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박한 응답_5월25일, 밀양 평밭마을을 다녀오다.

김선우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는 봉쇄되었다. 곧장 진입하지 못하게 양옆 나무를 기둥삼아 매어진 밧줄은 마을의 날선 긴장을 보여주었지만 언제든지 쉽게 끊어질 것 같다. 한국전쟁이 발발했는지도 모를 정도로 고요했다던 그 때와 달리, 마을 밖의 사람들은 마을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밀양으로 나섰던 날, 각지에서 몰려 온 '탈핵 희망버스' 참가자들로 인해 오늘 공사는 중단되었다. 위태로운 밧줄을 경계삼아 대치해야 할 상황에 잠시 짬이 생겼고 오늘 저녁은 누군가의 후원으로 오랜 투쟁기간 동안 마을 주민들의 지친 몸을 달래는 저녁식사 자리가 마련된다고 한다. 이 곳에서 '나'의 논밭이 말라가는 시간 동안 매일매일 언제 또 다시 들이닥치지 모를 적과 언제 찾아올지 기약이 없는 동료들 모두를 함께 기다리는 주민들에게 전할 인사의 말은 입구에 쳐진 밧줄만큼이나 무능한 것이었고 묵묵히 함께 기다리는 것 밖에 도울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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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전탑 127번 철탑 공사장으로 가는 길, 밀양역 버스정류장에서 1시간마다 오는 4번 버스 (16시와 18시 버스만 마을 앞까지 간다.)를 타고 평밭마을로 가는 가장 가까운 정류소에서 내렸다. 주말이라 여러 지역에서 마을로 찾아온 단체들이 많았다. 평밭마을로 간다는 말에 마을 밖으로 나오던 분의 차를 얻어 타고 마을 입구까지 들어섰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 주민들과 인사를 나누고, 미리 온 또 다른 동료들에게도 어떻게 무얼 도울 수 있는지, 어떤 게 이 곳과 사람들을 돕는 것인지를 묻는다. 마을 입구는 밧줄과 주민들, 주민들의 농기구를 차례대로 막아놓아 안으로 들어가거나 안에서 밖으로 나올 길이 모두 막혀있다. 미리 마을 안으로 들여놓은 주민들의 차는 마을 안에서 이동할 때만 사용할 수 있도록 되어있었다. 어제, 오늘 미리 온 외부사람들은 모두 마을 안으로 들어가 있다고 한다. 마을 입구에서 127번 구역까지는 도보로 30분 이상이 걸리고, 어떤 연고나 준비 없이 찾아든 터라 아직 고요한 마을 입구에 잠시 앉아있다 마을 안으로 올라가는 주민의 트럭을 또 덥썩 타고 127번으로 올라 들어간다.  


 127구역에도 마을 입구처럼 임시 움막이 지어져있었다. 움막 안에는 생활할 수 있는 물건들이 모두 마련되어있었고 공사현장 바로 옆에서 공사를 막기 위해 하루 종일 이 곳에서 생활하는 주민들의 현장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움막은 누군가가 살고 있는 집이기도 했다. 흙 땅에 방바닥을 깔아 바닥이 울퉁불퉁한 움막이지만 전기 포트기부터 티비, 이불과 옷장, 싱크대까지 마련되어있는 움막은 실상 오랜 시간 동안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걸 하나의 '장소'로서 말해주는 듯했다.
 127구역까지 올라왔지만 당장에 해야 할 일이 없었던 터라 미리 온 이들과 인사를 나눈 뒤 함께 온 선배들과 마을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던 차에 저 안쪽 마을에서 나오고 있던 사람들에게도 다급한 인사를 건넸다. '나눔연대'에서 오셨다는 분들은 저녁 식사를 준비하러 127구역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고 하여, 뭔가 도울 일이 있겠다는 반가운 생각에 다시 127번 움막으로 들어섰다. 마을 입구 쪽으로 나가는 차를 타고 가시던 아주머님께서 배추같은 상추 한 보따리와 쌈장을 급히 챙겨주시고 떠나셨다.










(오른쪽 사진, 127번 움막 주변에는 "박근혜 대통령님께 보내는 글"뿐만 아니라, "핵 폭탄 보다 더 무서운 할머니들"로부터의 경고장, 주민들에게 보내는 응원의 힘 등 다양한 메시지가 담긴 플랜카드가 걸려져있다. 왼쪽 사진은 현재 잠시 중단된 127번 송전탑 공사현장, 이미 무너져 언덕이 된 자리에 밧줄이쳐져있다.)











(왼쪽 사진은 127번 구역에서 길을 따라 '평밭마을' 안으로 들어갔을 때, 공사중이라는 팻말과 그 너머로 보이는 가구들이다. 오른쪽 사진, 127번 구역 바로 옆에 있던 앞 창이 모두 깨진 차 곳곳에 "765000볼트 초고압 충전 백지화 하라!", "밀양사망"이라는 스티커가 붙여져 있었다.)




도울 수 있는 것은 "하루라도 자고 가는 것", 마을 주민들만 있는 동안은 한전 직원들, 경찰, 용역들 모두가 쉽게 제압하지만 외부인들과 기자들이 모여드니 상황이 달라졌다고 한다. 모두들 하루 이틀씩 지내고 떠나는 날, 아무런 계획 없이 당도했던 밀양에서 계속 머뭇거리기만 하다가 결국 내려가는 주민들의 차를 타고 내려갔다. 평밭마을의 70대 노부부와 아들이 함께 마을 밖으로 내려가고 있었는데, 부산으로 돌아간다는 우리의 말에 할머님께서 아들이 부산으로 가는 길이니 부산까지 같이 타고가라는 말씀을 하셨다. 밀양을 왔다가는 길 내내, 내 몸을 움직이고 행동할 수 있는 조건이란 실상 내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들의 애씀이 수반되는 것이었다.

 부산으로 가는 한 시간 동안 우릴 태워주신 분은 고향과 부모님들, 마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 소상히 알려주시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갑작스런 투쟁이 아니라 8년 동안 고요하게 일어났던 일이었다는 것, 작년 마을 할아버지의 분신 사건, 억울함, 법과 기업과 경찰, 용역들이 어떻게 마을 곳곳에 침투할 수 있는지. 준비 없이 갔던 길에서 이 이야기들은 돌아가는 나를 점점 수그러뜨렸다. 마을로 들어가는 두 개의 입구는 모두 봉쇄당하여(마을 사람들이 스스로 마을을 봉쇄한 것이지만, 나는 부로 '봉쇄당함'이라고 표현했다. 땅으로 진입하지 못한 한전은 헬리콥터로 장비를 운반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이처럼 이들이 이 곳에서 투쟁할 수 있는 방법은 마을로 들어오는 것들을 모두 막아야지만 가능한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옴짝달싹 하지 못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마을사람들의 '삶의 반경'은 제한되었지만, 몇몇씩, 조금씩, 번갈아가며 함께 머물면서 이 제한된 반경을 다시 '연대의 반경'으로 넓혀가는 것은 아직 가능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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