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의 시간과의 만남: 인문학과 제도를 묻다

니시야마 유지 인터뷰

인터뷰어/aff-com

2012.8.14/일본대학 문리학부의 고영란 선생님 연구실

 

 

 

aff-com

국제철학학교에 대한 다큐멘터리 작업인 <철학에의 권리>를 토대로 니시야마 선생님이 몸담고 있는 대학의 안과 밖에서 어떤 작업을 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아프꼼의 경우 대학 제도의 안과 밖을 넘나들면서 여러 가지 발명들을 진행하고 있는데, 제도 안과 밖을 오가는 실험들에 대해서 온전히 학교/제도 밖에서 움직이시는 분들의 비판적인 시선이 존재한다고 생각됩니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 니시야마 선생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니시야마 유지

저의 다큐멘터리는 우선, 쟈크 데리다가 만든 콜레주(국제철학학교)에 대한 것이지만, 데리다를 소개하는 영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대학, 인문학, 철학에 있어서의 현상과 문제점, 미래를 다루고 있습니다. 큰 문제의 틀을 다루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저의 개인적인, 실존적인 입장에서 나온 물음이기도 합니다. 제가 연구원으로 있었을 때에 3년 계약이 끝나면 무직이 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 자체가 제가 제도의 안과 밖, 어디에 있을지를 생각하는 불안정한 시기였습니다. 그러한 개인적인 동기에서 출발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학의 안과 밖을 다른 말로 하면 제도와 운동이 될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대학을 제도의 안이라고 생각하고 그 외의 것을 밖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의 구분을 엄밀하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대학의 안과 밖 구분 없이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대학에서 하는 수업에도 대학 밖의 많은 사람들이 참가하고 있습니다. 대학의 활동을 대학 밖으로 열어가는 것이 작은 것으로부터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홈페이지의 활동을 들 수 있는데, 해외에서의 활동과 수업에 관한 기록들 모두를 이곳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하는 것은 즐겁기 때문입니다. 대학 안에서 학생들을 통해서 연구와 교육을 하는 것으로는 부족한 부분들이 있기 때문에 제가 밖으로 나가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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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제도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으면서,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위치가 바뀌었을 때 자신의 포지션을 어디에 둘 것인가 하는 부분 역시 많은 이들이 고민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니시야마 선생님의 경우는 어떠하십니까.

 

니시야마 유지

저는 한국에 몇 번 간적이 있습니다. 연세대, 서울대, 성균관대에 갈 때마다 <수유+너머><철학 아카데미> 분들과 함께 갔는데 매번 느낀 것은, 한국에는 제도의 안과 밖의 구분이 확실하게 되어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수유'에 가면 제도에 대한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고 또한 공부에 대한 순수한 커뮤니티에 관한 것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일본에는 그러한 것이 없는 듯합니다. 일본에는 대학원생만 26만 명이고, 대학은 국립이 150, 사립까지 포함해서 770개 정도 있습니다. 제가 듣기로 한국의 대학원생의 수는 24만 명이고 대학의 수는 160개 정도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단순하지만 두 나라를 비교해 본다면, 한국은 우수한 대학원생이라도 대학 안에서 직장을 얻기가 어려울 듯하고, 역으로 말하면 질이 높은 코뮨을 조직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그것이 전체적으로 좋은 효과를 가지고 올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인 측면에서 말하자면 긴 세월 비정규직으로 있었고, 지금의 준교수 포지션은 32세에 얻었습니다.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이 되면 불안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는 게 사실이지만, 비정규직에 대한 감각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는 계속 고민하고 있습니다. 일본에는 <내셔널 아카데미>가 있는데 그 산하에 <영아카데미>가 작년에 만들어졌습니다. 일종의 '학자의 국회'가 신설된 것입니다. 현재 영아카데미는 30, 40대가 주축이며, 같은 젊은 세대들의 불안정한 상태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또한 영아카데미는 세계 각국에 만들어져서 서로 교류하고 있습니다. 불안정한 비정규직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지만, 또한 그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는 좀 더 생각해볼 문제라고 봅니다.

 

aff-com

니시야마 선생님이 일본에서 활동하시는 지평에 관해 좀 더 알고 싶습니다. 국제철학학교나 연구모임과 같은 성격의 '공동체'들에는 한편, a라는 개인이 모여 하나의 공론장을 만들고, 공론의 제도를 통해서 '사회적인 개인들'의 목소리가 뻗어나갈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프꼼은 '컨스텔라시옹'이라는 이름으로, 그러한 지평을 만들어나가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의 '아지트'가 홀로 서있기 보다는, 다른 아지트와 만나고 접속하여, 전체적인 시야 안의 차이와 연대의 지평 속에서 관계를 통하여 계속 자신과 다른 이들이 함께 변해가고 움직이는 것을 보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작은 a들의 연대를 통해 생겨나는 공론장과 그 공론장 속에서 a들이 사회적인 발화를 해나가는 의미들을 통해서 이 '지평'의 의미를 발견해보고자 합니다. 일본 같은 경우 '지하대학'이나 'WINC', '코엔지', '자유대학'과 같은 크고 작은 아지트들이 있다고 여겨지는데, 이러한 '아지트'들 간에 어떠한 어소시에이션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니시야마 선생님의 활동은 이러한 아지트들의 지평 속에서 어떻게 이야기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니시야마 유지

짐작하기로는 부산이라는 지역이 서울보다는 크지 않고, 대학도 많지 않을 듯한데 제도 안/밖에서 아프꼼의 활동이 어떻게 가능한지 들으면서 굉장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대학 밖의 활동과 연결되는 부분에 있어서 공동체나 코뮨의 문제 중 가장 큰 것 중 하나는 재원을 어떻게 확보하는가라고 생각합니다. WINC는 대학의 안에서 그러한 재원을 받는 것이고, 코엔지는 재원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각각의 입장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제도 밖의 '얼터너티브'라고 할 때에, 이는 결국 자본의 얼터너티브라는 문제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프꼼은 제도 밖이기도 하고 안이기도 한데, 사회적인 연결 자체가 제도 밖과 안을 나누지 않고 부드럽게 연결시키는 방법을 취하신 것 같습니다. 또 한 가지 인문학의 어소시에이션을 말씀하실 때 먼저 코뮨을 만들고, 그 다음에 코뮨과 코뮨을 연결시키는 듯 합니다. 하지만 저는 역으로 인문학에 필요한 것은 고독(solitude)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박사논문은 <고독과 우애와 공동체>에 대해서 다룬 것입니다. 저는 여러 나라와 각 대학에서 영화를 상영하면 할수록 혼자가 되고 싶다, 고독해지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인문학이라는 것은 혼자서 책을 쓰는 작업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공동체나 가치들을 현재 사회 속에 어떻게 연결시키는가에 대해서는, 한편으로 인문학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고독, 즉 혼자서 책을 내고, 혼자서 쓰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어떻게 소중하게 생각하고 또 그 시간을 확보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고민 중입니다.

 

니시야마 유지

다큐멘터리 <철학에의 권리>를 보면, 국제철학학교의 내부적 결속이 어렵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를 나름의 방식으로 생각해 보면, 국제철학학교는 누구에게나 열린 '공공재'로서의 구조로 존재하고 있고, 그 곳에서 강의하고 참여하고 말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구조를 '통과'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열린 곳으로, '공공재'로서 존재하고 있으나 반대로 내부적인 결속은 어려워진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공동체'에서 '내부적인 결속'이라 했을 때, 그 결속이 갖는 층차가 주는 고민을 빼놓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니시야마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내부적인 결속의 어려움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듣고 싶습니다.

 

니시야마 유지

아프꼼이 affectcommune의 합성어인데, 먼저 일반적인 지금의 근대적인 사고에서 생각하면 굉장히 부정적(negative)이고 위험한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근대는 사회와 계약에 의해, 그 계약을 넘어섬으로서 계약을 한 개인들의 관계성에 의해 사회를 구축하는 것이 다음 단계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코뮤니티의 com-, 유니온이라 것은 하나의 가치가 전제되어, 원래는 커뮤니언(communion)이라는 기독교적인 단어이며 '다같이 하나가 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에 대한 위화감과 같은 것이 근대화의 과정에 한 가지로 있었으며, 아프꼼에서 사용하는 공동체와 같은 단어에도 이런 위화감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것을 합쳐서 아프꼼이라고 사용하는 것은 매우 강한 선언이 아닐까 하고 느꼈습니다.

 

지금은 공동체(community) 대신 '공공성(public)'이라는 단어들을 사용하면서, 하나의 원리가 아닌 보다 열린 장소, 또한 정념이 아니라 '관심(interesting)'을 공유해서 모이는 것입니다. 관심(interest)이라는 단어는 라틴어로 보면, '하나가 아닌 사이에 있을 뿐이다'라는 조금은 드라이한 이미지로, 공공성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만약 지금 커뮤니티라는 말을 사용할 경우에도, 예를 들어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에서는 오히려 정동이 하나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항상 '사이'에 있는 이탈가능한, 참여가능한 그리하여 빠지거나 들어가는 것이 가능한 의미로 공동체를 구현시키고 그런 공동체가 긍정적(positive)인 것으로 여겨진다고 봅니다. 그렇기에 아프꼼이 정동이나 공동체라는 말을 간판으로 내건 것은 처음부터 아주 큰 과제, 문제의식을 짊어지겠다는 것이고,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큰 도전이고 모험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aff-com

근대적인 사고에서 정동이라는 것은 이성이나 사회적인 계약이라는 것에 비해, 부적절한 것들이라고 간주된 것으로 이제까지는 부정적인 에너지로서 이야기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공동체라는 것은 블랑쇼가 얘기했듯이 '불가능한 공동체', '밝힐 수 없는 공동체'라는 함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공동체라는 말을 쓰는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많은 오해를 품을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아직은 그 말을 대체할 수 있는 말이 없기에, 아직은 오지 않은 말이기도 할 것입니다. 따라서 그 말을 사용함으로서 우리는 그것을 대체할 말을 찾아야 함을 환기하는 것이지, 공동체주의를 표방하지는 않습니다.

 

니시야마 유지

물론, 그런 식으로 생각해서 그 말을 사용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개인적으로는 공동체라는 단어를 아주 좋아합니다. ^^

 

aff-com

한편으로 오랫동안 존재했던 대안 운동의 딜레마 중 하나는 고립되지 않기 위한 어소시에이션을 만들며 외부로 나아가는 것이지만, 그러다보면 고독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확보하지 못하게 됩니다. 함께 무엇을 한다는 것은 엄청난 노동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 과정의 노동들이 고독할 수 있는 내면의 에너지를 소진시켜버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문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면에서 홀로 공부하는 것, 즉 학자로서 글을 많이 써나가고, 그것을 통해서 세계에 기여하는 것이 개인적으로든 공공적인 의미로든 더 나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니시야마 선생님의 고민이나 이후 활동의 잠정적 방향에 대해서 듣고 싶습니다.

 

니시야마 유지

지금 고독인가 고독이 아닌가 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비슷한 논점에서 또 다른 이야기를 하면 시간이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문학에 필요한 것은 다른 분야와 비교하면, 돈보다 시간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천문학은, 사람이 천문대를 만들어 방대한 돈을 들여 운영하고 있으나 그것이 중단되면 천문학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문학은 상대적으로 그 정도로 돈이 들지도 않습니다. 두 가지 극단적인 시간의 속도가 있을 것입니다. 사람과 연결되거나 활동을 할 때는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시간이 빨리 소모됩니다. 한편으로는 인문학의 시간은 놀랄 정도로 굉장히 느리다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주간 1회의 수업에서 프랑스어로 2-3페이지 정도 천천히 진도를 나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두 개의 시간을 동시에 소중하게 생각하고 싶습니다. 사회적인 관념과는 다른 느린 시간의 흐름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도 인문학의 하나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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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꼼은 국제철학학교와 같이 젊은 연구자나 이제 공부를 시작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공적으로 발화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 수 있는 것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국제철학학교도 이러한 점에서의 제도로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국제철학학교는 프랑스의 사례이고, 아프꼼은 한국에서 그런 활동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니시야마 선생님은 일본이라는 문맥에서 그런 활동들을 어떻게 전개하고 있는지 여쭈어 보고 싶습니다. 또한 니시야마 선생님이 하고 있는 작업에 있어서 실제적으로 젊은 세대들과의 작업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니시야마 유지

저는 지금 <인문학과 제도>라는 논집을 만들고 있습니다. 일본 같은 경우에는 국가에서 돈을 투자해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만들어서 연구를 장려하거나, 대학 내의 새로운 학과나 학부를 만들거나 하는 등의 새로운 제도가 많이 시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경우 우리는 역사적으로 볼 때, 지금까지 어떤 인문학 제도가 있었는가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대학에 있어서의 여백 혹은 공백에 대한 부분, 그 안에서의 실험적인 제도를 만들어가는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서 이러한 논집을 만들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여러 가지 역사적인 전환점에서는 레지스탕스로서의 인문학이라는 제도가 생겨났기 때문에 우선은 과거의 그러한 것을 모아서 살펴보려고 생각합니다.

 

또한 젊은 세대들과 연결될 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여러 장소에 가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심포지엄에서 발표를 하면서 만나거나, 상영회를 하면서 일본의 전국 대학을 돌면서 여러 대학의 학생들과 만나 친구가 되었습니다. 영화 상영회를 할 때에는 프랑스와 독일, 한국 등에서 사귄 친구들이 같이 동참하기도 합니다. 저는 이러한 유동적인 관계성이 재미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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