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의 자리에서,

한계의 자리에서 말을 태우다

 

김대성 (문학 평론가)

 

1.

 세상의 모든 가난한 곳에 ''이 있다. 폐허 위에, 외로움과 박탈감 속에 ''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 파괴되고 분리되어 있는 사물들과 세계를 잇는 가교가 될 준비를 기꺼이 품고서 말이다. 분리되어 있는 간격을 극복하려는 의지들의 결집, 그것이 바로 매체다. 그러니 새로운 매체가 탄생하는 자리란 '대의''자본'이 공모하는 매끄러운 원탁이 아니라 차라리 폐허 위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누군가를 부르는 (조난) 신호와 그 요청에 응답하려는 의지의 결집으로 매체가 구성될 수 있을 때, 그 자리는 (존재)미학의 장소가 된다.

 

 

2.

 매체 운동은 선동적인 슬로건만으로는 지속될 수 없다. 나보다 크고 힘 있어 보이는 것들은 죄다 '제도'라 몰아세우며 과잉되고 고양되는 것은 이곳과 저곳을 이어주는 ''의 역할을 외려 축소시킬 뿐이다. ''의 진정한 힘은 내용의 전달이 아니라 형식의 창출에 있기에 거부하고 대결해야할 것은 '제도'라는 추상적인 대상에 있지 않다. 제도가 매번 폐허를 밑천 삼아 저 스스로를 갱신해온 오랜 역사를 상기해보라. 새로운 매체의 창간은 새로운 관계 맺음의 방식을 창출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말의 고갈을 막는 유일한 방법은 제도에 대항하는 말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에 되먹히지 않는 새로운 관계 양식을 창출하는 데 있는 것이다.

 

 

3.

매체에 담아내는 것은 ''이지만 매체를 만들어가는 동력은 ''에서 나온다. 이는 각각의 매체들의 성격을 결정하는 심급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가 아니라 '어떤 형식을 취하고 있는가'에 있음을 가리킨다. 갖은 학설과 이론의 경로를 따라가며 추수하는 말이 아니라 없던 길을 만들어가는 자세로 새로운 관계를 조형해가는 형식 그 자체가 말이 되는, 마치 우수리처럼 얻어지는 말. 마찬가지로 매체의 운동성은 새로운 이론들을 선점하거나 결호 없이 이어나가는 시간이 아닌 새로운 관계 양식을 창출하는 무수한 접속 방식에 있다.

 

4.

  접속의 지점과 만남의 장소를 구축하는 데 애쓰는 매체는 그 자체로 실천적인 성격을 담지한다. 더 이상 연결 고리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매체는 매체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것이라고 해도 좋다. 그러니 '더 많은 만남을, 더 많은 이행을!'이라는 슬로건은 누구의 것이 아니라 모두의 것이 되어야 한다. 오직 관계의 실험을 통해서만 만남과 이행의 에너지를 증진시킬 수 있는 ''을 산출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기꺼이 새로운 관계를 발명하는 삶이라는 실험실의 발명가의 지위를 짊어져야 한다. 이는 너와 나의 분리를 조건으로 하는 삶이라는 장()을 새로운 방식으로 연결하는 연구자에 다름 아니다. 매체를 직조하는 말들은 더 많은 만남과 이행을 산출하는 연료다. 말이라는 연료를 태워 우리가 만난다.

 

5.

다시 새로운 매체가 출현할 수 있는 자리와 나아가야할 방향에 대해 묻자. 무수하게 많은 선택지가 주어진 곳이 아니라 어떤 한계에 봉착한 곳, 매체는 그러한 한계상황을 자신의 존재 조건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선택지를 늘려가는 것이 아니라 한계상황을 매번 갱신시켜가는 것, 달리 말해 오늘날 우리들의 삶의 조건에 대해 묻는 것을 중단하지 않는 것. 그것은 매체에 쓰기의 경제가 아닌 지우기의 공리를 도입해야 할 필요성과 조응한다. 우리는 너무 많은 말들을 소유하고 있기에 정작 어떤 말을 해야할지 결정할 수 없다. 말이 가난한 자리란 말의 포화, 말의 과잉, 말의 독점에 의해 교환되거나 갱신되지 않는 상황을 가리킨다. 매체에 지우기의 공리를 도입한다는 것은 제도의 논리에 결박되어 있는 포화상태의 말들을 태워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말들을 태()울 수 있을 때 모두의 말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활활 타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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