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의 ''을 전하다>

                                                     불투명한 나의 목소리로부터

 

양순주 (aff-com)

 

 

 

 

 

 

1.

2012811. 단 하루의 워크숍에는 수많은 이들의 부단한 노력의 시간들이 겹쳐져 있다. 그 속에는 아프꼼(aff-com)이 워크숍이라는 공론장을 만들어내기 위해 아등바등했던 준비의 시간들도 녹아 있다. 길게는 몇 년, 몇 달까지도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겠지만 스퍼트를 올렸던 한 달 가까운 시간들을 떠올린다면 이 시간들을 어떻게 형용할 수 있을까. 그것의 어떤 모습은 불안과 긴장으로 점철될 수 있으리라.

 

그러나 불안과 긴장은 감지(感知)될 수는 있어도 쉽사리 노출되지는 않았다. 눈앞에 형상화되지는 않았기에 그 광경은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이지만, 이를 느낀다면 금방 알 수 있는 모습이기도 했다. 또한 가끔은 돌발 상황이 벌어져 불안과 긴장이라는 실체가 드러나기도 했지만 그것마저도 금세 다른 모습으로 변해버렸다. 불안과 긴장은 다른 여러 감정들을 잉태했던 것이다.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듯이 해결해 버리거나 이내 괜찮다고 안도하거나, 잘 될 것이라고 낙관하면서 서로를 위로했다. 그렇지 않으면 피곤함으로 혹은 모른 척하거나 무던해지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때 드러난 해결, 안도, 낙관과 같은 것들은 불안과 긴장의 껍데기일 뿐이었다. 그 당시 긴장된 나와 너의 몸-들은 경직되어 있었으며, 그렇기에 끊임없이 불안했다. 따라서 그 불안은 감춰져야하는 혹은 없어져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도 감지되는 이것들은 은폐하거나 삭제불가능하다. 수많은 변신 속에서도 불안과 긴장은 여전히 잠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깊이를 길어 올리기 위해서는 회피가 아닌, 들여다보기가 필요하다. 그때 나와 너, 그 몸들이 느낀 불안과 긴장이 어떤 것인가를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이러한 사유 끝에서야 새삼 그 형태를 되물어볼 수 있지 않을까.

 

그 당시 일종의 진정제였던, 허위의 위로는 사실상 불필요했던 것일지 모른다. 지금, 오히려 그 불안과 긴장이 어떤 것이었던가를 천착해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시간의 경과, 사건의 종료 이후에 다른 것으로 전환되거나 삭제되어버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과정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것이 필요하다. 불안의 시간들이 즐거웠던 기억으로 환원되어 재구축된다면, 그 사이에 겹겹이 쌓인 시간들은 어찌 말해질 수 있을까. 따라서 중첩된 시간의 결들을 포착하는 과정은 불안의 유동성을 사유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불안과 즐거움 사이, 어딘가를 끊임없이 돌아다니는 흐름들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것은 어떤 정제되거나 관념적인 언어로 가두어지지 않으며, 그렇기에 불투명하게 쓰여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흐름이나 움직임, 그것은 결국 활동 속에서 녹아나올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 활동들이 아직은 아닌 어떤 것들을 계속해서 행할 수 있는 동력이 됨을 새삼 이번 도항을 통해 다시금 체감했다. 따라서 이 글은 현장의 경험들을 단초로 한 당신-들과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로 풀어가고자 한다. 무수한 시간, 장소, 이름들의 겹쳐짐 속에서 녹아나는 목소리인 이 글에 누군가 역시 또 다른 음색으로 울려나갈 수 있기를 바래본다.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그 찬스들을 환영해요라고 불러 보자. 마치 자기 자신을 이름 없이 부르듯이. 언젠가 내가 이름을 붙여 줄 주체의 주권, 그 너머(かなた)에서 당신(あなた)을 부르는 것이 가능하다는 듯이.

 

내가 느낀 불안을 유동적인 활동 속에서 체감하는 것은 불투명한 나에게서부터 출발한다. 불투명한 나는 이미 나일 수 없으며, 그렇기에 나의 너머이다. 또한 바로 그 곳이 나와는 다른 당신을 환대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기도 할 것이다. 그 목소리가 너에게로 가닿기를.

 

 

2.

 

지금까지 수많은 이름으로 불리어진 아프꼼의 팀원들이, 젊은 연구자들이 발화할 수 있는 공론장을 만들어내기 위해 행했던 노력들이 있었다. 그 하나의 결과이면서, 또 다른 시작으로 가능했던 것이 이번 워크숍이 아닐까 한다. 따라서 여기서는, 층층이 쌓여 있는 노력들이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또 다른 활동과의 겹침 속에서 이야기하고 싶다. 우선 워크숍 그 자체가 공론장의 가능성을 열어젖히고 있었다. 또한 국제철학학교에서 디렉터로 활동하고 있는 니시야마 유지(西山雄二)와 그의 다큐멘터리 <철학에의 권리>를 만남으로 인해 제도와 공론장이라는 문맥을 한층 더 깊이 사유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아프꼼에게 공유할 수 있는 무언가를 남겨준 소중한 만남으로 충분한 것이었다. 니시야마의 다큐멘터리를 보면, 1983년 프랑스 파리에 새롭게 창설된 국제철학학교의 목적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다종다양한 학문 분야 간에 물음과 대화를 실천하고 철학과의 새로운 관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데리다의 표현 철학에의 권리가 나타내는 것은 새로운 공공 공간을 창출해 국제적이고 새로운 사고의 장을 만들고자 하는 바람이다.

 

이때, 국제철학학교(콜레주)는 국제적이고 새로운 공공(公共) 공간을 지향한다. 나아가 콜레주는 ''프랑스에서 유일한, 젊은 연구자가 자유롭게 자기를 표현할 수 있는 제도''로 표현된다. 물론 프랑스의 기반 자체가 한국과는 많이 다르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하지만, 젊은 연구자들에게 공적으로 발언권을 부여하는 유일한 제도로서 콜레주가 가능한 것이다. 이런 다큐멘터리의 흐름 속에서 길어 올린 국제성, 제도, 제도로서의 공공성과 같은 키워드들에 집중한 것은, 이들에게서 파생한 무수한 물음들이 실은 아프꼼을 향해 있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 때문이다. 제도의 안과 밖에 걸쳐있는 다소 기이한 포즈는 어떤 이들의 오해를 불러일으킬만한 여지를 지속적으로 제공해왔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공적으로 유일한 제도로 구성되고 있는 콜레주가 더욱 흥미로웠다. 이 길을 좀 더 따라가 보면 콜레주는 ''어떤 의미에서는 제도이지만, '특별한 방식'으로 제도화되었다''라고 말한다. 그 특별한 방식이란 대학도, 공공연구기관도 아닌 '어소시에이션'으로서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더욱이 이러한 '준제도로서의 취약함'에서부터 콜레주가 시작되었다는 배경이 아주 중요하다는 사실도 강조된다.

 

따라서 콜레주는 지위를 확립하고, 커리어를 향상시켜주는 발판이 되는 제도로 기능할 수 없다. 물론 인터뷰이의 말처럼, 콜레주 덕분에 박사논문을 완성시킨 사람도 있지만, 원칙적으로 콜레주는 어떠한 역할도 하지 않는 '통과해야 할 장소'인 것이다.

이와 함께 몇 가지 다른 만남들도 상기해 보았다. 니시야마 유지와의 인터뷰에서 그가 안과 밖, 제도와 운동을 명확하게 분리하는 구별법을 피하면서 대학수업을 바깥의 사람들에게도 오픈하고 있다는 말과 함께 전해준 이야기도 곁들이고 싶다. 그는 콜레주에서 대표, 의장, 부의장 등의 주류가 전부 고등학교 선생님이라는 사실을 예로 들면서 이것이 꽤나 드문 현상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활기가 있다고 말했다. 이때 세미나는 ''언제 열리니까 와 주세요''와 같이 나의 위치가 우위를 점하는 형태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와는 달리, ''당신도 가르쳐도 좋다'', ''당신도 가르칠 수 있다''라고 하는 장소가 열리는 것, 또한 그 장소를 어떻게 확보할지를 니시야마 자신도 고민하고 있다는 지점은 여지없이 통과하는 장소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더불어 이레귤러 리듬 어사일럼(IRREGULAR RHYTHM ASYLUM)에서 만난 나리타 케이스케도 자신이 점하고 있는 장소가 어떤 비슷한 것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 생각을 공유하고, 만나고, 매개 가능한 자리가 될 수 있도록 본인은 이들을 이어주는 역할밖에 하지 않는다고 했던 말도 기억난다. 그리고 지하대학(地下大学) 역시 일시적으로 열리는 비정규대학이자 공론장이라는 점에서 교차된다.

이러한 현장과 활동들에는 다소 우울한 정조의 앞 절에서 풀어낸 말들이 기입될 여지가 존재할 수 없다. 또한 활동의 현장들을 직접 체감하면서 불투명한 목소리로 시작된 것이, 어딘가에는 가닿지 않았을까 하는 것도 조심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아프꼼이 관통했던 워크숍이라는 공론장 역시 지정된 하루였지만, 그날의 24시간은 특정 시간이나 특정 이름만으로는 규정될 수 없는 것이었다. 특정 시간, 특정 장소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지만, 특정한 누군가의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속에 수많은 이름들의 하나로 아프꼼 역시 자리했던 것이 아닐까. 물론 더 많은 이들을 향해 열려야 한다는 지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테지만, 그것이 당위로서 존재할 필요는 없다. 일본인, 한국인, 교수, 박사, 연구자, 과정생 등 규정된 하나의 이름들 사이를 끊임없이 미끄러지면서 그 자리는 열려 있었다. 따라서 아프꼼 역시 고정된 이름으로 귀속되지 않는 유동성을 담지한 것이었다. 그러한 관통하는 공론장에서, 하나가 아니면서도 유일한 코뮨이 지속 가능하지 않을까. 그러므로 아직은 이름 붙여지지 않은 불투명한 나-들의 목소리를 찾아서 듣는 행위는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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