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빛 공동체에서 배우는

 

 인문학 운동의 미래

 

 

                                                                                                                   임태훈 (문학 평론가)

 

 

 

                            

                        인문학 운동의 현장을 어떻게 구상하고 실천할 것인가를

                        고민할 때마다, '중고딩' 때를 떠올린다.

 

 

 

인문학 운동의 현장을 어떻게 구상하고 실천할 것인가를 고민할 때마다, '중고딩' 때를 떠올린다. 내가 중고등학생이었던 1990년대에는 한 반에 두세 명쯤 음란물 공급책이 있었다. 그 애들을 통해 반 아이들 전부가 이런저런 재밌는 것들을 돌려 볼 수 있었다. 교실은 신성한 수업장소이면서 음란물을 공유하고 즐기는 '핑크빛 공동체'이기도 했다. 정말이지 어른들이 기대하는 ''하고 '소년少年'다운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종종 일제 단속에 걸려 매타작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혈기왕성한 소년들의 본능에 근거한 공동체가 쉽게 와해될 리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우리가 돌려 보던 빨간 책과 음란비디오 덕분에 학교는 그나마 사람 살만한 곳이었던 듯싶다. 어른들이 아무리 감독을 철저히 해도 우리는 어떻게든 숨 쉴 구멍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나에게 그 시절의 '빨간 책'은 최고의 청소년 문학이자 산소 호흡기였다.

 

나이가 들수록 이런 독서 체험의 기회는 갈수록 줄어든다. 읽을 만한 책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근사하고 화끈한 책은 곳곳에 쌓이고 널렸다. 하지만 그때와 같은 해방감, 흥분에 들떠 ''을 함께 읽을 동무를 만나기가 점점 더 어렵다. 어른들에게 들키지 않으려 애지중지하며 돌려보는 책도 없어졌다. 그때 돌려보던 책의 내용은 기억도 안 난다. 그래도 여전히 생생하고 애틋한 건 그때의 ''이 뿜어내던 웃음과 친구들이다. 인문학 운동의 현장을 중고딩의 '핑크빛 공동체'만큼만 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동안 내가 기획에 참가했거나, 제작이나 운영에 직접 참가한 인문학 운동도 핑크빛 공동체 시절의 경험만큼 강렬해지길 바랐다. 아직 자신 있게 노하우를 말할 수 있을 만한 단계는 아니다. 그동안의 경험은 돌이켜볼수록 아쉬움이 더 크다.

 

푸른역사 아카데미에서 진행했던 '문학사 이후의 문학사'는 다섯 개 시즌, 총 스물다섯 강좌를 장장 1년에 걸쳐 청중에 전한 대장정이었다. 자신하건대 '문학사 이후의 문학사'는 그 어느 팀에서도 쉽게 시도하지 못할 의욕 충만한 기획이었다. 우리 팀의 성과를 바탕으로 더욱 강력한 기획이 푸른역사 아카데미를 비롯해 여타의 인문학 공간에서 시도될 것이다.

 

그러나 기획자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허기를 느꼈다. 매회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마다 생각했다. '', '', ''의 삼각 교양 편대로부터 비켜 나와, 이를테면 음담패설의 낄낄거림 속에서 '', '', ''을 새로운 삶의 강도로 재발명할 방법은 없는 걸까. 그렇게 해서 인문학 운동의 현장에는 전혀 얼씬도 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을 새로운 친구로 불러들일 방법이 있지 않을까. 아직도 눈에 선하다. '문학사 이후의 문학사'에 함께 해주신 선생님과 청중은 하나같이 더 바랄 게 없을 만큼 이상적인 인문학 애호가들이었지만, 그들의 전형성이야말로 인문학 운동이 직면한 한계였다. 왜 오는 사람만 여기에 오는 걸까!

 

날이 갈수록 책을 읽지 않는 사회 분위기도 고민을 깊어지게 한다. 지하철, 버스에서도 모두 스마트폰만 쳐다보고 있다. 지금의 '중고딩'도 더하면 더했지 예외가 아니다. 상황이 이러니 출판계의 사정도 참담하기 이를 데 없다. 책과 멀어진 사람들을 인문학 운동의 현장으로 불러들이기도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미디어 환경이 달라진 만큼 지금까지 해왔던 방식과는 다른 시도가 필요했다. 책이 사라진 그 자리에 책을 다시 돌아오게 하고 싶었다.

 

다행히 그런 노력을 하는 팀이 있었다. 팟캐스트 방송국인 '책 읽는 라디오(www.bookdio.com)'이었. 이 팀에 합류하면서 그동안 시도해보고 싶었던 다양한 콘셉트를 마음껏 시도했다. 방송 제목은 '음파의 기묘한 책 읽기'였다. '', '', ''을 개그로 버무리고 음담패설로 살짝 맛을 돋웠다. 반응도 기대 이상으로 무척 좋았다. 애청자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분은 전남 영광에서 학교를 다니는 고등학생이었다. 대학에 진학하면 내가 했던 것보다 더 재밌고 유익한 방송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올해 들었던 가장 기분 좋은 말의 하나다. 그 아이가 만들 미래의 방송이 기대된다. 나는 이미 그 방송의 애청자다.

 

'책 읽는 라디오'에서의 작업은 인문학 운동의 현장을 강의 공간만이 아니라 팟캐스트 플랫폼으로 확장할 방법을 배울 수 있었던 기회였다. 그러나 미디어 환경은 엄청난 속도로 급변하고 있다. 팟캐스트도 이미 최전성기를 지난 상황이다. 앞으로 대세가 무엇으로 바뀔진 모르겠지만, 그걸 마냥 쫓아다니는 방식만으로는 한계가 빤하다.

 

방법이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결국 '삶의 스타일''인문학'을 유행시키는 게 중요하다. 어느 특정 강의 공간이나 미디어 콘텐츠의 흥행을 기획하고 실천해나가는 것이 지금의 현실적 수행 과제인 것은 맞지만, 그 과정의 재생산에 머물며 인문학 운동의 모험이 공회전해선 곤란하다. 그 수준에서 자족하기엔 인문학의 경쟁상대는 만만치가 않다.

 

 

 

 

                                              

UFC 이종격투기 경기장(케이지)에서도 인문학 운동은 가능하다.

고정관념 대신 상상력에 기회를 줘야 이 일의 미래를 기약할 수 있다.

 

  

오늘날 대중이 가장 뜨겁게 열광하는 삶의 스타일은 '재벌 2'. 드라마 주인공만 해도 매번 '재벌 2'가 연기된다. 지난 십 년 이상 계속된 트랜드다. '재벌 2'의 표상이 '인문학'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촌스럽고 시시하다는 것을, 게다가 속이 텅 빈 허상이라는 사실을 각성케 할 문화를 만들어내야 한다. 자본주의의 세속적 풍경 안에서 작은 점으로 물러나 있던 인문학을 전경으로 끄집어낼 방법을 다양화해야 한다. 이것은 인문학을 근사한 주인공으로 다시 내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월이 흘러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지긋지긋한 세상의 한가운데서, 참을 수 없는 폭소를 선사할 광대를 만나려는 구상이다. 이를테면 UFC 이종격투기 경기장(케이지)에서도 인문학 운동은 가능하다. 프로레슬러이자 IT 얼리어답터이며 책과 칼럼을 쓰는 지식노동자이기도 한 김남훈이라면 언젠가 그런 현장을 만들지 모르겠다. 이 실험에 우락부락한 덩치만 필요한 건 아니다. 싸움이라곤 맞는 것밖에 못 하는 어느 약골의 무모한 도전이라면 훨씬 더 흥미진진한 모험이 될 것이다. 이보다 더 우스꽝스러운 상상이 가능하다면 그게 정답이다. 고정관념 대신 상상력에 기회를 줘야 이 일의 미래를 기약할 수 있다.

 

인문학 운동은 늘 허기를 느껴야 한다. 겁쟁이와 비겁자들 틈에서 불온하게 낄낄거릴 수 있는 인문학이야말로, 모든 것이 쓰레기로 바꿔가는 이 세계에서, 배울 거리이기 이전에, 감응될 만한 가치가 있는 사건이라고 믿는다. 세계의 비루한 질서에 물들지 않고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이가 많아지도록, 인문학 운동은 더 좋은 실패, 충분히 만족할 수 없는 성공을 거듭해야 한다. 그러나 이 일을 할 때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흥을 잃고 짜증만 남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때마다 내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앞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종잡을 수 없어지기도 한다. 머리로는 파이팅을 외치고 신념을 되뇌지만, 몸이 그에 값하는 에너지를 내보내지 않는다.

 

 

 

놀이의 흥분과 웃음이야말로

인문학 운동의 미래를 예감하는

전조다.

 

 

중고딩 때의 핑크빛 공동체를 자꾸만 떠올리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이 일을 오래 지속할 수 있는 에너지가 세상을 바꾸겠다는 결연한 의지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건 아이러니하다. 그런 의지는 타인에게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조차 부정되고 수정될 수 있으며, 당연히 그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의심과 착오, 실망의 순간조차 운동의 과정으로 끌어안을 수 있는 원초적인 힘이 존재한다. 그 힘은 철부지들의 핑크빛 공동체가 그러하듯, 갑갑한 생활에 억눌려 있더라도 좀처럼 기죽지 않고 더 재밌는 일에 작당하는 발랄한 마음과 몸에서 구할 수 있다. 놀이의 흥분과 웃음이야말로 인문학 운동의 미래를 예감하는 전조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