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의 ''을 전하다>

그곳에 '있음'으로 남아있는 것들:

외로움의 출처와 출구

 

송진희 (aff-com)

 

 

 

 

 

 

컵에 물이 담겨있다. 실수로 컵을 엎질렀을 때, 물은 기다렸다는 듯이 아래로 흘러내린다. 그 물의 양이 적으면 흘러내린 물도 적을 것이고, 물의 양이 많으면 물은, 컵이 채 땅에 닿기도 전에 제 움직임에 못 이겨 흘러넘칠 것이다. 이론가와 다르게 현장에서 활동하는 활동가들의 말은 제 움직임에 못 이겨 나오는 흘러넘침의 ''이다. 그 말은 정확한 어휘로 구사되는 것이 아니며, 때와 장소를 가려 그 속에서 잘 어우러지는 그런 ''도 아니다. 그래서 '비평'이 없고 직설적이거나, 정돈되지 못한 거친 말이기도 하지만, 거기엔 중요한 '한 방'이 있다. 그곳에 부단히 있었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노동의 '', 부대끼는 현장에서 '정동'되는 ''이다.

 

'쓰기''하기'는 어떤 면에서 같은 말인 듯하지만 '쓰기'만 하다가 해보면 다르고, 해보기만 하다가 막상 써보면 다르기에 그 값은 어쨌든 실천을 동반했을 때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쓰지 않고, 하지 않고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인문'이 그리고 '공부''쓰기'만 해서는 '하기'의 말의 중요성을 영영 모를 일이다. 그 흘러넘침의 '', '하기'의 말들을 올해 일본에서 열린 워크숍의 기간 동안 만났던 이들의 실천 속에서 엿보며 그 중요성을 배우고 깨달았다. 그러므로 자칫 <한일 국제 워크숍>이라는 학술적이고 글로벌한 문맥에, 이 워크숍의 무게가 있는 듯하지만, 그 번외편도 중요하다는 것이, 우리가 후기를 남기고, 글을 쓰고, 웹진을 내는 이유이다. 그러기에 이 글쓰기는 그 활동 속에서 흘러넘침, 저절로 쏟아지는 ''()은 그냥 자연스레 내버려 두되, 스스로를 비평해보는 ''() 사이를 오가며 서툰 문장을 이어 나갈 것이다. 어쩌면 '현장'의 이들은 단번에 알 수 있을지도 모르는 그런 속삭임에 가까운.

 

1.

 

일본에서 워크숍을 마치고 부산으로 돌아와서 거의 기절 상태로 며칠을 보냈다. 은근슬쩍 팀원들에게 안부 메시지를 넣어보니 모두들 식겁 아니면 배탈 아니면 기절 상태인 듯하다. 더군다나 부산은 왜 이리도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더운 것인지, 아니면 내 상태가 숨이 막히는 상태인지 순간 분간이 가지 않았다. 기절한 채 누워있던 주말의 끝자락에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간다. 중요한 것은 스쳐 간다는 것인데 '그것들'은 잡히지 않고 대체로 스쳐 간다. 갔다가 오고, 다시 간다. 그래서 혹여나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를 것들을 붙잡아 두기 위해서 글을 쓰고 있는지 모르겠다. 일본에서 돌아와 가장 많이 가슴속에 맴돈 것은 우리가 (내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 무엇이길래 이렇게 '외로움'을 동반하는가? 우리가 하나하나 움직이는 이 실천(운동)속에 남아있는 이 '외로움'의 정체는 무엇일까? 지지리 궁상맞은 감상쯤이라 생각할 수 있을 테지만, '실천과 외로움'은 서로 쉽게 떨어지지 않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실천적인 운동들이 외로움을 하부에 두고 또 다른 실천적인 움직임으로 이행하면서 그 무게들을 옮겨간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외로움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며, 외로움 자체엔 답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는 아프꼼의 어휘를 빌려 '정동''공동체'의 이론적이며 실천적인 문맥 위에서 얘기될 수 있을 것이다.

 

"외로움은 단지 내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기보다 실은 누군가와, 무엇인가와 이어지고, 포함되어 있느냐의 여부에 의해 발생한다. 그러니까 외로움은 내 마음속에 있지만 , 온전히 내 마음에 속한 것은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외로움의 원천은 나의 밖에 있다. 외로움은 온전히 나에게 속한 내 마음의 상태만이 아니라, 타인과 세계와의 연결, 공시적 이야기를 공유하는 공동체의 소속여부를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이다. 이를 이론적 어휘로는 정동이라 하겠다. 정동이라는 이론적 어휘는 개인과 공동체의 상태라는 현실의 문맥위에서 다시 발명되어야 한다" (권명아, aff-com총서

<무한히 정치적인 외로움>, 갈무리, 2012)

 

외로움도 수많은 정동-부대낌 속에서 동반되는 것이다. 아프꼼이 이론과 실천의 맥락들이 있을 테지만 사실은, '외로움'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걸어온 이론과 실천 사이에 남은, 그을려 있는 그 이름으로부터 말이다.

 

2.

 

작년이었던가? (현재로서는 너무 많은 일들을 했기에 작년이라는 것이 실감 나지 않는다.) 덜컥 연구모임의 멤버가 될 기회가 찾아왔다. ('덜컥'이라는 말은 조금은 사후적인 표현이다.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연구모임을 시작했고, 연구모임을 기획하고 움직이는 것이 실제로는 얼마나 힘겹고 어려운 것인지 몰랐던 시절에 대한 짧은 표현이다.) 인문과 공부, 그리고 공동체를 통해 삶을 배워가는 것에 대한 기대가 있었기에 팀의 활동에 동참하고 싶었다. 이론적인 공부를 시작으로 해서, 부족한 것이 한두 가지 아니었지만, 동료들과 선생님들이 나름의 재능을 봐주고, 귀 기울여 주고, 서로 개입하고 비평하는 그것 자체가 매우 새로웠다. 또한 함께 공부해가며 동료와 선생님들을 통해서 얻은 공동체의 어휘와 그 의미들은 내 삶의 깊숙한 곳에 있던 체증을 한 번에 뚫어주는 듯했다. 그때 '게토''반경' 그리고 '월경' 이라는 어휘를 배웠다. 이 어휘들은 단지 이론의 자리뿐만 아니라 내 삶의 경험들 속에서 차마 ''이 되지못하고 웅성거림으로 남아있던 것들을 ''로 되돌려주었다. 이론과 내 삶이 일치됨을 느끼는 '순간'(이것은 지속성을 가지기보다 어느 번쩍이는 '순간'이 아닐까) 그 말에 내가 빗대어서, 기댈 수 있는 공간이 생기는 셈이니, 얼마나 든든한가. '순간'을 지나 여러 활동들을 함께 했지만, 처음부터 팀에 모든 것을 투여하여 함께 하지는 않았다. 매일 매일 연구실을 지키는 친구들보다 나가는 횟수가 적었고, 일과 작업의 양도 한정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외로움'보다는 '즐거움''희망'이 더 컸던 것이다. 하지만 공동체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며 부대끼는 선분과 접촉면들에 닿을수록 몸과 마음도 점점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나서야 동료들과 선생님들의 '외로움'이 들리기 시작하고 외로움의 무게는 그 공동체를 온몸으로 끌어안고 있는 이들에게 더욱 깊숙이 자리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3.

 

거의 매일 구포에서 126번 버스를 타고 동아대학교 정문 앞에 내린다. 그리곤 야구게임장을 지나 롯데리아 앞의 신호등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길을 건넌다. 길을 건너면 맞은편에 휴대폰 가게를 끼고 오르막길을 올라가 연구소에 다다른다. 그리고 밤이 되면 108계단을 내려와서 엔제리너스, 카페베네, 패밀리마트를 지나 휴대폰 가게를 끼고 돌아서 126번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이 단순한 매일, 매일의 왕복과 온갖 자본의 간판들로 뒤섞인 하단이라는 불모지 속에 연구모임 아프꼼의 하루하루가 이어지고, 나의 하루 또한 그 속에서 이어진다고 할 수 있을 테다. 그러니 그곳은 나의 현장인 동시에, 우리의 현장이다. 현장을 갖는다는 것은 기꺼이 현장이 되려는 자, 현장을 간절히 바라는 자들이 뛰어들고,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현장을 꿈꾸기 전에, 현장을 가지게 되었고, 현장의 치열함을 매 순간 맛보며 나가떨어지거나 발목 잡혀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이 현장은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일까? 묻고 또, 묻는다.

 

'학교'라는 공간과 제도 속에 우리의 '현장'이 물리적으로 자리하지만, 그 안에서 우리는 그 제도를 넘어서는 실험들을 해왔다. 박사수료생도 아닌, 현직 연구자가 아닌, 아직 이름을 얻지 못한 이들이 그 일을 해왔다. 때로는 학교(제도)에 발목 잡히기도 하지만, 우리는 늘 빠져나갈 '구멍'을 기획하고 또 기획한다. '구멍'은 명확한 안과 밖의 경계라기보다 '사이'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안으로 연결되는 통로이기도 하고 때로는 밖의 뻗어 나갈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사이''구멍'이라는 것은 누군가가 쥐어주지 않고 늘 스스로 부딪혀 만들어 가는 것이므로 그것은, 어디론가 이행하고 제 몸에 맞는 '구멍''사이'의 형태를 만들어 가기 위해 고군분투한 흔적이다. who are you?라는 물음들 속에서 우리는 그 '구멍''사이'를 설명하기 위해 이론으로서 설명될 수 없는 것들은 실천으로, 실천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들은 글로서 풀어나간 바 있다

 

학교(제도)의 안과 밖을 넘나들며 활동한 경험들 속에서, 제도를 사이에 둔 ''''의 경계가 점점 더 희미해지는, 사라지는 기이한 느낌을 받는다. '구멍''사이'라는 포지션으로 오랜 시간 제 몸을 만들어 왔기 때문이다. 아프꼼을 ''''의 경계삼아 말할 수는 있지만 거기에서 출발할 수 있는 문제의식은 한정적이며, 우리의 활동은 언제나 그 한정적인 것으로부터의 '이행'이기에 이 '이행'으로부터 사유되어 ''''을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 어디가 ''이고 어디가 ''인가? 때로는 ''이 지독한 자본과 권력의 장소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안에서 창의적인 집단을 발생시키기도 한다. 집에서 버스를 타고 연구실로 향하는 길은 전형적인 '제도'속으로 진입하는 상징적인 길이겠지만, 이제 내게는 그저 연구실로 향하는, 현장 속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다. '이행'의 움직임으로서 입증하는 것, 그 경험치를 발화하는 것, 아직은 오지 않은 것들을 위해 다음으로 이행하는 것이 아프꼼이, 그리고 내가 힘겹게 해나가고 있는 작업이다.

 

4.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에서 보면, 부모의 이혼으로 어머니와 아버지에게로 각각 떨어져 살고 있는 두 형제는 다시 가족이 함께 사는 것이 소원이다. 형은 화산폭발! 이 일어나면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이사를 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그러던 중 새로 생긴 고속열차가 서로 반대편에서 달려오다가 스쳐 지나가는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되고 아이들은 소원을 빌기 위해 기적의 장소로 떠난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기적을 바라며, 직접 길을 나서는 그 과정이 인상 깊었다. 각자의 소원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은 신칸센을 타고 떠나기 위해서 옹기종기 모여 함께 돈을 모으고, 떠나는 날 수업을 빠지기 위해서 꾀병을 부려 학교를 빠져나온다. 이 모든 것이 단순히 소원을 빌어 기적을 바라는 마음이라기보다, 아직은 닿지 못한 그 세계에 대한 아이들의 열정으로 보였다. 그 열정엔 부끄러움도, 두려움도, 현실적인 장벽도 없다. 그 세계를 끊임없이 꿈꿀 수 있는 동력으로 충만하다. 하지만 그 열정을 꽃 피우는 순간은 서로 반대편의 고속열차가 스쳐 지나가는 순간처럼 아주 짧다는 것을 아이들은 알아챘을까?

 

외로움의 출처로 시작해 출구를 찾아 빠져나올 요량으로 글을 써내려 가고 있지만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일본에서 만난 니시야마 유지 선생님의 말씀처럼 '함께 있음'이 아닌 자기 안의 '고독'의 시간에서 그 출구의 길목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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