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뮨의 병에서 시작되는 연대의 쾌락

 

아프꼼(aff-com)의 웹진 창간을 축하하며

 

신지영 (히토츠바시 대학)

 

 

 

 

1. 코뮨의 병은 연대의 조건

 

대학원에서 내 별명은 수유+너머 대학원생이었다. 고등학교 때에는 신문반을, 대학교 때에는 그림패를 했고, 대학원에 들어가서는 줄곧 수유+너머에서 활동했으니, 늘 학교에 슬쩍 발을 걸치곤 대부분은 모임/코뮨에 있으려고 했던 셈이다. 그러나 코뮨에는 개인적으로도 집단적으로도 힘든 시기들이 있다. 그런 점에서 내게 어렵고도 소중해서 어쩐지 생각하길 멈출 수가 없는 말은 여전히 '코뮨'이다.

 

사실 어려운 순간들에 옆에 있어 주었던 것은 코뮨이 아니라 가족이나 코뮨 밖 친구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진정으로 위로가 되었던 것은, 그들 속에서 내가 새로운 코뮨을 느낄 때였다. 일본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요요기 공원의 여성 노숙자 공동체, 프리타 노조 활동, 1950년대 서클 활동, 거리의 수많은 코뮨들. 나는 그 모든 잠재성 주변을 기웃거렸다. 코뮨의 병은 연대의 계기였다! 코뮨의 병은 또 다른 코뮨과의 연대=쾌락을 통해서만 그 병에서 벗어날 계기와 만날 수 있었다. 그것이 혹 또 다른 병으로의 이행일지라도.

 

2. 잔잔히 다가온 움직임

 

어느 더운 여름 날의 대화에서 시작되었던 아프꼼(aff-com)과의 만남은, 병을 위로받고 그것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던 경험 중 하나였다. 아프꼼 분들은 강연회, 세미나, 심포지엄, 서평회, 일본 단체들과의 접속 등 다양한 형태를 실험해 왔다. <냉전과 정념의 공동체> 워크숍은 그간의 활동을 정리하고 내년의 활동을 기약하는 터닝 포인트였다.

 

2년여에 걸쳐 '태어나고 있는 코뮨'인 아프꼼은 '빠른 움직임'을 지녔지만 동시에 잔잔한 배려들을 지니고 있었다. 일상적 세미나, 심포지엄, 시민강연, 서평회 등을 할 때마다 편지가 왔고 그럴 때마다 만남의 순간 스치듯 지나갔던 다짐들이 떠올랐다. ''우리는 요즘 이런 걸 해요!''라고 알리는 것은 그 장소에 없었던 많은 사람들을 친구로 만들고 또 다른 활동으로 연결시킨다. '출사표'보다 '후기'가 중요한 이유이다. 동시에 그 많은 것을 하느라 얼마나 바빴을까 생각하게도 된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아프꼼에서 보내오는 메일의 부드러움에 조금씩 빠져들었던 것 같다. 아프꼼에서 보내오는 메일에는 기계적인 내용만이 아니라 늘 풍성한 잉여들이 있었다. 이번 일에서 느끼는 기대와 자신들의 의지, 그 사이사이에 끼어드는 한숨과 걱정과 두려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러서지 않는 단단하고 잔잔한 배려. 설명하고 설명하는 메일, 아니 '편지'를 받으며 때로는 기대하고 때로는 오해하고 때로는 설레면서 조금씩 친숙해져 갔다. 잔잔히 다가오는 움직임들은 얼마나 강력한지!

 

집단의 '명명(命名)'은 일종의 사건이다. 익숙했던 그 분들이 아프꼼이라는 이름으로 워크숍을 하고 싶다고 했을 때, 여태까지와는 다른 관계가 시작될 것이라고 느꼈던 것은 그 때문이다. 'aff-com''affect''commune'의 합성어이다. 코뮨에서 느끼는 부정적이고 긍정적인 모든 정동들과 ''부대끼며'' 용감무쌍하게 ''이행의 실험''을 하겠다는 선언이다. '부대낌''이행'은 이 모임의 키워드이다. 이것이 코뮨의 활동과, 학술적 활동, 그리고 각각의 삶 속에서 어떻게 수렴될 수 있을까? 이번 심포지엄은 이것에 대한 질문이었다. 따라서 내용만큼이나 발표방식이 중요했다. 시기는 그 어떤 순간보다 많은 접촉면과 이행면이 발생했던 전후 냉전기였다. 내 관심을 끈 것은 이것이었다. '부정적인 정동들'과 정면에서 마주하려는 이 워크숍이, 과연 무엇을 이행시킬 수 있을까?

 

코뮨의 능력을 가늠할 때에는 잡일만큼 정확한 게 없다. 나는 습관처럼 어떤 단체에 가든 차를 내오는 사람을 보게 된다. 심포지엄을 하면 번역하고 통역하는 사람의 이름이 제대로 명시되어 있는가를 보게 된다. 혹시나 그러한 잡일을 하는 사람들 간에 층층시하(層層侍下) 같은 관계가 있지는 않은가 걱정한다. 그래서 혹시라도 ''이곳 행사는 제 손으로 다 치뤘지요!''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런 분과는 다소 거리를 두는 편이다. 폴리스(비오스)의 권력관계보다 고통스러운 것이 오이코스(조에)의 권력관계이기 때문이다.

 

<냉전과 정념의 공동체> 워크숍 날엔 일찍 간다고 갔는데도 이미 발표제본, 책상배열, 간식준비까지 전부 되어 있었다. 준비를 총괄하시던 고영란님이 말씀하셨다. ''이 팀은 팀워크가 너무 좋아요!'' 눈치를 보면서 하는 일인지, 서로를 믿고 의지하면서 하는 일인지는 금방 느껴지기 마련이다. 또한 발표방식도 누구 한 사람 소외되지 않도록 준비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예전에 내가 좋아했던 차원언니의 말이 생각났다. ''새로운 사람이 오면, 일을 만들어서라도 줘야 해. 그래야 소외되는 일 없이 서로 금방 친해지거든.'' 좋은 코뮨은 친구를 위해 움직이고 친구가 움직이도록 해주는 것이라고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3. '이행할 수 없음''이행시켰던'

 

이날의 테마는 긍정적인 정동으로 이행될 수 없었던 부정적인 정동들이 어떠한 에너지를 갖고 있었는가를 되묻는 것이었다. 이는 그러한 정동들이 왜 사회에서 단지 부정적인 것으로만 치부되었는가에 대한 비판적인 질문을 담고 있었다. 따라서 '이행할 수 없는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행할 수 없음'이 무엇을 이행시킬 수 있었는가를 동시에 질문해야 한다고 느꼈다.

 

권명아님의 <전쟁상태적 신체의 정동>은 이행할 수 없었던 존재들이 냉전 하에서 내뿜는 숨찬 숨소리를 통해 기존의 연구들이 간과해 왔던 전후 문학의 정동을 전달해 주었다. 신명직님의 <냉전기 재일 코리안 시티즌십의 변화>는 나에겐 여러 가지 의미에서 어려운 주제였다. 국가나 민족을 선택할 수 없었던 재일 조선인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인정받는 것 뿐 아니라, 일본의 시티즌도 한국의 시티즌도 될 수 없는 상태에서 그들이 만들어냈던 가치였다고 어렴풋이 느낀다. 시티즌으로도 이행할 수 없는 순간에 만들어지는 '또 다른' 재일, '또 다른' 조선의 잠재성 말이다. 나는 <'쌈짓돈'의 공유, '듣고-쓰기'라는 표현: 탄광촌 여자 코뮨<무명통신 1959~ 1961>을 중심으로>를 발표했다. 뜸만 들이고 시작하지 못했던 주제인데 시작할 용기와 기회를 주신 것이 참으로 감사하다. 도쿠나가 나츠코님의 <타자에의 공감과 정념>은 가정에 소속을 둔 여성들이 에로스를 표현할 때, 그것이 사회 제도에 어떠한 파격을 가져오는가를 생각하게 했다. 양순주님의 <냉전의 문턱과 언어화의 경계>는 전후 냉전기의 언어상황을 '비언어''전달 불가능성'이라는 말로 포착했다. 내게는 비언어와 전달 불가능성에 대한 질문이 곧 새로운 코뮨의 언어는 어떠해야 할까라는 질문인 듯이 느껴졌다. 송진희님의 <냉전의 이마고>는 유일한 영상 프리젠테이션이었다. 전후에 대한 여러 영상들 속을 두더지처럼 파고 돌아다니는 움직임은 웅얼거리는 증언을 배경으로 계속되었다. 영상 속에 숨겨진 비명들을 완전히 노출하는 것이 아니라 '숨겨진' 형태로 드러내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어둠 속에 있는 것들은 어둠의 표현법이 있으니까. 또한, 영상은 이날의 발표들을 언어가 필요 없이 직접 느끼게끔 해 주었다. 덕분에 우리는 일본어-한국어 사이의 통역을 통해야 하는 관계로부터, 감각에 직접 부대껴 오는 언어의 세계로 이행했다. 다양한 매체의 합동 발표는 앞으로도 변화무쌍한 가능성을 지니리라 생각했다.

 

한편, 이날 참여자들의 견해는 통일되어 있지 않았고, 오히려 상충되는 입장도 많았다. 그런 점에서 보다 많은 논의가 필요할는지도 모른다. 이런 간극들을 풍부한 설명으로 채워주신 사회자 와타나베님, 섬세한 차이들을 드러내 주신 토론자 고영란님, 나카야님, 마루카와님께 감사드린다. 그 중에서도 소유의 문제를 전후 중국의 토지개혁이라는 테마와 연결시켜 말씀해 주셨던 마루카와님의 발언은 인상적이었다. 대만과 중국연구자로서의 시각이 전후 냉전기의 코뮨적 문제를 사고할 때 꼭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이 모든 논의가 어떤 언어 환경에서 이루어졌는지도 언급해 두고 싶다. 이날은 한국어와 일본어를 전부 할 수 있는 발표자가 많았다. 따라서 한명 한명이 제각각 다른 언어 환경을 만들어 냈고 일본어-한국어 사이의 통역이라는 룰은 계속해서 깨지곤 했다. 통역자였던 류충희님과 이현준님은 각각의 상황에 순발력 있게 대처해야 했다. 따라서 그 어떤 통역보다도 어려웠으리라 짐작한다. 마음 깊이 감사드린다. 또한 한쪽 언어만 할 수 있는 분들에게는 다소 불친절한 환경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복잡한 언어상황이 한국 대 일본이라는 이항대립적인 관계를 넘어서, 훨씬 다양한 소통을 가능하게 해 주었으리라 믿는다. 번역을 해 주신 와다님과 다카하시님은 식민지기 조선 문학에 관심을 가진 일본인이며, 이정희님은 일본의 한국 유학생이다. 이처럼 이행중인 번역자들의 번역은 우리가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훨씬 더 풍성한 의미들을 우리 속에 만들어 냈으리라 믿는다.

 

이날의 워크숍은 일반적인 연구 발표가 아니라 연구 계획을 나누고 점검하기 위한 자리였다. 회의실을 비워줘야 하는 시간이 급박했기 때문에 다 못한 이야기는 뒤풀이에서 나누었다. 신현아님이 <아프꼼>의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주셨고, 고영란 선생님의 제의로 이날에 대한 감상을 주고받았다. 이 자리에 함께 하진 못했지만 워크숍을 함께 준비하고 아프꼼 활동을 함께 해온 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부산이라는 지역성을 조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궁금해졌다. 아프꼼이 일본과 맺어온 이 관계들 속에 부산이라는 지역성은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 것일까? 이번 워크숍이 일본 대 한국이라는 틀과는 다른 분위기가 되었던 데에는 부산의 지역성이 끼친 영향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프꼼이 한국인으로서 일본에 오기보다, 부산 속 코뮨으로서 일본 속 소수자들과 만나가길 바래 보았다.

 

 

4. 연대의 쾌락

 

1950년대 말 일본의 큐슈 지방의 탄광마을에서 <서클마을> 활동을 했던 다니가와 간은 <정치적 전위와 서클>이라는 글에서 '이익을 위한 연대''연대의 쾌락'을 구분한다. 서로의 이익을 증가시키려는 연대는 그저 기능적인 집단에 머물게 될 뿐 아니라 이익과 정의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른바 '전위'들이 이익이나 정의를 내걸고 연대를 하는 데 반해, 대중들은 연대를 통해서 서로의 감정을 나누고 쾌락을 느낀다. 쾌락은 니체나 스피노자가 말했던 긍정의 힘과는 약간 다른 뉘앙스를 지닌다. 쾌락은 기쁨만을 강조하기보다는 희로애락을 모두 포함하기 때문이다. 워크숍이 끝난 다음날 아나키스트 서점 <모색사模索舍> 앞에서 했던 인터뷰는 내게 '연대의 쾌락'을 선물해 주었다. 내가 경험했던 코뮨의 기억과 감정들이-긍정적인 감정 뿐 아니라 부정적인 감정도-편안하게 풀려나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또한 그분들의 경험을 들으면서 친구로부터 위로를 받는 듯했다. 아마도 아프꼼 분들이 기꺼이 부대낄 용기와 함께 또 다른 코뮨으로 이행하기 위한 욕망이 있었고, 그것이 내 마음을 움직였던 게 아니었을까?

 

유토피아에 대한 욕망이 낳은 병은 '유토피아가 없다'라는 말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유토피아가 없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깊은 디스토피아 속에서 유토피아적 이행의 계기를 발견할 때 비로소, 위로를 받고 다시 해볼 용기가 생기는 게 아닐까? 코뮨에 한번 덴 사람들은 '차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코뮨 자체를 거부하기도 한다. 나 또한 그랬던 적이 있기 때문에 코뮨을 거부하고 싶어질 때의 마음을 조금 들여다 본 적이 있다. 그 마음속에는 코뮨을 만든다는 사람들에 대한 의심과 질투, 그리고 좀처럼 바뀌지 않는 자신에 대한 변명을 '차이'라고 말하고 싶은 욕망이 뒤섞여 코뮨 속에서 경험한 수많은 감정들과 겹쳐진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그러한 의심과 질투와 변명 속에는 실은 코뮨-함께 함-에 대한 욕망이 있다. 어떻게 하면 그 감정들을 코뮨의 연대로 이행시킬 수 있을까? 질투하고 변명하고 항변했던 나 스스로에게 용기를 불어넣듯이. 이 위로와 용기의 순간들이 부대낌과 이행을 모토로 한 아프꼼 여러분들에 의해서 창조되길 바란다. 그런 점에서 도래하고 있는 아프꼼들에게 미리 찬사를 보낸다.

 

 

5. 웹진 <아프꼼> 을 상상하며

며칠 전 편지를 받았다. 아프꼼이 웹진을 기반으로 한 매체운동을 벌이기로 했다는 소식이었다. 아프꼼 1<Passion for another life>에 글을 싣게 해 주셔서 감사드린다. 내가 알고 있는 담론공간의 상태를 몇 가지 언급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싶다. 1950년대 큐슈에서 만들어진 탄광촌 여자들의 담론공간으로 <무명통신>이라는 잡지가 있다. 이 잡지는 이 활동에 참여했던 어떤 여성의 강간사(强姦死)의 충격으로 폐간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문제였던 것은 강간사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임을 하자는 제의가 공동체 전체의 이익 때문에 거부당했던 데 있었다. 이야기할 공간이 거부당하자 이 잡지에 참여했던 주요 멤버들은 병에 걸리고 광기에 사로잡힌다. 한편 서로가 서로에게 준 상처가 너무 클 때에는 이야기할 공간을 만드는 것이 오히려 상처를 키우기도 한다. 이처럼 코뮨의 이야기터라는 것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민감하다.

아프꼼의 웹진이 긍정적인 정동 뿐 아니라 부정적인 정동까지 끌어안고 연대하되, 그 부정적인 정동에 먹혀버리지 않는 방식으로 그러하길 바래본다. 먼 어느 날, 아프꼼이 어떻게 멋지게 해 왔는가에 대한 비밀을 알려 주길. 그 순간 우리의 연대가 곧 쾌락이자 곧 코뮨이길. 아프꼼 웹진 창간에 축복과 기대를 가득 담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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