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의 말 :

<공간힘>이라는 대안공간을 이끌어오면서 오랜시간동안 부산 문화예술 지평을 넓히는 데 애를 써오고 있는 미술평론가 김만석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후기입니다. 10월 26일 저녁 <공간힘>에서 있었던 오용석 작가의 강좌와 10월 27일 저녁 <아프콤 월례발표회>에 공통적으로 흐르고 있던 예술적 표현과 발언의 정치적 의미와 두 모임 사이에 공명하고 있는 교류의 에너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좌측 : 박수지 발표자 / 우측: 양창아 토론자

 

 

한국미술사에서 퀴어의 위치는 여전히 주변적 경향성이다. 예술에 있어서 퀴어의 범주나 개념 역시 역사적 맥락에 따라 변화하고 있고 이들의 역사와 실천이 탐구되거나 논의된 것도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1990년대 이후 한국미술에서 퀴어 문제는 미술적 지형에서 새로운 흐름이며 도전적인 주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주제는 논쟁적이고 아직 구성되지 않은 것으로서 펼쳐져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10 26일 목요일 저녁 7<공간힘>에서 오용석 작가의 강좌가 진행되었다. 강좌의 제목은 젠더를 넘어서’. 27일 금요일 저녁 7<아프콤 월례 발표회>(부산컨텐츠코리아랩)에서는 박수지의 ‘1990년대 이후 한국 현대미술의 퀴어-정치가 발표되었다. 이틀 간 밤마다 퀴어에 관한 이야기 혹은 퀴어로 예술하기와 살기 그리고 연구하기가 이루어졌다. 참여자들은 스무 명 내외. 이 작고 소소한 자리야 말로 퀴어를 둘러싸고 앉는 것도 쉽지 않다는 의미일지 모른다. 그래서 참석자들은 귀하고 귀하다. 두 번의 밤과 두 번의 공연. 퀴어가 스스로를 다른 방식으로 상연하고 연출하고 연기하는 자리라면, 이 두 번의 밤과 공연은 참석자들을 흔들고 요동치게 만드는 자리이고 그 순간을 나눈 경험은 무엇으로도 해소되지 않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이틀의 밤은 모두 무대에서 진행되었다는 것, 그래서 우리가 공연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할 것이다.

 

제니 리빙스턴, <파리 이즈 버닝Paris Is Burning (1990)>의 한 장면

 

첫 번째 밤(26). 오용석은 레나타 로렌츠의 <Queer Art : A  Freak Theory>에서 제시된 퀴어 이론과 미학을 설명했다. 이 책의 저자가 갖는 문제의식은 기본적으로 1990년대 이른 바 에이즈 위기라는 상황에서 게이해방전선의 예술적 싸움과 스펙트럼을 보여준다고 했다. 논의의 출발점에서 마돈나의 뮤직비디오에서 나타난 보그’, ‘보깅을 예로 들면서, 무대 위에서 공연자들이 1980년대 흑인 커뮤니티에서 이루어진 실천들을 차용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긴 장식이 달린 모자와 화려한 깃털로 이루어진 의상들을 <파리 이즈 버닝>이라는 흑인 퀴어 공동체를 다룬 다큐멘터리와 교차해서 보여줌으로써, <보깅>, <보그>가 주류 문화 속에 어떻게 치환/차용되는지를 감각하도록 만들었다. <보그><보깅>은 흔히 ‘DRAG’과 같은 뉘앙스로 활용되는 것인데, 의상을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변용하는 방법인 드랙이라는 전략은 계급, 계층, 인종, 젠더를 무대에 올려 그것의 경계가 분명한 것이 아님을 드러내는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강연자가 보내준 요지서에 따르면 레나타 로렌츠가 1990년대 이후 퀴어 예술을 세 가지 층위로 나누어 이해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저자가 내세우는 관점은 프릭드랙이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프릭은 프릭쇼와 같은 대목에서도 알 수 있듯, 가정된 정상성의 범주를 벗어난 존재들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저자가 퀴어를 급진화하기 위해 차용한 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퀴어를 비정상으로 규정하는 지배적 시선과 논리를 급진적으로 전유해 퀴어의 특이성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프릭은 역사적 유산들을 기괴한 것으로 그래서 퀴어로 전유함으로써, 과거를 (몸으로) 다시 쓰는 일을 중요한 실천으로 삼은 예술들을 대상으로 한다. 드랙은 단순히 의상을 입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몸을 재구성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동시에 드랙은 이러한 규범들, 예컨대 양성체제, 백인임, 비장애인임, 그리고 이성애 규범성에 대한 거리를 생산하는 일련의 효과적인, 수고로운, 한편으론 친숙하고 한편으론 공격적인 방법론들을 조직하는 한 방식이다.”

 

 

이 두 조건을 통해 레나타 로렌츠는 퀴어 예술을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 설명한다. 1)급진적 드랙 2)전환시간적 드랙 3)추상적 드랙. 이 세 범주의 논리는 젠더’, ‘역사’, ‘지각을 동시대 퀴어의 관점에서 재전유함으로써 제시한다. 가령, 퀴어와 무관하지만 부드리와 로렌츠의 공동 작업인 <살로메니아>(2009) 1923년에 만들어진 영화를 퀴어로 전유하고 무대 위에서 재상연하도록 배치하는 작업을 전환시간적 드랙으로 범주화한다. 이 작업의 전략은 기존의 예술사, 영화사는 물론이거니와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역사를 퀴어의 역사로 배치하고자 하는 방식을 제공한다. ‘살로메라는 극적 인물이 퀴어내부에서 재해석되고 재공연되는 이었다는 사실 역시 주지해야 한다. 요컨대, 퀴어 예술에 대한 한 지도를 그리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레나타의 흥미로운 참조점을 제공한다는 것.

 

두 번째 밤(27). 보다 중요한 사실은 강연자가 강연을 준비하면서, 한국에서 퀴어의 역사화 작업이 취약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이야기했다는 사실이다. 여전히 퀴어는 게토에 머물러 있음을 강하게 자각하면서, 자신은 몸과 작업의 일치가 일어나는 중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강연자는 퀴어 내부의 위계화 문제 또한 제기하면서, ‘트랜스젠더가 어떻게 게이해방전선에서 배제되었는지를 보여주며 향후 퀴어 구성의 문제를 한국사회 내부에서 고민하려 한다는 말을 했다. 이 이야기는 흥미롭게도 다음 날 밤, 아프콤월례발표회(4)의 플로어에서 제기한 문제의식(주유신)과 공명했다. 퀴어 씬 내부의 위계화 문제는 퀴어 문제를 다룰 방법적 논의가 무척 중요해지는데, 이에 대한 한 응답이 전날 밤의 논의를 통해서 일정부분 이루어지고 있다고 여겨졌다.

 

이와 관련하여 발표자(박수지)퀴어성’(이 용법은 다소 불분명한 표현으로 보인다)이라는 게 만약 정치가 될 수 있다면, 이들이 가시화되어 있기 때문에 이 문제가 자본주의신자유주의와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다. 하지만 플로어에서 퀴어가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의 총체를 다만 퀴어라고 부르는 것이었다면, 이 문제는 정체성의 문제로 치환할 수 없는 것이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하여 퀴어가 이름을 도무지 붙일 수 없는 무언가를 의미한다면, 있음의 상태를 규정하는 퀴어성이라는 범주적 표현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권명아)라는 관점을 이야기했다. 퀴어가 다만 당사자 운동으로 인식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 데도, 당사자로서 운동으로 귀착시키는 논점은 다소 이해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제시했다. 이는 토론자(양창아)의 수많은 질문들과도 공명하는 논의이기도 했다.

 

 

 

이 논의에서 퀴어를 둘러싼 문제의식들, 그러니까 1990년대 이후 해소되지 않고 진행되어온 저간의 담론적 맥락과 쟁점들을 해소하지 않고 온 사정들이 반복되고 있다는 관점이 피력되었다. 정체성이 주요한 의제로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것도 이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중요한 지점은 바로 이 영역이 페미니즘의 선후배 세대가 교차하고 대화할 수 있는 장소라는 것을, 대화의 자리라는 것을, 페미니즘의 역사를 쓰는 영역이라는 사실이었다. 페미니즘 내 세대적 갈등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은 엡데이트로 극복해야 하는 게 아니라, 반복을 피하기 위한 전략과 전술을 함께 기획하는 일이어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페미니즘이 다만 여성의 이론이 아니라 소수자 해방 정치를 위한 기획을 실현하는 영역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그래서 아프콤의 월례 연구/발표회는 드문 자리일 것이다. 여러 연구자끼리 교류하는 자발적 모임이 사실 상 전무한 부산에서 이 연구/발표회가 점점 취약해져 가는 연구자 지반으로 꾸역꾸역 일구어 나가는 지역에서는 무엇보다 귀한 경험을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아프콤의 멤버들의 수고로움이 가시적 성과로 즉각적으로 드러나지 않겠지만, 시간을 더할수록 참여자와 밀도를 더 해 가는 과정은 향후 연구자들의 고립을 해소하는 데도 중요한 몫을 할 것으로 여겨진다(지나치게 낙관적이고 과장이겠지만 어떤 기대와 모종을 삽입해두는 건 피할 수 없는 것 같다). 지역의 대학에서 대학원을 중요한 목적으로 사고하지 않게 되어버린 현실은 안팎으로 연구자들의 장치를 모색하게 만들고 있으니, 외려 긍정적 신호일지도 모르겠다. (fin)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