알 수 있었는데, 이에 대한 권명아 선생님의 토론을 통해 협동조합과 정치적 주체화의 문제와  유럽의 경우와 달리 기존의 대안운동이 척박한 한국의 상태에서 협동조합이 정치적인 대안으로 타전될 수 있을지에 관한 질문이 이어졌다. 먼저 전자의 문제에 있어서, 차형석 기자님이 취재하신 유럽의 사례들을 보았을 때 협동조합운동은 이미 그 나라의 사회운동과 정치적 주체화가 일정한 기반을 갖추어졌기에 성공할 수 있었는데, 그렇다면 역으로 협동조합을 통해서 사회운동과 정치적 주체화의 가능성의 사례가 있을지, 이 두 가지 경우의 차이는 무엇일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차형석 기자님은 협동조합운동을 통한 사회운동의 경우나 사례들을 거의 찾을 수 없었다는 답변과 더불어 퀘백의 경우 경제적 소수자들이기에 결속할 수 있었고, 언어적으로 불어권 지역이라는 강점 또한 작용했으며 볼로냐의 경우 지방정부장악의 긴 역사를 고려했을 때, 한국에 협동조합이 사회적, 경제적인 이슈가 된 지금의 상황에 대한 고려를 바탕에 두고 참조해야 할 점이 있을 것이라는 답변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이어서 다른경제 포럼의 김성훈 대표님의 <노동자결사체운동으로서의 노동조합과 협동조합운동의 만남>발표가 이어졌다. 김성훈 대표님은 기존의 '사회적경제'의 이론적 배경에대해 설명하신 뒤, 사회적경제라는 이름이 아닌 '다른 경제'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하는 의미와 결의에 대해 설명하셨다. "한국사회에서 '사회적 경제'라는 용어가 자본주의 체제의 사회적 현실태로서 시장사회와 임금노동사회에 대한 이론과 실천을 아우르는 대안모색이라는 본래적 의미를 상실하고 사회적기업이나 협동조합 등 사회적경제조직으로 국한하여 이해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초기 사회적 경제의 본래적 의의를 되찾고 "노동자결사체를 통하여 임금노동사회를 극복하여 모든 이들이 노동의 주체가 되고 능력과 필요에 따라 나누어가질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자" 지금 퇴색된 의미의 '사회적경제'가 아닌 '다른경제'의 필요를 내놓으셨다. '다른사람, 다른경제, 다른정치'의 몇 가지 선언들은 다음과 같다. 1)내 안의 자본주의 넘어, 나부터 '다른사람'이 되자. 2)'다른경제-자립', 다른 노동에서 시작하는 살림살이, 3)'다른정치-자치', 다른 경제에 토대를 둔 이중권력 형성, 여기서 말하는 '이중권력'이란,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한 조직노동자와 미조직 불안정노동자를 포함한 노동운동과 협동조합운동의 만남을 뜻한다. 김성훈 대표님은 다른 노동에 기반한 다른 정치의 주체형성 전략을 4)지역사회와 노동운동을 통해 지역풀뿌리운동에서부터 찾으려고 하셨다.





세계자본주의의 위기와 좌파의 대안
 코뮤날레의 두 번째 전체회의는 '자본주의와 가부장체제, 적-녹-보라, 새로운 주체형성'이라는 주제하에 여섯 개의 발표를 통해 이루어졌다.





 고정갑희 선생님은 '가부장체제'라는 말이 세계자본주의와 좌파의 대안이라는 전체 틀 속에서 어떤 대안이 있을지를 질문하였다. '가부장체제'라는 시대규정을 통해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를 넘어서 현 시대의 체제로 정의하고 가부장체제에서의 행동철학으로 '적녹보라 패러다임'을 제시하였다. 기존의 가부장제론이 자본주의적 생산의 일부로서 여성의 노동을 재생산의 영역으로 이해하였기에 여성들의 생산은 비가시적 영역에 놓여있었던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에 의해 자본주의적 생산과 재생산의 영역을 구분하면서 여성노동을 기반으로 하는 재생산의 영역 또한 생산적인 것으로 여기게 되었으며 재생산은 생산을 뒷받침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보았는데, 이는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를 구분하고 가부장적 생산양식과 생산관계를 따로 둔 입장에 대한 문제제기를 바탕으로 한다. 이러한 맥락에 있어 고정갑희 선생님은 생산과 재생산을 통해 자본주의적 생산-노동의 범주를 확장시킬 것을 주문하는데, 이는 현시대의 '가부장체제'라는 범주가 '성체계의 군사-제국-자본주의적'성격으로 규정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랬을 때, 대안운동으로서의 환경, 장애인, 성 소수자 운동 등등을 말하는 것. 공통되는 패러다임으로서 <적녹보라 패러다임>을 말함.
 이에 대해 문화과학 편집위원 조형근 선생님의 토론이 이어졌다. 조형근 선생님의 토론 방식은 '가부장체제'의 생산 재생산 메커니즘에 대한 설명에서 보충되었으면 하는 지점들에 대한 문제제기로 이루어졌다. 토론문을 통해 그 내용을 요약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가부장체제의 구성요소들(자본주의-군사주의-제국주의)을 자본주의와 동연적인(coextensive) 것으로 정의하는 이런 방식의 접근은, 가부장체제를 자본주의체제보다 역사적으로 더 오래되고 포괄적인 것으로 정의하는 필자의 입장과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본주의체제를 넘어서는 가부장체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이어지는 두 번째 질문으로는, 가부장체제가 가부장적 성체계를 기반으로 한다고 했을 때, 이 성체계는 다시 성관계-성노동-성장치라는 삼각구도를 갖는데, 그렇다면 가부장적 성체계와 자본-군사-제국주의적 성체계는 어떤 관계인지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다. 셋째, 가부장체제의 역사성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 아쉽다는 말로 마무리가 되었다. 정해진 시간 안에 이루어져야 했기에 토론 이후 발표자들과 토론자들 사이의 또 다른 대화가 없었던 점이 아쉬웠다.



 두 번째 전체회의 심광현 선생님의 <<적-녹-보라 연대>의 이론적 쟁점과 과제>발표는, 자본에 의한 인간과 자연의 실질적 포섭이라는 전 지구적 순환고리를 체계적으로 가시화함으로써 각 운동의 '상호 내재적 포함관계'에 주목하여 각 운동 간의 적극적인 연대가능성에 주목하고자 한다. 분리되어 있던 각 운동들 간의 연대가 가능하기 위해선 두 가지 과제가 해명되어야 할 현실적인 필요성을 언급하셨는데, 하나는 상이한 각 운동들의 위치가 어떻게 '자본에 의한 인간과 자연의 실질적 포섭'의 거대한 순환회로로 함께 엮어져 있는지를 이론적으로 규명하는 일과 더불어, 이들이 '내재적인 포함 관계'를 가지고 있는 측면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적과 녹의 문제설정의 공통된 영역으로 경제(economy)와 생태(학)(ecology)의 동일한 어원으로 그리스어 'oikos'에서 파생되었다는 점을 주목하면서 자연생태-상품경제-가정의 살림살이-정치경제(자본과 국가의 융합)가 서로 무관한 별개의 차원이 아님을 언급한다. 또한 여성종속의 두 가지 형태인 사적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적 상품경제와 정체경제에 종속되는 공적 가부장제를 구분하는 실비아 월비(Sylvia Walby)의 지적을 통해 여성들의 이중적 구속을 통해 적과 보라의 문제설정 간의 관계를 파악한다. 그렇기에 심광현 선생님은 '적-녹-보라'의 연대의 이론적 체계를 개념지도로 시각화하고자 적-녹, 녹-보라, 적-보라의 하위연대를 살펴보고 이들이 공통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문제의식을 나누어 살펴본 뒤, 각 운동진영의 이론적, 실천적인 조우를 위한 기획을 고찰한다.
 권정임 선생님의 뒤따른 논평은, '적-녹-보 연대'를 기획하는 데 있어 보라 내부의 차이에 대한 지적과 더불어 공동의 혁명주체로 연대하기 위한 거시적인 쟁점으로써 '무조건적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을 환기할 것을 제안한다. 심광현 선생님은 '녹-보라 연대'를 주로 에코페미니즘의 성과에 대한 비판적 고찰에 근거하여 모색하고 있는 반면, '적-보라 연대'의 관점에서는 실비아 윌비와 고정갑희의 이론을 필두로 하는 페미니즘을 근거로 두고 언급하였다. 그렇기에 '적-녹-보 연대'의 기획에서 서로 다른 페미니즘 간의 공통점이 추출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박영균 선생님은 자본주의체제의 내적한계를 분석하며 이에 저항하는 주체로서 '적-녹-보라의 연대적 주체'를 설정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작동하기 위한 원리로 노동력, 종족을 생산하는 생식, 에너지를 얻는 자연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자본주의에서는 노동/노동력, 성-사랑/생식, 자연/에너지저장소를 분리시키고 노동력과 생식, 에너지만을 자본주의 내부로 포획하면서 '노동', '성-사랑', '자연'을 배제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박영균 선생님은 자본주의의 내적 완결성이 사실상 그 외부에 의존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렇기에 이러한 자본에 의해 배제된 자들끼리의 '적-녹-보라'의 연대적 가치를 중심으로 '자본 없이 살기'라는 생산-소비의 자치적 공동체인 '코뮌'을 이 사회 곳곳에서 구성해 가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엄남이 선생님은 박영균 선생님의 이러한 '자본 없이 살기'라는 새로운 사회적 전망이 어떻게 가능한가? 라는 질문으로 토론을 시작하였다. 박영균 선생님은 인간의 자연존재로서 자기규정성을 '자연', '노동', '생식'으로 범주화하는 데 있어 생존이라는 문제를 해결하는 자기 삶의 생산을 '노동'으로 범주화하고 다른 생명을 생산(종의 생산)하는 '활동을 단지 생식'으로 범주화하는 것에 대해 지적하였다. 생식이 매우 젠더화 된 활동으로 여성과 남성이 그 활동들(생리, 배란, 성교, 착상, 임신, 출산, 수유의 일련의 연속적 활동)에 개입하는 방식과 수행하는 노동 그리고 결과물의 전유에 있어서의 권력관계를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즉 '생식'에 관한 맹목에 따라 임신, 출산, 양육, 가사노동이라는 부불노동을 자연의 영역으로 치부함으로써 성적 노동을 수행하는 주체들이 비가시화되는 위험이 있다는 지적 또한 그러하다. '노동'에 대한 박영균 선생님의 설명이 이성애적 성인남성노동자의 시점에 국한되어있다는 것, '생산적 노동'이 은폐한 '비생산적 노동'의 수행자들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 이어졌다. 그리고 박영균 선생님이 자본주의 내/외부의 관계의 모순설정을 오히려 1)남성/여성=자연, 2)남성-노동(여성, 동물, 남반구 생계농)-자연, 3)서구, 북반구 임금노동자/불안정, 미등록 노동자, 노예노동, 남반구 생계노동(엄남이 선생님은 '/'를 지배와 위계 관계로 설정해 설명한다)로 바꿔 보았다면 어떨까라는 의제를 남겨두고 두 번째 토론이 정리되었다.





(자세히 보시면, 앞의 사진과 다른 사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성주의와 생태주의, 그리고 녹색사회주의-불편한 동거 또는 새로운 패러다임?> 서영표 선생님의 발표는 '녹색사회주의'라는 새로운 틀 안에서 마르크스주의-여성주의-생태주의 사이의 연대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이러한 비판패러다임의 준거로서 서영표 선생님은 데이비드 하비의 (욕구(want)나 욕망(desire)과 구별되는) '필요(need)'라는 개념을 통해 연대를 구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재고하고 있다. 필요개념은 보편적 계급으로서의 노동자계급이라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준거점이 초래할 수 있는 독단론 또는 객관적 이익 개념이 동반할 수 있는 권위주위를 막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를 기획하는 데서 사회주의, 여성주의, 평화주의, 생태주의의 이론적 자원까지 동원할 수 있게 한다는 것, 그리고 자유주의적으로 구성된 권리담론을 극단까지 몰고 감으로써 재해석할 수 있는 (담론적) 헤게모니 투쟁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황주영 선생님의 토론 또한 서영표 선생님이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필요'개념에 대한 고찰을 검토하는 것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여성의 젠더화 된 노동이 생물학적 생존을 위한 기본적 필요와 인간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주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필요개념은 가부장제를 충분히 비판적으로 겨냥하고 있는지를 질문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황주영 선생님은 <<에코페미니즘>>에서 제시하고 있는 '기본적 인간 욕구' 개념을 서영표 선생님의 '필요'개념과 비교하여 보완할 방법들을 제시하였다.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글로컬페미니즘학교'에서 활동하고 계신 이은숙 선생님의 <적녹보라 패러다임과 새로운 주체 형성-노동/생산 개념 확장/재구성과 운동주체> 발표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이 성인남성의 노동으로 대표화 되고 상품 생산 노동, 산업 노동을 중심으로 그 외의 노동을 배제한 점에 대해 비판하며 적녹보라 패러다임에서 노동과 생산이 어떻게 재고될 수 있을지를 설명한다. 이에 대한 토론으로 서동진 선생님은 우선 사회적 의제와 정치적 의제를 먼저 구분하고 토론을 전개하였다. 어떤 종류의 사회적 체계를 만들어내며, 어떻게 정치적 주체로 발현되느냐의 문제가 적녹보라 패러다임을 고려할 때에도 서동진 선생님의 중요한 축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기에 스무 몇 가지의 단상들로 이루어진 서동진 선생님의 토론문은 '적녹보라의 주체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주변을 맴돌며 적, 녹, 보라가 생성되었던 특정한 시기와는 다른 지금, 여기. 적-녹-보라의 연대가 구상된 지금의 한국사회의 단면들을 조각조각 모으고 있다.



 <음란과 혁명: 색을 얻지 못한 자들과 색스러운 자들>이라는 제목으로 권명아 선생님의 마지막 15분가량의 발표가 이어졌다. 한국 사회의 주체 구성의 역사를 '풍기문란'이라는 역사적 범주로 규명해온 선생님의 연구궤적을 우회하여 적녹보 연대와 새로운 주체 형성이라는 문제에 관한 몇 가지 단초들을 제기하는 것으로 발표를 준비하셨다. 일제시기에 만들어진 문화통제의 두 축으로 사상통제와 풍기문란 통제가 이루어졌다. 사상통제가 일제시기 주로 사회주의와 저항적 민족주의에 대한 통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면, 풍속통제는 일상생활 전반에 대한 통제로 이어졌다. 일본의 경우 이 법은 패전 후 전형적인 파시즘 악법으로 간주되어 미군정하에서 폐지되었으며, 성산업에 대한 통제에만 제한적으로 적용되고 있다고 하였다.(그래서 일본에서는 풍속(후조쿠)라는 말이 핑크산업을 지칭하는 말로 이해된다고 한다. 그러니 일본의 경우 냉전기 이래 문화통제가 레즈(사회주의)와 핑크(성산업)라는 두 개의 색으로 분할된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풍속통제는 일제시기 만들어진 통제 시스템을 그대로 이어받아 더욱 도덕화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 통제 시스템이 구성되던 일제시기에는 법적 경계에서 레즈와 레즈가 아닌 것 사이의 구별이 유동적이었고, 이 둘을 분리하는 것이 사상통제와 풍속통제의 구별선에서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지만 그 반대편, 레즈의 편에서도 레즈와 레즈가 아닌 것의 구별이 레즈와 풍속 사이의 구별의 문제로 대두되었다. 권명아 선생님은 이 지점에서 한국사회에서 색과 정치의 관계는 무엇이었는지, 레즈는 어떻게 레즈가 되었는지, 나아가 이른바 '적-녹-보 연대'라는 색의 연합은 가능한가? 라는 질문을 제기하였다. 한국에서의 레즈는 풍속과의 거리두기 또는 차별화를 통해 순정한 레즈의 색을 얻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레즈의 순정함이 보장되는 건 풍속의 함의가 제거됨으로써만 가능한 것인데, 반대로 풍기문란자들은 어떤 색을 얻었을까? (이들의 색은 우리가 음란물이라고 생각하는 핑크와도 다른데) 레즈는 스스로를 레즈로 표상하기 위해서는 다른 자들의 색을 박탈해야지만 얻을 수 있지만, 풍기문란자들은 이들로부터 색을 박탈당하거나, 색을 얻지 못했거나, 기존의 색으로 표상되지 않는 집단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두고 일제시기 레닌의 '두개의 혼'에 관한 테제를 논거로 삼아 일련의 논쟁이 진행되기도 했었고, 이에 대한 논쟁의 단서가 되었던 이기영의 '서화'(1933)를 통해 권명아 선생님은 풍기문란 통제의 이념이 작동하는 방식을 "바람을 법으로 잡으려는 시도"에 다름없는 것이라고 분석하였다. 이러한 권명아 선생님의 논의가 이번 전체회의에서 흥미로웠던 점은, '적-녹-보'라는 새로운 주체형성의 측면에서 어떤 주체를 어떻게 구성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면, 권명아 선생님은 앞선 "한국에서 레즈는 어떻게 레즈가 되었나?"라는 질문을 통해서도 볼 수 있듯이 주체를 구성하는 자의 위치가 아닌, 구성되는 과정을 역으로 좇아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상 오래도록 프롤레타리아 전위의 관점에서 사회주의자들은 인도하고 조망하는 '위치'를 아직까지 벗어나지 못하였다면, 바로 이 지점에서 '색을 가지지 못한 자들', '풍기문란한 자들'의 '색'은 아래 이미지에서 볼 수 있듯이 지속적인 색을 갖지 못하고 어떤 역사적 순간에 크랙을 일으킨 자들일 뿐이다.





 위 사진은 권명아 선생님이 한국의 근현대사 100년, 190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의 역사적 작업을 해오면서 얻은 역사적인 이미지이다. 이는 선생님의 풍기문란 연구를 읽는 데 있어 참조할 수 있는 또 다른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한 듯하였다. 한국에서 풍기문란 연구가 전무하고 풍기문란 연구를 음란물에 대한 연구로 제한적으로 생각하지만, 풍기문란 연구는 '어떻게 정치적 주체가 출현하는가?'를 뒤좇아가는 작업이다. 이는 단지 역사적 사후적 검토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정념의 정치적 이행에 대한 역사적 전망을 구성하는 작업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역사적 전망이라는 것은 혁명적 낙관론이나 비관론이랑도 구별되는 '이행'에 대한 역사적 전망을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선생님은 100년의 역사를 추적하면서 정치적 주체화, 정념의 정치적 이행이 당대에는 결실을 보이지 않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현실화가 되며 이론의 차원이 아니라 역사적인 추적의 결과로서 항상 이곳에 이미 당도해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그런 점에서 역사적 전망에 입각한 관점은 당대의 국면에 대한 정치적 판단과는 달리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실은 정세판단의 시급성에 비춰보자면 이러한 관점은 너무 뒤쳐진 논의로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역사적 전망이라는 것은 정세판단이나, 현실주의 양면의 환멸 사이에서 거리를 취하면서도 정치적  주체화에 대한 역사적 믿음을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하셨다.
 이어서 권명아 선생님은 2012년 전국 농성촌(캠프)지도 이미지를 통해서 게토와 로컬 라인에서 발생하는 고립과 외로움의 정념이 단지 수동적인 정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함께-있음의 변용 가능성을 담지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고 말하였다. 캠프에서 외따로, 홀로 밝혀진 불들을 외롭게 놓아두지 않고 '게토를 아지트로, 부적절한 정념을 정치적인 것으로, 비언어적인 것을 시적인 것으로', 모든 단수적인 존재들과 만날 때 발생하는 아지트, 그 정치의 자리(constellation)는 이미 시작되었다고 보아도 좋겠다.
 신병현 선생님의 마지막(급박한) 토론은 5페이지 가량되는 토론문을 요약하시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신병헌 선생님의 토론의 전문은 여덟 가지를 통해 논의 지형을 만들었는데, 아래 첨부된 사진을 통해 자세히 볼 수 있다. 신병현 선생님의 언급 중 인상적이었던 것은 권명아 선생님의 발표를 단지 내용적 측면에 국한하여 읽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글쓰기의 시도'로 거듭 읽으셨던 점이다. 게다가 한 명의 독자로서 "옛 원한에 더 얽혀 들어간다"는 말과 "80년대 <광장>과 <태백산맥>을 읽고 만났던 효과를 기대"한다는 말은 어떤 토론자에게서도 듣지 못했던 언급이시라서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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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튀세르와 마르크스

 드디어 마지막 날인 5월11일. 나는 올라가기 이틀 전, '또문 다락방'을 미리 예약해둔 터라 유이 선생님의 안내를 받아 편안히 하루를 보낸 뒤, 내일 오전 10시 발표를 보기 위해 다락방을 나섰다. <알튀세르와 마르크스>에서는 최원, 박주원 선생님의 발표가 있었다. 전체회의와 달리 토론자가 따로 정해져있지 않았다.



 최원 선생님은 알튀세르의 입장에서 슬로베니아 학파의 논쟁에 어떻게 개입할 수 있는가라는 관점에서 알튀세르와 라캉 사이의 쟁점을 재구성하였다. 슬로베니아 학파는 알튀세르가 말하는 이데올로기적 호명이 작동할 수 있는 사전적인 조건으로서 이데올로기적 주체에 앞서는 진정한 주체, 주체 이전의 주체를 상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알튀세르는 이러한 비판에 대해 'D박사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에서 주체 이전의 주체란 이데올로기적 호명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최원 선생님은 이데올로기적인 것 또는 상징적인 것에 의해 배제되는 '실재'를 무엇으로 볼 것인가라는 점과 알튀세르에게서 이데올로기적 반역이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지 또한 살펴보았다.
 박주원 선생님은 문화가 화두가 된 현 시점에서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는 '문화'를 어떤 의미와 방향으로 제기해야 하는지 성찰하는 과정에서, 마르크스의 '욕망'개념을 검토하고 재해석함으로써 문화정치의 방향을 모색해보는 발표가 이어졌다. '욕망'의 문제는 단지 주관적이 역능이 아닌 노동과 시대적 필연성, 보편성과 연결시킬 수 있는 지점이라고 하였는데, 마르크스 사상에서 감각 및 욕구는 한 사회의 변화와 이행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인 힘이기에 그 중요성이 부각되는 것이다. 아담 스미스, 벤담, 리카르도, 슈티르너 등의 욕구 개념이 특정한 욕구의 내용을 마치 인간에게 자연스럽고 절대적인 것으로 정당화시키는 비역사적인 것일 뿐 아니라 인간을 다만 고정된 욕구의 단순한 담지자로 대상화(소외)시키고 있다는 마르크스의 비판은 곧 자본주의가 배태한 욕구와 필요와 가치를 전복할 수 있는 역량을 새로운 필요와 욕구를 산출하는 것의 문제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박주원 선생님은 마르크스의 욕구 개념 안에 표현되어 있는 '감성적 행위자'로서의 인간상과 '자기 가치를 산출하는 행위'로서의 노동행위, 새로운 인간들 간의 연합과 교류를 창출하는 것으로서의 '정치'를 마르크스주의적 '문화정치'의 방향으로 제안하였다.





후기 자본주의와 로맨스





 12시 30분부터 3시까지 <후기 자본주의와 로맨스>라는 주제아래 이현재, 박이은실, 사미숙 선생님의 발표가 이어졌다. 아침부터 분과 회의는 스무 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항상 찾아왔지만, '여이연'의 분과 회의는 세 번째 발표가 끝날 때까지 서너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좁은 강의실에 들어왔다. 나중에는 자리가 없어 옆 강의실 책상을 함께 나르면서 사람들은 발표자들 바로 앞까지 자리를 채울 정도였다. 어느 분과 회의보다 자유롭고 참석자들 모두가 함께 세미나를 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모두가 성실히 듣고 쓰고 말하는 시간이었다. 분과 회의의 키워드는 '낭만적 사랑'과 경제 체제가 시작되는 지점으로서의 '로맨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독해라고 볼 수 있을 터인데 여기서 쟁점이 된 것은 사랑을 해방의 정치를 위한 저항으로 볼 수 있는지, 혹은 또 다른 억압의 이면인 것인지를 둘러싼 줄타기를 벌였다고 보아도 좋겠다.






 이현재 선생님은 사랑을 나누는 방식에서도 '계급적 차이'가 드러난다는 점에 주목하여, 근대 이후 사랑의 전형인 로맨스의 규칙들을 통해 근대성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근대의 자유로운 개인의 출현과 더불어 탄생한 낭만적 사랑에 대해 언급하며, 이러한 사랑의 기대가 근대 자본주의 사회와 더불어 발전한 낭만적 사랑 즉 로맨스의 이념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을 대중문화 등의 사례를 들어 설명하였다. 로맨스는 나와 파트너의 유일무이성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우리의 통일된 삶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이 이야기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후기자본주의 시대에는 소비주의와 경쟁의 극대화, 성적 쾌락의 추구가 근대적 로맨스가 발판으로 삼았던 공사의 이분법을 해체시키는 경향을 보인다고 하였다. 소비를 필요로 하는 데이트는 사적인 사랑을 공적인 영역으로 나아가게 만들고, 경쟁의 극대화는 탁월한 기능을 가진 사람을 인격적 파트너로 선택할 것을 종용하며, 성적 쾌락을 추구하는 태도는 사랑을 인격적 관계와 쾌락 충족의 사이 어디쯤에 위치시킨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로맨스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로맨스를 '줄타기와 협상의 문제'로 만든다. 가령 포스트모던적 로맨스 주체는 현실적으로 성을 사고팔지언정 규범적으로는 성의 상품화를 비난한다는 것이다. 순수한 사랑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는 하지만 이 사실을 적당히 배후에 숨겨두고 따라서 이들은 항상 이 혼종성 속에서 저글링과 줄타기를 한다. 그렇기에 이현재 선생님은 포스트모던 로맨스 주체는 오히려 여성을 순수성의 감옥에서 탈출시키는 효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닌지, 이제 진보는 순수한 사랑의 이념을 재고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박이은실 선생님은 앞선 이현재 선생님이 후기자본주의 시대의 로맨스주체들의 소비주의에 대한 경향에 주목하여 라이프스타일의 변화와 사랑을 나누는 방식의 소비자본주의적 변화를 고찰하였다. 중산층 소비문화에 기반한 낭만적 사랑의 문화가 부의 양극화, 불안정한 임금노동의 확산, 소비의 계급화, 소비주의 등과 연동하면서 사랑의 계급화가 초래되고 있다는 것을 여러 가지 자료를 통해 분석하고 있다. 사랑의 계급화가 선구매 후지불의 형태로 이뤄지는 신용문화와 연동하면서 사랑이 소비를 부추기고 소비가 빚을 부추기며 빚을 통해 자본의 재축적이 이뤄지는 양상을 '로맨스 자본주의'라는 용어를 통해 설명하였다. 그리고 발표의 마지막 대목에서 박이은실 선생님은 "로맨스 자본주의, 탈출구는 있을까?"에 대해 언급하실 때, 2013년 12월 24일 서울 여의도에서 일어난 '솔로 대첩'사건을 사례로 어떤 의문의 여지들을 남겨놓았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구경꾼들을 포함한 인파가 3,50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에도 보도되었듯, 이 '공개짝짓기'의 다음날은 '빈농 해방을 위한 좌파솔로들의 씁쓸한 크리스마스 파티'가 20여명의 참석자들로 조촐하게 열렸다고 한다. 여기서 한 참석자는 "외로움과 쓸쓸함을 연애가 아니라 사회적 연대로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고하는데, 박이은실 선생님은 이러한 견해에 대해 회의적이라는 입장을 견지하였다.(이 대목에서 모두가 씁쓸한 웃음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맨스의 문법들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는 방법이나 공간, 내 시간을 온전히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시간주권의 회복은 어떻게 가능할지에 대한 질문을 따로 또 함께의 몫으로 남겨두었다.


 사미숙 선생님은 낭만적 사랑과 결혼의 결합을 '로맨스 유토피아'로 정의하여 로맨틱한 사랑이 결혼의 전제조건이 된 이유를 탐문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는 여성 억압의 문제를 '성 상품화 담론'을 통해 논증하며, 여성 스스로가 사랑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을 회복할 것을 요구하였다. 가부장제에서 여성이 선택한 하나의 생활양식으로써의 '로맨스'를 '열정적 사랑'과 대비시키며 로맨스에 대한 정의를 조금 더 날카롭게 설명하였는데, 열정적 사랑이 그 순간의 시공간에 집중하여 "당신과 함께 죽어도 좋아!"라면, 로맨스는 삶을 지속하기 위해 열정을 순화하는 방식이자 열정적 사랑의 죽음에 대한 갈망과 달리 "당신과 함께 오래오래 행복하게"살겠다는 것이다. 앞서도 로맨스가 우리의 이야기를 지속하기라고 표현했지만, 왜 낭만적 사랑이 '여성독자'의 몫이 되었을까? 여기서 가부장적 자본주의 체제에 대산 분석이 필요할 것이다. 전통사회에서 현대사회로의 이행에 있어 계층적 분화보다 기능적 분화가 우위로 진행되면서 여성의 경제적 독립과 사회 활동의 연장으로써 결혼이 제시되었으며, 사미숙 선생님은 일부일처제 결혼을 재생산과 사유재산을 운영하기 위한 효율적인 '성장치'이자 경제공동체라는 측면에 주목하고 있다. 즉 결혼 상대자를 구하는 일은 생존 사업을 이어가기 위한 경제, 법률, 정치에서의 공적인 합리화 과정일 것인데, 그런 점에서 낭만적 사랑은 이미 노동윤리의 언어와 직결되어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여성의 '성 상품화 담론'의 다양한 인식들 중에서, 성 상품화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여성의 성적 '문란함'과 '가정 해체'를 걱정하거나, 내 애인 혹은 남편/부인이 성서비스 구매자가 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의견 또한 들려온다고 한다. 이러한 담론 또한 성과 사랑을 일치시켜 일상으로 포섭하고자 하는 로맨스 유토피아적인 발상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비판적인 대목들을 읽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성 노동자의 권리는 어떻게 존중할 수 있는 것일까? 사미숙 선생님은 로맨스 유토피아가 독점의 대상으로 삼는 섹슈얼리티를 자본으로 삼아 성적 서비스를 상품화한다는 측면에서, 중산층도, 노동계층도 아닌 사회적으로 '비체'이며 성적 하위계층에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는 정작 듣지 않으며 자신들도 자본주의적 삶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데도 성노동자에게만 멍에를 씌운다고 지적하며 아직 우리 모두의 과제를 제시하였다.



10분 동안의 휴식 시간 이후, 플로어 질문을 통한 토론이 이어졌다. 주어진 3시를 꽉꽉 채우고도 모자라 15분 정도를 더 할애하여 토론을 끝마쳤다. 아, 이 시간이야말로 토론이란  왜 필요한가를 보여주었던 자리가 아니었던가 생각해본다.










NGA의 '섹슈얼리티 공방'에서 오신 이재현님의 질문이 있었다. 좌파학자들의 대안 제시를 공감하는 반면 문제제기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기든스의 '순수한 관계'는 기존의 사회적 관계로부터 거리를 두고 독립된 개인으로서 합리적 사랑을 할 수 있는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다. 이런 논의들이 낭만적 사랑과 다른 방식으로 대안을 제시한 에바 일루즈의 <감정자본주의>에서도 성찰적 주체에 대한 비판. 성찰적 주체가 자기 개발적 주체처럼 대상을 선택. 이런 방식의 낭만적 로맨스는 개인의 관계를 피폐하게 만드는 것. 나와 너를 대상화하는 것. 좌파학자들이 낭만적 사랑을 어떤 식으로 재복원했는지를 질문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순수한 관계'라는 표현에 있어서 선생님이 말하는 순수성이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사회적인 도덕주의에 거리를 두고 결혼과 가장 거리를 두면서 내가 생각하는 순수함은 개인, 젠더와 상관없이 자기 윤리적인 실천으로서 순수한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발표자의 답변은, 어떤 사랑을 대안으로 제시할 것인가? 낭만적 사랑의 핵심은 '자아실현'의 성취이다. 같이 삶을 만들어 나간다는 것이 포기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게다가 낭만적 사랑이 돈과 자본의 매개가 될 때, 나는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서 그들을 비하시키는, (남성에 의해서 여성이 억압되는 게 아니라)여성이 스스로를 차별화시키는 방식이 된다. 로맨스와 성노동이 본질적으로 연결된다고 본다. 특히 성노동과 관련하여 '합리적 사랑'에서 또한 자기실현의 낭만적 사랑의 도식을, 이분화된 공식을 벗어날 수 없지 않겠나. 그리고 소비의 문제에 있어서, 박이은실의 '로맨스 자본주의'라는 말을 통해서 자본주의가 성정치경제학 적녹보의 모순을 얘기해주는 것. 이 순수성의 논리 안에 소비뿐만 아니라, 권력 또한 마찬가지로 매몰된다는 것 이다. 그랬을 때, 어떤 대안을 말 할 수 있는지. 각자에게 맡기는 것. 어떤 윤리적 강령과 규범을 제시하는 것이 낡은 방식이다. 어떤 특정한 사랑관에 근거해서 다른 사람을 도덕적 법적으로 매도하지 말자는 것.

2)부산대 법대에서 오신 오정진님의 질문, 박이은실 선생님과 사미숙 선생님의 발표를 연계하여 포스트모던 주체에 대해서 질문해보려고 한다. 이현재 선생이 말씀 해체가 경계를 넘나드는 것 양립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라 생각. 하지만 혼종성에 방점을 두었을 때, 사랑이 다른 것을 흡수 통합하는 경향에 대한 질문을 하였다.

3)경상대 정치경제학 오병헌님 또한 흥미로운 질문을 하셨다. 솔로부대를 하면서 군사주의로 나갈 때 비판. 연애경쟁이라는 것 자체. 조직에 있을 때, 운동을 하려면 연애를 해야 된다. 연애를 하지 않으면 어떻게 사람의 정서를 알겠냐는 말을 많이 들었다. 게다가 사람들은 연애를 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공포감을 느끼는 것 같다.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고립감을 해소하기 위한 연대를 꾀할 때, 개인들의 다양한 지향들이 얘기하셨듯이 어떠한 물적 조건 아래 각자의 침해가 이뤄지지 않을 수 있는지 고민해보고 싶다. 현실에서 어떠한 연애의 풍습이 나머지 연애 풍습을 주도하는 형태로 간다는 것.

4)세 분의 글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로맨스 자본주의 유토피아가 일정한 주체양식에 대한 이야기라면, 기존에 해왔던 여성주의 내에서 비판들. 왜 유독 여성들이 로맨스 낭만적 사랑에 대한 주체로 얘기되는지 벗어나지 못한 측면들. 여성에게 사랑과 결혼이 삶과 결혼을 그 대상이 되는 관계는 읽혀지지 않는 측면이 있기에 어떻게 해소될까?


 
 생각지도 못한 서울 친구들을 만나기도 하고 코뮤날레를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 모두 점심 시간까지 아껴가며 발표를 듣고 질문을 하고, 일찍 도착하여 끝까지 가지않고 열심을 부리는 이박삼일간의 기이한 열정에 덩달아 피곤함도 모른채 여기저기를 쏘다닐 수 있었다. 조금 더 나은 삶을 위한 열정 속에서 치뤄졌던 맑스 코뮤날레의 일박이일간의 에너지를 후기를 마무리하는 지금까지 쭉 이어받았기에 다시 일박이일을 되살필 수 있었다. 그때 내가 보았던 다른 삶을 위한 열정들이 다른 누군가에게 다시 또 무사히 전달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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