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꼼 3차 월례 연구/발표회 그 민중이란 누구인가후기

 

신민희

 

 

프꼼 3차 월례 연구/발표회에 대한 후기를 쓰기로 마음먹고, 어떤 방식으로 글을 써야 할지 고민할수록, 좋은 문제제기를 하겠다는 포부를 가지면 가질수록 왜 이와는 점점 멀어진 채, 자질구레한 어릴 적 나의 글쓰기 경험을 쓰고 싶은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때의 이야기를 쓰고 싶은 욕망을 규명하는 일이, 어느 지점에서 발표회의 후기와 맞닿기를 바라면서 이야기를 시작해보려고 한다.

 

 

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었다. 남해군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백일장을 열었다. 그때 제시된 주제는 가족이었는데, 그 당시에 나는 가족의 위기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아버지의 실직으로 경제적으로 위태로웠는데, 그해는 한국 전체에 IMF위기가 불어닥치던 때였다. 그때 내가 느꼈던 고통은 경제적 궁핍이라기보다 부모님들의 무기력함, 분노, 짜증을 보는 일이었다. ‘아이의 시선으로 기억하는 일은 사실 부모님의 대화를, 부모님이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전화통화를 엿듣는것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누구도 현재의 상황을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고, 그저 엿듣고 훔쳐보면서 가늠하는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그런 방식이 내가 가족의 위기를 더 크게 공포로 인식했던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그때의 큰 공포와 불안감이 가족이라는 주제 앞에서 글을 쓰게 했던듯하다. ‘우리가 너무 가난하다는 것을 모두가 알면 어쩌지라는 걱정이 들면서도 글을 썼던 기억, 쓸 수밖에 없었던 기억. 이것이 나에게 어떤 해방감을 주었던 것인지, 글을 쓰는 일을 생각하면 늘 이때의 경험만이 떠오른다. 엿듣는 위치에서 내가 나의 고통을 글로 썼다는 경험 때문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이 경험이 떠오르는 이유는 한편으로는 그때 쓴 나의 결말이 늘 마음에 걸리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시 우리 가족이 이 위기를 극복해, 행복한 가족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적은 것. 그 당시에도 내가 그 글을 마무리하면서 해소되지 않는 무언가를 봉합해버렸다는 기억이 있다(하지만 이 극복의 의지가 없었다면 상을 받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앞의 글의 전개가 어떠했든 글의 결말이란 으레 그런 방식으로만 마무리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행복을 상상하고 위기를 극복하는 것만이 결말이 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고, 그리고 누군가 나의 글을 심사할 것이라는 전제 때문이었다.

 

 

금 나의 글쓰기가 이날로부터 얼마나 가까이 그리고 멀리 있는지는 확신할 수는 없지만, 해방과 검열의 방식 사이에서 고민하는 일 자체가 나의 글쓰기 동력이 되고 있음을, 그로부터 나의 글쓰기 방식에 대해 고민하고 있음을 말하고 싶다. 이렇게 장황하게 나의 어릴 적 글쓰기 기억을 반추하는 일이 후기 쓰기에 맞는 일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번 연구/발표회가 적어도 내 글쓰기를 반추하게 했다는 사실 그리고 무엇보다 경험을 함께 나눌 다른 동료 연구자들을 만날 수 있는 장이 된 귀한 경험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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