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모임 아프콤(off-com) 월례발표(2) 

회로들 속에서 : 미디어, 세대, 정체성

2017년 8월 18일_부산





페미니즘과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있을까 싶을정도로 분야를 막론하고 페미니즘이 붐이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지역 과학기술특성화대학을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는 <페미회로>는 과학기술계 내의 페미니즘 운동을 하고 있는 모임이다. 결성 초기엔 페미니즘과 다소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는 이유로 많은 관심을 받았다고 한다.  


이들이 생활하고 있는 과학기술특성화대학들이 공통적으로 ‘과학을 한다는 것의 정체성이 너무 강한 공간’이어서 대개 ‘실력으로 인정 받으면 된다’는 논리가 절대적으로 발휘되는 탓에 젠더 차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어려웠다고 한다. 더군다나 이공계 내의 성차별 사례들을 모으지 않으면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을 전달하고 증명하기가 너무 어려웠기에 연합을 통해 운동을 지속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러나 과학기술특성화대학의 구조가 내부적으로 워낙 조밀하게 나뉘어져 있고(실험실, 분반, 동아리 등) 소문이 너무 빨리 퍼지며(‘쟤 매갈이라던데?’) 페미니스트로 오인 받지 않게 일반인 코스프레를 해야 하는 형편이어서 연대가 무척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사회적인 페미니즘과 젠더 이슈가 과학기술계의 상황과 잘 어울리지 않은 형편과 넷페미의 논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없는 조직적인 조건 또한 있었던 터라 <페미회로>의 활동이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쯤으로 오해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이슈파이팅이나 이슈메이킹보다 시급한 이공계 내의 문제에 접근하고 해결하는 방식이 주류 페미니즘 진영의 중요 이슈와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한 고민은 발표 현장에서 현재 페미니즘 운동의 특징과 문제들에 대한 논의에 이르기까지 무척 많은 의견들을 이끌어내었다.


지역 이공계 특성화 대학에 여성학 관련 수업 및 세미나를 접하기 어려운 형편과 불균형한 성비. KAIST 마고, POSTECH 포스텍 페미니즘, UNUST 오프코르셋 등 지역의 과학특성화대학에서 페미니즘 운동이 조직적 움직임과 연대를 모색하게 된 것은 2015~2016년에 불거진 SNS 상의 페미니즘 담론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어디에서 누가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각각의 지역이 달랐던 탓에 연락을 취하는 데만 두 달이 걸렸다고 한다. <페미회로>의 회의 및 기획이 주로 온라인 공간을 활용하는 것은 지역 간 거리 차이와 구성원 절반이 대학원생이어서 실험 일정 때문에 오프라인이 주가 되면 오히려 활동 자체가 어려워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열악한 여건 속에서 활동을 하는동안 내부적으로 공유하는 몇 가지 원칙을 세울 수 있었다. 주요 활동 무대와 형식이 온라인이긴 해도 SNS 상의 광역 연결이 꼭 긍정적이지만은 않을 수 있고 오프라인으로 이어지지 않은 온라인 운동을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페미회로>의 지리적 특성상 지역에 거점을 두고 할 수 있는 활동과 지역 이공계 중점 대학의 삶(들쑥날쑥한 실험실 스케쥴, 주변 대학과의 교류 미비 등)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제약적 조건’이 외려 모든 활동은 유연해야 한다는 내부 원칙을 구축할 수 있게 했다고 한다. 


<페미회로>의 주요활동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된다. 여성과학기술인의 삶을 기록하는 ‘인터뷰 프로젝트’, 여성과학기술인 배제문제와 성차별적 과학지식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 ‘젠더서밋 스토리펀딩’, ‘매달 두 권식 SF, 페미니스트 STS, 혹은 과학과 젠더 관련 책을 읽고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북큐레이션’, 이공계 대학 내에서 겪는 성차별을 기록하는 ‘이공계 내 성차별 아카이빙’. 이슈를 정해놓기보다는 상황에 따라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활동들을 해나간다고 한다. ‘성평등을 코딩하라’ 상영회나 여성과학기술인 배제 문제를 거론한 ‘March for Science’와 같은 활동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비교적 짧은 이력에 비해 아주 다양한 활동을 해온 것은 구성원들이 하고 싶은 활동이 다 다르기 때문인데 조직적인 운동의 경험이나 학습이 없었던 이유로 매번 달라지는 활동이 외려 혼란스럽게 느낀 적은 없다고 한다. 스스로의 활동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나가는 것이 좋을지에 관한 ‘정체성 찾기 회의’에 대한 경험을 들려주었는데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각자의 입장을 공유했던 그 시간이 무척 흥미 있게 들렸다. 페미니즘 운동이 이슈 중심으로 흘러가는 측면이 강해 국지적이고 개별적인 이슈를 귀담아 듣지 않는 측면이 있는데, <페미회로> 내부의 회의들 속에서 구체적인 이력을 듣는 것의 중요성을 새삼 다시 느낄 수 있었다.


<페미회로>의 활동은 2000년대 초반부터 활발하게 진행되어온 학술대안운동의 형식과는 다른 운동체이자 연대체의 사례로 읽혔다. 기존의 코뮨운동이 대의를 모임의 중심축으로 삼고 있는 것과 달리 개별적인 관심사와 욕망을 인정하면서 주어진 조건을 최대한 유연하게 활용하는 방식으로 활동을 지속하는 방식에서 많은 영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페미회로>가 자유주의자들의 느슨한 연대체라고만 말할 수 없는 것은 이공계 대학 내의 일상생활에서 마주하게 되는 조리돌림과 폭력, 조직 내에서의 왕따라는 직접적인 폭력 아래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말하자면 코뮨적 이력이 전혀 없다고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페미회로>의 활동에 대해 과학적이고 논리적이라고 평가하는 비평 또한 이들의 정체성을 전공과 일치시켜버리거나 환원해버리는 측면 또한 있다. 1시간동안 ‘막힘없이, 꾸밈없이, 체계적으로’ 이어졌던 <페미회로>의 발표는 기왕의 것과는 조금 다른 연대체이자 운동체의 중요한 사례라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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