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장 달인'들이 지배하는 사회

 

 

 

권명아

 

 

 

 

 

   태풍이 불면 바다 심연에 있던 것들이 기슭으로 올라온다. 태풍이 지난 후 백사장을 가득 채운 쓰레기 더미는 충격적이었다. '저 바다 깊은 곳에 이런 쓰레기가 가득했었구나.' 그 쓰레기들은 항상 바다 저 멀리 심연에 있었을 터이지만, 사람들이 사는 기슭으로 올라오기 전에는 누구도 알아채지 못하는 것이었다. 2014년 한국 사회에는 일 년 내내 태풍이 불고 있는 모양이다. 매일매일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무수한 쓰레기가 '한국 사회'의 기슭으로 올라온다. 이제 한국 사회가 바닥을 보인다는 말도 너무 자주 듣고 말해서 물려 버렸다.
 


심연의 유령들, 고딕 판타지의 시작
 
   그런데 이제, '심연, 바다' 같은 표현을 더는 심상하게 쓸 수 없다. 2014년 바닥을 보인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심연, 바다' 같은 표현조차 집단적 트라우마를 환기한다. 우리는 이미 상징이나 비유가 아닌 현실로, 생생하게 한국 사회의 바닥을 보았다. 
 
   태풍이 불지도 않았는데, 바닥을 드러낸 채 뒤집힌 세월호는 '바닥' '심연'을 상징 차원에서 현실로 불러들였다. 바닥을 드러낸 세월호가 무슨 전조이기라도 한 것처럼, 줄줄이 한국 사회의 심연에서 '유령'들이 밀려온다. 심연으로 사라진 아이들은 돌아올 줄 모르는데, 사라진 줄 알았던 과거의 유령들은 죽지도 않고 되돌아온다. 파시즘이 지배했던 스페인을 고딕 판타지로 그려낸 영화 '판의 미로'에는 아이를 살아 있는 채로 잡아먹는 괴물이 나온다. 피 맛에 굶주린 이 괴물은 그 자체로 파시즘의 상징이다. 고딕 판타지 장르를 빌려 말하면, 오늘 한국 사회에는 바다의 심연에서 아이들을 살아 있는 채로 잡아먹은 유령들이 피 맛에 굶주려 배회하는 모양이다. 남미의 문학이나 영화는 고딕 판타지나 마술적 리얼리즘이 지배적인 장르로 활용된다. 폭력과 학살로 점철된 남미의 역사적 경험은 통상적인 사실주의나 리얼리즘으로 재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도 말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 역시 리얼리즘이 불가능한 고딕 판타지의 세계로 넘어가는 듯한 조짐을 보인다. 

   1930년대 식민지 조선에는 '에로-그로'라는 장르가 유행했다. 일본에서 유행하던 이 장르는 에로티시즘과 그로테스크가 결합한 독특하고도 복합적인 성격을 지녔다. '에로'와 '그로'가 결합해서 만들어내는 미적, 정치적 효과는 다양했다. '에로-그로' 장르에서 나타나는 '과도한' 성적 표현은 성 해방에 대한 열망과는 직접 관계가 없다. 오히려 1930년대를 전후하여 나타나는 폭력의 기괴함과 폭력에 몸을 내맡기는 대중의 충동이 '파괴적인 죽음 충동'으로 충만한 '에로-그로'라는 장르를 만들었다고 평가된다. 일본의 파시즘이 극단화되면서 '에로-그로'는 전쟁 광기를 선동하는 수단으로 동원되기도 하였다. 

   파시즘의 역사를 참조해서 오늘날 한국 사회를 살펴볼 때 눈여겨볼 지점은, 파시즘의 폭력성은 매우 다양하고 이질적인 장르 복합체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파시즘의 역동성과 '자발적 광기의 분출'은 이런 면모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파시즘의 폭력성과 그 전조를 단선적인 회색 톤의 억압적이고 건조한 장르로 생각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일면적이다. 파시즘의 폭력은 일방적이지만, 그 폭력의 형태는 그야말로 '버라이어티'했다.


버라이어티 장르, 파시즘 

   2014년 정치 뉴스는 '19금' 경고 자막이라도 넣어야 할 만큼 어처구니없이 에로틱하다. 사회 뉴스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그로테스크하다. 게다가 '에로'와 '그로'는 종종 몸을 바꾸고, 때론 이종 교배를 일삼는다. 이런 버라이어티 장르를 창출하는 것은 물론 지배적인 미디어와 정치 집단이다. 그러나 이런 버라이어티에 열광하는 대중 또한 파시즘이라는 복합적인 장르의 발명자들이다. 물론 대중을 이렇게만 규정할 필요는 없다. '에로-그로', 고딕 판타지, 이름 붙일 새도 없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무수한 막장 장르를 한국 대중들은 아주 오래도록 '관람'해 왔다. 한국 사회는 여러모로 막장의 달인들이 지배하는 사회이다. 막장 장르의 주도권이 지배 집단에 있는 듯하지만, 막상 관람자의 자리에서 채널의 주도권을 놓지 않고 있는 대중 역시 만만치 않은 막장의 달인들이기 때문이다. 

   지루하게 무한 반복되는 막장 드라마를 끝내고 새로운 장르를 발명할 기회는, 그러니까 이제 우리 모두에게 달렸다. 2014년이 고딕 판타지로 마무리되고 있는 바로 오늘 말이다.

 

 

 

경제위기와 폭력적 언어유희

 

 

 

권명아

 

 

 

 

 

 

   대공황이 다시 오는가? 경제학자들도 이에 대해 쉽사리 예측하지 못한다. 역사적으로 대공황은 파시즘의 득세와 세계 대전으로 이어졌다. 문화사적 자료를 참조해 볼 때 대공황의 시대는 격렬한 휘발성의 시대였다. 이 시대 사람들에게 대공황은 마치 세계가 격렬하게 휘발되고 있는 것 같은 공포로 다가왔다. 쓸모없는 종이더미가 된 지폐 다발들이 상징하듯이, 대공황은 기존의 물질적인 경제적 토대를 휘발시켜 버렸다. 그런 점에서 이 시대의 휘발성이란 단지 상징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이 시대가 '격렬한 휘발성의 시대'였다는 것은 아주 작은 불씨에도 금세 불타올라 버렸다는 의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정체가 모호한 '적'을 향해 불타오르는 증오와 적대감은 대공황 시대의 정동(affects)이었다. 
 


대공황, 경제를 잃고 적을 얻은 시대
 
   이런 점에서 히틀러는 대공황 시대의 전형적 산물이다. 히틀러와 파시즘이야말로 이 세계를 격렬한 휘발성으로 불태워 버리고자 했으니 말이다. 격렬한 휘발성은 파시즘 언어에서도 발견된다. 파시즘 시기 언어는 내용, 의미, 가치, 구체성, 책임성과 같은 실체를 상실한다. 프리모 레비는 이러한 '언어의 폭력적 변형'이 파시즘의 특이성이라고 지적한다. 이러한 현상을 찰리 채플린은 영화 '위대한 독재자'에서 흥미롭게 묘사하였다. 연설광이었던 히틀러가 적에 대한 증오와 선동으로 가득 찬 언어를 구사할 때, 말은 내용과 의미를 상실한 '이상한 소음'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경제 불황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낯익은 '적'을 불러내어 책임을 전가하는 소란이 잦아진다. 경제는 황폐해지고 사회 갈등이 고조되고, 공동체의 위기는 해결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 버린다. 오늘날 우리는 곳곳에서 이러한 격렬한 휘발성의 증상과 마주한다. 경제 논리를 정치로 환원하는 것을 넘어서, 이제 경제는 '적'을 비난하는 폭력적 언어 속에서 휘발되어 사라져 버렸다. 많은 전문가가 지적하듯이 대공황은 막을 수 없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당대 집권 세력들이 경제 불황을 해결할 실질적 대책을 무시하고, 책임을 전가하기 위한 적대와 증오의 말들로 그 책임을 휘발시켜 버린 결과 대공황이 도래한 것이다. 그리고 그 휘발된 언어에 휩쓸려 버린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은 너무나 가혹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2014년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경제 불황이 장기화되는 상황에서 누구도 그 책임을 지지 않는다. 집권 세력은 매번 낯익은 적을 불러내어 책임을 전가할 뿐이고, 이제는 언어의 폭력적 변형에 스스로 매혹된 것처럼 보인다. 평범한 사람들은 불황의 고통을 매일매일 감수하고 살아야 하고, 거기에 더해서 폭력적이고 무책임한 언어의 '향연'을 관람해야 하는 참담함까지 감내해야 한다. 

   한편 무책임한 휘발성의 언어가 발산하는 적대의 향기에 심취한 이들은 앵무새처럼 '적'을 공격하는 말로 현실의 고통을 해소한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그들은 자신의 주머니 속 화폐다발의 가치도 해소된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2014년 겨울,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세상은 마치 '시끌벅적하고 분노로 가득한 소리들이 넘쳐나지만 무의미한 영화'와도 같다. 과거나 현재나 대공황이란 경제와 언어와 정동의 특별한 결합물이다. 경제 위기의 실질적 해결과 책임이 '폭력적 언어유희'에 전가되어 버린 결과 우리 사회는 경제를 잃고 대신 '적'과 '적대의 언어'만을 얻게 되었다. 따라서 경제를 '파괴적 언어유희'로부터 구출해야만 경제 불황에 대한 책임도 물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언어의 가치를 살피는 일이야말로, 경제 불황의 긴 터널에서 빠져나가는 출발점이라 할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언어라는 문, 그 탈출구를 점거할 시간이다. 문은 이미, 항상 거기에 있다.


불황의 책임을 묻고 언어의 가치 살펴야 

   "귀청이 터질 듯한 배경 소리에 잠겨 허우적대는, 이름도 얼굴도 없는 사람들의 난리법석, 그럼에도 그 위로 인간의 말은 떠오르지 않는 영화. 잿빛과 검은빛의 영화, 유성영화인데도 말이 없는 영화." 목청을 높여 적들을 물리칠 것을 외치고 마치 적을 마주한 듯이 괴성을 지르며 법석을 떠는 어떤 종편 채널의 소리를 뒤로 하며, 수용소로 들어가는 것은 바로 폭력적 언어로 가득 찬 세계에 무기력하게 끌려들어가는 일이었다는 프리모 레비의 말을, 아무 소용없이 떠올려 본다. 겨울이 다가온다. 모두 무사하고 안녕하시길 마음 깊이, 그러나 역시 아무 소용없이 빌어 본다.

 

 

 

 

청년 이탈 100% 향해 진격하는 부산시

 

 

 

권명아

 

 

 

 

 

 

   2012년 부산시의회는 '부산 청년대학생 정책욕구 조사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자료에 따르면 부산에 있는 대학에 다니는 학생 중 졸업 후 부산에 계속 거주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학생은 51.2%에 불과하다. 또 이 조사에 따르면 부산 청년 대학생들이 부산에서 개선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점으로 꼽은 것은 인적 자원 개발 프로그램과 일자리 창출 노력이다. 달리 말하면 현재 부산 지역 청년 대학생들에게 부산에서 자신들이 어떤 '인력'으로 성장할지 미래를 그려낼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인재 양성 전망 등 '미래'를 달라는 청년들
 
   이는 청년들의 일자리에 대한 불만이 '일자리가 적다'는 식의 양적 문제가 아니라, 내가 커 나갈 수 있는 미래적 전망을 가진 일자리가 없다는 불만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 조사에서 많은 학생이 월급 때문이 아니라, '미래' 때문에 서울과 수도권으로 가고 싶다고 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다. 즉 청년들에게 부산에서의 자기 삶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는 청년들이 부산시의 인력 정책에 대해 다양성, 비전, 변화 가능성, 진취성과 같이 사람을 '키우는' 미래적 전망을 요구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청년들은 부산시에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상상력을 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는 청년들이 부산에서는 주체적인 미래를 만들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어려운 말이 아니다. 부산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영역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서울이나 수도권과 비교해 부산에서 젊은 세대가 주도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영역이 거의 없다는 것은 굳이 통계가 없이도 실감할 수 있다.

   청년들이 자기 미래를 꿈꿀 수 없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지역에 자립적 삶의 가능성이 없다는 의미이다. 미래는 꿈꾸는 것이다. 즉 미래란 그저 물리적 시간으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과는 다른 삶을 꿈꿀 수 있는 자립과 주체적 삶에 대한 열망으로 도래하는 것이다. 

   청년층의 부산 이탈에 대해 부산시가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또 청년층의 부산 이탈에 대한 논의가 부산의 인구 감소를 걱정하는 인구 통계학적 관점이 아니라 지역의 삶과 문화에 대한 성찰로 진전된 것도 최근의 일이다. 부산 청년 창업 지원센터 추진이나 부산 청년문화 육성 조례(2013년 5월 22일) 제정은 이러한 정책적 관심이 확대된 결과이다. 

   부산 청년문화 육성 조례의 경우 지역의 자립과 주체적 삶에 대한 열망을 청년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에서 구하려는 정책적 반영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실상 이 지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문화 정책이기도 하다. 문화(culture)의 원뜻이 '키우다'(cultura·경작하다)라는 문화 이론의 원론을 새삼 거론하려는 것만은 아니다. 문제는 실질적 차원에 있다. 

   예를 들어 부산시 의정지원 자료인 '부산문화재단 비전, 핵심가치, 추진 방향 분석'(2012년)에서는 '인재들의 역외 유출'을 부산시가 처한 총체적 위기 상황의 핵심 요인으로 진단하고 있다. 그리고 부산문화재단의 존재 이유는 이와 같은 총체적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문화 분권'의 초석을 놓는 일이라고 논하고 있다.


미래 키우는 일, 부산문화재단의 존재 이유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부산문화재단의 존재 이유는 문화 사업에 국한되지 않고, 부산의 자립적 삶의 기반과 문화주권을 정초하는 데 있다. 또 앞서 인용한 자료들은 부산시 자체에서 수립한 정책 자료들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계속 논란이 되고 있는 부산문화재단 민간 이사장 선정 문제는 단지 문화계의 진영 문제나, '인물' 품평에 국한된 일이 아니다. 오히려 부산문화재단 민간 이사장 선정 논란을 이런 방향으로 이끄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제기하지 못한 채 공전할 우려가 높다. 

   부산문화재단 민간 이사장 선정 논란의 핵심은 부산시가 청년들이 미래를 꿈꿀 수 있는 도시, 즉 자립과 주체적 삶이 가능한 지역을 만들겠다는 정책적 기조를 스스로 배반한 꼴이 되고 말았다는 점에 있다. 그런 점에서 부산문화재단 민간 이사장 선정의 문제점은 부산시가 그간 추진해 온 정책 기조를 스스로 부정해 버린 데 있다. 인사가 정책을 부정해 버린 전형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제 청년 이탈 100%의 기록을 세우는 일만 남았다.

 

 

 

 

예방과 검열, 사전 조치의 희극

 

 

 

 

권명아

 

 

 

 

 

 

   유효성에 대해서는 의학적인 논란도 있지만, 예방 접종은 질병 발생에 대비하는 유효한 사전 조치의 하나이다. 그러나 발생 가능한 질병에 대한 예방 조치가 때로는 과도한 건강 염려증과 감염 공포를 동반하기도 한다. 예방 조치란 개입의 시기와 발생 가능성에 대한 적절한 판단과 분석 능력에 따라 그 효율성과 가치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예방 조치가 적절하게 취해지는가, 아니면 부적절하게 취해지는가는 그 사회의 합리적 판단 능력과 분석 능력을 나타내는 근본적 지표이다. 물론 합리적 판단 능력과 분석 능력이 있을 때에만 예방 조치라는 것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다이빙 벨'과 에볼라, 사전 조치 필요 영역은?
 
   사전 조치에 대한 판단 능력과 적절성이라는 차원에서 최근 부산에서 벌어지고 있는 두 개의 사건은 참으로 흥미롭다. 하나는 ITU(국제전기통신연합) 전권회의와 관련하여 에볼라 감염 사전 조치 논란이며, 다른 하나는 부산국제영화제 상영 예정작 '다이빙 벨'에 대한 상영불가 조치 논란이다.
 
   10월 20일부터 열리는 ITU 전권회의는 정보통신기술 정책 논의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전 세계 193개국에서 참가자들이 모이기에 여러 다양한 절차와 사전 조치들이 당연히 필요할 것이다. 특히 에볼라 바이러스 감염에 대한 공포가 확산되면서, 이에 대한 사전 조치를 부산의 시민 단체들이 요구하고 있다. 먼저 전제를 하고 싶은 것은 몇몇 보도나 성명에서 '에볼라 발병국' 참가에 대한 우려라는 식의 표현이 자주 사용되는 것은 문제적이다. 특정 지역이나 국가를 그저 '에볼라 발병국'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지나치게 폭력적이며 인종차별적이기 때문이다. 일본을 '피폭국가'로 부르는 것이 폭력적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질병 감염에 대한 사전 예방 조치를 철저하게 수행하는 것은 국제회의를 주관하는 국가와 지방 정부의 기본적 역할이자 책임이다. 그런데도 ITU 전권회의 주관 부처인 미래창조과학부 관계자는 국제회의 참가자들에게 이러저러한 사전 조치를 할 수 없다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수수방관하고 있던 부산시는 논란이 커지자, "미래창조과학부와 협력해 에볼라 바이러스 발병국에 참가자 수를 최소화해 줄 것을 요청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에볼라 바이러스 감염에 대한 예방 조치가 부산 시민의 안전에 대한 기본권을 보장하는 문제임에도 이를 책임질 부산시의 대응은 참으로 느긋하다. 

   부산국제영화제의 '다이빙 벨' 상영에 대한 부산시와 부산시장의 대응이 매우 기민하고, 집요하고, 적극적인 점을 전권회의에 대한 질병 예방조치와 비교해 볼 때, 이 대비는 더욱 흥미롭다. 국제영화제 참가작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든 상영불가 압력을 넣는 것은 부당한 검열이며, 사전 조치라는 의미에서 사전 검열에 해당한다. 사전 조치를 취할 질병 예방에는 무관심하고, 시민의 판단에 맡겨야 할 표현의 자유에는 적극적으로 사전 조치를 취하는 이 역설적 태도는 실상 시민의 기본권을 침해한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적이다.


부산시, 시민 기본권 지켜야 할 책임 안 지켜 

   2012년 제정된 '부산광역시 인권 보장 및 증진에 관한 조례'를 보면 부산시(3조)와 부산시장(4조)은 '시민의 인권 보장과 증진을 위하여 인권 보장 및 증진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시행할 책임을 지닌다. 안전하게 살 권리와 표현의 자유는 인권의 기본이다. 혹시라도 발생할 수 있는 질병과 재난에서 시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사전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부산시와 부산시장의 기본적 책임이다. 마찬가지로 부산 시민들이 다양한 사상과 예술 표현의 자유를 구가할 수 있도록 보호하고, 이에 반하는 일들을 조사하고 예방하는 것 역시 부산시와 부산시장의 기본적 책임이다. 따라서 바이러스 감염에 대한 사전 조치에 무관심하고,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에는 적극적인 부산시의 행위는 부산시민의 기본권을 지켜야 할 자신의 최소한의 책임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조례도 지켜지지 않는 상황이라면 부산 시민은 도대체 기본권을 지켜 달라고 누구에게 요구해야 하는 것일까? 사전 조치의 적절성에 대한 부산시의 합리적 분석의 초점은 어디에 있는 것인지, 합리적 판단 능력의 여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혐오 발화와 표현의 자유

 

 

권명아

 

 

 

 

 

 

 

   롯데의 외국인 투수 쉐인 유먼이 인종차별적인 혐오발화(發話)를 비판하는 의미로 '말조심' '누군가 듣고 있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티셔츠를 만들었다고 몇몇 신문이 전한 바 있다. 서울의 한 음식점에서는 '에볼라 바이러스 때문에 당분간 아프리카 사람을 받지 않습니다'라는 문구를 거리에 내걸었다. 세계적 모델 에릭 오몬디는 이에 대해 '인종주의는 그만(Stop Racism)'이라는 제목의 비판 글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리기도 하였다. 어떤 기사에서는 인종차별이 한국만 심각한 건 아닌데, 이런 사태가 마치 한국만의 문제인 것처럼 과장하면 안 된다고 논평을 하기도 했다.
 


피해자를 공격하고 소수자를 증오하는 사회
 
   오히려 근본적 문제는 한국 사회에는 이런 식의 언어 표현이나 행동이 혐오 발화나 증오 행동과 같은 특수한 형태의 폭력이라는 것에 대한 인식이 거의 부재하다는 점에 있다. 즉 자신이 하는 말과 행동이 폭력이라는 인식이 없고, 그 행동에 대한 문제제기 역시 폭력 비판이라는 차원에서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역으로 이런 식의 폭력이 마치 표현의 자유이기라도 한 것처럼 전도되는 사례도 빈번하게 나타난다.  
 
   혐오 발화는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지역차별주의와 같이 이미 구성된 사회적 배제와 적대를 토대로 형성되는 상징적 폭력이다. 특히 혐오 발화는 사회적 약자가 지닌 '차이'를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다. 한국인들이 가장 잘 알고 있는 혐오 발화는 '조센징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외치는 일본 극우파의 발언이다. 일본 내에서 이런 혐오 발화와 증오 행동을 이끄는 단체의 이름은 '재일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재특회)'이다. 일본 내의 소수 민족인 '조선인'의 권리 요구가 재특회에게는 특혜로 간주된다. 재특회는 조선인 학교 주위를 돌며 "조선학교를 일본에서 내쫓아라" "스파이의 자식들"이라고 확성기로 외치며 시위를 하면서 이를 표현의 자유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본 법원은 이에 대해 이들의 행위가 "(일본도 비준한)인종차별철폐조약에서 규정한 인종차별에 해당하므로 위법"이라며 시위를 금지하고 배상 명령 판결을 내렸다. 일본 사회에서는 혐오 발화에 대항하는 교육과 시민운동이 대학과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확대되고 있는 추세이다. 

   이 지점에서 이 글을 읽는 많은 독자의 분노 에너지가 급상승하고 공감 지수도 높아질 것으로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혐오 발화를 일본 문제로 환원해 버리면 참 속이 편하니 말이다. 그러나 이 경우는 어떤가. 단식 투쟁 중 병원에 이송된 김영오(유민이 아버지) 씨에 대한 악의적 논란은 전형적인 혐오 발화의 특성을 보여 준다. 기소권과 수사권이 있는 특별법을 요구하며 단식 중인 김 씨의 진정성이 의심된다면서 인터넷을 중심으로 퍼진 글들에는 여러 형태의 공격이 담겨 있다. 지역차별(호남출신 공격), 계급차별이 뒤섞인 이 혐오 발화 사례에는 가족 형태에 대한 한국 사회의 전형적 편견까지 가세하고 있다. 이혼한 아버지의 자격과 진정성을 비판하는 글들은 법적 결속, 이성애적 결속 등 이른바 '정상 가족' 이념에 근거한 차별 의식을 전형적으로 반복한다. 이 차별적 의식은 법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가족이나, 이른바 '정상가족'의 범위에 들지 못하는 다양한 가족을 '부적절하고 자격이 없는 것들'로 배제하는 논리를 함축한다. 


폭력성에 대한 법적 규제와 교육, 사회관심 필요 

   일본의 경우 혐오 발화와 증오 행동 단체에 대해 법적 처벌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혐오 발화의 폭력성에 대해 무관심하고 무책임한 한국 사회에도 이러한 법적 책임을 묻는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다. 그러나 혐오 발화와 증오 행동의 폭력성과 책임을 묻는 일은 법의 심판만으로 완수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적 규제와 교육, 사회적인 관심의 확대는 혐오 발화의 위험성을 줄이는 가장 최소한의 필요조건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최소 조건에 대해 논하기에는 한국 사회의 실상은 참으로 비참하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공감하기는커녕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 일이 인간으로서의 근본적 윤리에 위배되는 일이라는 '최소한의 윤리'조차 부재한 것이 한국 사회의 현실이다. 혐오 발화에는 증오를 에너지로 소수자를 불태워 버렸던 파시즘의 망령이 일렁인다는 점에서 혐오 발화가 넘쳐 흘러나는 한국 사회는 역사의 심판대에 올라 있다 할 것이다.

 

 

 

로봇과 살고 있어요

 

 

권명아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위해 아들은 보좌관 로봇을 보낸다. 보좌관 로봇은 아버지의 식사와 청소를 담당할 뿐 아니라, 건강관리를 맡아서 해 준다. 아침 식사를 차려 놓고 아버지를 깨우고, 운동 좀 하라고 잔소리도 한다. 잔소리 좀 그만하라는 아버지와 잔소리 듣기 싫으면 말 좀 들으라는 로봇의 대화는 부자관계의 대화와 다르지 않다. 영화 '로봇 앤 프랭크'(제이크 슈레이어 감독, 2012)에서 보여 주는, 로봇과 함께 사는 시대는 이제 더 이상 먼 미래의 일이 아니다.
 

청소 로봇과 '가족 로봇'
 
   미국의 한 연구팀이 세계 최초 '가족 로봇'을 출시했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과는 다소 거리가 먼 이야기로 느껴졌던 로봇과 함께 사는 삶이 현실이 되고 있다. 국내에서는 로봇 청소기 정도가 일상에서 만나는 로봇의 모습이고, 로봇 청소기조차 일반인들이 사용하기에는 아직은 가격이 비싼 편이다. 한국의 일반인들 인식 속에서 로봇은 로봇 청소기처럼 아직은 생활을 돕는 기계일 뿐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삶에서 로봇이 도구적 기계가 아닌 '가족'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물론 이 '가족 로봇'이 실제로 어느 정도의 기술적 진전을 이뤄냈는지는 아직은 확인이 어렵다. 다만 현재까지 제공된 정보를 토대로 볼 때 흥미로운 것은 '가족 로봇'이 인간을 위한 기능적 보조나 기술적 도구성보다 인간과의 정서적, 사회적, 인지적 관계 맺음을 주요한 기능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로봇과 함께 사는 미래, 혹은 인간과 로봇의 경계가 없어지는 미래에 대해서는 아주 오래 전부터 비관론과 낙관론이 팽팽하게 대립해 왔다. 따라서 이 글에서 그런 비관과 낙관의 어떤 입장을 굳이 다시 설명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페미니스트 생물학자 대너 해러웨이는 인간과 로봇의 경계를 설정하는 것 자체가 이미 무의미하다고까지 말한다. 즉 그녀에 따르면 우리는 이미 '사이보그'이기 때문이다. 사이보그라면 공상과학 영화나 만화에 나오는 무수한 캐릭터들을 떠올릴 사람이 많을 것이다. 사이보그는 신체의 일부나 전체를 로봇이나 기계로 대체한 존재이다.

   많은 공상과학 영화에서 사이보그가 위험한 존재로 자주 등장하는 것은 사이보그가 유기체로서의 인간의 완전성에 대한 믿음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우리의 신체 일부를 비유기체로 대체하며 살고 있다. 철이나 플라스틱으로 이뤄진 안경, 입안의 인공보철, 관절 속의 보철물들까지 우리 인간 신체는 이미 비유기체와 함께, 비유기체를 통해 구축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유기체인 인간이 비유기체인 존재들(로봇, 기계적 보충물 등)과 함께 사는 시대는 이미 도래해 있는 것이다.

   물론 '사이보그로서의 우리'는 아직은 기계나 비유기체를 인간 신체의 작동을 위한 보충물이나 도구로서 사용하고 있다. 기계가 인간의 친구가 되거나 가족이 되는 것은 여전히 공상과학적 상상이거나, 과도한 기술 낙관주의로 간주될 수도 있을 것이다. 기계와 인간, 테크놀로지와 휴머니즘 사이에는 넘기 어려운 경계가 여전히 설정되어 있다. 

인간, 사이보그, 로봇 

   인간이 오랫동안 인간을 닮은 로봇을 동경하면서도 두려워해 온 이중적 욕망의 구조는 이러한 인간의 경계, 테크놀로지의 경계와도 관련이 깊다. 이러한 논의들은 '포스트 휴머니즘'이라고 불리는 일련의 학문 경향들에서 천착하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반면 로봇 공학이나 사이버네틱스와 같은 학문들은 점점 더 휴머니즘적 주제들, 즉 감정, 사회적 관계, 인지적 연결 등의 문제에 보다 깊게 천착하고 있다. '가족 로봇'의 개발자가 "기술을 인간화(humanize)하자"고 제안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기술은 공학이 아니라, 인문의 영역에 도달한다. 고도기술 사회에서 '나는 누구인가' '누구와 함께 살 것인가'라는 가장 고전적인 인간적, 사회적 질문이 도래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게 로봇과 인간 사이, 휴머니즘과 테크놀로지 사이, 기술 공학과 인문학 사이, 미래적 상상력과 현재적 기술 발전 사이의 경계는 이미 무너지고, 새로운 흐름이 오늘 여기에 도래해 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떠신가? 아직도 자신이 '휴먼'이라는 데에 자부심을 느끼시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아마 과거에서 온 사람일지도 모른다.

 

 

 

자본이 '시'가 되는 시대



권명아

 

 

 




 

   한국이 자신의 광대역이 더 우수하다며 차별화된 '기술적 우위'를 주장하는 LTE에 몰두해 있는 동안 전혀 다른 차원의 광고를 들고 도래한 것은 애플이다. 물론 애플 역시 기술경쟁의 대열에서 전혀 자유롭지 않지만, 애플의 광고는 기술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완전히 미학적 텍스트로 시장을 사로잡았다. 대표적인 것은 애플 아이패드 에어의 "Your Verse"(당신의 시) 버전이다. 너무나 '시적인' 이 광고가 애플의 노동 착취를 가리고 애플 사용자의 우월감을 은근히 만족시킨다는 점은 먼저 전제로 해두자. 즉 너무나 미적이고 시적인 애플의 광고가 예술의 가치나 휴머니즘을 상업적 목적과 결합시킨 훌륭한 사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역으로 너무나 '시적인' 애플의 광고는 오늘날 자본과 시장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경제적이고 현실적인 지표의 역할을 한다.

 


 

한국의 '광대역'과 애플의 '당신의 시'


   한국의 LTE 광고들이 '기술+스타'라는 한정된 프레임을 무한 반복하는 것과 달리, 애플은 전 세계, 아니 우주 전체로 프레임을 확장한다. 전 지구를 횡단하는 카메라의 시선과 저 멀리 우주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는 프레임을 가로지르며 휘트먼의 시를 인용하는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선생의 대사가 흘러나온다. "시가 아름다워서 읽고 쓰는 것이 아니야. 인류의 일원이기 때문에 시를 읽고 쓰는 거야. 인류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지. 의학, 법률, 경제, 기술 등도 훌륭한 일들이고 삶을 지속하는데 필요해. 그러나 시, 아름다움, 로맨스, 사랑, 이것들은 삶의 목적이야." 너무나 미학적이고 시적인 텍스트의 효과는 복합적이다. 그러나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애플은 경쟁 상대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얘들아, 이제 기술을 파는 시대는 끝났단다."


   이렇게 자본이 마치 이전에 우리가 '시'라고 이름 붙인 어떤 영역이 하던 일을 대체해가는 것을 이론에서는 정동 자본이나, 비 물질 노동과 같은 개념으로 설명한다. 이러한 시대의 변화는 우리가 산업 노동 시대의 틀에 박힌 사고방식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때만이 파악할 수 있다. 경제적인 것, 실용적인 것을 기술 개발, 건설과 같은 물질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문학이나 예술, 시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라고 비아냥대는 통속적 이해방식은 이런 산업 자본주의 시대의 산물이다. 


   오늘날은 산업 자본주의 시대의 물질성이 지배하던 시대에서 인지 자본주의의 비 물질성이 지배하는 시대로 변화하는 거대한 전환기라 할 수 있다. 물론 산업 자본주의 시대의 패러다임이 모두 비 물질 노동으로 대체되지는 않지만, 노동과 자본의 위계를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한국 아이돌에 초점을 맞춘 LTE 광고와 전 지구와 '인류'로 프레임을 확장한 애플 광고는 기술과 시가 어떤 식으로 우위를 다투는지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기술 입국이라는 산업 자본주의 시대의 표어가 상징하듯이 기술은 '일국'의 시장을 좌지우지 할지 모르지만 '시'는 우주와 '인류'를 좌우하고 있다. 이제 이 우주와 인류는 '시'가 된 자본이 좌지우지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시를 자신의 '자본'으로 삼은 자들이 이 새로운 우주의 '엘리트'가 될 것이다.


 

"이제, 기술을 파는 시대는 끝났다"


   이미 이러한 전조는 나타나고 있다. 시, 예술, 미학의 '미래적 가치'를 글로벌 자본이 자신의 자양분으로 만들어가는 동안, 산업 역군의 후예들이 이끄는 지역 대학은 '의학, 법률, 경제, 기술'과 같은 산업화 시대의 '전통' 학문을 실용학문이라 떠받들며 시와 예술을 비실용적이고 무가치한 학문으로 폐기처분하고 있다. 이런 추세라면 한국의 지역 대학은 '시가 자본이 되는 이 시대'에 결코 '엘리트'를 양성할 수 없다. '기술을 파는 시대가 끝난' 이 시대에 기술입국을 꿈꾸는 한, 지역 대학은 이 새로운 자본주의의 피라미드 속에서 하층에 배치되는 산업 역군을 길러내는데 자족해야 할 것이다. 


   최근 이런 대학 구조조정을 담당하는 교육 관료들이 애용하는 표현이 있다. "Top/Down". 즉 경쟁력 있는 '탑'은 살리고 경쟁력 없는 '다운'은 없앤다. 지역의 행정 관료들, 대학의 교육 관료들에게 이 말을 되돌려주고 싶다. 자! '시가 자본이 되는 시대'에 산업화 시대의 '전통' 학문을 실용 학문이라고 떠받드는 당신들, 지역 인재의 미래는 탑입니까 다운입니까?

 

 

 

 

 

 

 

 

 

여전히 두근거리는 마음

 

엄준석

 

 

 

아프꼼을 생각하면 두근거린다. 혹 빼먹은 일은 없을까? 보고할 때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오늘 찍은 사진 페이스북에 올려도 될까? 아프꼼 홈페이지에는 어떤 글을 실을 수 있을까(필자는 아프꼼에서 홈페이지, 페이스북 운영을 맡고 있다)? 다른 대안적 공동체 관련 홍보물을 봤을 때도 아프꼼 생각이 난다. 그리곤 또한 두근거리는데, 아프꼼에 관한 고민하거나 그의 새로운 모습을 홀로 상상하며 흥분하곤 하는 것이다. 그 고민과 상상을 구체화한 경우도 있으나(배수아와 새벽의 극장 티져 영상과 같은) 마음속에 간직한 경우도 많다. 규모가 컸던 두 실험-시위인 환을 켜다배수아와 새벽의 극장이 끝난 후 조금의 여유가 허락돼 그를 구체화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나, 쉽지는 않은 것 같다(이 두 행사를 시위라고 칭한 것은 권명아 선생님이다). 그런데 이렇게 얘기하면 아프꼼을 대단히 많이 고민하는 사람인 것 같다. 부끄럽다. 아프꼼의 일원이 된 지 4개월이 지났음에도 이렇다 할 기획도, 발전적인 뭔가도 만들어내지 못했는데 말이다. 아니, 4개월밖에 안 지났는데도 큰 실수를 저지르곤 했다. 다른 식구(왠지 이렇게 부르고 싶다)에 비해 맡은 실무도 턱없이 적은데도 말이다. 그러나 아프꼼의 일원 즉 래인커머가 된 이후 일상적으로나 상시적으로나 아프꼼을 많이 고민하고 상상한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듯하다. 나아가 항상 그에 대해 긴장하고 흥분하고 욕망하고 있음 또한 말이다. 물론, 그러한 운동은 나 혼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아프꼼 또는 대안인문학운동은 나에게 과제가 되어 있는 것 같다. 미래의 아프꼼을 생각하고, 지금 아프꼼의 일-글은 향후 어떤 식으로 확장/축소될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고 있다. 아프꼼을 비롯한 여러 대안인문학운동의 성과와 의의를 밝히는 글을 읽으며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각종 대안적 형태의 공동체에 대해 궁금해 있기도 하다. 아울러 아프꼼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했거나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아프꼼이 어떻게 인식되고 있을지를 궁금하기도 하다. 아무래도 아프꼼의 의의와 역사를 잘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이 나에게 과제로 주어지고 또 의뭉스러운 무엇으로 설정된 것 같다. 아프꼼이 생산했던 글을 읽어보며 대략적인 틀을 잡아가곤 있지만 여전히 부족한 점이 있는 것 같다. 더 깊게 엮이고, 더 부딪혀보아야 그 과제를 해소할 수 있는 어딘가를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다행히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몇몇의 사건에 연루되었던 탓에 아프꼼에 대한 대략적인 상은 잡을 수 있었다. 그 상들이 내 속에서 패치워크(김명주의 글 참고)’되면서 아프꼼이라는 과제에 대한 해답을 조금이나마 찾을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첫 번째 사건은 201212월 한나 아렌트에 관한 세미나를 열었을 때였다. 아프꼼 식구를 처음 만났었고 아프꼼이 무엇을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당시 한나 아렌트의 논의에 관해 알고 싶어 찾아갔지만, 그보다는 아렌트의 논의를 빌어 아프꼼 또는 공동체를 꾸려가는 문제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었다. 당시 권명아 선생님과 신현아 선생님은 반갑게 맞이해 주었고 이후 조심스러우면서도 당당하게, 슬프면서도 기쁘게 아프꼼-공동체에 관해 얘기해줬다. 순간 그 고민과 갈등, 문제의식을 공개하는 것에 대해 당황스러웠지만, 내가 사는 부산의 어딘가에서 진지하고 묵묵한 걸음을 하고 있는 사람-집단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 계기가 됐다. 약 반년이 지난 후 그 걸음을 함께 해보자고 했을 때 두려우면서도 숙연해졌던 건 그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헌데, 막상 아프꼼에 들어왔을 땐 흥겨움과 경쾌함을 느꼈다. 오자마자 환을 켜다에 참여했다. 행사의 바탕에는 지역문화와 인문학의 현재를 사유하는 문제가 있었지만, 중앙동 40계단과 그 주변 공간과의 새로운만남 즉 그 공간을 새롭게 걷고 만지고 꾸미고 있었다. 직접 찍고 만들고 쓴 시와 사진, 미술 작품 등을 중앙동 일대에 펼쳐놓고 다른 이들과 걸으면서 그를 감상하고 설명하는, 능동적인 행사였던 셈이다. 이 때문에 중앙동 일대는 기왕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과 함께 그를 더 풍성하게 만들 수 있는 서사, 이미지를 곁들일 수 있었다. 아울러 중앙동의 현재와 부산 또는 한국사회 내에서 인문학의 현재를 함께 고민할 수 있는 꼭지도 있어 무형적비자본적 가치를 지닌 무엇이 사라지고 외면당하는 현실을 바라볼 수도 있었다. 물론 그를 그저 비극이라 명명하지 않고 새로운 저항의 시발점으로 여기는 지점을 만들어가며 말이다(‘환을 켜다의 마지막 소라계단 환등장면 참고). 그렇다고 이 행사가 모든 점에서 긍정적이었던 것은 아니었지만(더 많은, 다른 참가자와 이 흠겨움, 경쾌함을 즐기지 못한 아쉬움) 중앙동을 새롭게 마주할 수 있는 계기가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4시간여의 이 기이한 놀이 속에서 벗어나는 자가 거의 없었으며, 기실 낯섦과 부끄러움 탓이었겠지만 웃음과 미소도 지속하였던 것도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마도 새로운 놀잇거리, 새로운 놀이의 장소를 발견한 즐거움이 순간적으로나마 표출된 것으로 이해하고 싶다. 아프꼼의 무거우면서도 명랑한 시위에 참여하면서 또한 당황스러웠지만, 그것은 자연스레 두근거림으로 번져갔다.

당시 행사를 촬영했었는데 그를 편집제작하여 다른 이에게 이 기이한 놀이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게, 당황스러움이 두근거림으로 이행된 이유였던 것 같다. 촬영편집한 텍스트를 보여주며 그의 신산함과 운동성, 그리고 정치성을 공유할 수 있다는 데에 흥분했던 것. 부산에서 인문학을 하거나 그 주변을 오가는 사람에게 이렇게 새로운 일이 전개되고 있음을, 좀 더 명랑한 방식으로 저항-시위는 전개될 수 있음을 소개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도 흥분했었던 것 같다(‘환을 켜다다큐멘터리는 이후 재편집을 하여 부산의 몇몇 영화제에서 상영을 시도해볼 예정이다). 그 흥분은 일찍부터 행사의 과정에 참여할 수 있었던 배수아와 새벽에 극장에 이르러 더 켜져 갔다. 물론 행사 일에 맞춰 환을 켜다다큐멘터리를 만들어야 했던 것 때문에 생긴 스트레스가 가장 큰 이유였지만 말이다. 5년 만에 다뤄보는 편집 프로그램이었기에 힘겨웠고, 또 아프꼼에서의 첫 생산물이기 많이 긴장했던 것 같다. 시간 또는 선택(편집과 사진 보정은 다양한 이미지 중에서의 선택/포기 문제에 시달리게 된다)과 부단히 싸워야 했던 문제는 있었지만, 새로운 만남 덕택에 새로운 나를 발굴해낼 수 있는 기쁨의 두근거림도 경험할 수 있었다. 오래도록 생각은 했었던 것이지만 색다른 프로필 사진을 찍어보는 것(사진역사의 영역 내에서 내 프로필 사진은 그리 색다른것은 적어도 나의 능력치, 상황 내에서는 색다른 것이었다), 머릿속에 떠올렸던 최대한 그에 가깝게 구현해보는 것 등 다양한 개인적 실험을 시도해볼 수 있었다. 나아가 이는 내 생각과 신체를 통해 아프꼼의 모습을 꾸려볼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물론 그 내 생각과 신체는 아프꼼의 토대 위에서 생성된 것이었지만 말이다.

아프꼼의 이미지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더 용감해질 수 있었던 것 같다. 아울러 어떻게 표현하고, 어떤 (매체적)놀이를 어떻게 더 잘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었던 것 같다(이 지점에서 개인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이런 발견이 아프꼼과의 관계 안에서 얻어진 것이기에 나만의 발견, 즐거움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 식구와 공유할 수 있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언젠가 꼭 아프꼼 식구와 함께, 아프꼼의 이름으로, 또 다른 아프꼼의 이미지를 생산하고자 한다). 이미지 생산에 참여하며 더 분명한 두근거렸던 것은 지난 12월 중순에 일본을 방문했을 때였다. 더 정확하게는 일본 오사카에 있는 대안인문학운동을 만나고 그와 접속했을 때였다. 권명아 선생님은 이행과 자기해방의 결속체들: 대안인문학운동의 곤경과 실험들이란 글에서 대안인문학운동에 대한 평가와 진단의 어려움 또는 불가능성에 대해 언급했다. 그 어려움, 불가능성은 각각의 대안인문학운동의 상황과 그에 따른 결속과 애씀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이라 했다. 각각의 운동이 지닌 상황과 정황을 온전하게 파악하고 있지 않은 이상 평가와 진단은 불가능하거나, 외려 거부해야 할 상황이기도 한 것이란 것이다. 헌데, 개인적으로는 이와 같은 평가와 진단의 문제 이전에 대안인문학운동의 성과, 지속의 문제라는 것이 쉬이 이해되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 그러니까 대안인문학운동은 그것이 궁극적으로 거부극복하고자 하는 체제의 변화를 동반하지 못하면 근원적으로 실험적저항적인 순간에 그치고 이내 사라질 운명 또는 사라지기 일쑤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게 사라지더라고 그 순간을 정초했다는 것만으로도 중요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말이다. 이 같은 판단은 대안인문학운동에 대한 심원한 사유를 전개하지 못한 이유 때문이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로 그런 성과와 지속을 구체적으로 나타내 보이지 못하는, 항상 곤경에 도달하는 대안인문학을 보고 경험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런 내 판단은 오사카에서 아망또, KEY, 코코룸과 같은 대안인문학운동과 마주하면서 바뀌게 되었다. 8여 년 동안 지속한 아프꼼은 그러한 국내외의 다양한 여러 대안인문학운동과 결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 여행 속에서 아프꼼과 같은 대안인문학운동이 특정 국가와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확장적인 연대를 실현하고 있음을 보았다. 책이나 다큐멘터리에서만 보던 해외의 대안인문학운동을 직접 경험한 것도 놀랐지만, 그 운동이 다양한 국가, 사람과 어울리고 있음을 확인한 것도 놀랐다. 그 모습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아망또에서는 우리의 빼빼로과자와 같은 포키과자를 들고 그 대안적 공간-까페를 찾아온 작은 소녀를 만날 수 있었고, 쓰다 남은 전기난로를 가슴에 이고 찾아온 할머니도 만날 수 있었다. KEY에서는 (/)조선, 한국, 일본 어디에도 쉬이 속할 수 없어 다양한 국가적정치적문화적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나이 또래가 비슷해서 인지 왠지 동포 또는 친구라 부르고 싶기도 하다)과 얘기할 수 있었고, 다른 한편 술집에서 왁자지껄한 그들을 보며 단지 고통만이 깃들어있는 것이 아닌 다른 가능성을 품고 있는 그들을 대면할 수도 있었다. 오사카의 넓고 낮은 동네 가마가사키에 있는 코코룸에서는 건설 붐이 끝난 이후 남겨진 노동자를 내치지 않고 외려 그를 존중하고 그의 삶의 생기를 복원해주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그 모습은 영화적이었는데(필자의 전공은 영화학이다) 코코룸의 주인이자 그 동네를 소개해주는 카나요상이 지나갈 때마다 반갑게 인사하는 할아버지를 많이 만났다. 할아버지들은 기쁜 얼굴로 카나요상과 인사했다. 아울러 그 동네 속에 홈리스 노인분들을 위해 마련된 표현 프로그램(요리, 미술, 운동 등으로 이루어진)’과 각종 보호시설(의료와 주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또한 잘 꾸려져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이 제도적으로 잘 구축된 것만이 아닌 그의 역사와 심정을 잘 이해한 형태로, 최대한 안온하게 꾸려져 있음을 보았다.

이와 함께 특히 마음이 두근거렸을 때는 아망또, KEY, 코코룸에게 직접 말을 건넸을 때였다. 더 정확하게는 질문을 던졌을 때였는데 그때마다 마음속 한구석이 일렁였다. 적절한 질문일까 하는 걱정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언가 나의 선배, 스승, 동료에게 질문을 던지는, 연대를 요청하는 신호 같은 것으로 생각했기에 흥분했던 것 같다. 아망또에게는 그 공간에서 영화를 활용하는 방식을 물었고, KEY에서는 반쪽바리같은 혐오발화를 아무렇지 않게 남발하는 한국 사회의 문제, 코코룸에서는 세대론의 문제를 질문했다. 부족한 질문에도 모두 성실하게 답변해 주신 것이 기억난다. 답변 속에서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것은 한국사회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문제, 고민하고 있는 문제가 이 일본사회에서도 동일한 형태로 펼쳐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내 질문이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 일본에서도 익숙한 것, 달리말해 우리는 동시대에 같은 문제를 고민하고 그에 대응하는 해결책을 또한 다르면서도 같은 형태로 내놓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흥미로웠고 또한 마음 한구석이 두근거렸다. 나와 같은 고민, 곤경을 겪으면서도 그를 성숙한 방식으로 이겨내 가고 있는 이웃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이랄까. 권명아 선생님의 지적대로 다양한 대안인문학 운동단체들이 함께-있음의 온도 차이를 서로 감지하고 인지하면서 그들 간의 애씀의 인터페이스와 같은 새로운 어소시에이션을 구축할 수 있는 가능성을 고민하는 과정의 영역 바깥에서 경험했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4개월 남짓 동안 실은 많은 경험을 했었던 것 같다. 당장 나에게 남아있는 흔적만 더듬어 봐도 중앙동 40계단을 더 즐겨 찾아가게 됐으며 배수아의 그 난해한 언어가 외려 난해한 존재를 더 수월하게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라는 것. 세계는 자본에 의해서만 확장성을 갖는 것이 아닌 그에 버금가는 다양한 저항적 토대가 존재한다는 것. 권명아 선생님은 대안인문학운동 각각이 지닌 애씀과 온도차이 때문에 그에 대한 판단과 성과를 가늠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하였지만 적어도 그 이후, 즉 운동 이후를 적극 상상, 사유해 볼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아프꼼이 누군가의 내면에 남긴 흔적이, 나에게서처럼 적지만은 않을까란 사실. 각각의 해석은 다르겠지만, 그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누군가에게든 남아있다는 것. 8여 년 동안의 그 운동은 당장 가시화하지는 않겠지만, 그 흔적을 통해 인문학이 비단 먹물에 머무르지 않는 구체성을 띠고 있는, 띨 수 있는 무엇임은 인식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아울러 그러한 실험적인 운동 속에서만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그때야 자기해방을 생각할 수 있는 프레임을 찾게 될 수 있다는 것도 느긋한 시간 속에서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대안인문학운동은 궁극적으로 많은 이의 해방을 지향해야겠지만 이 속박에 익숙해져 있는 사회 속에서 그 주체의 해방 그리고 그것의 번져나감을 모색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새로운 세계와 나를 만날 것에 대한 두근거림, 만난 것에 대한 두근거림을 다른 이에게도 흘려보내면서 저항적인, 명랑한 전염병을 만다는 것. 별다른 논의를 끌어오기보다 나의 경험과 즐거움을 솔직히, 꼼꼼히 적고자 했던 건 다른 이 또한 이 두근거림을 찾아봤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다. 아직 적은 경험 때문에 충분한 설득력을 갖고 있진 못하지만, 누군가에게 내 운동에의 경험을 알리는 이 시간 속에서도 두근거림은 지속하고 있음이 전달되었으면 한다.

 

 

 

 

 

 

대안(인문학) 운동의 운명: 곤경과 실험 가운데 열리는/내는 길

 

 

김 명 주

1

 

 

1. 대안을 모색하기?: 곤경을 넘어서기!!

 

제게 대학이란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현실적인 이유로 오랫동안 거주해온, 당장 이사하고 싶어도 마련해놓은 대안이 없는 자신의 무능을 탓하며, 때로 합리화하며 하루하루 연명하는 낡은 주거지와 같은 곳이라고 할까요. 부질없긴 하지만 왜 나는 이 곳을 떠나지 못했고, 또 여전히 한 발을 걸치고 있는지 자문해 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이 사회에서 대학이 학인으로서의 시민권을 부여받는 잘 알려진 통로이기 때문일 겁니다. 그 시민권을 획득하기 위해 들이는 비용에 비해 얻는 권리란 고작 수강권, 도서관 이용권 등에 불과하다 해도 말입니다. 그렇게 수년, 운이 나빠 추가비용까지 들이고 결국 남은 것은 비정규직 강사로 강의 몇 시간을 얻을 수 있는 자격과, 생활의 방도는 오직 개별적으로 강구해야 하는 권리같지 않은 권리를 양도받았을 뿐이지만요.

 

 

그러는 동안 학교 밖에서 찾은 선생에게 배움을 얻기 위해 사람들을 모아 함께 공부를 해보기도 하고, 이름 난 선생을 중심으로 공부공동체가 실행되는 것을 지켜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다른 방식의 대안공간이 갑작스럽게 등장한 것은 2005년. 한 선구자의 독자적이고 돌발적인 실험이었던 <연구공간 장전>(이하 <장전>)은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습니다. 아마도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크게 문제될 것 없는, 아직은 대안공간이 그다지 절박하지는 않았던 이들이 함께 연대해 공간을 지켜나갈 힘을 갖기란 어려웠을 겁니다. <장전>이 모델로 삼았던 <수유+연구공간 너머>(이하 <수유 너머>)는 많은 전업 연구자들이 포진하고 있었던 만큼 필요의 차원에서나 지속할 수 있는 능력의 차원에서나 이미 다른 생태계를 확보하고 있지 않았을까 짐작합니다. 물론 외부인이기에 <수유 너머>의 성립과 오늘에 이르는 내부 사정을 아는 바는 없습니다. 다만 저나 제 주변의 연구자들에게 그 당시 <수유 너머>는 인문학하는 사람들이 대학이라는 공적 기관에 기대지 않고도 함께 공간을 점유하고 사람들과 만나 공부의 결과물을 공유하고, 동시에 그것이 자립의 방도가 되었던 사례였기에 신선한 충격이었고 공부와 삶을 결합시키는 상상력을 실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 하나의 모델이었습니다.

 

 

그로부터 또 많은 시간이 지나고 <수유 너머>도 다양한 모습으로 분리되고 서울의 다른 대안인문학 공간들이나 커뮤니티 역시 굴곡을 거쳤습니다. 부산 지역에도 많은 인문학 공동체들이 생겨나 지속적으로 모임을 꾸리고 있으니 10여 년 전에 비하면 외견상으로도 대안인문학 운동의 지형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처음에는 유명세를 치른 대안인문학 공동체의 변화들이 대안인문학 운동 자체의 약화로 여겨져 저 자신도 우려와 안타까움을 갖기도 했지요. 하지만 시차를 두고 생각하니 시간의 흐름 가운데 사람들 사이의 차이와 다양한 입장들이 분화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고, 어쩌면 대안인문학 공동체는 처음과 같은 모습으로 설정된 이상적인 목표를 향해 직진하여 걸어가는 것이기보다는, 처음과 다른 자리로 이행하면서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들과 마주하면서 끊임없이 수정하고 덧붙여가는 우회와 선회를 동반하며 계속해서 구성되는 패치워크와 같은 것일 겁니다.

 

 

2. 곤경, 이행, 실험: 주어진 삶에서 샛길 내기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대안인문학 운동 내지 연구활동가가 겪는 복합적인 상황과 연루되어 있다고 봅니다. 인문학 연구자가 제도(대학) 바깥에서 자신의 연구를 실천(글쓰기, 강의와 같은 생각을 소통하는 관계)하기 위해서는 기성의 공간이나 기성의 질서에 기댈 수 없기에 형식적인 공간은 물론이고 공부의 방향 및 내용 역시 제도권 안에 머물기 어렵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곤경은 단순히 대안 연구활동가로서 재무장하는 것으로만 해결되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여전히 제도권의 방식을 보수하며 관습화된 기성의 삶의 방식에 익숙한 한 개인의 몸과 일상이 대안인문학 운동의 실천 과정에서 부대끼며 자기 자신을 문제 삼는 상황에 처한다는 거지요. 이런 자기반성과 재인식, 이질적인 것을 생성하는 과정 없이 인문학 담론의 시혜자로서의 연구활동가란 계몽된 지식인 이미지에 다를 바 없고, 대안인문학운동이 지닌 보다 깊은 어려움을 외면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안인문학 운동이란 한 개인 혹은 공동체가 자신의 삶을 제도권 바깥에서 재구성하고, 재발견하는 모색의 과정과 등치되는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대안인문학 공동체 안에서의 곤경들 역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텐데요. 앞서 언급한 제도 공간 바깥에서 함께 공부하고 공부의 결과물을 나누고 소통하는 공간, 그리고 그 공간의 활동이 연구자의 경제적인 자립에도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가 대안공간을 성립시킨 이념이라면, 그 이념을 실제로 실행하는 실천(내지 실험)의 과정에서 당장 ‘함께-삶’이라는 부대낌이 대두됩니다. 부대끼는 가운데 서로의 차이를 넘어서 공통의 자리를 발굴하기도 하겠지만 뜻이 같다고 해서 그 방식 내지 경로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이 희석되지는 않기에 처음 만난 이들이 모두 함께 가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런 얼핏 사소해 보이는 방식 내지 모색하는 경로의 차이들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 내지는 삶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와 결부되어 있기에 삶과 공부를 적극적으로 결합시키려는 대안인문학 운동에서는 중요한 결절점으로 작동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은 거지요.

 

 

가령, 제가 몸담고 있는 대안인문학 공동체 중 하나인 <연구모임 비판과 상상력>(이하 <비상>) 역시 현재 또 다른 단계로 이행 중입니다. 주로 철학・사학 전공자들인 연구자들이 모여 정말 소박하게 사상서를 읽으며 친목을 도모하던 <비상>은 처음부터 <공간초록>이라는 독특한 공간과 인연을 맺은 덕분에 최소한의 비용으로 부산 지역 여러 학교의 대학생들과 인문학 독서모임을 여는 한편, 인문학 강좌를 개최하는 단계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 동력은 주도적으로 팀을 이끌었던 좌장의 역할이 주요했지요. 이제 <비상>은 주도적인 역할을 위임받은 우두머리 없이 말 그대로 함께 책 읽고, 글 쓰는 가운데 우리의 공부를 나누고 소통할 수 있는 새로운 공간에 대한 꿈을 조심스럽게 꾸는 중입니다. 사실 <비상>의 관계 방식은 매우 느슨하고 책읽기, 발제, 글쓰기, 책 출간 기획 등 모든 활동은 극히 자율적인 방식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강요하는 이는 아무도 없고, 모임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어떤 제재도 없습니다. 부담을 느낄 만한 게 있다면 책읽기에 뒤처지는 것과 모임 내부 관계에 소외되는 것이라고 할까요. 이런 관계 방식이 대안인문학 공동체가 응당 지녀야할 자생력을 떨어뜨리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모임의 가능성과 매력 역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매우 느슨한 관계 방식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책을 읽고 있다는 점과 구성원들 다수가 자신의 삶과 관련하여 모임의 전망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이 앞으로 만들 변이를 기약하게 만듭니다.

 

 

그에 비해 현재 임금을 받으며 실무자로 활동 중인 <연구모임 아프꼼aff-com>(이하 <아프꼼>)의 경우는 이미 주어진 틀과 이념이 굳건하게 있다는 점이 제가 경험해본 다른 커뮤니티와 갖는 본질적인 차이일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도 뒤늦게 합류하여 계속해서 뒤따라가는 입장에서 아프꼼의 업무를 총괄한다는 것이 버거웠고 약간은 불가능한 시간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제가 합류한 이후 아프꼼의 활동을 이루는 체제들, 홈페이지/웹진, 기획, 학술・문화 사업 등이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싶어 종종 마음이 무거웠고 지금도 그런 부담은 계속되고 있지요. 더군다나 오거나이저의 특성 상 학교에 걸쳐 있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학문후속세대를 교육하고 지원하는 차원에서는 이점으로 작용하지만 대안인문학 공동체의 정체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스스로 정리되지 않는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했듯이 대안인문학 공동체가 어떤 고정된 정체성을 유지, 보수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아프꼼의 독특한 처지와 체제는 문제될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실험의 과정을 보여주는 사례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입니다.

 

 

아프꼼의 활동 전체를 회고할 만한 자격이나 위치에 있지 않기에 올 해 아프꼼이 해왔던 일만 반추해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이제 웹진으로 변모한 홈페이지는 지속적으로 지역과 지역을 넘어서는 예술가, 대안문화활동가, 연구자들의 글을 실으며 그들의 생산을 지원하고 응원하는가 하면, 부산문화재단의 일부 지원을 받은 <로컬來人>이라는 기획 하의 세 개의 복합문화예술행사는 문화예술 장르들 사이, 인문학의 분과 학문들 사이의 ‘문턱과 경계를 넘고’ 드러난 ‘차이를 연결’하는 고투가 담긴 실험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활동의 중심에 오거나이저 권명아 선생님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가 진두지휘하는 방식은 미리 전체를 꿰는 방식이 아니라 함께 참여해서 모색하고 만들어나갈 수 있는 판을 제공해주는 식입니다. 우리는 <로컬來人> 행사를 통해 우리가 몰랐던 예술가 집단을 만나기도 했고(<한량맨션>), 기성의 팀 역시 새로 발견하는 기회를 얻기도 했습니다(<극단 새벽>). 거리로 나갔을 때는 인문학이 지역과 만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사유했으며(<환(幻)을 켜다>), 문학과 극(劇)이 조응하는 또 다른 방식과 그 결과물을 새롭게 체험하며 기존의 앎을 손쉽게 넘어설 수 있기도 했습니다(<배수아와 새벽의 극장>). 이 모든 과정이 오거나이저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아프꼼 팀원들이 함께 고군분투하지 않았다면 역시 불가능했다는 점에서 아프꼼의 체제는 어떤 의미에서 분업과 협업의 씨줄과 날줄로 직조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아직 심포지엄을 치러야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아무래도 지난 해 마지막 활동이었던 일본의 대안운동 커뮤니티를 방문했던 일이 가장 인상적으로 남아 있습니다(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추후 후기를 통해 전달될 예정입니다). 통역을 전담하시며 빡빡한 일정 동안 너무 많은 수고를 도맡아 해주신 권선생님 덕분에 일어에 까막눈인 저는 오사카에서 가슴 벅찬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아마 우리 팀원들 모두가 각자 다른 방식으로 정동되었던 시간이었으리라 짐작해봅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전인미답의 길을 열어가는 이들에 대한 경외심어린 감동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만났던 대안운동 커뮤니티 활동가들 모두가 곤경과 실패를 넘어서며 계속해서 묵묵히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다른 단계로 이행을 지속하고 있기 때문이었으며 그들이 뿜어내는 열기와 담담한 자세가 우리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이었겠지요. 그들과의 만남은 <아프꼼> 역시 자신의 자리에서 계속해서 고군부투하면서 다른 지역의 운동과 네트워크하면서 새로 또 조금씩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어쩌면 당연한 진실을 충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3. 대안인문학 운동: 대안적 삶의 모색

 

사실 이 글은 권명아 선생님의 논문 「이행과 자기 해방의 결속체들 -대안인문학 운동의 곤경과 실험들」을 읽고 그에 대한 감상과 더불어 저 자신이 직, 간접적으로 겪었던 대안인문학 운동을 소회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선생님의 글 자체에 대해 직접적인 코멘트를 하지는 못했지만 이 글을 읽는 과정은 부산 지역에서 나고 자랐으면서 고유한 굴곡이 있는 연구자로서 제 관점과 사고방식 안에 깃들어 있는, 부정할 수 없는 어떤 지역성을 감지하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글의 미덕은 <아프꼼>을 포함하여 우리의 대안인문학 운동이 처한 곤경을 직시하고 더불어 대안운동 내지는 공동체가 열어가야 하는 새로운 단계에 대한 전망을 적극적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나우토피아>의 저자들은 이상적인 공동체를 ‘존재하지 않는 장소(U-topos)’로 만든 것은 오직 다수에 대한 억압과 지배의 환상으로 현실을 초월한 완벽한 총체성과 획일성을 추구했던 이들 때문이었고 역설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대안인문학운동 역시 지금/여기의 삶의 방식 가운데, 새로운 관계 방식, 새로운 삶의 방식이라는 새로운 현재를 구성하는 실험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의 곤경이 우리의 모색이 되고, 우리의 운동이 우리의 삶이 되는 과정을 계속해서 살아나갈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이런 형편은 대안인문학 운동, 나아가 모든 대안적 운동들이 처한 운명이기도 하지만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삶이 지닌 잠재력이 또 다른 현실을 만들어나가는 조건에 해당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자, 모든 생이 그렇듯 체념과 좌절은 매몰된 하나의 현실에서 오는 법. 우리는 오직 다른 현실 가운데, 다른 관계 가운데 구원받을지니, 그것은 발굴과 연대의 힘 가운데서만 가능할 것이리라^^

 

 

 

영혼의 안녕을 묻는 방식의 발명을 위하여

 

 

신현아

 

 

1. 일과 영혼: 자기해방되었나요?

 

“저는 연구모임 아프꼼의 연구원입니다. 활동한 지는 4년쯤 되었습니다. 아프꼼에서 제가 하고 있는 것은 전반적인 일입니다. 아무거나 다 합니다.”

 

언젠가부터 내가 ‘아프꼼’으로서 나를 소개할 때 해왔던 말이다. 아무거나, 전반적인 일을 한다는 말은 한 편으로는 이제는 ‘짬 좀 찼다’는 것의 겸손이기도 하겠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오히려 내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에서 나온 자기방어이다. 부끄러움. 연구모임 아프꼼은 ‘일’로 자신을 소개하는 곳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가짐으로, 기쁨과 슬픔과 자부심과 몸 둘 바로 자신을 전해야 하는 곳인데, 나는 어째서 일로 자신을 소개하는가. 그래서 스스로에 대한 자신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 우리는 <배수아와 새벽의 극장>이라는 행사를 치루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노력을 기울여 만들어 낸 시간들. 그런데 정말 어처구니없게도 내가 이 행사에 대해 가장 먼저 기억하는 것은 영상 상영 초반에 합이 맞춰지지 않았던 것, 뒤풀이 테이블 세팅이 잘 되어 있지 않았던 것 등이다. 생각해보면 우습다. 이 행사에는 아프꼼이 언제 이런 격려를 받아보았을까 싶을만치 어느 때보다도 많은 사람들이 와서 축하해주었고,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서 목소리, 힘을, 마음을 보태주었고, 따뜻한 격려를 보내주었는데, 나는, 왜, 고작, 치킨이 미리 도착하지 않은 것에 노심초사하였던 것일까. 정작 가장 많이 마음을 썼던 사람도 좋은 행사였다고, 기뻤다고, 사소한 것에 마음쓰지 말자고 하는데, 나는 왜.

 

 

그러니 이런 마음이 ‘소진’의 한 단면이라고 할 것이다. 나는 이러한 나의 소진을 들키는 것이 부끄러웠다. 좋아서 하는 일이어야 하는데, 그래서 다른 사람도 북돋아야 하는데 소진되어 있다는 것이 다른 팀원들에게 미안했고 전해지지 않았으면 하였다. 게다가 나보다 힘들게 일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내가 감히 입 밖으로 내어 ‘소진’을 말하는 것은 ‘문제적’이고 ‘못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랬을 때 오히려 ‘일’은 하나의 좋은 알리바이가 된다. 나는 나 스스로에게도 내가 소진되었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영혼이 소진되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더 ‘일’에 ‘실무’에 매진하였다. 다른 팀원들에게 힘든지를 묻기 전에 일정에 맞춰 진행되었는지를 물었고, 일이 끝나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기보다도 집에 내려가서 잠을 잤다. 그때는 그것이 참 절실하였다. 사람들이 나에게 “무리하는 것 아니냐”고 걱정하면서 물으면 나는 오히려 의아했다. “일이 안되고 있나요? 잘 되고 있지요? 그럼 뭐가 문제인가요?”라고 말하면서. 이 말은 결국 “내 영혼에 대해 묻지 말아주세요. 나도 당신의 영혼을 묻지 않을 게요.” 라는 말에 다르지 않았으리라.

 

 

「이행과 자기해방의 결속체들」은 애씀과 그에 따른 소진에 대한 걱정이며, 또 한 편으로는 그 소진으로 인해 해방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질문이다. 소진은 자기해방이 아닌 족쇄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기해방되었느냐는 이 질문에 답하자면, 언젠가부터 나는 소진되었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소진되면서부터 나는 자기 해방이라는 것을 애써 잊었다.

 

 

2. 소진과 성장통의 사이: 당신의 영혼은 안녕한가요?

 

물론 소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조심스럽다. 소진과 피로에 대해 말하는 순간 다른 사람에게 그 피로가 전염되어 버리지는 않을까하는 걱정도 들고 무엇보다도 오히려 ‘저 이만큼 힘들었어요’하는 투정으로 비춰지는 역효과가 나는 것이 걱정스럽다. 게다가 간단하게 소진이라고 하였지만, 실은 여전히 이것이 ‘소진’인지도 긴가민가하다. 한편으로 일에 매진하면서 어떤 부분에서는 진행자로서, 선배로서 성장한 면도 분명히 있고 일이 손에 익어가는 과정에서 느낀 성취감도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그저 ‘성장통’일 뿐인데, 내가 그것을 ‘소진’이라고 생각하여 내 팀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도 불안하다. (실은 나에게 가장 큰 불안은 지역적재생산구조에서의 소외보다도 이것이다. 피곤하고 흔들리는 내 마음이 ‘소진’인지, ‘성장통’인지, ‘부대낌’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정하자고 하는 것에는, 결국 공동체의 건사는 이 ‘그 무엇’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가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라는 고민 때문이다.

 

 

성장통이라고 부르든, 소진이라고 부르든, 이것은 결국 공동체를 건사하는 사람이 마주하는 그 무엇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왜 소진되었나’를 묻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 무엇을 말할 것인가’이다. 왜 소진되었나를 묻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어떤 공동체든 간에 일은 많고 사람은 없고 관계를 건사해야겠다 싶으면 근육부터 쑤신다. 그러다보면 신경질이 나고 남 탓부터 하기 십상이다. 그렇다면 ‘왜’가 아니라 ‘어떤’ 소진인가를 말하자면 그것도 조심스럽다. 자칫하면 ‘피로자랑대회’가 되거나, 덜 피로한 사람이 더 피로한 사람에게 어쩐지 미안해하게 되어서 결국 ‘일’을 어떻게 나누어야 하는가에 대한 것으로 귀결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일을 잘 나누는 것은 공동체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런 것에 조심을 기하다 보면, 말하는 자체가 조심스러워져서 결국 자신의 상태에 대해 말하지 못하고 입을 닫게 되는 상황도 생긴다. 또는 더 이상 영혼에 대해 말하기도 지친 사람에게 넌 왜 그렇게 축 쳐져 있냐고 닦달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니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필요한 발명은 서로의 영혼에 대해 잘 묻고 말하는 방법, 그리고 그 건사를 통하여 그 무엇을 다른 에너지로 바꾸는 순환에 대한 것이다.

 

 

3. ‘그 무엇’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문제는 혼자서 ‘그 무엇’에 대해 골몰하다 보면 ‘내가 잘 하고 있나? 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 사람들을 잘 못 챙기고 있는 것 같은데? 어쩌지? 아 몰라, 일이나 하자.’ 하는 식의 공회전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공회전을 깨어주는 것이 바로 다른 사람의 목소리이다. 나를 흔들어 잠에서 깨워주는 목소리. 그 목소리는 단지 ‘잘하고 있어’라는 말이 아니라, ‘나는 이러이러한 점이 이런데, 너는 어떠니?’라는 두드림이다. 나는 거기에 답해야 한다. ‘너의 이러이러한 점에 나는 이러이러하게 응하고 싶어.’라고 말해야만 한다. 여기에서 소진과 성장통은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증상을 어떻게 체감하는가의 문제가 된다. 혼자 공회전하다가 삼켜버렸을 때, 그것은 소진이 되고,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나누어서 다시 되짚어 보았을 때 그것은 성장통이 된다.

권명아님의 「이행과 자기해방의 결속체」는 공회전에 빠진 나에게 ‘자기해방을 잊지는 않았니?’ 라는 물음이 되었고, 차가영님의 「이방인의 자기해방」은 누군가의 뜨거움을 내가 미처 몰랐다는 미안함과 뜨거움을 어떻게 받아 안을지에 대한 요동이었다. 그리고 엄준석님의 글은 내가 뒤로 밀어놓았던 시간들이 얼마나 반짝이는 것이었는지 다시 되새기는, 기쁨을 다시 캐내는 전이가 되었다. 아, 그랬구나. 우리가 정말 멋진 일들을 하고 있었던 것이 맞았구나. 어떤 치하보다도, 칭찬보다도 ‘나는 뜨겁고 싶었어’, ‘나는 참 기뻤어’와 같은 말들이 다시 일깨우고, 소진을 성장통으로 바꾸어주는 것이다. 1년간 나는 진행자로서 성장하였고, 어느 날은 마법사였고, 거리의 악사였고, 신경질적으로 몰아치는 사람이기도 하였고, 널브러져 있기도 하였다. 그리고 누군가를 챙기지 못하였고, 뜨거움에 응하지 못하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짬짬이 별 일 없냐고 안부를 묻기도 하였다. 그 전부가 이 시간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부대껴 온 시간에 비하자면 참으로 짧은 이 시간, 마음을 토로하고 써서 전하는 이 짧은 시간이 우리가 우리를 다시 만나는 공간이 되어, ‘부사적으로’ 그 긴 시간을 전혀 다른 시간으로 만들어 놓는다. 물론 이 마음의 파도가 그 간의 피로를 전부 씻은듯이 낫게 하지 못하고, 짧은 요동으로 그칠지도 모른다. 그러면 또 누군가가, 내가, 말해야만 한다. 우리 글을 써보지 않을래?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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