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의 ''을 전하다>

워크숍: 국경을 걸어서 넘다

 

 

 

신현아 (aff-com)

 

 

 

 

 

 

1. 국경을 걸어서 넘다.

 

''순수하게 모든 경로를 걸어서 가겠다는 발상은 날아서 가겠다는 생각만큼이나 참으로 비현실적이죠. 그 사이에 수많은 바다와 사막과 끝없는 스텝(steppe) 황무지가 있어서가 아니라, 현대적인 국경과 감시 시스템과 무기 상인들과 군인과 관리들이 버티고 있으니까요. (중략) 지금 생각하면, 발가락과 걸어서 가는 여행의 공통점은 육신의 맹목적인 진지함이었을 거예요. 순수하고도 직접적인 진지함, 나는 그것을 바랐던 겁니다. 그 어느 나라의 국경에서도 거절당하지 않는 그런 종류의 진지함을.''

 

월경. 경계를 건넌다는 그 말에는 수많은 겹의 떨림들이 함의되어 있다. '국경'을 넘는 설렘, 자신이 살아온 안온한 공동체의 밖으로 나가보는 두려움, 또는 삶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반경(ghetto)을 넘기 위해 몸을 던지는 용감함, 그리고 동경, 기쁨, 또 무엇. 실은 우리가 그 동안 '워크숍'이라는 자리를 만들기 위하여 동분서주했던 시간들은 우리가 바리바리 싸안고 갔던 글, 자료, 작업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저 심정들에도 새겨져있을 것이다.

 

20112, 20118, 20119, 20128, 교토에서 도쿄로, 요코하마로, 구마모토로, 다시 동경으로. 우리는 그 동안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수차례 국경을 넘나들어왔다. 이때의 '누군가'는 당신일수도 나일수도 또는 '다시 만난 세계'일 수도 있다. 방점은 모든 곳에 동등한 무게로 찍힌다. 국경을 넘는 것, 만남이라는 것, '누군가'라는 것, 그리고 '''세계'가 조금, 변한다는 것, 그 가능성들 중 어느 하나도 우리에게는 절박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우리가 '월경'으로 우리의 삶에 '설정된', 넘을 수 없는 한계로서의 삶의 반경을 넘는 동시에, 우리가 가진 몫에서 오는 내 몸에 익숙한 공동체의 반경을 넘어가보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나는 일부러 '국경을 넘는다'는 말을 쓴다. '국경을 넘는다'는 말에는 '외국에 간다'는 말의 편안한 일상성과 달리, '결단'과 같은 모종의 절박함과 긴장감이 스며있다. 그러니 '외국에 간다'는 것이 어떠한 '사건'이 될 수 없는 요즘 세상에 굳이 '국경을 넘는다'는 말을 쓰는 것은 어쩐지 어색하거나 과잉되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그 어색함과 과잉의 낙차야말로, 우리가 그동안 '국경을 넘어서' 걸어왔던 길의 시작점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알려준다. 이제 '월경'이 사건이 될 수 없는 것은 그 길이 '신분증명'을 가지고 매끄럽게 이어진 길을 부드럽게 미끄러져 다니는 것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여권'을 가지지 못하였으므로, 게토의 주민들처럼 걷고 걸어서 '국경'을 건넌다. 그러다 '국경'에서 '신분증명'을 요구한다면 우리는 다만 우리의 이름을 계속하여 말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월경'은 여전히 '사건'이다.

 

 

2. 만나기 위해 걷다.

 

'국경을 넘는 걸음'의 시작이 어떠한 낙차의 틈새에 있었다면, 그렇게 걸어서 향했던 길의 방향 역시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매끄러운 길이나 여행자의 걸음이 장소와 장소를 지나는 것으로 이어져있다면, '국경을 넘는 걸음'의 길은 누군가와 다시 누군가를 만나는 것으로 이어져왔다. '누군가'를 만나서, 서로의 걸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우리가 만났던 벽을 당신들은 어떻게 넘어갔는지 고민을 나누고, 서로의 보폭을 견주어볼 수 있기를. 그리하여 우리가 걷는 길이 '반경'의 테두리를 맴돌 때, 이 만남의 힘으로 다시 넘

어갈 수 있기를. 그러나 걷고 있는 사람은 걸어서야만 만날 수 있다. 한편으로는 비유로서만이 아니라, 수차례 '월경'을 하는 그 길에서 우리는 정말로 참 많이 걸었다. 길을 헤매면서, 약속장소로 향하면서, 자료를 보러 가면서, 늘 운동화끈을 동여매고 타박타박 걸었으므로, 우리는 '누군가' 만날 수 있었다. 그러니 우리가 걸어서야만 만날 수 있었던 당신은 역시 자신의 길을 열심히 걸어서 밟아나가고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잠시 만나서 함께 걷던 시간들은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 그러니 월경의 길에서 만나는 얼굴들에 어쩐지 서로 마음이 쓰이는 것은 걸음의 기쁨과 노동과 피로가 묻어있음을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리라. 우리는 그렇게 월경의 얼굴들과 만났다.

 

한 편으로 우리에게 이 '월경의 얼굴들'과의 '만남'이 절박했다면 그것은 이러한 면 또한 가진다고 할 것이다. 앞서 우리의 걸음이 '여권'을 갖지 못한 채로, 걸어서 국경을 건너는 걸음과도 같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그 '모종의 긴장감과 절박함'의 걸음이 여행자의 걸음이 될 수 없듯, 또한 순례자의 걸음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한 켠에 남아 있다.

 

지는 싸움과 죽는 걸음이 기꺼워도 '이미 많은 이들이 나선' 걸음의 뒤로 또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슬픔으로, 또는 박탈감과 증오심을 누르고 누르며 나서야 한다면 그 산책의 길은 고통의 순례길이 될 터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걸음이 빈 곳을 향할 뿐이라지만, 이 지는 싸움과 죽는 걸음 뒤에는 무엇을 남겨야 하지 않을까.

 

'국경'을 넘기 전에 내가 물었던 질문 속에서 나는 우리의 '걸음'을 다시 생각해본다. 우리의 '걸음'이 몫의 반경이든, 게토의 반경이든 그것을 '넘어선다'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 '너머'의 만남을 끝없이 바라왔다면, 그것은 이 걸음이 싸우고, 지치고, 또 그 와중에 기쁘고, 뻘밭을 걷듯 아름답지 못하더라도, 그 길에 그러한 관계와 변화와 같은 무형의 흔적과 목소리들을 끊임없이 남기고자 한 것이 아닐까. 그리하여, 걷다가 지치는 나와 당신이 죽지 않고, 난리를 치면서도, 다시 걸어가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3. 걸음의 보폭, 발자국의 깊이

 

수많은 월경을 걸어서 건너왔다. 그러나 이것이 '걸음'이었음을 지금에서야 조금이나마 알았다. 그것은 함께 걸어온 사람들의, 그리고 걷다가 만난 사람들의 발자국을 뒤늦게서야 보고,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발자국의 깊이가 다른 것을, , 하고 발견하였을 때에야, 함께 건넜음에도 다른 길을 걸었다는 것 또한 깨닫는다. 나의 발자국이 경쾌한 보폭으로 가볍게 찍혀있다면, 또 누군가의 발자국은 주위를 살피며 느릿한 보폭으로 찍히고, 또 누군가는 책임의 무게로 발자국이 무겁게 패여 있다. 지금까지 마치 무언가 알겠다는 듯이 이야기를 하였지만, 실은 나의 발자국은 너무나 가볍게 찍혀있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발자국과 보폭이 변하는 것과 차이에도 우리가 걸었던 길이 남아 있을 것이다.

 

첫 워크숍에서 첫 외국방문의 설렘으로 가득 차서 교토와 도쿄를 가로지르는 힘든 일정에서도 아무에게나 말을 걸면서 뛰어다녔던 것, 그리고 그 다음번 장기 레지던시 참가로 짧지만 '생활'이 되었을 때 막막하고 우울했던 것, 그리고 언젠가 받았던 환대의 안도감, 그리고 이번의 워크숍에서 실수하지 않도록 촉을 세우고, 자리가 불편하지 않도록 가늠하고, 인사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걸음의 보폭과 깊이가 바뀌어가는 것은 팀 안에서의 '', 또는 어떤 사회적 관계 속에서의 ''를 다시 가늠하고 세워보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aff-com'이 누군가로서의 'a''com-munity' 속에서 하나의 'a'로서 말하고, 응답받고, 관계 속에 놓이는 주체가 되는 것, 그리하여 공론장 속에서 말의 몫을 갖는 것을 바라왔다면, 나의 보폭 또한 그러한 길을 돌아서 또는 엇나가면서도(!) 밟아왔다고 말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한편으로 이러한 걸음과 발견, 그리고 길을 만들어나가는 '발명'은 삶의 반경을 넘었을 때에야 육박하는 것이기도 하다. 익숙한 학교, 익숙한 지역, 익숙한 레토릭, 익숙한 관계 속에서는 될 수 없었던 ''를 조금씩 발굴하거나 조형해간다. 그러니 국경을 넘어서 만나는 것은 비단 '당신'만이 아니라, ''이기도, '다시 만난 세계'이기도 하다. 이는 만남의 값을 다시 ''의 안으로 환수하는 것이기보다는, 당신도, 나도, 우리도, 세계의 지평이 약간 흔들, 하면서 각도가 바뀌었다는 것을 체감하는 것이다. 이 흔들림을 겪기 위해 서로를 찾아 발이 온통 곪아가며 울퉁불퉁한 길을 밟아 건넌다. 그리고 잠시 멈추어 되돌아보았을 때, 이리저리 어지러운 발자국들이 꽤 멀리서부터 이어져있는 것이 보인다. 혼자서는 결코 올 수 없는 길을, 다른 보폭, 다른 무게로, 다른 길을 걷는 사람들이, 함께 걸어주었구나. 탄식밖에는 뱉을 수 없을 때, 그 음색에는 나뉠 수 없는 의미들이 뒤섞여 반짝인다.

 

4. 열렸다가 사라지는 장소

 

'월경'이라는 '걸음'은 지금까지 어떠한 낙차 속에서 시작되어, 누군가를 만나고 그것으로 보폭을 바꿔왔다. 그렇다면 그 걸음이 닿는 곳은 어디일까. 물론 이 '닿는 곳'은 완결된, 또는 종결 가능한 '종착지'로서가 아니라 열렸다가 사라지는 장소에 잠시 머무르는 것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이 열렸다가 사라지는 장소는 우리의 걸음과 또 다른 이의 걸음이 만나서, 그 만남들이 모이고 모여 이루어졌다가 사라지는 장소이다. 서로의 보폭을 견주고, 힘듦을 교환하는 걸음 위의 만남이 그것으로 그치거나 스러져버리지 않도록, 모두가 모여 길의 지도를 그려 지평을 만들면서도 동질성의 재생산으로 이어지지 않고, 다시 헤어지고 또다시 다음의 장소를 기약하는 그런 장소. 그럼에도 완전히 사라지는 장소가 아닌, 걸음과 길들을 이어서 별자리를 그릴 수 있게 하는 장소. 한편으로 우리의 걸음은 그런 장소를 만들고, 기록하기 위해 걸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월경의 걸음에서 만나서 함께 노동과 노력과 대화와 고민으로 만들어온 '워크숍' 또한 그러한 열렸다가 사라지는 장소이다. 그리고 그다음 장소에서 다시 당신과 만나기 위해, 당신도 나도 걸음을 걷는다

 

그러다 어느 날 나는 생각했을 거예요, 그래 나는 걸어서 그곳으로 가겠어. 왜냐하면 걸어간다는 것은 일종의 비언어적 정당성을 획득하는 유일한 방법이고, 지금 이 시대에 행할 수 있는 가장 나 자체인 것이며, 마음과 육체를 모두 포괄하는 전체적인 묘사라고 생각되었으니까요. 내가 더 이상 똑바로 걸을 수 없는 벽을 만나게 되면, 그때는 돌아서 가리라. 돌아가는 길은 더욱 멀고, 언젠가 나는 더 이상 걸어서 통과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르겠지만, 그러다가 여러 번의 벽을 만나게 되면 나는 마침내 방향을 완전히 잃어버릴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결정적인 순간에 내가 항상 걷고 있었던 그 길 잃은 길을 걸으리라.

 

벽을 만나 돌아가고, 길을 잃더라도, 우리는 그 길 잃은 길 위에서 역시 길 잃은 당신을 만날 것이다. 그러니 걸어간다면, 우리는 다시 당신을 만날 것이다. 그리고 그 걸음의 한 지점을 여기에 기록해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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