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혼과 증오와 국정화

 

 

 

 

권명아

 

 

 

 

 

 

   올해 아이를 잃고 상심에 잠겨 있던 오다기리 조가 <과자의 집>으로 복귀했다. 드라마는 “너무 무리하지 마라”는 할머니의 염려 담긴 말로 시작한다. 친구를 구하기 위해 아깝게 죽은 또 다른 친구의 장례식에서 돌아오며, 할머니는 타로에게 ‘죽음이 들러붙지 않게’ 하기 위한 작은 의례를 하고 집으로 들여보낸다.

 

 

   문명의 성격과 종교를 막론하고 인류는 ‘억울한 죽음’을 두려워했다. 이는 단지 전근대적 문화의 잔재라고 보기는 어렵다. 원혼을 달래 저세상으로 보내려는 여러 종류의 의례는 죽음에 대한 인류의 집단지성의 산물이다. 근대 ‘과학’인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도 죽음을 대하는 인류의 오래된 의례(토템과 터부)를 이론적 분석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억울한 죽음에 대한 인류의 공통적인 두려움은 이 죽음이 산 자에게 들러붙을 가능성에서 비롯되었다. 억울한 죽음은 반드시, 살아 있는 자들의 세상으로 되돌아온다. 집단적 의례로서 애도는 애초에 이 두려움에서 시작되었다.

 

 

   훗날 역사가가 2015년을 기록할 때 세월호 청문회와 혐오 선동이라는 두 항목은 빠뜨릴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2015년은 이런 역사 기록이 훗날에도 가능할지를 판가름하는 ‘역사적인 시간’이기도 했다. 세월호 사건이 재난이고 혐오 선동이 차별을 조장하는 증오 정치의 산물이기에 두 문제 사이에는 어떤 논리적 인과관계도 없다. 그러나 다른 맥락에서 볼 때 이 둘은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다. 억울한 죽음은 산 자 혹은 삶의 공간에 ‘들러붙는’ 힘이 있다. 들러붙는 힘에 있어서 증오보다 강한 정동은 거의 없다. 억울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애도를 통해 상쇄되지 못하면 죄의식을 남긴다. 역사적 사례를 살펴보면 해소되지 못한 죄의식은 희생양을 찾아 그 대상에게 ‘죄’를 덮어씌우곤 했다. 이런 희생양을 찾는 제의의 근대적 버전이 파시즘의 증오 정치이다. 억울한 죽음과 증오는 모두 ‘들러붙는 힘’과 산 자를 죽일 수도 있는 강력함을 갖고 있다.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직후, 아주 짧은 기간이지만 ‘우리 모두’ 이 억울한 죽음 앞에 공통의 두려움과 죄의식을 느꼈다. 애도에는 시간과 절차가 필요하다. 그러나 정치 공동체는 그 시간과 절차를 지키지 않았다. 아니 시간과 절차를 앞질러, 희생양을 찾기에 분주했다. 억울한 죽음을 슬퍼하는 자조차 희생양의 목록에 올랐다. 미친 듯이 희생양을 찾기 분주했던 거대 미디어와 정치집단의 행태는 애도의 회피가 증오의 강도를 높이는 전형적 사례를 제공했다. 세월호 사건과 증오 정치는 정동의 차원에서 관련이 깊다.

  

 

   애도는 그 자체로 정치적이지 않다. 다만 죽음이 삶을 사로잡지 못하도록 풀어헤치는 것이 애도의 작용이다. 그런 의미에서 애도는 삶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산 자의 의례이다. 애도에 실패한 개인이 상실에 사로잡혀 삶을 지속하기 어렵다면, 애도에 실패한 공동체는 지속가능성이 사라지고, 재생산 위기에 봉착한다. 한국 사회가 이런 재생산 위기에 봉착한 것은 이미 오래전이다. 출산 거부와 사회적 타살에 가까운 자살률의 증가는 전형적이다.

 

 

   억울한 죽음에 대한 애도를 회피하는 정치집단이 출산 거부와 자살과 같은 사회적 재생산 위기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은 그런 점에서 ‘필연적’이다. 국정화 정책이 교육을 사회적 재생산의 관점이 아니라, 증오 정치의 기반으로 만드는 시도라는 점에서 이 정치집단은 한결같다. 억울한 죽음에 대한 애도의 회피와 증오 정치와 국정화는 참으로 한결같은 문제이다. 2015년 한국은 총체적인 재생산 위기에 봉착했다. 삶과 죽음을 아우르는 재생산의 정치가 절실한 때이다.

 

 

 

 

항쟁에서 퍼레이드로 그리고 퀴어 우주로

퀴어문화축제(서울, 대구) 참관기

 

 

 

 

차가영

 

 

 

 

1. 생명과 사랑의 지속으로서 항쟁

    태초에 항쟁이 있었다. 스톤월 항쟁. 그래 그것은 항쟁이었다. 오늘날 퍼레이드가 광장과 거리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항쟁 때문이었다. 항쟁이 국가와 국민이 맞서 싸우는 것이라고 할 때, 이 항쟁은 퀴어들이 이 세계 전체와 맞서며 자신들의 생명과 그 가능성을 드러낸 스파크였다. 마치, 지구의 생명이 탄생할 때, 전기적 자극이 바이러스를 만들어낸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이 항쟁은 퍼레이드를 산출한 전기 자극이고 그리고 앞으로 등장하게 될 우주를 예비하는 것이었다. 물론 저 항쟁은 고향이 아니고, 그곳의 순간으로 굳이 돌아갈 필요가 없고 오직 퍼레이드를 누비며, 우주로 나아가는 모험이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우리는 모두 우주여행을 곧 하게 될 것이다.

    다시 시작해보자. 스톤월 항쟁은 오늘날 퍼레이드가 싸우고자 하는 것의 기초를 제공해왔다. 싸움의 자세와 기초를 알려준 것이다. 퍼레이드가 싸움의 방식으로 사랑을 선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스톤월에 자발적으로 모여든 퀴어들은 서로를 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우선은 사랑이고 그것이 바로 항의였다는 것을 즉각적으로 보여준 바 있다. 달리 말해, 퍼레이드가 광장과 거리에서 사랑을 외치면서 싸우는 것은 이로부터라고 할 수 있다. 퍼레이드는 갖은 위험을 세계의 여러 스톤월과 같은 장소에서 뛰어 넘고, 걸으며 이루어지는 사랑이다. 그 때 사랑은 지역의 이름으로 기록될 것이고 어디에서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할 것이다.

 

 

2. 배제와 혐오에 맞서며

    퀴어문화축제는 매년 6~7월 사이에 서울과 대구에서 각각의 슬로건을 걸고 개최된다. 두 축제는 성적 소수자들이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며 배제되고, 주변화되는 것에 저항하기 위한 퀴어 인권/문화/예술운동의 방법 중 하나이다. -녀라는 이분법적 성별구분, 이성애중심 사회/결혼 제도, 이분법 속에 분류되지 않는 성적 다양성을 가진 사람들을 사회구성원으로 여기지 않는 차별적인 규범에 저항한다. 두 지역의 퀴어문화축제는 이를 바탕으로 하여 퀴어가 여기에 살고 있음을 외친다. 퀴어의 존재를 가시화하여, 퀴어들이 우리의 주변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퀴어들이 존재와 다양성을 인정받으며 사회 속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법이나 제도, 인식 개선을 마련해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퀴어를 가시화하는 운동은 존재의 다양성을 인정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 배려와 제도 획득의 한 방법이다. 퀴어 인권/문화/예술운동은 평소에도 많이 일어나고 있지만, 그것이 가장 가시화되는 날이 퀴어문화축제 기간 중에 열리는 퀴어퍼레이드이다.

    운동이 사회적으로 퀴어의 존재에 대해 드러낼수록, 이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시선도 생겨나고 있지만, 그 반대에서의 안티-퀴어의 움직임도 커지고 있다. 현대의 이성애중심의 사회규범은 그 자체가 안티-퀴어적이며,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퀴어에 대한 배제와 소외를 만들어 낸다. 하지만 현재 사회에는 일상적인 배제에 대한 문제의식보다는 퀴어 인권/문화/예술 운동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활동을 하는 일부 보수적 집단의 형성에 집중하고 있다. 퀴어에 대한 혐오를 축으로 모인 이들 집단의 행동은 퀴어 인권/문화/예술 운동을 사회의 전반적인 배제에 저항하는 모습이 아닌 퀴어와 안티-퀴어 간의 대립에만 초점을 두게 한다. 이는 퀴어들이 벌이는 차별적인 성규범에의 저항을 그들만의 싸움으로 여기도록 만든다.

    2015년은 퀴어문화축제를 반대하는 안티-퀴어의 축제개최 방해가 서울에서도 대구에서도 거세어 행사 개최의 어려움을 겪었다. 특정한 집단이 에이즈 공포, 가족윤리 침해, 이성애윤리 침해를 이유로 들며 행사 개최 계획 장소를 따라다니면서 장소 선점을 방해했다. 이뿐만 아니라 축제에 참가하는 인원을 보호해야 하는 시와 구의 행정부에서도 축제 개최를 허락하지 않아서 그 어려움이 더해졌다. 이들은 교통소통 저해’, ‘중립이라는 말을 내세우며 행사 개최를 불허했다. 퀴어에게 행사를 개최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면, 안티-퀴어에게도 장소를 제공해야 한다는 이유를 대며 행사를 허락하지 않았다. 때문에 안티-퀴어와 대치하고, 행정부에 항의하는 등 오랜 기간 투쟁을 벌인 끝에 서울과 대구는 퀴어문화축제를 개최할 수 있었다. 이 기다림을 보상받기라도 하려는 듯 퀴어문화축제 기간 중 있었던 두 지역의 퀴어퍼레이드는 서울 3만여명, 대구 800여명이라는 퍼레이드 역사상 최고의 참가인원을 기록했다. [각주:1]

    나는 2015년의 퀴어문화축제 기간 중 서울과 대구의 퀴어퍼레이드에 다녀왔다. 서울의 퀴어퍼레이드는 세 번째 참가였고, 대구 퀴어퍼레이드는 첫 참가였다. 두 퀴어문화축제의 개최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SNS를 통해 전해들을 수밖에 없었던 지역의 퀴어이론 연구자인 나에게 2015년 서울과 대구의 퀴어퍼레이드에 참가하기까지의 시간은 유달리 길었고, 불안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수년간 지속적으로 이어지며 점점 더 커지는 운동의 힘이 혐오와 불허로 인해 사그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덮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랜 기간의 투쟁 끝에 얻어낸 두 지역의 퍼레이드에 참가하는 것이 더 의미 있고, 퍼레이드 현장의 열기가 힘있게 느껴졌다.

 

 

 

 

3. 광장의 스펙터클과 게토- 보호받는 것과 저항의 사이에서

    올해 제16회를 맞은 서울퀴어문화축제는 사랑하라! 저항하라! QUEER REVOLUTION!’이라는 슬로건을 걸고 69일부터 28일까지 열렸다. 서울 퀴어문화축제는 연초에는 613()~21()8일간의 일정으로 계획되어있었다. 그러나 안티-퀴어 세력(나라사랑·자녀사랑운동연대, 바른성문화국민연합, 건강한사회모임 등)의 집회신고 방해와 서울시청 및 대학로 관할 경찰서의 집회신고 거부, 남부경찰서의 집회신청 희망 단체 일주일동안 밤낮 없는 줄세우기에 의해, 축제 개최를 결정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러한 상황에 의해 퀴어퍼레이드 장소는 서울시청광장에서, 대학로로 개최 계획이 변경되었다가, 다시 서울시청광장에서 확정되는 과정을 겪었다. 이에 따른 영향으로 축제는 개막식, 퍼레이드, 파티가 하루에 진행되는 이전까지의 방식과는 달리 진행되었다. 개막식(69), 파티(613), 퍼레이드(628)가 다른 날로 나뉘어 진행되었고, 퀴어 영화제(618~21)가 그 사이에 치러지는 약 3주간의 일정으로 변경되었다.

    퍼레이드 당일 현장의 분위기는 폭발적인 축제의 모습이었다. 올해 서울 퀴어퍼레이드에 참가하면서 나는 그 입구에서부터 놀랐다. 거리의 운동이라고 생각했던 퀴어퍼레이드가 잔디밭이 깔린 곳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광장을 두르며 가득 메우고 있던 83개의 행사부스들과 이를 살펴보지도 못하게 꽉 차있던 사람들의 모습은 압도적이었다. 넓은 시청광장이 꽉 차게 느껴질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장 놀랐던 것은 퍼레이드 행렬이 출발하기 전에 본 어떤 할머니였다. 가족들과 함께 온 것으로 보이는 할머니는 서울 퀴어퍼레이드 슬로건이 적힌 부채를 들고 행렬 안에 있었다. 그 할머니는 세 번의 퍼레이드 참가 동안 퍼레이드 행렬 속에서 처음 본 할머니 참가자였다. 점점 그 규모가 커지고 있지만, 몇 개월 간 서울 퀴어퍼레이드 준비 소식을 SNS를 통해 전해보면서 이번에는 절대 이루어질 수 없을 거라 의심했던 것들이 현장에서 모두 이루어지고 있었다. 사람으로 꽉 찬 광장, 배로 늘어난 참가 인원, 그 속에 함께 있던 퀴어들과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 이들이 합쳐져 만들어낸 축제의 형상은 일상 속에서 행해지는 안티-퀴어적 배제에서 벗어나 자긍심에 가득 찬 퀴어들의 웃는 얼굴을 만들어냈다. 마치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들처럼 보였다. 퍼레이드는 자긍심을 가지고 모인 이들의 행복한 춤과 노래를 통해서 채워졌고, 서울 길거리에 그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퍼레이드 행렬 속에서 함께 걸으면서, 나는 자긍심 행진을 함께 하고 있다는 행복감과 반대로 어떤 찝찝함을 느꼈다. 퀴어들이 이렇게 가시성을 얻고 당당히 사회 속으로 나올 수 있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에 건물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노랫소리, 광장을 둘러싸고 있던 철펜스, 경찰들의 모습이 겹쳐졌기 때문이다. 이번 서울의 퀴어퍼레이드는 퍼레이드의 크기도, 안티-퀴어 단체의 혐오표현도 커져서 경찰들의 보호가 눈에 보일만큼 가까이에서 이루어졌다. 경찰들은 안티-퀴어들이 침범하여 행사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광장을 둘러싸는 철펜스를 둘러 그 앞에 서있었고,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것은 퍼레이드 행렬을 혐오에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내 눈에는 보호보다는 경찰의 보호막에 갇힌 것처럼 보였다. 16년의 역사 속에서 지속되어온 퀴어퍼레이드가 만들어낸 참가자들 간의 결속성과 연대성을 이용해서 이들을 다시 광장이라는 게토 속에 가둔 것 같았다. 일 년에 한번 서울에서 지역의 경계와 퀴어 배제 사회의 경계를 넘어 탁 트인 광장에서 만났지만, 퀴어들을 맞이한 것은 또 다시 이들을 가두는 경계였던 것이다. 그리운 고향에서 퀴어들을 맞이한 것은 우리 모두 함께 하자는 연대가 아니라, 철펜스와 경찰들이 서있는 경계 안에서만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라는 경계였다. 이 경계는 퀴어들이 가득한 거리에 울려퍼지는 음악소리가 건물에 튕겨 다시 행렬 속으로 돌아오게 했다. 그리고 광장에서 옷을 벗고 다니는 모습, 성기모양의 쿠키와 부채가 보이는 것, 여성의 성기를 직접 지칭하는 말들을 구경하며 이러한 모습 때문에 퀴어는 인정받을 수 없다’, ‘동성애는 지지하지만 저런 건 싫다’, ‘왜 자꾸 나와서 눈에 띠려고 하는지 모르겠다와 같은 말을 통해 퀴어퍼레이드를 소비하는 스펙터클을 만들어냈다.

    서울의 퀴어퍼레이드는 전국에서 모인 퀴어들의 엄청난 수와 그리고 그에 맞춰 풍성해진 행사구성을 보여주었다. 이를 통해 퀴어퍼레이드가 앞으로도 퀴어의 인권/문화/예술 운동의 기반을 다지고, 그 운동의 하나로써 앞으로도 계속 운동을 해나갈 것을 증명해보였다. 그러나 오랜 기간 서울에 집중된 퍼레이드는 퀴어들의 전국적인 움직임을 커다란 광장에 집합시켜 그 속에 가두고 배제를 지속하려는 안티-퀴어의 모습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따라서 서울의 퀴어퍼레이드는 이제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경계를 넘어 퀴어 인권/문화/예술 운동의 또 다른 모습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발견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나는 새로운 운동의 가능성을 75일에 열린 대구 퀴어퍼레이드에서 찾아보고자 했다.

 

 

 

 

4. 광장의 패러디와 저항의 가능성

    올해 처음 참가하였던 대구의 퀴어퍼레이드는 지역의 유일한 퀴어문화축제이다. 따라서 퍼레이드 참가는 서울과 얼마나 다르고 또 같으며, 어떤 특성을 가지고 퍼레이드가 진행되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기회였다. 대구 퀴어문화축제는 올해로 제7회를 맞았다. 대구 퀴어문화축제는 원래 627일 퍼레이드를 진행하기로 되어있었다. 하지만 안티-퀴어 세력의 방해로 인한 서울퀴어퍼레이드의 일정 변경이 대구에도 영향을 미쳤다. 대구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는 서울의 퀴어퍼레이드 일정과 맞추기 위하여 대구퀴어퍼레이드 일정을 변경하고자 했다. 그러나 변경과정에서 대구중구청의 교통소통을 저해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인한 집회신청 거부와 동성로 야외무대시설의 사용을 불허 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에 저항하며 조직위원회는 집회를 열었고, 이후 대구지방법원의 퍼레이드 집회허가 판결로 퍼레이드가 75()로 변경되면서 개최 확정되었다. 따라서 제7회 대구 퀴어문화축제는 사진전(71~10), 퍼레이드(75), 영화제(711~12), 연극제(717~19)로 구성되었고, 71()~19일()까지 약 3주간 진행되었다.

    당일 대구에서 본 모습은, 서울 퀴어퍼레이드 퍼레이드에서 대구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장이 외쳤던 서울에서 전반전! 대구에서 후반전!”의 모습과는 달랐다. “서울에서 전반전! 대구에서 후반전!”이라는 말은 서울의 운동 열기를 대구에서도 이어나가 운동을 더 폭발시키자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이를 통해 지역에서도 퀴어 인권/문화/예술 운동이 촉발될 수 있는 가능성을 마련하자는 뜻이 담겨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대구 퀴어퍼레이드에서 본 것은 서울의 패러디였다. 서울에서 마주한 퀴어들의 게토를 떠나 대구에서 새로운 운동을 보고자 했다. 하지만, 대구 또한 서울과 같은 퀴어들의 게토였다.

    대구의 퍼레이드 모습이 서울의 퀴어퍼레이드의 패러디로 나타난 것은, 한국의 서울 중심 사회구조의 현실이 지역의 퀴어 인권/문화/예술 운동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역에 나타나는 운동, 문화, 예술에 대한 불모성은 지역 퀴어의 인권 감수성 부족을 야기하고 있었고 이것이 운동에도 영향을 미치는 듯 했다. 이는 대구라는 지역성을 살리며 운동을 해나갈 수 있는 방법론 마련을 막는 것이었다. 때문에 지역의 정체성 마련이 부족한 대구에서 퍼레이드를 하려면 서울의 모습을 모방할 수밖에 없었다. 퀴어 인권/문화/예술 운동의 커뮤니티가 적은 대구는 부스 행사 구성이 적었다. 대구에서 활동하고 있는 무지개인권연대’, ‘대소인(대구 경북 성소수자 인권연대)’, ‘청소년교육문화공동체 반딧불이등이 부스를 마련하고 있었지만, 부스 행사의 대부분이 서울에서도 보았던 것이었다. 대부분 서울에서 주로 활동을 하고 있는 단체들이었고, 무대행사 또한 절반 정도가 서울을 주 무대로 하는 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행진의 방식 또한 마찬가지였다.

    재미있는 것은 퀴어 퍼레이드를 보호하고자 했던 경찰들의 모습, 안티-퀴어 집단이 혐오를 외치는 모습 또한 서울의 패러디였다는 것이다. 경찰들은 동성로 야외무대시설, 부스 행사 장소 근처에 철펜스를 치고, 그 앞에 서있었다. 행진을 할 때도 서울에서와 같이 줄지어 손을 잡고 행렬과 함께 걸었다. 안티-퀴어 집단은 서울에서 보았던 피켓을 그대로 사용했다. 그들은 박원순 타도하자’, ‘박원순 OUT’, ‘동성애 OUT' 등과 같은 피켓을 재사용하였고, 퍼레이드의 무대행사가 열리는 반대편에 서울과 똑같이 무대를 설치하는 모습 또한 보여주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장소가 좁아서 그들이 보내는 혐오의 말들을 좀 더 가까이에서 들었다는 것뿐이었다.

    대구의 퀴어문화축제는 서울이 아닌 지역에서 일어나는 유일한 퀴어문화축제로서 다른 지역에서도 축제를 통한 항쟁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동시에 그 모습 뒤에는 운동, 보호, 혐오의 프레임이 모두 서울이라는 지역을 모방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는 현재 퀴어 인권/문화/예술 운동에서 짚고 가야할 문제점이 무엇인지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점은 지역이라는 공간에서 서울을 모방하지 않고, 지역성을 토대로 하며 정체성을 가지는 운동방법을 발명해야 할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대구에서의 퀴어퍼레이드 경험은 현재 지역에 만들어져 있는 퀴어 커뮤니티는 어떤 것이 있으며, 이를 통해 앞으로 퀴어 인권/문화/예술 운동이 어떤 방향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살펴보게 하였다.

 

 

 

5. 항쟁에서 퍼레이드로 그리고 퀴어 우주로

    지금까지 퀴어 퍼레이드는 서울이나 혹은 대구에서 퀴어인 것이 가능한 찰나의 공간을 만드는 것을 통해 이어져왔다. 이는 퀴어퍼레이드의 현장을 가시화하여 공간의 스펙터클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매년 전국의 퀴어들이 퍼레이드를 하기 위해 한곳으로 모이며 만들어낸 공간의 스펙터클은, 운동에 있어서의 퀴어 게토를 형성하게 되었다. 게토의 형성은 퀴어들이 한 공간에 모이는 것을 통해, 퀴어의 삶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위로와 위안을 얻게 한다. 그러나 게토 안에서 얻는 위로와 위안은 투쟁의 모습을 지우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이는 퀴어들이 만들어낸 퍼레이드라는 항쟁을 현재 사회의 고정적이고 차별적인 성규범에 반대하는 우리 모두의 투쟁이 아니라 그들의 투쟁으로 보이게 한다. ‘그들의 투쟁 모습은 퀴어들이 사회에 대항하는 투쟁의 이유를 퀴어들만의 인권을 가지려 하는 투쟁의 이름으로 바꾼다. 이는 점점 안티-퀴어의 모습이 사회에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문제가 아니라 특정 보수집단과 퀴어들 간의 싸움인 것처럼 가시화되게 한다. 여기에 더해 보호를 이유로 퀴어를 둘러싼 펜스를 더 단단하게 치고, 경찰들이 더 가까이에서 퀴어들을 따라다니게 할 것이다. 점점 퀴어가 지금-여기 살고 있다는 것은 사라지고, 게토의 선명함이 퀴어들을 계속 괴롭힐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퀴어 인권/문화/예술 운동은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 것일까? 한곳으로만 향했던 퀴어들의 이동 선이 게토를 선명하게 하는 것이라면, 이 선의 방향을 바꾸는 것으로 더 많은 운동을 만들어낼 수 있지는 않을까? 나는 앞으로 만들어갈 운동의 방식으로, 서울과 대구가 만들어낸 퀴어 항쟁의 역사들을 하나의 연대점으로 보며 다른 연대의 점들을 찍어 가보려 한다.

    현재 지역은 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인권 모임이 생겨나고 있다. 경북대 성소수자 인권 모임인 ‘Kivans’[각주:2]2000년도부터 결성되어 가장 오래 활동하고 있고, 그 이후 포항공대의 ‘LinQ’[각주:3], 부산의 부산대학교 성소수자 동아리 ‘QIP(Queer in PNU)’[각주:4], 울산대학교와 울산과학기술대가 연합하여 만든 성소수자 커뮤니티 ‘THIS WAY’[각주:5], 전남대학교 성소수자 동아리 라잇온미[각주:6] 등이 결성되어 현재 활동 중이다. ‘LinQ’라잇온미는 소속 대학의 학생을 중심으로 회원을 형성하고 있다. ‘Kivans’, ‘QIP’, ‘THIS WAY’는 경북권, 경남권, 울산권에 있는 성소수자 모두가 회원으로 가입가능하다. 이 동아리의 회원수는 늘어가고 있는 추세이며, 이들은 동아리 내 활동뿐만 아니라 각 지역 동아리들끼리의 지속적인 만남도 가지려 하고 있다. ‘대학성소수자모임연대(QUV-Queer university)’에의 가입을 통해 서울의 성소수자 인권 동아리와도 연대하려 한다. ‘QIP’는 서울의 성소수자 부모모임과의 연대를 통해 부산에서 성소수자 부모모임을 추진하고 있다. 이들 동아리는 지역 퀴어의 인권/문화/예술 운동의 장을 마련하려는 움직임을 지속적으로 보이고 있고, 앞으로 그 수는 점점 늘어갈 것으로 보인다.

    대학에서 결성된 성소수자 인권 동아리는 대학이라는 공식적으로 승인된 시스템에 새로운 프레임을 도입하게할 것이다. 운동에 있어서 불모성을 가진 지역이라는 공간에서 퀴어들이 공식적인 시스템과의 만난 것은, 운동이 없는 절멸의 자리에서 새로운 결속을 만들어내려는 움직임으로 보아야 한다.[각주:7]그것은 이미 있는 것으로부터 변용하고 전유하여 리듬과 언어를 재활성화하는 것[각주:8]에 가깝다. 지역 대학의 성소수자 인권 동아리는 서울과 대구에서 이미 시작되어 온 운동의 역사를 지역에서 변용하고 전유하여 지금-여기에 살고 있는 퀴어들의 언어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오랜 시간 지역에 자리 잡고 있는 대학을 전유하여 퀴어들이 가시성을 획득하고, 이들의 결속을 용이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지역 속에서 이루어지는 안티-퀴어적 배제에 저항하고, 퀴어들이 존재와 다양성을 인정받으며 사회 속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규범을 마련해가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움직임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지역의 퀴어 인권/문화/예술 운동은 변용과 전유를 통해 정체성을 형성하고 새로운 결속의 연대로 항쟁의 점들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스톤월 항쟁이 세계를 여행하며 서울과 대구의 퀴어문화축제에 닿았다. 서울과 대구의 퀴어문화축제는 광장을 만들며 운동의 연대점을 만들어내었다. 그 광장을 누비던 전국의 퀴어들은 자신들이 있는 지금-여기에 모여 새로운 결속의 점들을 만들어내려 하고 있다. 이 점들이 모여 별자리가 될 것이고, 또 다른 별들의 점을 만들어 이어갈 것이다. 이는 퀴어들이 그들이 아니라 우리이며, 이들이 거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여기에도 있음을 증명하게 될 것이다. 퀴어들의 항쟁은 연대를 통해 혐오가 아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우주여행을 곧 하게 될 것이다.

 

 

 

 

 

※ 이 글은 『오늘의 문예비평』 제99호 〈포커스〉란에 실렸습니다.

 

 

 

  1. 1. 2000년 50명의 참가로 시작되었던 서울의 퀴어퍼레이드는 2001년 250여명으로 늘어나기 시작하여 2011년 1천여명, 2012년 1천5백여명, 2013년 약 1만여명, 2014년 약 2만여명으로 참가자 수가 급증했다.(http://www.kqcf.org 참조) 2009년부터 시작한 대구 퀴어퍼레이드 또한 처음에는 5명으로 첫 퍼레이드를 진행하였지만, 2011년에는 40여명, 2014년에는 600여명으로 참가자 수가 점점 증가하고 있다.(http://queer.or.kr 참조) [본문으로]
  2. 2. 경북대학교 ‘Kivans’는 2000년 9월 22일에 결성되어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는 경북대학교 학생들의 온/오프라인 이반인권모임이다. 대구, 경북지역에서 가장 꾸준하고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대학생 모임이다. 경북대학교에만 제한을 두지 않고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된 퀴어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과 퀴어를 이해하고 친구가 되길 원하는 ‘일반’ 또한 회원으로 받고 있다. 정기 모임과 채팅, 이벤트, 스터디 등으로 회원들끼리의 친목을 도모하고 학교 및 사회생활을 하는 데 활력소가 되기 위해 노력중이며 대외적인 동성애자 인권을 위한 활동 및 에이즈 예방 활동 등으로 그 활동 범위도 넓혀가고 있다. (http://kivans.kr/ 참조) [본문으로]
  3. 3. 포항공대 성소수자 동아리 ‘LinQ’는 2012년 2월 7일 결성된 동아리이다. ‘LinQ’라는 이름은 세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 번째, ‘LinQ Is Not Queer’이라는 뜻이다. 이는 Queer라는 단어가 가진 ‘이상한, 괴이한’의 뜻을 살린 것으로, 성소수자로서 부정적 시선을 극복하고 자신감을 가질 수 있기를 희망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두 번째는, ‘LinQ [liŋkjuː] ≒ Link [liŋk]’로, 학내 구성원과 교류의 기회를 만들고, 소통을 통한 변화를 추구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세 번째, ‘邻Q. 이웃(린) Queer’로서의 ‘LinQ’는 퀴어가 지금 여기 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성적 지향, 성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성찰’을 통해서 ‘진솔하며 건전한 인간관계를 모색’하고, ‘발전적이며 행복한 삶에 대한 탐색과 지향’으로 ‘일상에 개개인의 '다름'을 녹여낼 수 있는 배려와 존중의 문화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LinQ’는 세미나 개최, 회원 및 학내 구성원 인터뷰, 회원들의 생애 기록 활동들을 하고 있으며, 이 기록들을 담은 두 권의 간행물 『HELLO WORLD』(2014년 5월 20일 발간), 『IMPONDERABILIA』(2015년 5월 20일 발간)을 발간하였다. (https://sites.google.com/site/postechlinq/home 참조) [본문으로]
  4. 4. 2013년 10월 결성된 'QIP(Queer in PNU)'는 부산 및 경남 지역에 거주하는 성소수자를 위한 인권 동아리이다. ‘QIP’는 대자보 부착, 학술 세미나 등 학내 성소수자 인권 운동을 기반으로 학내 구성원들에게 지속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또한 강연, 파티, 영화제 등의 행사를 통해서 성소수자 학우들과 교류하려고 한다. 또한 이러한 활동을 통해 학내 구성원뿐만 아니라 경남지역 성소수자와도 교류하려 한다. ‘QIP’는 9월에 동아리 회원들의 다양한 말이 기록된 간행물 『e²』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QIP’ 간행물 『e²』 참조) [본문으로]
  5. 5. 울산대학교와 울산과학기술대학교가 연합하여 만든 퀴어 동아리 'THIS WAY'는 2015년 6월에 결성되었다. ‘THIS WAY’는 울산뿐만 아니라 경상권 지역에 사는 퀴어라면 모두 가입 가능하다. ‘THISWAY’는 친목 도모와 인권보호 중심으로 세미나, 개강총회, 타학교와의 소통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 ‘대학성소수자모임연대(QUV-Queer university)’에 가입한 ‘THIS WAY’는 다른 지역 동아리간의 교류를 도모하는 활동도 하고자 한다. (이가영, <우리 대학에도 뜬 무지개>, 울산대학교 신문, 2015.10.07. 참조 http://media.ulsan.ac.kr/newspaper/university/university/Default.aspx?crud=V&idx=4388&type=N&mode=W&page=2) [본문으로]
  6. 6. 전남대학교 성소수자 동아리 ‘라잇온미(Lights on me)’는 2014년 10월 13일 결성되었다. ‘라잇온미’라는 이름은 퀴어 영화 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전남대학교 학내의 성소수자들만이 가입 가능하며, 이성애자 및 타대학 구성원의 가입은 허용하지 않고 있다. 전남대학교 내의 성소수자들이 모여 서로의 고민과 삶을 나누고 토론하며 서로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동아리가 되고자 하는 것이 목표이다.(http://koreaqueer.tistory.com/16 , http://cafe.naver.com/klccangminlove/1322596 참조) [본문으로]
  7. 7. 인용은 권명아, 『무한히 정치적인 외로움』, 갈무리, 2012, 7쪽 참조. [본문으로]
  8. 8. 「인문장치를 ‘발명’하자!-제1회 좌담회 <흐름의 재구축과 역장치적 아포리아>」, 『문화/과학』, 2015년 여름호, 382쪽. [본문으로]

 

 

 

시위와 '국제' 세습 권력

 

 

권명아

 

 

 

 

 

 

 

    11월14일 ‘민중 총궐기’ 이후, 시민들은 시위를 둘러싼 공방전과 과잉 진압으로 인한 치명적 인명 피해 사건을 접하며 ‘과거의 망령’과 다시 대면하고 있다. 오랜 군사독재의 역사 속에서 시위는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대중적 저항의 한 형식이었다. 한국의 근현대사는 시위의 역사 없이 기술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가까운 일본과 비교해 봐도 한국 사회에서 시위는 익숙한 ‘반복적 현상’으로 치부되는 경향이 있다. 민중 총궐기 이후의 상황을 보아도 시위를 평가하는 해석 방식은 다소 반복적이다. 시위가 끝난 이후 이에 대해 의미 부여를 하고, 시위에서 제안된 쟁점을 확산해나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해석 방식을 만들어야 한다.

 

 

   대형 미디어를 매개로 이어지던 ‘폭력 시위’ 매도나 원색적인 이념 몰이는 이제 테러라는 쟁점까지 이어 나가고 있다. 이런 반지성적 선전에 대항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해석이라는 지적 작업이다. 시위란 하나의 의사 표현 행위이기에 해석과 의미 부여를 통해, 단지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계속 재생산되는 의미 작용이 된다. 일본의 역사학자인 오구마 에이지는 최근 일본 사회에서 발생한 시위를 기록하고 재구성한 <수상관저 앞에서>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였다. 영화 작업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역사학자이지만 역사 자료를 기록하고 해석하듯이 시위를 또 다른 역사 자료로서 기록하고 해석했다. 이런 해석을 통해 시위는 익숙한 기정사실이 아니라, 읽고 해석하고 소통하는 상호작용이 된다. 이 상호작용이야말로 민주주의적 과정 그 자체이다.

 

 

   국제적 테러의 위협을 국내의 치안 강화를 위해 활용하는 것은 어쩌면 국제적 현상이다. 그러나 ‘민중 총궐기’라는 조금은 오래된 이름의 이 시위가 국제적 맥락에 이어지는 것은 전혀 다른 지점이다. ‘한국의 시위와 아시아에서의 최근 몇 년간의 저항’이라는 영문 비평에서 대만(타이완)의 젊은 문화연구자인 추치신은 한국의 민중 총궐기를 홍콩, 대만, 일본과 비교하고, 공통성을 추출한다. 추치신은 먼저 홍콩의 ‘우산혁명’과 대만에서 2014년 일어난 시위가 모두 “교과서 개정에 대한 항의”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또 한국, 대만, 홍콩, 일본에서 ‘과거를 왜곡하는 교과서 개정’이 동시적으로 몇 년에 걸쳐 나타난 것은 이 지역에서 시차를 두고 ‘오래된 세습 정치권력이 재등장’하게 된 결과라고 분석한다.

 

 

   약간의 시차를 두고 대만, 한국, 일본은 모두 ‘오래된 세습 정치권력’이 다시 돌아와서, 이 세습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한 ‘역사 바꾸기’ 작업을 추진하는 유사한 길을 걸어가고 있다. 그런 점에서 서로 달라 보이는 대만, 홍콩, 일본, 한국에서의 시위는 ‘오래된 세습 권력의 재등장’과 이로 인한 아시아 지역 민주주의의 위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해석을 통해 볼 때 결코 ‘민중 총궐기’는 익숙한 반복으로 치부될 수 없다. 오히려 이런 익숙함의 감각이 해석을 위한 자리를 가려버린다. 국제적 맥락에서 민중 총궐기는 테러보다는 아시아 지역에서 ‘오래된 세습 정치권력이 재등장’한 신냉전 질서와 밀접히 연루되어 있다.

 

 

   탈냉전도 민주주의도 채 이룩하지 못하고, 다시금 미국과 중국 중심의 신냉전 질서로 급속하게 재편되는 세계 체제 속에서 아시아 지역의 민주주의는 후퇴를 거듭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후퇴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의 의문과 저항이 시차를 두고 홍콩, 대만, 일본, 한국에서 차례차례 대규모 시위로 나타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민중 총궐기야말로 국제적 문제이다. 시위는 끝났지만, 해석은 이제 시작되어야 한다.

 

 

 

 

 

 

세계 상실의 국정

 

권명아

 

 

 

 

 

 

 

   파시즘은 양차 세계대전 사이의 국가 간 세력관계에서 발생했다. 나치 최초의 구호인 “베르사유의 사슬을 끊자”는 1차 세계대전으로 구성된 세계 질서를 겨냥한 것이었다. “독일이 포위되어 있다”는 히틀러가 애용한 표현이었다. 독일에서 나치즘의 집권은 급변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돌파구를 찾지 못한 “꽉 막혀버린 변경의 역사”(밀턴 마이어)의 산물이다. 파시즘이 탈출구가 없다는 폐쇄공포와 이를 해소하려는 공격성을 동전의 양면처럼 내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밀턴 마이어는 이런 폐쇄공포와 공격성이 국가 내부를 향한 독재와 국가 외부를 향한 공격성이라는 파시즘 고유의 정치 형태를 만들었다고 논한다.(<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했다>) 폐쇄공포는 급변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미래의 전망을 찾지 못한 상실감에서 비롯되었다. 미래를 구상할 수 없는 집권층의 무능력이 바로 폐쇄공포의 원천이었다. 그리고 그 무능력은 공격성을 통해 상쇄되었다.

 

 

   같은 시기 일본은 급변하는 세계정세에서 우위를 놓친 중국을 대신하여 아시아 신질서를 수립하겠다고 나섰다. 일본 내부에서 파시즘의 강화는 대륙과 해양의 싸움이기도 했다. 대륙 진출을 아시아 신질서 건설의 교두보로 삼았던 육군파와 해양을 새로운 교두보로 삼고자 했던 해군파의 대립은 혁신적 파시즘을 내건 해군파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대륙파의 교두보가 철도였다면, 해군파의 교두보는 ‘전함 야마토’로 상징되는 함대였다. 철도와 전함이 ‘세계’에 대한 일본 상상력의 한 근간이라고도 할 것이다.

 

 

   세계정세가 급변하고 있다는 말은 이제 새삼스럽다. 말 그대로 세계지도가 다시 그려지고 있다. 대륙과 해양을 둘러싼 열강의 각축전은 2015년 현재 중국의 일대일로 프로젝트(육상·해상 실크로드)에 대한 미국의 강력한 저항과 일본의 견제 국면으로 부활하고 있다. 28일 뉴스를 장식한 남중국해에서의 미국과 중국의 아슬아슬한 대치는 급변하는 세계정세를 보여주는 인상적인 장면이다. 유럽 정상들은 일대일로 프로젝트 협의에 분주하고 세계 각국 정상과 정치인은 그 어느 때보다도 분주하게 교섭을 진행하고 있다. 동아시아의 대륙과 해양을 연결하는 새로운 지도를 그리는 각축전은 시시각각 가속화되고 있다. 한국 정부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아쉽게도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결과물은 거의 없다. 대륙에는 중국 열차가, 연안에는 일본 함대가 코앞까지 당도했는데, 한국형 전투기의 미래는 막연하기만 하다. 물론 일본 정부처럼 재무장의 길을 가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한국 정부가 상대해야 할 위기가 과연 어디서 오는지를 보자는 것이다.

 

 

   주변국들이 세계지도를 다시 그리겠다며 모든 인프라를 동원해 나서고 있는 바로 오늘, ‘국사교과서 국정화’에 몰두하고 있는 한국 정부의 모습은 그야말로 자학적이다. 대륙도 해양도 다 막혀버린 지구 유일의 냉전체제 속에서, ‘외부’와 대항해야 할 정부가 국민을 상대로 전쟁 중이니 그야말로 슬프도록 자학적이다. 국정 교과서란 대륙도 해양도 다 막혀버린 지구 유일의 냉전체제에서만 가능한 상상력이다. 국사교과서 국정화 정책이란 급변하는 세계질서 속에서 새로운 자리도 미래의 전망도 찾아내지 못한 정부의 무능함의 전형이다. 국정 교과서가 세계를 상실한 나라의 국정 전략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다.

 

 

   파시즘은 ‘비국민, 퇴폐분자’의 이름으로 사람이든 책이든 다 불살라버리는 공허한 증오의 열기로 세계를 잃어버린 좌절감을 상쇄했다. 세계를 대신해 증오가, 미래를 대신해 죽음만이 사회에 가득했다. 세계 상실의 증오와 죽음의 정치에 맞서, 미래를 향한 살림의 정치를 요구해야 할 때다.

 

 

 

 

 

시스템 고장과 봉기

 

 

 

권명아

 

 

 

 

 

 

 

   남에게 폐를 끼치는 일을 절대로 하지 않아야 한다는 문화가 강한 일본에서 시위는 ‘최고 민폐’이다. 게다가 일본에서도 ‘깍쟁이’로 유명한 교토 사람들이 시내 번화가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박수를 치며 흥분하는 모습이야말로 누구도 예상치 못한 변화이다. 지난 목요일 교토의 동네 데모 현장이다. 삼사십 명 정도 모인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시위였지만, 거리 시민들의 호응과 함성에 시위대의 분위기는 고조되었다. “이런 분위기를 경험해본 적이 있느냐”는 필자의 질문에 시위에 참가한 일본 친구들은 “난생처음”이라고 입을 모았다.

 

 

   몇 해 동안 ‘동네 인문 공동체’를 만나러 일본에도 자주 가고는 했다. 어렵게 만난 동네 문화운동가나 활동가들은 변화의 활력이 넘치는 한국을 부러워하곤 했다. 게다가 ‘3·11 사태’ 이후, 일본은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 속으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 고층 건물에 내걸린 전광판에서 번쩍이던 ‘부흥’, ‘지역 살리기’ 같은 정부의 메시지는 너무 건전해서 오히려 기괴하게 느껴졌다. 이때만 해도 일본이 이렇게 변할 것이라고는 예측하기 어려웠다.

 

 

   ‘헬조선’이라는 한탄이 그치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 ‘시위, 변화의 열정’ 같은 말은 고리타분한 옛날 사람 말로 치부된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낙관적인 말을 하는 것도 기성세대의 시대착오적 발상인 것 같은 자기 검열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보면서 어두운 심연에서 예상치 못하게 출현하는 변화의 힘과 그 가능성에 좀 더 기대를 품게 된다. 물론 현재 일본 사회에서 출현한 힘들이 곧 소멸하거나, 일본 사회 전체를 바꿀 정도의 역량으로 이어지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어떤 봉기의 힘도 사회 전체를 통째로 바꾸는 데 성공한 적은 없다. 다만 변화를 향한 힘들이 사회의 흐름을 바꾸고, 그렇게 바꾼 흐름을 이어갈 수 있는 역량들이 계속 만들어지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일본 사회에서 이러한 힘들은 어떻게 출현한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공통으로 내놓은 대답 중 하나는 ‘3·11’의 경험이다. ‘3·11’ 이후의 반원전 시위가 오늘날의 반전 시위로 이어졌음은 분명하다. 일본 비평가 히로세 준은 고장 난 채 정지되어 정상화가 불가능한 원전 시스템을 봉기의 전형적 이미지로 분석한 바 있다. 시스템이 정지된 뒤, 일본은 불바다의 한가운데 있는 것 같은 혼란과 공포에 휩싸였다. 이 혼란과 공포 속에서 ‘부흥’과 같은 총동원 시대가 다시 도래할 가능성이 커졌고, ‘정상국가’라는 이른바 ‘정상화’ 논리 역시 여기서 돌출할 여지를 얻었다. 그러나 현재 일본은 부흥과 정상화가 아닌, 정상화를 거부하는 길로 접어들고 있다. 시스템이 멈춘 악몽과 같은 경험 끝에, 일본의 많은 이들은 ‘다시, 정상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이는 원전 사고 경험 이후 시스템의 정상화(원전 재가동) 대신, 시스템 정지(원전 반대)를 선택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노력도 모자라 ‘노오오오오오오력’을 해도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헬조선에서 정상적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변화가 불가능하다는 암울한 전망에 휩싸인 한국 사회에서 변화의 힘은 과연 어떤 식의 ‘시스템 정지’를 통해 도래할 것인가? 일본의 동네 인문 공동체 친구들은 나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어.” 모두가 정상적인 삶을 꿈꾸며 과로사를 향해 맹렬하게 달려가던 시절에 그렇게 살지 않기로 결정한 사람들, 그들의 선택 속에 바로 변화의 잠재성은 이미 있었던 게 아닐지. ‘시스템 고장’은 환멸만이 아니라 봉기의 힘을 촉발한다. ‘헬조선’이라고 예외이랴.

 

 

 

 

 

몸살을 앓는, 바로 거기

 

 

권명아

 

 

 

 

 

 

 

   온갖 논란 속에 몸살을 앓고 있는 한국 문학에 대해 우울하고 때로 혐오로 가득 찬 진단이 내려지고 있다. 당면한 문제를 어떻게 함께 풀어 가느냐에 따라 미래는 달라지리라. 올 상반기 일본을 뜨겁게 했던 한 논쟁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일본의 민주주의와 반전을 위한 시민 행동에 대해 한국에서도 많은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 전쟁 반대로 모인 기저에는 매우 다양하고 이질적인 움직임들이 존재한다. 그중 단연 주목을 받은 것은 실즈(민주주의를 위한 학생긴급행동)이다. 정치에 무관심한 것으로 ‘유명한’ 일본 청년 세대가 반정부 반전 시위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일본 사회는 뜨거운 열기에 휩싸였다. 그러나 논란도 많았다. 실즈 논평이나 지지자들의 발언에 대해 식민주의나 성차별적일 수 있다는 지적과 비판 또한 격렬하게 제기되었다. 운동의 열기를 꺾어서는 안 된다는 의견과 사회운동에서 기존의 차별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이 격렬한 논쟁을 통해서 페미니스트와 차별 반대 운동 집단, 대학생과 지식인들이 서로 연결되었다. 논란의 여지는 여전하지만, 비판과 갈등, 공격이 난무하는 논쟁이 오히려 여러 힘들이 모이고 함께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어떻게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함께 나아가기 위해 말을 나누는 방법이 될 것인지 고민하는 계기도 되었다. 무엇보다 이러한 격렬한 논쟁은 다른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전과는 다르게 말하고, 생각하고, 상상해야 한다는 그 ‘오래된 진리’를 다시 환기했다. 다른 세상을 만들기 위한 열정이 성명서를 시가 되게 하고, 거리시위의 구호를 새로운 음악으로 만들고 있다. 그리고 이 변화의 열정이 빚어낸 새로운 예술은 광화문 거리에서도, 남포동 한 모퉁이에서도, 안산의 거리에서도 오롯이 빛나고 있다. 변화의 열정이 새로운 예술을 추동하는 장면을 우리는 곳곳에서 본다. 예술과 문학과 인문학이 죽었다는 판관들은 이러한 현장과는 동떨어져 있다. 티브이와 뉴스를 장식하는 게 예술과 인문학의 전부가 아니다.

 

 

   오늘날 일본은 여러 지점에서 한국 사회와 유사한 문제에 직면해 있다. 혐오 발화로 상징되는 배외주의가 만연하고, 대학 구조조정이 급격히 진행되면서 인문학과들의 위기가 심화되고 있다. 청년 실업은 해결 기미를 보이지 않고, 대학 교육이 신자유주의적 논리에 잠식되어 파행을 거듭하고 있다. 이 사안들은 그간 당사자들의 문제로서, 비판 작업도 서로 별도로 진행되어왔다. 혐오 발화는 주로 ‘재일동포 문제’로 여겨졌고, 대학 교육은 대학 관계자의 문제일 뿐이었다. 그러나 혐오 발화가 소수자에 대한 일본 사회에 누적된 차별 의식의 결과라는 점에서 교육의 변화 없이는 혐오 발화의 근원적 제어는 불가능하다. 또 혐오 발화가 만연할수록 주변국에 대한 적대를 제어할 수 없고, 전쟁의 위기를 벗어나기 어렵게 된다. 차별금지법 제정과 대학 구조조정 반대와 헌법 9조 수호, 그리고 청년의 미래가 각자 저마다의 의제를 지니면서도 연결될 수밖에 없다. 아니 이런 연결을 만들어냄으로써 갈등과 의견 대립 속에서도 변화를 향해 함께 걸어나갈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연결을 만들어내는 과정에 뜨겁고 격렬한 충돌은 피할 수 없다.

 

 

   의견 충돌과 비판을 통해 새로운 흐름을 여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러나 부딪쳐서 깨져나가지 않는 한 제자리를 맴도는 반복을 피하긴 어렵다. 부딪쳐야만 비로소 열리는 새로운 흐름이 있다. 그 흐름의 가능성은 격렬한 의견 충돌로 몸살을 앓고 있는 바로 거기, 그 몸들 사이에 항상 존재한다. 냉소와 혐오는 몸살의 일부다. 냉소와 혐오를 넘어서야 몸살 후의 다른 몸을 얻는다. ‘문학’은 아직 몸살 중이다.

 

 

 

 

 

'광복' 기념 소비 촉진

 

 

권명아

 

 

 

 

 

 

 

 

   오키나와 작가인 마타요시 에이키의 <긴네무 집>은 식민지인에게 역사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소설에 따르면 미군은 전쟁 기간의 파괴 흔적을 위장하기 위해 오키나와 전역에 긴네무 종자를 살포했다. ‘종전’이 되었지만, 오키나와 주민에게 남은 건 콜라병과 긴네무뿐이다. 콜라병과 긴네무는 식민자가 남긴 것이라는 점에서 말 그대로 ‘잔재’이다. 이에 반해 조선인 ‘그’가 오키나와 사람인 ‘나’에게 남기고 간 ‘돈 봉투’는 그야말로 “식민지 유산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씁쓸하게 곱씹게 한다.

 

 

   1945년에서 70년이 지난 2015년은 국가마다 서로 다른 맥락에서 기념된다. 기념이란 그 자체가 국가나 지역의 공식적이고 의례적인 절차이기에 그저 공허한 잔치이거나 무의미한 말의 향연으로 넘쳐나곤 한다. 기념은 역사적 기억이나 집단적 기억과는 다르다. 그러나 바로 이런 이유로 연구자들은 역사 기념 방법을 그 국가나 사회의 국가적 정체성과 지향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연구한다. 중국과 일본은 ‘70주년’을 어떤 식으로든 세계사의 질서를 다시 구상하는 계기로 기념하고 있다. 정부는 광복절을 기념하여 ‘국민 사기 진작’과 ‘침체한 소비 심리를 회복하기’ 위해 8월14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하였다. ‘광복 70주년 기념’과 ‘국민 사기 진작’ 혹은 ‘침체한 소비 심리 회복’은 과연 서로 관계가 있는 것일까?

 

 

   식민화의 기억과 소비 심리 회복이 이렇게 연결되는 맥락에는 참으로 씁쓸한 역사적 무의식이 작동한다. 소설 <긴네무 집>은 역사의 기억과 책임이 ‘대가 지불하기’라는 방식으로 전도되는 기묘한 역사적 순간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전쟁에 동원되었던 식민지인들에게 그 기억은 갈기갈기 찢겨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는 연인의 눈동자를, 목이 잘린 채 “아버지 아파요”를 외치는 아들을 매일 악몽 속에서 만나는 일과 같다. 해방되지 못한 식민지인들에게 과거를 마주한다는 것은 피해의식이나 망상, 혹은 반복되는 악몽의 형식을 맴돈다. 해방되지 못한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식민지 지배자들은 폭력에 대한 책임을 지기보다 ‘야스쿠니 합사’(일본)나 ‘돈과 지위’(미국)를 제안했다.

 

 

   성폭력의 책임을 물으러 온 오키나와 주민들이 ‘가해자’로 몰아붙이던 조선인으로부터 “돈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요”라는 말을 듣게 되는 순간은 그런 점에서 으스스한 전율을 일으킨다. 전쟁에 동원되어 위안부가 된 연인을 찾아 필사적으로 살아남았던 조선인은 그렇게 ‘폭력의 대가’를 유산으로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조선인 ‘그’는 헤어진 ‘연인’이라고 추정되는 그녀를 “매춘소”에서 돈을 내고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 성폭력의 가해자도 아닌 그가 모든 재산을 오키나와 사람인 ‘나’에게 남기고 자살한 것은 ‘대가 지불하기’라는 악순환에 종지부를 찍으려는 마지막 몸부림이다. 폭력에 대한 책임 대신 ‘대가 지불하기’라는 형식으로, 해방 대신 냉전을 식민지에 ‘유산’으로 남긴 것이 바로 지난 70년의 세계 질서였다.

 

 

   성폭력을 당한 요시코의 ‘위로금’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긴네무 집>의 한바탕 소동은 무섭도록 슬프게 역사적이다. 한쪽 발이 잘린 채 쩔뚝이며 손녀딸의 위로금으로 시내를 돌며 진탕 돈을 써댄다는 할아버지에 대한 뒷소문이 무성한 오키나와의 한동네 이야기가 ‘광복 70주년’의 한국의 이야기와 너무나 닮아 놀랍다. ‘광복 70주년’이다. 해방 같은 이야기는 꿈같은 소리가 되었고, 2차 세계대전 이후 70년의 세계 질서를 고민하는 것은 남의 나라 이야기가 되었다. 그저 연휴를 맞아 한바탕 소비를 촉진하는 일만이 한국 사회가 식민지 유산을 ‘청산’하는 방식이다. 그렇게 또 익숙한 기념일이 돌아왔다.

 

 

 

 

 

 

독점과 모욕의 자리

 

 

권명아

 

 

 

 

 

   한국 사회에서는 제도 비판이 불가능하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제도 비판을 인격화해서 개인적 모욕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정치 제도를 비판하는 걸 개인적 모욕으로 받아들여 보복하는 정치권에 대해서는 입을 모아 같이 한탄하지만, 자신이 속한 제도에 대한 비판에 직면해서는 모욕당했다고 펄펄 뛴다. 한국문학 제도 비판도 이런 악순환을 고스란히 반복해왔다. 역설적으로 이런 현상은 한국 사회의 제도가 추상적이고 공적인 형식이 아니라 인격화된 사적 형식으로 존재해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국문학 제도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을 때도 비판을 사적 모욕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한국문학이 자기비판의 계기를 놓친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이후 한국문학 제도는 인격화된 사적 형식의 면모를 더욱 심화해왔다. 논란이 되는 신경숙의 표절과 ‘문단 권력’에 대한 논의가 제도 비판의 계기가 되려면 바로 이 악순환의 고리를 먼저 끊어야 한다. 게다가 이른바 ‘문단 권력’의 안쪽에서는 문학 제도 비판을 ‘낙오자들의 원한’ 정도로 치부해온 관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인격화된 사적 형식으로 경도된 한국문학 제도가 출판 산업에서 독점적 지위를 점하게 되면서 문제는 더 심각해졌다. 한국문학 제도에서 창비와 문학동네는 독점자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경제적 생산의 차원뿐 아니라 상징자본과 문화자본 또한 독점하고 있다. 문학적인 것과 한국문학의 정통성을 수호한다는 “문학적인 이념”이 바로 창비나 문학동네가 독점자본이 될 수 있는 기반이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창비나 문학동네는 제도 비판에 직면할 때마다 위기에 처한 한국문학의 수호자로서 자기 정체성을 거듭 천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입장에서 한국문학은 항상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에 수호자로서 자신들의 위치 또한 항상 소수자나 약자의 입장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다. 따라서 제도 비판을 위기에 처한, 소수자에 불과한 한국문학을 죽이는 적대적 행위로 여기게 된다.

 

 

   동어반복을 피하려면 이전과는 다른 논쟁이 필요하다. 주식회사 창비나 문학동네를 비롯한 여타 대형 출판기업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비판과 연구가 무엇보다 필요하다. 한국문학 제도에서 출판 산업의 독과점 방지를 위한 감시와 견제, 또는 제재가 필요하다. 대형 출판 주식회사의 상징적이고 실제적인 주주 자리에 있는 이들이 비평가나 편집위원을 겸하는 것은 금지되어야 한다. 사적이고 독점적으로 비평가를 재생산하는 방식도 공개적으로 비판되어야 한다. 논란이 되는 대형 출판사 관계자들이 한국문학의 가치를 수호하는 것과 독점자본의 지위를 모순 없이 겸해왔던 이중성에 대해 근원적인 자기비판이 필요하다. 한국문학의 수호자라는 ‘신성한 자리’를 이후로도 유지할 수 있으려면 독점자본과의 실질적 분리가 이뤄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분리가 과연 가능한지 스스로 물어야 한다. 이런 최소한의 형식적 변화조차 불가능하다면, 한국문학 제도는 파산해버려도 아깝지 않은 한국문학 주식회사에 불과하다.

 

 

   한국문학 제도의 모순은 그야말로 중층적이어서, 반성과 성찰로 해결될 수 있는 차원이 아니다. 사실 한국문학 제도가 이러한 사적 제도화와 독점화로 기울어지면서 이로부터 이탈하는 여러 경향이 나타났다. 그러나 독점화된 제도의 힘은 이로부터 이탈하는 힘들이 자리할 토양을 사실상 황폐화했다. 1990년대 중반 나타났던 다양한 문학 집단들은 “본격문학의 가치”라는 깃발 아래, 신문 문화면과 선인세와 ‘밀어내기 출판’으로 무장한 대형 자본과의 전투에서 그저 사라져버렸다. 이러한 이탈의 힘과 역사를 되찾고 자리매김하는 게 더 중요한 시점이다.

 

 

 

 

 

 

무능과 정치적 주체화

 

 

권명아

 

 

 

 

   무능이 지배하는 시대다. 무능이란 능력이 없는 상태니, 무능이 ‘지배하다’의 주어 역할을 할 수는 없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 비판과 한탄이 넘쳐날 만한 상황이 분명하지만, 이를 넘어선 무능의 ‘정치화’가 더욱 필요하다.

 

 

   메르스 사태에서도 새삼 확인되듯이 국가는 국민의 안전하고 행복한 삶을 유지해줄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 무능은 단지 대통령이라는 상징적 1인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어떤 이들은 좀 더 능력 있는 지배자가 대통령이 된다면 이 말도 안 되는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미디어에서는 메르스 사태에 대한 정계의 대응을 마치 대선 전초전처럼 보도하기도 한다.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의 갈등도 대선 예측으로 귀결된다. 이런 상황은 능력 있는 지도자에 대한 국민의 높은 관심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달리 보자면 이런 문법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 넘쳐나는 ‘무능론’은 ‘지도자 대망론’의 변주에 그칠 수 있다. 이런 논리에서 지배의 능력은 지배자의 것이거나, 국가기구의 몫일 뿐, 누구나의 것이 될 수 없다. 결국, 지도자만 바뀔 뿐 삶은 변하지 못한다.

 

 

   재난 상황에서 무능한 국가(기구)를 대신해서 무수한 사람이 자신과 공동체의 안전과 행복을 지키기 위해 나서고 있다. 이는 국가 부재의 한탄스러운 상황이기도 하지만, 무능의 빈자리에서 새로운 주체가 만들어지는 역동적 상황이기도 하다. 이렇게 형성된 주체는 더는 지배능력을 ‘국가’에 내맡긴 다스림의 대상이 아니다. 지배능력은 이제 국가의 몫이 아닌, 다스려지던 사람들의 몫으로 되돌려진다. 이렇게 되돌려지는 과정이야말로 무능이 ‘정치화’되는 사건이다. 그리고 이런 사건들은 메르스 사태 이전에도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한 예로, 진주의료원 폐업에 반대하며 공공 의료 체계와 지역의 의료 주권을 요구하던 경남도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이들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메르스 사태를 통해, 음압병실의 필요성을 포함하여 진주의료원 폐업 사태에 대한 반대 목소리가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를 많은 사람이 이제야, 겨우 실감하고 있다.

 

 

   “정치가 싸움이라는 걸 이제 알았다.”(심은숙) “정치가 생활이다. 이전에는 의원이 갑이라 생각했는데 이제는 우리가 갑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박소연) ‘양산 무상급식 지키기 집중행동 밴드’ 모임 좌담 자료는 이런 정치화의 경험을 잘 담고 있다.(오마이뉴스, 6월8일) 회원들의 이야기는 “이전에는”, “처음에는”으로 시작된다. 처음에는 누구도 자신들이 하는 일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자신들이 “꼬리를 흔들어 몸통을 움직이는”(허문화) 일을 했다고 해석한다.

 

 

   프랑스 철학자 장뤼크 낭시는 사회를 머리와 배, 꼬리로 구성된 유기체로 상상하는 방식이 중심과 주변의 위계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들어버린다고 논했다. 그래서 이 위계를 벗어나려면 바로 그 ‘수미일관한 몸’이라는 관성적 담론을 넘어서야 한다. “꼬리를 흔들어 몸통을 움직인다”는 양산 학부모들의 발상은 그런 점에서 이미 몸통과 꼬리의 관계를 깨뜨렸다. 이제 지배는 몸통이 아닌 꼬리의 몫이 된다. 그들이 “이전에는”, “처음에는” 상상도 못 했던 정치적 주체가 되었다는 것은 바로 이런 뜻이다.무능이 지배하는 시대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무능한 머리를 대체할 능력 있는 머리가 아니다. “꼬리로 몸통을 움직이는” 방식이야말로 무능이 지배하는 시대에 절실하게 요구되는 무능의 정치화 방법이다. 이는 머리와 꼬리라는 분할로 이루어진 사회상을 깨뜨리고, 새로운 사회상을 만들어낸다. 그러니 꼬리로 몸통을 움직이자. 무능을, 더욱 정치화하자.

 

 

 

 

 

 

사랑과 환멸의 대중탕

 

 

권명아

 

 

 

 

 

   한국 사회의 미래와 대중 정치에 대한 환멸이 담론 공간을 강하게 채우고 있다. 1960년대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에 담긴 다소 영웅적인 어조는 환멸에 대한 단절의 태도이기도 했다. 2015년 “껍데기는 가라”는 ‘이놈도 저놈도 마찬가지’인 세상에 대한 환멸이 되었다. 세상이 다 거기서 거기라고 여기는 것은 자신의 앎을 절대화하는 지적 오만이다.

 

 

   환멸(disillusion)은 말 그대로 이전에 가졌던 환상이 깨지면서 촉발된다. 환멸은 자신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세계를 보는 거울이 깨진 데서 비롯된다. 거울이 깨지자 세상도 깨져버린다. 환멸 속에서 ‘나’에게 세계는 끝장난 것처럼 보이지만, 바로 그 끝장은 ‘나’와 ‘나’를 지탱하던 거울의 끝장이다. 그래서 환멸이야말로, 끝장난 ‘나’와 단호하게 이별하고, 다른 세계를 만나기 위해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알림 신호이다. 그러나 막상 오늘날 환멸은 ‘나’가 아닌 ‘끝장난 대중’에게로 향한다. ‘나’는 환멸 속에서 더욱 고매하게 빛난다.

 

 

   에스엔에스가 진보 정치를 구원할 것이라는 환상이 환멸로 이어진 것도 이미 오래된 이야기이다. 대중이나 대중 미디어에 대한 환멸은 실상 지금까지 대중의 흐름을 파악해온 방법론적 한계에서 비롯된다. 근대적인 학문 방법론이 ‘대중’의 흐름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데 한계에 봉착했다는 점은 많은 학자가 지적했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경우 대중의 흐름은 훨씬 더 복잡하고 유동적이다.

 

 

   이른바 대중 네트워크라는 차원에서 보자면 한국은 어느 사회보다도 사회 기저에 강력한 네트워크 힘이 흐르고 있다. 사실 한국 사회의 기저에 흐르는 대중 네트워크를 전체로 조망하는 연구는 아직 없다. 가장 오래된 상호부조 형식이라 할 ‘계’의 경우도 식민통치와 군사독재를 거치며 대중 동원의 도구가 되거나, ‘퇴폐풍조’로 전락했다. 한국의 특이한 대중 네트워크의 하나는 대중목욕탕인데, 이는 가장 고전적인 ‘풀뿌리’ 네트워크라 할 만하다. 풀뿌리 네트워크라는 의미는 ‘민중적’이라는 의미보다는 지배적인 흐름이 변해도 한국 사회의 기저를 단단하게 동여매고 있는 흐름이라는 뜻에 가깝다. 대중목욕탕은 모든 정보가 모였다가 나가는 중계점이고, 모든 담화와 정보는 ‘생활적’이다. 드라마 선택에서 투표 후보자 선택까지 다양한 판단 지점에 이러한 생활적인 정보와 담화는 주요한 변수로 작동한다. 그런 점에서 대중목욕탕은 상품 정보에서 인물평까지 다양한 평판을 구성하고 생산하는 ‘뒷말’ 공간이다.

 

 

   대중목욕탕은 누구나 갈 수 있는 열린 공간이지만, 독특한 내적 친밀성을 기반으로 관계가 형성된다. 모두가 잘 아는 공간이지만, 실상 논리적 파악이 힘들다. 누구나 들어갈 수 있지만, 막상 그 네트워크의 일원이 되는 건 쉽지 않다. 이 네트워크는 최근 들어 에스엔에스로 이어지면서 이른바 친구와 동료들만의 단체 방의 형태로도 변형되었다. 그런 점에서 학문적 연구 대상으로서 대중목욕탕은 에스엔에스와 비교하면 접근도 어렵고 내밀한 관계 형성을 통한 정보 수집에도 한계가 있다.

 

 

   한국 사회에는 이런 식의 풀뿌리 네트워크가 강해서 흐름의 변화는 여기서 비롯된다. 풀뿌리 네트워크 자체가 본래 진보적이거나 보수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고도 볼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한국 사회는 보수나 진보의 이름으로 상상할 수 없는 잠재성을 가졌다. 대중 네트워크의 흐름을 연구하는 건 이제 시작 단계이다. 대중목욕탕 네트워크 하나만 연구하고 조사하려 해도 누군가의 인생 전부를 걸어야 할 정도의 시간과 애정이 필요하다. 환멸은 그런 시간과 사랑을 소모하고 잠재성을 잠식해버린다. 환멸에 머무는 한 기저를 관통하는 흐름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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