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모임 아프꼼이 동아대학교 문화콘텐츠연구소, 인문평론연구회, 동아시아여성문학 연구회와 함께 <신냉전 질서와 증오정치의 역사 및 혐오 발화 비교연구 국제 심포지엄>을 개최합니다.

 

※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내용과 첨부 파일을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신냉전 질서와 증오정치의 역사 및 혐오 발화 비교연구 국제 심포지엄>

<新冷戦秩序政治歴史, およびトスピ比較研究国際シンポジウ>

International Symposium on the New Cold-War Order, History of the Politics of Hatred, and Comparative Studies of Hate Speeches

 


 

 

 

 

 

시위와 '국제' 세습 권력

 

 

권명아

 

 

 

 

 

 

 

    11월14일 ‘민중 총궐기’ 이후, 시민들은 시위를 둘러싼 공방전과 과잉 진압으로 인한 치명적 인명 피해 사건을 접하며 ‘과거의 망령’과 다시 대면하고 있다. 오랜 군사독재의 역사 속에서 시위는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대중적 저항의 한 형식이었다. 한국의 근현대사는 시위의 역사 없이 기술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가까운 일본과 비교해 봐도 한국 사회에서 시위는 익숙한 ‘반복적 현상’으로 치부되는 경향이 있다. 민중 총궐기 이후의 상황을 보아도 시위를 평가하는 해석 방식은 다소 반복적이다. 시위가 끝난 이후 이에 대해 의미 부여를 하고, 시위에서 제안된 쟁점을 확산해나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해석 방식을 만들어야 한다.

 

 

   대형 미디어를 매개로 이어지던 ‘폭력 시위’ 매도나 원색적인 이념 몰이는 이제 테러라는 쟁점까지 이어 나가고 있다. 이런 반지성적 선전에 대항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해석이라는 지적 작업이다. 시위란 하나의 의사 표현 행위이기에 해석과 의미 부여를 통해, 단지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계속 재생산되는 의미 작용이 된다. 일본의 역사학자인 오구마 에이지는 최근 일본 사회에서 발생한 시위를 기록하고 재구성한 <수상관저 앞에서>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였다. 영화 작업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역사학자이지만 역사 자료를 기록하고 해석하듯이 시위를 또 다른 역사 자료로서 기록하고 해석했다. 이런 해석을 통해 시위는 익숙한 기정사실이 아니라, 읽고 해석하고 소통하는 상호작용이 된다. 이 상호작용이야말로 민주주의적 과정 그 자체이다.

 

 

   국제적 테러의 위협을 국내의 치안 강화를 위해 활용하는 것은 어쩌면 국제적 현상이다. 그러나 ‘민중 총궐기’라는 조금은 오래된 이름의 이 시위가 국제적 맥락에 이어지는 것은 전혀 다른 지점이다. ‘한국의 시위와 아시아에서의 최근 몇 년간의 저항’이라는 영문 비평에서 대만(타이완)의 젊은 문화연구자인 추치신은 한국의 민중 총궐기를 홍콩, 대만, 일본과 비교하고, 공통성을 추출한다. 추치신은 먼저 홍콩의 ‘우산혁명’과 대만에서 2014년 일어난 시위가 모두 “교과서 개정에 대한 항의”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또 한국, 대만, 홍콩, 일본에서 ‘과거를 왜곡하는 교과서 개정’이 동시적으로 몇 년에 걸쳐 나타난 것은 이 지역에서 시차를 두고 ‘오래된 세습 정치권력이 재등장’하게 된 결과라고 분석한다.

 

 

   약간의 시차를 두고 대만, 한국, 일본은 모두 ‘오래된 세습 정치권력’이 다시 돌아와서, 이 세습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한 ‘역사 바꾸기’ 작업을 추진하는 유사한 길을 걸어가고 있다. 그런 점에서 서로 달라 보이는 대만, 홍콩, 일본, 한국에서의 시위는 ‘오래된 세습 권력의 재등장’과 이로 인한 아시아 지역 민주주의의 위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해석을 통해 볼 때 결코 ‘민중 총궐기’는 익숙한 반복으로 치부될 수 없다. 오히려 이런 익숙함의 감각이 해석을 위한 자리를 가려버린다. 국제적 맥락에서 민중 총궐기는 테러보다는 아시아 지역에서 ‘오래된 세습 정치권력이 재등장’한 신냉전 질서와 밀접히 연루되어 있다.

 

 

   탈냉전도 민주주의도 채 이룩하지 못하고, 다시금 미국과 중국 중심의 신냉전 질서로 급속하게 재편되는 세계 체제 속에서 아시아 지역의 민주주의는 후퇴를 거듭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후퇴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의 의문과 저항이 시차를 두고 홍콩, 대만, 일본, 한국에서 차례차례 대규모 시위로 나타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민중 총궐기야말로 국제적 문제이다. 시위는 끝났지만, 해석은 이제 시작되어야 한다.

 

 

 

 


잡고 놓음 사이에 있는 눈


정선욱(래인커머)


   어느 날 나는 친구에게 일본여행으로 오키나와가 어떻겠냐는 말을 들었다. 그 친구와 나는 항상 해외여행에 대한 로망을 이야기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했다. 친구가 보여준 사진에 등장한 오키나와는 하늘이 새파랗고 길쭉길쭉한 나무가 자라는 해변이었다. 따뜻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항상 둘이서 상상하던 휴양지 그 자체의 모습이었다. 사진 속 사람들의 표정은 행복해보였고 신나있었다. 그 때 동시에 내 가방에는 오키나와의 역사와 관련된 글이 들어있었다. 교정을 위해서 매일 들고 다니던 종이뭉치였다. 그 안의 풍경은 흑백사진처럼 느껴졌고, 오래 전 부터 계속되어온 무게들이 느껴지는 글이었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계속해서 차별받았고 여전히 차별받고 있었다. 항상 논외가 되어온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곳이었다. 


   친구와 아름다운 오키나와의 사진을 보는 그 테이블 밑에 가슴아픈 오키나와의 글이 담긴 가방이 있었다. 그 층을 느꼈을 때 나는 어떤 것이 내 안에서의 오키나와였을까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나는 어떤 오키나와를 생각하면서 오키나와를 가게 될까 생각하니 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른 것들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많은 것들에 대해서 나는 쉽게 정의내리거나 판단하거나 할 수 없다. 글을 읽거나 사진을 보기 전까지 내 머릿속의 오키나와는 일본의 어떤 섬이었을 뿐이었다.


   나는 살아가면서 많은 것들을 선택하지만 어떤 것을 선택했는지도 모르고 선택하기도 한다. 매일같이 전기를 쓰지만 그것이 원자력발전을 통해 생산되는 전기라는 것을 모르고, 아무 생각없이 돈을 벌고 소비하지만 그 돈이 결국 어디로 향하는지 모른다. 물론 정말 모르는 것이 아니라 모른척하고 사용하는 것이다.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래서 불편한 마음이 들지만 그 뿐이다. 쓰지않고서 사는 삶은 감히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림에서의 눈들은 각자의 손들을 다 보고있다. 보아서 알고있다. 하지만 그 눈은 하나가 아니고 여럿이다. 어떤 눈이 어떤 손을 움직이게 하는지는 알 수 없다. 손들은 많은 것들 앞에서 머뭇거린다. 어떤 손들은 금방이라도 잡아챌 듯 손을 벌리고 있고, 어떤 손은 튕겨내기라도 할 듯이 손가락을 웅크리고 있다. 어떤 손은 손안에 소중하게 놓고 있기도 하고, 어떤 손은 손도 대지 않으려고 하고있다. 그 잡음과 놓음의 사이를 명확히 가로지르는 선이나 기준은 없다. 절실히 잡으려 하다가도 맥없이 놓아 버리기도 하고, 사실 이 손들이 잡으려는 것인지 놓으려는 것인지 알 수 없기도 하다. 그 중간에는 여러 눈들이 있을 뿐이다. 한 손을 뻗을 때 어떤 눈은 눈을 감기도하고, 어떤 눈은 또렷이 뜨고 있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손이 한 일을 모든 눈이 눈을 또렷이 뜨고 지켜보거나 모두 눈을 감아줄 일은 없을 것 같다. 그저 자꾸 잡아보고 자꾸 놓아보고 해서 놓고 싶을 때 놓고 잡고 싶을 때 잡는 것이 틀린일이 되지않는 눈이 되면 좋겠다. 나는 생각만 하고 있어서 이렇게 눈 속의 눈과 손이 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결국 눈 안에서의 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이 눈 아래 목과 어깨가 붙어 있을까. 아래에 손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긴 한 걸까. 그 손은 뭔가를 쥐거나 놓을 수 있는 힘줄을 가지고 있을까. 그 불확실함이 눈들과 손을 더 방황하게 하는 것 일지도 모르겠다. 눈을 더 굴리고 손을 더 뻗어서 어깨에 붙어있을 손을 찾을 수 있기를. 또한 모든 눈들이 같은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살아가는 방법들도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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