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장치를 발명하자’ 연속 좌담 2회

 


 

 

NPO와 공생 카페
: 지역 생협으로 발명한 ‘동아시아 공생 대학’

 

 

권명아

 

 

   이번 좌담은 일본 구마모토 가쿠엔 대학의 신명직 선생님에 대한 인터뷰로 이루어집니다. ‘운동을 하는 것’과 ‘운동을 사는 것’에 대해 이즈음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운동이 삶을 소진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사는 방법이 될 수 없을까? 이 좌담은 기본적으로 노동운동가에서 연구자로, 다시 일본으로 늦은 나이에 이주하여 ‘한국계 규슈인’으로 정착하기까지 신명직 선생님의 생애사를 따라가면서, 운동 방식의 변화를 되새겨보고자 했습니다. 생애사의 운동사를 연결해서 생각해보고 싶었습니다. 또 대학과 지역사회, NPO법인을 연결하여 새롭게 인문장치를 발명해온 과정을 한국 상황과 비교해서 들어보았습니다. 은퇴 후의 계획을 묻는 필자에게 동아시아 공생을 위한 엄청난 계획을 말해주시는 신명직 선생님 이야기를 들으며, ‘운동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며 미소를 짓기도 했습니다. 단지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이 삶이 될 때, 지치지 않는 ‘기쁨’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게 아닐까? 모두가, 즐겁고 신나하던 2015년 구마모토 가쿠엔 대학의 동아시아 공생 영화제 풍경은 그 증거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1980년대 부천 노동법률상담소에서, 
‘난장이는 없다’는 ‘난시(亂視)’ 시절을 거쳐
동아시아의 ‘가리봉 공단’을 만나기까지

 


권명아: 10월에 동아시아 공생 영화제가 성대하게 끝났습니다. 임흥순 감독의 <위로공단>의 일본 첫 개봉이기도 했는데요. 저도 참여했습니다만, 구마모토 가쿠엔 대학의 동아시아 공생 영화제에서 <위로공단>을 본다는 것이 참 상징적이고 의미심장했습니다. 또 <위로공단>의 서사가 마치 신명직 선생님이 걸어온 지난 생애사와도 겹쳐져서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좀 소개 겸 감회를 말씀해주세요.

 

신명직: 영화 <위로공단>을 작은 프리뷰 화면으로 보면서 좀 뭉클했습니다. 80년대 가리봉 그 시절 그 사람들 얼굴에서 세월의 흔적을 발견했는데, 돌이켜보니 저 역시 예외가 아니더라구요. 훌쩍 30년 넘게 흐른 세월들을 임흥순 감독님이 잘 포착해 주셨어요. 하지만 영화 <위로공단>이 그때 그 시절을 단지 회고하는 영화였다면 아마도 우리 영화제에서 상영하지 않았을 거예요. 한반도 국경을 넘어 동아시아의 가리봉으로 공단을 확장시켰다는 점에서 너무 반가웠어요.

   사실 1992년 무렵, 그러니까 87년 노동자들의 대투쟁 이후 임금도 많이 오르고,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노동조합도 많이 생겨나면서 제 자신이 무척 초라해 보인 적이 있어요. 그 때 노동법률상담소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고생고생해서 함께 노조를 만든 간부들이 어려운 일이 생기면 저희들 대신 인권변호사를 찾아가더라구요. 처음엔 무척 섭섭했는데, 생각해 보니 그게 바로 우리가 바라던 세상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 이상 우리와 같은 존재가 필요하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는 건 박수치고 환영할만한 일이었던 거죠. 사실 노동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도 70년대 말에 나온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으면서 난장이의 벗 ‘지섭’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거든요. 이젠 떠날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때 전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이제 난장이는 없다.’

   하지만 ‘이제 난장이는 없다’고 했던 제 말이 틀렸다는 것은, 제가 대학원에 들어가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습니다. 보다 싼 임금을 찾아 중국과 베트남 등지로 빠져나간 한국계 기업들이 그곳에서 어떤 일들을 벌이고 있는지 알게 되었거든요. 문제는 ‘국경’이었습니다. 한국이라는 ‘국경’을 들어내고, 경계를 동남아시아까지 확장시키자, 너무도 많은 ‘난장이’들이 ‘전태일’들이 한꺼번에 뚜벅뚜벅 걸어왔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네요.

   영화 <위로공단> 속 캄보디아 이야기는, 한국 국경 너머 존재하고 있는 동아시아의 ‘난장이’를 찾아 떠난 저의 궤적과 일치하는 것이어서 무척 반가웠습니다. 물론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한국의 ‘난장이’ 역시 사라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난장이①=가리봉 ‘외딴방’ 여공에서, 난장이②=가리봉 이주노동자와 난장이③=비정규직 노동자로 형태만 바뀌었을 뿐이었던 것이지요. 87년 대 투쟁 이후 오른 임금 인상분이 글로벌 자본의 집요한 공격으로 다시 원위치되고 말았다는 것. 결국 ‘난장이가 없다’는 저의 말은 ‘착각’이거나 ‘거짓’이었던 거죠. 영화 <위로공단>은 바로 저와 같은 난시자들을 향한 조용한 외침으로 다가왔습니다.

 

 

 

‘NPO법인 동아시아 공생 문화 센터’ 6년,
본국으로 돌아간 네팔과 방글라데시 등지의 노동자와
한국, 일본을 연결하기 위한 ‘한국계 규슈인’의 여정.
대학이라는 현장과 이주노동, 공정무역을 어떻게 연결할까?

 

 

권명아 : 먼저 한국 독자들을 위해서 선생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기본적인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일본에서는 NPO법인 형태로 대학, 시민사회, 지역이 연결되는 ‘운동체’ 형식이 활발하게 진행되는 것 같습니다. NPO법인은 어떤 형태인가요? 설립 과정, 국가나 대학, 지역사회의 지원이나 연계 방식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또 NPO법인과 대학, 지역의 ‘그린코프’ 같은 협동조합을 연결하는 방식은 일본사회에서 일반적인가요? 아니면 선생님 나름의 경험의 결과인가요? 한국은 최근 대학 위기 속에서 ‘협동조합’ 형식으로 대안 대학이나 협동체를 만드는 것이 이제 시작 단계입니다. 협동조합 운동과 NPO 형식은 좀 다른 것 같은데요. 이에 대해서도 선생님 의견은 어떠신지요?

신명직: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은 ‘한국어능력시험’ 장소를 구마모토에도 유치하는 것이었어요. 규슈에서 후쿠오카에 있는 규슈 대학 다음으로 저희 대학에서 한국어능력시험을 치를 수 있게 되었지요. 그 다음으로 케이팝과 한국어 스키트(촌극)를 경연 형식으로 치루는 한국어대회를 시작했고, 이어서 동아시아 공생 영화제와 동아시아 공생 커피 사업을 새로 시작하면서 NPO법인을 만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사업을 공식화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죠. NPO는 일종의 사회적 기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법인화된 NGO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예산, 결산 상황을 지역사회에 지속적으로 보고해야 할 의무가 따르죠. 일정 규모가 되지 않을 경우 좀 번거로운 게 사실입니다. 일본엔 생활협동조합은 있지만, 최근 한국에서 많이 생겨나고 있는 협동조합 개념은 그다지 활용되지 않고, NPO유형의 법인체가 최근 크라우딩 펀드를 기반으로 발전해 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나온 10년을 돌이켜보면 가장 발전한 것이 안정성과 지속성인데, 여전히 불안한 것 역시 안정성과 지속성일 것 같습니다. ① 동아시아 공생 커피를 지역생협에 공급하고, ② 동아시아 공생 카페를 오픈해 지역의 장애인 단체에서 쿠키를 구입, 판매하는 등 지역사회와의 연계를 이루고, 관련 교육과정을 개발할 뿐 아니라, ③ 동아시아 공생 영화제와 한국어대회 학생 스태프 역시 적극적이고 안정적인 자체 시스템을 구축하긴 했지만, 이 모든 것을 연결시킬 전문 인력 없이는 유지, 발전되기 힘들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전문 인력의 양성과 이들의 경제적 자립이 가능할 만큼의 파이를 키워내야 비로소 안정적인 재생산 시스템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국과 일본 이외에 최근 다른 동아시아 지역과의 연계에 힘을 집중하고 있는 곳은 라오스입니다. 라오스 볼라벤 고원의 자이커피 생두를 수입해서 로스팅한 ‘라오스의 향기’를 구마모토 지역사회와 대학에 공급하고 있는데요. 학생들과 함께 라오스 볼라벤 고원에서의 현지 워크숍, 한국의 ‘아름다운 커피’ 관련 대학생 그룹과의 공동 워크숍 등이 앞으로 계획하고 있는 과제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라오스 커피마을과의 교류가 어느 정도 안정적인 궤도에 오르면, 러시아 연해주 고려인들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는 대규모 유기농 콩농장, 지금까지 함께 오랜 여정을 함께해 온 네팔의 커피마을 등과도 지속적으로 공생 네트워킹을 계속해나갈 예정입니다.

   제가 ‘NPO법인 동아시아 공생 문화 센터’를 만든 지도 벌써 6년이 지났네요. 글로벌한 신자유주의 시스템을 넘어선 대안의 시스템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만들어 가야할지를 고민하던 끝에, ‘한국계 규슈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이런 것 아닐까 싶었습니다. 저희 NPO가 하는 일 중 하나는 ‘공정무역 커피 사업’을 하는 것입니다. 95년 대학원에 들어가자마자 접한 파키스탄의 전태일 ‘이크발마시’(아동노동을 세계에 고발하다 죽음을 당한)를 찾아 꽤 오랫동안 네팔을 방문해 왔는데, 아동노동 문제 역시 글로벌한 경제 시스템-양극화(격차)의 한 형태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죠. 그 때 발견한 것이 공정무역이었습니다. 거대한 글로벌의 바다에 돌을 던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달리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서 이주노동운동을 하다 네팔과 방글라데시 등지로 돌아간 이주노동자들이 대안의 시스템을 구축해갈 중요한 동력이 될 수 없을까 생각하면서, 한국의 이주노동자 단체와 한국과 일본의 공정무역 단체의 도움을 받아 네팔의 커피 생두를 수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직접 신용장도 작성하고 세관 검사까지 다 받은 뒤, 차를 몰고 후쿠오카에서 구마모토로 생두를 실어 나르던 어느 날 하루 해가 저무는 고속도로 휴게실에서 하늘을 쳐다보다 문득 이건 너무 원시적이다 싶었습니다. 비슷한 고민을 해온 사람들과의 연계가 필요하다고 느꼈죠. 수소문 끝에 지역 생협에 저희 공정무역 커피를 소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히말라야의 향기’(네팔 커피)에서 ‘라오스의 향기’(라오스 볼라벤 고원 커피)로 중심축을 옮겨가고 있는 중입니다. 공정무역도 사업인지라, 역시 ‘규모의 경제’가 필요한 곳이었습니다. 직접무역 방식에서 일본의 ATJ(Alter Trade Japan)를 통해 커피 생두를 공급받는 간접무역 방식으로 형식을 바꾸었습니다. 최소한 컨테이너 규모로 생두를 수입하지 않으면 단가가 비싸져서 ‘공정’의 정신 역시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저의 ‘현장’이 대학이라는 것. 현장에 기반을 두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학을 변화시킬 뿐 아니라, 대학과 지역사회 사이에 글로벌한 시스템을 네트워킹할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 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까 싶었죠.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동아시아 공생 북카페’입니다. 아직은 걸음마 단계지만 대학과 지역사회를 연결시킬 단단한 사회적 기업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NPO법인 동아시아 공생 문화 센터’는 구마모토 가쿠엔 대학을 기반으로 ‘동아
시아 공생 영화제’를 지속해왔고,최근에는 동아시아 공생 북카페를 학교 내에
열었다. 이 일들은 모두 학생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뤄지고 있다. 
공생 문화 센터와 영화제, 공정무역 카페 등이 학생들을 어떻게 변화시켰을까?
또 이런 경험과 활동을 대학제도 내에 정착시킬 방안은?

 

 

권명아 : 초기의 동아시아 공생 영화제에 비해 금년 영화제 때는 학생들 참여도 훨씬 많아졌고, 동아시아 공생 카페 역시 학생들의 자원봉사로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학생들을 어떻게 변화시켰나요? 또 대학에서의 이른바 일반적인 교육 방식과 어떤 다른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하시나요?

 

신명직: 저는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내는 일이 신나고 즐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비장한 목소리와 결의에 찬 눈빛도 때론 중요하겠지만, 그건 그리 오래 가지도 여럿이 함께 하지도 못하는 것 같아요. 최근 일본 젊은이들이 자기목소리를 내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되는데, 이들이 목소리를 내는 방식 역시 이전 세대들의 그것과 달리, 진지하지만 흥겹고 경쾌하다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저희 학생들도 동아시아 공생 영화제나 동아시아 공생 카페를 하면서 모두들 즐거워하는 것 같아요. 물론 처음엔 다들 소극적이었죠. 하지만 적극적으로 참여해 나름의 성과를 내자 학생들의 눈빛이 바뀌기 시작했어요. 크고 작건 간에 일하는 과정이 즐거울 때, 또 자신들이 한 일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박수를 받을 때, 힘들어도 이겨내고 또 다른 성과를 만들어 내는 것 같았습니다.

   특히 동아시아 공생 카페를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운영하면서, 사람(교육과 배치), 물건(물품), 돈(회계)을 관리할 시스템을 정착시켰는데, 이를 통해 학생들은 카페 운영을 안정적이고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가고 있습니다. 물론 학생들의 자발성이 늘 일정한 것이 아니어서, 자발성의 진폭이 큰 만큼 시스템을 보다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더 많은 고민과 연구가 필요한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이를테면 시스템을 학제화하여, 학부를 넘어선 학제간 실습(혹은 인턴) 커리큘럼 같은 것을 만들어, 실습이 가미된 학과간 공통 옴니버스 수업을 제도화함으로써 지속가능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유럽의 옥스퍼드 대학과 옥스팜, 혹은 페어트레이드 대학 같은 것들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이런 실험들이 위기에 처한 대학 교육과 인문학 교육에 어떤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을까? 
구마모토 지역 주민과 구마모토 가쿠엔 대학은 서로 어떻게 연결될 수 있었나? 
그리고 한국학 교육이 신나고 재미있는 실험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권명아: 일본에서 한국어 교육이나, 한국학은 점점 더 위기에 봉착하고 있고, 대학제도 내에서 매우 협소한역할에 할당되어 있다고 생각됩니다. 또 교수자의 경우도 ‘한국어 교육’만으로는 매우 제한된 역할을 하게 되어서 교육자로서의 보람을 찾는 것이 힘들다고 말하는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선생님이 하시는 일들은 기존의 일본 대학에서의 ‘한국학 교육’이나 ‘한국어 교육’의 제한된 역할을 넘어서려는 노력이자 결과라는 생각도 듭니다. 한국의 대학에서 인문학 역시 사실 일본에서의 ‘한국학 교육’처럼 제한된 역할에 한정될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선생님의 경험에 비춰보자면 동아시아 공생 영화제나 공정무역 카페, NPO법인과 지역 생협과의 연계 활동이 이런 대학의 위기를 어느 정도 타개했다고 평가하시는지요?

신명직: 일본 학생들이 한국에 관심을 갖고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배우고자 한다는 것 자체가 무척 소중한 지점 아닐까 싶습니다. 언어와 문화의 ‘국경’을 넘어서고자 하는 의지를 지닌 학생들인 거죠. 제가 학생들과 함께 추진해가고 있는 동아시아 공생 영화제나 공정무역 카페는 그러한 학생들의 의지를 조금 더 확장시키고 심화시킨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일본에서 한국에 관심을 갖고 있는 학생들의 70~80퍼센트는 케이팝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케이팝에 대한 관심은 예전보다 그 규모가 작아졌지만 심도는 훨씬 더 깊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어를 배울 기회가 없는 고등학교 시절 독학으로 한국어를 체득한 학생들을 발견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교육 환경을 만드는 것, 곧 케이팝을 함께 즐기고 나눌 수 있는 교육 환경을 만들어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싶었죠. 지금까지 8년에 걸쳐 ‘함께 말해 봐요 한국어대회’를 개최해 왔습니다. 한류 붐이 한창이던 시절의 여세를 몰아, 다소 주춤하긴 했지만 여전히 매년 200여 명이 출전하고 500여 명이 함께하는 ‘축제’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한국어 촌극과 케이팝을 중심으로 한 축제에 한국 드라마를 사랑하는 지역 주민들이 함께 참여하여 보여주는 열정도 학생들에게 큰 자극이 되고 있습니다.

   초기에는 한국어대회 기간과 영화제 기간에 한정해서 공정무역 카페를 준비・운영해왔는데, 이를 통해 한국만이 아닌 더 넓은 세계로 시야를 넓힐 수 있게 되었죠. 그렇게 8년여를 준비한 끝에, 학교 안에 학생들의 자원봉사로 운영되는 상설 공정무역 카페가 만들어질 수 있었습니다.

   학생들의 능동성을 유발시킬 다양한 실험이 절실한 사회적 요구와 맞아떨어질 때, 대학의 위기 혹은 인문학의 위기는 넘어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출산과 고령화, 에너지 대량 소비와 원전, 경제성장률의 둔화, 글로벌화로 인한 양극화(격차) 등은 대학사회에 그 돌파구를 요청하고 있고, 다양한 인문학적 상상력과 실험을 통해 이를 돌파할 대안을 제시할 경우 대학은 물론 지역사회 역시 크게 환영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구마모토에서의 10년여의 실험은 이제 실험 단계를 거쳐 제도화에로의 진입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의지와 전망 모두 그리 어두운 편은 아닌 듯합니다.

 

 

 

노동운동에서, 일본 정착까지 
“초심을 잃지 않되 새로운 방식으로 자신의 현장을 바꾸어가기”

 

 

권명아: 젊은 시절 노동운동을 하시다가 대학원에 늦게 진학하시고, 일본으로 가서 정착을 하셨습니다. 사실 일본에 유학을 하신 것도 아니신데 일본 대학에 직업을 갖고 정착하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이 과정에 대해서 좀 알고 싶습니다.

신명직: 아마도 ‘한류’가 저를 일본에 정착시키지 않았나 싶습니다. 제가 일본에 와서 정착을 고민하던 시점이 한류가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하던 1차 시기와 일치하기 때문이죠. 2002년 한일월드컵, 2004년 <겨울연가> 현상이 저를 일본에 정착하게 만든 배경인 것 같습니다. 사실 <겨울연가> 현상은, 근대 이후 일본문화가 대륙으로 건너갔던 것과는 거꾸로 대륙 쪽의 문화가 일본으로 건너온 최초의 현상 아닐까 싶습니다. 대중문화가 정치, 외교 혹은 경제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실감했죠. 이 ‘한류’ 현상을 어떤 방향으로 몰고 가느냐 하는 것이 저에게 주어진 과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한국이 아닌 일본에서의 한류는 ‘동아시아의 공생’과 무관하지 않죠. 구마모토에 정착한 이후 한류를 동아시아의 공생과 관련된 새로운 시스템의 동력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전념해 온 것 같네요.

   제가 좋아하는 웹툰 <송곳>이 최근 드라마로 만들어져 방송되고 있더군요. 1990년대 초에 그 유효기간이 끝났다고 생각했던 노동상담소를 2010년대 브라운관에서 다시 만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습니다. 하지만 2010년대의 노동상담소는 좀 다른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대중문화와 디지털 혹은 글로벌한 로컬사회와 보다 긴밀하게 결합된 새로운 방식이 필요한 게 아닐지요. 그러고 보면 지금하고 있는 일들이 예전 그러니까 젊은 시절 스스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초심을 잃지 않되 새로운 방식으로 자신의 현장을 바꾸어 가려했던 것 같습니다.

 

 

 

뿌리내릴 지역사회로서의 구마모토 발견
한류에서 시작된 동아시아 공생의 꿈
한국어대회에서 공생 영화제로, 다시 꿈꾸는 다큐영화 제작

 

 

권명아: 처음 일본에 가셨을 때는 다큐멘터리 작업에 관심을 가지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셨을 때랑, 구마모토에 이주해서, 대학을 기반으로 이주노동과 지역사회를 고민하면서 동아시아 공생 영화제를 만들면서, 이어지면서도 달라진 지점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변화와 연속은 어떤 것들일까요? 그 변화 속에 도쿄와 구마모토라는 지역적 차이는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신명직: 제가 도쿄에 있을 때는 뿌리내릴 지역사회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구마모토라는 곳에 와서야 비로소 뿌리내릴 지역사회를 갖게 되었죠. 하지만 다큐멘터리 영상 작업에의 꿈은 아직도 유효합니다. 지금까지의 성과를 바탕으로 새로운 다큐멘터리 한 편을 만들어 보는 게, 저의 남은 대학생활 10년 동안의 꿈이기도 하죠. 동아시아 공생 영화제를 하면서 다큐멘터리 제작을 향한 제 꿈은 점점 더 커진 것 같기도 합니다. 대단한 다큐멘터리를 만들려 하기보다 제 주변의 일상을 조금씩 담아나가려 하는데요. 의미 있는 다큐멘터리가 되기 위해선 보다 의미 있는 일상을 살아가야겠죠.

 

 

 

이주노동과 동아시아 공생을 로컬에서 접목시킨다는 것의 의미
대학이 지역사회와 만나는 길목에 위치한 동아시아 공생 카페
동아시아 공생 마을과 거리 만들기, 그리고 공정무역 마르셰(시장)

 

 

권명아: 선생님의 생애사의 변화와 이른바 ‘운동 방식’의 변화가 흥미롭게연결되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요. 청년기의 노동운동, 일본 이주, 도쿄에서의 다큐멘터리 운동과 구마모토에서의 이주노동의 관점에서 동아시아 공생 평화 문화운동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생애사의 변화와 관련이 깊은 것 같습니다. 그런 의식을 하셨는지요? 이제 어떤 점에서는 ‘은퇴’를 준비하실 나이이기도 합니다. 일본사회의 뉴커머로서 이후의 삶과 지역을 연결하는 어떤 또 다른 ‘운동의 형식’을 고민하고 계신지요?

신명직: 제가 학생들과 함께 하는 공정무역 카페, 지역 생협과 함께 하는 공정무역 커피 사업은 여전히 영세한 규모를 면치 못하고 있지만, 한국의 ‘아름다운 커피’나 스페인의 ‘몬드라곤’처럼 사회에 영향력을 미칠 만큼의 규모로 성장하길 희망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점’에서 ‘선’으로 변모되어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동아시아와 규슈를 포괄하는 작지만 큰 ‘면’을 이루어가는 꿈을 늘 꾸고 있죠. 네팔이나 라오스의 커피마을뿐 아니라 구마모토를 비롯한 규슈에서의 새로운 고용-노동의 창출로 이어지길 바라고 있습니다. 기존의 ‘노동’이 아닌 새로운 ‘노동’을 향한 실험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학생들과 함께 하는 공정무역 프로젝트는 ‘이주노동’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초기 네팔 커피 생두를 수입하던 시절, 저에게 가장 큰 힘을 준 것은 한국에서 이주노동 운동을 하다 귀국한 네팔 청년들이었습니다. 네팔 현지에서 새로운 지역 만들기 운동을 하는 이들은 동아시아를 새롭게 만들어갈 중요한 동력-에이전트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실 한국의 노동 문제에서 이주노동 문제로 넘어온 것은 저의 존재와도 무관하지 않죠. 제 자신이 전문직 이주노동자이기 때문입니다. 1국의 노동 문제에서 글로벌한 노동 문제로 트랜스내셔널화했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런데 동아시아의 이주노동 문제와 오랫동안 접하면서 느끼게 된 것이지만, 이주해 온 노동자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이주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보다 중요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아시아 커피마을 사람들뿐 아니라, 유기농 콩, 혹은 유기농 면화 등을 생산하는 마을 사람들이 이주하지 않고도 자립할 수 있는 마을을 만들어가는 게 더 중요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거죠. 그런 의미에서 노동과 이주노동, 동아시아 공생 프로젝트는 어디에 방점을 찍느냐의 차이일 뿐, 별개의 분리된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종종 도쿄나 서울의 우뚝 선 대기업 건물 앞에 서게 될 경우, 주눅이 드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지금 하고 있는 구멍가게가 과연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 같은 거죠. 하여 남은 10년 동안 지금의 파이를 키우는 일에 보다 전념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동아시아 공생 마을 만들기’ 프로젝트도 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 지역사회 공정무역 단체와 함께 추진하고 있는 ‘공정무역 마르셰(시장)’, 대학 공정무역 카페를 거점으로 확장시켜 갈 ‘동아시아 공생 거리’ 만들기 사업 등이 이에 해당될 것 같네요. 지역사회와 보다 밀착한 프로젝트를 통해, 가능성을 현실로 바꾸어 갈 생각입니다. 어디까지 가능할진 모르지만 가는 데까지 가 봐야죠.

 

 

 

 

 

 

 

 

 

 

 

 

원혼과 증오와 국정화

 

 

 

 

권명아

 

 

 

 

 

 

   올해 아이를 잃고 상심에 잠겨 있던 오다기리 조가 <과자의 집>으로 복귀했다. 드라마는 “너무 무리하지 마라”는 할머니의 염려 담긴 말로 시작한다. 친구를 구하기 위해 아깝게 죽은 또 다른 친구의 장례식에서 돌아오며, 할머니는 타로에게 ‘죽음이 들러붙지 않게’ 하기 위한 작은 의례를 하고 집으로 들여보낸다.

 

 

   문명의 성격과 종교를 막론하고 인류는 ‘억울한 죽음’을 두려워했다. 이는 단지 전근대적 문화의 잔재라고 보기는 어렵다. 원혼을 달래 저세상으로 보내려는 여러 종류의 의례는 죽음에 대한 인류의 집단지성의 산물이다. 근대 ‘과학’인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도 죽음을 대하는 인류의 오래된 의례(토템과 터부)를 이론적 분석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억울한 죽음에 대한 인류의 공통적인 두려움은 이 죽음이 산 자에게 들러붙을 가능성에서 비롯되었다. 억울한 죽음은 반드시, 살아 있는 자들의 세상으로 되돌아온다. 집단적 의례로서 애도는 애초에 이 두려움에서 시작되었다.

 

 

   훗날 역사가가 2015년을 기록할 때 세월호 청문회와 혐오 선동이라는 두 항목은 빠뜨릴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2015년은 이런 역사 기록이 훗날에도 가능할지를 판가름하는 ‘역사적인 시간’이기도 했다. 세월호 사건이 재난이고 혐오 선동이 차별을 조장하는 증오 정치의 산물이기에 두 문제 사이에는 어떤 논리적 인과관계도 없다. 그러나 다른 맥락에서 볼 때 이 둘은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다. 억울한 죽음은 산 자 혹은 삶의 공간에 ‘들러붙는’ 힘이 있다. 들러붙는 힘에 있어서 증오보다 강한 정동은 거의 없다. 억울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애도를 통해 상쇄되지 못하면 죄의식을 남긴다. 역사적 사례를 살펴보면 해소되지 못한 죄의식은 희생양을 찾아 그 대상에게 ‘죄’를 덮어씌우곤 했다. 이런 희생양을 찾는 제의의 근대적 버전이 파시즘의 증오 정치이다. 억울한 죽음과 증오는 모두 ‘들러붙는 힘’과 산 자를 죽일 수도 있는 강력함을 갖고 있다.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직후, 아주 짧은 기간이지만 ‘우리 모두’ 이 억울한 죽음 앞에 공통의 두려움과 죄의식을 느꼈다. 애도에는 시간과 절차가 필요하다. 그러나 정치 공동체는 그 시간과 절차를 지키지 않았다. 아니 시간과 절차를 앞질러, 희생양을 찾기에 분주했다. 억울한 죽음을 슬퍼하는 자조차 희생양의 목록에 올랐다. 미친 듯이 희생양을 찾기 분주했던 거대 미디어와 정치집단의 행태는 애도의 회피가 증오의 강도를 높이는 전형적 사례를 제공했다. 세월호 사건과 증오 정치는 정동의 차원에서 관련이 깊다.

  

 

   애도는 그 자체로 정치적이지 않다. 다만 죽음이 삶을 사로잡지 못하도록 풀어헤치는 것이 애도의 작용이다. 그런 의미에서 애도는 삶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산 자의 의례이다. 애도에 실패한 개인이 상실에 사로잡혀 삶을 지속하기 어렵다면, 애도에 실패한 공동체는 지속가능성이 사라지고, 재생산 위기에 봉착한다. 한국 사회가 이런 재생산 위기에 봉착한 것은 이미 오래전이다. 출산 거부와 사회적 타살에 가까운 자살률의 증가는 전형적이다.

 

 

   억울한 죽음에 대한 애도를 회피하는 정치집단이 출산 거부와 자살과 같은 사회적 재생산 위기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은 그런 점에서 ‘필연적’이다. 국정화 정책이 교육을 사회적 재생산의 관점이 아니라, 증오 정치의 기반으로 만드는 시도라는 점에서 이 정치집단은 한결같다. 억울한 죽음에 대한 애도의 회피와 증오 정치와 국정화는 참으로 한결같은 문제이다. 2015년 한국은 총체적인 재생산 위기에 봉착했다. 삶과 죽음을 아우르는 재생산의 정치가 절실한 때이다.

 

 

 

 

항쟁에서 퍼레이드로 그리고 퀴어 우주로

퀴어문화축제(서울, 대구) 참관기

 

 

 

 

차가영

 

 

 

 

1. 생명과 사랑의 지속으로서 항쟁

    태초에 항쟁이 있었다. 스톤월 항쟁. 그래 그것은 항쟁이었다. 오늘날 퍼레이드가 광장과 거리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항쟁 때문이었다. 항쟁이 국가와 국민이 맞서 싸우는 것이라고 할 때, 이 항쟁은 퀴어들이 이 세계 전체와 맞서며 자신들의 생명과 그 가능성을 드러낸 스파크였다. 마치, 지구의 생명이 탄생할 때, 전기적 자극이 바이러스를 만들어낸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이 항쟁은 퍼레이드를 산출한 전기 자극이고 그리고 앞으로 등장하게 될 우주를 예비하는 것이었다. 물론 저 항쟁은 고향이 아니고, 그곳의 순간으로 굳이 돌아갈 필요가 없고 오직 퍼레이드를 누비며, 우주로 나아가는 모험이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우리는 모두 우주여행을 곧 하게 될 것이다.

    다시 시작해보자. 스톤월 항쟁은 오늘날 퍼레이드가 싸우고자 하는 것의 기초를 제공해왔다. 싸움의 자세와 기초를 알려준 것이다. 퍼레이드가 싸움의 방식으로 사랑을 선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스톤월에 자발적으로 모여든 퀴어들은 서로를 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우선은 사랑이고 그것이 바로 항의였다는 것을 즉각적으로 보여준 바 있다. 달리 말해, 퍼레이드가 광장과 거리에서 사랑을 외치면서 싸우는 것은 이로부터라고 할 수 있다. 퍼레이드는 갖은 위험을 세계의 여러 스톤월과 같은 장소에서 뛰어 넘고, 걸으며 이루어지는 사랑이다. 그 때 사랑은 지역의 이름으로 기록될 것이고 어디에서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할 것이다.

 

 

2. 배제와 혐오에 맞서며

    퀴어문화축제는 매년 6~7월 사이에 서울과 대구에서 각각의 슬로건을 걸고 개최된다. 두 축제는 성적 소수자들이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며 배제되고, 주변화되는 것에 저항하기 위한 퀴어 인권/문화/예술운동의 방법 중 하나이다. -녀라는 이분법적 성별구분, 이성애중심 사회/결혼 제도, 이분법 속에 분류되지 않는 성적 다양성을 가진 사람들을 사회구성원으로 여기지 않는 차별적인 규범에 저항한다. 두 지역의 퀴어문화축제는 이를 바탕으로 하여 퀴어가 여기에 살고 있음을 외친다. 퀴어의 존재를 가시화하여, 퀴어들이 우리의 주변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퀴어들이 존재와 다양성을 인정받으며 사회 속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법이나 제도, 인식 개선을 마련해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퀴어를 가시화하는 운동은 존재의 다양성을 인정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 배려와 제도 획득의 한 방법이다. 퀴어 인권/문화/예술운동은 평소에도 많이 일어나고 있지만, 그것이 가장 가시화되는 날이 퀴어문화축제 기간 중에 열리는 퀴어퍼레이드이다.

    운동이 사회적으로 퀴어의 존재에 대해 드러낼수록, 이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시선도 생겨나고 있지만, 그 반대에서의 안티-퀴어의 움직임도 커지고 있다. 현대의 이성애중심의 사회규범은 그 자체가 안티-퀴어적이며,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퀴어에 대한 배제와 소외를 만들어 낸다. 하지만 현재 사회에는 일상적인 배제에 대한 문제의식보다는 퀴어 인권/문화/예술 운동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활동을 하는 일부 보수적 집단의 형성에 집중하고 있다. 퀴어에 대한 혐오를 축으로 모인 이들 집단의 행동은 퀴어 인권/문화/예술 운동을 사회의 전반적인 배제에 저항하는 모습이 아닌 퀴어와 안티-퀴어 간의 대립에만 초점을 두게 한다. 이는 퀴어들이 벌이는 차별적인 성규범에의 저항을 그들만의 싸움으로 여기도록 만든다.

    2015년은 퀴어문화축제를 반대하는 안티-퀴어의 축제개최 방해가 서울에서도 대구에서도 거세어 행사 개최의 어려움을 겪었다. 특정한 집단이 에이즈 공포, 가족윤리 침해, 이성애윤리 침해를 이유로 들며 행사 개최 계획 장소를 따라다니면서 장소 선점을 방해했다. 이뿐만 아니라 축제에 참가하는 인원을 보호해야 하는 시와 구의 행정부에서도 축제 개최를 허락하지 않아서 그 어려움이 더해졌다. 이들은 교통소통 저해’, ‘중립이라는 말을 내세우며 행사 개최를 불허했다. 퀴어에게 행사를 개최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면, 안티-퀴어에게도 장소를 제공해야 한다는 이유를 대며 행사를 허락하지 않았다. 때문에 안티-퀴어와 대치하고, 행정부에 항의하는 등 오랜 기간 투쟁을 벌인 끝에 서울과 대구는 퀴어문화축제를 개최할 수 있었다. 이 기다림을 보상받기라도 하려는 듯 퀴어문화축제 기간 중 있었던 두 지역의 퀴어퍼레이드는 서울 3만여명, 대구 800여명이라는 퍼레이드 역사상 최고의 참가인원을 기록했다. [각주:1]

    나는 2015년의 퀴어문화축제 기간 중 서울과 대구의 퀴어퍼레이드에 다녀왔다. 서울의 퀴어퍼레이드는 세 번째 참가였고, 대구 퀴어퍼레이드는 첫 참가였다. 두 퀴어문화축제의 개최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SNS를 통해 전해들을 수밖에 없었던 지역의 퀴어이론 연구자인 나에게 2015년 서울과 대구의 퀴어퍼레이드에 참가하기까지의 시간은 유달리 길었고, 불안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수년간 지속적으로 이어지며 점점 더 커지는 운동의 힘이 혐오와 불허로 인해 사그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덮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랜 기간의 투쟁 끝에 얻어낸 두 지역의 퍼레이드에 참가하는 것이 더 의미 있고, 퍼레이드 현장의 열기가 힘있게 느껴졌다.

 

 

 

 

3. 광장의 스펙터클과 게토- 보호받는 것과 저항의 사이에서

    올해 제16회를 맞은 서울퀴어문화축제는 사랑하라! 저항하라! QUEER REVOLUTION!’이라는 슬로건을 걸고 69일부터 28일까지 열렸다. 서울 퀴어문화축제는 연초에는 613()~21()8일간의 일정으로 계획되어있었다. 그러나 안티-퀴어 세력(나라사랑·자녀사랑운동연대, 바른성문화국민연합, 건강한사회모임 등)의 집회신고 방해와 서울시청 및 대학로 관할 경찰서의 집회신고 거부, 남부경찰서의 집회신청 희망 단체 일주일동안 밤낮 없는 줄세우기에 의해, 축제 개최를 결정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러한 상황에 의해 퀴어퍼레이드 장소는 서울시청광장에서, 대학로로 개최 계획이 변경되었다가, 다시 서울시청광장에서 확정되는 과정을 겪었다. 이에 따른 영향으로 축제는 개막식, 퍼레이드, 파티가 하루에 진행되는 이전까지의 방식과는 달리 진행되었다. 개막식(69), 파티(613), 퍼레이드(628)가 다른 날로 나뉘어 진행되었고, 퀴어 영화제(618~21)가 그 사이에 치러지는 약 3주간의 일정으로 변경되었다.

    퍼레이드 당일 현장의 분위기는 폭발적인 축제의 모습이었다. 올해 서울 퀴어퍼레이드에 참가하면서 나는 그 입구에서부터 놀랐다. 거리의 운동이라고 생각했던 퀴어퍼레이드가 잔디밭이 깔린 곳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광장을 두르며 가득 메우고 있던 83개의 행사부스들과 이를 살펴보지도 못하게 꽉 차있던 사람들의 모습은 압도적이었다. 넓은 시청광장이 꽉 차게 느껴질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장 놀랐던 것은 퍼레이드 행렬이 출발하기 전에 본 어떤 할머니였다. 가족들과 함께 온 것으로 보이는 할머니는 서울 퀴어퍼레이드 슬로건이 적힌 부채를 들고 행렬 안에 있었다. 그 할머니는 세 번의 퍼레이드 참가 동안 퍼레이드 행렬 속에서 처음 본 할머니 참가자였다. 점점 그 규모가 커지고 있지만, 몇 개월 간 서울 퀴어퍼레이드 준비 소식을 SNS를 통해 전해보면서 이번에는 절대 이루어질 수 없을 거라 의심했던 것들이 현장에서 모두 이루어지고 있었다. 사람으로 꽉 찬 광장, 배로 늘어난 참가 인원, 그 속에 함께 있던 퀴어들과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 이들이 합쳐져 만들어낸 축제의 형상은 일상 속에서 행해지는 안티-퀴어적 배제에서 벗어나 자긍심에 가득 찬 퀴어들의 웃는 얼굴을 만들어냈다. 마치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들처럼 보였다. 퍼레이드는 자긍심을 가지고 모인 이들의 행복한 춤과 노래를 통해서 채워졌고, 서울 길거리에 그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퍼레이드 행렬 속에서 함께 걸으면서, 나는 자긍심 행진을 함께 하고 있다는 행복감과 반대로 어떤 찝찝함을 느꼈다. 퀴어들이 이렇게 가시성을 얻고 당당히 사회 속으로 나올 수 있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에 건물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노랫소리, 광장을 둘러싸고 있던 철펜스, 경찰들의 모습이 겹쳐졌기 때문이다. 이번 서울의 퀴어퍼레이드는 퍼레이드의 크기도, 안티-퀴어 단체의 혐오표현도 커져서 경찰들의 보호가 눈에 보일만큼 가까이에서 이루어졌다. 경찰들은 안티-퀴어들이 침범하여 행사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광장을 둘러싸는 철펜스를 둘러 그 앞에 서있었고,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것은 퍼레이드 행렬을 혐오에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내 눈에는 보호보다는 경찰의 보호막에 갇힌 것처럼 보였다. 16년의 역사 속에서 지속되어온 퀴어퍼레이드가 만들어낸 참가자들 간의 결속성과 연대성을 이용해서 이들을 다시 광장이라는 게토 속에 가둔 것 같았다. 일 년에 한번 서울에서 지역의 경계와 퀴어 배제 사회의 경계를 넘어 탁 트인 광장에서 만났지만, 퀴어들을 맞이한 것은 또 다시 이들을 가두는 경계였던 것이다. 그리운 고향에서 퀴어들을 맞이한 것은 우리 모두 함께 하자는 연대가 아니라, 철펜스와 경찰들이 서있는 경계 안에서만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라는 경계였다. 이 경계는 퀴어들이 가득한 거리에 울려퍼지는 음악소리가 건물에 튕겨 다시 행렬 속으로 돌아오게 했다. 그리고 광장에서 옷을 벗고 다니는 모습, 성기모양의 쿠키와 부채가 보이는 것, 여성의 성기를 직접 지칭하는 말들을 구경하며 이러한 모습 때문에 퀴어는 인정받을 수 없다’, ‘동성애는 지지하지만 저런 건 싫다’, ‘왜 자꾸 나와서 눈에 띠려고 하는지 모르겠다와 같은 말을 통해 퀴어퍼레이드를 소비하는 스펙터클을 만들어냈다.

    서울의 퀴어퍼레이드는 전국에서 모인 퀴어들의 엄청난 수와 그리고 그에 맞춰 풍성해진 행사구성을 보여주었다. 이를 통해 퀴어퍼레이드가 앞으로도 퀴어의 인권/문화/예술 운동의 기반을 다지고, 그 운동의 하나로써 앞으로도 계속 운동을 해나갈 것을 증명해보였다. 그러나 오랜 기간 서울에 집중된 퍼레이드는 퀴어들의 전국적인 움직임을 커다란 광장에 집합시켜 그 속에 가두고 배제를 지속하려는 안티-퀴어의 모습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따라서 서울의 퀴어퍼레이드는 이제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경계를 넘어 퀴어 인권/문화/예술 운동의 또 다른 모습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발견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나는 새로운 운동의 가능성을 75일에 열린 대구 퀴어퍼레이드에서 찾아보고자 했다.

 

 

 

 

4. 광장의 패러디와 저항의 가능성

    올해 처음 참가하였던 대구의 퀴어퍼레이드는 지역의 유일한 퀴어문화축제이다. 따라서 퍼레이드 참가는 서울과 얼마나 다르고 또 같으며, 어떤 특성을 가지고 퍼레이드가 진행되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기회였다. 대구 퀴어문화축제는 올해로 제7회를 맞았다. 대구 퀴어문화축제는 원래 627일 퍼레이드를 진행하기로 되어있었다. 하지만 안티-퀴어 세력의 방해로 인한 서울퀴어퍼레이드의 일정 변경이 대구에도 영향을 미쳤다. 대구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는 서울의 퀴어퍼레이드 일정과 맞추기 위하여 대구퀴어퍼레이드 일정을 변경하고자 했다. 그러나 변경과정에서 대구중구청의 교통소통을 저해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인한 집회신청 거부와 동성로 야외무대시설의 사용을 불허 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에 저항하며 조직위원회는 집회를 열었고, 이후 대구지방법원의 퍼레이드 집회허가 판결로 퍼레이드가 75()로 변경되면서 개최 확정되었다. 따라서 제7회 대구 퀴어문화축제는 사진전(71~10), 퍼레이드(75), 영화제(711~12), 연극제(717~19)로 구성되었고, 71()~19일()까지 약 3주간 진행되었다.

    당일 대구에서 본 모습은, 서울 퀴어퍼레이드 퍼레이드에서 대구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장이 외쳤던 서울에서 전반전! 대구에서 후반전!”의 모습과는 달랐다. “서울에서 전반전! 대구에서 후반전!”이라는 말은 서울의 운동 열기를 대구에서도 이어나가 운동을 더 폭발시키자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이를 통해 지역에서도 퀴어 인권/문화/예술 운동이 촉발될 수 있는 가능성을 마련하자는 뜻이 담겨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대구 퀴어퍼레이드에서 본 것은 서울의 패러디였다. 서울에서 마주한 퀴어들의 게토를 떠나 대구에서 새로운 운동을 보고자 했다. 하지만, 대구 또한 서울과 같은 퀴어들의 게토였다.

    대구의 퍼레이드 모습이 서울의 퀴어퍼레이드의 패러디로 나타난 것은, 한국의 서울 중심 사회구조의 현실이 지역의 퀴어 인권/문화/예술 운동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역에 나타나는 운동, 문화, 예술에 대한 불모성은 지역 퀴어의 인권 감수성 부족을 야기하고 있었고 이것이 운동에도 영향을 미치는 듯 했다. 이는 대구라는 지역성을 살리며 운동을 해나갈 수 있는 방법론 마련을 막는 것이었다. 때문에 지역의 정체성 마련이 부족한 대구에서 퍼레이드를 하려면 서울의 모습을 모방할 수밖에 없었다. 퀴어 인권/문화/예술 운동의 커뮤니티가 적은 대구는 부스 행사 구성이 적었다. 대구에서 활동하고 있는 무지개인권연대’, ‘대소인(대구 경북 성소수자 인권연대)’, ‘청소년교육문화공동체 반딧불이등이 부스를 마련하고 있었지만, 부스 행사의 대부분이 서울에서도 보았던 것이었다. 대부분 서울에서 주로 활동을 하고 있는 단체들이었고, 무대행사 또한 절반 정도가 서울을 주 무대로 하는 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행진의 방식 또한 마찬가지였다.

    재미있는 것은 퀴어 퍼레이드를 보호하고자 했던 경찰들의 모습, 안티-퀴어 집단이 혐오를 외치는 모습 또한 서울의 패러디였다는 것이다. 경찰들은 동성로 야외무대시설, 부스 행사 장소 근처에 철펜스를 치고, 그 앞에 서있었다. 행진을 할 때도 서울에서와 같이 줄지어 손을 잡고 행렬과 함께 걸었다. 안티-퀴어 집단은 서울에서 보았던 피켓을 그대로 사용했다. 그들은 박원순 타도하자’, ‘박원순 OUT’, ‘동성애 OUT' 등과 같은 피켓을 재사용하였고, 퍼레이드의 무대행사가 열리는 반대편에 서울과 똑같이 무대를 설치하는 모습 또한 보여주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장소가 좁아서 그들이 보내는 혐오의 말들을 좀 더 가까이에서 들었다는 것뿐이었다.

    대구의 퀴어문화축제는 서울이 아닌 지역에서 일어나는 유일한 퀴어문화축제로서 다른 지역에서도 축제를 통한 항쟁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동시에 그 모습 뒤에는 운동, 보호, 혐오의 프레임이 모두 서울이라는 지역을 모방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는 현재 퀴어 인권/문화/예술 운동에서 짚고 가야할 문제점이 무엇인지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점은 지역이라는 공간에서 서울을 모방하지 않고, 지역성을 토대로 하며 정체성을 가지는 운동방법을 발명해야 할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대구에서의 퀴어퍼레이드 경험은 현재 지역에 만들어져 있는 퀴어 커뮤니티는 어떤 것이 있으며, 이를 통해 앞으로 퀴어 인권/문화/예술 운동이 어떤 방향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살펴보게 하였다.

 

 

 

5. 항쟁에서 퍼레이드로 그리고 퀴어 우주로

    지금까지 퀴어 퍼레이드는 서울이나 혹은 대구에서 퀴어인 것이 가능한 찰나의 공간을 만드는 것을 통해 이어져왔다. 이는 퀴어퍼레이드의 현장을 가시화하여 공간의 스펙터클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매년 전국의 퀴어들이 퍼레이드를 하기 위해 한곳으로 모이며 만들어낸 공간의 스펙터클은, 운동에 있어서의 퀴어 게토를 형성하게 되었다. 게토의 형성은 퀴어들이 한 공간에 모이는 것을 통해, 퀴어의 삶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위로와 위안을 얻게 한다. 그러나 게토 안에서 얻는 위로와 위안은 투쟁의 모습을 지우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이는 퀴어들이 만들어낸 퍼레이드라는 항쟁을 현재 사회의 고정적이고 차별적인 성규범에 반대하는 우리 모두의 투쟁이 아니라 그들의 투쟁으로 보이게 한다. ‘그들의 투쟁 모습은 퀴어들이 사회에 대항하는 투쟁의 이유를 퀴어들만의 인권을 가지려 하는 투쟁의 이름으로 바꾼다. 이는 점점 안티-퀴어의 모습이 사회에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문제가 아니라 특정 보수집단과 퀴어들 간의 싸움인 것처럼 가시화되게 한다. 여기에 더해 보호를 이유로 퀴어를 둘러싼 펜스를 더 단단하게 치고, 경찰들이 더 가까이에서 퀴어들을 따라다니게 할 것이다. 점점 퀴어가 지금-여기 살고 있다는 것은 사라지고, 게토의 선명함이 퀴어들을 계속 괴롭힐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퀴어 인권/문화/예술 운동은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 것일까? 한곳으로만 향했던 퀴어들의 이동 선이 게토를 선명하게 하는 것이라면, 이 선의 방향을 바꾸는 것으로 더 많은 운동을 만들어낼 수 있지는 않을까? 나는 앞으로 만들어갈 운동의 방식으로, 서울과 대구가 만들어낸 퀴어 항쟁의 역사들을 하나의 연대점으로 보며 다른 연대의 점들을 찍어 가보려 한다.

    현재 지역은 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인권 모임이 생겨나고 있다. 경북대 성소수자 인권 모임인 ‘Kivans’[각주:2]2000년도부터 결성되어 가장 오래 활동하고 있고, 그 이후 포항공대의 ‘LinQ’[각주:3], 부산의 부산대학교 성소수자 동아리 ‘QIP(Queer in PNU)’[각주:4], 울산대학교와 울산과학기술대가 연합하여 만든 성소수자 커뮤니티 ‘THIS WAY’[각주:5], 전남대학교 성소수자 동아리 라잇온미[각주:6] 등이 결성되어 현재 활동 중이다. ‘LinQ’라잇온미는 소속 대학의 학생을 중심으로 회원을 형성하고 있다. ‘Kivans’, ‘QIP’, ‘THIS WAY’는 경북권, 경남권, 울산권에 있는 성소수자 모두가 회원으로 가입가능하다. 이 동아리의 회원수는 늘어가고 있는 추세이며, 이들은 동아리 내 활동뿐만 아니라 각 지역 동아리들끼리의 지속적인 만남도 가지려 하고 있다. ‘대학성소수자모임연대(QUV-Queer university)’에의 가입을 통해 서울의 성소수자 인권 동아리와도 연대하려 한다. ‘QIP’는 서울의 성소수자 부모모임과의 연대를 통해 부산에서 성소수자 부모모임을 추진하고 있다. 이들 동아리는 지역 퀴어의 인권/문화/예술 운동의 장을 마련하려는 움직임을 지속적으로 보이고 있고, 앞으로 그 수는 점점 늘어갈 것으로 보인다.

    대학에서 결성된 성소수자 인권 동아리는 대학이라는 공식적으로 승인된 시스템에 새로운 프레임을 도입하게할 것이다. 운동에 있어서 불모성을 가진 지역이라는 공간에서 퀴어들이 공식적인 시스템과의 만난 것은, 운동이 없는 절멸의 자리에서 새로운 결속을 만들어내려는 움직임으로 보아야 한다.[각주:7]그것은 이미 있는 것으로부터 변용하고 전유하여 리듬과 언어를 재활성화하는 것[각주:8]에 가깝다. 지역 대학의 성소수자 인권 동아리는 서울과 대구에서 이미 시작되어 온 운동의 역사를 지역에서 변용하고 전유하여 지금-여기에 살고 있는 퀴어들의 언어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오랜 시간 지역에 자리 잡고 있는 대학을 전유하여 퀴어들이 가시성을 획득하고, 이들의 결속을 용이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지역 속에서 이루어지는 안티-퀴어적 배제에 저항하고, 퀴어들이 존재와 다양성을 인정받으며 사회 속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규범을 마련해가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움직임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지역의 퀴어 인권/문화/예술 운동은 변용과 전유를 통해 정체성을 형성하고 새로운 결속의 연대로 항쟁의 점들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스톤월 항쟁이 세계를 여행하며 서울과 대구의 퀴어문화축제에 닿았다. 서울과 대구의 퀴어문화축제는 광장을 만들며 운동의 연대점을 만들어내었다. 그 광장을 누비던 전국의 퀴어들은 자신들이 있는 지금-여기에 모여 새로운 결속의 점들을 만들어내려 하고 있다. 이 점들이 모여 별자리가 될 것이고, 또 다른 별들의 점을 만들어 이어갈 것이다. 이는 퀴어들이 그들이 아니라 우리이며, 이들이 거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여기에도 있음을 증명하게 될 것이다. 퀴어들의 항쟁은 연대를 통해 혐오가 아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우주여행을 곧 하게 될 것이다.

 

 

 

 

 

※ 이 글은 『오늘의 문예비평』 제99호 〈포커스〉란에 실렸습니다.

 

 

 

  1. 1. 2000년 50명의 참가로 시작되었던 서울의 퀴어퍼레이드는 2001년 250여명으로 늘어나기 시작하여 2011년 1천여명, 2012년 1천5백여명, 2013년 약 1만여명, 2014년 약 2만여명으로 참가자 수가 급증했다.(http://www.kqcf.org 참조) 2009년부터 시작한 대구 퀴어퍼레이드 또한 처음에는 5명으로 첫 퍼레이드를 진행하였지만, 2011년에는 40여명, 2014년에는 600여명으로 참가자 수가 점점 증가하고 있다.(http://queer.or.kr 참조) [본문으로]
  2. 2. 경북대학교 ‘Kivans’는 2000년 9월 22일에 결성되어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는 경북대학교 학생들의 온/오프라인 이반인권모임이다. 대구, 경북지역에서 가장 꾸준하고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대학생 모임이다. 경북대학교에만 제한을 두지 않고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된 퀴어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과 퀴어를 이해하고 친구가 되길 원하는 ‘일반’ 또한 회원으로 받고 있다. 정기 모임과 채팅, 이벤트, 스터디 등으로 회원들끼리의 친목을 도모하고 학교 및 사회생활을 하는 데 활력소가 되기 위해 노력중이며 대외적인 동성애자 인권을 위한 활동 및 에이즈 예방 활동 등으로 그 활동 범위도 넓혀가고 있다. (http://kivans.kr/ 참조) [본문으로]
  3. 3. 포항공대 성소수자 동아리 ‘LinQ’는 2012년 2월 7일 결성된 동아리이다. ‘LinQ’라는 이름은 세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 번째, ‘LinQ Is Not Queer’이라는 뜻이다. 이는 Queer라는 단어가 가진 ‘이상한, 괴이한’의 뜻을 살린 것으로, 성소수자로서 부정적 시선을 극복하고 자신감을 가질 수 있기를 희망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두 번째는, ‘LinQ [liŋkjuː] ≒ Link [liŋk]’로, 학내 구성원과 교류의 기회를 만들고, 소통을 통한 변화를 추구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세 번째, ‘邻Q. 이웃(린) Queer’로서의 ‘LinQ’는 퀴어가 지금 여기 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성적 지향, 성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성찰’을 통해서 ‘진솔하며 건전한 인간관계를 모색’하고, ‘발전적이며 행복한 삶에 대한 탐색과 지향’으로 ‘일상에 개개인의 '다름'을 녹여낼 수 있는 배려와 존중의 문화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LinQ’는 세미나 개최, 회원 및 학내 구성원 인터뷰, 회원들의 생애 기록 활동들을 하고 있으며, 이 기록들을 담은 두 권의 간행물 『HELLO WORLD』(2014년 5월 20일 발간), 『IMPONDERABILIA』(2015년 5월 20일 발간)을 발간하였다. (https://sites.google.com/site/postechlinq/home 참조) [본문으로]
  4. 4. 2013년 10월 결성된 'QIP(Queer in PNU)'는 부산 및 경남 지역에 거주하는 성소수자를 위한 인권 동아리이다. ‘QIP’는 대자보 부착, 학술 세미나 등 학내 성소수자 인권 운동을 기반으로 학내 구성원들에게 지속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또한 강연, 파티, 영화제 등의 행사를 통해서 성소수자 학우들과 교류하려고 한다. 또한 이러한 활동을 통해 학내 구성원뿐만 아니라 경남지역 성소수자와도 교류하려 한다. ‘QIP’는 9월에 동아리 회원들의 다양한 말이 기록된 간행물 『e²』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QIP’ 간행물 『e²』 참조) [본문으로]
  5. 5. 울산대학교와 울산과학기술대학교가 연합하여 만든 퀴어 동아리 'THIS WAY'는 2015년 6월에 결성되었다. ‘THIS WAY’는 울산뿐만 아니라 경상권 지역에 사는 퀴어라면 모두 가입 가능하다. ‘THISWAY’는 친목 도모와 인권보호 중심으로 세미나, 개강총회, 타학교와의 소통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 ‘대학성소수자모임연대(QUV-Queer university)’에 가입한 ‘THIS WAY’는 다른 지역 동아리간의 교류를 도모하는 활동도 하고자 한다. (이가영, <우리 대학에도 뜬 무지개>, 울산대학교 신문, 2015.10.07. 참조 http://media.ulsan.ac.kr/newspaper/university/university/Default.aspx?crud=V&idx=4388&type=N&mode=W&page=2) [본문으로]
  6. 6. 전남대학교 성소수자 동아리 ‘라잇온미(Lights on me)’는 2014년 10월 13일 결성되었다. ‘라잇온미’라는 이름은 퀴어 영화 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전남대학교 학내의 성소수자들만이 가입 가능하며, 이성애자 및 타대학 구성원의 가입은 허용하지 않고 있다. 전남대학교 내의 성소수자들이 모여 서로의 고민과 삶을 나누고 토론하며 서로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동아리가 되고자 하는 것이 목표이다.(http://koreaqueer.tistory.com/16 , http://cafe.naver.com/klccangminlove/1322596 참조) [본문으로]
  7. 7. 인용은 권명아, 『무한히 정치적인 외로움』, 갈무리, 2012, 7쪽 참조. [본문으로]
  8. 8. 「인문장치를 ‘발명’하자!-제1회 좌담회 <흐름의 재구축과 역장치적 아포리아>」, 『문화/과학』, 2015년 여름호, 382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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